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晩秋에 더 빛나는 광양

醉月 2018. 11. 8. 19:45

단풍의 물결이 어느새 남도 끝에 당도했다. 단풍을 두른 전남 광양 백운산 중턱의 절집 백운사. 본디 하백운암이란 암자였는데 지금은 어엿한 사찰이다. 백운사 위쪽으로 지금은 사라진 중백운암 암자 터가 있고, 그 위에 상백운암이 있다. 상백운암은 신리말의 선승 도선국사 이래 내로라하는 고승들이 수행했다는 전설 같은 암자다.


# 남녘의 백운산, 가을 단풍이 물들다

전남 광양은 이른 봄날의 여행지다. 섬진강 변 다압마을의 구릉에 매화가 구름처럼 피어날 때면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섬진강 매화가 봄의 첫 기운을 알리는 때, 그때만큼은 광양이 전국에서 가장 뜨거운 여행지가 된다. 그러나 딱 그때뿐이다. 1년에 짧으면 2주, 길어도 3주다. 그러고는 다른 계절에는 관광객들이 광양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간혹 순천이나 여수, 남해 등을 오가는 이들이 슬쩍 들러서는 ‘광양 불고기’를 맛보고 가는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광양은 그렇게 보아야 할 곳이 아니다. 광양에서 느껴지는 건 맑고 밝은 기운이다. 지명부터가 그렇다. ‘빛 광(光)’에 ‘볕 양(陽)’ 자. ‘환한 빛과 따뜻한 볕’이다. 신라 때 부르던 지명인 희양(晞陽)도 ‘마를 희(晞)’ 자를 쓰니 희양도 광양도 다 ‘맑고 밝은 곳’이란 의미다. 지세나 기운이 이와 같지 않았다면, 광양이 1000년이 훨씬 넘도록 이런 지명을 지켜올 수 있었을까.

광양의 맑고 밝은 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백운산이다. 해발 1222m의 백운산이야말로 광양의 역사·문화의 중심이다. 광양이 자랑해 마지않는 신라말의 선승 도선국사가 이 산에서 불법을 닦았다. 풍수지리에 능한 도선국사가 백운산으로 들어와 수년 동안 수행하며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마침 남녘으로 밀려 내려온 단풍이 광양 땅에 이제 막 당도했다. 노랗고 붉은 단풍이 백운산을 울긋불긋 물들이고 있으니 지금이 백운산으로 가는 가장 아름다운 때다. 백운산은 크고 깊은 산답게 등산로도 여럿이다. 지도 위에 굵은 선으로 그려진 등산코스만 여덟 개에 달한다. 부챗살 같은 능선의 산행 들머리까지 보태면 스무 군데가 족히 넘는다.

그중에서 권할 만한 코스가 백운산 남쪽 자락인 옥룡면 용소 쪽에서 오르는 길이다. 옥룡면 용소에서 출발해 백운사와 상백운암을 거쳐 백운산 정상에 오르게 되는데 3시간 남짓의 만만찮은 코스다. 이게 힘들다면 백운사까지 차로 가서 거기서 1시간 30분 정도 올라 정상을 밟는 방법도 있다. 더 짧게는 백운사에서 40분 남짓을 걸어 암자 상백운암까지만 다녀온대도 좋겠다.


# 천하의 길지에 들어선 상백운암

옥룡면 용소에서 출발해 백운산을 오른다면 순서대로 하백운암, 중백운암, 상백운암을 지나게 된다. 하백운암은 백운산 중턱쯤에, 상백운암은 백운산 턱밑쯤에 있다. 중백운암 자리는 하백운암과 상백운암의 딱 중간쯤이다. 세 암자가 다 남아 있는 건 아니고, 하백운담은 암자에서 사찰로 승격해 ‘백운사’로 이름을 바꿔 단 지 오래고, 중백운암은 거기 암자가 있었음을 표시해둔 돌탑으로만 남아 있다.

하백운암, 그러니까 백운사까지는 시멘트 도로가 놓여 있다. 산길이 가파르고, 구비도 급하지만 조심조심 오르면 절집 마당까지 차로 들어갈 수 있다. ‘아래 하(下)’ 자를 써서 하백운암이라 불렀다지만 백운사는 해발 900m에 있다. 산 ‘아래’가 아닌 산 ‘어깨’쯤에 있는 셈이다. 산중에 있되 앞으로는 저 멀리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다. 절집은 조망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거의 하루 종일 맑은 볕이 환하게 들어 기분이 다 밝아진다.

하백운암을 지나면 이내 시멘트 포장도로는 끝나고, 산길이 이어진다. 등산로는 제법 가파르다. 숨을 몰아쉬며 비탈진 산길을 걷다 보면 이내 중백운암 자리에 쌓아놓은 돌탑을 만나게 된다. 이쯤의 높이부터는 단풍이 이미 져서 낙엽으로 발밑에서 서걱거린다. 중백운암 자리에서 상백운암까지는 금방이다.

상백운암이 들어선 자리는 봉황 둥지 형상의 천하의 길지라고 전해진다. 하백운암에 머물며 3년 기도를 마친 도선국사는 상백운암 터를 발견하곤 기쁨에 겨워 가사 장삼을 갖춰 입고 7일 동안 춤을 췄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모르고 본다 해도 상백운암이 길지라는 건 따스한 볕과 탁 트인 조망으로 금방 느껴졌다.

상백운암에서는 암자 뒤쪽에 우뚝 일어선 바위들부터 범상치 않아 보였다. 파란색으로 칠한 창문을 단 낡은 건물도 인상적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암자로 숨어든 반란군들에 의해 암자가 다 불태워져 폐사된 뒤에 지었던 임시 법당 건물이라고 했다. 낡고 법당 옆에는 근래 새로 지은 번듯한 법당이 있었는데, 낡고 초라한 오래된 법당 건물로만 자꾸 눈이 갔다. 마침 스님이 출타 중이어서 암자에는 기척이 없고, 가을바람에 간혹 생각난 듯이 법당 처마의 풍경만 뎅그렁거렸다.


전남 광양의 구봉산전망대는 사방 어느 쪽으로도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 한자리에서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다 볼 수 있다. 구봉산전망대를 찾은 주민들이 여자만(彎) 뒤쪽으로 지는 낙조를 바라보고 있다.




# 동백숲에 갇힌 옥룡사와 운암사

도선국사는 상백운암에서 3년을 더 머물고는 종이학을 날려 그 학이 내려앉은 백계산 아래 절집 옥룡사를 지어 산문을 나가지 않고 35년간 머물렀다고 전한다. 옥룡사는 지금 없다. 절집은 스러지고 남은 절터에는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심었다는 7000그루의 동백나무만 가득하다. 다른 곳의 동백은 겨울부터 피고 지지만 여기 옥룡사 동백은 이른 봄이 절정이다. 봄의 기운이 남녘에 막 당도할 무렵에 섬진강 변의 매화와 옥룡사 동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핀다. 의외로 동백이 매화보다 늦어서 섬진강의 매화가 다 져갈 때쯤에야 옥룡사 동백은 절정에 이른다.

옥룡사 동백이 섬진강 매화보다 덜 알려진 건 개화 시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동백과 매화가 같이 피어난다 해도, 이른 봄의 정취를 만나러 광양을 찾은 관광객들은 옥룡사 동백보다 섬진강 매화를 찾는다는 얘기다. 꽃이 있어도 그럴진대, 꽃 없는 가을에 옥룡사를 권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볕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동백이파리 때문이다. 날이 차가워지면 동백 이파리는 윤기가 더해지고 더 환하게 반짝인다. 동백꽃의 붉은 기운이 없어도, 초록의 청량함만으로도 이즈음의 동백숲은 매력적이다.

옥룡사지에서 불과 몇 걸음의 거리에 절집 운암사가 있다. 담도 없이 전각 몇 채 세운 게 고작인 자그마한 절집이다. 그럼에도 이 절집이 작지 않게 느껴지는 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황동약사여래불 때문이다. 마당의 불상은 법당으로 쓰는 10m의 좌대 위에 30m의 높이로 우뚝 서 있다. 늙고 병든 것들을 구원하는 약사여래에 바쳐지는 기도가 늘 간절해서일까. 불상이 이리도 크고 장중하다.

운암사는 옥룡사지를 등 뒤로 두고 있다. 절집 안쪽의 산신각 뒤쪽이 옥룡사 동백숲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뎅겅뎅겅 모가지째 떨어지는 동백꽃들이 낭자하게 숲에 깔릴 때라면 더 좋았겠지만, 초록으로 반짝이는 동백 이파리만으로도 이즈음의 숲은 특별하다. 옥룡사지에는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놓여 있다. 운암사 길과 옥룡사지 길, 도선국사 참선 길, 백계산 가는 길이 열십자를 그린다. 운암사 쪽에는 도선국사와 도선의 제자인 통진대사 부도탑이 있다. 탑은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2002년에 복원한 것이다.


광양 백운산 정상 턱밑의 암자 상백운암. ‘천하의 길지’에 들어섰다는 암자에는 도선국사를 비롯한 고승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사진 오른쪽은 광양제철소의 쇠로 만든 구봉산전망대의 봉화대.


# 백운산에 몸을 숨긴 사람들

다시 백운산 얘기로 돌아가자. 백운산은 높고 험한 데다 품도 제법 커서 몸을 숨기는 데 좋았다. 여순사건의 반군들이 앞다퉈 백운산으로 숨어들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반군들이 진압군 15연대 연대장 최남근을 생포해 가장 먼저 끌고 간 곳도 백운산의 하백운암이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1월에는 화순 백아산에 있던 전남도당과 유격사령부가 모두 이곳 백운산으로 옮겨오기도 했다.

광양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산재 최산두와 매천 황현이 꼽힌다. 조선 중기 문신인 최산두는 문장에 뛰어나 ‘호남 삼걸’ 중 하나로 꼽혔고, 우국지사 황현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절명 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한 대쪽 같은 선비다. 둘 모두 광양에서 태어난 건 맞지만, 줄곧 타지에서 생활해 고향에 남긴 자취는 묘 외에 이렇다 할 게 없다.

사실 이 둘보다 광양에서 가장 마음이 갔던 인물은 ‘백낙구’였다. 구한말에 광양 땅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결성한 그는 백운산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전북 전주 출신의 관료였던 그는 썩어 빠진 정치의 난맥상에 실망해 사직한 뒤 떠돌다가 광양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고 백운산으로 숨어들어 항일투쟁을 벌였다. 광양지역 최초의 의병이었던 백낙구는 광양 관아를 점령한 뒤 구례를 공격했다가 동료들과 함께 체포당하고 만다. 광주로 압송된 그는 신문 과정에서 “위로는 복수의 거의(擧義·의병을 일으킴)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씻는 논의가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중략)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분함을 외쳐보지도 못하고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라고 일갈했다.

재판에서 12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완도의 고금도로 유배됐다. 순종의 특별사면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그 길로 다시 전주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전북 정읍 태인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료를 피신시킨 뒤 “백낙구가 여기 있다”며 적진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순국했다.

그의 행적에는 몇 가지 놀라운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그가 한때 동학 농민혁명군의 토벌대였다가 관직을 벗고 의병장이 됐다는 것. 두 번째는‘왕조와 사직을 지켜야 한다’는 성리학적 명분이 아니라, 오직 국가와 민족만을 바라보고 의병을 모아 일제의 침략에 맞섰다는 것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했으면서도 지배자가 아닌 백성들을 위해 싸웠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다는 것이었다. 대한제국기의 유일한 시각장애인 의병장. 앞을 볼 수 없음에도 그는 의병장이 돼서 전투대열의 맨 앞줄에 섰다. 그의 행적을 좇다가 못내 아쉬워졌던 건 광양이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손이 없어 묘조차 없는 그를 기리는 비석 하나가 없다. 그가 바친 죽음에 대한 손톱만 한 보답도 없는 셈이었다.


광양 백운산의 백운사(하백운암)에 오르면 법당 앞에서 광양과 남해, 여수 일대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운사까지는 차를 타고 쉽게 오를 수 있다.


# 광양만의 바다를 굽어보는 자리

순천의 조계산을 거쳐 백운산으로 이어진 호남정맥은 바다를 코앞에 두고 마지막 봉우리를 일으켜 세우는데, 그게 광양의 구봉산이다. 구봉산이라면 아홉(九) 봉우리(峰)를 가진 산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예 구(舊)’에 ‘봉화 봉(烽)’ 자를 쓴다. 예전에 봉화를 올리던 산이었다는 뜻이다.

구봉산은 광양 컨테이너 부두 뒤쪽에 솟아 있다. 보기에는 야트막한 뒷산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해발 473m로 제법 높다. 산정에 서면 어느 곳 한 곳 가리지 않는, 360도의 완벽한 조망이 펼쳐진다. 이곳에다 광양시에서 구봉산전망대를 설치하고 쇠로 만든 봉수대 조형물을 세웠다.

구봉산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양만 일대는 정유재란 당시 두 달에 걸쳐 조선과 명, 일본이 한데 얽혀 싸운 최대의 격전지였다. 저 아래 관음포의 바다에서는 일본 수군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이 왜군의 유탄을 맞고 쓰러졌다.

전망대에 오르면 앞으로는 광양만 일대의 경관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광양만에 수반 위의 수석처럼 떠 있는 묘도 뒤쪽으로 남해와 여수 일대 경관이 펼쳐지고, 묘도 앞으로 하동화력발전소와 포스코 광양제철소, 이순신대교, 여수국가산업단지, 등이 빽빽하다. 전망대는 언제 가도 좋다. 항만과 제철소, 산업단지가 휘황하게 불을 밝히는 낙조 무렵의 경관도 좋고, 어둠이 내린 뒤의 야경도 좋다. 일대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여수 뒤쪽으로 떠오르는 일출도 제법 감격적이다.

전망대에서 바다를 등지고 돌아서면 백운산과 계족산, 순천의 검단산성과 순천 왜성이 병풍을 펴듯 주르륵 펼쳐진다. 그 너머로 지리산 천왕봉까지도 한눈에 다 들어온다. 요즘처럼 일교차가 큰 가을날 새벽에는 능선 사이에 안개가 피어올라 산봉우리들이 아랫도리를 안개로 감은 채 바다 위의 섬처럼 떠오른다.


■ 여행정보

광양가는 길 = 수도권에서 가자면 호남고속도로로 익산 분기점에서 익산∼포항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완주 분기점에서 다시 순천∼완주고속도로로 바꿔 탄다. 다시 순천 분기점에서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광양 IC에서 나오면 광양읍이다. 광양시청은 광양읍이 아니라 여수로 건너가는 이순신대교에서 가까운 중동에 있다. 광양읍과 광양시청이 있는 중동의 중간쯤에 구봉산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주차장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잘 닦여 있다.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는 짧긴 하지만 계단이나 비탈길을 걸어 올라야 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백운산 기슭의 백운산자연휴양림(061-797-3655)을 숙소로 추천한다. 휴양림 일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삼나무, 편백나무가 빽빽하다. 휴양림은 종합 숙박동과 오두막, 캠핑장 등의 숙소시설을 갖추고 있다. 중마부두 쪽에는 광양락희호텔(061-913-5000)을 비롯해 비교적 최근에 지은 숙박시설이 모여 있다. 광양에서 가장 이름난 먹거리는 광양불고기다. 광양에는 광양불고기집이 줄지어 모여 있는 ‘광양불고기 특화거리’가 따로 있다. 특화거리에 늘어선 크고 이름난 식당들도 좋지만, 맛으로만 고르라면 광양시립도서관 근처의 ‘금목서’(061-761-3300)를 추천한다.

꽃게 간장게장으로 이름난 광양읍의 백도식당(061-761-2647)도 빼놓을 수 없는 광양의 맛집이다. 남도에 왔으니 한정식 맛을 보는 것도 좋겠다. 광양의 한정식이라면 금수저한정식(061-762-0770)이 대표선수 격이다. 밥값 대비 만족도가 높다. 남해고속도로 섬진강 휴게소 뒤쪽에 있는 청룡식당(061-772-2400)도 재첩국과 재첩회로 알아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