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늙은 절 한 채’찾아가는 길 전북 완주
시인이란 참 묘한 존재다. 한량없이 천진스러운가 하면 때로는 능글맞고 뻔뻔하기 짝이 없다. 화암사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 않겠다는 이 시는 어떤가? 정녕 그럴 양이면 그에 대한 시를 발표하지 않거나 사람들이 관심도 갖지 못하게 메모하듯 몇 자 긁적거려놓으면 될 걸, 굳이 실제의 절보다 산보다 더 훤칠한 시를 만들어 세상 천지에 퍼뜨리는 까닭이 무엇인가. 기품과 맛깔스러움을 다 갖춘 시를 보고도 찾아가지 않고 배기는지 보자. 그 반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영악스러운 대개의 독자도 실은 시인과 같은 처지다. 시인의 수작을 뻔히 알면서도 정말 거기 가면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릴지 모른다 싶은 마음에 조바심을 내며 인터넷을 뒤지고 지도를 확인한 다음, 소리 소문 없이 현장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곤 뭘 얻는가. 시인과 같은 관찰 혹은 각성, 아니면 자조와 회한?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게임 자체가 문화의 층위가 된다는 점이다. 나도 그 게임에 말려들었다.
사진보다 선명한 시 구절
숲의 터널을 지나
이윽고 용복리 삼거리. 천등산 입구에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길가에 ‘화암사’ 진입로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키 작은 대추나무들이 서 있는 갈림길로 들면 화암사까지는 외길이다. 절간까지 가는 좁은 포장도로 주변의 풍경은 지극히 고요하고 아름답다. 대둔산, 천등산 쪽에서 봤던 우람한 풍광과는 대조적이다. 더 이상 차가 나아갈 수 없는 지점, 그 너른 공터가 절간 주차장인 셈이다. 사방이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아연 폐쇄공간에 든 느낌을 갖게 된다.
화암사로 오르는 산길은 숲의 터널이다. 열대의 밀림에라도 든 듯 공기도 습하다. 숲을 벗어났다 싶으면 골과 바위벽이 나타나는데 이때부터 길은 턱없이 좁아지며 미끄럽기도 하다. 바위벽을 돌고 골을 건너면 물소리 요란한 폭포를 마주하기도 하는데 산길을 걷는 이는 시의 표현처럼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기만 하면 그만이다.
산과 골의 형세를 봐서는 도무지 근처 어디에도 절집이 있을 성싶지 않다. 특히 골의 끝자락에서 풍경을 가리고 선 높다란 바위벽을 마주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람마저 드물었던 그 옛날, 역적모의는커녕 나그네 등짐 뺏을 궁리조차 해본 적 없었을 스님네들이 무슨 깊은 생각을 하고 남 들어서는 안 될 말씀을 나눈다고 이런 궁벽한 곳에 절집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싶은, 희한한 생각까지 들지 않는바 아니다. 이렇듯 꼭꼭 숨은 절을 볼라치면 문득 조정권의 짧은 시 한 편도 머리에 스친다.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 조정권 시 ‘독락당(獨樂堂)’ 전문
절은, 바위 벼랑 앞에 층층으로 설치된 철 구조의 보행로를 통해 절벽 위를 오른 뒤, 그 위편에 선 아름드리 고목을 돌아서야 만난다. 흔적으로 봐서는 예전엔 절벽 틈새로도 길이 있었던 듯싶은데 사람의 내왕이 쉽지 않다 여겨 근대에 이런 구조물을 세운 듯하다.
소박 질박한 아름다움
이곳 화암사는 신라 진성여왕 때 일교국사가 창건하고 조선조 세종 때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 의상대사가 수도하고 설총이 공부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건축사적으로 소중한 극락전(보물 663호)이며 우화루(보물 662호) 등은 그대로 남았다. 극락전은 잡석으로 터를 돋운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터라 소박 질박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절집의 현관이랄 수 있는 우화루는 누각 형식의 건물인데 바깥으로는 기둥을 세우고 뒤쪽에 축대를 쌓아서 지은 까닭에 밖에서 보면 2층 구조요 안에서 보면 단층 마루 집이다.
작은 산에 어울리는 작은 절. 굳이 바위 벼랑 너머에 종달새 집처럼 앉아 있는 까닭을 알 만하다. 올망졸망한 산봉들이 부채꼴로 둘러선 산속, 종지 같은 분지에 절집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러 산자락을 타오른 구름이나 이 안쪽을 기웃거려볼까 바람조차 함부로 범입치 못할 곳이다. 절의 내역을 적은 비문에 따르면,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된 이 고장 사람 성달생(成達生)이란 이가 고향을 떠나기 전 사찰을 하나 세우고자 절터를 모색했다. 그러던 중 예전 화암사 자리인 이곳이 산 좋고 물 맑아 적격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청이 바래서 나무 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절집 건물은 시인의 표현처럼 참 잘 늙었다. 소담하고 아늑하며 정갈한데, 내가 찾은 날은 때가 좋지 못했다. 보수 공사를 한다고 절집 벽에는 비계들이 세워져 있고 여기저기 건축자재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공사가 끝나더라도 제발 때깔 벗었다며 요란한 단청을 덮어쓰고 시멘트 층계들을 거느린 채 생뚱스럽게 앉아 있지 말기를 바랄 따름.
수국 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우화루 앞뜰을 지나면 곧바로 불명산 등산로를 만날 수 있다. 산등성이에 오를 때까지는 산죽(山竹)들이 길을 틔워준다. 돌무더기 있는 정상에 올랐다가 반대편 능선을 거쳐 절집으로 돌아오는 데 한 시간이면 족하다.
새벽안개만으로 황홀한 대아저수지
절에서 나와 17번 국도를 좇아 계속 남진하면 삼례, 전주에 이를 수 있다. 몇 년 사이에 길이 넓어져 조금 각박해지긴 했지만 주변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부터 산 좋고 물 좋은 완주 땅인지라 눈길 닿는 데마다 아늑하면서도 정겨운 경치가 펼쳐진다.
가장 먼저 접근이 가능한 경천저수지는 이미 댐 주위를 공원으로 꾸며놓았기에 길 가는 이는 잠시 이곳에 들러 드넓은 호수와 산들이 만들어내는 호쾌하고도 수려한 풍치를 감상해도 좋다. 댐에서 조금 더 직진하면 저수지 상류로 진입할 수 있는 643번 지방도를 만날 수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맛깔스러운 붕어찜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화산(花山) 마을에 이른다. 호수를 바라보며 토종 붕어의 달디단 육질을 음미할 수 있는 것도 이곳의 자랑이다.
17번 도로 삼기 삼거리에 이른 뒤에는 732번 도로로 옮겨 타볼 일이다. 전주를 거치지 않고 직접 진안(鎭安)으로 빠질 수 있는 이 길에서는 자못 이국적인 정취마저 풍기는 대아저수지와 원시의 고요가 있는 동상저수지를 차례로 만날 수 있으며 위봉산, 운장산의 산 기운도 흠뻑 느낄 수 있다.
대아저수지는 만경평야의 젖줄인 만경강 최상류에 위치한다. 1920년 최초의 댐이 세워졌다. 댐의 내구 연한이 지나 1990년 새로운 댐이 그 앞쪽에 건립되었는데 옛것과 새것이 서로 위용을 다투는 이들 구조물 자체가 괜찮은 볼거리가 된다. 내륙의 다도해를 연상케 하는 호숫가로 길은 굽이굽이 이어진다. 호수를 다 지났다 싶으면 새로운 골짝 저수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동상저수지다. 운장산 깊은 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먼저 동상지를 채웠다가 이어 대아지로 흘러드는 것이다. 여기부터가 동상 운장산 계곡인데 주변의 빼어난 풍광과 함께 차량의 내왕마저 뜸해 아연 별세계로 든 느낌마저 가질 수 있다.
어느 해 가을, 나는 이 경치에 빠져 낚싯대를 드리운 채 이틀이나 이곳 물가에 앉아 있은 적이 있다. 비록 물고기 한 마리 건지지 못했어도 수면에 엎어지는 단풍 든 산이며 골에서 피어오르는 새벽안개만 보고 있어도 마냥 황홀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연하다.
● 1950년 경북 경산 출생
● 고려대 국문과 졸, 동 대학 교육대학원 석사
● 197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 현 고려대문인회 회장
● 창작집 ‘잠시 머무는 땅’ ‘그물의 눈’ ‘식구들의 세월’ 등
● 장편소설 ‘서북풍’‘안개울음’ ‘미륵을 기다리며’‘화담명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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