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진도의 동석산 암봉을 딛고 올라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처럼 펼쳐진 능선에 섰습니다. 거기서 굽어본 바다와 간척지의 풍경도 풍경이지만, 암봉이 이루는 뼈대며 굵은 암맥들이 어찌나 힘차고 강렬하던지요. 유독 산이 많은 진도에는 늘어선 봉우리마다 건장한 사내의 팔뚝처럼 힘찬 암릉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진도의 바위 산들이 그려 내는 아찔한 벼랑과 굵은 지맥에서 그 섬이 지닌 ‘남성성’을 봅니다. 어디 산뿐이겠습니까. 진도가 품고 있는 선혈과도 같은 붉은 기운에서도 비장미 감도는 ‘남성’을 목격합니다. 낙조 무렵의 서쪽 하늘은 핏빛으로 붉고, 구릉을 따라 겨울 대파가 심어질 황토밭이 붉고, 구름이 내려온 운림산방 앞의 연못에 심어진 배롱나무가 또 붉습니다. 여기다가 피비린내 나는 삼별초들이 뿌린 선혈이 붉고, 정유재란 때 몰살된 이들의 피도 낭자합니다. 가을의 초입에 남도 땅의 끝에서 섬으로 건너가 그 붉은 자취를 따라나섰습니다. 이웃한 완도가 둥글고 부드러운 것들이 이루는 ‘모성의 땅’이라면, 진도는 정반대의 굵고 단단한 것들이 만들어 내는 ‘부성의 땅’입니다. 낙조의 붉은 기운에 젖어서, 역사의 핏빛에 젖어서 진도에 갑니다. 깊은 상처에도 여전히 강건한 뼈대와 힘줄을 따라 아슬아슬 암릉의 칼날 같은 능선길을 갑니다. # 동석산의 위태로운 능선을 타고 암릉에 오르다
거기서 누구는 거대한 물고기의 등지느러미를 봤다 했고, 누구는 울부짖는 사자의 형상을 봤다고 했다. 설악의 용아장성을 가져다 놓은 것 같다는 이들도 있었고, 그 자체로 거대한 성곽이라는 이도 있었다. 전남 진도의 동석산. 산 하나가 그대로 하나의 암릉이다. 우뚝 솟은 회백색의 봉우리들은 세워 놓은 칼처럼 날카로운 바위 능선을 거느리고 있다. 거기 서면 누구든 주눅이 들고 오금이 저린다. 높이라야 고작 240m 남짓. 그러나 밑동부터 온통 바위로 이뤄진 섬 속의 산이라 체감고도는 해발 1000m를 훌쩍 넘는다. 아니, 위태로움이 주는 아찔한 공포와 웅장함이 주는 거대한 위압감으로 치자면 그보다도 훨씬 고도가 높다. 동석산은 진도에서조차 그리 알려진 산이 아니었다. 진도의 산이라면 단연 첨찰산과 여귀산이 맨 앞줄에 선다. 1976년 발간된 진도 군지(郡誌)에도 동석산은 이름뿐 심지어 해발 높이조차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그건 오랫동안 동석산이 ‘오를 수 없는 산’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동석산은 험준한 산세 때문에 최근까지도 ‘접근금지’의 아슬아슬한 공간이었다. 지금이야 오름길에 아슬아슬한 바위에 난간을 대거나 밧줄을 매고, 문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박아 접근이 가능하지만, 이전에는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그 산을 오르기란 불가능했다. 등산로가 정비되기 전에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겨우 발 하나 디딜 칼등 같은 공간을 마치 외줄타기하듯 건너야 했다. 깎아지른 벼랑에서 발 디딜 곳과 오름길을 모두 제가 찾아야 했으니, 외지인들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오래도록 그 산자락 아래 살아온 이들이라 해도 지형에 익숙하고 겁이 없는 한창 때의 동네 젊은이들만 그 산의 암릉에 오를 수 있었다. 진도에서 건장한 사내의 팔뚝에 툭툭 불거진 힘줄 같은, 혹은 단단한 흰 뼈 같은 암릉이 이곳 동석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도의 진산이라는 첨찰산도, 여귀산도, 진도대교를 넘자마자 만나는 금골산도 다 그렇다. 동석산만큼 날카롭거나 우람한 것은 아니지만, 진도의 산들은 죄다 능선 곳곳에 크고 작은 암릉의 이빨을 갖고 있다. 웬만한 섬들은 ‘모성’의 바다에 기대고 있어 ‘여성성’이 두드러지지만, 진도 땅만큼은 ‘남성성’이 드러나 보이는 것도 아마 이런 산세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리라. # ‘천하 제일의 등산로’에서 내려다보는 장쾌한 조망
동석산 곳곳에는 종(鐘)소리가 깃들어 있다. 동석산은 그 산의 우뚝 솟은 암봉인 종성바위에 북풍이 스치면 종소리가 난다 해서 종을 짓는 구리(銅)자를 이름으로 삼았다. 신라의 승려가 중국을 다녀와서 하동 쌍계사로 탑을 세우러 가다 잠깐 이곳에 머물렀는데, 동석산 봉우리들이 일제히 종소리를 토해냈단다. 그때부터 산 아래 골짜기는 종성골이 됐다. 동쪽 직벽 아래 1000개의 종을 뜻하는 ‘천종(千鐘)사’가 있고, 남쪽 능선의 바위 아래에는 ‘종성교회’가 들어선 것도 그래서다. 동석산은 종성교회쪽에서도, 천종사쪽에서도 오를 수 있다. 발가락 끝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아찔함을 맛보겠다면 종성교회를 들머리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밧줄에 매달려 거의 수직의 벼랑으로 오르며 칼날 같은 능선을 줄타기 곡예를 하듯 건너야 하는 이 길은 웬만해서는 말리고 싶은 코스다. 거대한 암봉을 머리에 이고 있는 천종사쪽에서 오르는 코스는 최근에 정비돼 비교적 순하다. 암봉 등반에 익숙지 않다면 이 코스를 택한다. 두 길은 천종사 위쪽에 펼쳐진 종모양의 암봉인 종성바위 부근에서 만나게 된다. 동석산의 매력이라면 힘줄처럼 툭툭 불거진 암봉의 짜릿함과 함께 능선에서 펼쳐지는 장쾌한 조망이다.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동석산과 석적막산의 능선을 따라가는 내내 어디에서든 고개만 들면 장쾌한 조망이 펼쳐진다. 시야가 어찌나 거침이 없던지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들머리의 암릉에서는 봉암저수지와 가을볕에 벼가 익어가는 간척지가 펼쳐지고 그 너머로 팽목항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인다. 천종사에서 올라와 닿는 중업봉은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의 특급 명소. 동쪽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인 봉암저수지 뒤로 첩첩이 산자락의 능선이, 남쪽으로는 물골을 끼고 있는 너른 간척지가, 동쪽으로는 남해의 푸른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이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가야 할 능선들이 마치 물고기 등지느러미처럼 펼쳐져 있다. 마침 연무가 끼어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대기가 청명한 날이면 여기서 완도, 보길도, 구자도, 추자도, 우이도는 물론이거니와 흑산도와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단다. 동석산에서 석적막산을 지나면 등산로는 큰애기봉을 지나 진도의 낙조 명소인 세방낙조전망대로 내려간다. 종성교회에서 출발했다면 4시간30분 남짓, 천종사에서 출발하면 3시간30분쯤 걸린다. 오후 나절 산자락에 올라 낙조 무렵에 맞춰 세방낙조전망대쪽으로 내려선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다. 낙조 무렵에 석적막산에서 내려서도록 시간을 맞춘다면 진도군이 이 산길에다 ‘천하 제일 등산로’라는 이름이 붙인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으리라. # 진도에서 더 붉고 비장하게 지는 해를 만나는 시간
진도에서 만나는 낙조는 다른 곳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바다로 지는 해야 서쪽에 바다를 두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볼 수 있지만 진도 세방리의 해넘이는 유독 선혈처럼 붉고 비장하다. 이처럼 세방리의 낙조가 유독 아름다운 데는 무슨 연유가 있을 터인데, 그게 설명이 잘 안 된다. 세방리 앞에 점점이 떠 있는 양덕도, 주지도, 장도, 소장도, 당구도, 혈도 같은 섬 때문인 듯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유난히 붉고 처연한 색감을 빚어내는 이곳의 낙조를 설명할 수는 없다. 세방리의 낙조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라고 정해 준 기상청도 그 아름다움의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세방리의 낙조를 ‘세방낙조전망대’라 이름 붙여진 전망대에서 맞이하지만, 굳이 전망대를 찾아갈 것 없이 세방해안일주도로인 801번 지방도로를 따라 지산면 가치리와 가학리 해안도로 어디에서나 감상할 수 있다. 세방낙조는 대기가 맑아지는 9월부터 12월 말까지가 최고의 절정이다. 그러니 지금 진도를 찾아간다면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다. 낙조라면 이글거리는 해가 선명하게 수평선으로 잠기는 모습이 으뜸이라지만, 세방리의 낙조는 해가 구름 뒤로 숨어 버린다 해도 그 맛이 조금도 덜하지 않다. 오히려 해가 넘어가는 순간보다는 해가 다 떨어지고 난 뒤에 서쪽 하늘과 구름을 갖가지 색으로 물들일 때가 더 황홀하다. 그러니 해가 넘어간 뒤에 관광객들이 서둘러 자리를 뜨더라도, 자리에 남아서 지고 남은 빛이 어떻게 사그라지는지, 해가 진 뒤에 푸른 어둠이 어떻게 찾아오는지를 오래도록 바라볼 일이다. 해가 질 무렵이면 진도를 찾은 관광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세방낙조전망대로 모여드는데, 그런 번잡스러움이 싫다면 여기서 남쪽으로 3~4㎞쯤 더 내려가다가 만나는 급치산의 낙조전망대를 찾아가는 편이 낫겠다. 급치산 정상의 군부대로 향하는 오름길 옆에 만들어진 급치산전망대는 고도가 높아 다도해 경관과 함께 더 크고 장엄한 낙조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세방낙조전망대의 높은 명성에 밀려서인지 찾는 이들이 적다. 호젓하게 낙조전망대의 난간에 기대서서 멀리 발아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과 그 섬 사이를 오가는 배들이 기울어 가는 해를 받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순간을 마주하면 가슴이 절로 저릿저릿해진다. # 삼별초의 절망과 외로움, 그리고 처참한 최후 진도가 가진 ‘남성성‘은 그 섬이 딛고 온 역사에도 깃들어 있다. 진도의 역사를 말하자면 대개 정유재란 때 울돌목의 명량대첩으로 대표되는 승전의 기억만을 떠올리지만, 그에 앞서 진도에는 삼별초의 항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있었다. 명량대첩만 해도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조선수군이 벌인 해전사상 전무후무한 대승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진도는 해전에서 패한 왜군들이 상륙하면서 벌였던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살육극을 감당해야 했다. 진도를 찾았다면 시간의 태엽을 되감아 8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잇단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까지 저항했던 고려. 그러나 원종때 몽골과 화의를 맺고 개경으로 천도하기로 합의했다. 몽골과의 화의는 곧 몽골군에 칼을 들고 맞섰던 무신정권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엇다. 몽골군에 맞서 싸우며 적개심을 갖고 있었던 무신정권 병력인 삼별초는 화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무신과 대립했던 원종은 삼별초의 명단을 몽골에 넘기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넘겨진 명단은 삼별초 소속 군사들의 처참한 살육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삼별초는 배중손 장군을 필두로 몽골과의 항쟁에 나섰다. 고려 현종의 8대손인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는 1000척의 배에 삼별초 군사들과 가족 1만2000명이 나누어 타고 이곳 진도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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