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화실의 향기](25)경북 봉화 축서사 선원장 무여스님
“마음이 부처이고, 법(法)이고, 도(道)입니다.”
경북 봉화 축서사 선원장 무여(無如·67) 스님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태백·소백 양백지간의 청산 연봉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해발 1206m의 문수산. 그 깎아지른 산세를 병풍으로 두르고, 일망무제로 전망이 탁 트인 봉화 물야면의 산중 오지에 축서사가 있다.
“혜은이, 여기 차 한 잔 가져다 주게.”
젊은 제자 스님이 조용한 움직임으로 내어 온 국화차 향기가 맑다. 창호 문 밖에는 난분분 난분분 흰눈 날리고, 마침 풍경이 댕그랑 하고 운다. 노스님의 하심(下心) 가득한 미소가 눈 덮인 겨울 산사의 고요를 더욱 깊게 만든다. 문득 속세를 절하고 이 산중에서 무연하고 아득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라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괜찮은 직장에 다녔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허송세월 같고 신명이 나질 않았어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 떠나질 않는 겁니다.”
마침내 스님은 삶과 죽음이라는 물음을 들고 해인사 암자를 찾았다. 그 발길이 자연스레 출가로 이어졌다. 1년 뒤 순천 송광사를 거쳐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 스님을 은사로 정식으로 머리를 깎았다. 법명은 탄허 스님이 지어줬다. 천상천하 무여불(天上天下 無如佛), 세상에 부처님 같은 분은 없다는 조사의 말씀에서 따왔다.
한 가문의 종손으로서 의무를 저버리고 떠나온 길. 그는 오대산으로 깊이 들어가기 전 딱 한 번 속가를 찾았다. 가족은 출가를 극구 말렸다. 그는 쪽지 한 장을 써놓고 다시 바랑을 멨다. 스님은 중국 선사들의 예를 들어 당시의 간절했던 출가 결심을 설명했다.
중국 선종 2조 혜가선사는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선사에게 바치며 법을 구했다. 당나라 때 선종 일파인 위양종을 창종한 앙산선사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손가락 두개를 잘라 부모에게 바치며 “부모님의 은혜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고 수행해 불도를 이루겠다”고 간청해 뜻을 이뤘다.
“수행은 간절한 발심이 기본이 돼야 합니다. 발심은 내가 부처님처럼 반드시 이 우주와 인간의 근본진리를 깨닫고야 말겠다는 큰 마음을 내는 것이지요.”
스님이 스승에게 받은 화두는 ‘이 뭣고’다. 스님 방에는 ‘오대산 도인’ 한암 스님이 친필로 쓴 중봉선사의 가르침과 달마도가 걸려 있다. ‘道心堅固(도심견고·도를 닦는 마음을 견고히 하여) 須要見性(수요견성·모름지기 반드시 견성할지어다) 捉着話頭(착착화두·화두를 꼭 붙들고) 如咬生鐵(여교생철·마치 생철을 씹는 듯이 하라)….’ 스님은 수행자의 몸가짐, 마음가짐 등을 일러주는 이 가르침을 구도의 동행으로 삼아 40년이 넘는 세월을 옹근 수행자로 살았다.
스님은 오전 2시30분에 일어나 새벽 예불을 모시고 나면 선방 스님들을 지도하고 신도들을 만난다. 스님은 “항상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안락한 경지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축서사 선원에는 10여명의 스님들이 동안거 결제 중이다. 선방 수좌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참선 정진하면서 치열하게 수행하고 있다.
스님의 젊은 날이 그랬다. 선방과 토굴 말고는 잘 나다니지도 않았고, 말도 끊다시피 하면서 오직 화두 참선에만 매달렸다. 강원도 명주군의 한 토굴에서는 한 노스님과 함께 1년6개월을 살았다. 농사짓고 나무하면서 수행하는, 평범하기만 한 노스님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던지는 말 한마디는 정곡을 찔렀다. 승속간의 재난까지 예언할 정도로 비범한 도인이었다. 그후 오대산 북대에서 홀로 2년 정도 정진했다. 세수도, 삭발도, 청소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토굴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용맹정진했다. 이런 토굴 생활으로 수행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스님은 올해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을 강조했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하게 있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에서 항시 화두가 여여(如如)해야 한다는 뜻이다.
“수행자의 화두는 의단(疑團·의심 덩어리)을 일으켜서 자기의 근본 바탕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의단을 참구해서 깨치면 자기의 마음자리를 곧바로 알 수 있어요. 그러나 일반인들은 가부좌를 틀지 않아도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마음공부로 충분히 선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님은 ‘선의 생활화’를 강조했다. 매일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여행 중에도, 쉬는 순간에도 자기를 점검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의 시작이자 ‘이 뭣고’ 화두의 초보단계인 셈이다.
“‘나’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으면 결국 남의 집 머슴살이하듯 살아가는 겁니다. 늘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퀘스천 마크를 붙여가면서 자기를 들여다보세요.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집니다.”
스님은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이런 마음 공부를 통해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공부는 ‘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리이타(自利利他·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남도 위하는 일)’로 확대된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 같은 세속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으면 그것은 결국은 무상하고 허망해요. 외형적으로 성공하더라도 마음은 늘 헐떡거리고 괴로운 겁니다. 마음은 본래 밝은 것인데 온갖 번뇌와 망상으로 인해서 흐려져 있는 겁니다. 참선을 하면 때 묻어 있는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해집니다.”
스님은 선이 요즘 흔히 말하는 ‘웰빙’과 ‘웰다잉’에도 알맞은 수행법이라고 설명한다. 마음만 튼튼하고 올바르면 껍데기인 육체의 건강은 저절로 좋아지고 어디서든지 당당하고 떳떳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조사들은 숨 떨어지기 직전까지 초롱초롱한 정신을 유지하다가 앉은 채 열반(좌탈입망)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죽음을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생사를 자재하는 것이고, 생사를 초월하는 겁니다. 맞춤형 죽음이고, 진정한 안락사지요.”
스님은 “요즘은 사회가 복잡하고 다단한 시대여서 옛날만큼 깨달은 도인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어렵고 괴로운 시기일수록 일반인들에게 더 필요하고 갈구되는 것이 선이고 마음수행”이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살기가 어렵고 괴롭다는 사람들이 참 많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지나친 욕심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물질에 대한 욕심을 놓아야 돼요. 일체 마음을 비우고, 일체 마음을 놓고, 일체 마음을 쉬면 평화가 옵니다. 무리한 욕망을 좇는 것보다 욕심을 줄여서 담담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사람들이 물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진정 행복을 원하면 마음을 낮게 가지면서 절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 스님은 욕심(탐·貪)이 화(진·瞋)를 부르고, 그것이 어리석은(치·痴) 사람을 만드니, 번뇌의 근원이 욕심이라고 말한다.
“가구나, 옷이나, 아파트가 아니라 사람이 고급화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져야지요. 마음을 고급스럽게 쓰는 사람이 많아야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그러면 아이들 교육을 위해 외국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을 많이 낳게 됩니다. 이게 아주 절실해요.”
국민 전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 스님은 대통령 당선자에 대해 “온갖 구설과 도덕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당선되는 것에서 보듯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천운이 갖춰진 자리”라면서 “이제부터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털어서 한 점 먼지가 나지 않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무상한 세월 속으로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산중의 눈 밝은 선지식에게 새해의 가르침을 청했다.
“사람들이 너무 빨리빨리, 급히급히, 안절부절못하고 살지요? 음식을 빨리 먹으면 맛을 모르고, 일을 급히 하면 망칩니다. 좀 느리고 답답하게 살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서도 짬지고, 알뜰하고, 빈틈없어야 합니다. 급하지도 않고, 느긋하지도 않은 곳에 오묘한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보세요.”
▲무여스님은
1940년 경북 금릉에서 태어났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상원사, 동화사, 송광사, 해인사, 관음사, 칠불사, 망월사 등 전국 선원에서 참선 수행했다. 칠불사와 망월사 선원장을 지냈다. 87년부터 봉화 축서사에 주석하고 있다.
축서사란 독수리(鷲)가 사는(棲) 곳이란 뜻이다. 험준한 축서사 뒷세가 풍수상 독수리의 형국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독수리는 지혜를 상징한다. 산 이름인 문수 또한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로 꼽히는 보살 명호다.
축서사는 신라 때인 673년 의상 조사가 창건했다.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의상스님은 동해 낙산사에 이어 이곳에 축서사를 열고, 3년 뒤 부석사를 개산해 화엄종을 펼쳤다. ‘축서사에서 기도하면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질 정도로 기도의 효험이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근래들어 피폐를 면치 못했다.
무여스님이 축서사에 들어온 것은 1987년. 올해로 딱 20년이 되는 세월 동안 대규모 불사를 끊임없이 펼쳐 오늘의 축서사를 중건했다. 문수산 품속 해발 800m 고지에 20여채의 당우를 연꽃처럼 활짝 펼쳐놓았다. 축서사가 비로소 천년 고찰다운 도량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절 한가운데 대운전 마당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안치된 불탑이 서 있다. 축서사 진신사리는 모두 112과. 그중 2과는 2002년 보물 제1379호인 축서사 괘불탱화를 조사하던 중 발견했다. 나머지는 한 신도가 성지순례 중 버마의 선원에서 기증받은 것이다. 불탑은 황등석을 재료로 한 5층 석탑으로 2005년 조성됐다.
경북 봉화 축서사 선원장 무여(無如·67) 스님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연다. 태백·소백 양백지간의 청산 연봉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해발 1206m의 문수산. 그 깎아지른 산세를 병풍으로 두르고, 일망무제로 전망이 탁 트인 봉화 물야면의 산중 오지에 축서사가 있다.
무여 스님은 “‘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남의 집 머슴살이하듯 살아가는 것”이라며 “종교와 관계없이 날마다 ‘나는 누구인가’를 확인하고 점검하면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축서사(봉화)/이상훈기자 |
“혜은이, 여기 차 한 잔 가져다 주게.”
젊은 제자 스님이 조용한 움직임으로 내어 온 국화차 향기가 맑다. 창호 문 밖에는 난분분 난분분 흰눈 날리고, 마침 풍경이 댕그랑 하고 운다. 노스님의 하심(下心) 가득한 미소가 눈 덮인 겨울 산사의 고요를 더욱 깊게 만든다. 문득 속세를 절하고 이 산중에서 무연하고 아득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라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괜찮은 직장에 다녔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허송세월 같고 신명이 나질 않았어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 떠나질 않는 겁니다.”
한 가문의 종손으로서 의무를 저버리고 떠나온 길. 그는 오대산으로 깊이 들어가기 전 딱 한 번 속가를 찾았다. 가족은 출가를 극구 말렸다. 그는 쪽지 한 장을 써놓고 다시 바랑을 멨다. 스님은 중국 선사들의 예를 들어 당시의 간절했던 출가 결심을 설명했다.
중국 선종 2조 혜가선사는 자신의 왼팔을 잘라 달마선사에게 바치며 법을 구했다. 당나라 때 선종 일파인 위양종을 창종한 앙산선사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손가락 두개를 잘라 부모에게 바치며 “부모님의 은혜를 조금도 저버리지 않고 수행해 불도를 이루겠다”고 간청해 뜻을 이뤘다.
“수행은 간절한 발심이 기본이 돼야 합니다. 발심은 내가 부처님처럼 반드시 이 우주와 인간의 근본진리를 깨닫고야 말겠다는 큰 마음을 내는 것이지요.”
스님이 스승에게 받은 화두는 ‘이 뭣고’다. 스님 방에는 ‘오대산 도인’ 한암 스님이 친필로 쓴 중봉선사의 가르침과 달마도가 걸려 있다. ‘道心堅固(도심견고·도를 닦는 마음을 견고히 하여) 須要見性(수요견성·모름지기 반드시 견성할지어다) 捉着話頭(착착화두·화두를 꼭 붙들고) 如咬生鐵(여교생철·마치 생철을 씹는 듯이 하라)….’ 스님은 수행자의 몸가짐, 마음가짐 등을 일러주는 이 가르침을 구도의 동행으로 삼아 40년이 넘는 세월을 옹근 수행자로 살았다.
스님은 오전 2시30분에 일어나 새벽 예불을 모시고 나면 선방 스님들을 지도하고 신도들을 만난다. 스님은 “항상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안락한 경지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축서사 선원에는 10여명의 스님들이 동안거 결제 중이다. 선방 수좌들은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참선 정진하면서 치열하게 수행하고 있다.
스님의 젊은 날이 그랬다. 선방과 토굴 말고는 잘 나다니지도 않았고, 말도 끊다시피 하면서 오직 화두 참선에만 매달렸다. 강원도 명주군의 한 토굴에서는 한 노스님과 함께 1년6개월을 살았다. 농사짓고 나무하면서 수행하는, 평범하기만 한 노스님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던지는 말 한마디는 정곡을 찔렀다. 승속간의 재난까지 예언할 정도로 비범한 도인이었다. 그후 오대산 북대에서 홀로 2년 정도 정진했다. 세수도, 삭발도, 청소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토굴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용맹정진했다. 이런 토굴 생활으로 수행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한다.
스님은 올해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을 강조했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하게 있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에서 항시 화두가 여여(如如)해야 한다는 뜻이다.
“수행자의 화두는 의단(疑團·의심 덩어리)을 일으켜서 자기의 근본 바탕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의단을 참구해서 깨치면 자기의 마음자리를 곧바로 알 수 있어요. 그러나 일반인들은 가부좌를 틀지 않아도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마음공부로 충분히 선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스님은 ‘선의 생활화’를 강조했다. 매일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여행 중에도, 쉬는 순간에도 자기를 점검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의 시작이자 ‘이 뭣고’ 화두의 초보단계인 셈이다.
“‘나’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으면 결국 남의 집 머슴살이하듯 살아가는 겁니다. 늘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퀘스천 마크를 붙여가면서 자기를 들여다보세요.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집니다.”
스님은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이런 마음 공부를 통해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공부는 ‘나’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리이타(自利利他·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남도 위하는 일)’로 확대된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 같은 세속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으면 그것은 결국은 무상하고 허망해요. 외형적으로 성공하더라도 마음은 늘 헐떡거리고 괴로운 겁니다. 마음은 본래 밝은 것인데 온갖 번뇌와 망상으로 인해서 흐려져 있는 겁니다. 참선을 하면 때 묻어 있는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해집니다.”
스님은 선이 요즘 흔히 말하는 ‘웰빙’과 ‘웰다잉’에도 알맞은 수행법이라고 설명한다. 마음만 튼튼하고 올바르면 껍데기인 육체의 건강은 저절로 좋아지고 어디서든지 당당하고 떳떳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조사들은 숨 떨어지기 직전까지 초롱초롱한 정신을 유지하다가 앉은 채 열반(좌탈입망)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죽음을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생사를 자재하는 것이고, 생사를 초월하는 겁니다. 맞춤형 죽음이고, 진정한 안락사지요.”
스님은 “요즘은 사회가 복잡하고 다단한 시대여서 옛날만큼 깨달은 도인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면서 “어렵고 괴로운 시기일수록 일반인들에게 더 필요하고 갈구되는 것이 선이고 마음수행”이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살기가 어렵고 괴롭다는 사람들이 참 많지요. 그런데 그 이유가 지나친 욕심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물질에 대한 욕심을 놓아야 돼요. 일체 마음을 비우고, 일체 마음을 놓고, 일체 마음을 쉬면 평화가 옵니다. 무리한 욕망을 좇는 것보다 욕심을 줄여서 담담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사람들이 물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진정 행복을 원하면 마음을 낮게 가지면서 절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 스님은 욕심(탐·貪)이 화(진·瞋)를 부르고, 그것이 어리석은(치·痴) 사람을 만드니, 번뇌의 근원이 욕심이라고 말한다.
“가구나, 옷이나, 아파트가 아니라 사람이 고급화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져야지요. 마음을 고급스럽게 쓰는 사람이 많아야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그러면 아이들 교육을 위해 외국을 기웃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을 많이 낳게 됩니다. 이게 아주 절실해요.”
국민 전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 스님은 대통령 당선자에 대해 “온갖 구설과 도덕적인 타격에도 불구하고 당선되는 것에서 보듯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천운이 갖춰진 자리”라면서 “이제부터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털어서 한 점 먼지가 나지 않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무상한 세월 속으로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산중의 눈 밝은 선지식에게 새해의 가르침을 청했다.
“사람들이 너무 빨리빨리, 급히급히, 안절부절못하고 살지요? 음식을 빨리 먹으면 맛을 모르고, 일을 급히 하면 망칩니다. 좀 느리고 답답하게 살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서도 짬지고, 알뜰하고, 빈틈없어야 합니다. 급하지도 않고, 느긋하지도 않은 곳에 오묘한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보세요.”
▲무여스님은
1940년 경북 금릉에서 태어났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희섭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상원사, 동화사, 송광사, 해인사, 관음사, 칠불사, 망월사 등 전국 선원에서 참선 수행했다. 칠불사와 망월사 선원장을 지냈다. 87년부터 봉화 축서사에 주석하고 있다.
축서사는 지혜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사는 곳
축서사란 독수리(鷲)가 사는(棲) 곳이란 뜻이다. 험준한 축서사 뒷세가 풍수상 독수리의 형국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독수리는 지혜를 상징한다. 산 이름인 문수 또한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로 꼽히는 보살 명호다.
축서사는 신라 때인 673년 의상 조사가 창건했다.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의상스님은 동해 낙산사에 이어 이곳에 축서사를 열고, 3년 뒤 부석사를 개산해 화엄종을 펼쳤다. ‘축서사에서 기도하면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전해질 정도로 기도의 효험이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근래들어 피폐를 면치 못했다.
무여스님이 축서사에 들어온 것은 1987년. 올해로 딱 20년이 되는 세월 동안 대규모 불사를 끊임없이 펼쳐 오늘의 축서사를 중건했다. 문수산 품속 해발 800m 고지에 20여채의 당우를 연꽃처럼 활짝 펼쳐놓았다. 축서사가 비로소 천년 고찰다운 도량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절 한가운데 대운전 마당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안치된 불탑이 서 있다. 축서사 진신사리는 모두 112과. 그중 2과는 2002년 보물 제1379호인 축서사 괘불탱화를 조사하던 중 발견했다. 나머지는 한 신도가 성지순례 중 버마의 선원에서 기증받은 것이다. 불탑은 황등석을 재료로 한 5층 석탑으로 2005년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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