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연륙교로 하니되는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

醉月 2018. 11. 14. 19:45

오는 12월 27일 천사대교가 개통되면 암태도는 물론이고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가 모두 육지와 연결된다. 사진은 자은도 분계해수욕장 남쪽의 곶끝 언덕에서 바라본 모습. 앞의 모래밭이 분계해수욕장이고 뒤에 풍력발전기가 늘어선 곳이 양산해변과 내치해변이다.


오는 12월 27일 전남 신안 압해도의 송공항에서 바다 건너 암태도로 건너가는 연륙교 ‘천사대교’가 개통합니다. 놓는 다리는 하나지만, 이 다리가 놓이면서 암태도는 물론이고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까지 육지가 됩니다. 이들 섬을 ‘다이아몬드 제도’라 부릅니다. 그 섬을 찾아갔던 건 다리를 놓기 전에 섬의 명소를 미리 살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막상 섬에 당도하고서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섬에서 봐야 할 것은 다리가 놓인 뒤의 모습이 아니라, 다리가 놓이기 전의 섬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면 서둘러야 합니다. 다리를 놓고 나면 곧 사라질 닫힌 섬의 고즈넉한 정취를 만나고 싶다면 말입니다.


# 비워진 섬을 찾아든 이들의 사연

한반도의 섬들이 죄다 비워졌던 때가 있었다. 당시 섬 정책의 목표는 ‘비워놓는 것’이었다. 섬 거주민들을 모두 본토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워놓는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 얘기다. 공도 정책은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의 침략이 극에 달했을 무렵 시작됐다. 조선 태종이 1417년에 ‘죄인들이 섬으로 도망쳐 숨어버리고 섬 주민들은 세금도 내지 않는다’며 울릉도와 독도를 비울 것을 명령하면서 공도 정책은 본격화됐다. 공도 정책은 고종에 의해 1882년 폐지될 때까지 자그마치 470여 년 동안 유지됐다.

정부의 정책이 그랬다고 해도, 섬에 사람이 아주 안 살았던 건 아니었다. 농사지을 땅 한 뙈기라도 얻기 위해 들어온 이도 있었을 것이고, 탐관오리의 학정과 과중한 세금에 섬으로 도망쳐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었다. 하나같이 기구한 삶이었으리라. 공도 정책이 살아 있을 때도 그랬겠지만, 공도 정책이 폐지되고 난 뒤에도 섬에 들어오기까지는 필시 사연 하나쯤은 있었겠다. 거친 파도의 바다 너머 작은 섬에 살러 들어왔을 때는 말이다.

전남 신안의 ‘다이아몬드 제도’를 이루는 섬 중 하나인 암태도의 장고 마을에는 자그마한 추모비가 하나 있다. 섬으로 들어온 한 사내의 내력과 사연이 새겨진 비석이다. ‘윤성춘 선생 추모비’. 비석의 제목만 보고 학교 선생님이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 추모비 주인공 윤성춘은 전남 함평 출신으로 젊은 시절 방랑생활을 하다가 1920년대에 암태도로 들어왔다. 생년이 1880년 무렵이라니 섬에 들어왔을 때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섬에 정착한 그는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땅을 사서 모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다. 말년에 이른 그는 1958년 11월 전 재산인 자신의 땅을 마을에 기증했다. 밭이 1046평, 논이 799평. 임야는 9480평이나 됐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세상을 떴다.

이웃들에게 전 재산을 건넨 조건 없는 기부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건 주민들이 그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땅을 받은 마을 주민들은 그가 기증한 임야 일부를 마을 공원묘지로 조성해 윤 씨 부부의 묘를 쓰고 60여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는 윤 씨의 제삿날인 4월 25일을 ‘장고리 주민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단다. 마을 한쪽의 작은 추모비에 새긴 것은 기구한 사연의 삶이 작은 섬에다 베풀고 간 것, 그리고 두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걸 기억하는 섬사람들의 마음이다.

다음 달 말이면 개통하는 천사대교로 육지와 이어지는 다이아몬드 제도의 섬에는 사실 눈이 번쩍 뜨이는 대단한 명승이나 흥미진진한 관광지는 없다. 다리 개통을 앞두고 장고 마을의 추모비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던 건, 소박한 섬이 가진 것들이 대부분 소소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가슴을 따스하게 덥히는 사연은 언제나 이렇듯 작은 이야기들이 아닌가.


# 암태도의 소작쟁의 기념비와 매향비

윤성춘이 방랑생활을 마치고 암태도로 막 들어왔을 무렵. 그러니까,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암태도에서는 소작인들이 지주를 상대로 벌인 뜨거운 항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농민 운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암태도 소작쟁의’였다. 암태도 농민들은 식민 수탈정책에 편승한 대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해 쟁의를 벌였다. 암태도 자주들은 소작인들에게 수확량의 70∼80%를 소작료로 낼 것을 요구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추수 거부, 소작료 불납 동맹으로 맞섰다. 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소작인들은 1년여 동안 끈질기게 싸움을 벌였다. 급기야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은 암태도 주민 600명이 목포까지 나가 법원 앞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하기까지 했다. 그제야 지주들은 소작료 인하 등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때의 승리가 마을 입구의 소작인 항쟁기념비로 우뚝 서 있다.

암태도에는 ‘매향비’도 있다. 매향비란 갯가에 묻은 향나무가 1000년 뒤에 떠오르면 그 나무로 향불을 피워 미륵을 부를 수 있다고 믿은 종교의식의 전말을 기록한 비석이다. 매향 의식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혼란기에 크게 유행했다. 불교 경전에 따르면 중생을 구원하러 오는 미륵이 당도하는 건 자그마치 56억7000만 년 뒤의 일. 미륵이 오기까지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을 기다리지 못한 이들은 향나무를 묻었다. 암태도의 매향비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405년에 세운 것이었다. 매향의 구원을 믿는다 해도 미륵의 도래는 400년이나 남았다.

암태도에서 천사대교 개통 얘기를 나누다 눈물까지 보였던 노인이 있었다. 20년 전쯤 태풍으로 고립된 섬에서 아내가 세상을 떴다고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상황이라도 바람이 불거나 안개가 짙어 배가 뜨지 못하면 꼼짝없이 섬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섬사람들에게 육지와 연결한 다리는 숙원 중의 숙원이었다. 그렇다면 암태도 사람들이 향나무를 묻고 기다렸던 것이 곧 개통하는 천사대교가 아닐까. 그렇다면 600년 전 암태도의 매향비가 불러내고자 한 미륵의 현신이 400년 앞서 당도한 것은 아닐까.


연륙교로 이미 육지가 된 압해도와 다이아몬드 제도의 암태도 사이를 잇는 천사대교. 개통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7.22㎞의 천사대교는 전국에서 4번째로 긴 다리다.


# 자은도의 두봉산이 보여주는 섬의 풍경

바다를 건너온 천사대교가 닿는 섬이라 암태도 얘기를 앞세우긴 했지만, 사실 다이아몬드 제도의 섬 중에서 가장 먼저 관광지로 떠오를 만한 섬은 자은도다. 다이아몬드 제도의 4개 섬이 각각 하나의 면(面)을 이루는데, 연륙교 개통을 앞두고 제 섬의 명소만으로 관광지도를 만든 곳은 자은도의 자은면이 유일하다. 그만큼 자은도가 관광 명소도 많고 경관이 훌륭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은면이 관광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은도의 대표적인 명소는 두봉산이다. 두봉산은 다이아몬드 제도의 산 중에서 가장 높고, 신안군 전체로 봐도 가거도의 독실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마을 주민들은 태곳적에 서해의 섬들이 다 바다에 잠겼을 때 봉우리가 물 밖으로 한 말(斗)만큼 나와 있었대서 두봉산이란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두봉산보다 높이가 10m쯤 낮은 이웃 섬 암태도의 승봉산은 물난리 때 봉우리가 ‘한 되’만큼 물 밖으로 나와 되봉산이란 이름으로도 부른다고 전해진다. 암태도의 승봉산도 두봉산 못잖지만 겨룬다면 자은도 두봉산의 압승이다. 다이아몬드 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두봉산이니 그 프리미엄을 넘어설 도리가 없다.

두봉산 정상까지는 구영저수지 옆에서 등산로를 따라 꽃깔봉과 두모산의 긴 능선을 딛고 오르는 길도 있지만, 정상 아래 작은 절집 도명사 옆에서 바로 경사를 차고 오르는 등산로를 택하면 1시간 안쪽에 두봉산 정상을 디딜 수 있다. 등산로 초입은 널찍하게 다듬어져 있고, 산 중턱의 급한 바위 구간에는 로프를 매어 놓았다. 군데군데 철제 계단과 발받침도 든든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정상이 바위로 이뤄진 두봉산의 압권은 바로 거칠 것 없는 조망이다. 남쪽으로는 암태도와 자은도를 잇는 은암대교가 보이고 그 뒤로 팔금도와 안좌도 일대가 보인다. 반대쪽인 북쪽으로는 증도가 손에 잡힐 듯하고 서쪽으로는 멀리 흑산도와 홍도까지 눈에 들어왔다. 섬이 떠 있는 바다는 볕의 방향에 따라서 푸르게 빛나거나 은박지처럼 반짝였다.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자은도 경관도 독특했다. 자은도의 명물은 한겨울에 수확하는 대파. 정강이 높이까지 자란 대파밭은 초록으로 싱그러웠고, 멀칭비닐을 덮고 이제 막 마늘이며 양파를 심은 밭은 은박지처럼 반짝였다. 저 아래 마을의 민가 주변으로 대파밭과 마늘밭, 양파밭이 마치 바느질해 이어 붙인 고운 조각보처럼 펼쳐졌다.


# 분계 해변 모래와 해넘이길의 숲

자은도는 섬 동쪽을 빼놓고는 모두 고운 모래다. 섬의 서쪽과 북쪽, 남쪽 해안은 모두 해수욕장이라고 해도 좋다. 해수욕장의 규모며 숫자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섬 사람들은 하나같이 ‘백길해수욕장’을 최고로 꼽았지만, 아늑하기로는 자은도 서쪽 끝의 분계해수욕장이 단연 최고였다. 게의 집게발 형상의 만(灣) 안쪽에 형성된 분계해수욕장에서는 바다의 낭만이 듬뿍 묻어났다. 해변의 모래 입자는 설탕보다 고왔고, 차로 달려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백사장 뒤편 아름드리 솔숲의 정취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숲에는 자은도의 명물 중 하나인 거꾸로 선 여자의 다리를 닮은 소나무 ‘여인송(女人松)’이 있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얼어 죽은 아내를 묻은 자리에서 자란 나무라는 전설이 깃든 나무다. 자은도 남쪽의 백길해수욕장도 고운 모래의 백사장이 독특한 형상의 기암과 어우러진 해변이다.

분계해수욕장 북쪽에는 서쪽으로 열린 해안을 가진 양산해수욕장과 내치해수욕장, 외기해수욕장이 죽 이어지는데, 이쪽의 해수욕장 규모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광활하다. 어찌나 넓은지 썰물이면 섬 주민들이 차를 몰고 백사장으로 들어와 그물을 칠 정도다. 해수욕장 모래 언덕 뒤에는 스무 개쯤 돼 보이는 초대형 풍력발전기가 늘어서 있다. 이리 좋은 해변을 풍력발전기에 내주다니…. 하지만 섬 곳곳에 해수욕장이 흔전만전이라 그런지 주민들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양산해수욕장 백사장 뒤쪽에는 신안자연휴양림이 있다. 휴양림이라지만 울창한 숲이 있는 건 아니고, 해안 구릉에 나무와 꽃을 심고 정원을 가꾸고 있는 곳이다. 지난 2013년 임시개장한 휴양림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조성 중이어서 그런지 황량하다. 숙박시설도 보수를 위해 문을 닫았다. 다리가 놓이고 방문객이 늘면 속도를 더 낼 수 있을까. 연륙교 개통을 앞두고 휴양림 옆에는 고둥 박물관도 들어서고 있다. 자은도에 갔다면 놓칠 수 없는 게 한운 마을 앞에서 둔장 마을로 이어지는 4.8㎞ 남짓의 해안 숲길이다. 바다를 끼고 울창한 솔숲을 걷는 운치 만점의 길이다. 이 길은 해양수산부가 낸 ‘해안 누리길’ 중에서 송산-한운-둔장-두모 마을을 연결하는 12㎞ 트레킹 코스 ‘자은도 해넘이길’의 일부 구간이다.


자은도 두봉산에서 내려다본 유천 마을 일대의 대파밭과 양파밭, 마늘밭은 겨우내 초록빛을 잃지 않는다. 초록빛 밭과 햇볕에 반짝이는 멀칭비닐이 어우러져 바느질로 이어붙인 조각보처럼 보인다.


# 작은 섬 팔금도와 큰 섬 안좌도

다이아몬드 제도의 4개 섬 중에서 가장 작은 섬이 팔금도다. 규모나 인구도 이웃 섬의 절반쯤이다. 섬 한복판에 고려 말에 세웠다는 3층 석탑이 하나 있지만 막상 가보면 탑의 규모도, 모양도 그저 그렇다. 구태여 가서 보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질 정도다. 팔금도는 적막하게 쇠락해 가고 있는, 아무런 볼 것이 없는 섬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오래된 섬마을의 정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마을의 작은 골목을 걷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애잔함을 느낄 수 있다. 그게 다른 섬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팔금도가 가진 독특한 매력이다.

팔금도 남쪽에 놓인 신안제1교를 건너 들어가는 섬 안좌도는 팔금도와는 반대로 다이아몬드 제도의 섬 중에서 가장 활기가 느껴진다. 면사무소 주변에는 식당도, 마트도, 노래방도 있다. 안좌도는 한국 근대회화의 대표적 인물인 김환기 화백의 고향이다. 하지만 섬에 얽힌 김환기 화백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났던데다 말년에는 외국에서 활동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도 유년시절의 바다는, 그리고 섬은 화가에게 예술의 원천이며 생명이었을 것이었다.

안좌면 읍동리에는 김환기 생가가 있다. 작은 정원을 거느린 생가는 단아하지만, 채워 넣은 것이 없어 좀 쓸쓸하다. 유품 하나도, 그림 한 점도 없다. 생가 주변의 담벼락 등에 김환기 작품을 모사한 그림을 그려 넣긴 했는데, 오래돼 색이 죄다 바래거나 지워졌다. 그거야 오래돼서 그렇다고 치지만, 안좌도에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건 계획만 있을 뿐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시설을 버젓이 알리는 가짜 이정표였다. 읍동리 사거리에는 화살표와 함께 ‘김환기 미술관’이라 적어놓은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정표를 따라가도 미술관을 찾을 수 없다. 이제 막 미술관을 지을 터를 고르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언제 지을지 기약도 없으면서 왼쪽으로 30m만 가면 ‘이영태 명창 소리미술관’이 있다는 안내 비석을 세워두기도 했다. 그러니 섬을 찾은 외지인들은 자주 길을 잃을 수밖에….

안좌도에 갔다면 꼭 디뎌봐야 하는 것이 인근 부속도서인 박지도와 반월도를 잇는 목책교다. 안좌도에서 박지도로, 다시 반월도로 바다를 건너는 1.4㎞ 남짓의 나무다리는 차량은 통행할 수 없고 도보나 자전거만 겨우 다닐 수 있다. 하지만 다목적의 쓸모가 있다. 섬사람들이 건너다니는 육로인 동시에 상수도가 지나는 수로이고, 관광객들에게는 바다와 갯벌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시설이다.

섬으로 건너간 길은 핏줄과 같다. 새로 놓은 다리는 육지와 암태도를 잇지만, 길은 암태도로 건너가 다이아몬드 제도의 섬과 그 섬이 거느린 다른 섬으로 실핏줄처럼 이어진다. 이렇게 바다를 건너간 길에 의해 먼바다의 섬들이 하나둘 육지가 되고 있다. 그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섬사람들에게는 말이다.


■ 여행정보

가는 길 오는 12월 27일 천사대교가 놓이고 나면 목포에서 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로 차를 타고 단번에 건너갈 수 있지만, 지금은 압해도 송공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 송공항에서 뜨는 여객선은 암태도와 팔금도 사이를 운항한다. 네 섬을 다 돌아보겠다면 섬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여객선 출항 간격은 1시간을 넘지 않는다. 몸만 간다면 송공항에서 바로 배를 탈 수 있지만, 차는 금세 만원이 돼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암태도까지 승용 차량 요금이 운전자 포함 편도 2만1600원이다. 네 섬이 다리로 이어져 있어 섬 안에서의 이동 거리가 제법 된다.

묵을 곳·먹을 것 자은도에서는 숙소로 펜션을 추천한다. 우체국 인근의 밀알촌(061-271-4200·전남 신안군 자은면 구영2길 37-1)은 한옥 펜션으로 운치가 있다. 자은도에서 양파농사를 짓는 농장에서 운영하는 나무늘보펜션(010-9132-5459)은 바다체험 등을 주선해 주기도 한다. 자은도에서 암태도로 넘어가는 은암대교 근처에는 자은도 힐링펜션(010-5234-3324)도 있다. 자은도 분계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분계정숙민박펜션(061-275-0234)의 방은 소박하지만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위치가 훌륭하다. 자은도에 썬무인호텔(061-271-7740)이 있다.

다이아몬드 제도의 네 곳 섬에는 아쉽게도 이렇다 할 식당이 없다. 자은도는 대파 농사만으로도 연간 수익 1억 원 이상을 올리는 주민들이 적잖은 부자 섬이라 관광객에게는 관심이 별로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