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매산은 ‘여름 산’은 아닙니다. 해마다 5월 초가 되면 8부능선이 온통 철쭉으로 물드는 황매산은 누가 뭐래도 ‘봄의 산’입니다. 산자락이 온통 수를 놓듯 철쭉꽃 붉은 물이 드는 5월 한 달 동안 50만 명이 찾아온답니다. 그 넓은 산 능선이 꽃 반, 사람 반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꽃이 다 지고 나면 황매산을 찾는 발길은 뜸해집니다. 이즈음 같은 여름철이라면 황매산을 찾는 이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어렵습니다. 하기야 철쭉 같은 관목이 해를 가리지 못해 대부분의 능선 구간을 땡볕을 받으며 걸어야 하는 황매산을 누가 구태여 무더운 여름에 찾겠습니까. 황매산의 남동쪽 자락인 모산재 역시 그렇습니다. 꽃피는 봄이나 청명한 가을날이라면 모를까, 노출 암봉이 즐비한 험하디 험한 바위산을 숨이 턱에 닿아서 딛고 오르는 길이니 여름날 그곳에 오르는 것은 ‘고행’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무더위로 설설 끓는 날, 모산재를 찾아간 것은 한여름의 불볕더위와 정면으로 맞서기 위함입니다. 올여름은 늘 ‘흐리거나 비’였습니다. 여름 내내 게릴라 같은 물폭탄이 쏟아진 수도권이 특히 그랬습니다. 볕을 본 날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높은 습도에다 흐린 날씨로 늘 불쾌지수만 치솟았습니다. 더위다운 더위 없이 ‘지지부진’하게 이렇게 여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따가운 여름 볕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간 이유가 이 때문이었습니다. 볕에 달궈진 모산재의 암봉을 딛고 오르는 길은 ‘계절의 순례’와도 같은 여정이었습니다. 가파른 바위를 딛고 수직으로 선 철계단을 걸어 오르자니 드러난 팔과 목덜미는 붉게 익고, 강렬한 뙤약볕에 머리가 타 버릴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기기묘묘한 암봉을 하나하나 딛고 올라서 숨을 고를 때마다 발아래에 펼쳐지는 장쾌한 풍경을 굽어보노라니 그런 수고쯤이야 금세 잊어졌습니다. 저마다 다른 형상의 바위들은 하나씩 오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빠르게 몰려다니는 뭉게구름이 불러온 바람이 지날 때면 그리 시원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장대 같은 소나기가 퍼붓고 산정에서는 수증기처럼 운무가 피어올랐습니다. 이미 온몸이 땀에 젖고 말았으니, 구태여 비를 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온몸으로 빗줄기를 맞으며 운무가 넘실거리는 바위 능선을 걷는 맛을 여름이 아니라면 언제 또 맛볼 수 있겠습니까. 남녘의 내륙인 경남 합천은 이즈음 달궈진 양철처럼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서늘한 그늘로 들거나 계곡으로 숨거나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피서라지만, 입추도 말복도 지난 지금 지지부진하게 여름을 보내는 것이 아쉽다면 남녘의 내륙으로 가 볼 만합니다. 그곳에서 불볕더위와 정면으로 마주칠 수도 있겠고, 매미 소리로 가득한 활엽수 그늘을 따라 은박지처럼 반짝거리는 호반을 따라 달리는 정취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의 거리 모습을 낡은 흑백 사진처럼 고스란히 재현해낸 영상테마파크를 찾아가서 오래된 기억 속의 시간을 뒤적여 보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답니다.
# 철쭉에 가려진 황매산의 만물상…모산재 황매산은 철쭉산행으로 유명한 곳이다. 황매산에 철쭉이 군락을 이룬 것은 20여 년 전의 일. 1984년 목장 개발로 나무를 베어 내고 불을 놓아 초지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철쭉이 번져 나갔고, 방목한 소들이 철쭉의 새순을 따 먹으면서 ‘자연전정’을 하게 돼 지금처럼 철쭉이 대평원을 이루게 됐다. 그러나 철쭉이 황매산의 전부는 아니다. 무릇 ‘이름난 것’들이 다른 것들을 가려 버리듯, 황매산의 철쭉은 다른 명소들을 다 가려 버렸다. 가려진 곳 중 대표적인 게 바로 모산재(767m)다. ‘재’라는 이름에서 고갯길을 연상하기 쉽지만, 당초 산 정상 부근에 ‘못(淵)’이 있어 ‘못산’이었다가 ‘모산재’로 바뀌었다. 한자어로는 ‘묘산(妙山)’이라고 했다는데, 그 이름대로 산을 온통 뒤덮은 바위들이 그야말로 절묘하게 생겼다. 능선을 따라 노출된 암봉들의 형세가 마치 금강산의 만물상을 연상케 한다. 배의 돛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은 돛대바위부터 천하 제일의 명당 자리이긴 하지만, 이곳에 묘를 쓰면 전국에 가뭄이 든다 해서 묘를 쓸 수 없도록 했다는 무지개터가 있고, 천 길 벼랑 위에서 최치원이 도를 닦았다는 득도바위, 부처 형상을 한 부처바위, 남녀의 순결을 시험할 수 있다는 순결바위에다 다섯 개 손가락 형상을 한 손가락바위도 있다. 모산재는 들머리에서 올려다볼 때부터 입이 딱 벌어지게 한다. 바위도 바위지만 그 암봉에 뿌리를 내린 채 기기묘묘하게 가지를 뒤틀고 자라난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가히 ‘절경’이라 이름할 만하다. 모산재는 구태여 꽃피는 봄이 아니어도, 단풍 물든 가을이 아니어도 그 빼어난 경관은 모자라지 않다. 사방이 깎아지른 직벽이니 눈이나 얼음이 있는 겨울에는 접근마저 어렵겠지만, 녹음이 짙은 여름이라면 그 풍모를 온전히 다 만날 수 있겠다. # 고행과도 같은 여름 산행에서 만나는 선경(仙境)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온몸에는 비 오듯 땀이 흘렀다. 모산재에서는 거리와 높이에 대한 가늠이 뒤죽박죽이다. 모산재의 정상은 해발 767m. 그러나 타오르는 불꽃처럼 솟은 암봉들이 어찌나 장쾌한지 체감 높이는 훨씬 더하다. 산자락 아래 옛 절터인 영암사지에서 고개를 들어 늘어선 험준한 암봉을 올려다보면 아예 기가 질려 버릴 정도다. 그러다 산행표지판과 마주치게 되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정상까지 거리는 1.5㎞. 동네 뒷산에 불과한 거리다. 그것만 보고 ‘만만하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1.5㎞의 산길에 해발 767m까지 몸을 올려놓아야 하니 가파르기는 말하지 않아도 익히 알 일이다. 작은 개울 옆의 산길로 들어서면 곧 급경사가 시작된다. 한 발 한 발 높은 바위를 딛고 오르다 보면 금세 허벅지는 팍팍해진다. 등산로의 절반 이상이 노출 암반을 따라 오르니 마땅히 볕을 피할 곳도 없다. 비탈진 암반을 오르려면 두 다리와 두 손을 모두 써야 하는데 볕에 달궈진 바위에 손을 대면 뜨끈한 열기가 전해진다. 뜨거운 볕과 바위에서 후끈 끼치는 열기, 그리고 두방망이질치며 혈액을 뿜어 대는 심장으로 몸 안의 열까지 오르니 그야말로 ‘비 오듯’ 땀이 흘러내린다. 여름의 한복판에 더위의 극한으로 몸을 밀어 넣는 기분이다. 이 뜨거운 날에 밧줄을 잡고, 철계단을 타고 솟은 암봉을 하나씩 오르는 일은 가히 고행과도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한 발 한 발 고도를 높이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경치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아슬아슬 암봉 위에 서면 불어오는 바람은 또 어찌나 시원한지. 이렇게 여름날 모산재에 오르는 일은 풍경과 바람의 힘으로 가능하지 싶다. 깎아지른 암벽 아래로 대기저수지의 푸른 물이 굽어 보이고 그 주변으로 도탄리, 오도리, 중촌리 일대 마을의 다랑논이 발아래로 펼쳐진다. 그 너머로는 창녕, 의령, 진주 일대의 산들이 그려 내는 곡선이 물결치고 있다. 철계단을 올라 돛대바위에 서면 이제부터는 기기묘묘한 암봉의 화려한 능선을 따라가는 절정의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때맞춰 산정으로 우우 몰려온 먹구름이 소나기를 쏟아냈다. 비를 피하려면 발걸음을 재게 놀려야 하건만 능선의 풍광에 발걸음은 자꾸 멈춰진다. 하기야 온몸이 땀으로 젖었으니 비를 피할 일도 없다. 일순 밀려든 자욱한 운무가 바위 능선에 걸려 피어오르면서 눈 닿는 곳마다 여름 산이 보여 주는 절정의 선경(仙境)이 펼쳐졌다. 아, 오래도록 잊어지지 않을 풍경이다. # 적요하면서도 화려한 영암사지의 빈터 모산재를 찾았다면 산 아래 영암사지는 덤이다. 아니 ‘덤’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황송하다. 산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 되는 영암사지에는 석탑 하나와 쌍사자석등 하나, 그리고 당간지주의 흔적과 함께 너른 터만 남아 있다. 적요하면서도 한편으로 화려하다. 쇠락한 석탑과 서너 층의 계단으로 조성된 초지에 뚜렷한 돌기둥의 흔적이 적요함을 만들어 준다면, 화려함은 암봉이 주르륵 펼쳐진 모산재 능선의 불같은 기운과 뒷다리를 곧추세우고 석등을 받치고 서 있는 쌍사자석등의 사자, 그리고 풍화돼 무너졌으되 세련된 문양이 새겨진 돌계단 장식이 합세해 만들어 낸다. 영암사는 수수께끼와 같은 절집이다. 언제 지어졌고, 또 언제 허물어졌는지 아무데도 기록이 없다. 다만 강원 양양의 선림원지의 홍각선사비에 해인사 부근에 있었다는 기록과 이름 석 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발굴된 석재 기단만 봐도 여러 건물을 거느려 위세가 당당했던 대찰이었을 텐데 그렇다. 영암사터에 세워졌던 수많은 당우들은 세워진 반대의 순서대로 허물어졌을 터. 건물들과 함께 수많은 시간 속의 이야기들이 세월에 녹아 다 무너진 빈터는 적막하다. 영암사지에서 가회면 소재지로 나와서 1089번 지방도로를 타고 합천호로 넘어가는 길은 드라이브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합천호를 끼고 있는 대병면 소재지에 닿기 전 언덕 위의 도로에서 내려다보는 합천호의 모습은 좌우로 펼쳐진 다랑논과 어우러져 독특한 미감을 빚어 낸다. 이 길에서는 멀리 호수에다가 유려한 곡선의 다랑논에서 자라는 벼들까지 온통 푸르지 않은 것이 없다. 대병면사무소를 지나 1089번 지방도로를 타고 역평리, 술곡리를 지나고 우회전해 59번 국도로 갈아타고 가는 길은 줄곧 합천호의 물길을 따라간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호수를 따라 달리는데, 특히 59번 국도 고삼리 부근에서는 마치 남해안을 연상시키는 호반 풍경이 펼쳐진다. 너른 호수와 물 건너 점점이 들어선 마을이 마치 남해안의 포구와 꼭 닮았다.
# 합천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을 찾아가다 합천의 간판 관광지인 해인사는 익히 알려진 곳. 알려진 명소라 굳이 보탤 얘기가 없지만, 합천호 보조댐 부근의 영상테마파크는 그 진면모가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한때 전국 곳곳에 들어섰던 촬영 세트장은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의 얄팍한 속셈으로 만들어진 인스턴트 식품과 같은 관광지였다. 한때 반짝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그곳을 촬영 장소로 삼은 드라마나 영화가 잊어지면 함께 잊어지게 마련이었다. 촬영을 위해 얼기설기 시늉만으로 지어 놓은 건물들에서는 도무지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천의 영상테마파크만큼은 다르다. 그곳에는 일제강점기와 1980년대 서울의 모습이 정교하게 재현돼 있다. 일제강점기의 반도호텔과 경성고보, 조선총독부와 돈암장, 경교장과 동화백화점이 거기 있다. 또 1980년대 배재학당과 원구단, 한국은행 등도 남아 있다. 서울의 과거 풍경들이 그곳에 오롯이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봐야 하는 것은 감쪽같이 만들어 낸 가짜 풍경이 아니라, 옛 풍경 속에서 저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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