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미소 찾아가는 길 서산
처음 해미읍성을 찾은 때는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점심때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지만 평일이라 성 앞거리는 퍽 한적했다. 공사 안내판이 서 있고 이곳저곳 노변이 뜯겨 있었지만 힘써 뭔가를 만들고 고쳐보겠다는 부산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성문을 들어서면 벌써 과거 시대다. 그 짧은 통로 하나에서 시간이동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도 해미읍성에서만 갖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낙안읍성 안쪽의 그 재현된 초가 마을이며 관아 등도 정답긴 하지만 그것은 오늘에 덧칠된 과거의 무늬 같아서 쉬 식상할 수도 있었다. 낙안과 달리 관아 건물들만 복원 보수한 고창읍성은 그 청결감이 기특하지만 박제된 과거를 보는 듯한 아쉬움을 남긴다. 아무튼 낙안, 고창, 해미의 읍성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임에 틀림이 없으며 따라서 현대의 운용 면에서도 상호 차별성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당시만 해도 해미읍성은 퍽 황량한 느낌을 주었는데 차라리 나는 이 거칠고 투박한 면이 썩 마음에 들었다. 고르지 못한 지반과 그곳에 멋대로 자란 잡초들, 인위적인 조경과는 거리가 먼 수목들의 배치 등이 되레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옛날의 집들이 죄 사라지고 머물던 사람들의 종적마저 지워진 황량한 옛 성의 한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서 둘레를 지켜보면 문득 대책 없이 흐르는 시간의 웅성거림마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고로 사라진 것들은 다 이렇듯 황량하고 적막해야 하거늘. 그때 놓았던 내 탄식처럼 당시의 해미읍성은 떠돌이 나그네들의 그립고 처량한 귀의처가 될 여지가 많았다.
거칠고 투박한 해미읍성의 맛
그 사이 해미읍성도 새 단장을 해서 예전의 그 ‘맛’은 많이 사라졌다. 잡초가 우거졌던 풀밭이 말끔히 정비되었는가 하면 여기저기 전통 가옥들도 세워졌다. 천주교 박해 현장이던 회화나무 주변에는 당시를 재현한다며 옥사(獄舍)까지 지어놓았다.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친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 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멀고 귀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 나희덕 시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부분
탱자나무 울타리는 사라졌지만 한 그루 회화나무는 그대로다. 해미읍성에 가거든 꼭 찾아보라고 시에서 일러준 그 고목이다. 본래 회화나무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기품 있는 나무로 대접받았는데 이곳 회화나무는 조선 말기의 그 혹독한 처형의 공간 배경이 되었다 해서 ‘교수목(絞首木)’이라는 살벌한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화사한 햇살 아래서 한 쌍의 남녀가 나무기둥을 등진 채 웨딩 사진을 찍고 있다. 두 어깨와 가슴을 드러낸 신부가 남자의 품에 안긴 채 환하게 웃는다.
“신랑도 입을 더 크게, 그래요 그래!”
사진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라는 시의 표현은 이래서 더욱 정겹고 생생하다. 그러나 읍성의 회화나무는 타고나면서부터 형틀의 운명밖에 지닌 것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제 먼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그 처절한 비명과 낭자한 선혈을 몸으로 지켜보고 듣던 나무로서는 스스로 눈멀고 귀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오늘 이 시간에도 어둠밖에 베풀지 못하는 나무를 마음속에 새겨달라고 마음씨 어진 시인이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단청을 해 그윽한 맛이 사라진 진남루에 오르면 평지 성곽의 특색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음은 물론 돌벽 하나를 두고 문명을 달리하는 안팎을 보는 즐거움도 있다. 안전 구역을 확보한다는 발상이야 인류의 시작 때부터 있었겠지만 그 구체적 형물로서 동서양 구분 없이 성을 만든 인간들이 나는 참 재미있다. 자못 황당무계하기까지 한 만리장성에서도, 거대한 해자를 두른 채 위엄을 뽐내는 오사카 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특한 인간들이 지어낸 가장 바보스러운 문명물이 바로 성곽이 아니고 뭔가. 그 점에서는 되레 웬만한 높이뛰기 선수라면 쉽게 넘을 수 있을 만한 담장을 쌓아놓고도 태연할 수 있었던 우리네 조상들의 어리숙함이 어여쁘다.
해미읍성 또한 이런 어여쁨을 모두 갖고 있는데, 서해안 방어 문제가 중요시되던 조선조 성종 때 처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다. 오래 버려졌던 성인데 1970년대 초부터 성안에 있던 학교며 관공서, 민가 등을 철거하고 옛 모습을 되살리는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새 단장을 하는 김에 초등학교 하나쯤은 다시 끌어들여 읍성 하나를 온전히 아이들의 교실로 삼아도 좋았겠다는 감상은 ‘성문 밖에 묶어둔’ 내 말에 몸을 싣기 전 잠깐 가졌다.
주책없이 설레며 마애불 찾는 길
해미에서 운산으로 가는 길, 즉 어둠의 나무 곁을 떠나 햇살 같은 미소를 찾아가는 길은 내륙의 서산 땅을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더러 먼 데 큰 산이 바라보이기도 하지만 찻길은 대개 완만한 산들을 타넘는다. 그런데 이 길의 정취가 남달라 자못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산언덕에서 언덕으로 이어지며 펼쳐진 젖소 목초지 때문이다. 계절로 인해 초지의 색깔은 바랬지만 산책을 즐기는 소들의 움직임이 한가롭다.
647번 국도, 고풍저수지를 지난 뒤 옹색한 터널 하나를 통과하면 마애불을 받들고 있는 용현계곡이 나타난다. 터널을 통과한 덕에 아연 별세계로 진입했다는 느낌이다. 아직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청정한 골을 따라 좁은 찻길이 이어진다.
물가에 차려진 작은 구멍가게 하나를 보곤 차를 세운다. 골 너머의 가파른 산비탈과 울창한 수림을 봐서도 이쯤 그 천진한 웃음을 가진 백제 마애불이 모셔져 있을 것임이 짐작 간다. 햇살은 여전히 고운데 주위는 인적마저 드물어 더없이 고즈넉하다. 팔을 벌려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신 뒤 냇물을 건너는데 까닭 없이 가슴이 뛴다. 주책없는 이 설렘은 뭐란 말인가. 그 사이 또 여러 해가 흘렀다 해도 이미 두 차례나 와봤던 터이니 초면부지의 상면이라고 할 수 없는데 돌에 새겨진 불상 하나 만나러 가는 일이 마치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고 예전에 헤어진 여인네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될 줄은 나 자신도 예상치 못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 단출한 절간 하나가 나타난다. 마애불을 연분 삼아 근대에 세워진 절집이다. 절간 아랫도리를 돌아가는 산길을 걷다보면 금세 천공으로 불쑥 튀어나온 바위 벼랑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마애불 본래의 몸통이 되는 인(印) 바위다.
마애삼존불, 그 웃음 진정 좋아라
층계를 오르자마자 마주 대하게 되는 마애불. 그 사이 눈비를 막겠다고 세웠던 보호각(保護閣)이 치워졌음을 알았다. 제비집 같은 전각마저 사라져서 거침없이 불상을 마주하는 일이 내겐 되레 낯설다. 심호흡을 하며 전각 안으로 들어섰던 때의 기억이 선연해서 더욱 그랬다. 오호라! 그때 내 입에서도 절로 탄성이 나왔다. ‘바로 이것이야!’ 식의 무슨 광고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옛 불상을 처음 대하는 순간에 속세의 광고 문구를 되풀이하는 것이 한심스럽긴 했지만 달리 뭐라고 표현할 말이 없었다. 다른 말은 모두 군더더기가 될 성싶었다. 한량없이 그냥 좋았다.
바닥에 앉은 채 나는 은은한 인공의 조명을 받고 있는 삼존불과 눈을 맞춰보려고 애를 썼는데 도무지 시선이 부딪치질 않았다. 날 언제 봤다고 저렇게 푸근히 웃고만 계시는가. 날 놀리시는가? 따져볼라치면 그런 빛도 아니었다. 너희들 아랑곳없다 하여 방만히 웃으시는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량한 세월을 간지럼 타다 오신 듯 그렇게 웃고 계시는데 그 웃음이 우스워서 쳐다보는 사람마저 따라 그렇게 웃지 않고는 배길 도리가 없었다. 나를 웃기는 부처님을 생전 처음 만났다! 그 발견 하나만으로도 복된 느낌이었다.
이제 본래대로 천연의 빛 속에 선 불상, 그 밝고 푸근한 웃음이 여전하다. 둘레에 막힘이 없어서 보는 이의 집중도가 덜할 수는 있어도 그 미소의 천연스러움을 살리기에는 이게 제격이란 느낌을 준다.
하늘의 치맛자락을 들추고 있는
벼랑 위에
철쭉꽃보다 아름답게 핀 웃음.
허허허 흘러내리는 그 웃음소리
등짐으로 가득 지고 내려와서
오려내고 다듬어
그대와 함께 살 집 하나 지으면
그 속에서 한 천년은 행복하리.
(중략)
저 벼랑 위에
철쭉꽃 붉은 빛보다
더 곱게 피어 있으니
혹 수로부인이 지나면
포동한 가슴 꼭 품어가고 싶으리.
- 문효치 시 ‘서산마애삼존불의 웃음’
‘치맛자락을 들추는’ 첫 행과 ‘포동한 가슴’의 마지막 행에서는 시가 의도하는바 에로틱한 분위기가 그대로 노정되는데 이는 웃음 웃는 불상의 건강성과 활달성을 높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된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어여쁘고 넉넉하다고 봤으면 그 웃음으로 지은 집에서 사노라면 천년이 행복하겠다고 했을까. 신라 최고의 절색인데다 ‘끼’마저 넘치는 수로부인을 이곳 서산까지 모셔 오는 시인의 솜씨도 날렵하다. 오만 가지 신물(神物)까지 여인네의 미모와 끼에 혹해 납치 소동도 마다하지 않는 통에 평생이 고단했을 강릉태수 순정공(純貞公)이야 절색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업보를 그렇게 갚음하면 되지만, 이윽고는 그 아내가 포동한 가슴의 부처님을 보곤 한눈에 반해 제 손으로 껴안고 떨어질 줄 모른다면 한숨밖에 더 날 게 없을 듯싶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와 문화재전문위원 신영훈 선생은 각기 이 마애불의 발견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유 교수의 책에는 이 마애불이 1959년 4월 홍사준(당시 부여박물관장) 선생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고 돼 있는데 신영훈 선생의 수기에는 본인과 함께 홍사준, 황수영(당시 동국대 교수) 등 세 사람이 찾아낸 것으로 적혀 있다.
유 교수의 글에 의하면, 보원사 터를 조사하러 왔던 홍사준 선생이 인바위 아래 골짜기에서 만난 한 노인에게 근처에 탑이나 불상 같은 걸 본 적 없느냐고 물었다. 노인의 대꾸.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계시는데유. 양옆에 본마누라하고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을 볼따구에 찌르면서로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겄지 하고 약 올리니까 본마누라 화가 나서리 장돌을 쥐고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가운데의 본존 여래불이 양옆으로 반가보살과 봉주보살의 협시(夾侍)를 받는 모습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해학적이고 통렬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싶다. 최초 발견자가 누구냐 하는 점은 차라리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발견이라고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알고 있던 것을 학계가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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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불의 조성 연대에 대해서 학자들은 대략 6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에 한강유역을 내주고 웅진으로 밀려났던 백제는 무령왕 때에야 비로소 다시 태안반도에 수군기지를 구축하고 대륙으로 통하는 바닷길을 열 수 있었다. 당시 태안반도에서 웅진이나 사비로 가려면 지금의 서산과 예산을 거치는 길이 지름길이었으며 서산마애불이 있는 지점은 바로 그 옛길의 입구가 되었다. 대륙교통로의 안전과 융성을 비는 목적으로 이러한 마애불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용현계곡을 좀 더 올라가면 발굴 작업이 끝난 신원사터를 만날 수 있으며 찻길은 이후 작은 마을에서 끝난다. 신원사터에서 곧장 산으로 오르면 가야산의 한 봉우리인 일락산까지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다. 산이 높이 않은데다 둘레길 모양으로 잘 정비돼 있기 때문이다. 천년 고찰 개심사(開心寺)가 바로 이 산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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