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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고 머슴새 우는 초록 들에서

醉月 2009. 7. 18. 11:54

바람 불고 머슴새 우는 초록 들에서

 

휴가철이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다. 눈 밝고 사려 깊고 조용한 사람이라면 전통 마을 숲으로 떠나보자.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이 기다릴 것이다

어디론가 훌쩍 ‘증발’해 버리고 싶은 계절이다. 하지만 막상 여행 가방을 꾸리려 하면 막막하다. 어디로 가야 제대로 쉰담? 오래된 ‘마을 숲’은 어떨까? 외진 마을 앞에 푸른 목도리처럼 늘어서 있는 마을 숲은 무료하고 따분해 보인다. 그러나 한 발 들여놓으면 분위기가 다르다. 다채로운 나무·곤충·꽃·바람·새가 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할 풍경을 펼쳐 보인다. 사려 깊고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천마을 숲에서 노루 새끼나 장수풍뎅이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속이 갑갑한 사람은 물건리 어부방조림(남해)이나 살구미마을 밤나무 숲(인제)에서 오감이 열리는 쾌감을 체험할 수도 있다.

<시사IN>은 바다보다 더 시원하고, 산보다 더 그늘이 짙은 마을 숲을 찾으려고 전국을 일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름다운 마을 숲’ 10여 곳과 ‘사연이 있는 숲’ 10여 곳을 찾아냈다. 마음에 여유가 있다면 그 숲속이나 주변에서 하루이틀 묵으며 숲이 주는 무한한 바람과 맑고 고운 소리와 초록 물로 ‘영혼의 샤워’를 하기 바란다. 자, 바람 불고 새 우는 ‘7월의 숲’으로 살금살금 들어가보자. 부디, 행운을 빈다.

   

 

그늘이 짙은 우리나라 마을 숲은 200군데가 넘는다. 이름도 숲정이·숲마당·당숲·성황림·수구막 등 다양하다. 그중 대부분의 숲은 역사·문화·신앙 등을 바탕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숲에도 개발 바람이 불어 하루아침에 공장이나 논밭으로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행히 강원도·경상도·전라도 바닷가와 들에 머리채 무성하고 그늘이 짙은 숲이 더러 남아 있었다. 이들 숲은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닳고 상처받은 우리의 심성을 하염없이 어루만져주고, 우리의 무딘 감성을 자극하고 흥분시켜 주기 때문이다.

❶‘빛의 마술’이 멋진 오리장림(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화려한 꽃이 다 지고 난 여름 숲에 뭐 볼 게 있을까 싶다. 그런데 오리장림에 가서 생각이 바뀌었다. 멀리서 볼 때는 초록 이파리뿐이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만물상이 따로 없다. 초록의 농담과 나뭇잎 고유의 결과 무늬가 눈부시다. 빛의 각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나무껍질의 표정은 또 어떤가. 20~350년 된 282그루의 말채나무 느티나무 갈참나무 풍게나무 소나무 등이 연출하는 ‘그림자 연극’도 소박하지만 오묘하다. 해의 높낮이, 빛의 광도에 따라 달라 보이는 나무 그림자는 오리장림을 ‘빛의 숲’ ‘마술의 숲’으로 변모시킨다.
바람이 불면 숲은 또 달라진다. 맨 처음 버드나무 이파리들이 스스스거리며 연주를 시작하면, 뒤이어 말채나무와 풍게나무의 둥근 이파리들이 사샤샤사사 소리를 내며 화음을 맞춘다. 간간이 숲을 두 개로 쪼개놓은 도로로 자동차가 질주하지만, 초록이 짙고 그늘이 넓은 오리장림에서는 그마저도 풍경이 된다. 숲 언저리 매점 주인은 “3월에 시향을 지내는데 그때 오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이맘때는 새벽녘이 더 운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숲이 넓고 나무들 덩치가 커서 숨바꼭질이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놀이를 하면 좋을 듯하다. 


      ⓒ전문수

❸노하리 숲에는 유난히 고사목과 딱정벌레가 많다.


❷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살구미마을 숲(강원 인제군 인제읍 남북리)
살구미마을 숲은 기묘하다. 우선, 공기가 어두침침해 당장에라도 도깨비가 튀어나올 듯하다. 날벌레와 거미줄은 또 어찌나 많은지…. 눈썹에 들러붙은 거미줄을 떼어내며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햐!” 하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짙푸른 밤나무 이파리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금빛 햇살. 그 빛은 조각조각 떨어져 나무 둥치에 내려앉거나, 풀잎에 떨어져 다시 산산이 부서졌다.
숲밖에서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숲속 개망초 흰 군락이 꿈처럼 몽롱하다.

갑자기 새들의 목청이 바빠진다. 인디언들은 6월을 ‘와웨 페심(알의 달)’이라 부른다. 새들이 알을 가지려 화려하게 단장하고 달콤한 노래를 부르는 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때 부르는 노래와 알을 낳고 부르는 노래가 다르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7월초 살구미마을 숲 새들은 이미 알을 낳은 듯했다. 여기저기에서 경계의 목소리가 드높다. 끼익 끽끽, 끼끽….
200여m 뒤쪽에 내린천 강물과 꽤 널찍한 모래톱이 펼쳐져 있어, 강 건너에서 보면 고흐와 박수근의 풍경화가 따로 없다. 근처 인제읍내에 직접 면을 뽑아 평양식 물막국수와 함흥식 비빔막국수를 내는 남북면옥이 있다. 집은 허름하지만 메밀의 고소함은 그대로 살아 있다. 

 

     ⓒ전문수

❶오리장림에서는 숲의 마술이 끊이지 않는다    
 
❸나와라, 딱정벌레-노하리 숲(전남 장수군 장수읍)
아름드리나무가 가득한 숲(32~33쪽 사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드높다. 그네를 타고 공중을 가르는 아이, 고사목의 껍질을 뒤집는 아이, 허리를 숙인 채 잠자리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는 아이….
노하리 숲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학습장이었다. 딱정벌레를 꼬여내려 고목에 팬 검은 구멍에 꿀물을 뿌리던 아이가 소리친다. “야, 이리 와봐!”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와 구멍을 파헤치지만 나무 가루뿐이다. 허탈한 표정이 동동동 뜬다. “죽은 나무 구멍에 꿀물을 뿌리고 새벽에 나오면 어슬렁거리는 장수풍뎅이를 잡을 수 있는데 아쉽다”라고 박찬우군(장수초등학교 5학년)은 말했다.
노하리 숲은 그 역사가 길다. 300여 년 전에 선박 모양으로 생긴 마을의 운세가 좋으라고 돛대의 의미로 조성되었다. 이후 개발과 풍상에 시달리다가 몇 년 전 급기야 고가도로를 사이에 두고 큰 숲과 작은 숲으로 쪼개졌다. 아이들은 큰 숲·작은 숲 가리지 않고, 쓰러진 고사목에 매달렸다. 허탕을 친 아이 서너 명은 작은 숲 근처 냇가로 달려갔다. 민물조개를 잡겠단다. 장수인들은 노하리 숲을 “장수인의 귀복(貴福)”이라고 추어올린다. 여느 숲에 없는 게 풍부하니 당연하다. 아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❹짧은 ‘초록 치마’-진밭마을 숲(강원 원주시 문막읍 취병리)
진밭마을 숲의 첫 느낌은 짧은 ‘초록 치마’였다. 바람에 나풀나풀, 아담하고 시원하고 예뻤다. 옛날에는 호랑이까지 출몰했다던 숲인데, 지금은 숨바꼭질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좁다. 숲 안쪽에 도로가 나고 주택이 들어선 탓이다. 다행히 묵은 들뽕나무 갈참나무 팥배나무 숲의 그늘이 짙고, 나무들의 표정이 다양해 운치는 살아 있었다.
평상에 앉으니 산들바람의 시원함과 졸졸졸 물소리가 주름진 마음을 빳빳하게 펴준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 임수경씨가 한마디 툭 던진다. “이곳은 숲보다 마을 잔치가 더 멋지지!” 임씨에 따르면, 23가구뿐인 작은 마을에서 사계절 내내 잔치가 열린다. 봄 저수지 축제, 여름 미술잔치, 가을 식용버섯 축제, 겨울 썰매축제…. 또 축제 때면 마을 끝에 있는 신화미술관(관장 김봉준)에서는 도자기·판화 체험이 가능하고, 숲에 붙어 있는 염색 체험장에서는 풀과 꽃을 이용한 염색 체험도 가능하다. 잘 가꾼 숲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진밭마을 숲은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전문수

❷밤나무로만 이루어진 살구미마을 숲.


❺통째 갖고 싶은 어부방림(경남 남해시 삼동면 물건리)
황홀하다! 이 글로는 보고 들은 것의 10분의 1도 표현하지 못할 것 같다. 호수 같은 바다, 그 바다를 에워싼 초록 숲, 그리고 선선한 바람과 온갖 소리들…. 멀리서 보면 어부방림은 마치 바닷가에 불시착한 뒤 그대로 굳어버린 초승달 위에 나무들이 쑥쑥 웃자라난 것 같다.
1.5km 길이의 숲도 상상력을 자극한다. 문명의 발톱이 닿지 않은 원시 그대로의 풍경. 소롯길 주위에 나무와  풀이 뒤엉켜 있고, 바닥에는 단단하고 둥근 돌이 이리저리 뒹군다. 그 위로 박지성의 다리통 같은 나무뿌리들이 제멋대로 뻗어 있다. 그 뿌리 위에 잠시 앉자, 나뭇잎을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 바다내음을 머금은 풀 향기가 그윽하다. 고개를 들자 바람에 까불거리는 이파리들도 보이고, 흘러가는 구름도 보인다. 맑고 신선한 기운 덕일까. 등목을 한 듯 온몸이 시원하다.
숲은 사람의 마음뿐만 아니라 바다도 기름지게 하나보다. 수십 년간 멸치잡이 선박을 띄웠다는 김영옥씨(82)는 “이곳 앞바다에서 잡히는 멸치가 동해·서해·남해 멸치 중 가장 맛있다”라고 자랑했다. 덧붙여 그는 “숲에서 길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며 농을 건넸다.

만약 신께서 숲 하나를 주신다면 어부방림을 통째 달라 하고 싶다. 다른 바닷가 숲처럼 이 숲도 300여 년 전에 소금 바람과 폭풍, 해일을 막으려 만들었다. 주변에 독일마을과 해오름예술촌이 있다. 해오름예술촌에서는 알공예·천연염색·도자기 체험을 할 수 있다. 멸치의 고장답게 싱싱한 멸치 요리가 풍성하다. 


     ⓒ전문수

❹주민들이 유용하게 이용하는 진밭마을 숲. 

❻도천마을 숲에서 노루 새끼를 만나다(경북 영덕군 남정면)
도천마을 숲이 생긴 것은 400여 년 전이다. 마을 건너편 산세가 뱀 머리 형세(蛇頭穴)라, 그 사악한 기운이 마을에 직접 닿지 않게 하려 숲을 조성했다고 전해온다. 그 믿음에 따라 주민들은 지금도 지극 정성으로 숲을 가꾼다. 그 덕에 풀들이 쑥쑥 자라는 한여름인데도 숲은 단정하고 조화로웠다. 근처에서 논농사를 짓는 서천구씨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숲 중앙에 있는 제각에서 제사도 지낸다”라고 소개했다.
오랜 세월과 비바람을 이겨낸 시무나무 느티나무 신갈나무 쉬나무 말채나무 팽나무 등은 편무암처럼 거무튀튀하거나 울뚝불뚝했다. 느티나무와 신갈나무 같은 층층나무가 많은 덕인지 밀잠자리와 풀벌레도 흔했다. 가끔 휘파람새가 기분 전환을 시켜주듯 가늘고 고운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풀숲이 궁금했는지 모르겠다. 늙은 팽나무 곁을 지나 풀숲 안쪽에 발을 들여놓는데,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제법 큰 동물이 누웠다 일어난 자리에 털복숭이가 보인 것이다. 노루 새끼였다! 마을 숲에서 노루 새끼를 만나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만약 <이웃집 토토로> 같은 정령이 산다면 꼭 이 숲에서 살 것 같다. 도천마을 숲은 그만큼 신비롭다. 근처에 모래밭이 제법 너른 장사해수욕장이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다. 또 영덕대게로 유명한 강구항도 가깝다. 도천마을 숲 옆에서도 민박이 가능하다.   

 

   ⓒ전문수

❺초승달 모양의 어부방림은 멀리서 봐도, 숲 안쪽에서 봐도 빼어나다. 동네 이름처럼 정말 ‘물건’이다.

  

❼세 번 놀라는 덕동마을 숲(경북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 첫번째 놀람. 우선, 별안간 정자가 나타난다. 물가의 예사롭지 않은 나무들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면 나무 뒤에서 불쑥 1687년께 지었다는 용계정(龍溪亭)이 나타난다. 정자는 낡았지만 운치 있다. 두 번째 감탄사는 용계정 배롱나무 옆을 지날 때 터진다. 눈앞에 노송과 자그마한 연못, 물풀이 어우러진 ‘황금빛 선경’ 앞에서다. 푸른 물풀 위에 별 가루처럼 흩어져 있는 노란 어리연꽃이 장관이다.
또 한 번 여행자를 놀라게 하는 것은 600여 년 된 은행나무와 200여 년 된 향나무다. 향나무는 너무 힘든지 옆으로 기우뚱 누웠고, 은행나무는 600년 세월을 영양으로 삼았는지 아직도 청년처럼 꼿꼿하다

 인간은 온갖 보약을 다 먹어도 100년을 살기 힘든데, 도대체 600여 년을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근처에 청소년 수련원과 솔밭이 있어 마음먹으면 한나절 이상 편안히 쉴 수 있다. 


 

     ⓒ전문수

❼햇살이 짱짱한 날 덕동마을 숲은 어리연꽃과 연못 수면 덕에 황금빛으로 빛난다.


❽침이 고이는 대곡마을 숲(경남 사천시 정동면) 숲을 조성한 이유가 재미있다. 곡식을 까부는 키처럼 생긴 마을 한가운데로 물이 흐른다. 그런데 풍수지리에 의존하던 옛 어른들은 이것이 못마땅했다. 물과 함께 마을의 복이 빠져간다고 믿은 것이다. 그 개울가에 그물처럼 소나무 숲을 조성하면 빠져나가는 복이 걸리지 않을까? 그 믿음이 멋진 숲을 남겼다.
멀리서 보면 평균 연세 160세라는 할아버지 소나무들(150여 그루)이 줄지어 어디론가 가는 듯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용트림하는 듯 기괴하다. 둘레 4m가 넘는 소나무를 껴안자 온몸으로 수액이  몰려드는 듯 정신이 맑아진다. 

숲이 넓고 바닥에 키 작은 잡초가 융단처럼 깔려 있어서 막 달리고 싶어진다. 
가을에 대곡리 숲은 더 근사해진다. 인근의 과일나무에서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맛인 사천단감과 사과가 푸짐하게 생산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대곡리 앞에서 ‘감이 물처럼, 사과가 쌀밥처럼 많은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가을 숲을 생각하자 벌써 침이 고인다.  

 

    ⓒ전문수

❽대곡리 숲은 넓어서 마구 달리고 싶다.  

❾여우가 돌을 쌓던 수월마을 숲(경남 통영시 도산면)
숲이 마을 대문이라니, 멋지다! 바닷가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주민이 문턱을 넘듯 수월마을 숲을 지나 마을로 이어진 고샅길에 발을 내딛는다. 그 대문을 슬쩍 밀고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선다. 1000여 년 전에 방풍림으로 조성했다더니, 과연 긴긴 역사에 걸맞게 고색창연했다. 나무와 덩굴 식물들은 빛 한 줄기 들일 수 없다는 듯 촘촘히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 숲을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끊임없이 흔든다. 잠시 파도에 흔들리는 배 안에 있는 듯, 멀미가 인다.
저 멀리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주민 김 아무개씨(60대 중반)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는 더 울창했지. 일제가 나무를 베어가기 전까지는. 내 어릴 적에는 무서워서 숲에 내려오지를 못했어. 요 근처에 주막이 하나 있었거든, 한밤에 어른들 심부름으로 술 받으러 내려오면 여우가 돌을 쌓곤(뒷발로 자갈밭을 차는 행위) 했지.”

여우가 들락날락했을 숲을 다시 걸어보니, 나뭇잎과 나무줄기 사이로 푸른 바다가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사이로 들리는 졸린 듯한 파도소리. 동요 ‘섬집 아이’ 속의 아이가 들었을 파도소리가 저랬으리라. 저절로 가사가 흘러나온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전문수

❾수월마을 숲은 마을 대문이자 전설이다.


❿두호마을 ‘바람의 숲’(경남 고성군 마암면)
우연일까. 두호마을 숲에는 유난히 바람이 많았다. 두 팔을 벌리면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와 온몸을 간질였다. 20여 년 전 이 숲에는 바람뿐만 아니라 민초의 목소리도 출렁거렸다. 1988년 수매 거부운동과 1989년 ‘잃어버린 밀씨를 찾아서’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외국 소 수입으로 소 값이 폭락했을 때 첫 소몰이 시위와 봉화가 오른 곳도 이곳이었다. 그래서 두호마을 숲은 민중운동사에서 ‘민주 동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호마을 숲은 400여 년 전 조성되었다. 북쪽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을 따라 팽나무와 서어나무·느티나무 등속을 심기 시작했다. 그중 300년간 살아남은 팽나무 허리에는 매년 정월 초하루에 금줄이 드리워진다. 동제(洞祭)를 지내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둘로 나뉜 숲에는 우리네 인생처럼 울퉁불퉁한 둔덕도 있고 움푹 팬 홈도 있다. 자료를 보니, 한국전쟁과 태풍이 두 번 휩쓸고 간 탓이다. 다행히 숲은 고적하고 깨끗했다. 아쉽게 몸을 돌리는데, 누군가 옷깃을 잡아 흔든다. 아니나 다를까, 또 바람이다! 근처 철새 도래지에서 탐조 체험과 우리 밀 재배 체험이 가능하다. 가끔 숲만큼 푸르고 시원한 숲속 음악회도 열린다.   

 

     ⓒ전문수

❿두호마을 숲은 ‘민주 동산’ 소리를 듣는다.

 

11‘근육 나무’ 서어나무 숲(전북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남원 주천 쪽에서 서어나무 숲으로 가는 길은 눈부시다. 산 구비를 하나 돌 때마다 기암괴석과 울울창창한 숲이 연방 나타나 운전을 방해한다. 500여m의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순간 또 한 번 시선을 빼앗겼다. 가슴이 탁 트이는 드넓은 분지! 서어나무 숲은 그 분지 끝에 배처럼 둥둥 떠 있었다. 나무가 64그루밖에 안 될 정도로 작았지만 숲은 빼어났다. 150살 이상 되었다는 나무들도 ‘근육 나무’라는 별명에 걸맞게 키가 크고 ‘근육’은 불끈불끈했다.
나무 하나하나를 살펴보니 외피도 달랐고, 키도 달랐고 모양도 달랐다. 이래서 나무 하나하나가 역사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한 나무 전문가는 인간을 나무와 동격이 아니라, 나뭇잎과 동격이라고 주장한다. 나무의 한해살이가 인간 삶의 압축과 비슷하다지만, 수백 년을 산 고목의 인생과 수십 년을 산 인간의 그것과 같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봄이면 돋고, 가을이면 물들고, 겨울이면 종내 떨어져 내리는 잎이 인간과 흡사하다”라는 말이 귀에 쟁쟁하다.

나무가 높아서일까. 새와 풀벌레들의 목청도 꽤 높았다. 근처에서 상추 농사를 짓던 서명석씨는 “북풍을 막으려고 만든 숲이다. 그러나 어려서는 이곳에 도깨비불이 많다는 소리 때문에 쉽게 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숲은 사방으로 열려 있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 탓에 도깨비들이 모두 저 멀리 도망갔는지 모른다. 그래도 서어나무 숲은 여전히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근처에 지리산 숲길이 조성되어 있어, 하루이틀 묵으며 도보 여행을 겸하면 금상첨화다.   

     ⓒ전문수

어느 각도에서건 사진만 찍으면 작품이 되는 둔동마을 숲정이.


12 황소개구리가 미운 둔동마을 숲정이(전남 화순군 동북면 연둔리)
둔동마을 숲은 멀리서 보면 단순히 ‘푸른 목도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안쪽에 들어서면 매일매일 새로운 빛깔과 향기와 소리가 그득하다. 숲을 가득 채운 초록 물결과 빛의 하모니 덕이다.

 느티나무 버드나무 서어나무 등은 싱그럽다. 자신들과 연결된 낡은 시멘트 다리마저 아름다운 풍경으로 바꿀 정도로…. 그래서 둔동마을 숲정이에서는 어디에서 사진을 찍건 ‘엽서 같은’ 풍경이 인화된다.
이른 아침인데 벌써 돗자리를 편 사람이 여럿이다.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에 잔물결이 일렁인다. 그 물결 위에서 까만 물잠자리가 유희한다. 의자에 기대자 선선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그때 탈곡기를 과속시킬 때 나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연해 들린다. 위잉, 위잉…. 귀에 거슬려 평상에 앉은 동네 노인들께 여쭈니 황소개구리 소리란다. 저런! 그 소리마저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와불로 유명한 운주사가 그리 멀지 않다.

 

 

      ⓒ전문수

지리산 분지에 배처럼 떠 있는 서어나무 숲은 바람도 풍경도 시원하다. 

 

나무 껴안자 건강의 ‘묘약’이 온몸에 솨솨

숲이 주는 미덕은 한둘이 아니다. 나무가 내뿜는 살균 물질들은 기분을 가라앉히고, 신진대사를 촉진시키고, 불면증까지 없애준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숲이 주는 ‘선물’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침 숲과 한낮의 숲은 그 표정이 판이하다. 아침 숲은 막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하지만 한낮의 숲은 한바탕 뛰고 온 듯 지쳐 보인다. 이처럼 분위기는 제각각이지만, 아침·점심 숲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 안에 발 들여놓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는 점이다.

숲속 방문객의 기분을 흐뭇하게 만드는 도우미는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테르펜이라는 물질이다. 이 물질은 살균·진정·소염 등 20여 가지 이상의 약리 작용을 한다. 피톤치드는 테르펜 중에서도 가장 활발히 살균 작용을 하는 성분이다. ‘식물’을 뜻하는 phyto와 ‘죽이다·살균하다’를 의미하는 cide가 합성한 피톤치드는, 그 어원처럼 식물성 살균 물질을 총칭한다.

식물은 외부에서 적이 부딪치거나 자극을 가하면 자신의 몸을 방어하려고 피톤치드 같은 살균 물질을 발산한다. 그런데 이 물질이 의외로 인체 내에서 진정 작용을 유발하는 것이다. 신원섭 교수(충북대·산림과학부)는 테르펜이 “혈압을 안정시키고 맥박을 감소시키며, 안정된 상태에서 발현하는 뇌파를 증가시킨다”라고 말했다. 

테르펜, 편백나무가 가장 많아

     ⓒ전문수

오래전에 인디언들은 피로하거나 지치면 전나무를 끌어안고 한참을 있었다. 숲은 알면 알수록 더 정겹고 고마운 이웃이라는 생각이 든다.

 

숲속을 떠도는 음이온도 인체에 이롭다. 음이온은 피를 맑게 해주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불면증을 없애주는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음이온은 특히 물 분자운동이 활발한 습지나 계곡, 폭포, 그리고 광합성 작용이 왕성한 숲에 다분하다. 가령 도회지 실내에 떠도는 음이온 양을 1이라 하면, 교외에는 2.8~10이 맴돌고, 산야에는 10~26.7쯤이 떠돈다. 숲에는 그보다 훨씬 많아서 14.3~ 73.3이 서려 있다. 그 옛날 인디언들은 지치거나 피곤하면 전나무를 꽉 끌어안고 한참을 있었는데, 그 행위가 꽤 의미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어느 나무가 가장 왕성히 타르펜을 분출할까. 침엽수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편백나무나 서양측백나무가 월등히 많다. <숲해설 아카데미>(생명의숲 교재 편찬팀)에 따르면, 한여름 낙엽송과 소나무 그리고 왕소나무가 내뿜는 테르펜 양이 0.2~0.3이라면, 편백나무와 서양측백나무는 무려 4.0이나 된다. 가문비나무와 삼나무도 적지 않아서 2.1~ 3.1이나 된다. 대관령휴양림의 소나무 군락지와 울진 소광리 금강송 숲이 늘 인기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어디 테르펜 효과뿐일까. 숲은 보이지 않는 공덕을 끊임없이 인간에게 베푼다. <월든>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소로는 “내가 숲을 찾는 이유는 생을 더 현명히 살기 위함이고, 생의 본질적인 진실과 만나기 위함이고, 내가 이 땅에 오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으려 함이다”라고 말했다. 50년 넘게 숲에 머물고 있는 법정 스님도 숲이 인간의 상상력을 흥분시키는 알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며 “친밀하지만 무한하고, 어두우면서 밝은 숲을 가까이 하면 일과 사람에게 상처받은 심성이 다스려진다”라고 말한다.

김기원 교수(국민대·산림자원학)는 숲에 둘러싸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덜 호전적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숲 가까이 사는 사람은 숲이 먼 사람보다 사교성도 좋고, 타인과의 공존도 비교적 순조롭다고 한다. 비교적 어린 학생들이 숲의 영향을 받는다. 숲이 가까이 있는 학교와 숲이 아예 없는 학교의 학생 1425명을 조사한 결과, 숲이 있는 학교의 학생들이 더 긍정적이고 애교심도 더 강했다.
 
숲속에서의 캠핑도 인간의 심신을 긍정적으로 뒤흔든다. 1900년대 초, 뉴욕 맨해튼 주립병원 의사 맥도널드 박사는 폐병 환자를 대상으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일부 환자는 텐트에서 살며 숲을 산책하게 하고 시냇물을 자유롭게 바라보게 했다. 또 일부 환자는 일반 환자처럼 병실에서 치료했다. 그 결과 텐트 병동 환자들의 정신적·육체적 회복 속도가 훨씬 빨랐다.

요즘은 자아를 상실하거나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캠핑 치료를 시행한다. 기간은 이틀에서 몇 주. 지금까지 보고된 캠핑 치료 효과는 간단히 언급해도 열 가지가 넘는다. 육체적 건강 증진과 식욕·몸매 향상, 자신감·자존감 증진, 추진력 향상, 열정과 즐거움 배가, 회복기 질환 재발률 저하, 집단적 문제 해결력 향상, 정서적 문제 감소, 흥밋거리(취미) 개발, 친밀감 증진, 사회성 향상…. 따지고 보면 숲은 유능한 정신병원이고, 성공 길라잡이고, 행복 도우미인 셈이다.

구름을 보며 누워 있자니…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다! 숲이 아무리 선물을 많이 건네도 그것을 받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숲이 내미는 선물을 제대로 받으려면 둔해진 후각·시각·촉각·청각 등을 되살려야 한다. 숲을 꼼꼼히 살피고 관찰하며, 숲이 주는 향기와 바람과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어느새 나무처럼 꿋꿋하고 단단하게 변해 있을지 모른다. 그 전에 식물도감이나 곤충도감 등을 챙겨 읽고, 흐린 날 새벽에 나무만의 조용한 시선과 고독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 효과가 극대화할 것이다. 

신원섭 교수는 아예 구체적인 숲 체험법을 제안한다. 일명 구름 관찰하기. 일단 평평하고 깨끗한 자리에 눕는다. 팔다리는 편안히 좌우로 펼친다. 2, 3분간 자신의 몸·마음·숨·감각에 집중한다. 그 뒤 마음이 충만해지면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본다. 이때 구름 조각 하나하나가 내 인생의 사건이고 문젯거리라 여긴다. 그 다음 눈을 감고 1분 정도 지난 뒤에 눈을 뜬다. 구름의 모양과 위치가 바뀌었는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나 사건도 이렇게 구름처럼 변한다고 여기며 마음을 다독인다.

30분 정도 걸리는 간단한 체험이지만, 이 행위를 통해서 도시에서의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큰 걱정거리를 덜어낼 수 있다. 정말, 숲의 능력은 끝이 없다.

 

사연 많은 나무들 사람을 부르나니…

오래된 숲에는 사연이 있다. 그 애달픈 사연 탓에 숲은 더 슬프게, 더 아름답게 보인다. 준경묘 숲에서는 죽음이 떠오르고, 청령포 숲에서는 어린 단종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가 몰랐던 숲속 이야기….

 

❸물길을 따라 1.6km나 늘어선 방동마을 숲은 보기 드문 ‘띠 숲’이다. 한 번 보면 잔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400~500년 된 나무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역사다. 울퉁불퉁한 몸통에는 비바람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때로는 본의 아니게 슬픈 사연을 간직한 나무도 적지 않다. 나무 한 그루가 그러한데, 그 같은 나무가 모여 있는 숲은 오죽할까. 사연 많은 숲 가운데 휴가차 들를 만한 곳을 소개한다. 
        ⓒ전문수

❸물길을 따라 1.6km나 늘어선 방동마을 숲은 보기 드문 ‘띠 숲’이다. 한 번 보면 잔영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❶왕실의 숲, 소광리 숲(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숲에 오르다가 조선 왕실에서 새겨놓았다는 황장봉산금표(黃腸封山禁標)를 만났다. 소나무 숲을 보호하려고 일반인의 벌목 금지 표지를 해놓은 것이다. 조선 왕실은 이곳에서 벤 소나무로 궁궐을 짓고 관을 짰다. 숲 입구는 도깨비가 나와도, 처녀 귀신이 나와도 하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 드디어 금강송(줄기가 곧고 가지가 높은 곳에서만 뻗는 소나무. 심재부가 붉은색이나 적황색을 띤다고 해서 황장목이라고도 불린다)들과 만났다.
10~520년 된 나무들은 호박(보석)처럼 은은한 빛을 발했다. 520년 된 노송이 2그루에 200세가 넘은 소나무만 8만 그루라 했던가. 수많은 궁궐 복원 공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궁궐 목수들의 눈길을 피하느라 또 얼마나 가슴 떨렸을까.

그 떨림과 두려움이 금강송을 더 미끈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소광리 숲은 봄·가을에 더 화사해진다. 길이 군데군데 끊겨 불편한 대광천 주변도 그 시기에는 혼절할 만한 비경으로 변한다.

   ⓒ전문수

❶소광리 숲을 지키는 520세 금강송.


❷애달픈 청령포 숲(강원 영월군 남면) 언제나 애수 띤 풍경이다. 조선 6대 왕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 말이다. 앞쪽으로 흐르는 녹두 빛 강물과 뒤편으로 솟은 가파른 절벽도 여전하다. 배를 타고 들어가 만난 솔밭에서도 여전히 이상한 기운이 번진다. 선입견 탓이려니 하며 마음을 펴다가 천연기념물 제349호 관음송(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다 보고 들은 소나무라는 뜻) 앞에서 다시 울적해진다.
키가 30여m인 관음송은 겉보기에는 웅장했다. 그러나 단종이 이 나무의 갈라진 사이에 앉아 쉬었다는 ‘전설’을 읽고 나니, 별안간 물기를 잔뜩 머금은 듯 보인다. 두어 달간 이곳 삭막한 숲에서 어린 단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물 소리를 베고 잠들었다가 머슴새(쏙독새)나 두견새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밤에는 또 얼마나 무서웠을까. 숲을 에돌아 나오는 길에 제법 굵은 소나무 뒤에서 어린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꿈인가, 환상인가.  

❸한 폭의 수채화, 방동마을 숲(전북 임실군 방수리)
장제무림(長堤茂林). 옛 이름이 무협지 제목 같다. 실제 강 너머에서 보면 무협 영화에 나올 만큼 고색창연하다. 일명 ‘띠 숲’으로도 불린다. 섬진강 지류 오원천을 따라 방죽 위에 팽나무·느티나무 470여 그루가 지그재그로 서 있어 그런 별칭을 얻었다.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소롯길이 나 있다. 그러나 마을과 멀어서인지 그 길에는 사람 대신 검은 실잠자리만 나풀거린다. 중간중간 서 있는 고사목에는 총알 자국 같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딱정벌레 애벌레들이 우화하려고 나온 구멍이거나, 그것을 잡아먹으려고 새들이 파놓은 구멍인 듯하다.
1.6km에 달하는 띠 숲은 제법 멀었다. 고요한 물 한 번, 만지면 초록물이 들 것 같은 건너편 숲 한 번, 비껴 지나는 나무 한 번 쳐다보자 발걸음이 느려진다. 숨도 차분해진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웃는지 차르르 차르르 소리가 연방 숲을 흔든다. 수채화! 한바퀴 돌아보니 방동마을 숲은 딱 수채화 한 폭이었다. 그러나 불안했다. 그 아름다운 숲 주변에서 개간 공사가 한창이었다. 설마, 내년에는 사라지는 게 아니겠지…. 

❹신비로운 어흘리 숲(강릉 대관령휴양림) 광화문 복원 공사 현장에서 도편수를 맡은 신응수 대목장은 노송을 벨 때마다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 제사로 예를 갖춘 뒤 도끼를 들고 “어명이요!” 하고 외치는 것이다. “그 같은 행위를 세 번 하고 나서야 겨우 나무를 베는데, 그래도 매번 나무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는 것 같다”라고 그는 말했다. 어흘리 인근 대관령휴양림의 금강송들을 보니, 왜 신응수 대목장이 노송 베기를 그렇게 힘겨워했는지 짐작이 간다.
사방에 으쓱으쓱 뻗어 올라간 수백 그루 아름드리 금강송은 지상의 생명체가 아닌 듯했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웠고,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영물(靈物)처럼 보였다. 이 같은 덩치가 무려 11만3100그루나  된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달착지근한 송진 향을 따라 개개비와 동고비 노랫소리가 기분을 띄운다. “개케케 비피피 개케케 비피피” “휘-이 휘-이….” 나무들의 천국이 있다면 혹시 이곳이 아닐까 싶다.

   ⓒ전문수

❷청령포 숲은 언제나 쓸쓸해 보인다.


❺너무 아름다워 슬픈 준경묘 숲(강원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는 놀랍게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조모(祖母)의 묘다. 함흥이 고향인 이성계의 조상 묘가 어떻게 삼척에 남았을까. 태조의 5대조 부모가 전주에서 이주해 이곳 활기리에 살다가 작고한 탓이다. “이후 이성계 조상이 함흥으로 이주했고, 그래서 함흥차사가 생겨났다”라고 마을 주민 김진웅씨는 설명했다. 해거름이라 아쉽게 할아버지 묘(영경묘)는 포기하고, 할머니 묘(준경묘)만 일견하기로 했다.
가파른 언덕을 80여m 올라가자 미인송 수십 그루에 둘러싸인 제각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쭉쭉 뻗은 금강송은 눈부셨다. 그런데 제각 뒤에 있으리라 여겼던 묘가 보이지 않는다. 왼편으로 오솔길이 열려 있었다. 길은 향긋한 솔향기와 재재거리는 새소리로 가득했다. 연방 감탄사가 터진다. “어우! 와우!”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미인송은 하나같이 기품이 있었다. 불에 탄 숭례문을 복원하려 이곳 소나무 20여 그루를 베었다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하늘을 보니 보랏빛 서린 하늘에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문득 살 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이런 숲에서 다음생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즐겁던 쓰르라미소리, 매미소리, 휘파람새 소리가 갑자기 처연했다. 숲은 아니, 숲속 묘지는 인간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울림이 있다.

    ⓒ시사IN 오윤현

❺준경묘 주변에는 ‘미인송’이 빽빽하다.


❻매력덩어리 관방제림(전남 담양군 담양읍 남산리)
길이 2km,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는 숲이다. 1648년부터 담양 읍내를 유유히 지나는 담양천 남쪽 언덕에 조림되었다. 현재 177그루의 늙은 느티나무·팽나무·개서어나무·곰의말채나무·음나무 등이 남아 너비 10~15m의 제방을 그늘로 뒤덮고 있다. 일단 바닥이 흙이어서 더 마음이 가는 숲이다. 흙길은 맨발로 걸어도 편안했다. 담양천 변에 깔아놓은 나무 마루와 의자도 편안했다.
해거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더위에 지친 담양 사람들이 모두 나온 듯…. 산책을 나왔다는 40대의 한 주민은 “새벽녘 분위기가 훨씬 좋다.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면 선경이 따로 없다”라고 추켜세웠다. 자랑할 만했다. 30여 분을 걸었는데도 온몸에 수액이 차오르듯 생기가 돈다. 이 숲에서 아침을 맞고, 이 숲에서 밤을 보낸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만약, 담양에 살게 된다면 이 관방제림에 홀려서일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366호이다.     

     ⓒ전문수

❻관방제림은 새벽에 가장 청신하다.

 

❼함양 상림(경남 함양군 함양읍) 함양 인근에 사는 누군가가 그랬다. “처음 지리산에 내려왔을 때, 함양 상림을 보고 이 숲만 보고도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로부터 6~7년 뒤 군수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면서 상림의 모습도 달라졌다. 사료에 따르면, 이 숲은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숲이다. 1100여 년 전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함양 태수로 있던 최치원이 인근 위천의 홍수 피해를 막으려 조성했다는 것이다.
긴긴 역사 덕에 상림에는 오래된 때죽나무 너도밤나무 서어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와, 다른 숲에서는 쉽게 보지 못할 쪽동백 이팝나무 까치박달 산초나무 작살나무 등이 한껏 짙푸르다. 하지만 최근 숲이 지나치게 사람 손을 타서 숲의 규모(길이 1.8km, 너비 100~200m)에 비해 정감과 안온함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듣는다. 걸어보니 나무들은 탐이 날 정도로 울창했다. 하나 숲의 출입을 막으려 설치한 말뚝과 밧줄, 그리고 밤을 밝히는 가로등은 숲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숲 입구의 2만여 평 백련지·홍련지 연꽃을 보는 순간 단번에 날아갔다.

속살까지 환히 드러낸 분홍 연꽃과 흰 연꽃은 함양을 다 밝히겠다는 듯 눈부셨다. 가을이면 상림의 단풍도 연꽃 못지않게 물든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154호

 

    ⓒ전문수

❽덕고개 숲은 도심에서 가깝지만 꽤 울창하다..  

❽당집이 솟은 덕고개 숲(경기 군포시 속달동) 수리산 한쪽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서자마자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다행히 근처 덕고개 숲에서는 짙은 풀내음 덕인지 고기 타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숲은 작아서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너비 30m, 길이 40m쯤 되려나. 나무 수종도 네댓 종(서어나무, 느티나무, 상수리 나무 등)뿐이고, 나무 수도  30여 그루에 불과했다. 하지만 100~300여 년 비바람과 눈폭풍을 견뎌온 나무들은 위풍당당했다. 굵기도 울울창창한 숲의 나무에 뒤지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숲 안쪽에 가시 철망이 쳐 있고, 그 안에 노거수 몇 그루와 정체불명의 초막이 서 있었다. 매년 10월 초하루에 이곳에서 마을 제사를 지낸다더니, 당집이 분명했다(하지만 사방이 막혀 있어서 무엇이 있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아름드리 상수리나무에 등을 기대자 바람이 나뭇잎을 간질이는 소리가 “스샤샤샤사사” 들려왔다. 앉아서 쉴 만한 의자가 없는 게 아쉬웠지만, 이 정도면 됐다 싶었다. 이 숨가쁜 도시에서 잠시 쉬면서 숨을 돌리기만 해도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