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金瑞鈴의 여기 사는 즐거움_09

醉月 2011. 9. 30. 12:37

"사업에 실패하고 인간에 절망했을 때 구들이 날 살렸다

열효율 높은 회전구들 전파하는 안진근 명장

 

사업가 기질을 타고난 안진근씨는 벼락부자에서 빈털터리 신세를 반복하면서 특이하게도 구들 놓는 데서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 안씨는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가 난방 방식의 대세를 이루는 지금 전통 방식의 구들을 개선한 회전구들을 전파하는 이다. 이번 호 ‘여기 사는 즐거움’의 여기는 바로 우리 민족의 ‘DNA’에 각인된 구들이다.

 

몇 해 전 서울 평창동 어느 골짜기에서 재미있는 곳을 발견했다. 번잡한 서울하고도 종로구인데 심심산골에서나 볼 수 있는 개울이 흐르는 것도 신기했지만 거기서 구들학교라는 곳이 운영되고 있다는 게 더욱 흥미로웠다. 구들학교엔 다양한 사람이 찾아온다고 했다. 건설회사 CEO, 방송사 PD, 신문기자, 주부, 대학생, 구청 공무원….

구들이 도대체 뭔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바닥에 깔아둔 돌을 덥히는 고릿적 난방 방식 아닌가. 그게 도시에서 도대체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구들을 그리워하는 이는 여전히 많다. 나는 구들장에 몸을 푹 ‘지지는’ 것이 피로를 푸는 데는 최선이라 여기는 이도 봤고 부침개를 먹으며 구들장에 느긋하게 엎드려 노는 것이 행복의 정점이라고 말하는 이도 만났다. 한 번도 구들방을 경험하지 않은 아이들도 일단 구들방에 들어가면 즐겁게 뒹군다. 한국인의 몸세포 안에는 수천 년 동안 구들에 몸을 눕힌 기억이 각인돼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구들에 관한 즐거운 기억이 셀 수 없이 많다. 그건 깊은 아궁이와 고래(구들 아래 불과 연기가 통하는 길) ...

 

아자방과 상관없이 안씨는 이미 자기 나름의 새로운 구들을 개발해두고 있었다. 한 번 불을 때면 닷새 동안 방이 식지 않는 획기적인 구들이었다. 바닥을 평평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가마솥 바닥처럼 움푹하게 팠다. 그래서 연기가 지나가는 길을 여러 겹 회전하게 만들어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방식이었다. 열기를 오래 잡아두기도 하지만 아궁이와 굴뚝에 잠금장치를 만들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열기를 아예 원천봉쇄했다.

 

‘한 번 불 때면 온기 5일 가’

“불을 때고 난 후엔 고래 안을 진공상태로 만들어버리지예. 그러니 열기가 빠져나갈 틈이 없어예. 전통 방식의 고래는 열기의 40~50%가 굴뚝으로 빠져나가버립니더. 회전 구들은 97% 이상이 구들 안에 머물러 있지예. 장작이 타서 열기가 한번 고래 안으로 들어가면 그 열이 밖으로 빠져나오지를 못하게 자꾸 뱅뱅 돌리는 겁니더. 그 열기가 공기 중에서 저절로 식을 때까지 한 5일은 유지되는 거지예.”

정말 획기적이지 않을 수 없다. 장작을 한 번 때면 구들돌이 뜨거워져서 5일을 간다면 한 달에 6번만 불을 때면 된단 말인가?

“물론 바깥 기온에 따라 차이가 나긴 하지예. 구들학교에서 배워간 학생들이 돌아가서 회전구들을 설치하거든요. 그들이 놓은 구들도 5일을 가는 걸 보면 과장하는 거는 아니지예. 전통 구들이 고래에 열을 많이, 오래 저장하고 있지 못하는 건 구조상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예. 전통 구들의 고래는 보통 방의 길이에 비례하게 되어 있거든예. 전통 구들의 대부분은 일(一)자형인데 이런 구들은 아궁이와 굴뚝이 1개의 고래로 연결되어 있거든예. 아궁이에서 들어온 열기가 고래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고래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굴뚝으로 나가버리는 거지예. 이런 구조의 구들에서는 손실되는 열이 무려 60%나 됩니더. 회전 구들은 그걸 막으려고 고래의 길이를 최대한 늘렸어예.”

회전구들은 방의 아래쪽을 둥글게 파서 고래를 원형으로 돌려가며 만든다. 전통 구들의 고래가 4m 정도 된다면 회전구들의 고래는 40m가 넘는다. 이렇게 방 전체에 고래를 원형으로 조성할 경우 열기의 97%가 고래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열효율이 가장 높다는 원자로의 열 이용률이 65%라예. 그렇다면 우리 구들이 가치가 월등히 높은 거 아입니꺼?”

구들은 원래 ‘구운 돌’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온돌’보다 더 오래된 순 우리말이다. 초가집이나 기와집 같은 우리의 옛날 집에서 사용되던 바닥 난방시설 그 자체를 말하거나 이런 난방법을 이용한 방바닥 또는 방을 통틀어 가리킨다. 구들은 서양에서 흔히 보이는 대기난방 방식이 아니다. 거기서 몇 단계 진화한 난방법으로 세계 최초의 바닥 난방 방식이다.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어 합리적이며 우리 민족만의 독보적인 난방법으로 이 때문에 신을 벗고 실내에 들어와 앉는 좌식문화가 생겨났다.

돌을 달구는 축열식 난방이라 서양 난방법에 비해 열에너지를 오랜 시간 저장할 수 있고, 연기가 실내로 유입되지 않는다. 구들의 장점은 더 있다. 바닥을 따뜻하게 만들어 더운 공기를 위로 올라가게 만드는 가열방식은 발을 따뜻하게 하고 머리를 서늘하게 만든다. 한의학이 말하는 두한족열(頭寒足熱)이다. 머리가 차고 발이 따뜻한 것은 건강의 기본요소로 수승화강(水乘火降)이란 한의학의 기본원리에 들어맞는다. 물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불기운은 아래로 내려와야 생명의 순환이 일어난다는 철학인데 구들이 가져오는 두한족열이 바로 인체에서 수승화강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구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렇게 말하면 구들이 최고의 난방법인 것 같지만 전통구들엔 상당한 약점이 있다. 바로 방이 빨리 식는다는 것이고 장작이 많이 든다는 것이고 구들 고래가 쉬이 내려앉는다는 것이고 추운 겨울 바깥에서 불을 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불 때는 아궁이를 가진 집을 여럿 이미 구경했었다. ‘여기 사는 즐거움’에 등장한 이들 중에도 아궁이 난방을 하는 이가 몇 있었다. 초은당 이성래 부부는 방과 거실의 높이를 달리해서 거실에 아궁이를 두는 방식을 써서 난로 겸용 난방을 했고 도적골 화가 부부는 아궁이 대신 화목 보일러를 써서 바닥을 뜨끈뜨끈하게 만들었으며, 지리산 햇살네 부부는 전통 구들과 아궁이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그런데 안진근 선생이 만든 회전구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진화했다.

 

 

안진근씨는 방 아래쪽을 둥글게 파서 고래를 원형으로 돌려가며 구들을 놓는다.

 

지난 40년간 우리나라 주택 난방의 역사는 엄청나게 변했다. 1950년대엔 도시에서도 나무장수가 있어 당연히 나무를 때는 구들을 쓰다가 그 다음에는 연탄으로 구들돌을 덥히는 방식을 썼다. 다음에 나온 것이 소위 연탄보일러라는 것으로 보일러란 파이프에 물을 넣고 그 물을 데워서 난방하는 방식이었다. 이어서 1980년대에 기름값이 싸지면서 기름보일러가 나왔고 이후 가스보일러, 이어서 도시가스로 보일러 난방을 하고 차츰 값싼 심야전기가 생겨 그걸로 바꾸는 사람이 늘다가 최근에는 태양열 에너지를 쓰기도 하고 드물게는 지열 에너지 난방을 하는 집도 생겼다. 40년 만에 바닥을 난방하는 거의 모든 방식이 총동원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중에서 구들은 가장 원시적인 방식일 것이다.

▼ 회전구들에도 구들돌을 쓰나요?

“돌을 쓰지만 옛날 같은 구들돌은 아니라예. 자연석을 사용하면 구하기도 어렵고 시공기간도 늘어나고 모양이 규격화되어 있지 않아 틈을 맞추느라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예. 그래서 규격화된 돌을 써예. 예전에는 고온에 견딜 수 있는 돌이 자연석밖에 없었지만 내화판이라고 고온에 견디는 돌을 특별히 고안했어예. 회전구들에는 두 종류의 돌이 사용됩니더. 하나는 거친 화강암이나 운모를 쓰는데 여기서 좋은 기운이 나와예. 이런 돌들은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니까 저온의 연기가 닿은 부분에 쓰고 1000℃까지 견디는 내화판은 고온이 닿는 불목돌로 사용하지예.”

▼ 돌만 씁니까?

“고래에 습기가 차면 불을 지펴도 불기가 잘 안 들어예. 방고래에 불을 들이려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불기가 고래 안으로 들어가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하지만 불기운이 줄어들면 다시 습기로 변하거든예. 불을 안 때면 습기가 구들장 밑에 물방울로 맺히거나 고래 내부의 흙에 흡수되지예. 이 습기 때문에 곰팡이류가 번식하고, 벌레들도 자라고 습기가 심하면 고래 뚝이 무너지기도 하거든예. 그래서 재래식 구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몇 해만 지나면 무너져버려예. 쥐나 고양이 같은 짐승들도 들어가고예. 회전구들은 그걸 막으려고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어예. 습도조절 장치는 화분처럼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 항아리를 쓰지예. 이 항아리 안에 자옥석과 운모와 소금을 채워 넣어예. 아궁이를 중심으로 네 귀퉁이에 각기 1개씩, 그리고 가운데에 두 개를 놓으면 소금과 운모에서 좋은 기운이 나오고 습기가 조절됩니더.”

 

습기 흡수 위해 소금 넣기도

항아리에 자옥석이나 운모를 넣는 이유는 이런 광물들이 뜨거운 열을 받으면 원적외선을 90% 가까이 방사하기 때문이며, 소금을 넣는 이유는 습기를 흡수하는 성질과 축열 기능 때문이란다. 항아리는 구조상 유입된 공기가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어 한번 들어온 공기를 오랫동안 가둬둔다. 실험을 해봤더니 고래 내부에 항아리 같은 열저장 장치를 설치할 경우 온기가 머무는 시간이 12시간 정도 늘어났다고 한다.

▼ 도대체 이런 구들을 어떻게 발명하게 됐지요?

“한번은 가마솥 앞에서 불을 때고 있었지예. 솥에 담긴 물이 끓자 바깥으로 넘쳐나지 않고 중심을 향해 둥글게 몰려들데예. 냄비는 물이 끓으면 밖으로 넘쳐버리잖아예. 냄비 바닥은 평평하고, 가마솥 바닥은 둥그렇잖아요.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지예. 제가 원래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예. 구들도 가마솥 바닥처럼 둥그렇게 만들면 어떨까 싶었어예. 원의 개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방위도 없잖아예. 회전구들을 하면 굴뚝도, 아궁이도 아무 방향이나 놓을 수가 있으니까 그것도 좋지예.”

▼ 회전구들의 단점은 뭐지요? 아무리 좋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게 아닙니까.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거지예. 그리고 도시에서는 쓸 수 없다는 거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시골에서 살지 않으니까 보급에 한계가 있고 보급에 한계가 있으니까 재료값이 비싸지지예.”

▼ 예전부터 구들 놓는 사람은 기압이나 바람의 방향이나 지형이나 기후를 잘 살펴 과학적으로 놓을 줄 알았다고 하던데요.

“허허, 맞아요. 그렇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던 거지예. 옛날 사람들은 아궁이에 불만 잘 들고 방이 고루 따뜻하기만 하면 구들 잘 놨다고 하거든예. 에너지 소모가 많든 적든 따지지를 않았지예. 불을 잘 들이는 건 사실 간단한 일이라예. 물은 내려가는 성질이 있고, 불은 올라가는 성질이 있어예. 자연의 그 원리만 알면 사실 아궁이에 불을 잘 들게 하는 건 간단해예. 고래를 위로 올라가게 만들기만 하면 되거든예. 불이 잘 든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열기가 밖으로 빨리 빠져나간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예? 열이 고래 안에 오래 머물고 있어야 좋은 구들이지 빨리 빠져나가서야 좋은 구들이 아니잖아예.”

 

▼ 회전구들 놓을 집이 많을까요?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난방법 아닙니까?

“물론 도시에선 안되지예. 아파트에도, 사대문 안에도 쓸 수가 없지요. 뜰이 있는 집에서 찜질방 하나 정도 짓는다면 모를까. 지금 우리나라 농촌주택이 200만호가량 됩니더. 이 중에서 반은 비어 있지예. 구들 놓는답시고 전국 어디든 안 다녀본 데가 없어 내가 좀 알지예. 나머지 100만호 중에서 반은 암만 회전구들이 좋다고 해도 돈이 없어 못 놓습니더. 그 나머지 50만호에 회전구들을 놓자는 겁니더. 시골 가면 노인들이 기름보일러 해놓고 기름이 아까워서 못 때고 다들 오들오들 떨면서 겨울을 나지예. 번듯한 고택들도 마찬가지고예. 심야전기 보일러 놓은 집들도 겨울을 춥게 나는 건 마찬가지라예. 그런 집들에 회전구들을 놓으면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해결되지예.”

▼ 땔나무는 충분한가요? 연료를 쉽게 구하지 못하면 회전구들도 소용없잖아요?

“나무는 많아예. 1년에 산불로 훼손되는 산림만 여의도 면적의 열 배인 400만평이랍니더. 간벌과 태풍 같은 재해로 훼손되는 산림이 800만평이고. 그 1200만평에서 나오는 나무만 해도 80만호의 땔감이 나온답니더. 지금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은 목재로도 쓰지 못하고 쓰레기장으로 보내서 돈을 들여 소각하거든예. 그거 얼마나 아깝습니까. 목재로 쓰던 헌 나무들도 다시 사용하기는 어렵다네요. 헌 나무는 대개 못이 박혀있어서 거기 전기톱을 대면 톱날이 나가버린답디더. 그런 나무들 다 장작으로 만들어 때면 되지예. 누이 좋고 매부 좋다 아입니꺼.”

 

설치비 비싼 게 흠

안씨의 말이 맞다면 회전구들은 시골사람들에겐 자그만 복음이겠다. 다만 초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평당 150만원 정도! 보통 방 하나에 구들을 놓자면 700만~800만원이 든다는 계산이니 보급하기가 쉽지는 않겠다.

“20년 전쯤 안동 어느 곳에 있는 고택에 구들을 놓으러 갔더니 노인장이 이런 말을 하대예. 40대 되는 젊은 놈이 수염도 못 깎고 구들을 놓고 다니니까 측은지심이 생겼던가봐예. ‘앞으로는 집을 짓는 게 능사가 아닐 거다. 지어놓은 집을 잘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 될 거다, 그걸 연구해봐라’ 라고 하셔예. 그 어른의 말씀이 늘 귀에 쟁쟁했지예. 그때만 해도 기름값이 싸서 시골 고택들이 난방을 다 기름보일러로 바꿨거든예. 기름보일러로 바꾸니까 편리는 한데 습기 때문에 오래 묵은 기둥이 다 썩어버리거든예. 나무기둥이 있는 집은 구들로 불을 때야 벌레도 죽고 습기도 걷을 수 있는데 바닥에 온수를 돌리는 보일러를 놓았으니 습기를 못 잡아서 겉만 멀쩡하지 기둥뿌리는 정작 다 썩는다는 겁니다. 그 말을 고맙게 들었지예. 온수를 돌리는 보일러가 아니라 전통 방식 구들을 살릴 길이 뭔지를 그때부터 찾아 나선 거라예. 바닥에 불을 깔고 사는 민족은 우리 민족밖에 없어예. 만주사람은 돌을 뜨겁게 달궈 올라앉고 일본사람은 뜨거운 물을 이불 밑에 넣지만 우리는 방바닥 전체에 뜨거운 연기를 깔고 살잖아요. 인간은 아랫도리가 뜨거워야 불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힘이 생기는 거지예.”

▼ 서양에서도 최근 우리 온돌이 인기가 있다면서요? 수승화강이란 한의학 원리 때문에 그런 건가요?

“주로 겨울이 긴 북유럽 사람들이 우리 온돌 난방을 좋아하지예. 그러나 그건 엄밀히 말하면 구들은 아니지예. 구들이란 구운 돌이란 의미의 순 우리말이고 온돌은 ‘溫突(온돌)’이라고 쓰는 한자말이잖아예. 돌을 달구든 바닥에 파이프를 깔고 물을 넣어 전기로 돌리든, 나무로 돌리든, 가스를 돌리든 바닥이 따뜻한 건 무조건 온돌이라고 불러예. 그러나 구들은 돌로 달구는 것만을 말하니까 뜻이 같지는 않지예. 독일,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같은 북유럽 사람들이 온돌을 한번 맛보면 반해서 죽을라고 하지예. 그 곳은 페치카(벽난로) 난방을 주로 하는데 페치카는 불이 들어가면 바로 열이 나오는 반사난방 아입니꺼. 그런데 우리 구들은 황토와 돌이 달궈져서 열을 내는 복사난방이거든예. 유럽인들은 전쟁을 하고 사냥을 하느라고 빨리 움직여야 되니까 포크, 나이프를 쓰고 느긋한 에너지원이 필요 없었어예. 그런데 우리는 한자리에 붙박여 살기 때문에 서서히 열이 나오는 느긋한 에너지원이 훨씬 좋았던 거라예. 난방법의 발생은 지역 문화와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만 인제는 그들도 한자리에 느긋하게 붙박여 사니까 온돌이 좋은 거지예.”

▼ 독일에서는 온돌의 정식 명칭으로 우리말 그대로 ‘ONDOL’로 부른다고 들었어요.

“온돌이 아닌 ‘GUDUL’로 부르는 게 더 좋겠지예. 문화란 모든 게 같이 따라가는 겁니더. 하나가 올라가면 나머지도 같이 따라 올라가는 거지예. K-POP이 해외에서 인기가 있으면 구들도 해외에서 더 큰 인기를 얻을 겁니더. 앞으로 회전구들 난방법을 수출하지 말란 법도 없지예. 중국이 아리랑을 자기네 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는 뉴스 봤습니꺼? 기가 막힐 일이지예. 눈 빤히 뜨고 우리 것을 멍청하게 남에게 뺏기는 꼴 났잖아예? 구들도 마찬가집니더. 일본이나 중국이 자기 거라고 가져가버리면 우리는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됩니더.”

 

 

재일동포와의 운명적 만남

 

안진근씨가 경기 가평의 한 선방에서 구들을 놓고 있다.

 

그는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경남 창원시 상남동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는 철이 늦게 들었다고 하지만 그는 국량이 크고 의협심도 있었던 것 같다. 1980년대 초 그가 부산공항에 근무할 때였다.

“오야마(한국 이름은 김종달)라는 재일동포 사업가가 부산을 자주 왕래했어예. 그는 한 번 오면 동포 소상공인을 한 70명쯤 데리고 와예. 그가 수삼을 사 가지고 가다가 통관이 안 돼 쩔쩔매고 있을 때 절차 등을 좀 도와드렸지예. 그랬더니 고맙다고 자꾸 돈을 주려고 해요. 당연한 일을 한 건데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더니 돌아가서는 일주일 쯤 뒤에 연락이 왔데예.”

그렇게 해서 안씨는 항공사를 그만두고 오야마의 한국 ‘현지 비서’ 노릇을 시작했다. 오야마가 제의한 일이었다. 안씨는 작은 오퍼상을 내고, 오야마가 데려오는 일본인 소상공인들에게 한국의 물품을 중개해주는 일을 맡았다. 일본 상인들은 주로 가방, 신발, 옷, 조경용품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대우물산 같은 곳을 연결만 해줘도 커미션(수수료)을 3%씩 정확하게 통장에 넣어주데예. 중간에서 10원도 더 깎지 않았어예. 관광 안내를 해서 가게에서 커미션을 줘도 제 주머니에 넣지 않고 일본 소상인들에게 똑같이 나눠서 돌려주곤 했지예. 그 바람에 그들로부터 신뢰를 얻었어예. 일본 사업가의 신뢰는 엄청나데예. 그렇게 한 일 년 지내다 통장을 보니 돈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어예.”

▼ 얼마나 쌓여 있던가요?

“한 10억쯤 되데예. 1980년대 후반 부산에서 49.5㎡(15평) 주공아파트 값이 1000만원쯤 했거든예. 그런 아파트 10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지예. 당시 부산에서 BMW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와 안진근 둘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예.”

그러나 다 옛날이야기다. 쉽게 들어온 돈은 올 때보다 더 쉽게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후에도 사업을 해서 목돈이 들어온 적이 있지만 허망하게 날아갔다. 그가 돈을 날린 이야기도 재미있으니 잠깐 들어보자.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한 우리 경제는 개인에게 갑작스러운 재물을 안겨주고 또한 갑작스럽게 거둬가는 부작용도 낳았다. 한창 돈을 벌 당시 30대인 그에게 오야마가 권한 취미가 승마였다. 승마를 하면 건강에도 좋고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승마의 매력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예. 말의 키는 170cm도 안 됐지만 말 등위에 올라가서 보는 세상은 전혀 달라 보였지예. 발끝에 힘을 꽉 주고 말과 한몸이 되면 세상 두려울 게 없어져예. 자연과 인간과 동물이 삼위일체가 되는 짜릿함이 엄청났어예. 한동안 말밖에 보이는 게 없었어예.”

 

쉽게 번 돈 쉽게 나가

그는 돈이 모이니까 좋아하는 말을 실컷 사고 싶었고 말이 여러 필 생기니 승마클럽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그는 순식간에 큰돈을 날렸다. 그러면서 괴로움이 커졌고, 몇 년 새 확 늙어버렸다.

“그 무렵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데 내 또래쯤 되는 사람이 석남사 가는 길을 물어봐예. 가르쳐줬더니, ‘예, 어르신’하고 고개를 숙이더라고요. 또래 사람이 나를 어른 대접하는 게 신기해서 거울을 자세히 봤지예.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얼굴이 완전히 노인으로 변해버렸데예.”

이후 그는 절집을 찾아다녔다. 스님의 선방에도 들어가 앉아보았다. 절절 끓는 구들방에 누우니 붕 떠서 흔들리던 마음이 비로소 바닥으로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하동 칠불사 아자방에 특히 자주 드나들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구들방이 준 위안을 잊지 못해 그는 ‘구들, 구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사람은 생업이 필요하다. 일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기생해서 살게 된다. 기생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다. 자존을 잃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손을 댄 게 음식점이었다. 고기를 황토에 싸서 아궁이에 구워서 팔면 괜찮을 듯싶었다. 늘 보는 게 구들이고 아궁이고 황토였으니 자연히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황토오리구이 사업으로 그는 또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저축은행에 투자했다가 그는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완전히 거덜이 났지예. 다 망하고 나니까 대인기피증이 오데예. 사람이 싫으니까 다시 산을 찾게 되고, 산에 가더라도 길이 아닌 길을 찾아다니고, 길이 아닌 길을 찾다보면 거기 어딘가 또 절이 있데예. 절에 가면 공밥을 주잖아예? 스님들 곁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게 참 좋데예. 그때부터 공부하는 스님들 방에 구들을 놓아주기 시작했지예. 그러다보니 차츰 제가 갈 길은 이것이다 싶데예. 사업에 그토록 많이 망한 것도, 그래서 사업에 정이 똑 떨어진 것도, 내가 갈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한 일 같데예. 내 인생이 아주 복잡해예. 죄도 참 많이 지었어예. 가만 돌아보면 전생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예. 마산에 장곡산 고개라는 게 있어예. 비가 오는 날 하늘 똥구멍을 쳐다보고 있는 욕, 없는 욕을 실컷 퍼부어 댔어예. 밤새 욕을 하고 눈물 빗물 범벅이 된 채로 새벽을 맞이했는데, 속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하데예. 가진 것을 다 잃고, 최고에서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내 갈 길이 훤히 보이는 게 신기하데예.”

그래서 완전히 빈손으로 절집을 떠돌면서 그는 구들 놓는 사람이 되었고 회전구들을 발명해서 특허를 냈고, 인연 따라 흘러와서 평창동 골짜기에서 구들학교까지 열게 된다. 여러 가지 일로 구들학교는 현재 문을 닫은 상태다.

▼ 여러 사람에게 회전구들이 알려진다는 건 결국 좋은 일 아닌가요?

“좋은 일이지예. 나쁘다는 게 아니라 혼자 하기에는 기운이 빠져서예. 여기서는 구들을 놓았다 허물었다 하지만 현장에 가면 허물지 않아도 되니까 수업을 하더라도 현장에서 하고 싶어서예. 구들은 주생활 문화라예. 좋은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 상황에 맞게 고쳐나가야 살아 있는 문화가 되거든예. 구들이 앞으로 크게 빛을 볼 거라고 나는 믿어예. 구들 배우는 사람도 늘어날 거라예.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에게 한옥을 보여주지만 말고 구들을 체험하게 만들어야 해예. 한번 구들방을 경험하고 나면 난생처음 자보는 사람들도 몸이 먼저 좋아라 하는 것을 느끼게 되거든예! 그러면 한류처럼 우리 구들이 세계로 팔려나가게 되는 날이 올거라예.”

 

돈 말고 재주 줘야 참 보시

나는 가평에 있는 오래된 절의 선방에서 안씨가 황토와 벽돌과 자갈돌로 회전구들을 놓는 것을 구경했다. 풍광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암자였다. 산의 능선이 좌우로 길게 누운 부처의 형상이었다. 산꼭대기에 올라앉았더니 이런저런 분별이 아득히 지워졌다. 겹겹이 싸인 능선의 파도는 본디 사람의 피로를 녹여주는 기능이 있다는데 그런 풍광이 눈앞에 끝도 없이 이어졌다.

 

金瑞鈴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대구 중앙중 국어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 깊은 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여자전’ ‘김서령의 家’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등

 

안씨는 거기서 겨울을 날 현우스님을 위해 구들을 놓아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울력은 현우스님이 직접 하고 먹고 자는 것은 절에서 해결하니 재료비만 받아도 밑질 건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고 했다. 그는 얼마 전 노동부가 주는 구들명장 칭호를 얻었다. 명장이 되면 정부로부터 지원금도 나오고 한 달에 얼마씩 생활비도 보조가 된단다. 안씨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다. 그러면서 얻은 깨달음은 이렇다.

“돈을 벌어서 사람들한테 주는 것은 보시가 아니더라고예. 자식에게도 친구에게도 돈을 주는 것은 화를 주는 거더라고예. 돈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재주를 남에게 줘야 된다는 걸 알았어예. 보살 행위는 그런 거지 딴 게 아니더라고예.”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음식 기행_04  (0) 2011.10.03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03  (0) 2011.10.01
전남 진도  (0) 2011.09.25
황교익의 味食生活_09  (0) 2011.09.21
이규보의論詩中微旨略言  (0) 2011.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