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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힘

醉月 2009. 7. 21. 08:13

한글창제 원리 영어로 빛난다

훈민정음 해례본 영문판 발간… 국문해설·원문 영인본이 한권에

<대지>의 저자 펄벅(Pearl buck)은 “한글은 24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문자체계이지만 한글 자모음을 조합하면 어떤 언어음성이라도 표기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극찬한 바 있다. 세계 언어학자들이 감탄하는 과학적인 문자 체계, 한글은 그러나 아쉽게도 그 창제 원리와 기원이 해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올해를 한글주간 원년으로 삼고 한글의 창제원리를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외국어 번역본을 발간했다. 지난 8월 영어 번역본이 나왔고, 4일 중국어와 베트남어, 몽골어 번역본이 새로 선보였다.

■ 영어 설명과 함께 원문 영인본 실어

영어 번역본의 정식 제목은 <알기 쉽게 풀어 쓴 훈민정음>. 김주원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훈민정음의 소개와 의미를 쓰고 이상억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창제 원리를 설명한 이 책은 훈민정음의 국문 설명과 영어설명이 함께 실려 국내외 한국학 연구생들이 쉽게 훈민정음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훈민정음의 원문 현대 번역은 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한국어문회 고문)가, 영어 번역은 신상순 전남대 명예교수가 담당했다.

외국어 번역본은 2006년 국립국어원 이상규 원장이 부임한 후, 훈민정음을 세계에 보급하자는 취지로 훈민정음의 외국어 번역 자료 수집을 시작하면서 만들게 됐다. 사실 훈민정음의 외국어 번역본 발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영어 번역본은 72년 이정호 교수가 쓴 “Rifgt Sounds to Educate the people” Explanation and Translation 과 98년 Gari K. Ledyard가 쓴 “The Korean Language Reeorm of 1446” 등이 학술용 자료로 발간된 적이 있다. 국립국어원은 98년 전남대 신상순 교수가 쓴 훈민정음 영어 번역본 ‘훈민정음의 이해’를 채택하고 이를 기준으로 번역작업을 진행했다.

이전 훈민정음 번역본과 비교해 이번에 발간된 책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원문을 영인해 함께 실었다는 차이가 있다. 훈민정음 번역 사업을 담당한 국립국어원 황용주 학예연구사는 “이전에도 영어번역본은 나온 적이 있지만 현대 국문번역과 영어 번역, 영인본이 함께 한 권의 실려 있는 것은 이 책이 최초다. 독자들의 훈민정음의 해설뿐만 아니라 원본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책에 실린 훈민정음 영인본은 57년 이상백 선생의 <한글의 기원>에 실린 훈민정음을 재영인 한 것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은 57년 통문관에서 영인 된 적이 있는데 이 영인본이 <한글의 기원>에 실렸고, 57년 김민주 선생의 <훈민정음 주례>에 축소판이 실린 적이 있다.
황용주 학예연구사는 “46년 조선어학회에서 발간된 훈민정음도 있는데 보관상태가 좋아 학생들은 조선어학회 훈민정음의 영인본으로 주로 공부한다. 그러나 조선어학회의 훈민정음에는 권점(圈點, 방점)이 잘못된 부분이 있다. 이 책(<알기 쉽게 풀어 쓴 훈민정음>)을 통해 좀 더 정확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황용주 학예연구사는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훈민정음은 경전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귀중한 문화유산이다”고 덧붙였다.
“훈민정음은 중세 언어를 표기한 문자이기 때문에 현재 표기되지 않는 문자는 모두 그림을 그려서 작업해야 했습니다. 국문 해설과 영어 번역본 작업의 경우 훈민정음 해설 부분을 원전과 비교해 보고 잘못된 표기를 찾고 고치는 데만 5개월 이상이 걸렸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 30개국 언어로 발간 계획

국립국어원 황용주 학예연구사.

 

이번 사업을 계기로 영어 번역본 이외에도 훈민정음은 중국어, 베트남어, 몽골어로 번역됐다. 한국문학번역원과 2007년 업무 협정을 맺고 작업을 진행한 결과다. 4개 언어로 번역하는데 총 2,500만원가량이 들었다고.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앞으로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 사용인구가 많은 언어 이외에도 한류를 중심으로 한국어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동남아시아 언어 등 30개국 언어로 번역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번역본은 해외 한국학 도서관과 국가 도서관, 한국학 연구기관에 배포된다. 또한 청와대와 문화관광부를 찾은 국빈에게 한글을 알리는 선물로 보낼 예정이다.
국립국어원 이상규 원장은 “훈민정음은 15세기에 만들어졌지만 이미 20세기의 현대 언어학 이론원리를 모두 담고 있을 만큼 시대를 앞선 우수한 문자”라고 평했다. 이어 이상규 원장은 “세계의 여러 문자 가운데 만든 사람과 만든 날짜가 밝혀진 유일한 문자로 세계 문자의 태생적 유래로 보아도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덧붙였다.
“이번 시도를 계기로 훈민정음이 재평가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한글을 한국의 대표 이미지로 완성해 갈 겁니다.”

 

한글에 IT기술 입혀 세계어로 도약

우리말 바탕 정보사회 건설 '21세기 세종계획' 지난해 1단계 완료,

말뭉치 구축등일정한 성과.... 후속사업은 활용 방안 모색에 초점

오늘날 지식정보사회는 방대한 디지털 정보가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생산, 유통, 소비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와 달리 정보량이 매순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정보의 디지털화 덕분이다. 그 정보의 대부분은 역시 언어 정보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글이 디지털 정보의 근간인 것이다.

언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넓은 지역에 걸쳐, 얼마나 자주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힘이 결정된다. 영어가 20세기 들어 세계어의 권좌에 오른 것은 바로 그 기준에 가장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는 어떤 언어가 지구촌의 패권을 잡을까. 위세가 여전한 영어, 혹은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어일까. 물론 한 언어의 힘은 정치ㆍ경제적 영향력과 떼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두 언어는 유력한 후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바로 ‘언어의 정보화’라는 시각에서다. 온라인ㆍ디지털화가 가속화할 미래에는 사이버 공간에서 얼마나 널리 쓰이느냐 하는 기준이 언어의 패권구도에 결정적 변수가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영어가 사이버 공간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는 천문학적인 정보의 상당 부분은 영어 텍스트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한국어의 ‘정보화를 통한 세계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한국은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을 만큼 우수한 IT 경쟁력을 갖고 있는 데다, 한글 역시 과학적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는 터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국어 정보화’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큰 타당성을 지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출범한 국가 사업이 이른바 ‘21세기 세종계획’(이하 세종계획)이다. 세종계획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바탕으로 하는 정보사회 건설’이라는 웅대한 슬로건 아래 1998년 시작돼 2007년 사업이 완료됐다. 사업의 3대 목표는 ▲세계 수준의 국어 기초 언어자료 베이스 구축을 통한 우리말 정보화 ▲표준화된 전자사전 구축을 통한 우리말 체계화 ▲한민족 언어 정보화를 통한 우리말 세계화 등이다.

세종계획은 1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였던 만큼 우여곡절도 거쳤지만 여러 분야에서 적지 않은 결실을 맺었다.

우선 기초 언어자료 베이스 분야에서 2억 어절의 ‘말뭉치’(corpus)를 구축한 점이 단연 두드러진다. 말뭉치는 여러 단어가 쓰인 어절을 컴퓨터가 인식할 수 있도록 묶어 놓은 단위를 뜻한다. 2억 어절의 말뭉치 규모는 일찌감치 언어 정보화에 나선 선진국에 비해서도 월등히 많은 양이다. 1990년대 초반 국가 말뭉치를 구축한 영국의 경우 1억 어절에 불과하며, 미국 역시 2,200만 어절에 그치고 있다.

말뭉치가 국어 정보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엇보다 대규모의 말뭉치가 구축되면 컴퓨터를 이용한 기계번역과 문서요약, 맞춤법 교정 등이 보다 정교하고 수월해진다.

학문적으로도 활용 범위가 매우 넓다. 특히 국어의 계량적 연구와 사용 양상 연구 등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학, 교육학, 전산학, 인지과학 등 관련 학계에서도 연구 효율성을 높여주는 핵심자원이 될 수 있다. 아울러 국가 어문정책 수립과정이나 사전 편찬, 국어 교재 편찬, 국어 정보처리 기술 개발 등에도 쓰임새가 크다.

말뭉치 구축 외에 60만 어휘 규모의 전자사전을 개발한 것도 세종계획의 뚜렷한 성과로 꼽힌다. 전자사전은 정보검색과 텍스트 분석, 자동번역, 다국어 사전 구축 등에 활용도가 매우 높다.

국어 교육 및 학습 등에 널리 쓰일 수 있는 국어 정보화 시스템도 다수 개발됐다. 어문규정 시스템, 남북한 언어 비교사전 검색 시스템, 한국 방언 검색 시스템, 어휘 역사 검색 시스템, 문학작품에 사용된 어휘 검색 시스템, 전통문화 어휘 검색 시스템 등이 그런 사례다. 이밖에 옛 한글, 한자 등에 대한 문자코드 표준화, 전문용어 데이터베이스 구축 및 표준화 등에서도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세종계획은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과 숙제들도 남겼다. 당초 남북한 및 재외 동포를 대상 범주에 넣었던 ‘한민족 언어 정보화’가 여러 난관에 봉착하면서 ‘한국 내 언어 정보화’로 축소된 점, 전문가 집단이 협소한 데다 사업을 주관하는 구심점이 미약해 난항을 겪은 점 등이 그런 사례로 꼽힌다.

무엇보다 국어 정보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는 게 프로젝트 참여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러다 보니 세종계획에 대한 홍보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그나마 어렵사리 이뤄낸 성과물도 널리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세종계획은 단발성 사업으로 흐지부지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지난 10년의 성과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보완해 당초 목표와 취지를 온전하게 달성할 수 있도록 후속사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21세기 언어 주도권 경쟁에서 우리말은 또 다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국립국어원은 현재 세종계획의 성과를 분석ㆍ평가하고 향후 과제를 도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후속사업의 큰 방향은 세종계획의 성과 활용 및 발전적 승화 방안 마련에 맞춰져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립국어원 국어정보화팀 김한샘 학예연구사는 “다른 나라들은 자국의 언어자원을 보다 심층적으로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세계적 흐름을 반영해 세종계획의 성과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세종대왕의 이름으로'한국어 보급 박차

몽골 울란바타르 대학과 세종학당 운영을 위한 업무협정 체결식.

세종대왕의 이름을 현판으로 내걸고 우리말 세계화에 나선 ‘세종학당’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세종학당은 해외 한국문화원이나 관광공사 등을 거점으로 한 개방형 한국어문화학교다. 해외 현지의 일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보급 기관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여타 한국어 보급 사업과는 차이가 있다.

그 동안 교육인적자원부 등이 주관해온 해외 한국어 보급 사업은 주로 재외 국민과 동포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외국인들 중에는 학문적으로 한국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일부 보급 대상자였다.

세종학당은 국립국어원 주도로 지난해 처음 설립되기 시작해 올 6월 현재 중국, 몽골,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미국 등 5개국에 17곳이 문을 열었으며, 6개국 18곳은 설립 협정을 맺은 상태다. 2012년까지는 오대양 육대주에 걸쳐 모두 60곳으로 늘어날 예정이다.

세계 각국은 지금 자국어 전파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경제성장을 등에 업고 국제무대에 강자로 등장한 중국은 지난해까지 140개의 ‘공자학원’을 설립했으며, 독일(괴테 인스티튜트, 238개), 프랑스(알리앙스 프랑세즈, 1074개), 영국(브리티시 카운슬, 238개) 등도 자국어 보급기관 설립에 박차를 가해 왔다. 이 같은 자국어 보급기관 설립 붐은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 확대 전략과 무관치 않다.

세종학당은 일방적인 언어 보급보다 현지 문화 존중을 바탕으로 상호이해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언어가 가진 ‘문화이해의 코드’라는 특성을 충분히 살려 외국인들이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한류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국립국어원은 아시아 지역 5개 언어로 만들어진 초급 한국어 교재를 이미 자체 개발해 세종학당 표준교재로 보급하고 있다. 교재에 사용된 언어는 중국어, 베트남어, 타갈로그어(필리핀어), 태국어, 몽골어 등이다

 

전각예술가 고암 정병례

"디자인으로서 한글 가능성 무한"

‘포트폴리오’. 조금 떨어져서 읽으면 포트폴리오란 글자가 매직아이처럼 떠오른다.

가까이 들여다 보면 자음과 모음이 각각 담긴 네모난 공간 속에 색색의 물고기도 있고 굽이치는 물결도 있다. 전각을 설치미술, 전각판화, 퍼포먼스, 레이저 빔, 애니메이션으로까지 확장시킨 ‘혁명적’ 예술가 고암 정병례 씨의 작품이 망라된 포트폴리오의 표지로, 그것은 또 하나의 예술이었다.

그의 작품은 지하철 역사마다 붙어있는 서화액자 ‘풍경소리’를 비롯해 책 표지, 상업광고, 기업CI 등을 통해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지난해 반기문 유엔 총장의 ‘삼족오 직인’을 새긴 장본인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그에게서 ‘문화적 컨텐츠로서의 한글’의 가치와 한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글의 디자인적 측면이 부각되고 있는데, 한글이 가진 예술적 가치를 어떻게 보시나요?

한글은 기하학적이고 완벽한 글자로 한자의 상형성과는 많이 달라요. 우주 질서의 부호 같은 느낌이 강하지요. 그러면서도 미니멀 하고 모던한 느낌이 있어 디자인으로서의 한글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전각에 다양한 한글 서체를 새겨오셨습니다.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한자보다 한글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져야 하지요. 과거의 한글이 언어로서 위대한 창조물이었다면, 이 시대 예술가에겐 개인의 조형언어라는 창작의 과제가 주어집니다. 그릇이 바뀔 뿐 안에 담는 물은 그대로 에요. ‘포트폴리오’라는 글자가 전체로 보면 글씨이지만 하나씩 보면 예쁜 디자인으로 보이는 것처럼요.

갤러리이자 작업실의 이름을 새김아트라고 칭하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새기다’ 라는 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마음에 새기다’, ‘글씨를 새기다’처럼 물질과 정신을 포용하고 범주가 없어요. 내가 글을 쓸 때마다 ‘새김’으로 마무리 짓곤 했는데, 어느 날 무릎을 딱 쳤어요. 내가 하는 일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각하면 서예에서 파생됐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새김아트에선 그런 개념도 없어지는 겁니다. 이름을 통해서 자유를 얻은 거죠.

예술성에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하지 않으신 이유라면…?

25년 전부터 해외에 전각 예술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혼자서는 아주 힘이 들어요. 정부지원을 받으려고 디자인협회 가입도 해보려 했지만 매출, 직원 수 등 자격 조건이 아주 까다롭죠. 학맥이나 학파가 없어 다른 통로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열심히 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구조가 개인의 퀄리티를 검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문화 컨텐츠는 소멸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쓰다. 한글의 디자인적 가능성을 확장시킨 국내 대표적 예술가 중 한 명이지만 그는 정작 문화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고군분투해온 덕에 내년쯤엔 해외진출의 길이 열릴 것 같단다. 최근 한국적인 문화, 특히 한글의 문화적 가치에 힘을 싣고 있는 정부의 세심한 ‘살핌’이 필요한 때다.

■고암 정병례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1992), 대한민국서예대전 우수상(1992), 동아미술제 특선(1993) 등을 수상했다. 대한민국서예대전, 서울서예대전 등의 초대작가, 여러 공모전의 심사위원, 단원미술제 운영위원 역임 등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작품으로는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 영화 ‘娼 -노는 계집 창’ ‘오세암’, MBC 베이징 올림픽 타이틀,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 책 표지 등이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로 있다.

 

한글, 디자인 예술로 화려한 변신

캘리그래피·한글 춤·예술작품 등 문화 콘텐츠 소재로 각광

1- 2006년 2월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 '달빛그림자'라는 주제로 출품된 한글 디자인 의상디자인 | 이상봉글씨 | 장사익
2- 아트센터 나비, '이상한글'전에 전시된 변지훈의 '정신병'
3- 백자 한글 투각병 | 전성근

소통의 시대, 한글이 문자가 아닌 ‘이미지적 소통’으로 주목 받고 있다. 우회적이면서도 세련된, 예술적 소재로서의 한글이 높은 가치를 인정 받으면서 새삼 한글을 소재로 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보화 시대, 과학성과 실용성을 가진 한글에 쏠렸던 이목이 한글 가치에 대한 재인식과 더불어 한류 속에서 한글이 국가 브랜드를 높일 문화상품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 정책 역시 1,2년 전부터는 언어순화보다는 디자인 산업으로서의 한글의 가치에 대한 논의가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한글의 화려한 변신에 주목하는 요즘, 디자인과 예술에 채색되어온 다양한 빛깔의 한글을 만나본다.

한글 자체의 글씨체 개발을 통해 한글의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캘리그래피(손글씨)는 어쩌면 순수미술과 함께 한글 변신의 최초의 주역이 아닐까 싶다.

생활에서 쓰일 수 있는 모든 글씨를 붓을 사용해 개성 있는 필치로 써낸 글씨를 의미하는 캘리그래피. 90년대 중반 이후 서서히 관심을 받다가 2000년도부터 ‘국화꽃 향기’, ‘댄서의 순정’ ‘타짜’ ‘혈의 누’ 등 다양한 영화의 타이틀로 사용되면서 음반과 북 커버, 광고 디자인, 포스터 등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이는 단순히 글씨체라기 보다 영화, 음반 등 상품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존재로까지 의미가 넓어지면서 디자인으로서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캘리그래피가 영화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1996년 상영된 임권택 감독의 ‘축제’의 포스터에서다.

서예가 여태명 교수(원광대)가 개발한 민체로 쓰여진 것으로, 당시 춘향가를 민체로 펴낸 것에서 발췌해서 사용했다. 또 하나의 서체의 형태인 타이포그래피(글꼴 디자인)는 현재 산돌 커뮤니케이션과 윤디자인 두 회사가 시장을 양분하고 있으며 컴퓨터 문서뿐 아니라 싸이월드 스킨, 문자, 글꼴 판매 등으로 시장을 다각화 시켰다.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여태명 교수는 ‘다소 늦은 감이 있다’고 말한다. “가장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캘리그라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있었고 런던의 경우엔 지하철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글꼴을 따로 개발해서 100여 년 전부터 사용해오고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올해 발족한 한국캘리그래피디자인협회의 회장을 맡은 여 교수는 일본, 중국과의 교류, 디자인으로서의 캘리그래피의 가능성 확대, 캘리그래피의 가격정책 정립 등 캘리그래피 발전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가고 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캘리그래퍼에는 이상현, 이규복, 강병인, 김종건, 김성태가 있으며,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는 안상수, 한재준, 이용제 등이 활약하고 있다.

무용의 캘리그라피라고 할 수 있는 밀물현대무용단의 ‘한글 춤’ 시리즈는 한글 조형미의 신체적 표현이다. 18년 동안 이숙재 교수(한양대)가 안무해온 ‘한글 춤’은 미국과 일본 공연을 통해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수없이 많이 받아왔다.

국내에서도 서울무용제 대상 및 안무상, 한국예술평론가협회의 최우수 예술가상, 한국무용학회의 무용대상 등 내로라하는 무용상도 휩쓸었다. <홀소리 닿소리>를 시작으로 <한글누리> <뿌리깊은 나무> <한글25시> <사맛디> 등 꾸준히 새로운 춤을 창작해 무대 위에 올려오고 있다. 오는 10월 14,15일에는 <한글 춤2350>을 선보이는데, ‘2350’이란 홀소리와 닿소리를 결합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완성형 문자의 글자수를 의미한다.

한글 디자인 상품을 이미 소비자에게 판매하며 매출을 올리고 있는 패션, 쥬얼리 브랜드와 쇼핑몰도 있다. 산돌티움은 산돌 커뮤니케이션의 자회사로 올해 5월에 설립된 한글 디자인 전문 쇼핑몰이다.

티셔츠부터 핸드백, 구두, 넥타이, 생활소품까지 포용하는 이 쇼핑몰은 산발적으로 판매되던 한글 상품을 한 곳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달 1억 원 매출을 달성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가고 있고 독도 티셔츠만 지금까지 1만 여장이 판매되었다.

산돌티움의 신향숙 상무는 “기존의 디자인 전문 쇼핑몰의 경우 초기 50억에서 현재 200억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글 디자인의 가능성과 더불어 디자인 전문 쇼핑몰의 가능성을 보고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면서 “디자인 패턴 공급을 통해 영세규모에 기업에 기초적 디자인 경쟁력을 확보시키고 해외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인사동 입구 조그만 한글 디자인 문화상품 전문점에서 출발한 이건만 AnF는 인사동 2호점을 내고 올해에는 롯데백화점 본점에 매장을 오픈, 세계적인 브랜드 제품과 경쟁을 시작했다. 한글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넥타이, 스카프, 지갑, 핸드백 등의 의류와 액세서리 등의 제품은 모두 핸드메이드로 명품을 지향하고 있다.

‘한국 전통문화예술의 현대화, 세계적 브랜드화’라는 슬로건으로 출범한 이건만 AnF는 롯데백화점의 전 지점에 매장을 열 계획이며 해외 진출도 계획 중이다. 패션 쥬얼리를 제작 판매하는 ㈜니은은 2001년 홍대 부근에 문을 연 니은공방을 전신으로 한다. 미니멀 하면서도 독창적인 디자인을 가진 ㈜니은의 제품은 한글을 비롯한 한국의 미가 담겨있다.

4- 인사동 쌈지길 '여보시오'전에 전시된, 장준석의 'Fantasiless'
5- 나전칠기 한글 쌍합 보석함 | 이상숙

2002년 7월 서울시 지원 공식업체로 선정되어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개최된 ‘캘리포니아 기프트 쇼’에 참가해 한글 디자인 쥬얼리를 선보였으며 해외 바이어들에게 호응을 얻으며 지금도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에게 한글자음으로 만들어진 펜던트가 인기품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압구정에도 지점을 내며 사업을 확장해간 ㈜니은은 그 이름 역시 순수 한글인 ‘ㄴ’의 발음을 표기한 것이다. 한글 의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이상봉은 의상 외에 여성용 속옷, 침구류, 아파트 현관문, 핸드폰, 프랭클린 플래너 다이어리 등에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LG 샤인폰 디자이너스 에디션 시리즈에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손글씨로 적은 디자인을 새겨 넣어 신선한 예술성을 선보였다.

한글을 소재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도예 분야에 무토 전성근, 전각(새김아트) 분야의 고암 정병례, 서각 분야에 소석 조명웅, 서양화에 노영선, 판화가 이철수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신진 작가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04년 이후 매년 한글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한태상(서울교대 미술교육과 교수)과 심리학과 미술 전공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노승관으로, SK본사 4층 아트센터 나비에서 열리는 <이상한글> 전시회에서 움직이는 한글 글꼴을 이용해 간판을 추상화한 설치작품을 내놓아 수작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글 디자인 혹은 공연을 선보이는 예술가와 디자이너 집단 이외에 이들을 정책 담당자들과 연결하거나 방향제시의 역할을 하는 한류전략연구소와 한글 디자인 작품을 만드는 다양한 작가와 기업이 모여 결성한 한글사랑운동본부도 문화 컨텐츠로서의 한글을 위해 힘쓰는 숨은 일꾼들이다.

한류전략연구소의 경우 지난해 한글날의 첫 국경일을 맞아 서예, 서각, 전각, 현대무용, 의류와 작품 디자인, 정보통신기기, 광고 등 예술과 문화상품 디자인에 적용된 한글의 다채로운 형상을 담은 화보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562돌째 맞는 한글날을 맞아 다양한 한글 관련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인사동 쌈지길 앞마당에서 <한글 옷이 날개>라는 테마로 한글 디자인된 옷의 패션쇼가 지난 5일에 펼쳐졌고 10월 19일까지 갤러리 쌈지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선보이는 ‘여보시오 전’이 열린다.

SK본사 아트센터 나비에서는 10월 7일부터 11월 18일까지 한글과 뉴미디어의 만남을 선보이는 <이상한글> 전시회를 연다.

타이포그래피, 한글의 사운드 아트, 스토리텔링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한글의 의미적 접근 등 실험적인 형태의 한글의 변신을 만날 수 있다. 기술중심의 ‘디지털 강국’을 넘어 ‘디지털 문화 강국’으로 전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취지로 기획된 이번 전시회는 서울 이후 뉴욕과 호주 멜번으로 이어진다.

한류전략연구소의 신승일 소장은 “유인촌 장관 부임 이후에 한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올해 안에 일본 동경과 오사카에서, 내년에는 중국에서도 문화 컨텐츠로서의 한글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 4월에 <한 스타일> 전시회가 일본에서 있었는데, 한류로 인해 시장이 생겨났다면 이제 신한류 컨텐츠인 한글의 다양한 문화상품을 소개할 때라는 사실을 실감했다.”는 말로 문화 컨텐츠로서의 한글의 가능성과 가치를 시사했다.

* 한 스타일(Han Style)이란? 한글, 한식, 한복, 한지, 한옥, 국악의 6대 전통문화를 대상으로, 전통문화컨텐츠의 세계화 전략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2005년부터 수립, 추진하고 있는 중장기 계획.

■ 한글 문화관 건립 토론회

불과 몇 년 사이 문화적 컨텐츠로서 급격하게 진화하는 한글에 대해 정부가 본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기존의 언어순화나 한글 국외보급에 대한 논의와는 사뭇 다른 각도의 접근인데, 한글의 담을 그릇이자 하나로 모아줄 구심점의 필요성 대두로 최근 ‘한글 문화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주최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 논의의 일환으로, 지난 10월 1일 국립민속박물관 강당에서 ‘한글 문화관 건립’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회가 펼쳐졌다.

토론회는 ‘한글 문화관, 왜 필요한가’를 시작으로,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 등 3부로 나뉘어 주제 발표와 함께 토론이 이루어졌다..

1부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김현 박사(한국문화관광연구원)는 2006년에 개관한 브라질의 언어박물관을 사례로 들며 한국의 대표 문화 상징물이자 문화적 거점이 될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한글 문화관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토론회에 참석한 이기만 교수(문화평론가)는 ‘한글의 문화적 가치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관광산업의 활성화인지’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 설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글 문화관, 무엇을 담을 것인가’의 발표자 한재준 교수(서울여자대학교)는 한글 창제 정신과 철학, 실체를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전시실과 자료실뿐 아니라 체험교육관, 공연장, 야외 무대, 한글상품점, 회의실, 그리고 진화하는 한글을 위한 한글 연구소 및 디자인 학교 등을 두루 갖춰 한글과 관련된 모든 문화의 거점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시덕 학예연구원(국립민속박물관)은 토론자로 참여해 일회적으로 자료를 모으는 ‘죽은’ 공간이 아닌, 꾸준히 새로운 자료가 채워지고 변화하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마지막 ‘한글 문화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서는 실제적인 입지조건을 검토하고 건축물로서의 이미지화, 건립 추진전략 등이 논의 되었다.

발표를 맡은 이명식 교수(동국대학교 건축공학부)는 파리의 에펠탑과 런던의 런던아이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랜드 마크로서의 입지의 중요성과 한글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상징적 위상을 지닐 수 있는 건축물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설명했다.

한편, 적당한 부지로는 경복궁 옆의 기무사 부지나 이전 계획이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주변 등 서울시내와 파주 출판단지나 경기도 여주의 세종대왕릉 주변 등 서울 근교를 제시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토론회를 통해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거론한 구체적 사안들에 대해 타당성 검토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세계 으뜸 가는 한글의 힘

500년 휴면기 불구 인터넷 타고 전자 정보화 시대 주도

김미경 mikim@ddc.ac.kr

한글의 문선, 식자과정을 한국최초로 자동화하여 한글인쇄기술에 새기원을 마련한 컴퓨터 시스템 (1979년 10월 9일자 한국일보).(위)
한국일보가 최초로 시도한한글 기사 전송기.(아래)

세계문자 체계의 대가인 제프리 샘슨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매우 작고 아주 먼 나라이지만, 두 가지 점에서 언어학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나라이다. 한국은 13세기에 금속활자 인쇄술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였다. 그리고 15세기에 세종대왕이 오늘날 한글이라고 부르는 완전히 독창적이고 매우 훌륭한 음운표기 문자를 창조했다. 많은 학자들이 한글을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체계’, 혹은 더 간단히 ‘세계 최상의 알파벳’이라고 부르고 있다.”(재프리 샘슨,<세계의 문자 체계>의 저자)

세계 언어학자들의 한글의 과학성에 대한 찬사는 이제 웬만한 한국인은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이다.

그러나 샘슨 박사의 평가는 우리에게 뼈아픈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과거 한국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고도 구텐베르크만큼 그 기술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세계 최고의 문자인 한글을 발명하고도 500년 동안이나 한글을 활용하지 않았던 무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과거의 한국은 정보 기술에 관한한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각과 재주로 최고의 창의성을 발휘해서 세계 수준의 도구를 발명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발명한 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 문자의 힘

예일 대학의 헤이블릭 교수는 그리스 알파벳의 출현은 불이나 바퀴의 발명처럼 서양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위대한 도약이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화약과 나침반을 배워갔던 서양이 동양을 제치고 세계의 기술과학을 주도하는 이유는 서양인이 동양인에 비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서양인들이 누구나 배우기 쉬운 그리스 알파벳을 발명하고, 그 알파벳을 활용하여 2000년간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이 서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보다 200년 뒤에 금속활자인쇄술을 발명하고도 서양이 전 세계의 지식과 정보를 주도하게 된 이유도 그들의 문자가 알파벳이었기 때문이다. 알파벳으로 인쇄된 책이 서구 사회 내에서 지식과 정보를 획기적으로 확산시키는 동안, 동양의 한자 인쇄물들은 소수 엘리트들의 정보 독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현재 전 세계 책의 70% 이상이 로마알파벳으로 출판된다. 이런 그리스 로마 알파벳의 가장 큰 힘은 알파벳이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점에서 나온다. 디린저 박사의 말처럼 인구의 1% 정도만 활용 가능했던 이집트문자가 귀족엘리트 문자인 반면에, 27개의 음소문자인 알파벳은 누구나 쉽게 배워 정보와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민주문자였다.

알파벳의 민주성과 금속활자 인쇄술에 의한 대량생산이 결합되었을 때, 그 시너지 효과는 가히 폭발적이었으며, 우리는 이 둘의 결합을 정보혁명이라고 부른다. 샘슨 박사가 한국의 과거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이유는 알파벳의 힘과 활자 인쇄술의 힘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샘슨 박사의 감탄은 뼈아픈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금속활자 인쇄술과 그리스 알파벳을 능가하는 세계 최상의 문자인 한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이 두 기술을 결합할 안목이 없었던 것이 과거 조선의 한계였으며, 이는 한국사회의 지식과 정보의 공유를 500년 이상 지연시켰다.

그러나 500년의 휴면기를 거치고도 우리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한 인터넷 문화를 누리며 전자정보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잠자고 있던 한국이 오늘날 전 세계를 상대로 경쟁할 수 있을 만큼 급성장하여 정보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글을 우리의 문자로 채택하고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6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한글이 이루어낸 한국 사회의 발전과 정보 공유의 힘은 그리스알파벳이 2000년간 서구사회에 기여한 역할과 비교할 때 조금도 손색이 없을 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그리스 알파벳이 서양의 민주문자로 불리듯이, 한글은 동양의 민주문자이다.

오늘의 서구 문명 뒤에 알파벳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 뒤에는 한글이 있었다. 한글은 단 60년 만에 한반도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제 아무도 한국에서 한글을 멈출 수 없다.

그러나 한글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한글은 그 자체가 어떤 정신이나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며, 단지 정보 교환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다. 앞으로의 한글의 힘은 우리가 한글로 어떤 정보를 주고받으며, 한글로 어떤 정보를 후대에 남기는가에 달려있다.

■ 한글날의 의미

한국어학의 대가인 로스 킹 박사는 세상에서 문자가 창제된 날을 국경일로 정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남한은 10월9일(한글이 반포된 날), 북한은 1월 15일(한글이 완성되었다고 생각되는 날)에 한글날을 기념하는 것을 두고. 킹 박사는 한글에 대한 집착이 순수주의를 고집하는 문자 민족주의(scrip nationalism)의 표현을 아닌가하고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글날을 기념하는 이유는 애국심이나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한글날을 기념하는 이유는 지난 60년간 한글로 이루어낸 한국의 발전을 통해 문자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한글이 얼마나 실용적인 도구인지를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의 힘을 바탕으로 21세기 정보 사회에서 이루어낼 세계로의 비약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한글날은 한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오늘 한국의 정보의 공유를 힘을 돌아보며, 민주문자의 중요성을 기억하는 날이다. 한글을 통해 한국인의 창의성과 잠재된 가능성을 확인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세계로 나가는 발판으로 삼는 날이다.

■ 한국일보, 국내 최초로 한글인쇄 기계화

30년 전인 1979년 10월 9일, 533돌 한글날인 이날 한국 언론사는 인쇄문화의 새 장을 열었다. 한국일보 전산팀이 국내 최초로 한글의 기계화 작업을 완성한 것. 한글의 자동문선과 자동사진식자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컴퓨터ㆍ시스템을 개발, 이제까지 문선공이 활자를 하나씩 고르던 원시적 공정에서 탈피해 한글인쇄의 새시대를 개척한 것이다.

한글인쇄의 기계화로 종래 숙련된 문선공이 1시간에 1,000자 정도밖에 뽑을 수 없는 자수를 이의 10배에 달하는 1만자를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타를 CRT(음극선관)의 화면(디스플레이)에 직접 교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쇄에 드는 시간ㆍ경비를 종전의 10분의1로 줄였다. 또한 컴퓨터에 내장된 프로그램에 따라 글자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편집까지 마칠 수 있게 됐다.

당시의 개발 총책임자는 장재구 한국일보 LA 지사장(현 한국일보 회장). 장재구 지사장은 70년대 초부터 한글기계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 미국과 일본 등지의 최신 인쇄기술 정보를 입수, 종합분석해 왔으며 한국일보 전산팀은 78년 1월 한글기계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해 1년 9개월의 각고끝에 한글자동문선 및 자동식자 컴퓨터ㆍ시스템을 개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문의 가로쓰기, 한글ㆍ한자 겸용 시스템이 가속화되는 등 인쇄와 출판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 김미경 교수

대덕대학 교양과 교수,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한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