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팔공산은 ‘불국토’입니다. 신라 때 경주의 남산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지요. 팔공산의 품 안에 들어서 보니 갓바위마저도 한낱 팔공산을 불국토로 그려내는 데 쓰인 하나의 ‘장엄(莊嚴)’일 따름이었습니다. 하나 하나 다 헤아려보지는 못했지만 팔공산의 품 안에는 무려 300여개의 절집이며 암자가 있답니다. 염천의 더위, 폭염의 한복판에서 산자락의 절집은 마치 ‘진공의 공간’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팔공산 북동쪽 자락을 더듬어 경북 영천의 은해사가 거느린 자그마한 암자를 찾아갑니다. 반대편 대구 쪽에는 동화사나 파계사 등의 이름난 절집이 있긴 하지만 세속의 번거로움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진 곳을 겨누다가 은해사를 들머리 삼아 산중 암자를 찾아나선 길입니다. 거미줄처럼 흩어진 팔공산의 산줄기를 타넘으며 호젓한 암자를 만나고, 그 고요한 공간 속을 소요하는 행로였습니다. 산문으로 들어서 만나는 고요한 절집도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 호젓한 산길을 걸어올라 당도한 자그마한 산내 암자에서는 모든 사물들이 마치 정지된 듯했습니다. 인적은 드물고 간혹 대숲을 스친 바람이 추녀 끝의 풍경만 뎅그렁 흔들고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바람이 막 지나가고 나면 그 고요함 속에서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합니다. 고요함으로 마음을 정갈하게 씻어낼 수 있다면, 내 안의 미동(微動)과도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더위쯤이야 쉽사리 물리쳐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영천에서는 또 횡계천변의 구곡(九谷)에 그윽하게 들어앉은 정자에서 바람소리와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이 주는 위안을 경험하기도 했고, 시간이 ‘슬로 비디오’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는 자그마한 면 소재지의 100년도 더 된 소박한 한옥 교회의 목조 종탑 아래서는 두 손을 모은 기원의 소박함, 혹은 무릇 세상을 대하는 겸손함까지 배우게 됐습니다. 길지 않은 여정에 수확이 이 정도라면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가 아닐는지요.
# 극락으로 향하는 굴, 자신의 욕망을 가늠해보다 무섭다. 모로 돌린 몸을 한뼘 남짓의 갈라진 좁은 바위 틈으로 밀어 넣는다. 좁은 바위 틈의 끝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도 두렵지만, 자칫 잘못 들어갔다가는 바위 틈에 몸이 꽉 끼어 오도가도 못할 것만 같아서 와락 무섬증이 밀려온다. 선뜻 첫발을 내딛기가 쉽잖은 건 그 때문이다. 그 틈을 통과하기만 한다면 품은 소원이 이뤄지고 극락에 다가갈 수 있다지만, 마음에 욕심을 담았거나 욕망을 단속하지 못해 몸집만 키운 이들은 드나들지 못한다는 곳. 그 바위 틈에 붙여진 이름이 ‘극락굴’이다. 극락굴은 경북 영천 은해사의 산내암자인 중암암에 있다. 자칫 암자의 이름을 ‘중앙암(中央庵)’이라 잘못 알기 십상이지만, 그게 아니라 ‘중암암(中巖庵)’이다. ‘가운데 중(中)’에 ‘바위 암(巖)’ 자를 쓰는데, 사람들은 한자이름보다는 흔히들 ‘바위구멍 절’이라 부른다. 중암암은 이름 그대로 바위 사이로 난 산문으로 들고나야 한다. 거대한 암봉의 직벽에 매달린 암자는 자그마한 법당과 그 법당에 붙여지은 산신각 그리고 요사채 하나가 전부다. 그 암자 위쪽에 극락굴이 있다. 극락굴은 말이 굴이지 실상은 모여있는 거대한 바위 사이의 쪼개진 틈을 말한다. 누군가 일러주지 않는다면 헤매는 것은 고사하고, 끝내 찾지 못한다. 암자의 스님에게 물어 찾아낸 극락굴은 좌우를 뒤집은 ㄱ자 형으로 굽어져 있다. 몸을 모로 돌리고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그 굴을 통과하지 못했다. 보통 체격의 성인 남자 가슴팍의 두께로는 좁은 바위 틈새를 통과하기가 쉽잖아 보였다. ‘밑져야 본전’이라며 앞서 몸을 집어넣었던 이도 절반쯤 가다가는 포기하고 어두운 바위틈을 되돌아 나왔다. 좁은 바위 틈을 통과했다고 해서 악행을 다 용서받는 것은 아닐 것이고, 몸집만으로 욕망의 크기를 잴 수는 없는 일이니 통과했대서 희희낙락할 일도 아니고 돌아나왔다고 낙심할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극락굴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좁은 바위틈에 ‘극락굴’이란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만들어낸 뜻은 그걸 보고 제 욕망의 크기를 돌아보라는 것이었을 게다.
중암암은 은해사가 거느린 8개의 산내암자 중 하나다. 은해사는 품고 있는 절집만 300개가 넘는다는 팔공산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팔공산 안에 은해사가 있고, 은해사의 품에 중암암이 있다는 얘기다. 흔히들 갓바위가 있는 관봉(853m)만 생각해서 쉽게 보지만 팔공산은 해발 1193m에 달하는 큰산으로 수많은 연봉들을 거느리고 있다. 신라 이래 팔공산의 골짜기에는 수많은 절과 탑이 들어섰다. 팔공산의 불국토는 서남쪽의 대구 동화사와 동북쪽의 경북 영천 은해사가 양분하고 있는데 동화사는 대구를 끼고 있는 덕에 산문으로 드는 길이 반질반질 윤이 났지만, 영천의 은해사 쪽은 다르다. 산문부터 울창한 솔숲은 고요한 정취로 가득하다. 여기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암자야말로 멀고 또 깊다. 거조암, 기기암, 묘봉암, 백련암, 백흥암, 서운암…. 어느 하나 깊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 중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중암암의 정취가 단연 으뜸이다. 은해사의 산중암자는 차로 들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걷기를 택하는 편이 더 낫다. 은해사에서 출발한다면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인 백흥암을 지나 중암암까지는 4.8㎞로 짧지 않은 길이다. 길도 제법 가파르다. 염천의 삼복더위에 ‘웬 산길걷기냐’고 반문하기 쉽겠지만, 그건 중암암까지 이어지는 숲길의 청아한 깊이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작은 물길을 따라 암자로 이어지는 길은 솔숲과 활엽수 터널이 만들어내는 어둑한 산길. 가파른 길을 오르자면 제법 땀이 배지만 청아한 물소리와 함께 소슬한 바람이 쏴아 지나간다. 절집을 지나 고즈넉한 산내암자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마음을 닦는 길’. 비워지고 고요해진 마음이라면 더위쯤이야 쉽게 잊을 수 있다. 중암암은 천연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바위틈을 지나 들어야 한다. 구태여 터를 넓히지 않고 주변 산세에 맞춰 가람을 일궈 만든 중암암의 뒤편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그 위쪽에 극락굴이 있다. 극락굴에서 바위를 더 타고 오르면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만년송’이 있다. 만년이야 됐을 리 없겠지만, 척박한 바위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기운차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나이가 족히 수백년이 넘어보인다. 여기서 굽어보는 풍경은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장관이다. 중암암은 또 해우소가 깊기로 유명한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 한 자락이 전해온다. 통도사와 해인사, 중암암의 스님들이 절자랑을 시작했는데 먼저 통도사의 스님이 허풍을 시작한다.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열고 닫을 때 문고리에서 쇳가루가 한말 석되가 떨어진다.” 해인사 스님이 질 수 없다. “스님이 많은 우리 절은 가마솥이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쑤면 솥 안에 배를 띄워 노를 젓는다.” 중암암은 자그마한 암자니 대찰들과 규모야 어디 비할 수 있을까. 그래도 중암암 스님은 지지 않는다. “우리 절의 뒷간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루에 볼일을 보면 그해 섣달 그믐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이야기 때문인지 중암암을 찾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돌구멍 속에 있는 해우소를 기웃거리곤 한다.
# 은해사가 품은 저마다 다른 매력의 그윽한 암자들 중암암을 거느린 은해사는 만만찮은 내력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은해사는 신라 헌덕왕 때 지어졌다. 조카인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 왕위찬탈 과정에서 정쟁의 피바람이 불었을 것은 당연한 일. 헌덕왕이 그때 숨진 원혼을 달래고 참회를 하기 위해 지은 절이 바로 은해사다. 조선시대에는 중종이 맏아들인 인종의 태실을 팔공산에 묻으면서 은해사가 이 태실을 지키기도 했다. 은해사에서는 편액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지금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는 대웅전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솜씨다. 서울 봉은사에 걸린 판전이란 추사의 마지막 작품과 함께 사찰편액 글씨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것이다. 경상감사로 재직하던 중 은해사를 찾았던 김정희는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 등 희대의 명필편액을 남겼다. 대웅전에 내걸린 네 폭의 주련도 추사의 글씨다. 지장전의 편액은 1955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7일간 3000배를 참배한 후 손가락을 태워 서원하는 이른바 ‘연지연향(燃指燃香)’으로 불법의 정진을 발원했다는 동곡 일타스님이 남긴 것이다. 중암암 외에 은해사의 암자들도 다 제각기 독특한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북쪽의 계곡길을 따라 3㎞쯤 가서 만나는 운부암도, 새파랗게 빛이 날 듯한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하는 백흥암도, 또 가파른 길을 올라 당도하는 묘봉암도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 은해사 산문을 나와 다른 쪽 산 자락에 앉아있는 거조암은 오백 나한으로 유명한 절집이다. 영천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거조암 영산전에는 저마다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한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오백 나한이라지만 실제로는 526기가 있는 나한상에는 조 이삭 3개를 부러뜨린 스님이 농부를 돕기 위해 소로 변해 3년간 일한 뒤 욕심으로 가득한 중생 500명을 불러다가 참회를 거쳐 나한으로 성불토록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쥘부채 하나만으로도 능히 더위를 쫓을 수 있는 곳 팔공산의 맑고도 그윽한 기운으로 더위를 씻어낼 만한 곳으로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의 횡계구곡을 추천한다. 보현산에서 흘러오는 자그마한 개천인 횡계천을 따라 기암과 고목들이 펼쳐져 있다. 횡계천변의 경관은 한 눈에 확 뜨일 만한 절경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곳곳에 명소를 만들어내며 ‘구곡(九谷)’의 이름 값을 제법 하고 있다. 특히 천변의 언덕에 세워진 정자인 3곡 모고헌과 4곡 옥간정은 정취가 느껴진다. 모고헌과 옥간정은 조선 숙종 때 정만양·규양 형제가 건립한 누각으로 주자의 도학적인 삶을 꿈꾸며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낡은 정자는 다소 쇠락했지만 말끔히 단장된 관광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옥간정은 굳게 잠겨있지만, 모고헌은 잠긴 듯 열려있다. 한가롭게 부채 하나 들고 걸터 앉아 풍경에 눈을 맞추고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앉아있고픈 곳이다. 횡계구곡 인근의 화북면 소재지인 자천리의 자천교회도 찾아가 볼만 하다. 1903년에 지어진 교회는 목조 종탑을 거느린 목조단층 한옥이다. 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권헌중이 영천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난 후 감화받아 지은 소박한 한옥교회는 정갈하고 단아하다. 도시의 초대형 교회가 세운 웅장한 성전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박함과 겸손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흠뻑 느껴지는 곳이다. 영천에서는 또 보현산 천문대를 빼놓을 수는 없다. 보현산 정상에 자리잡은 보현산천문대는 국내 최대구경인 1.8m의 반사망원경과 태양플레어 망원경을 갖추고 있는 천문연구시설.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별 관찰은 물론이거니와 일몰 이후에는 연구원들의 천문관측을 위해 천문대로 오르는 길도 출입이 통제된다. 그럼에도 천문대를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구불구불 산길의 포장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해발 1126m의 보현산 정상에 올라 서늘한 대기 속에서 구름이 척척 걸린 팔공산을 비롯한 일대의 산줄기를 굽어보는 맛 때문이다.
|
|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와 함께 하는 우리 산하 기행_2 (0) | 2011.08.30 |
---|---|
황교익의 味食生活_08 (0) | 2011.08.29 |
때묻지 않는 풍경_양구 (0) | 2011.08.25 |
폭포기행_포천, 철원, 연천 (0) | 2011.08.24 |
우중여행_춘천,화천 (0) | 2011.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