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스위스 융프라우

醉月 2011. 9. 4. 20:16

스위스 융프라우 지역의 바흐알프 호숫가에서 등산객들이 호수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도보 여행’이 최고 유행입니다. 몇 년 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열풍’에서 시작되더니, 어느 순간 전국 곳곳에 각종 ‘길’이 생겨났습니다. 제주 올레길을 시작으로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강화 나들길’ 등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잠시 피해 ‘길’에서 인생을 들여다보려는 기대가 뜨겁다는 방증이겠지요.

그래서 이 길들은 모두 ‘도보 명상’ 코스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박자에 맞춰 걷다 보면 머리에 잡념이 사라집니다. 그저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고, 온통 제 발에만 정신이 집중되면서 순간 무상무념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정 간격으로 반복되는 제 발걸음은 목탁이 되고, 그 순간만큼은 속세를 떠난 구도자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스위스 융프라우 지역에서 만난 ‘길’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은 힘든 순간마다 다시 걷게 하는 자양분이었고, 산꼭대기 빙하에서 밀려 내려온 맑고 차가운 공기는 퍼뜩 정신을 차리게 하는 죽비 같았습니다. 이 길에서도 정상을 맛보고, ‘업 앤드 다운(up&down)’이라는 굴곡을 느끼고, 경사길을 따라 내려와야 하는 인생이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길은 우리네 길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먼저 역사가 오래된 산길입니다. ‘젊은 여자’라는 의미의 융프라우는 로마 시대에 이름 붙여졌다고 하니, 족히 2000년은 훨씬 넘은 길이겠지요. 분명 그때부터 인간이 만든 길인데도, 인위적인 냄새가 적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목동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이어서 그럴까요. 때마침 스위스 여행 직후 찾은 제주 올레길과는 정말 달랐습니다. 가장 유명하다는 올레길 7번 코스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진 덱으로 이뤄진 길이라면, 융프라우 지역의 하이킹(hiking) 코스는 모두 흙으로 만들어진 길이었습니다. 도회지 인간을 위한 편의성보다는 목동과 젖소를 위한 편의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북적북적하지도 않았습니다. 융프라우 턱밑에서 클라이네샤이텍 역까지 내려오는 1시간여 동안 하산길은 모두 저희 일행 차지였습니다. 위대한 자연 앞에 홀로 선 인간, 그 자체였던 셈이지요.

이 길이 매력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내려오는 길’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하산길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미처 올라갈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하강’의 즐거움이 곳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목적을 향해 숨에 차서 급하게 오를 때는 절대 볼 수 없는 절경이 느릿한 하산길에 펼쳐졌습니다. 4000m가 넘는 저 높은 봉우리에 위압당하지 않고, 과감히 등을 돌려 아래를 향해 내려올 수 있다는 자신감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마음먹고 걷기 시작하면 삶의 여유가 넘실대고,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는 묘한 착각에 빠집니다. 물론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겠지요. 하지만 기억은 명료할 것입니다. 시인 고은이 ‘그 꽃’이라는 시에서 단 2줄로 표현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에 대한 기억 말입니다.

관광객들이 융프라우 정상을 뒤로하고 아래로 내려가는 ‘아이거 워크’를 따라 걷고 있다.



● 체력전 ‘쉬니케 플라테’ 코스 - 정상 서면 구름이 발끝에 걸려

◆ 업 앤드 다운(Up&down) 도전길 = ‘쉬니케 플라테(Schynige Platte)’는 한국형 등산 코스와 가장 닮았다. 역에서 인근 정상을 찍고 다시 내려오는 코스인데, 체력 좋은 일부 외국인 여행객들은 중간 역에 내려 걸을 정도로 ‘인기’있는 길이었다. 소요 시간은 1시간15분.

일단 기차로 올라가면서 내려다보이던 인터라켄 전경을 다양한 높이에서 즐길 수 있었다. 호수 사이에 자리 잡은 인터라켄 마을이 올라갈수록 장난감처럼 작아지면서 푸른 호수 2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전에 오르면 구름 때문에 시계(視界)가 다소 답답하지만, 정상에 서면 발끝에 구름이 걸리는 게 묘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구름이 사라졌다. 바로 아래 언덕에 무지개가 걸렸다.

다시 역으로 내려오는 길은 언제 구름이 가득 끼었는지 싶게 ‘햇볕 쨍쨍’이었다. 그 햇볕을 자양분 삼은 들꽃들이 지천에 피어 있는 산길이 이어졌다. 고도 때문에 초원은 온통 키 작은 야생화 나라였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온 ‘에델바이스’도 처음 봤다.

인간으로 치자면 이 60번 코스는 마치 겉모습은 까칠하지만 속은 섬세한 ‘까도남’ 격이다. ‘까도남’ 공략법은 지치지 않는 도전이며,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체력이 필수. 그런 의미에서 역 인근 산장에서 점심을 먹는 게 좋다. 메뉴는 딱 하나. 엄청난 양의 체력 보강용 ‘마카로니’인데, 도저히 한 그릇을 다 먹어 치우기가 쉽지 않았다. 산장에서는 흥에 겨운 관광객들의 ‘춤판’이 벌어졌다. 땀을 흘려야 휴식이 달콤하다는 진리를 알려 주는 길이었다.

● 순례길 ‘아이거 워크’ 코스 - 빙하서 내려온 찬공기 목덜미에

◆ 내리막을 배우는 순례길 = ‘아이거 워크(Eiger Walk)’는 하산길이다. 유럽 최고봉이라는 융프라우에서 내려오는 코스 37번. 최고 정상을 등 뒤로 하고 내려오는 인생길과 많이 닮았다. 내려오는 길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다. 중간에 발이 저절로 멈춰 섰다. 그러다 보니 1시간 걸리는 길이 2시간이 됐다. 워낙 높이 위치해 있다 보니 침엽수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에 목동이 걷고 또 걸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에 나오는 목동이 홀로 이 길을 걸으며 ‘아가씨’를 생각했을까.

마침 길에는 우리 일행밖에 없어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했다. 골짜기 사이를 내려다보며 걸으니 정상의 빙하에서 내려온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내려오는 게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이 신선한 공기가 어깨를 들어 올려 줄 것 같았다. 웅장한 자연 앞에 선 인간은 겸허해지는 동시에 여유로워지는 법. 올라갔던 만큼이나 잘 내려오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이보다 더 극적인 대비를 맛보고 싶다면 이른바 ‘아이거 트레일’이라는 36번 코스를 추천한다. 수직으로 깎아지르는 아이거 봉을 오른쪽에 끼고, 왼쪽으로는 산 아래로 펼쳐진 초원을 내려다보며 2시간50분 동안 걷는 코스다. 이 코스를 택했다면 그날 밤은 산골 마을 그린델발트(Grindelwald)에서 묵자. 스위스 전통 샬레 양식 주택이 옹기종기 모인 이 산골 마을은 쉼 없이 내려온 순례자에게 동화같이 아름답고 포근한 휴식을 선사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종착지다.

● 그림같은 ‘바흐알프’ 코스 - 형형색색 패러글라이더의 천국

◆ 그림 같은 자연을 맛보는 예술길 = ‘바흐알프(Bachalpsee)’ 호수로 가는 1번 코스는 ‘그림’이다. 일단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부터가 ‘액자 없는 그림’이었다. 초원 위에 젖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띄엄띄엄 놓여 있는 농가들이 목가적 분위기를 더욱 고취시켰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뒤 호수까지 50분을 걷는데, 흰 눈에 덮인 높이 4000m 이상의 봉우리 3개가 곳곳에서 멋진 배경 화면을 만들고 있었다. 엽서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코스라고 했다. 호수는 엄마와 딸처럼 가까이에 2개로 나뉘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물빛도 달랐다.

하나는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다 보니 검은빛이었다. 풍경화는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단 조금 멀찍이 떨어져 보는 게 더 낫다. 이 호수를 낀 풍경도 조금 위쪽으로 올라오니 더 근사했다. 호수가 저 멀리 보이는 흰 봉우리와 대비되면서 더욱 푸른색으로 빛났다.

이 코스는 패러글라이더의 천국이기도 했다. 형형색색의 패러글라이딩이 하늘을 날았다. 하이킹 출발지였던 피르스트(First) 산장은 그런 점에서 최고의 구경거리를 선사하는 장소였다. 한번에 3~4개가 하늘을 수놓기도 했는데,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쾌감을 느낄 정도였다. 패러글라이딩보다 값싼 유사 체험을 원한다면 ‘트로티바이크’를 강추한다. 트로티바이크는 페달 없이 서서 달리는 자전거. 처음에는 생소한 데다, 초반 경사가 다소 가팔랐다. 하지만 몸이 일단 적응하면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자전거를 달리면서 마을 풍경을 고스란히 눈에 담을 수 있다


■ 융프라우 100배 즐기기

한국에서 스위스 융프라우로 직행하는 항공편이 없기 때문에 인근 국가를 경유해야 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프랑스 파리 등에서 갈아타야 한다.

기차로 이동하는 것도 방법인데, 파리에서는 5시간30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4시간52분이 걸린다. 융프라우 한글판 인터넷 홈페이지(www.jungfrau.co.kr)에서 자세한 교통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인터라켄 오스트, 빌더스빌, 라우터부룬넨, 클라이네샤이텍, 그린델발트 등이 주요 정차역이므로, 이름을 숙지해 놓는 게 편리하다.

물가가 비싼 스위스답게 기차 운임은 꽤 비싸다. 편도 노선을 구입하는 게 더 비싸므로 패스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특히 융프라우 정상 인근에 위치한 융프라우요흐 관광뿐 아니라, 76개에 달하는 하이킹을 즐기고 싶다면 패스 구입은 필수.

국내 동신항운(02-756-7560)에서 VIP 패스를 판매하고 있는데, 융프라우를 가까이에서 관람하는 융프라우요흐 1회 왕복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을 무제한 탑승할 수 있는 연속 2일권 패스가 175스위스프랑(약 22만3400원), 3일권은 195스위스프랑(약 24만9000원). 패러글라이딩 및 트로티바이크 할인 특전도 포함돼 있다.

각종 놀이시설도 이용할 수 있는데, 가격은 트로티바이크 16스위스프랑, 패러글라이딩 170스위스프랑, 래프팅 110스위스프랑 등이다. 융프라우요흐에서 눈썰매와 자일타기, 스키를 한꺼번에 즐기려면 1일 패스를 45스위스프랑에 구입하는 게 더 경제적이다.

숙박 정보는 융프라우 인터넷 홈페이지(www.jungfrau.ch)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예약도 가능하다.




철도회사 CEO 케슬러

“이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융프라우 철도 건설 100주년을 맞이하는 내년 8월에는 융프라우 산등성이를 따라 조명을 환하게 켤 것입니다.”

인터라켄 메트로폴호텔에서 만난 우르스 케슬러(사진) 융프라우 철도회사 경영위원회 사장은 열정과 에너지가 충만한 최고경영자(CEO)였다. 축구선수에서 전직, 평사원에서 출발해 최고 직위까지 오른 경력의 소유자다웠다. 그만큼 험준한 지형을 뚫고 건설된 융프라우 철도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케슬러 사장은 “연간 600만명이 인터라켄을 방문해 융프라우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다”면서 “한국도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고객”이라고 말했다.

특히 아시아 관광객 증가는 놀라울 정도라고 케슬러 사장은 덧붙였다. 지난해에는 전년 대비 25%가 증가했다. 인도와 중국 관광객이 최근 급증하고 있지만 한국도 중요한 고객이라는 것. 한국에서 등산과 하이킹 코스가 인기를 끌고 있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시장에 대한 마케팅을 중시하는 이유다.

케슬러 사장이 꼽은 추천 하이킹 코스는 쉬니케 플라테 외곽을 따라 걷는 56번과 70번 코스. 자택이 쉬니케 플라테 인근에 위치한 데다, 풍광이 뛰어나다는 이유였다. 케슬러 사장은 “내년 5월에는 인터라켄 오스트 역 옆에 침대 240개를 갖춘 유스호스텔도 완공될 예정”이라면서 “한국의 20~30대 젊은 층도 융프라우를 꼭 방문해 달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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