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영화와 함께 떠나는 중국여행_06

醉月 2012. 11. 19. 10:03

‘붉은 수수밭(紅高粱)’ 원시 열정의 영웅들, 오만한 현대문명에 짓밟히다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새벽닭이 울면 인천에서도 들릴 만큼 가깝다는 중국의 산둥성. 산둥성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칭다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영화 ‘붉은 수수밭’을 촬영한 마을이 있다. 머옌의 소설 ‘붉은 수수밭 가족’을 원작으로 한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은 사랑과 열정으로 매매혼과 같은 오랜 인습엔 저항하되, 전통적 삶의 방식은 지켜가던 순수한 중국인들이 일본군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색채감 돋보이는 영상으로 보여준다. 산둥성에는 칭다오 외에도 취푸, 타이안 같은 관광 명소가 있다.
산둥성 타이안에 있는 태산.

‘붉은 수수밭(紅高粱)’은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영화 촬영기사이자 배우이던 장이머우는 ‘붉은 수수밭’을 연출해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탔다. ‘붉은 수수밭’은 그가 ‘제5세대 감독’의 선두주자로 세계 영화계에 첫발을 내딛는 계기를 만들었다. ‘제5세대 감독’이란 1978년에 베이징 영화대학에 입학한 일군의 감독을 지칭한다.

 

‘붉은 수수밭’의 무대는 산둥(山東)성, 구체적으로는 산둥성 가오미(高密)다. 이곳에서 수수밭과 관련된 주요 장면을 찍었고, 나머지는 인촨(銀川)에 있는 중국 최대 규모의 영화 세트장인 서부 영화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붉은 수수밭’은 머옌(莫言)의 연작 장편소설 ‘붉은 수수밭 가족’을 각색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출판된 ‘붉은 수수밭’이란 제목의 번역본 2종은 이 연작소설 중 한 편만을 번역한 것이다. 영화는 전 5편의 연작장편 가운데 ‘붉은 수수밭’과 ‘고량주’ 2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원작자 머옌은 중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다. 우리나라에도 ‘탄샹싱’ ‘풍유비둔’ ‘술의 나라’ 같은 작품이 번역, 소개됐다. 머옌의 고향이 바로 산둥성 가오미다. 가오미는 머옌에게 있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문학의 고향,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문학의 공화국’이다. 머옌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산둥성 가오미 이야기다. ‘붉은 수수밭’도 그렇다. 장이머우는 산둥성 출신은 아니지만 ‘붉은 수수밭’은 궁극적으로 산둥성 가오미의 이야기라는 점을 제대로 포착해 영화화했다.

 

산둥성은 한국인에게 매우 친근한 곳이다.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중국이기도 하다. “웨이하이(威海)와 옌타이(煙臺), 칭다오(靑島)가 있는 자오둥(膠東) 반도에서 새벽닭이 울면 인천에 들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1980년대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화교 대부분이 산둥 출신이고, 우리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중국요리도 대부분 산둥요리 계열이다.

 

한국인과 닮은 ‘산둥 호한(好漢)’

산둥요리는 중국 4대 요리 중 하나다. 산둥이 과거 노(魯)나라 땅이어서 산둥요리를 ‘노채(魯菜)’라고 부르는데, 담백하고 재료 고유의 맛이 살아 있는 게 특징이다. 우리나라 중국음식점에서 먹을 수 있는 요리 가운데 닭고기를 재료로 한 것은 라조기, 깐풍기 등 대부분 ‘기’자로 끝난다. 이것은 산둥 지역 사투리가 계(鷄)를 ‘기’로 발음한 데서 연유한다.

 

한국 사람들이 산둥에 특별한 애착을 느끼는 것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만이 아니다. 산둥 사람들은 기질 면에서 한국인과 닮은 점이 많다. 흔히 산둥 남자들을 ‘산둥 호한(好漢)’, 즉 산둥 대장부, 산동 호걸이라고 한다. 기질이 거칠다고 할 정도로 호탕하고, 열정적이고, 다혈질이다. 더구나 그런 기질 탓인지는 몰라도 산둥 사람들은 술을 아주 잘 마신다.

 

10여 년 전 산둥을 처음 방문해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濟南)에서 저녁을 먹을 때였다. 접대를 받는 자리였는데, 테이블에 고량주는 가득인데, 고량주를 마시는 작은 잔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식사가 시작되자 맥주컵의 3분의 2정도 되어 보이는 큰 유리잔에 고량주를 가득 따라주는 게 아닌가. 세 번에 나눠 마시라고 하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일 뿐, 원탁에 앉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건배를 제의하는 데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붉은 수수밭’은 그런 산둥 대장부, 산둥 호걸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영화다.

 

‘붉은 수수밭’의 무대인 가오미에 가기 위해 먼저 칭다오로 간다. 가오미는 칭다오에서 기차나 버스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다. 칭다오 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데, 길가에 보이는 것이 온통 한글 간판이다. 베이징과 상하이에 각각 5만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데, 산둥에는 8만여 명이 살고 있다.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숫자도 약 1만8000개로, 베이징과 상하이에 있는 한국 기업 수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우리나라가 중국에 투자한 금액의 절반가량이 산둥에 집중되어 있다. 칭다오는 산둥 지역 중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진출해 있는 곳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인들이 이곳 부동산에 집중 투자해 부동산 투기 바람을 일으켰고, 지금도 여기저기서 한국인용 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다.

    

혼성의 도시 칭다오

1988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영화 ‘붉은 수수밭’

칭다오는 이민도시이자 식민도시이고, 중국과 서양, 동양과 서양이 뒤섞인 혼성의 도시다. 상하이와 흡사하다. 칭다오에 들어온 첫 번째 이방인은 독일인이다. 그때가 1897년 11월이다. 아편전쟁(1840) 이후 영국과 미국, 프랑스는 상하이를 비롯한 남부 지방 곳곳을 점령했으니 중국 진출에 있어 독일은 한발 늦은 셈이다. 독일은 칭다오에 군침을 흘렸다. 톈진과 비교하면 베이징에서 멀기는 하지만 부동항인데다 산둥성의 자원이 더없이 탐이 나, 호심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천우신조로 침략을 감행할 기회가 왔다. 독일 선교사 두 명이 산둥성의 한 교회에서 살해당한 것이다. 이른바 ‘교주만 사건’이다. 독일은 이 사건을 구실로 칭다오를 침공해 1897년 11월13일에 칭다오의 주인이 된다. 독일로서는 동아시아 최초의 식민지를 구축하는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지금도 칭다오 해변을 따라 남아 있는 서구식 건물들, 산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독일군 사령관 관저 등이 바로 독일 점령 시대의 유물이다.

독일에 이어 일본이 칭다오에 들어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이 독일군을 격퇴하고 칭다오를 차지한 것이다. 일본인이 칭다오에 몰려들면서 칭다오에 일본 바람이 불었다. 독일 점령 시절에는 316명이던 일본인 숫자가 1921년에는 2만명으로 늘어났다.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대를 맞아 이제 칭다오에는 한국 바람이 불고 있다. 독일과 일본은 모두 제국주의 침략의 형태로 칭다오에 들어왔지만 한국인들은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대에 개발 열풍을 몰고서 칭다오에 자본주의 성공 신화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한국인에게 칭다오는 새로운 사업 기지이지만, 칭다오에 사는 중국인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일까. 칭다오를 거쳐간 독일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한국인은 칭다오에서 중국인과 상생하는 가운데, 일찍이 칭다오 역사에 없던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칭다오로 달려가는 한국인이 좀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중국을 만만하게 보지 말 것이며, 칭다오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싼 임금 하나만 보고 무턱대고 칭다오를 황금목장으로 여기지 않는 냉철함도 지녀야 한다. 요즘 칭다오에는 야반도주하는 한국 기업인이 늘고 있다고 한다. 무작정 칭다오에 왔다가 완전히 실패하고 직원들에게 임금도 못 줄 처지로 내몰려 공장까지 내팽개치고 야밤에 도망하는 것이다. 한국 기업을 위해서도, 칭다오를 위해서도 칭다오로 달려갈 계획을 세우는 한국인은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칭다오에 한국 사람이 많은 것은 칭다오의 자연환경이 한국과 비슷한 데도 이유가 있어 보인다. 칭다오는 도교(道敎)의 명산인 라오산(?山)에 에워싸여 있다. 흡사 북한산에 둘러싸인 서울을 보는 듯하다. 한국 사람들은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물이 있어야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는데, 칭다오가 딱 그렇다. 기후가 쾌적하고, 환경이 깨끗하며, 가로수와 녹지가 푸르게 가꿔져 있는 모습이 한국과 매우 흡사하다.

 

칭다오의 전통 주택은 붉은색 기와지붕에 노란색 벽이다. 이런 전통 주택들이 해변 산등성이를 따라 굽이굽이 늘어서 있다.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이국적인 풍경, 맑은 공기와 깨끗한 환경, 조용한 해변이 어우러져 멋진 휴양지를 연출하는,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가 칭다오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 칭다오는 골목골목 유명 인사가 살았던 옛집이 즐비하다. 유명 작가 라오서(老舍)가 대표작 ‘낙타상자’를 이곳에서 썼고, 근대 초기의 사상가이자 개혁가인 캉유웨이(康有爲)도 여기서 말년을 보냈다.

 

중국인의 고난이 서린 철길

독일이 칭다오를 차지한 뒤 칭다오에 세 가지가 생겼다. 철도와 맥주, 그리고 해수욕장이다. 1899년 9월 독일은 칭다오와 산둥성 내지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산둥성 내지에 있는 석탄을 비롯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반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03년에는 독일인답게 맥주 공장을 지었다. 전세계적으로 칭다오의 이름을 알린 칭다오맥주가 탄생한 것이다. 칭다오맥주 공장 앞은 맥주 거리라고 한다. 해마다 8월10일 전후에 이 거리에서 맥주 축제가 열린다. 칭다오맥주가 맛이 좋은 것은 독일인들이 전수한 제조 기술 덕도 있지만 칭다오의 명산 라오산의 물맛 덕분이다. 칭다오맥주의 상쾌함에는 독일 식민지 시대 칭다오의 슬픈 역사가 녹아 있다.

 

칭다오에서 기차를 타고 가오미로 간다. 이 철로 때문에 수많은 중국인이 죽었다. ‘붉은 수수밭’의 원작을 쓴 머옌의 또 다른 소설인 ‘탄샹싱’은 독일이 철도를 건설할 때 저항한 산둥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독일은 1901년 칭다오에서 가오미까지 철도를 건설한다. 그런데 이 철도 공사에 반대한 중국인들이 있었다. “쇳덩어리의 후손인 서양 귀신”이 철로를 놓아 “천지를 깨어나게 하고” 가오미의 “풍수지리를 파괴하고 동네 물길을 망가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산둥에서는 독일이 철도 놓는 것에 저항하는 민중 봉기가 격렬했다. 의화단운동(1900)이 대표적이다. 민간신앙과 의화권이라는 민간무술이 결합되어 조직된 의화단의 근거지가 바로 산둥이었고, 이들은 산둥을 넘어 베이징까지 진격해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8국 연합군과 일전을 벌인다. 추억의 영화 ‘북경 55일’이 바로 그 이야기다. 소설 ‘탄샹싱’에서 그렇게 철도 부설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우두머리는 독일군과 청나라 관군에 잡혀 끔찍한 탄샹싱 형벌을 당한다. 탄샹싱 형벌은 항문에서부터 박달나무 쐐기를 박아 넣어 입으로 나오게 하되,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죄인이 극심한 고통을 맛보게 하는 형벌이다.

 

그런 고난이 서려 있는 철길을 따라 1시간30분 만에 가오미에 도착했다. 가오미는 시이지만 우리 읍내만하다. 시내에서 약 20㎞ 떨어져 있는 촬영지까지 왕복 100위안(약 1만3000원)을 내기로 하고 택시를 잡았다. 이 운전기사는 오늘 운수대박이다. 기본요금이 6위안(약 800원)인 이곳은 어지간하면 기본요금으로 해결될 만큼 작은 도시인데, 3∼4시간 만에 100위안을 벌게 됐으니 말이다.

 

원작자인 머옌에게 사전에 이메일로 도움을 받은 대로 먼저 머옌의 고향 마을로 간다. 30분 정도 걸려서 머옌의 생가에 도착했다.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 2002년 설날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다녀가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생가를 한바퀴 둘러본다. 평범하다못해, 초라해 보인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나이 든 어르신이 다가온다.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다. “머옌을 아시냐”고 묻고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악수를 청한다. 그 어르신은 내 말을 알아듣지만 나는 어르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중국어를 배워도 소용이 닿지 않는 이럴 때가 가장 난감하다. 운전수가 나서서 어르신 말을 보통화로 통역해준다.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담배연기를 뿜어대면서 쉴새없이 떠드는 운전사의 말도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보다는 알아듣기가 훨씬 수월하다.

 

“영화 ‘붉은 수수밭’을 촬영한 곳이 이 마을이냐”고 물었더니, 아뿔싸! 여기가 아니란다. 머옌에게서 그의 고향만 확인한 것이 탈이었다. 여기서 10분쯤 더 가야 한단다. 멀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어디라고 설명하는데 택시 기사도 통 못 알아듣는 눈치다. 답답했던지, 할아버지가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선다. 할아버지가 택시 앞자리에 타고 비포장 길을 달려 도착한 곳이 쑨자커우(孫家口). 한겨울이라 주위에는 마른 수수더미만 널려 있을 뿐 ‘붉은 수수밭’을 찍었음직한 곳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칭사교와 붉은 수수밭

막막한 표정을 짓고 있자 영감님이 손으로 다리 하나를 가리킨다. 순간, 눈이 번쩍한다. 바로 그 다리다. 칭사교(靑紗橋). 돌로 된 짧은 칭사교는 영화에서 스바리(十八里) 마을과 붉은 수수밭을 잇는 다리다. 여주인공 주얼(궁리 분)이 돈에 팔려 나병환자에게 시집갈 때 이 다리를 건너고, 혼례 후 사흘째 되는 날, 친정으로 신행을 떠날 때도 이 다리를 건넌다.

 

겨울에 찾아온 것이 잘못이었다. 텅빈 평원에 차가운 바람뿐이다. 작열하는 붉은 태양이 수수잎 사이사이로 섬광처럼 빛나면서 붉은 수수가 파도를 이루어 일렁이던 그 장관의 붉은 수수밭은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 원래 이곳 수수밭이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넓지는 아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수수는 촬영을 위해 일부러 심은 것이었다.

 

애초에 장이머우가 가오미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원작자인 머옌은 반대했다. 소설 속의 붉은 수수밭은 할아버지 시대의 이야기이며,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신화이고, 꿈의 경계일 뿐이어서 가오미에 그런 수수밭이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장이머우 감독은 막무가내였다. 1987년 봄, 땅을 빌려 수수를 심었다. 그렇게 수수를 심은 곳이 바로 칭사교 다리 건너편이다. 그런데 수수를 심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수 절반이 죽어버렸고, 남은 것마저 키가 고작 1m밖에 되지 않는데다 잎도 다 말라 타들어갔다. 장이머우는 현(縣) 사무실로 달려갔고, 현 서기를 졸라서 화학비료 5t을 얻어냈다. 수수를 살려내는 것이 한가한 시골 현의 중요한 업무가 됐고, 현 서기를 비롯한 전 주민이 동원되어 마침내 수수를 살려냈다. 영화에서 사랑, 원시적인 힘, 열정, 야성, 순수를 상징하는 그 붉은 수수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붉은 수수밭’은 내레이터인 손자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 시대를 사는 손자가 붉은 수수밭에 살던 영웅들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머옌의 소설은 과거 그 붉은 수수밭 세계에 살던 순종 인간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상징되는 붉은 수수밭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지금 잡종의 시대를 살고 있는 불초(不肖)한 손자가 마련한 기억의 제단이다.

 

장이머우는 그런 소설의 핵심을 절묘하게 포착하여 빼어난 영상 미학으로 빚어낸다. 장이머우의 초기 대표작들은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대개는 소설보다 못한 태작이 되고 마는데, 장이머우는 영화감독 가운데 원작 소설의 핵심을 제대로 포착해 원작보다 나은 영화를 만드는 빼어난 능력을 지녔다. 영화 ‘붉은 수수밭’이 성공하면서 원작자 머옌도 유명해졌다. 머옌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한다.

“처음에는 장이머우가 내게 빚을 졌고, 나중에는 내가 장이머우에게 빚을 졌다.”

   

가오미시 쑨자커우에 있는 쑨자커우 항일 투쟁 승리 기념비. 아래 사진은 영화에서 붉은 수수밭과 스바리 마을을 잇는 다리 칭사교.

영화에서 할머니는 시집가던 날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새신랑 새신부였던 것은 아니다. 할머니가 돈에 팔려 나병환자에게 시집가면서 탄 가마를 할아버지가 메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 가면서 가마놀이를 하는데, 가마꾼이던 할아버지도 가마를 흔들면서 노래를 불렀다. “누이여, 누이여,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라, 앞으로….” 돈에 팔려서 나병환자에게 시집가지 말고 그 운명에서 벗어나라는 꼬드김이다. 이 노래는 ‘붉은 수수밭’이 상영된 뒤, 중국에서 한동안 유행했다. 그런데 가마가 붉은 수수밭에 이르렀을 때 산적이 나타나 신부를 겁탈하려 한다. 그때 신부를 위기에서 구하는 이가 바로 가마를 메던 사내, 즉 훗날 영화 속 내레이터의 할아버지다.

 

무사히 혼사를 치른 새신부가 결혼 후 3일이 지나 친정으로 신행을 가면서 붉은 수수밭을 지날 때, 가마꾼 사내는 새 신부를 납치한다. 혼자 나귀를 타고 친정으로 가던 새색시를 수수밭으로 안고 들어간 것이다. 가마꾼은 수수를 밟아 둥그런 터를 만들고 한가운데에 새색시 주얼을 눕힌다. 두 팔과 두 발을 편 채 수수밭에 누운 주얼은 엷은 두려움 속에서도 황홀하고 평온해 보인다. 그렇게 누운 주얼 앞에 할아버지(위잔아오)가 무릎을 꿇는다. 두 사람을 수수가 에워싸고, 태양은 수수잎 사이로 황금처럼 반짝인다. ‘붉은 수수밭’의 명장면이다.

 

제의(祭儀)와 카니발의 장소

주얼과 위잔아오가 붉은 수수밭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일종의 제의다. 이 제의를 관장하는 것은 태양과 대지, 붉은 수수다. 그 제의를 통해 수수밭 대지에 누워 음기를 받은 주얼과 태양을 받은 양기의 위잔아오가 결합한다. 그들은 태양과 대지, 붉은 수수와 하나가 되고, 태양과 대지, 붉은 수수가 내뿜는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힘과 기운을 그들은 몸으로 호흡한다.

 

그렇게 스며든 힘과 기운으로 두 남녀 주인공이 결합하면서 이들은 자식을 마음대로 팔아넘기는 매매혼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억압적인 관습과 부권(父權)에 저항하고 그것을 해체한다. 원시적 열정과 생의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기존의 억압적인 도덕률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붉은 수수밭의 순종 인간, 붉은 수수밭의 영웅이 탄생한다. 영화에서 붉은 수수밭은 이렇게 인간에게 원시적 생명력과 열정을 불어넣어 인간을 원래의 순종인간으로 거듭나고 생명력을 되찾게 하는 제의의 장소이자, 일종의 억압된 본능과 열정, 활력, 야성이 풀려나는 카니발의 장소다.

 

주얼이 친정에 갔다가 돌아오자 나병환자인 남편이 죽어 있다. 영화에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화자(話者)의 할아버지인 위잔아오가 그렇게 한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원작 소설에서는 위잔아오가 주얼의 남편과 친정아버지를 모두 살해한다. 분명 살인을 저지르고, 남의 유부녀를 차지했지만 영화에서는 이것이 범죄로 다가오지 않는다.

 

살인사건을 전후로 태양, 황토, 붉은 색, 에로스적 충동, 열정 등이 배치되고 이것들과 돈을 받고 딸을 파는 아버지, 비참한 여자의 운명 등이 대립하는 까닭에 불법적인 살인이 비도덕적이고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기보다는 삶의 원시적 열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생명의 논리처럼 처리된다. 살인과 범법을 도덕의 기준이나 법의 논리가 아니라 생명의 논리, 생의 충동 속에서 바라보도록 만들어버리는 붉은 수수밭 세계의 원시적 생명력이 영화에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법이나 규범, 문명의 논리를 뛰어넘어 자신의 솟구치는 생명의 열정에 따라 사는 원시적 생명력과 야

성이 충만한 영웅들, 그들이 붉은 수수밭 세계의 영웅들인 것이다.

 

나병환자인 남편이 죽자, 남편 소유이던 술도가는 주얼의 차지가 된다. 주얼은 새로 양조장을 열기로 하고 집안을 말끔히 청소한다. 집 주위에 붉은 고량주를 뿌리고, 양조장 지배인 노릇을 하는 라오한은 집 열쇠를 붉은 고량주로 씻는다. 붉은색의 액막이 상징과 고량주의 소독 효과가 곁들여진 것이다. 그렇게 새로 단장을 하고 있을 때 수수밭에서 위잔아오가 나타나 자기가 주얼의 남편이라고 떠들다가 밖으로 끌려나간다.

    

붉은 고량주가 탄생하다

주얼은 본격적으로 새 술을 빚기 시작한다. 붉은 수수밭의 수수를 가지고 술을 만드니 그 붉은 고량주가 얼마나 뜨겁고 달 것인가. 드디어 9월9일에 새 술이 완성되어 나온다. 9월9일은 음력으로 치면 중양절(重陽節)이다. 양이 두 번 겹치는 날이다.

 

중국인들은 홀수는 하늘의 숫자인 양수이고, 짝수는 땅의 숫자인 음수라고 생각한다. 9는 양의 숫자인 홀수 중 가장 큰 수다. 그래서 양기가 가장 충만한 숫자가 바로 9인데, 중양절은 그런 9가 두 번이나 겹친 날이다. 더구나 여주인공 이름이 주얼인 것은 집안의 아홉째이고 생일이 9월9일이어서다. 주얼은 숫자 9의 중국음 ‘주’와 2의 중국음 ‘얼’을 합성해 만든 이름이다. ‘붉은 수수밭’에는 이렇게 양기가 흘러넘친다. 붉은 태양, 늘 웃통을 벗고 있는 남자들, 붉은 고량주…. 양기로 가득 찬 영화이고, 남성성이 충만한 영화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러한 양기, 남성성의 충동이 밖으로 드러나고 생의 원시적 열정으로 발휘되는 것은 여성에 의해서다. 산적에게 붙잡힌 주얼이 위잔아오를 바라보는 시선은 위잔아오가 산적을 해치우게 하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또한 술도가 지배인 라오한이 일본군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한 뒤 붉은 고량주를 내놓으며 인부들에게 “당신들이 사내라면 라오한의 원수를 갚으라”고 부추기는 것도 주얼이다. 음이 양을 추동하면서 양도 온 생명의 힘을 발휘해 자신의 쓰임새를 다하고, 그렇게 한껏 부푼 양과 음이 만나 음 또한 온전한 생명력과 열정이 제대로 넘치게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런 남성성이 가장 희화되고 기묘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위잔아오가 주얼을 납치한 산적을 살해하고 술도가로 돌아와서는 술도가 사람들이 새 고량주 빚은 것을 축하하는 가운데, 술독에 소변을 보는 대목이다. 위잔아오는 시원하게 소변을 본 뒤 주얼을 안고 들어가 안방을 차지한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술도가 지배인인 라오한이 술독을 들고 와서는 한방에서 자고 있는 주얼과 위잔아오를 깨운다. 그러고는 오랫동안 술을 만들었지만 이렇게 훌륭한 명주는 처음이라고 말한다. 위잔아오가 심술을 부리면서 오줌을 눈 술독에서 맛과 향이 더없이 좋은 명주가 탄생한 것이다. 붉은 수수밭 세계에 걸맞은, 붉은 수수밭의 영웅을 상징하는 붉은 수수로 빚은 붉은 고량주가 탄생했다.

 

사실, 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붉은 고량주가 실제로는 없다. 중국술은 크게 백주(白酒)와 황주(黃酒)로 나뉜다. 백주는 흔히 고량주라고 하는 흰 증류주이고, 황주는 발효주다. 황주로는 사오싱지우(紹興酒)가 대표적이다. 한국 사람들은 간장 맛이 난다고 해서 싫어하는데, 따뜻하게 데워서 말린 매실을 술잔에 넣어 마시면 맛이 썩 괜찮다. 증류주인 백주의 주 원료는 수수인데, 아무리 붉은 수수로 만든다고 해도 영화에서처럼 붉은색을 띠지는 않는다. 모두 하얗다. 그래서 백주다. 영화에서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러 붉은색을 낸 것이다. 장이머우 감독의 탁월한 색채 감각이다. 그 탁월한 색채 감각은 ‘붉은 수수밭’의 후속작인 ‘국두’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왜 하필 붉은색 고량주인가. 중국인이 좋아하는 색깔은 노랑색과 붉은색이다. 노란색은 존귀함과 고귀함을 상징하고 황제의 색이다. 예전에는 황제 이외에는 노란색 옷을 입을 수 없었다. 붉은색은 기쁨과 행운을 상징하고, 액운을 막아주는 색으로, 서민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설날이면 붉은색 팬티를 입고 붉은색 양말을 신고 붉은 봉투에 세뱃돈을 넣어 주는가 하면 결혼식, 생일 등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온통 붉은색으로 장식한다. 황제가 살았던 자금성이 온통 붉은색과 노란색 물결이고,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가 붉은색 바탕에 노란 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노란색과 붉은색이 지닌 이런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붉은 고량주에는 기쁨과 행운, 열정, 액운을 막아주는 신비한 마력이 들어 있다.

 

붉은 고량주가 탄생하던 날 술도가 지배인 라오한은 술도가를 떠난다. 몰래 주얼을 사랑했는데, 위잔아오가 와서 안방을 차지하고, 자신이 그동안 만들었던 것보다 더 맛 좋은 술이 만들어졌으니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어졌다고 여긴 것이다. 라오한이 떠나고, 우연히 오줌을 눈 것이 효과를 보기는 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기술(?)로 천상의 맛을 지닌 고량주를 탄생시키면서 위잔아오는 명실상부한 이 집 주인이 되고 주얼의 남편이 된다. 그후 아이도 낳는다.

 

원시적 열정의 폭발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이 가오미의 붉은 수수밭에 나타난다. 일본군은 1914년에 독일군을 몰아내고 칭다오를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칭다오에서 가오미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차지하자 중국 정부와 영국, 미국 등이 크게 반발해 일본의 산둥 점령은 오래가지 못한다. 독일은 강압이기는 하지만 중국과 조약을 맺고 칭다오를 차지했었다. 그런데 일본은 그런 절차마저 없이 독일을 물리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옛 독일의 점령지를 승계해야 한다고 우긴 것이다. 오랜 협상 끝에 일본은 결국 1922년 12월10일 칭다오에서 철수하고 칭다오를 중국에 돌려준다. 칭다오로서는 반세기 동안의 식민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하지만 15년 후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은 다시 칭다오를 점령한다. 그리고 칭다오를 발판 삼아 철로를 따라 산둥 내지로 점령지를 확대해간다. 그 결과 마침내 일본군이 자동차를 앞세우고 가오미의 붉은 수수밭까지 들어온다. 영화에서 일본군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붉은 수수밭에 길을 내려고 한다. 일본군은 자동차로 수수를 넘어뜨리고, 마을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붉은 수수를 짓밟도록 한다. 수수를 없애고 수수밭에 자동차 길을 내려는 것이다. 일본군이 들어온 뒤, 붉은 수수밭 영웅들의 삶의 터전이자 생명의 공간이 훼손되기 시작한다.

   

칭다오의 맥주 거리. 칭다오맥주가 맛이 좋은 것은 독일인이 전수한 맥주 제조 기술 덕도 있지만 칭다오의 명산 라오산의 물맛 덕분이다.

그러던 중 일본군은 그렇게 짓밟힌 수수밭에서 끔찍한 처형을 감행한다. 일본군에게 대항하던 중국인 유격대원을 잡아 피부를 벗겨 죽이는 공개처형을 하는 것이다. 그 처형을 당하는 이가 바로 주얼의 술도가 지배인이던 라오한이다. 그는 술도가를 떠나 항일 유격대에 가담했던 것이다.

 

라오한이 일본군에게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 뒤, 집에 온 주얼은 예전에 남편이 오줌을 싸서 탄생시킨 명주를 꺼낸다. 그러고는 “당신들이 사내라면 이 술을 마시고 가서 라오한의 복수를 하라”고 말한다. 붉은 고량주에 불을 붙이고 활활 타오르는 고량주 불길을 앞에 둔 채, 위잔아오와 술도가 사내들은 붉은 고량주를 항아리 뚜껑에 가득 따라 마시면서 복수를 다짐한다.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이들이 들고 나선 무기는 바로 고량주다. 고량주를 항아리에 가득 담아 그것에 불이 붙으면 폭발하도록 고량주 폭탄을 만든 것이다.

 

땡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시각, 웃옷을 벗은 사내들이 수수밭에 매복하면서 일본군을 기다린다. 기다려도 오지 않자 위잔아오는 주얼에게 먹을거리를 내오라고 한다. 주얼이 먹을거리를 머리에 이고 아들(내레이터의 아버지)과 함께 수수밭으로 오는 찰나, 저쪽에서 수수밭 사이를 가로질러 일본군 트럭이 달려온다. 아들이 “일본군이다!” 하고 외치는 순간 일본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는다. 주얼이 쓰러진다. 기관총에 맞서 고량주 화염병과 고량주 폭탄이 연이어 터진다.

 

사라져간 붉은 수수밭 세계

영화를 찍은 가오미시 쑨자커우에 가면, 쑨자커우 항일 투쟁 승리 기념비가 있다. 1938년 4월16일에 400여 명의 유격대가 일본군을 격퇴한 전적이 기록되어 있다. 이날 전투는 아침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계속됐는데,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포위 공격해 장교를 포함한 39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차량 7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했다고 적혀 있다.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 머옌은 바로 이 이야기에 착안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자기가 살던 고향에서 일어난 조그만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이처럼 웅장하고도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 머옌의 상상력과 역사의식,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장이머우가 빼어난 색채감과 연출력으로 작은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재현하였으니, 가오미의 선조들로서는 후손을 잘 만난 셈이다.

 

영화는 전투로 폐허가 된 붉은 수수밭에서 태양 빛을 받고 우뚝 서 있는 위잔아오와 그의 아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주얼은 죽었고 붉은 수수밭도 사라졌다. 일본군이 붉은 수수밭에 온 뒤에 그렇게 됐다. 그렇다면 붉은 수수밭에 살던 사람들에게 일본군은 무엇인가. 일본군은 붉은 수수밭을 파괴한 세력이다. 그들은 자동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붉은 수수밭에 와서 수수를 망가뜨리고 길을 내려 했다. 또한 그들은 붉은 수수밭의 순종 인간들, 원시적 열정을 지닌 순수하고 용감한 붉은 수수밭 세계를 파괴하고 없애려는 세력이다.

 

붉은 수수밭에 사는 이에게 일본군의 침략은 국가의 재난이라기보다는 붉은 수수밭 세계의 재난이다. 이 영화가 단순한 항일 민족주의 영화를 넘어서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영화에서 일본군은 단순한 제국주의 외세만이 아니다. 인간의 가죽을 벗겨 죽이듯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이고, 자동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해 붉은 수수밭에 자동차 길을 내서 붉은 수수밭을 파괴하는, 현대의 상징, 현대 문명의 상징이다. 현대 이성의 오만과 파괴를 상징하는 세력인 것이다.

 

그 현대적으로 무장한 비인간적인 제국주의 일본군으로 인해 붉은 수수밭 세계는 사라졌다. 일본의 침략은 중국인을 죽인 것이기 이전에 붉은 수수밭의 영웅들을 죽인 것이고, 중국 이전에 붉은 수수밭을 침략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이 영화를 단순한 반(反)제국주의, 반일본 민족주의 영화로만 해석하는 것은 이 영화를 형편없이 축소시켜 해석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붉은 수수밭’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일본의 침략은 민족의 재난이었다는 판에 박힌 틀에서 벗어나 일본 침략이 중국과 한국 민중의 삶에 대관절 무엇이었는지, 좀더 다양하고 심층적으로 파고들 필요가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죄행을 훨씬 더 깊이 있게 드러내는 일이 아닐까. 우리의 항일 영화, 항일 드라마는 왜 계속 틀에 박힌 패턴만 반복하는 것일까.

    

산둥의 세 꼭지점

위잔아오와 주얼이 붉은 수수밭 한가운데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

‘붉은 수수밭’의 무대인 산둥성의 성도는 지난이다. 하지만 지난의 위상은 퍽 곤혹스럽다. 그저 성도일 뿐, 주변에 있는 세 도시가 지난보다 더 명성을 누리면서 오히려 산둥의 상징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산둥에 여러 차례 가는 사람도 지난에 들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성도인 지난보다 더 유명한 세 도시, 칭다오, 취푸(曲阜), 타이안(太安)만 거쳐가는 것이다.

 

취푸는 공자(孔子)의 고향이다. 중국에서 20세기 들어 줄곧 비판받아온 공자가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주목을 받으면서 ‘공자 붐’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공자 부활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동하는 주체는 역시 중국공산당과 정부다. 2004년 9월28일에는 공자 탄생 2555주년을 맞아 중국 관방이 주최하는 최초의 기념제(記念祭)와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는가 하면, 베이징에서는 ‘공자문화의 달(孔子文化月)’행사가 인민대회당에서 열리는 등, 전국 각지에서 기념 활동이 진행됐다.

 

중공당과 정부가 공자 탄생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등 적극적인 유교 부활 운동과 전통 문화 진행 정책을 펼치는 것은 사회주의 정권 탄생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민족문화의 계승자, 중화문화의 수호자에서 찾고, 전통문화를 통해 민족적 단결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민간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합쳐져 요즘 중국은 가히 공자 붐이다. 그런 공자 붐으로 인해 공자의 고향인 취푸가 인기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취푸에 있는 공자의 무덤에 가면 그곳 비석들을 유심히 보라. 부서진 곳을 땜질한 비석이 대부분이다. 문화대혁명 때 봉건주의 타도를 외치며 깨뜨린 것을 복원한 것이다. 금석지감(今昔之感)에 젖는다.

 

타이안에는 유명한 태산이 있다. 인문적 정취가 가득한 산이다. 역사의 숨결, 옛 황제와 선비들의 흔적을 살피면서, 산둥이 옛날 제나라 땅이자 노나라 땅이었다는 것을 새기면서, 진시황을 비롯한 5명의 중국 황제가 이 산에 올라 하늘과 땅에 제를 지낸 의미를 새기면서 모두 6660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보는 것도 의미 있는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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