문화&사상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05

醉月 2010. 12. 19. 10:56

콩깍지 사랑, 회초리 사랑

햇빛과 비로 생명을 키우기도 하지만 가뭄과 홍수로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시련을 원천으로 생명이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 거친 대지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풀이 되도록 품는 것이 큰 사랑이며 하늘같은 사랑입니다.

자식 사랑은 평생의 난제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콩깍지 사랑’이 아니라 ‘회초리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한석봉과 어머니 일화는 유명합니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홀몸으로 떡을 썰어 날품을 팔며 넉넉지 않은 생활을 했습니다. 총명한 한석봉의 재능을 보고 공부시키기 위해 12살인 한석봉을 10년을 기약하고 한양에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들 한 석봉이 글공부를 마쳤다며 3년 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품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며칠 품에 안으며 어리광을 받아줄 법도 했지만 어머니는 냉정했습니다. 한 밤중에 등불을 끄고 당신은 떡을 썰고 아들은 글을 쓰게 했습니다. 다시 등불을 켜고 살펴보았더니 도마위의 떡은 가지런히 쓸려 있었지만 화선지위의 글은 들쭉날쭉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당신 떡을 써는 것보다 글을 잘 쓰지 못하면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말라는 꾸중을 뒤로하고 한석봉은 돌아서야했습니다. 한석봉은 나중에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까지 천하명필로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고슴도치도 못생긴 제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말이 있습니다. 열렬한 연애를 할 땐 연인의 못생긴 발가락도 예뻐 보입니다.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고 합니다. 남들이 봐선 분명 단점까지도 장점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콩깍지 사랑’은 집착에 다름 아닌 경우가 흔합니다. 나중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데’라며 상대방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전생을 통틀어보면 자식은 전생의 빚쟁인데 이 사실을 모르고 현생에서 빚을 갚고 있으면서 자신이 베풀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콩깍지 사랑’은 눈먼 사랑입니다.

‘회초리 사랑’은 가릴 줄 아는 눈 뜬 사랑입니다.
어미 닭은 병아리에게 먹이를 먹여주지 않습니다. 병아리 보는 앞에서 어미 닭이 열심히 먹이를 쪼아 따라하게 합니다. 병아리의 여린 부리를 가엽게 동정하지 않고 단단한 땅을 쪼게 합니다. 짐승조차도 회초리 사랑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윗사람이 되고 부모가 되었다고 사랑할 자격이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안아줄 땐 뜨겁게, 그러나 가르칠 땐 냉정할 줄 알아야 비로소 사랑할 자격이 갖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달은 사랑입니다. 달은 지구의 바다에 거대한 바닷물을 밀려 올렸다가 순식간에 빠지게 합니다. 밀물과 썰물은 바다 생물에게는 거대한 환경의 변화이고 그 때마다 생존의 위기입니다. 생물은 이 거대한 물의 진퇴를 이기기 위해 강한 생명을 키워야합니다. 햇빛과 비로 생명을 키우기도 하지만 가뭄과 홍수로 생명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시련을 원천으로 생명이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 거친 대지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한 풀이 되도록 품는 것이 큰 사랑이며 하늘같은 사랑입니다. 귀하게 키운 자식이 불효하고 어렵게 큰 자식이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고 효도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입니다.

 

정자나무에 에어컨 달린 거 보셨습니까?

매년 여름이 끝날 때마다 ‘벌써 여름도 끝났구나’라는 생각에 내심 섭섭하기도 하지만, 법회가 열리는 매월 음력 16일마다 유성 후암정사에 오시는 분들을 생각할 때면, 한편으론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까닭인즉, 법회가 열리는 법당에는 에어컨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법회 때마다 전국 각지에서 삼사백 분은 오시곤 하지만, 여름 한철 세 번 열리는 법회를 위해 에어컨을 설치한다는 것은 꽤나 낭비일 뿐 아니라, 유독 영가들이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 그 배려 차원에서 에어컨 설치를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7,8월 법회가 열리는 날이면, 법당 안은 삼사백 명의 체온과 열기로 ‘사우나탕’ 그 자체로 변하고 말아, 처음에 오시는 분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고행’으로 여기고 더 반기시니 에어컨 설치는 이제 완전히 물건너 간 듯싶다.

하루는 너무나 더운 날씨에 많은 분들이 오셔서 땀을 뻘뻘 흘리시며 법당에 앉아 계시는 게 죄송해 자주 오시는 남자분께 슬쩍 “법당안이 너무 더워 에어컨을 설치해야겠습니다”고 말은 건넸더니, 그분은 정색을 하고 손을 내저으며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자나무에 에어컨 달린 거 보셨습니까?”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나 또한 무슨 뜻인가 싶어 “정자나무에 에어컨이라뇨?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되물었더니 그분 왈, “이 유성 후암정사는 정자나무 같은 곳 아닙니까?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법사님 말씀에 마음에 위로를 얻고 편안히 쉬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끔 만드는 곳 말입니다. 그런 곳에 에어컨이라뇨? 당치않은 말씀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가. 이 유성 후암정사를 정자나무에 비유해주니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나 또한 처음 유성 후암정사가 완공되었을 때의 바람은 단 한가지. 이곳이 찾아오시는 모든 분들에게 작은 쉼터가 되게 해달라는 것, 그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성 후암정사는 쉼터, 그 이상의 몫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얼마전 일이다. 분명히 내 기억에 대머리였던 분이 몰라볼 정도로 머리숱이 많아져서 찾아온 일이 있었다. 나 역시 그분을 보고 놀라 “요즘엔 머리카락도 참 잘 심는다죠?”라고 말했더니, 그분은 빙그레 웃으며 “유성 후암정사에선 머리카락도 심어주시나요?”라고 되묻기에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믿거나 말거나지만요, 이 머리카락, 유성 후암정사에서 나온 샘물을 먹었더니 이렇게 자란 겁니다”면서 껄껄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유성 후암정사의 샘물을 먹고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했다는 분들도 솔솔찮게 나타나기 시작했고, 오랜 지병을 앓아오신 분들 역시 그 샘물을 먹고 몸이 많이 좋아졌다면서 열심히들 샘물을 떠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나’하는 마음에 얼른 유성 후암정사 샘물의 성분조사를 물을 연구하는 연구소에 의뢰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 샘물에 머리카락을 나게 하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수질에 있어서도 탁월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매월 음력 16일이면 유성 후암정사에 ‘법당안 자리확보 전쟁’과 더불어 ‘샘물전쟁’가지 벌어져 도 한번 정자나무의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자나무의 가장 큰 매력은, 그 곳에서 ‘인연’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잠깐 쉬러 온 그 자리에서 자기와 마음이 맞는 ‘우인(友人)’을 만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듯하다. 그것이 설령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라 할지라도, ‘정자나무’아래서 만났기에 더욱 아름다운 인연으로 남게 되리니, 그 또한 얼마나 자연스러운 이치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늘도 이 정자나무 같은 유성 후암정사를 지키며 인연을 엮는 ‘물레’를 돌린다. 이번달에도 찾아오실 분들에게 좋은 ‘인연’을 엮어드리고픈 마음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여성의 ‘그곳’을 닮은 땅

여성의 ‘그곳’을 닮은 Y자 모양의 땅이 있다면? 풍수지리를 조금만 들어오신 분들이라면, 바로 요런 묘한 모양의 땅이 엄청난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계실 터. 물론 그 묘한 땅이 가진 효과의 원천은 ‘강력한 울트라 음기!“

이 정도만 해둬도, 벌써부터 뭇남성들의 ‘장소 문의전화’가 쇄도하겠지만, 한 가지만 더 밝히자면, 그 Y자 땅의 골 밑에 유성 후암정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조금 더 위로 슬쩍 올라가면 ‘울트라 파워풀’ 음기의 원천지인 ‘유성 컨트리 클럽’이 나온단 사실!

이쯤되면, 남성분들은 당장에 골프채를 트렁크에 싣고 유성으로 달려가고 싶어하겠지만, 여기서 명심할 것, 한 가지! 만약 부인께서 골프를 친다면 반드시 부부동반으로 오란 말씀. 까닭인즉, 유성 컨트리 클럽만이 갖고 있는 그 강력한 ‘음기’덕분에 여성골퍼들에겐 더 없이 강력한 ‘힘!’을, 남성골퍼들에겐 짜릿한 ‘힘!’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미네소타에서 3승을 올린 박세리 역시, 유성 컨트리 클럽 출신. 골프의 여왕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던 곳이 유성 컨트리 클럽이었기에, ‘여왕’이 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음기’가 퍼팅 순간때마다 그녀의 것이 되어 ‘승리’를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박세리’가지 운운하며 음기에 대한(무슨 약장수마냥) 늘어놓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는 분명, 그 까닭이 있을 터. 지금까지 그 누구에도 절대로 공개할 수 없었던 ‘유성 컨트리 클럽-그 음기의 비밀’을 오늘에서야 여러분께 공개한다.

이 얘기는 골프장 준공, 그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성 컨트리 클럽이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인근마을의 40,50대 남자들이 교통사고나 질병 등으로 사망, 며칠 간격으로 상여가 나가더니, 마침내 마을은 ‘남자없는’ 오싹한 마을이 되어 버렸다.

그뿐 아니라,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유성 컨트리 클럽의 창업주마저 크게 망하자, 마을주민들은 풍수지리 좀 한다는 사람들을 불러 이 사태의 원인규명을 부탁했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여성 생식기 모양의 이 땅에는 여산신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여산신을 잘못 건드렸기에, 이런 무시무시한 재앙이 이곳에 내린 것”이라며 “하루속히 예전에 올리던 제사를 다시 올리도록 하라”며 서둘러 마을을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하나 없는 마을 주민들은 속는 셈치고, 마지막으로 여산신에게 제사를 다시 올리기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후부턴 줄지어 나가던 상여행렬이 거짓말처럼 딱,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얼마 후, 마을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제사를 올리던 당에 심어있던 소나무가 말라죽자, 컨트리 클럽 측에서는 동네인부에게 ‘미관상 보기 안 좋으니 그 나무를 즉시 자르라’고 명령했는데, 이상하게도 인부가 한달동안 자꾸 일을 미뤄, 컨트리 측에서는 외부에서 다른 인부를 구해, 나무를 자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무를 자르자마자 그 인부는 3개월 만에 갑작스레 암으로 죽었고, 큰아들마저 갑자기 정신착란증상을 보여 정신병동에 입원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 것.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이 엄청난 음기의 땅 ‘Y 구역’을 아는 사람들은 여산신의 힘에 절대복종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여황제의 놀이터’ 유성 컨트리 클럽. 울트라 파워풀 음기를 응축시킨 여산신의 땅인 이곳은 남성골퍼들은 물론, 여성골퍼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가 되어줄 것이다. 골프 뿐 아니라, 지그시 땅을 밟으며 여산신님께 ‘자식’을 바라는 마음 등 작은 고민부터 큰 소원까지 빌어보는 것도 좋을 듯. 또 모르지 않은가. 당신에게 잊을 수 없는 멋진 ‘스코어’를 선사해 줄지….

 

겸손은 어려워

법(法)은 물같이 흐르고, 물은 도리를 따라 흐릅니다. 자기 재물의 원천을 잊지 않을 때 재물의 사회적 회향에 대해 자연스러운 의무감이 나옵니다. 겸손은 초심을 돌아보는데서 우러나오고, 그 회향(回向)을 실행하는데서 맛이 납니다.

내 60평생 동안 아직도 참으로 어려운 게 있습니다. 겸손과 주제파악입니다.

사람이 겸손하기는 어렵습니다. 윗사람이나 강자에게 자신을 낮추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식처럼 자기보다 아랫사람에 겸손하기는 어렵습니다.겸손을 도덕률이나 매너로 받아들이면 겉으론 겸손해보일지 몰라도 자칫 안으로는 교만한 마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진정 하늘같은 사랑을 한다면 겸손은 위아래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당시 식민지 상황에서 드물게 인도인 변호사였습니다. 안정된 미래가 보장된 높은 계급이었습니다. 간디가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올라타다가 그만 신발 한 짝이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남은 신발 한 짝을 벗더니 떨어진 신발 쪽으로 던졌습니다. 의아해하는 주위사람들에게 간디는 말했습니다.
“누가 주워가더라도 신발 한 짝은 쓸모가 없지 않소?”

얼마 전 어느 대기업이 큰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한 사실이 있습니다. 겸손은 없고 기부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심 없는 기업윤리를 국민들이 귀신같이 구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재물부자가 겸손해지려면 어찌해야할까요?
재물의 원천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조폐공사에서 돈을 직접 찍어온 것도 아니며, 수만 평의 땅을 자기가 직접 일군 것도 아닙니다. 공장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물건을 모두 만든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이름모를 사람들에 손을 거쳤다는 것을 돌아봐야합니다. 재물의 사회적 소유권은 1인이지만 자연적 소유는 만든 사람 모두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개인의 사리사욕에만 사용하면 현행법의 사리(事理)에는 맞을지는 몰라도 도리(道理)에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법(法)은 물같이 흐르고, 물은 도리를 따라 흐릅니다. 자기 재물의 원천을 잊지 않을 때 재물의 사회적 회향에 대해 자연스러운 의무감이 나옵니다. 겸손은 초심을 돌아보는데서 우러나오고, 그 회향(回向)을 실행하는데서 맛이 납니다.
저는 마누라에게 충성하고 자식에게 효도할까 합니다.

하늘은 말없는 성인이요, 성인은 말로 하늘을 대신합니다

 

용 대신 이무기

내가 가장 자주 듣는 질문 베스트 텐 중, 1위는 단연 “영혼은 정말 있습니까?”다. 그럼, 2위는 뭘까? 뜻밖에도 “결혼은 하셨나요?”다. 물론 내 나이가 결혼적령기는 훨씬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운운하는 질문이 2위를 차지한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일단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둔 유부남이다.
거울 보고 생각해도, 오십줄의 내가 결혼 안 한 총각처럼 보일 리는 없을 테고… 아마도 ‘불자’의 몸으로 평생 살아왔기에 으레 결혼을 안 하셨겠거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 나 역시도 결혼이란 걸 하게 될지 꿈에도 몰랐더랬다.
평생 수행만 하고 살리라 다짐했던 내게 지금의 아내가 떡-하니 나타났을 땐, 그 심정은 입이 열이라도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게 갈등하기를 수만 번. 나는 아내에게 “결혼해도 수행을 막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 뒤, 드디어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남들 같으면 단꿈에 젖어있을 신혼에, 갑자기 사라졌다 1년만에 불쑥 나타나선 내내 참선만 하던 무늬만 남편인 나를 위해, 아내는 부산 남포동 시장에서 이것저것 돈 될만한 물건을 내다팔며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론 ‘결혼 참 잘했구나’란 생각에 슬며시 미소짓기도 여러 번.
그러던 어느날, 내가 서른네 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날도 여느날 처럼 방안에 들어앉아 내내 참선에 정신을 모으고 있었는데…밤 12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온 몸이 굳기 시작하더니 맹렬히 혈관을 타오르던 피의 흐름이 점점 둔해지는 게 아닌가! 더 이상한 것은 몸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지만, 정신상태만큼은 너무나 맑고 또렷해 눈을 감고도 온 세상이 구석구석 환히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이다! 바로 이 느낌, 도의 경지에 달했을 때, 전해오는 죽음의 상태!’
나무토막마냥 빳빳하게 굳어가는 육신과는 반대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에너지의 흐름을 타고 내 영혼은 용이 부상하듯 하늘을 향해 온몸을 곧추서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순간. 영원으로의 여행이 시작됨을 알리는 몸부림. 나는 죽어가는 육신을 미련없이 떨쳐버리고 한없이 가벼운 영혼이 되어 그 누구보다 거센 몸짓으로 하늘로 승천하는 한 마리 용처럼 거칠게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여보! 정신차려요! 여보-!”
그 순간, 내 육신을 세차게 흔드는 아내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게 아닌가!
‘제발, 이대로 있게 해주오! 지금 이 순간 그곳에 가지 않으면 나는 평생 후회할 거란 말이오!’ 죽어가는 육신속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내 영혼은 아내를 향해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지만, 영혼의 목소리가 아내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아내는 필사적이었다. 내 온몸을 만져보고, 맥박을 짚어대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열하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몇분이나 지났을까. 같은 건물 5층에서 살고 있던 병원 마취과 의사를 깨워 나를 진단케 했다. 진단결과는 ‘사망’. 이쯤되자, 아내는 병원에 연락, 구급차에 실어 병원 응급실로 나를 옮기는 것이었다. 상당히 위험한 상태였다. 수행자들의 입으로만 전해오던 ‘죽음의 경지’. 까딱 잘못하면 영원히 죽음의 나락에 빠지고 만다는 그 경지에 이르렀을 때, 하필 아내가 나타나다니!
‘세시간만, 두시간만, 아니 한시간, 30분이라도 제발 그냥 있게 해주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수십 범에 걸친 전기충격기의 심장마사지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보통 사람들 같았음, 벌써 죽었을 상황. 나는 어렵사리 회생하게 되었지만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잃은 허탈감에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말았다.
사건후 다음날, 당시 고은사에 계셨던 큰 스님께서 우리집을 찾아오셔선 아내에게 “어제 이곳에서 방광(放光:빛을 발하는 현상)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빛이 오래가지 않더군요. 차법사는 괜찮습니까?” 그 말에 아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스님은 혀를 끌끌 차며 “그대로 세시간만 있었으면, 용이 됐을 터인데…용이 못 되고 이무기가 되었구나…”하시며 돌아가셨다 한다.
‘꿩 대신 닭’이 아닌 ‘용 대신 이무기’랄까. 그 사건 이후, 나는 용이 되기 위해 시작했던 수행생활을 깨끗이 접고 영성 밝은 이무기로서 살아가기 위해 서울 후암동에 최초의 후암정사를 열고 본격적인 영능력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능력자’의 DNA

“정말 영혼을 부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내가 지금껏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다. 이 말에 답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사람은 뭐든지 한 가지씩은 타고난다는 것이다. ‘물냄새’를 맡는 능력으로 물을 감별해 낼 수 있는 분이 계신가하면, 작열하는 피냄새 속에서도 집중해서 수술을 할 수 있는 외과 의사도 계시다. 이런 분들이 하고 계신 일은 타고난 천성(天性)없인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니, ‘영매’인 나는 또 어떠했겠는가.
한창 잠 많을 나이인 청소년기에, 나는 보통 새벽 4-5시경에 잠을 자 6시경에 기상, 등교하곤 했다. 이런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걱정하셨던 것은, 밤마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새벽이슬 내릴 시간에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아들의 괴기스런 잠버릇이었다. 이쯤되면, 혹시 내 아들이 늑대인간이나 구미호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셨을 법도 한데….
그런, 나는 그런 몬스터 계열과는 차원부터 다르다. 왜냐하면, 나는 ‘영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몬스터들과 취향은 비슷했던 모양이다. 몬스터들도 새벽에 즐겨가는 곳이 나와 같은 ‘무덤’이었기 때문. 차이점이 있다면, 몬스터들은 식육을 위해 무덤으로 가지만, 나는 총총한 별을 보기 위해 무덤으로 갔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절대로 이해가 안갈 터. 누가 새벽가지 무덤가에 누워 별을 보는 ‘별취미’를 갖고 있겠는가. 이는 타고난 ‘영매’로서의 천성이 없인,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오늘은 나의 이런 ‘별취미’ 때문에 겪은 별난 얘기를 하나 해보겠다.
내 나이, 스물하고도 여섯 살 때. 산사들을 돌아다니며 만행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한참, 더위가 시작되려 하던 초여름경. 산사에서 잠을 자고 가라는 말을 애써 뿌리치고 밤길가기를 스스로 청하며 걷고 있었다. 잘 모르시겠지만, 삼경무렵 산중에서 만난 영가와 수다떠는 일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라. 한밤중에 산중을 헤매고 있는 영가들이 어디 보통 영가들이겠는가. 분명 베스트셀러감인 사연들을 제각각 가슴에 품고 얘기할 상대를 찾아다니는 영가들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날도, 그렇게 산책길의 적적함을 달래다 한 이름없는 무덤가에 자리를 펴고 잠을 청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무덤주인장 어른께서 내게 한풀이를 시작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강릉에 사는 박 아무개의 아버지되는 사람이오. 내겐 두 아들이 있소다. 한 아들은 고등학교 교장이고, 막내놈은 방송계통에서 일을 하고 있소. 그런데, 이 놈들이 교회를 다닌다며 제사도 안 지내준다오. 제발, 내 아들을 만나 제사 좀 지내라고 전해주오”라 하시는 게 아닌가. 그에 덧붙여 “만약, 당신말을 듣지 않거든, 내 방 셋째 서랍 책갈피속에 옛날 화폐들을 모아놨다고 전해주소. 지금쯤이면, 꽤 비싼 돈이 되어있을 거요.”
영가와 헤어진 뒤, 나는 강릉으로 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영가의 아들이라는 교장선생님을 만나, 다짜고짜 “아버님 제사는 지내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들은 “죽으면 그만인데 제사는 지내 뭐합니까. 돌아가신 날을 기념일로 정해 기도를 드리고 있으니, 상관말고 가던 길이나 가시오!”하며 상대도 안해 주는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아버님께서 쓰시던 서랍장 셋째칸 책갈피속에 아버님께서 모아놓으셨던 옛날 화폐들이 있을 겁니다. 내 말이 맞다면 그 돈으로 아버님 제사를 지내드리십시오”라고 전하곤 강릉을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사건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강릉에서 만났던 그 교장선생님이 매스컴에 실린 내 기사를 보고 단숨에 달려왔다며, 관심에도 없었던 자기 아버님에 대한 얘기를 꼬치고치 물어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전 내가 했던 말이 맞았던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에 아는 대로 성심껏 답해드렸더니, 마지막으로 딱 한가지만,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며, “아버님께서 남기신 단 재산은 없었습니까?”라고 물어오는게 아닌가. 정말 씁쓸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분을 뵙고 난 뒤, 새삼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영매로서의 DNA를 타고 났듯이, 어떤 분은 조상을 잘 모시는 DNA를 타고나는 반면, 또 어떤 분은 조상의 돈만 밝히는 DNA를 타고난다는 점이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DNA를 타고나셨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우연한 기회에 내가 여러분의 조상님들하고 얘기 나누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재앙을 막는 주제파악

복(福)과 재앙(災殃)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비가 적당히 오면 풍년이 되지만 넘쳐서 둑을 넘으면 흉년이 됩니다. 제 분수에 넘치면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저지르기 쉬운 3대 착각이 있는데, 내가 오래 산다는 착각, 내 생각이 옳다는 착각,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착각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현재가 매우 불행하다고 하소연해서 왜 그런가 살펴보니 쌓은 복이 없는데 무리한 부를 쌓았던 게 화근이었습니다. 또 한 분은 자식이 속을 썩여 알아보았더니 무자식 팔자였는데 억지로 얻은 자식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그릇의 크기를 알지 못하고 넘치는 소원을 비는 분들이 있습니다. 배를 띄우는 것이 물이지만 배를 뒤집는 것도 물입니다. 복(福)과 재앙(災殃)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비가 적당히 오면 풍년이 되지만 넘쳐서 둑을 넘으면 흉년이 됩니다. 제 분수에 넘치면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현생에 모든 것을 다 손에 쥐려고 발버둥치기보다 천수답에 농사짓듯 겸손한 만족과 기다림도 재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자신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한 발짝 물러서 볼 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어렵다면 자신을 평가한 남의 말에 귀기울여야합니다. 자신을 잘 파악해야 더 큰 그릇을 빚을 수 있고 큰 기회를 담을 수 있습니다.

저는 웃음이 많아서 종교가로서 근엄한 연기를 잘 못합니다. 저는 사제의 엄격한 규율을 지키기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사람은 될 수 있을망정 종교가는 되지 못합니다.

 

일간스포츠와의 인연

사람과 사람, 1:1의 인연을 맺는 일은 매우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구 인구가 50억이라 가정해 볼때 50억 대 1의 확률로 그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이 아닌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이렇게 높은 확률로 만들어지는데, 사람과 신문 사이의 인연은 또 어떨까. 나와 일간스포츠가 어떻게 인연맺기를 했는지 그 인연의 뒷배경을 공개해 볼까 한다.
그 재미있는 인연의 시작은 1996년 음력 6월 24일, 아버님의 38주기 기제사날 일이다. 당시 그리 크지 않던(지금도 아담한 그대로지만) 후암정사가 아버님의 기제사를 기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화환으로 가득 채워졌음은 물론, 뜻하지 않게 각계 각처 중요인사분들까지 직접 찾아와 제사에 참석해 주시는 통에 앉을 자리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길진아, 남자는 세상에 태어나 딱 두 번 눈물을 흘린단다. 한번은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위해, 또 한번은 진정으로 사랑했던 자신의 여자를 위해….”
후암정사를 가득 메운 화환들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아버님의 말씀이 생각나 울음이 복받쳐 오르고 말았다. 내 나이 열한 살,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치러진 아버님의 장례식날. 나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아버님의 죽음을 슬퍼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도 너무 더워 빨리 식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제대로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그렇게 아버님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의 장례식날 제대로 울지도 못한 놈’. 아버님 장례식날 울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한으로 남아 가슴에 사무칠 줄이야….
살아 생전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죽음의 전쟁터에서 부하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셨던 아버지. 조국을 위해 목숨바치기를 서슴지 않으셨던 당신에게 의당 주어졌어야 할 부귀영화도 채 누리시지 못한 채, 서른 여덟, 젊은 나이, 그 의연한 모습으로 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곤 그렇게 수중고혼이 되시고만 아버지셨기에 그날도 그렇게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제를 올리던 중 갑자기 아버님께서 내 앞에만 홀연히 나타나시더니
“길진아, 내일 일간스포츠의 S 기자가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오면 반갑게 맞도록 하여라”라고 말씀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너무나 당황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나와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일간스포츠 기자가 내일 후암정사로 찾아온다니… 장시간에 걸친 제사가 끝나고 조금은 허탈한 기분으로 아버님 말씀을 되뇌다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내게 전화 한 통이 와 있었다. ‘일간스포츠 S 기자인데, 오늘중으로 찾아뵙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S 기자. 그는 잠실 후암정사로 들어오는 순간,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법사님이 이렇게 대단하신 분인 줄은 정말 몰랐는데요”말하며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리 며칠 뒤, 8월 13일자 일간스포츠에 나에 대한 특집기사가 실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돼, 본격적으로 연재물 <영혼 X-FILE>을 시작, <영매의 고백>에 이르게 되었다.
4년전만 해도 나는 그리 대중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그전에도 몇몇개의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구명시식을 하는 사람’으로 소개된 바는 있어도, 스포츠 신문의 대명사인 ‘일간스포츠’처럼 인지도 높은 일간지와 인연을 맺어본 적은 없었기에 나와 일간스포츠와의 인연은 단번에 나를 ‘대중적 인사’로 급부상하게 했고, 덕분에 스타 아닌 스타가 되어 적잖이 유명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나와 일간스포츠와의 인연, 그것은 나와 일간스포츠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과의 인연이라 생각한다. 참으로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게 해준 일간스포츠에게 감사드리며,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작은 인연에 감사할 줄 아는 하루가 되시기 바란다.

좋고 나쁜 인연은 따로 없다

누구나 좋은 인연은 잡고 싶고 나쁜 인연은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해뜨는 날도 날이요, 비 오는 날도 날입니다. 인연의 인과를 속속들이 알 수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 없는 게 인연입니다. 더구나 영혼의 성숙을 위해 인생의 컨셉이 실패하게 되어있으니 비 오는 날이 더 많을 수밖에요.
해가 떠서 물이 증발되어 비구름이 만들어지니, 해가 떠서 비가 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좋은 인연이 따로 있고 나쁜 인연이 따로 있을까요?

김유신이 혈기 왕성한 화랑시절 가까운 낭도들과 술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천관’이라는 기생이 마음에 들어 더욱 빈번하게 술집에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어머니 귀에까지 소문이 전해져서 크게 꾸중을 듣게 됩니다. 어머니께 술집에 발길을 끊기로 맹세하였지만 천관은 김유신의 첫사랑이었기에 김유신은 깊이깊이 고뇌에 빠집니다. 며칠 후, 집으로 가는 말위에서 졸다가 깨어보니 천관의 술집 앞이었습니다. 김유신은 천관이 보는 앞에서 칼을 빼들었습니다.
“나의 결심을 무너뜨린 네 놈의 죄를 알렸다.”
하며 말의 목을 쳤습니다. 천관은 그 뒤로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김유신은 천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천관사’라는 절을 짓습니다. 천관의 넋은 김유신을 지키고, 김유신은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합니다.

이 이야기를 찬찬히 음미해보면 어디까지가 좋은 인연이고 어디까지가 나쁜 인연인지 구분이 안갑니다. 김유신은 좋은 인연만 운 좋게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인연을 피하지 않고 잘 처리했던 것입니다.

저는 ‘감정은 참는 게 아니라 잘 처리해야할 일’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인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연도 피할 일이 아니라 잘 처리해야할 일입니다.

사람은 인연의 바다에 떠 있습니다. 배를 띄우는 것도 물이요, 배를 뒤집는 것도 물입니다. 거센 풍랑이 1등 항해사를 만듭니다. 나쁜 인연을 잘 극복해야 인생의 1등 항해사가 될 수 있습니다. 길게 보면, 나쁜 인연이 될지 좋은 인연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본인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줌마, 제 돌잔치때 오셨었죠?”

가끔 영화속에서 연인들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공간이 기차일 때가 종종 있다. 기나긴 시간 말동무를 하다 보면 ‘혹시 이 사람이 나의 반쪽?’이란 생각에 쉽게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저 다음에 내려요’하면서 그 사람도 나와 같이 내려주길 바랄 때가 있지 않은가.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 여성은 CF나 영화속에 나오는 미모의 20대 여성은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덩그러니 서울 친척집에 홀로 남아 방콕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가마득해졌다. 이 더운 여름날, 방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이라니… 나는 당장에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탄 호남행 특급열차 태극호.
오랜만에 가는 고향행에 ‘금의환향’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특급정도는 타야겠다는 어린 마음에 비싼 돈을 주고 산 특급열차 기차표. 이 기차표 한 장 때문에 고향에서 막노동을 하게 될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도대체 무슨 까닭에선지 그날 따라 ‘반드시 태극호에 탈 거야’라는 생각이 간절했다.
의기양양하게 올라탄 태극호 안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찾던 중, 저만치쯤 고운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우아한 자태로 앉아 있는 한 중년부인이 눈에 띄었다. ‘참 곱다!’며 스스로 감탄하는데 뜻밖에도 내 자리가 바로 그 여인의 옆자리가 아닌가!
몇 시간이 지났을까. 그 시간동안 왠지 모를 두근거림으로 차창밖의 평화스런 농촌풍경은 아예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여인의 자태가 너무나 눈에 익숙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하면서 흘낏흘깃 쳐다보는데, 그 여인 또한 나와 같은 느낌이었던지 몇 번이나 교복에 붙어 있는 내 이름표를 훔쳐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흐르는 침묵을 깬 건, 대전쯤 왔을 때, 당시 복선이 아닌 단선이었던 호남선은 대전에서 기나긴 대기시간을 거쳐야 했다. 바로 그대, 음료와 과자같은 것을 파는 수레가 달그락 거리며 우리 옆을 지나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수레를 보더니 “잠깐만요!”하며 달걀과 음료수를 사 내게 건네며, “우리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자연스럽게 말문을 트는게 아닌가.
엉겁결에 받아든 달걀과 음료수. 그 순간, 나는 그 여인에 대한 기억이 섬광처럼 스쳐지나감을 느꼈다. 그것도 섬뜩할 정도로 자세하게….
“혹시, 학생 아버님이 차일혁 총경 아니신가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저도 아줌마가 기억나요. 아줌마, 제 돌 잔치 때 오셨었죠?” 그러자 그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학생이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하길래 난 여유만만하게 달걀껍질을 가며 “저 다 기억나요. 제 돌 때 아버지께서 아주 크게 잔치를 해주셨죠. 그때 전주 명기셨던 아줌마도 동료 다섯분과 같이 오셨잖아요. 아줌마 노래 솜씨 일품이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노래 잘하세요?”
이쯤되자, 그녀는 놀라 할말을 잃곤 멍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혹시 그때 내 이름도 기억나요?” 라고 묻기에 “그럼요, 그때 아줌마 이름이 ‘소옥’이셨죠” 그러자 그녀는 내 두손을 꼬옥 잡더니, “저도 학생이 기억나요. 학생, 아버지랑 참 많이 닮았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당시 영웅이셨던 우리 아버지를 참으로 많이 사랑하셨다 한다. 그렇게 가슴앓이 하다 금융계의 거물을 만나 결혼했는데 그 남자가 갑자기 납치돼 행방불명되는 통에 그 남자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고, 후에 큰 요릿집을 해서 어려운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좋은 일을 하시다,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 전주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계셨던 것이었다.
전주에 도착하자, 그녀는 고인 눈물을 소매께로 훔쳐내며 “학생, 꼭 우리집에 한번 들러요. 내 저녁상 맛있게 차려줄 테니…”하며 내리시다, 흘낏 뒤를 돌아보시더니
“그런데 학생, 돌때 본 나를 어떻게 기억해요?”라고 뒤늦게 물어보시는 게 아닌가.
지금도 덜커덩거리며 전주로 달리는 호남선을 볼 때면, 그 고아했던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이제는 그분도 내가 ‘어떻게’ 그분을 기억하게 되었는지 아실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