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에 타오르는 투르크 민족주의
최근 발생한 위구르 유혈 충돌은 이 흐름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 터키가 하는 행동을 보면 남의 나라가 아닌 듯하다.
7월8일 레제프 타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가 유엔 안보리의 의제로 채택되도록 제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7월9일 니하트 에르군 터키 산업장관은 위구르 유혈 사태와 관련해 중국산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자고 자국민에게 촉구했다. 터키 국민은 터키 정부가 여전히 중국 눈치를 본다며 더 세게 항의할 것을 촉구했다. 앙카라 주재 중국 대사관과 이스탄불 주재 중국 영사관 앞에서는 위구르인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터키인 시위가 연일 벌어진다.
터키는 중국과 친한 나라로 알려졌다. 군사·외교적인 협력 관계도 각별하다. 그런데 왜 터키 정부와 국민이 위구르 문제만은 민감하게 나서는 것일까? 여기에는 범투르크 민족주의(Pan-Turkism)라는 배경이 있다.
7월7일 신장 위구르의 수도 우루무치에서 유혈 사태에 항의하며 경찰과 대치하는 주민들. |
범투르크 민족주의는 위구르 독립운동을 이해하는 열쇳말일 뿐만 아니라, 왜 중국이 그토록 위구르 문제를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아울러 중앙아시아 독립국과 자치공화국 사이에 벌어지는 지정학적 구도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한국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동북아 몽골 민족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7월5일 발생한 신장 위구르 유혈 충돌로 최소한 150여 명이 죽고 800명 이상이 크게 다쳤다. 위구르 측은 최소 500~6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G8 정상회담 와중에 급거 귀국할 정도로 이 사건은 중국 정부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티베트보다 위구르가 중국에 더 위험
이번 위구르 유혈 참극은 지난해 3월 분출한 티베트 독립운동과 닮은 점이 많다. 언어·역사·문화가 다른 자치구 소수민족이 한족에게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이 배경이었다. 민족 문제와 빈부 격차 등 경제 문제가 서로 얽힌 것도 닮았다.
유명하기로 따지자면 그간 티베트 독립운동이 위구르 독립운동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위구르를 티베트보다 더 위험한 지역으로 생각한다. 한양대 이희수 교수(문화인류학)는 “티베트 민족은 오로지 티베트 지역에만 살지만, 위구르족은 주변에 언어·종교·역사가 같은 동족이 독립국을 세우고 버티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위구르 독립운동 세력은 이웃 국가를 넘나들며 활동한다. 범투르크 민족주의라는 시각에서 위구르는 티베트보다 훨씬 더 잠재적 폭발력이 큰 곳이다”라고 말했다.
위구르와 국경을 맞댄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은 물론 우즈베키스탄·아제르바이잔·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독립국은 모두 터키어를 쓰며, 이슬람 종교를 믿고, 역사적으로 실크로드를 지배했던 옛 투르크족(돌궐족)의 후손이다. 투르크인이 사는 땅을 ‘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는데, 위구르 독립운동 세력은 위구르를 ‘동투르키스탄’이라고 일컫는다. 1949년까지 신장 위구르 지역에 존재했던 독립국 이름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었다. 위구르 독립운동은 동투르키스탄 재건운동이며 범투르크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현재 투르크족의 맹주는 오스만튀르크의 적자를 자처하는 터키다. 터키(Turkey)라는 나라 이름은 투르크(Turk)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위구르 사태 발생 일주일 전에 있었던 일을 복기해보자. 지난 6월24일 압둘라 귤 터키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해 후진타오 주석을 만났다. 귤 대통령은 6월28일과 29일에 걸쳐 귀국길에 우루무치를 들렀다. 터키 대통령이 신장 위구르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혈 사태 5일 전 터키 대통령(가운데)이 우루무치를 방문했다. |
터키 언론에 따르면 터키 대통령이 우루무치 방문을 제안했을 때 중국 정부는 난색을 표했다. ‘경호상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투르크 민족주의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게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터키 대통령이 우루무치를 방문한다는 소식은 위구르인들에게 기대와 불안감을 동시에 줬다. 터키 일간지 후리예트에 따르면 위구르 사람들은 “터키 대통령이 위구르에 뭔가 해줄 것” “위구르 민족의 사기를 높여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일부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고 썼다. 과거 터키 정부 관계자가 우루무치를 방문할 때면 꼭 후폭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 터키 부총리였던 유력 정치인 데블렛 바셀리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카슈가르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중국 정부는 바셀리가 방문하는 동안 위구르어 사용 금지령을 새로 내렸고, 그가 귀국한 직후에는 위구르 역사·문학 서적 5000권을 불태우는 위구르판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위구르 출신으로 6년 전 터키에 망명한 ‘이스탄불 마립 연대기구’ 의장 히다예툴라 오구즈는 6월30일 터키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방문(터키 고위층의 방문)이 있고 나면 꼭 위구르인에게 나쁜 일이 생겼다. 중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타이밍을 맞췄다. ‘희망을 품으면, 우리는 좌절시킨다’는 것을 보여준 거다. 이번 방문도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예언은 들어맞았다. 터키 대통령이 돌아가고 5일 뒤 광둥성에서 위구르 노동자가 집단 폭행을 당하고 우루무치에서는 학살에 가까운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아마도 터키 대통령의 방문과 유혈 사태 발발이 겹친 것은 우연일 것이다. 터키는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의 국경을 인정한다고 밝힌 우방국이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벌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압둘라 귤 대통령은 외무장관 출신으로 범투르크 민족국가 6개국을 유럽연합(EU)처럼 통합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했고 지금도 추진하는 인물이다. 중국 정부는 범투르크 민족주의의 위구르 유입을 가장 두려워한다.
7월6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위구르계 터키 소년들이 터키 국기와 위구르 깃발을 함께 펄럭이며 위구르 지지 시위를 하고 있다. |
범투르크 민족주의는 오랫동안 죽은 단어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오스만튀르크를 중심으로 주창됐던 범투르크 민족주의는 중앙아시아 투르크족에게 큰 영향을 줬다. 1933년 위구르 카슈가르에 처음으로 동투르크 공화국이 탄생한 것도 범투르크 민족주의의 영향이 가장 컸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뒤 20세기 중반을 지나 범투르크 민족주의를 말하는 사람은 사라졌다.
지금도 범투르크 민족주의는 중앙아시아의 지배적 정치사상은 아니다. 하지만 물밑에서 조용히 범투르크 민족이 뭉치려는 조짐이 일고 있다. 범투르크 민족주의 부활의 첫 번째 배경은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 붕괴였다. 투르크 민족국가인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아제르바이잔·키르기스스탄이 이때 독립했다. 중앙아시아에 ‘투르크 벨트’가 열린 것이다. 9·11 테러 이후에는 이슬람주의도 한몫 했다. 투르크 민족이 모두 이슬람을 믿고 있는데 9·11 테러 이후 이슬람이 민족운동과 결합하는 현상이 생겼다. 아랍 민족주의와 투르크 민족주의는 이런 면에서 닮은꼴이다.
요즘 투르크 민족국가 6개국이 서로 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1990년대부터 이 6개국은 EU와 같은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종종 정상회담을 열어왔다. 2006년 정상회담 때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지역공동체의 준비 단계로 먼저 의회 연합을 제안했다. ‘터키어 사용 국가들의 의회 연합(TURKPA)’이라는 구체적인 이름도 나왔다. 지난해 이 기구의 창설에 각국은 동의 서명을 했고 올해 9월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TURKPA 정상회담이 열린다.
압둘라 귤 터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정상회담에서 “TURKPA 출범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선언하며 “이런 지역 협력은 유라시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 형제애는 특정한 목표물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마음과 정신을 통합해 지역을 번영시키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터키는 이미 투르크 5개국에 대한 비자 발급을 면제하고 이 지역 내 투르크어 문자 표기를 통일하려고 노력한다.
터키의 이런 범투르크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예를 들어 터키 내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의 배경이 범투르크 민족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범투르크 민족연합 탄생할까
만약 범투르크 민족주의가 성공해 6개국이 뭉치면 만만치 않은 세력이 된다. 우즈베키스탄만 해도 인구가 2770만이 넘고 카자흐스탄(1640만), 아제르바이잔(817만) 등도 꽤 큰 나라다. 이런 투르크 독립국가의 단결은 이웃 미독립 투르크족을 자극할 수도 있다. 중앙아시아에 1000만명이 넘는 투르크 민족이 자치구 형태로 러시아 등지에 퍼져 살고 있다. 인구 500만 이상 투르크 집단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하지 못한 집단은 동투르키스탄(신장 위구르)뿐이다. 범투르크 민족주의는 6개 독립국가를 중심으로 위구르를 포함한 20여 투르크 자치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원대한 꿈이다.
범투르크 민족연합이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같은 독립국 집권 세력은 투르크 민족주의보다는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투르크 민족의 단결을 바라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다. 세계 3대 강국이 모두 투르크 민족의 분열을 바란다. 러시아는 러시아 연방에 속한 알타이·바슈코르토스탄·추바시야·카카시아·사하·타타르스탄·투바 등 투르크계 자치공화국을 단속해야 한다. 좀 더 넓게 보면 체첸 공화국 독립운동도 범투르크 민족운동의 가지에 걸쳐 있다. 체첸 민족은 투르크-잉구슈어를 쓴다.
중국은 신장 위구르를 지키기 위해 범투르크 민족주의가 발호하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최근 위구르 사태가 발생한 뒤 중국은 카자흐스탄 국민의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
투르크 민족, 세계 역사의 큰 변수 될 수도
미국 역시 범투르크 민족주의가 달갑지 않다. 중앙아시아에 퍼진 투르크계 국가 지도는 미국에게 ‘알 카에다 루트’로 여겨진다. 이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이 이슬람 무장운동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위구르 출신으로 키르기스스탄을 거쳐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을 돌다 미군에 잡힌 관타나모 포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열강의 압력 속에 이 지역 투르크 민족의 정치적 독립이나 지역 공동체의 탄생은 당장 실현되지 않겠지만, 경제적으로 이 지역은 서서히 통합되고 있다. 2008년 카자흐스탄과 신장 위구르 무역량은 현재 카자흐스탄의 대중국 교역량의 70%를 차지했다. 2007년 61.8%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중국 전체 교역량이 5% 정도 늘어난 것과 비교해도 큰 폭이다. 카자흐스탄의 신장 위구르 무역 규모는 84억 달러로 러시아 다음으로 크다. 카자흐스탄과 신장 위구르 사이의 교역은 두 지역만의 무역이 아니라 ‘범투르크 벨트’와 위구르 사이의 무역이다.
‘투르크 벨트’는 엄청난 지하자원을 가진 곳으로 아랍의 석유만큼이나 중요하다. 유라시아 철도 물류 거점이기도 하다. 투르크 민족은 1000년 전에는 실크로드를 지배하며 세계를 호령했다. 지금 그들은 ‘에너지 로드’를 장악하고 있다. 비록 갈기갈기 찢겨지고 일부는 강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형편이지만, 이들 민족의 움직임이 유라시아와 세계 역사의 향방에 큰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발생한 위구르 유혈 충돌은 이 조류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중국, 위구르의 정체성 말살”
‘위구르의 달라이라마’ 레비야 카디르는 미국에서 활동하지만, 정작 그녀가 의장으로 있는 세계위구르대표회의(WUC) 본부는 독일에 있다. WUC를 창설한 핵심 멤버가 독일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구르 독립운동을 이끄는 망명운동단체 WUC의 사무총장 돌쿤 이사(사진)에게 전화와 이메일로 최근 동향을 물었다. 그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꼭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불렀다.
7월5일 유혈 사태가 벌어진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중국 정부가 오랫동안 위구르 민족을 차별해온 것이 위구르인이 분노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중국은 위구르 문화와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한다. 학교에서 위구르어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중국어만 쓰도록 강요한다. 중국 정부는 18세부터 25세까지 위구르 미혼 남녀를 동투르키스탄(신장 위구르 자치구) 밖으로 내모는 정책을 썼다. 대신 엄청난 인구의 한족을 이곳에 이주시켜서는 경제·사회적 이득을 줬다. 반면 쫓겨난 위구르인은 중국어를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억지로 인구를 이동시키는 정책 때문에 문화가 다른 위구르족과 한족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번 광둥성 사건(위구르족이 한족 여성을 집단 성폭행했다는 헛소문이 퍼진 사건) 이전에도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다. 광둥성 사건은 그저 외부에 알려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이 한족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주장한다.
광둥성에서 위구르족이 한족 폭력 집단에게 거리에서 집단 폭행을 당하며 쫓겨다니는 동영상을 보라(그는 유튜브 주소를 알려줬다). 이 동영상에서 놀라운 것은 구경하는 한족 시민이 아무도 위구르족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박수를 치며 격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중국 정부는 오히려 위구르족을 가해자로, 한족을 피해자로 선전한다. 이렇게 증오심을 키우는 선전 때문에 위구르족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되고 있다.
ETIC·ETIM·ETLO와 같은 다른 위구르 해방운동단체는 WUC와 어떻게 다른가?
다른 단체에 대해 뭐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폭력적 방법에 의한 독립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위구르 사람들이 인권을 보장받고 자유를 누리며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세계 각지에 망명한 위구르인들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동투르키스탄 상황을 세계에 알리려 한다.
소수민족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한족 |
광둥과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을 테러한 것은 한족 시민들이다. 이들은 소수민족이 오히려 큰 특혜를 받는다는 고정관념 탓에 위구르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소수민족은 특혜보다 차별을 더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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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한족보다 위구르족에게 더 잘 해주는데 무슨 폭동이냐? 데모하는 위구르족들은 엄청 폭력적이다. 한족을 보면 바로 죽이려고 한다. 정부가 경찰에게 이제 총을 쓰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는데, 총을 못 쓰게 되면 오히려 사회 치안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반대다.” 신장 위구르 우루무치에서 택시 기사로 있는 서지앙차앙 씨(31)가 <시사IN> 중국 통신원에게 한 말이다.
위구르 유혈 사태에 대한 중국인의 반응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젊은 세대가 주로 쓰는 인터넷 게시판도 비슷하다. “올림픽 앞두고 티베트 터지더니 엑스포 앞두고 위구르 터지네”라며 서방세계 개입론을 펴는 글이 호응을 받는다. 중국 바깥에서 위구르인을 걱정하는 세계인의 시각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광둥과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을 테러한 것은 경찰이나 군인이 아니라 한족 시민들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한족 젊은이들이 가진 왜곡된 고정관념 때문이다.
유혈 사태의 시발이 된 7월5일 광둥 사건은 헛소문이 계기가 됐다. 사오관 시에 있는 한 완구업계에서 일하는 한족 노동자들이 ‘위구르 노동자가 한족 소녀 2명을 집단 성폭행했다’는 헛소문 게시물을 보고 흥분해서 기숙사를 찾아가 위구르 노동자를 집단 폭행한 것이다. 이날 린치로 위구르 노동자 2명이 죽고 89명이 다쳤으며 한족 노동자 39명이 부상했다.
한족 노동자들이 인터넷 게시물 하나 때문에 엉뚱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때는, 그 게시물이 교묘하게 인종 갈등을 부추겼던 측면도 있지만, 그만큼 ‘소수민족이 오히려 더 특혜를 받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한족 중국인 사이에 퍼져 있다는 게 사실이다.
7월7일 한족 청년들이 삽과 몽둥이를 들고 우루무치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
위구르·티베트족 실업률, 한족의 4배
두 번째로 주장되는 특혜는 산아제한법(一胎制)에서 소수민족은 예외로 빠지는 것이다. 1980년대 이래 중국 도시 거주 부부는 자녀를 한 명만 가질 수 있지만 중국 계획생유법에는 “소수민족이라면 상황에 따라 아이를 두 명이나 세 명 이상 낳을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최근 중국 내 청년실업 문제와 맞물려 이런 ‘소수민족 우대론’이 크게 확산되고 있다. 마치 과거 ‘여성 군 면제 때문에 한국 사회는 여자가 더 유리한 사회다’라고 주장했던 일부 남성의 그것과 비슷하다.
한족 젊은이의 고정관념과는 달리 통계를 보면 위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서 여전히 소수민족이 차별의 벽에 갇혀 있다. 예를 들어 대학입학에 특례가 있다고 하지만 위구르족과 티베트족의 실업률은 여전히 한족보다 4배 이상 높다. 또 산아제한법 적용 제외 덕분에 중국 소수민족 인구의 절대 숫자가 다소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꾸로 신장 위구르의 위구르인과 티베트 자치구의 티베트인 인구 비중은 80~90%에서 50%로 크게 줄었다.
“위구르와 한국은 둘도 없는 형제” |
투르크계 위구르인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이고 알타이 문화를 공유한다. 삼국 시대와 고려·조선 시대에도 영향을 크게 주고받았다. 한국전쟁 때 투르크족은 유엔군과 ‘중공군’으로 나뉘어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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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는 중국이 아니다. 결코 중국이 될 수 없다.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 역사적 배경과 살아온 문화가 다른데 어떻게 동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땅을 빼앗은 중국이라는 체제에 편입될 수 있겠는가?”
그는 1933년 위구르 지역에 건설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의회 서기장을 지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비행기 테러 폭파로 대통령을 포함한 동투르키스탄 정부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희생된 직후, 그는 중국 당국의 감시를 피해 터키에 망명해 위구르의 독립투쟁을 이끌어왔다. 1995년, 그는 끝내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94세로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의 아들 에르킨 알프테킨이 세계위구르회의(WUC)를 조직하고 독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다.
ⓒKBS 위구르인은 돌궐의 후예다. 위는 드라마 <대조영>에서 돌궐족과 동맹을 맺는 대조영. |
투르크족인 위구르인은 흉노를 조상으로 한 돌궐의 후예다. 돌궐 때는 고구려와 이웃해 중국에 대항하는 군사연대를 맺기도 했다. 8세기께에는 실크로드를 거점으로 광대한 위구르 제국을 건설했다. 840년 키르기스족에게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1600년대까지 지금의 알타이 산맥과 동투르키스탄 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크고 작은 국가를 건설했다. 위구르족 일부는 계속 서진해 트란속시아나 지방에서 셀주크튀르크를 세우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출해 오스만 제국과 지금의 터키공화국을 이루었다.
‘회교’라는 말은 ‘위구르인의 종교’라는 뜻
고려 말 개경에도 ‘회회인(回回人)’으로 알려진 적지 않은 위구르인이 모여 집단촌을 이루고 살았다. 일찍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던 그들은 위구르 말을 쓰고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면서 심지어 ‘예궁(禮宮)’이라는 이슬람 사원까지 짓고 살았다. 그들은 조선 초기까지 국제 교역의 전문가로서 조정의 이익을 대변해주었고, 조선 사회의 과학과 학문의 발전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세 세계 최고 수준의 이슬람 과학을 우리나라에 전수한 두뇌집단이었던 것이다. 한글 창제 과정에서도 우리말과 가장 닮은 위구르 어문이 크게 참고되었을 법하다. 한글 창제의 대표학자였던 신숙주가 위구르 문자를 빌려 쓰는 몽골어에 달통했다면 그가 위구르 어문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일부 위구르인들은 쌍화점처럼 토착 음식을 파는 가게를 열었고, 고려 여인과 결혼해 우리 사회에 점차 동화되어 갔다. 덕수 장(張)씨, 위구르 설(遜)씨, 도(都)씨 같은 위구르인을 조상으로 가진 우리 성씨도 생겨났다. 나아가 다양한 중앙아시아·이슬람 문화를 우리 사회에 남겨놓았다. 지금 우리가 쓰는 ‘회교(回敎)’라는 말도 ‘위구르인의 종교’라는 뜻이며, 위구르 상인이 독점하던 청화백자의 청색안료는 회청(回靑)으로 불렸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의 과학적 원리도 조선 초기의 이슬람 역법인 <칠정산외편(七政算外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전쟁기념관 한국전쟁 때 신장 위구르에 살던 투르크계 위구르족은 중공군(왼쪽)에 강제 징용됐고, 위구르의 형제뻘인 터키는 유엔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오른쪽)했다. |
위구르는 20세기까지도 엄연히 독립된 나라를 가졌다. 1863년에는 야쿠브 베그가 이끄는 카슈가르 독립국가가 건국되어 오스만 제국과 영국을 상대로 화려한 외교를 펼치면서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위세를 떨쳤다. 이 모든 꿈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침략과 무력공격 앞에 맥없이 무너졌고 그 후 위구르인들은 숨을 죽인 채, 국제사회의 망각 속에서 중국의 인위적 인구 이주 정책과 체계적인 민족 말살 정책에 맞서 처절한 생존투쟁을 지속해왔다.
다른 투르크족 국가는 모두 독립했는데…
석유와 천연가스, 풍성한 지하자원을 가졌음에도 모든 경제적 이권은 중국인의 손에 들어가고, 이 지역의 정치적 권력도 한족 차지가 되었다. 차별과 소외, 가난과 실업, 종교적 박해와 민족적 모멸감은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위구르인의 저항을 폭력 테러쯤으로 몰고 가려는 중국 당국도 당당하지 못하다. 무장 테러 공격으로 반미 응징을 목표로 하는 알 카에다와 민족과 언어, 종교적 연대를 내세우며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위구르인의 자치와 독립 요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물론 우리 처지에서는 21세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중국과의 외교 문제도 세심하게 고려하면서 중국 내 소수민족 문제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것은 외교나 국제관계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관의 문제이고, 자기 말과 글을 쓰면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원초적 민족 권리 문제이다. 이웃의 이슬람 투르크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아제르바이잔 등은 모두 1990년을 전후해 독립했는데 왜 위구르 국가만 안 된다는 것인지! 어떤 논리와 정치적 명분으로도 그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을 가깝게 생각하는 위구르인의 처지에 대한 우리의 남다른 관심과 애착이 필요한 때이다. 강대국의 식민지배를 경험하면서 처절한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경험이 있는 우리 민족이 또 다른 소수민족의 정당하고 당연한 독립 투쟁을 외면한다면, 먼 훗날 역사는 우리를 어떻게 기록할지 두려움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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