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방어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칠곡의 다부동 일대에서 있었다. 전술적 요충지인 다부동을 놓고 북한군은 2만1500여 명의 병력과 20여 대의 전차, 각종 화기 670문으로 공격해왔다.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학도병 500명을 포함해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로 북한군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삼 분의 일에 불과한 형편없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으리라. 밀고 밀리는 전투는 국군이 진지를 탈환하기까지 55일이나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다부동에는 젊은이들의 피가 뿌려졌다. 북한군 1만7500명과 국군 1만 명이 이 자리에서 죽었다. 다부동은 젊은이들의 소중한 목숨이 불쏘시개가 돼 활활 타오른 ‘전쟁의 아궁이’였던 셈이었다.
호국평화기념관에서 발길을 오래 붙잡은 건 전투 중 전사한 학도병의 편지였다. 육군 제3군단 소속 학도병 동성중 3학년 이우근. 그가 쓴 편지는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수류탄을 던져넣어 적을 죽인 뒤 두려움에 떨며 고뇌하는 마음과 가족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편지에는 선명하고 또렷하게 묻어있다. “전쟁이 끝나면 어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쓴 그는, 그 뒤에다 “내복을 빨아 입으며 문득 수의를 떠올렸다”고 고백했다. 그러곤 살아서 어머니에게 돌아가 상추쌈을 게걸스럽게 먹고, 이가 시린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다고 적었다. 그 꿈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이제 막 열여섯 나이의 학도병은 그러나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10일 포항여중 앞 전투에서 사망했다. 보내지 못한 이 편지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됐다. 그가 죽은 전투에서 학도병 71명 중 48명이 전사했다. 글로 적지만 않았지, 이우근보다 더 어린 나이의 기막힌 죽음이 왜 없었을까. 호국평화기념관에다 대면 초라하고 옹색한 듯 보이지만, 유학산 기슭의 다부동 전적기념관도 들러보자. 1981년 지어진 전적기념관은 호국평화기념관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칠곡에서 전쟁의 참상과 생명을 바친 군인들을 추념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호국평화기념관에 앞서는 건 ‘장소성’이다. 기념관에서는 ‘바로 이곳’에서 다부동 전투가 있었다는 현장감이 느껴진다. 여러 개의 비석과 함께 장갑차며 대포 등을 전시해놓은 전적기념관 외부공간에 시인 조지훈의 종군시 ‘다부원에서’가 새겨져 있다. 다부동을 그때는 다부원으로 불렀던 모양이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 이렇다.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산 사람들도 모두 신산했던 시절이었다.
군청이 있는 왜관읍은 유서가 깊다. 왜관이란 본래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일본 사신이나 상인을 통제하려고 설치해 관리하던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다. 부산포, 제포, 염포 등에 대표적인 왜관이 있었는데, 여기 칠곡의 왜관은 낙동강 뱃길의 중간숙소 역할을 한 소규모 왜관이었다. 일대 낙동강변에 줄잡아 10여 곳의 왜관이 있었다지만, 지금까지 지명이 그대로 내려오는 건 칠곡의 왜관이 유일하다. 왜관에는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있다. 베네딕도 성인의 엄격한 수도규칙에 따라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기도하고 노동하는 수도원이다. 본래 수도원은 함경남도 덕원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피란 내려와 여기 칠곡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수도원이 여기 자리를 잡은 연유까지도 ‘전쟁 탓’이다. 그러고 보니 칠곡에는 ‘전쟁 탓’ 아닌 게 별로 없다. 아무튼 당시 수도원은 독일인 신부와 수사가 이끌었는데, 독일인의 기질이 그런지 부족한 게 있으면 뚝딱 공장을 만들어 해결했다. 수도원 안에 작업장이 여럿인 건 이런 이유다. 성당의 가구나 제대, 의자, 탁자 등을 만드는 목공예실과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드는 유리공예실, 독일식 소시지를 만드는 소시지 방, 출판사와 인쇄소, 인근에 농사를 짓는 논과 밭도 있다. 중·고교와 양로원도 운영한다.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거의 자급자족이다. 왜관수도원 건물은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수도원의 생활과 닮았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성당 건물도, 조경도 정갈하고 경건하다.
흥남철수. 1950년 12월 22일. 그날 기온이 영하 20도라고 했다. 흥남부두에는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발을 더 디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무슨 방한복이나 방한화가 있었겠는가. 추위는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을 것이었다. 불과 10㎞도 안 되는 곳에서 중공군이 폭격을 하며 치고 내려오는 와중이었으니 목숨을 구하자면 다른 수가 있었을까. 흥남부두에는 미군 소속의 7600t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정박 중이었다. 퇴각하는 미국해군에 연료를 공급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군은 빠른 퇴각을 종용했다. 그러나 부두에는 살려달라고, 제발 배를 태워달라고 애원하는 피란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고심 끝에 피란민들을 태우라고 지시했다. 사람을 태우려 불을 밝혔다가는 언제 어디서 폭격이 날아올지도 모르는 상황. 설사 피란민을 태운다 해도 열두 명 정원인 화물선에는 음식은커녕 마실 물도, 화장실도, 의약품도 없었다. 사람을 태울 사다리도 없어 배 옆으로 그물을 내려 대신했다. 배에는 기뢰탐지기도 없었고,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피란민을 통제할 만한 무기 하나 없었다. 12명 정원의 화물선에 자그마치 피란민 1만4000명이 탔다. 그야말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사흘간의 항해 끝에 배는 거제에 도착했다. 배에 탄 사람이 다 내리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배에 탄 사람 숫자보다 내린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항해 도중 다섯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피란민들을 다 내려놓고서야 선장은 알았다고 했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음을…. 훗날 선장은 그날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메시지가 저에게 전해옵니다.” 라루 선장은 고향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 종교에 귀의했고, 뉴턴 세인트폴 수도원에 입회했다. 왜관수도원이 인수한 미국의 그 수도원 말이다. 이런 드라마틱한 인연이라니…. 라루 선장은 2001년 10월 1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리너스 수사라는 이름으로 뉴턴 세인트폴 수도원에서 평생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그날 피란민을 태우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분명한 건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없었으리란 것이다.
칠곡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절집 송림사로 삼는 것이 좋겠다. 평지에 들어선 고즈넉한 사찰인 송림사는 평화로 가득하다. 송림사를 가장 특별하게 하는 건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 전탑이다. 장식적이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풍모의 전탑은 문외한이라도 그 가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나다. 특히 어둠이 내린 뒤에 야간 조명을 받으면 몽환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문화재청이 60년 전 기단부 해체 복원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된 사실이 확인됐다는 이유로 국보승격 신청을 반려하긴 했지만, 그거야 고고학의 이야기고, 눈으로 보기에 송림사 전탑은 그야말로 국보 이상이다. 전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금판을 오려 만든 금동제 사리탑과 녹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 옥과 진주가 붙어있는 유리잔이 나왔다. 모두 보물로 지정된 출토품은 대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전탑 3층에서는 나무 뚜껑으로 덮인 돌 상자 안에서 발원문으로 추정되는 종이가 발견됐는데, 해체할 때 햇빛을 보자 모두 산화됐다고 전한다. 옛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탑에다 무슨 기원을 담아두었을까. 그리고 그 소원은 이뤄졌을까. 전탑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고려 때 몽골의 침입도, 조선 때 임진왜란도 허물지 못한 송림사 전탑 위에다 치열했던 전쟁의 와중에 목숨을 잃은 젊음에 대한 위로와 평화의 소망을 포개어 얹어 두었다. 칠곡 가는 길 = 수도권에서 출발하자면 영동고속도로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다시 상주분기점에서 상주~영천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영천 방면으로 향한다. 이어 군위분기점에서 또 중앙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가다 다부 IC로 나가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바로 근처에 있다.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은 낙동강변에 있다. 칠곡군청에서 3㎞ 남짓으로 차로 5분가량 걸린다. 송림사는 대구 북쪽 팔공산 아래 있다. 이쪽에 가산산성이 있어 함께 둘러보는 코스로 잡는 게 좋다. 조선시대 영남의 3대 양반촌 중 하나였다는 칠곡 매원마을에는 고택체험을 할 수 있는 한옥 숙소가 여럿 있다. 삼천석 부잣집이었다는 ‘풍각댁’(010-9375-4308)과 옛 서당이었던 ‘서당’(010-2930-0799), 광주 이씨 문중 재실인 ‘관수재’(010-2437-7022), 후손들이 충신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 ‘아산재’(010-2875-6800) 등을 추천한다. 팔공산 아래 동명면 기성리 쪽에는 모텔들이 몰려있다. 칠곡의 맛집은 주로 팔공산 아래 몰려있다. 팔공산으로 드라이브나 나들이 온 대구 주민들을 겨냥한 음식점들이다. 약선한정식을 내는 해밥달밥(054-975-8775), 오리불고기와 호박 안에 오리고기를 넣고 쪄내는 호박오리 등을 내는 팔공유황오리(054-975-8052)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왜관에는 미군 부대가 있어 부대 주변에 미군을 상대로 한 햄버거 집들이 많다. 한미식당( 054-974-0390)이 그중 이름난 곳이다. 고기에 스모크햄과 치즈를 넣고 말아 튀긴 코던 블루가 대표메뉴. 돈가스를 빵 사이에 넣은 시내소, 두툼한 패티의 수제 햄버거 등을 내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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