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해 (尋隱者不遇)
소나무 아래 동자에게 물으니 (松下問童子)
스승은 약초 캐러 가셨다 하네 (言師採藥去)
다만 이 산 속에 계시지만 (只在此山中)
구름 깊어 계신 곳 모른다 하네 (雲深不知處)
▲ 장득만 ‘송하문동자도’, ‘만고기관첩’ 중, 18세기, 종이에 색, 38.0×30.0cm, 삼성미술관 리움 |
팔당대교를 지나고 두물머리를 지나 한참을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려가 보니 용문산 끄트머리에 그의 집이 있었다. 지붕 높이만큼 자란 보리수나무에 둘러싸인 아담한 집이었다. 마당과 밭을 가득 메운 보리수나무는 다닥다닥 붙은 붉은 열매들로 가지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복분자, 앵두는 농익다 못해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짐을 부려 놓기가 무섭게 보리수를 따기 시작했다. 이번 주가 지나면 나무에 달린 열매들이 모두 산속에 사는 새들 차지가 될 것이라 했다. 나를 부른 이유였다. 절반은 먹으면서 절반은 바구니에 담으면서 밭에서 반나절을 보내노라니 어느새 점심때가 다 됐다. 그제야 내 곁에서 상추, 오이, 쑥갓을 따며 점심 준비를 하는 친구 곁이 허전해 보였다.
“네 남편은 왜 안 보여?”
인사가 너무 늦었다 싶어 멋쩍게 물었다.
“응. 저 산에 약초 캐러 갔어. 단오 전에 캐야 하는 약초가 있다면서 도시락 싸가지고 올라갔으니까 저녁때나 되어서 내려올 거야.”
걱정도 안 되는 듯 친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그곳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갔다.
은자는 어디 갔나
곱게 색칠하고 꼼꼼하게 그린 그림을 굳이 ‘설명’이라는 단어로 폄하한 까닭은 그림이 시의 세계를 전해주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누군가를 만나려면 사전에 약속을 잡고 조금만 늦어도 양해를 구하고 서로가 합의된 시간에 방문해야만 결례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에게 기껏 스승님의 행방을 알려준다는 소리가 험준한 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진정한 은자의 모습을 보여준 가도의 시 세계가 장득만의 그림에서는 잘 녹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분초(分秒)를 따지며 현대를 사는 내게 ‘산속에 계시지만 구름 깊어 계신 곳 모르는’ 가도의 시 세계는 너무나 광대하고 유유자적해서 도무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득하기만 하다. 그 아득함의 세계를 장득만은 시 표면에 드러난 모습을 설명하는 것으로 간단히 보여주었다. 그림 보는 사람의 수준이 너무 낮다고 생각한 탓인지 지나치게 친절한 설명으로 감상자의 생각할 여지마저 대신해 주었다. 잔소리가 많은 까닭에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느껴지는 칡뿌리 같은 여운은 사라져 버렸다. 장득만은 조선 후기의 화원으로 왕의 어진(御眞)을 그릴 정도로 초상화에 뛰어난 작가였다. 그런 기량을 가진 작가가 왜 그랬을까.
‘퇴(推)’로 할 것인가 ‘고(敲)’로 할 것인가
이 그림은 왕실 자재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제작한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그 때문에 작가의 예술적 기량을 드러내기보다는 가도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보조자료로서의 그림에 적합하도록 제작했다. 장득만이 굳이 예술성에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설명적인 그림을 그린 것은 ‘만고기관첩’이 지닌 교육용 교재로서의 의도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영화에서 조연들이 주연을 돋보이도록 최대한 자신들의 끼를 죽이고 감추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조연임에도 불구하고 주연보다 더 많이 사랑받는 경우가 있다. 그런 현상이 단지 모든 존재가 가치 있다는 인식이 보편화된 우리 시대만의 특징일까. 장득만이 살았던 시대에는 힘들었을까.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해서 보더라도 장득만의 ‘송하문동자도’는 가도의 시 위에 살만 입혔을 뿐 그 안에 뼈대를 세워 혼을 불어넣는 데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더구나 가도는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민다(僧推月下門)’는 시구(詩句)를 쓰면서 ‘퇴(推)’와 ‘고(敲)’ 중 어떤 글자가 적합할 것인가 고민하다 결국 ‘퇴고(推敲·글을 다시 읽어가며 다듬고 고치는 일)’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주인공이니 그의 시 세계는 허깨비 같은 천학(淺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융숭하지 않은가.
김홍도의 작품 ‘월하고문(月下敲門)’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다’는 뜻의 ‘퇴고(推敲)’의 일화를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 스님이 등장한 것은 ‘퇴고’를 고민하던 때 가도가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의 명문장 한유(韓愈)의 권유로 환속하여 시인으로 살았다.
용문산 정상에 석양빛이 짙어질 때까지, 보리수의 붉은빛이 어둠 속에 잠길 때까지도 산에 간 친구 남편은 내려오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그런 선비가 오늘 그립다
주돈이 애련설
연꽃을 사랑함에 대하여(愛蓮說)
물과 땅에서 나는 꽃 중에는 사랑스러운 것이 매우 많다(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晉陶淵明獨愛菊)
이씨의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몹시 사랑했으나(自李唐來 世人甚愛牡丹)
나는 홀로 연꽃을 사랑한다(予獨愛蓮之)
진흙 속에서 나왔으나 물들지 않고(出於淤泥而不染)
맑은 물 잔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고(濯淸漣而不妖)
속은 비었으되 밖은 곧아(中通外直)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도 없으며(不蔓不枝)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 깨끗하게 서 있으니(香遠益淸 亭亭淨植)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함부로 다룰 수는 없다(可遠觀而不可褻翫焉)
나는 말하겠다(予謂)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요(菊花之隱逸者也)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자요(牧丹花之富貴者也)
연은 꽃 중의 군자라고(蓮花之君子者也)
아(噫)!
국화에 대한 사랑은(菊之愛)
도연명 이후에는 들은 적이 드물고(陶後鮮有聞)
연꽃에 대한 사랑은(蓮之愛)
나와 같은 이가 몇 사람인고(同予者何人)
모란에 대한 사랑은 많을 것이 당연하리라(牡丹之愛宜乎衆矣)
▲ 강세황 ‘향원익청’ 종이에 색, 52.5×115.5cm, 간송미술관 |
‘주돈이’라는 이름의 무게
주돈이는 북송(北宋)의 대유학자이자 송나라 유학의 비조(鼻祖)다. 그는 유교의 토대를 마련하고 체계화하였는데 성리학(性理學)의 기본이 되는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오행(五行)이 만물 속에서 생성발전되는 과정을 도해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저술했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재창한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형제와,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1130~1200)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 네 사람은 중국 송대의 4현(四賢)으로 칭송받으며 현재까지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있다. 주돈이는 자가 무숙(茂叔)으로 중국 강서성의 여산(廬山)에 있는 염계(濂溪)에서 염계서당을 짓고 살아 주렴계(周濂溪)라고도 한다.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그린 ‘향원익청(香遠益淸)’의 제시에서도 역시 ‘염계’라는 호로 주돈이를 칭하고 있다. 제시는 이렇다.
‘염계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연꽃은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되 함부로 다룰 수는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그린 연꽃 역시 멀리서 보는 것이 좋다”고 하겠다. -표암(濂溪先生謂蓮可遠觀不宜褻翫余則曰畵蓮亦宜遠觀焉. 豹菴)’
그림 ‘향원익청’에는 두 포기에서 자란 꽃과 잎사귀가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다. 세로로 긴 그림은 한여름 연못에서 어린아이 키만큼 웃자란 연꽃의 긴 줄기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형식이다. 앞쪽의 연꽃은 활짝 핀 상태로, 그리고 뒤쪽의 연꽃은 봉오리를 오므린 상태로 그려 연꽃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묘사했다. 한 줄기에서 솟아오른 널찍한 연잎 또한 앞면과 뒷면을 엇갈리게 표현하여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특히 백련임에도 불구하고 흰색 연꽃잎의 끄트머리에 붉은색을 찍어 발라 한껏 운치가 묻어난다. 배경에 흐릿하게 등장하는 수초와 뿌리 부분에 듬성듬성 펼쳐진 어린 연잎도 한여름 연못의 싱싱함을 전해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하물며 연잎 위에 기어 오른 청개구리까지 발견하게 되면 금세라도 연꽃 아래서 퐁당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 실감난다. ‘향원익청’은 주돈이의 ‘애련설’에 대한 흠모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성 있는 그림이지만 그 뜻을 무시하고 감상용으로만 한정해서 본다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작품이다.
강세황은 조선 후기 남종화풍을 주도한 사대부 화가이다. 각 서체에도 능했을 뿐만 아니라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같이 서양화풍을 수용한 작품도 남겼다.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의 작품에는 예외 없이 표암의 그림 평이 따라붙을 정도로 평론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하고는 32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 강세황은 자를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노죽(露竹)이라 했는데 특히 표암이란 호를 즐겨 썼다. ‘표암(豹菴)’은 강세황이 태어날 때부터 등에 있던 흰 얼룩무늬가 마치 표범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향원익청’에서도 표암이라 썼다. 표암 대신 ‘표옹(豹翁)’이라 칭할 때도 있었다.
이름은 조정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강세황은 평생 야인으로 살다 61세가 되는 1773년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영의정을 지낸 고관대작의 아들이 백면서생으로 늙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영조의 배려 때문이었다. 관직은 볼품없었다. 무덤을 관리하는 9급 참봉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수석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병조참의와 한성판윤을 지냈다. 10년 동안에 이뤄 낸 고속승진이었다. 이 ‘자화상’을 그릴 당시에 그는 호조참판을 거쳐 가의대부(종2품)에 올랐다. 허리에 묶은 붉은 띠가 당상관임을 말해준다. 그렇게 잘나가던 그가 ‘이름은 조정에 있지만 마음은 산림에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조선시대 초상화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을 제작했다. 비록 지금은 남들이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어느 시골 구석에서 이름 없이 살았던 시절을 잊지 않겠노라는 다짐이다. 이 얼마나 갸륵한 자기성찰인가. 강세황은 자화상을 4점이나 남겼다. 그만큼 자의식이 강했으며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엄정함이 강했던 사람이다. 강세황은 ‘향원익청(香遠益淸)’을 그릴 자격이 있는 선비다. 오염된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도 오직 자신만이 청정한 척 기염을 토하는 사람들 속에서 출세한 뒤에도 행여 자신의 행동에 진흙이 묻어 있지 않을까 반성하고 또 반성했던 강세황 같은 선비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