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대청봉에 첫 눈. 몇 번의 찬비 뒤에 계절의 걸음이 더 빨라졌습니다. 좀 더 머물렀으면 좋으련만, 더불어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이제 단풍은 중부지방을 넘어 남도를 향해 맹렬하게 내려가고 있습니다. 서두르셔야 하겠습니다. 이번 주말이 중부 내륙 쪽에서는 절정의 단풍시즌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 듯하니 말입니다. 단풍이 불붙은 이즈음은 어디든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가을철 여행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으로 물든 장쾌한 산자락과 불붙은 단풍으로 포위되다시피한 고즈넉한 산사의 매혹적인 풍경입니다. 이름난 명산들이 가을이면 단풍놀이 행락객들로 넘쳐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단풍의 절정 무렵에 이름난 명산을 찾았다가는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산에 오르기 십상이고, 정작 단풍보다는 울긋불긋 등산복만 보다가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한꺼번에 몰려든 행락 차량들로 짜증나는 교통 체증을 견뎌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몇 해 동안 단풍의 행로를 쫓았던 경험으로 미뤄본다면,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물’과 함께 있을 때입니다. 이름난 산이 보여주는 단풍의 색감도 빼어나긴 하지만, 고요한 호숫가의 단풍 색감이나 자태만큼 매혹적이지 않았습니다. 가을의 호수는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명산들보다 훨씬 더 고즈넉한 데다 걸음을 멈추고, 혹은 차를 세우고 호반의 풍경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절정의 단풍을 만날 수 있는 때를 겨눠서 충주호를 찾아간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충주호의 호안은 지금 온통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처럼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호수의 단풍. 그 화려한 자태와 정취를 ‘완벽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나섰다가 세 곳을 찾아냈습니다. 충주호를 끼고 있는 두 개의 산과 하나의 길입니다. 충주호를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보고 서있는 말목산과 제비봉, 그리고 충주호를 감아도는 비포장 드라이브 코스까지, 단풍으로 물든 기막힌 호수를 굽어보는 세 곳의 자리를 살짝 공개합니다. 이 세 곳을 찾아가는 행로를 따라오며 주의할 점은 단 한 가지. 늦어도 이번 주말은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 말목산 빼어난 풍광에 발목을 잡히다 충주호를 끼고 솟은 말목산. 월악산국립공원의 동북쪽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산이지만, 말목산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충주호의 유람선을 타 봤다면 혹 이 산의 자태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충주호 유람선이 뜨는 장회나루에서 충주호 건너편으로 긴 능선을 벼랑을 드러내며 우뚝 솟아있는 산이 바로 말목산이니 말이다. 말목산은 행락객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른바 ‘산꾼’들의 발길도 드물지만, 가을 충주호의 단풍을 조망하는 명소 중 가장 앞자리에 당당히 놓을 만하다. 그만큼 말목산 능선에서 바라다보이는 단풍이 물든 충주호 전망은 빼어나다. 능선을 따라가다 만나는 몇 곳의 아슬아슬하게 깎아지른 벼랑의 조망지점에 서면, 산자락의 한쪽 사면에 융단 같은 숲의 울긋불긋한 단풍과 함께 그 아래로 호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을 그으며 호수 위를 유람선이 오가면 그대로 한 폭의 그림과 다름없다. 말목산의 해발 고도는 720m.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오르는 길은 그리 녹록지는 않다. 국립공원 지역임에도 탐방로가 놓이지 않아 길은 ‘딱 잃지 않을 정도’로 흐리다. 산행은 단양군 단장면 하진리 마을에서 시작한다. 산행 내내 표지판이라고는 ‘말목산 등산로입구’와 정상석에 새겨진 ‘말목산’ 딱 두 개뿐.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급경사면을 차고 올라야 하는 구간도 제법 길다. 하진리 마을 앞의 등산로 표지판에 그려진 시간대로라면 말목산 정상까지는 2시간 안쪽이면 닿는다. 하지만 일순 하늘이 툭 터지는 돌너덜 구간이나, 깎아지른 벼랑 지형에서 바라다보이는 조망 앞에서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다. 턱까지 닿는 가쁜 숨이나 뻐근한 허벅지가 아닌, ‘빼어난 경관’이 도무지 발목을 붙들고 속도를 낼 수 없게 만든다는 얘기다. 말목산의 능선의 조망지점에서 내려다보는 충주호는 호수라기보다는 말목산과 맞은편 제비봉 사이로 흐르는 물길처럼 보인다. 지금 말목산의 가파른 능선에도, 물 건너편에 마주 선 제비봉 사면에도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이 카펫처럼 펼쳐져 있다. 제비봉의 허리춤에는 길고 가늘게 36번 국도가 지나가고, 그 길이 닿는 장회나루에는 수면에 비친 단풍색의 물길을 따라 유람선이 들고 난다. 다른 산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이런 풍경이야말로 말목산이 만추 무렵에 선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 거친 암릉길이 보여주는 그림 같은 풍경 ‘말목산과 둥지봉을 이어붙여 넘겠다’는 말을 마치자마자 월악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빠르게 시선을 위아래로 훑었다. 카메라를 멘 모습을 보더니 이내 ‘그런 차림으로는…’이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목산을 넘어 호수로 다 내려와 천진선원을 거쳐 다시 서쪽으로 이어진 암릉을 딛고 둥지봉을 타서 옥순대교 쪽으로 내려오겠다고 설명하자 손사래부터 쳤다. 그는 “딱 한번 그렇게 가본 적이 있는데 중간에 길을 잃고 무진 고생을 했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배웅을 받으며 말목산에 오른 길이었다. 말목산 정상까지는 몇몇 구간이 좀 가파르다거나 덱이나 계단 등이 없다뿐이지 여느 산과 다를 것 없는 산행이다. 하지만 서쪽의 암릉을 따라가면 충주호 건너편의 구담봉이니 옥순봉의 절경을 굽어볼 수 있는 자리가 있을 것이었으니 되돌아서기가 못내 아쉬웠다. 하기야 둥지봉 쪽으로 이어지는 암릉 등반을 말렸던 월악산 국립공원 직원도 ‘풍광이야 거기만한 곳이 없다’고 했으니….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준비 없이 둥지봉 쪽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오르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정상에서 둥지봉 쪽으로 이어지는 암릉구간으로 내려서자마자 길은 흐려졌다. 등산객들이 간간이 매어놓은 리본도 사라졌다. 그러곤 나타난 암릉구간. 여기서 두 개의 암릉을 넘어야 둥지봉으로 이어지는 길을 만난다. 첫 번째 암릉은 위태위태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바위에 붙어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암릉은 깎아지른 벼랑이 아찔했다. 길은 점입가경이다. 두 번째 암릉에서 내려서는 구간은 거의 직벽에 가까워 오금이 저릴 정도다. 그러니 말목산을 넘어 둥지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산행경험이 풍부한 이가 길잡이를 잡고 되도록 여럿이, 자일 등의 장비를 갖추고서 다녀와야 한다. 이런 위태위태한 산행을 감행하는 것은 암릉구간에서 펼쳐지는 빼어난 경관 때문이다. 단양팔경으로 꼽히는 구담봉과 옥순봉이 호수와 어우러져 보여주는 풍경은 이런 수고와 충분히 바꿀 만하다. 직벽의 암봉 구간에서 욕심을 접고 되돌아 말목산을 내려오는 길. 그 길에서는 ‘언젠가 둥지봉으로 이어지는 암릉구간을 다 밟아보리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말목산 정상까지만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유람선을 타고 보는 충주호의 경관과 절대로 바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 장쾌한 시선으로 호수를 굽어보는 자리 충주호의 가을 경관으로 보는 또 하나의 명소로 꼽을 수 있는 곳이 말목산과 마주보고 서있는 제비봉이다. 제비봉은 빼어난 조망으로 익히 알려진 곳.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는 데다 바윗길에 놓인 몇 개의 철계단에서 굽어보는 충주호 일대의 경관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다. 게다가 이즈음은 단풍까지 짙으니 주말이면 산행객들의 발길이 잦다. 제비봉의 조망을 즐기겠다면 굳이 정상까지 다녀올 필요는 없다. 장회나루 뒤편의 산행 출발점에서 제법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10분 정도만 오르면 첫 번째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 서면 시야가 탁 터지면서 충주호가 발아래로 굽어보인다. 왼편으로는 구담동이 우뚝 서있고 정면으로는 말목산의 가파른 산자락이 거대한 성곽처럼 막아선다. 발 아래 장회나루에서는 구담봉이 막아 S자로 휘어지는 물길을 따라 수시로 유람선이 따라 들고 난다. 가을 호반의 단풍색은 고우면서도 짙고, 물색은 유독 푸르다. 넓게 시야를 넓혀도, 이리저리 시선을 좁혀 보아도 ‘한 편의 그림’이 아닌 풍경이 없다. 고도를 높일수록 단풍 든 충주호반의 풍광은 더 장쾌하다. 제비봉의 해발고도는 710m. 하지만 단풍을 즐기겠다면 굳이 정상까지 오를 욕심은 접어두어도 좋다. 첫 번째 전망대를 지나 암봉의 칼날 같은 능선 구간에 든든한 철계단이 놓여 있는데, 그 계단 끝이 최고의 조망포인트다. 더 오른다 해도 이만한 풍경을 보여주는 자리는 없다. 같은 방향에서 보는 풍경이니 높이 오른다 해서 뭐 별다를 게 있겠나 싶겠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오를수록 시야에 들어오는 호수의 폭이 넓어지면서 아기자기하게 느껴지던 풍경이 압도의 느낌으로 변한다. 등산로 초입에서 이곳 계단 끝까지 다 오른다 해도 30∼40분 남짓이면 족하다. 등 뒤로 펼쳐지는 충주호의 풍경을 흘낏거리며 속도를 늦춘다 해도 그렇다. # 비포장길에서 만나는 만추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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