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붉은 꽃을 마치 색동저고리처럼 두르고 정자 앞 연못에 제 모습을 또렷하게 담아내고 있는 안동시 풍산면 상리리 체화정의 정취는 또 무슨 수로 그려야 할까요. 붉은 꽃 그늘 아래 오래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체화정 대청마루 난간에 기대니 시 몇 줄쯤은 저절로 나올 듯합니다. 청량산에서 흘러든 낙동강물이 굽이치는 물가에 작은 점처럼 들어서 있는 고산정의 고요함은 또 어떻구요. 여기다가 반변천 물가에서 운무를 빨아들이는 ‘백운정’과 낙동강변의 단애의 중간쯤에 매달려 있는 ‘낙암정’, 그리고 아래와 윗 정자가 함께 쌍을 이루고 있는 광풍정과 제월대…. 더 보태자면 숨이 다 가쁠 정도입니다. 경북 안동. 한 마을 건너 종갓집이 있고, 대수롭잖아 보이는 허름한 마을에도 솟을 삼문을 두른 당당한 고택 하나쯤은 들어서 있는 곳입니다. 안동은 흔히 하회마을, 병산서원, 도산서원 등 이름난 몇 곳으로 대표되곤 합니다. 안동에서는 오래된 기와를 이고 있는 자못 당당한 고택의 규모와 자태에 시선을 뺏기기 십상이지만, 사실 안동에서 만나는 건축미의 정점이라면 단연 ‘정자’입니다. 고택들이 대개 전통과 실용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정자는 들어선 자리부터 앉음새며 건물의 형태까지, 무릇 주인의 안목과 품성, 나아가서는 삶의 태도까지도 읽어낼 수 있답니다. 안동 땅에서 이름난 전통마을이나 고택들을 다 제쳐 두고 구태여 정자를 찾아 나선 까닭이 그랬습니다. 정자는 다층(多層)적인 공간입니다. 선비들의 사색과 자기성찰의 공간이자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의 공간이기도 하고, 먼 데서 찾아온 벗들과 때로는 벼루와 먹을, 때로는 소박한 주안상을 앞에 두고 풍류를 즐기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정자의 기능은 마찬가지지만 안동의 정자는 전남 담양으로 대표되는 남도의 누정문화와는 좀 다릅니다. 남도의 정자들이 조선시대 당파 싸움에 밀려나거나 왕위 찬탈에 환멸을 느껴 낙향한 선비들의 비분강개 혹은 처사적인 삶과 맥락이 닿아있는 것이라면, 안동의 정자들은 세도가들이 강호의 삶을 꿈꾸며 말년을 의탁했던 곳입니다. 그들이 가장 바람직하게 여긴 삶인 계거(溪居), 즉 계곡에 정자를 짓고 사는 것이었으니, 안동의 정자에는 말년에 자연으로 돌아온 선비들의 마지막 꿈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안동 땅 세도가들의 고택들은 아흔아홉칸을 헤아릴 정도로 으리으리했다지만 정자는 뜻밖에도 소박했습니다. 인연이 닿는 곳의 아담한 공간을 잡아 정자를 들였고 한두칸의 온돌방을 두어 비바람을 피했고 마루를 넣었습니다. 아무리 권세를 누렸다 해도 늘그막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 이들이 말년을 보내는데 무어 그리 호화로운 공간이 필요했겠습니까.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두거나 소유하지 않고 기꺼이 자연의 한 부분이 된 단아한 정자의 자태 속에서 옛사람들의 정신을 봅니다.
# 그윽한 수묵화 속 풍경을 만나다…만휴정 흔히 ‘물도 좋고, 정자도 좋은 곳은 없다’고들 하지만 안동의 만휴정만큼은 예외다. 빼어난 풍경 속에 곱게 숨어 있는 만휴정은 물도 좋고, 정자는 더 좋다. 안동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 계명산 반대편 자락의 작고 허름한 마을인 하리에서 길안천에 합류하는 묵계(默溪)의 물길을 따라 걸어 오르면 10분도 채 안 돼서 수묵화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법한 그윽한 비경이 펼쳐진다. 바로 만휴정 원림(園林)이다. 만휴정을 찾아가노라면 먼저 잦은 비로 제법 위세가 당당한 송암폭포부터 만나게 된다. 폭포를 건너다보는 자리에 서면 정작 폭포보다는 폭포 위 암반에 들어서 있는 정자 만휴정의 자태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첫 만남부터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자연을 다치게 하거나 거스르지 않고 어찌 저렇듯 딱 맞는 퍼즐처럼 아늑한 자리에다 정자를 들여놓았을까. 폭포 너머로 담쟁이가 휘감고 올라간 초록의 돌담장 너머로 정자는 추녀 끝이 날렵한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정자 앞에 다가서면 너럭바위를 타고 비단처럼 흘러내려 온 곡간수가 담겨 흐르고 있고, 그 물길 위에는 통나무 네개를 포개서 만든 제법 긴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정자의 쪽문으로 들어서게 된다. 다른 곳의 정자들은 대개 ‘문화재’라는 이유로 문을 꼭꼭 닫고 있지만, 만휴정의 문과 대청마루는 다른 안동의 정자들처럼 늘 열려 있다. 인적 드문 계곡의 만휴정에서는 누구든 잠깐이나마 정자를 통째로 소유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휴정의 누마루에 앉으면 마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듯하다. 난간에 기대서 낮은 담장 너머로 오랫동안 계곡을 건너다보는 것도 좋겠고, 시원한 마루에 누워 잠깐의 오수(午睡)를 즐겨도 좋겠다. 짙은 이끼의 숲은 서늘하고,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와 늦여름의 유순한 매미소리, 그리고 솔숲을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까지 어우러지니 신선놀음도 이런 신선놀음이 없다. 정자에 들어서면 절로 마음을 평안하게 내려놓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청마루에 앉아 반나절의 시간쯤은 흘려보낸다고 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으리라. 아니 거기서 한나절을 다 보낸다고 해도 되돌아나오는 발걸음이 아쉬움에 자주 멈칫거려질 게 틀림없다. 만휴정의 주인은 조선 전기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보백당 김계행이다. 그는 마흔아홉의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해 쉰이 넘어서야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예순일곱까지 관직에 있었지만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겠다’는 사직소를 올리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무오사화 이후 일흔한살이 돼서야 고향 땅인 풍산으로 돌아와 만휴정을 짓고 여든일곱의 나이로 임종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일흔 한살의 귀향. 늦어도 많이 늦었다. 정자의 현판을 애초에 ‘쌍청헌’이라 했던 것을 ‘저물 만(晩)’에 ‘쉴 휴(休)’를 써넣어 ‘만휴정’으로 갈아 매단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만휴정의 서쪽 방 앞에는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풀어보자면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이 있다면 맑고 깨끗함이다’라는 뜻이다. 그가 ‘우리집의 보물’이라고 꼽은 청백(淸白)이란 곧 ‘청렴함’을 이르는 것이겠지만, ‘맑고 깨끗함’이라고 해석한다면 그가 꼽은 보물 중에는 만휴정도 포함되지 싶다. 만휴정의 원림이 품고 있는 자연이 그지없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 스스로 풍경 된 고산정, 붉은 꽃 두른 체화정 청량산을 굽어 돈 낙동강이 청량교 아래 패차골과 실밭골을 지나 협곡을 만나는 곳이 바로 도산면의 가송협이다. 가송협의 들머리쯤에는 안동에서 손꼽히는 정자 중의 하나인 ‘고산정’이 있다. 고산정을 찾아가는 길이 강 건너편으로 나있어 정자의 첫인상은 멀찌감치 강물 너머 서 있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강 건너편에서 보는 고산정의 모습은 여느 정자와는 사뭇 다르다. 강변의 초지에 호젓하게 들어선 고산정은 거대한 바위벼랑과 너른 강물이 빚어내는 거대한 풍경 속에서 마치 하나의 작은 점처럼 보인다. 주변의 경관의 워낙 장대하니 옹색하게 보이기 십상이지만, 어쩐 일인지 부속건물 하나 없는 작은 정자 하나가 그 풍경에 탱탱한 탄력을 불어넣는다. 정자가 ‘자연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을 이만큼 적절하게 확인해주는 풍경이 또 있을까 싶다. 정자가 풍경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정자를 지워버린다면 일대의 경관까지 헐거워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이 때문이다. 고산정은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많이 쇠락했다. 안동의 다른 정자와는 다르게 문도 잠겨 있다. 그저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자가 빚어낸 풍광이 만족스러우니 구태여 찾아드는 이들이 없는 탓이다. 그러나 강물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여 자라는 수백년은 됐음 직한 노송 한그루와 어우러진 정자의 모습이 제법 운치 있다. 게다가 이즈음 누가 심어놓았는지 정자 주변에 분홍빛 상사화까지 만개해있다.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인 금난수가 지은 것으로 주변 경관이 워낙 뛰어나서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본 고산정의 누정에는 퇴계의 시 한 편이 걸려 있는데 그게 또 글로 쓴 한 폭의 산수화다. 시를 풀어서 요약하자면 이렇다. ‘강 건너편에서 쟁기 끌던 농부에게 ‘정자 주인이 있냐’고 물었더니, 쟁기꾼은 내 말 못 듣고 손만 내저어 구름 걸린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렸다’는 내용이다.
안동에서 또 하나의 정자를 꼽자면 ‘체화정’을 빼놓을 수 없다. 체화정은 안동시내에서 하회마을이나 병산서원쪽으로 가자면 지나게 되는 풍산읍에 있어 오며 가며 들를 수 있지만, 관광객들은 대부분 34번 국도를 따라 바삐 풍산읍을 에둘러 돌아가니 아쉽게도 코앞에서 정자를 빗겨가곤 한다. 체화정은 풍산읍을 지나는 924번 지방도로변에 있다. 자그마한 동산을 뒤로 두르고 앞으로는 수생식물과 자라는 연못을 품고 있는 정자는 늦여름의 햇살에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그건 바로 정자 앞의 배롱나무 붉은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예년보다 못하다지만 올해도 배롱나무 가지마다 농염한 붉은 꽃들이 활짝 피어올랐다. 체화정을 찾는 이들은 누구도 곧바로 정자 앞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체화정을 보는 일은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연못을 앞에 두고 멀리 물러나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며, 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겨가면서 정자의 모습을 감상하게 된다. 연못에 누각의 지붕을 비춰보기도 하고, 배롱나무 붉은 꽃이 물에 반영되는 자리를 찾기도 한다. 누가 시켜서 그러는 것도 아닌데 체화정 앞에서는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단원 김홍도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안기찰방으로 있으면서 체화정의 아름다움에 반해 자주 찾아들었다. 체화정 현판 뒤쪽의 ‘담락재(湛樂齊)’란 현판도 그때 쓴 그의 솜씨다. # 저마다 다른 풍광… 마음 끌어당기는 정자들 이쯤 되면 마음이 바쁘다. 꺼내 보여야 할 정자는 아직도 수없이 많은데 소개할 공간이 부족한 탓이다. 만휴정, 고산정, 체화정을 안동의 으뜸 정자로 올리는 데는 망설임이 없지만 백운정과 낙암정, 그리고 광풍정을 ‘나머지 정자’로 뭉뚱그리는 것이 못내 아쉽긴 하다. 백운정은 임하면 천전리 임하 보조댐 건너편에 있다. 아름드리 울창한 솔숲의 백운정 유원지의 강둑 길에서 강 건너편을 올려다보면 물그림자를 드리운 정자의 지붕이 살짝 보인다. 짙은 숲에 정갈한 정자 하나가 묻혀 있다. 백운정을 찾아가려면 걸어서 보조댐을 건너 찾아가거나 추월마을까지 가서 차를 세워두고 보조댐 철조망 안쪽의 강둑의 조붓한 오솔길을 걸어 찾아가야 하는데 이 길의 운치가 보통은 넘는다. 백운정은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다. 누마루 한쪽에 놓인 방명록을 들추니 다녀간 이들이 적어놓은 감탄사들이 즐비하다. 내용으로 보아하니 얼마 전까지 후손들이 정자 안쪽의 살림집에 살며 손님들에게 방을 내줬던 모양이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살림집의 문이 잠겨 있다. 낙암정은 안동의 서남쪽 남후면 단호리 건지산 자락의 단애 절벽에 매달리듯 들어서 있다. 그 매달려 있는 풍경을 아득하게 올려다보려면 강 건너편 풍산읍 개평리를 찾아가야 한다. 이즈음은 4대강 공사로 주위가 흐트러져 정취가 예전만 못하지만, 그곳에서 서면 건지산의 4부 능선의 가파른 암반에 들어선 낙암정을 만날 수 있다. 강 건너편 낙암정이 코앞에 있지만 강을 건너는 다리가 없어 무려 20㎞를 돌아가야 한다. 남호면 소재지에서 개곡리 방향으로 향하다 낙암정을 겨누고 강변을 따라가다 보면 언덕길을 넘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내려다본 강변 풍경이 또한 그윽하기 그지없다. 언덕을 넘어 나타나는 표지판을 따라 햇볕을 가릴 정도로 숲이 무성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낙암정이다. 낙암정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떨어진 문짝과 뚫어진 창호문이 안쓰러울 정도다. 멀리 휘돌아나가는 낙동강 변이 온통 공사판인 게 아쉽긴 하지만 도깨비가 점지해줬다는 자리만큼은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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