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칠곡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醉月 2018. 11. 1. 20:41

통일신라시대 세워졌다는 송림사 오층전탑이 푸른 어둠 속에서 조명을 받아 또렷하게 떠올랐다. 평지형 절집인 송림사는 소나무 숲으로 가득 찼다던 옛날의 위세는 잃었지만, 전탑만큼은 흐트러짐 없이 1000년을 제자리에 서서 사람들의 기원을 받아냈을 것이었다. 치열했던 전쟁이 지나간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 기도가 바쳐졌을까.



바야흐로 ‘평화의 시대’입니다. 반목과 저주에서 이해와 화해로 우리는 건너갈 수 있을까요. 자꾸만 마음 한쪽이 불안해지는 건 경험 때문이겠지요. 지금으로부터 68년 전에 가장 치열했던 전쟁이 지나갔던 경북 칠곡을 찾았습니다. 평화의 시대에 굳이 전쟁의 시간을 찾아갔던 것은, 전쟁의 비극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 비로소 평화는 더욱 빛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처참한 전쟁의 기억이 평화의 소중함과 당위를 일깨워준다는 것이지요. 그곳에서 열여섯 나이의 학도병이 남긴 어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읽었습니다. 명령을 어기고 흥남부두에서 피란민 1만4000명의 생명을 구했던, 그러고서 훗날 수도원의 수사가 됐다는 푸른 눈의 미국 해군 선장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칠곡의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다가 칠곡의 절집 송림사에 들렀을 때는 시간이 늦어져 푸른 어둠이 내린 뒤였습니다. 송림사 경내의 불 밝힌 탑 앞에서 두 손을 모았습니다. 사람을 죽였다는 자책과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그리움을 담아 꾹꾹 편지를 눌러쓴 학도병. 영하 20도의 추위에 허리춤까지 차는 물속으로 들어와 태워달라던 피란민을 외면하지 않았던 미 해군 선장. 그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 뜨거운 전쟁이 이곳을 지나갔다

경북 칠곡은 뜨거운 전쟁이 지나간 땅이다. 가장 치열했던, 그리고 절대 질 수 없었던 전투가 이곳에서 있었다. 6·25전쟁을 도발한 북한군은 거침없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북한군이 대구 인근까지 접근하자 월턴 워커 한미연합군사령관은 낙동강 방어선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선포했다. 이른바 ‘워커 라인’이었다. 여기가 무너지면 그다음은 대구와 부산이었다. 저지선을 지키지 못하면 패전은 불을 보듯 뻔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칠곡의 다부동 일대에서 있었다. 전술적 요충지인 다부동을 놓고 북한군은 2만1500여 명의 병력과 20여 대의 전차, 각종 화기 670문으로 공격해왔다.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학도병 500명을 포함해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로 북한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삼 분의 일에 불과한 형편없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으리라. 밀고 밀리는 전투는 국군이 진지를 탈환하기까지 55일이나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다부동에는 젊은이들의 피가 뿌려졌다. 북한군 1만7500명과 국군 1만 명이 이 자리에서 죽었다. 다부동은 젊은이들의 소중한 목숨이 불쏘시개가 돼 활활 타오른 ‘전쟁의 아궁이’였던 셈이었다.

다부동 전투 중에서도 산 중턱부터 정상까지가 가파른 암봉으로 이뤄진 유학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장 처참했다. 학이 노닌다는 뜻의 ‘유학(遊鶴)’이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유학산은 비린 쇳내와 피 냄새로 가득했을 것이었다. 가파른 바위 봉우리가 어른 키의 50배가 된다고 해서 ‘쉰질바위’라 불리는 곳 위에는 정자 유학정(遊鶴亭)이, 그 아래에는 절집 도봉사가 있다. 마침 부슬부슬 비가 뿌리는 날이었는데 쉰질바위 암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절집 주변에 안개가 짙었다.





지난 1928년 지어진 왜관성당. 함경남도에 있던 성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수도원 성당으로 쓰였다.



# 고뇌와 그리움… 어린 학도병의 편지

▲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세워진 동상.
칠곡에는 호국평화기념관이 있다. 548억 원을 들여 2015년 개관한 국내 최대규모의 전쟁기념관이다. 전쟁박물관이라면 딱딱한 교훈으로 가득한 판에 박은 전시공간을 생각하기 쉬운데, 뜻밖에도 구성도 다양하고 전시방식도 흥미롭다. 전쟁장면을 입체영상으로 구현한 곳이나 게임 시뮬레이션 방식을 도입한 공간은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였다.


호국평화기념관에서 발길을 오래 붙잡은 건 전투 중 전사한 학도병의 편지였다. 육군 제3군단 소속 학도병 동성중 3학년 이우근. 그가 쓴 편지는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수류탄을 던져넣어 적을 죽인 뒤 두려움에 떨며 고뇌하는 마음과 가족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편지에는 선명하고 또렷하게 묻어있다. “전쟁이 끝나면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쓴 그는, 그 뒤에다 “내복을 빨아 입으며 문득 수의를 떠올렸다”고 고백했다. 그러곤 살아서 어머니에게 돌아가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이가 시린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다고 적었다. 그 꿈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이제 막 열여섯 나이의 학도병은 그러나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10일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사망했다. 보내지 못한 이 편지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됐다. 그가 죽은 전투에서 학도병 71명 중 48명이 전사했다. 글로 적지만 않았지, 이우근보다 더 어린 나이의 기막힌 죽음이 왜 없었을까.


# 50년 만에 가족에게 돌아온 병사


호국평화기념관에는 국방부 유해발굴사업 첫 발굴지인 칠곡 포남리의 369고지에서 발굴된 전사자 최승갑 하사의 유품도 전시돼 있다. 1949년 자원입대한 그는 국군 제1사단 소속으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투입됐다가 개인호에서 총에 맞아 전사했다. 시신을 찾지 못하고 전사자 처리가 됐던 그는 2000년 4월 유해발굴 사업으로 50년 만에 극적으로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그가 남긴 유품은 뜻밖에도 삼각자였다. 발굴된 유해의 신원도 삼각자에 새겨진 이름에서 나왔다. 그는 왜 그걸 죽는 순간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훗날 이 이야기는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됐단다.

호국평화기념관에다 대면 초라하고 옹색한 듯 보이지만, 유학산 기슭의 다부동 전적기념관도 들러보자. 1981년 지어진 전적기념관은 호국평화기념관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칠곡에서 전쟁의 참상과 생명을 바친 군인들을 추념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호국평화기념관에 앞서는 건 ‘장소성’이다. 기념관에서는 ‘바로 이곳’에서 다부동 전투가 있었다는 현장감이 느껴진다. 여러 개의 비석과 함께 장갑차며 대포 등을 전시해놓은 전적기념관 외부공간에 시인 조지훈의 종군시 ‘다부원에서’가 새겨져 있다. 다부동을 그때는 다부원으로 불렀던 모양이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이렇다.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산 사람들도 모두 신산했던 시절이었다.


미군 부대 담벼락에 새겨진 전쟁 조형물.

6·25전쟁 중 낙동강 전투에서 미군이 사용했던 곡사포.




# 소박해서 아름답다… 왜관수도원

▲ 왜관수도원 대성전 입구에 세워진 베네딕도 성인 조각상.
군 단위 지역이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군청이 있는 곳이 중심이다. 그런데 칠곡군청은 ‘칠곡읍’이 아니라 ‘왜관읍’에 있다. 칠곡군 안에 칠곡읍이 없어서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없는’ 게 아니라 ‘없어졌다’는 게 맞겠다. 칠곡읍은 1980년 칠곡동이 됐다가 1995년 대구가 광역시로 확대되면서 대구 북구에 편입됐다. 칠곡군과 헷갈려서 그랬는지, 편입된 이후 칠곡동은 전혀 다른 지명으로 바뀌었다.


군청이 있는 왜관읍은 유서가 깊다. 왜관이란 본래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일본 사신이나 상인을 통제하려고 설치해 관리하던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다. 부산포, 제포, 염포 등에 대표적인 왜관이 있었는데, 여기 칠곡의 왜관은 낙동강 뱃길의 중간숙소 역할을 한 소규모 왜관이었다. 일대 낙동강변에 줄잡아 10여 곳의 왜관이 있었다지만, 지금까지 지명이 그대로 내려오는 건 칠곡의 왜관이 유일하다.

왜관에는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있다. 베네딕도 성인의 엄격한 수도규칙에 따라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기도하고 노동하는 수도원이다. 본래 수도원은 함경남도 덕원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피란 내려와 여기 칠곡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수도원이 여기 자리를 잡은 연유까지도 ‘전쟁 탓’이다. 그러고 보니 칠곡에는 ‘전쟁 탓’ 아닌 게 별로 없다.

아무튼 당시 수도원은 독일인 신부와 수사가 이끌었는데, 독일인의 기질이 그런지 부족한 게 있으면 뚝딱 공장을 만들어 해결했다. 수도원 안에 작업장이 여럿인 건 이런 이유다. 성당의 가구나 제대, 의자, 탁자 등을 만드는 목공예실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드는 유리공예실, 독일식 소시지를 만드는 소시지 방, 출판사와 인쇄소, 인근에 농사를 짓는 논과 밭도 있다. 중·고교와 양로원도 운영한다.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거의 자급자족이다. 왜관수도원 건물은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수도원의 생활과 닮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성당 건물도, 조경도 정갈하고 경건하다.


# 1만4000명의 목숨 이야기

▲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전시실의 6·25전쟁 유해발굴작업 조형물.
다시 ‘전쟁’ 얘기로 되돌아가자. 왜관수도원은 2001년 미국 뉴저지의 뉴턴 세인트폴 수도원을 인수했다. 이 미국 수도원은 6·25전쟁의 와중에 왜관수도원을 아낌없이 지원했을 정도로 위세가 컸으나 26년 동안 수도원을 이끌어 갈 수도사를 배출하지 못해 급기야 왜관수도원에 운영을 부탁한 것이었다. 7명의 왜관수도원 신부와 수사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알려졌다.


흥남철수. 1950년 12월 22일. 그날 기온이 영하 20도라고 했다. 흥남부두에는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발을 더 디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무슨 방한복이나 방한화가 있었겠는가. 추위는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을 것이었다. 불과 10㎞도 안 되는 곳에서 중공군이 폭격을 하며 치고 내려오는 와중이었으니 목숨을 구하자면 다른 수가 있었을까.

흥남부두에는 미군 소속의 7600t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정박 중이었다. 퇴각하는 미국해군에 연료를 공급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군은 빠른 퇴각을 종용했다. 그러나 부두에는 살려달라고, 제발 배를 태워달라고 애원하는 피란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고심 끝에 피란민들을 태우라고 지시했다. 사람을 태우려 불을 밝혔다가는 언제 어디서 폭격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상황. 설사 피란민을 태운다 해도 열두 명 정원인 화물선에는 음식은커녕 마실 물도, 화장실도, 의약품도 없었다. 사람을 태울 사다리도 없어 배 옆으로 그물을 내려 대신했다. 배에는 기뢰탐지기도 없었고,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피란민을 통제할 만한 무기 하나 없었다. 12명 정원의 화물선에 자그마치 피란민 1만4000명이 탔다.

그야말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사흘간의 항해 끝에 배는 거제에 도착했다. 배에 탄 사람이 다 내리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배에 탄 사람 숫자보다 내린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항해 도중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피란민들을 다 내려놓고서야 선장은 알았다고 했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음을…. 훗날 선장은 그날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메시지가 저에게 전해옵니다.”

라루 선장은 고향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 종교에 귀의했고, 뉴턴 세인트폴 수도원에 입회했다. 왜관수도원이 인수한 미국의 그 수도원 말이다. 이런 드라마틱한 인연이라니…. 라루 선장은 2001년 10월 1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리너스 수사라는 이름으로 뉴턴 세인트폴 수도원에서 평생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그날 피란민을 태우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분명한 건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없었으리란 것이다.


# 송림사의 탑에 얹은 기원

▲ 칠곡의 가산산성 진남문. 산성 안의 숲길이 걷기 좋다.
칠곡에는 가산산성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왕의 명령으로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세워진 성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전쟁’이 빠지지 않는다. 가산산성은 제법 높은 자리에 있지만 차로 남문 바로 아래까지 올라갈 수 있어 쉽게 둘러볼 수 있다. 성곽이 이어진 단풍 물든 숲길을 따라 걸어도 좋고, 남문에 올라서 일대를 내려다보아도 좋다. 달이 차오른 때가 아니어서 미처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달빛이 밝은 날 가산산성 일대의 정취가 훌륭하단다. 보름날 밤이면 해원정사 입구부터 가산바위까지 왕복 10.6㎞ 구간을 걷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도 했다.


칠곡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절집 송림사로 삼는 것이 좋겠다. 평지에 들어선 고즈넉한 사찰인 송림사는 평화로 가득하다. 송림사를 가장 특별하게 하는 건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 전탑이다. 장식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풍모의 전탑은 문외한이라도 그 가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나다. 특히 어둠이 내린 뒤에 야간 조명을 받으면 몽환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문화재청이 60년 전 기단부 해체 복원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된 사실이 확인됐다는 이유로 국보승격 신청을 반려하긴 했지만, 그거야 고고학의 이야기고, 눈으로 보기에 송림사 전탑은 그야말로 국보 이상이다.

전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금판을 오려 만든 금동제 사리탑과 녹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 옥과 진주가 붙어있는 유리잔이 나왔다. 모두 보물로 지정된 출토품은 대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전탑 3층에서는 나무 뚜껑으로 덮인 돌 상자 안에서 발원문으로 추정되는 종이가 발견됐는데, 해체할 때 햇빛을 보자 모두 산화됐다고 전한다. 옛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탑에다 무슨 기원을 담아두었을까. 그리고 그 소원은 이뤄졌을까. 전탑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고려 때 몽골의 침입도, 조선 때 임진왜란도 허물지 못한 송림사 전탑 위에다 치열했던 전쟁의 와중에 목숨을 잃은 젊음에 대한 위로와 평화의 소망을 포개어 얹어 두었다.



■ 여행정보


칠곡 가는 길 = 수도권에서 출발하자면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상주분기점에서 상주~영천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영천 방면으로 향한다. 이어 군위분기점에서 또 중앙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가다 다부 IC로 나가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바로 근처에 있다.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은 낙동강변에 있다. 칠곡군청에서 3㎞ 남짓으로 차로 5분가량 걸린다. 송림사는 대구 북쪽 팔공산 아래 있다. 이쪽에 가산산성이 있어 함께 둘러보는 코스로 잡는 게 좋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칠곡의 유학산 자락에는 한국산림복지진흥원에서 운영하는 국립 칠곡숲체원이 있다. 저수지를 끼고 있는 휴양림 겸 숙소다. 숲체원에는 산책로가 특히 잘 돼 있다. 특히 산벚나무 사이에 수변 덱을 놓아 만든 길의 분위기가 좋다. 미리 식사를 신청하면 뷔페식으로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충실하다. 산림교육프로그램만 22가지에 이르고, 산림치유프로그램도 5가지다. 10명 이상이 들어가는 단체동과 2인실, 5인실로 나뉘는 가족동이 있다. 최대 3명까지 숙박할 수 있는 2인실 요금은 주중 3만 원이고 주말은 5만 원이다.

조선시대 영남의 3대 양반촌 중 하나였다는 칠곡 매원마을에는 고택체험을 할 수 있는 한옥 숙소가 여럿 있다. 삼천석 부잣집이었다는 ‘풍각댁’(010-9375-4308)과 옛 서당이었던 ‘서당’(010-2930-0799), 광주 이씨 문중 재실인 ‘관수재’(010-2437-7022), 후손들이 충신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아산재’(010-2875-6800) 등을 추천한다. 팔공산 아래 동명면 기성리 쪽에는 모텔들이 몰려있다.

칠곡의 맛집은 주로 팔공산 아래 몰려있다. 팔공산으로 드라이브나 나들이 온 대구 주민들을 겨냥한 음식점들이다. 약선한정식을 내는 해밥달밥(054-975-8775), 오리불고기와 호박 안에 오리고기를 넣고 쪄내는 호박오리 등을 내는 팔공유황오리(054-975-8052)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왜관에는 미군 부대가 있어 부대 주변에 미군을 상대로 한 햄버거 집들이 많다. 한미식당( 054-974-0390)이 그중 이름난 곳이다. 고기에 스모크햄과 치즈를 넣고 말아 튀긴 코던 블루가 대표메뉴. 돈가스를 빵 사이에 넣은 시내소, 두툼한 패티의 수제 햄버거 등을 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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