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호 동쪽의 가오인미식가 |
오늘은 저장성의 항저우를 여행하면서 강남의 미식을 맛보려고 합니다. 항저우는 저장성의 성도인데, 저장이란 항저우를 지나가는 첸탕강(錢塘江)의 옛 이름이지요. 춘추시대에는 월(越)나라에 속했다가 오(吳)나라가 점령했었고, 다시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월나라에 속했다가, 전국시대에는 초(楚)나라 땅이었습니다.
삼국시대를 지나 사마의(司馬懿)가 세운 서진(西晋)이 멸망하고, 남경을 수도로 동진(東晋)이 세워지면서 항저우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경제력에 관한 한 남방이 북방을 추월했고, 수나라는 항저우로부터 북방의 군사 중심지인 베이징으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경항대운하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북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이 여진족의 금나라에 함락당하고, 항저우로 쫓겨 내려와 남송을 세우자 항저우는 일시적으로 남송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됐지요. 그러나 쿠빌라이가 이끄는 몽골의 군대가 남송마저 멸망시킨 이후 항저우는 권력에서는 소외되지만 경제와 문화에서는 발전했고 음식문화도 지속적으로 발전해서 지금도 저장 또는 항저우는 중국 음식문화에서 대표적인 지방으로 꼽힙니다.
항저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서호(西湖)입니다. 서호는 호수가 아니라 첸탕강의 하구로 바다와 직접 접하고 있었으나, 동한 시대에 방파제를 만들면서 바다와 격리된 호수가 됐습니다. 이후에도 첸탕강 하류는 범람과 퇴적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바다로부터 50㎞ 이상 들어온 위치가 됐습니다.
서호는 둘레가 15㎞ 정도로 도보여행을 하기에 적당합니다. 호숫가의 공원 길도 잘 정비돼 있고,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항저우 지사로 부임해서 만들었다는 제방인 쑤디(蘇堤)도 걷기에 좋습니다. 레이펑탑(雷峰塔)과 악비묘(岳飛墓)와 같은 역사의 명소는 물론 저장성 박물관과 미술관 등 볼거리도 풍부하지요. 서호 동쪽 가까운 곳에 가오인미식가(高銀美食街)와 허팡제보행가(河坊街步行街)가, 북서쪽으로는 러우와이러우(樓外樓)라는 유서 깊은 식당이 있어 항저우 음식문화를 만끽하기에도 그만입니다.
가오인미식가 인근에 숙소를 정하는 것도 좋습니다. 가오인미식가는 허팡제보행가와 함께 있고, 서호도 가깝고, 성황각이 있는 오산도 가깝지요. 가오인미식가에서 저녁을 한 다음에 허팡제를 둘러보고 그 다음날 아침 서호 도보일주를 하면 일정도 적절합니다.
아침에 가오인미식가를 출발해서 호숫가를 따라 걷다가 레이펑탑에 올라가 서호 전체를 조망해 보고, 제방을 걸어 호수를 가로지른 다음, 러우와이러우에서 점심을 먹고, 저장성 박물관과 미술관, 시후톈디(西湖天地)를 거쳐 가오인미식가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면, 중국 여행에서 도보와 음식 여행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오인미식가는 동서로 약 400m의 길 한쪽으로만 20여개의 식당이 늘어서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식당들입니다. 어디를 들어가든 실망하지 않겠지만, 황판얼(皇飯兒)이란 식당을 먼저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황판얼이란 황제가 식사를 한 곳이란 뜻인데, 청의 건륭제가 내려준 것이지요. 이 식당의 대표적 요리인 첸룽위터우(乾隆魚頭)가 주인공입니다.
건륭제가 세 번째 강남 순행에 나섰을 때 하루는 평복을 하고 혼자서 오산(吳山)에 올라 첸탕강과 서호를 바라보다가 그만 비를 만났습니다.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는 데다가 시장해진 건륭제는 근처 허름한 민가에 들어가 비도 피하면서 식사를 청했습니다. 집주인 아싱(阿興)은 어떤 식당의 종업원이었는데, 이 사람이 황제인 줄은 몰랐지요. 가난한 집이라 변변한 식재료는 없었고, 점심식사에 쓰고 남은 생선대가리 반 토막과 두부 한 모만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기 냄비에다가 두반장(豆瓣醬)을 넣고 요리를 해서 내왔는데, 춥고 배고프던 황제는 아주 맛있게 먹었지요. 은자로 밥값을 지불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는데, 그 맛이 생각나서 황실 주방에 몇 번 주문을 했으나 그 맛이 아니더랍니다.
건륭제는 네 번째 강남 순행에서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생선대가리와 두부로 만든 요리를 청했고, 식사 후에 밥값으로 은자 이십 냥을 내면서 아예 식당을 열도록 했습니다. 아싱은 이때 황제란 것을 알았지요. 이런 연유로 생긴 식당이 바로 왕룬싱판좡(王潤興飯庄)입니다. 이 이름이 참 재미있는데, 핵심은 룬(潤)에 있습니다. 룬의 한자를 뜯어보면, 氵는 삼수(水)변이니 비가 내린다는 뜻이고, 閏은 문(門) 아래 왕(王)이 있으니 황제가 비를 피한다는 뜻이 됩니다. 곧 황제(王)가 비를 피해 문으로 들어와서(潤) 맛있게(興) 식사(飯)를 한 곳(庄)이란 말이 되는 것이지요.
다시 5년이 지난 후 건륭제가 강남 순행에서 이 식당을 찾았을 때 아싱은 극진하게 요리를 만들어 올렸고, 황제가 식사 후에 친히 황판얼이라는 이름을 하사해서 지금도 황판얼과 왕룬싱 두 곳이 각각 사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요즘 대중스타의 마케팅 효과가 대단하지만, 당시의 황제 마케팅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황제로 마케팅을 했으니 그저 복을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황판얼에서는 첸룽위터우(乾隆魚頭) 이외에도 항저우의 미식을 여러 가지 맛볼 수 있습니다. 첸룽위터우로 생선요리가 결정됐다면, 육류로 자오화지(叫花鷄)를 주문하는 것도 좋습니다. ‘거지닭’이라고 부르는데 항저우의 유명한 특산 닭고기 요리지요. 어느날 거지에게 닭이 한 마리 생겼습니다. 닭을 연잎으로 싸고 진흙을 바른 다음 옆집 아궁이를 빌려서 구웠답니다. 단단해진 진흙을 망치로 두드리자 닭에서 연잎의 향기가 솔솔 나고 기름이 모두 빠져서 담백한 맛의 닭고기가 탄생된 것이지요.
서민스러운 느낌과 고급스러움이 한데 어우러진 바바오여우탸오(八寶油條)도 특색 있는 요리입니다. 서민들의 아침식사로 잘 알려진 여우탸오에 죽순과 해산물 등 고급스러운 재료들을 얹어서 만든 것인데, 아삭대는 죽순도 좋고 여우탸오의 고소한 맛도 참 좋습니다.
시후춘차이탕(西湖蒓菜湯)도 항저우에서 꼭 맛봐야 할 것으로 항저우 사람이라면 누구든 추천하는 음식입니다. 춘차이는 수련의 잎으로 중국에서는 아주 귀한 수생식물이지요. 아교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입에 들어가면 미끌미끌합니다만, 100g의 춘차이 안에 단백질이 90㎎이나 들어있고 비타민도 풍부하게 들어있습니다. 부재료는 닭 가슴살과 돼지 뒷다리를 염장한 훠퉤이(火腿)와 함께 탕으로 만들어 눈으로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입니다.
식사를 잘 마쳤다면 가오인미식가의 옆길인 허팡제보행가를 걸어 보면 좋습니다. 이 길은 차가 없는 길로서, 현대 중국의 세련된 디자인에서 티베트 향기가 진한 액세서리, 전통적인 약방에서 샤오츠(小吃)까지 아주 다양한 상품들이 즐비합니다. 멋진 상점과 예쁜 노점도 구경할 만하고, 이곳을 찾아오는 서양 여행객들에서부터 항저우의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는 거리입니다.
이 허팡제의 동쪽 끝부분에 가면 즐거운 야식 골목이 있습니다. 가오인미식가와 허팡제를 남북으로 잇는 40m 정도의 골목길에는 양측으로 샤오츠 노점상들이 가득 차 있고, 가운데에는 공용 식탁이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어디서든 샤오츠 실물을 보고 편하게 고른 다음 공용 식탁의 빈자리에서 먹습니다.
이곳에서 정말 다양한 간식거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만두, 각종 국수, 크고 작은 꼬치, 조그만 그릇에 담아서 파는 과일, 철판에 부친 것들, 닭고기 요리, 오리 대가리, 완자, 철판에서 요리한 개구리, 참새구이에 연근까지 정말 다양한 간식거리들이 즐비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지요.
본격적으로 서호를 걷는 도보여행은 다음 편에 이어가겠습니다만, 항저우의 황판얼에서 나온 건륭제 이야기는 음식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한번쯤은 음미해볼 만합니다.
청나라는 잘 알다시피 만주족이 세운 왕조입니다. 30만명 정도의 인구로 1억이 넘는 대륙을 지배했고, 몽골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넓은 땅을 지배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정관념 속에 은근히 여진족의 나라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청나라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세 황제는 성군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세 황제는 스스로 검소해서 강희제의 경우 재임 초기 20년간의 황실 비용 총액이 명나라 황제들의 1년 경비보다도 적었고, 재정이 안정되었던 옹정제와 건륭제도 명나라의 반 정도였습니다. 만주족의 전체적 문화수준이 높지 않았던 탓에 세 황제는 스스로 열정적으로 공부하여 어떤 한족 학자에게도 뒤지지 않는 학문적 소양을 보여주었지요. 세 황제는 한족에 대해서는 가장 앞장섰던 문화적 투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군사적으로 상당한 업적을 남겨 건륭제 시절 최대 판도를 이뤘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평복을 입고 민간인들의 생활을 시찰하는 등 가장 부지런한 공무원이 바로 황제 자신이었지요. 이런 민생시찰 가운데 황판얼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이니, 21세기의 한국인들, 특히 한국의 리더들은 황판얼에서 미각과 함께 그 속에 드리워진 모범적인 리더의 모습도 음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악비묘 옆 160년 식당서 西湖서 잡은 생선요리를
저장성 항저우②
▲ 돌냄비에 게를 넣고 조리한 셰황바오. |
허팡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곧 공원 입구를 만나는데 공원 안쪽이 서호(西湖)입니다. 호숫가에 닿는 대로 좌회전을 하면 서호를 시계방향으로 도는 게 됩니다.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숲 사이의 오솔길 곳곳에는 벤치가 있습니다. 길은 호숫가를 따라가다가 슬그머니 숲으로 들어가기도 하지요. 잠시 중국이 아니라 서양 어디쯤을 여행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쪽으로 1.5㎞ 정도를 걸으면 레이펑탑(雷峰塔)을 만납니다. 레이펑탑은 북송 시대인 977년에 세워졌고 이후 훼손과 복구가 몇 차례 반복되다가 1924년 탑이 기울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당시 시국이 어수선하고 국력이 달린 탓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가 2002년에야 복구했습니다. 탑 자리가 서호 남안의 작은 동산 꼭대기인 데다가 탑 자체의 높이도 61.9m나 되기 때문에 서호 전체를 시원스레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이 탑은 1924년 무너진 자리에 탑신의 기저부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새로 세웠습니다. 1층에 들어가면 유리벽 안에 무너진 당시의 탑을 그대로 볼 수 있지요. 무너진 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걸 느낍니다.
‘구국의 영웅’ 악비 앞에 무릎 꿇은 진회
레이펑탑을 내려와 호숫가를 더 걸으면 곧 쑤디(蘇堤)를 만나게 됩니다. 북송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항저우 지주(知州)로 일하던 시절 그가 주관해서 세웠기 때문에 소동파의 제방이란 뜻으로 쑤디라고 부릅니다. 전체 길이가 2.8㎞로 서호의 서쪽 수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릅니다. 쑤디가 시작되는 곳은 단체 관광객이 많아 붐비는 편이지만 이 부근을 지나기만 하면 가로수가 잘 자란 한가로운 제방길을 걸으면서 서호를 감상할 수 있지요.
쑤디를 통해 건너편에 도착하면 악비의 무덤과 사당이 있습니다. 악비는 중국 사람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습니다. 남하하는 금나라 군대에 연전연승을 거둔 악비는 문무를 겸비한 출중한 인재였지요.
중국 역사에서 남방의 군대가 북방의 군대를 이긴 것은 두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먼저 동진을 멸망시키고 남조의 첫 왕조인 유송(劉宋)을 세운 유유가 북조의 후진(後秦)과 남연(南燕)을 멸망시키고 북위(北魏)의 군대까지 물리쳤던 적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악비가 금나라 군대를 격파한 것이지요.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군사적으로 항상 북방에 눌려왔던 남방에서 보면 악비는 더더욱 빛나는 영웅입니다.
주전파 악비는 진회를 비롯한 주화파 관료들의 정치적 술수에 걸려 군대 지휘권을 빼앗기고 투옥됐다가 살해당합니다. 악비는 진회가 죽은 뒤 누명을 벗고 악왕(岳王)으로 추존됐습니다. 그를 모함한 진회는 가장 비열한 인간으로 낙인 찍혔고, 지금도 악비의 상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진회의 상에는 사람들이 침을 하도 많이 뱉어 상 앞에 “침을 뱉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걸려 있을 정도입니다.
쑨원·루쉰… 명사들이 줄 잇는 곳
악비묘에서 나오면 고산루(孤山路)의 유서 깊은 러우와이러우차이관(樓外樓菜館)에서 점심식사를 할 시간입니다.(주소 孤山路 30號, 문의 0571-8796-9023) 이 식당은 1848년 개업했으니 16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쑨원(孫文)이나 루쉰(魯迅)에서부터 현대 중국의 최고 권력자나 명사들이 즐겨 찾는 항저우의 대표적 식당입니다. 특히 저우언라이(朱恩來) 중국 총리가 외국 귀빈을 위한 공식 연회를 수차례 열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이곳의 음식은 항저우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56년 저장성 정부가 항저우 요리 36가지를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러우와이러우가 출품한 요리가 10가지나 뽑혔답니다.
러우와이러우라는 말도 운치가 있습니다. 이 명칭은 식당 주인이 유곡원(兪曲園)이란 학자에게 작명을 부탁한 것인데 남송 시인 임승(林升)의 시구 ‘山外靑山樓外樓(산 너머 청산이요, 누각 건너 누각이네)’에서 차용해, 자신의 집 건너에 있는 식당이란 뜻을 담아 지어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이곳에서도 메인 요리는 서호에서 잡히는 쿤위(鯤魚)라는 생선으로 만드는 시후추위(西湖醋魚)가 어울릴 듯합니다. 이 요리는 단맛이 나지만 그 속에 신맛이 들어 있습니다. 생선의 육질은 아주 부드럽고, 게살의 향이 배어 있는 듯합니다. 요리하기 이틀 전부터 먹이를 주지 않고 내장을 비우게 해 진흙 냄새를 없애고 나서 요리를 한답니다. 이 요리는 출세를 위해 집을 떠나는 시동생에게 형수가 백성의 고통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단맛 속에 신맛이 배어 나오게 만든 요리라고 합니다.
쑹싸오위겅(宋嫂魚羹) 역시 항저우에 가면 꼭 맛보아야 할 음식으로 추천되곤 합니다. 농어(魚)를 주로 사용하는데 중국식 햄과 죽순, 버섯 등을 넣고 끓여낸 국의 일종입니다. 남송의 고종이 재위 36년 만에 황제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곳 서호를 찾아 유람할 때 송씨 부인이 하는 이 음식을 즐겨 먹어 그때부터 유명해졌답니다.
새우에 찻잎을 넣고 요리한 룽징샤런(龍井蝦仁)도 담백한 강남 요리로 유명합니다. 동파육(東坡肉·둥포러우)은 후베이(湖北)에서 탄생한 음식이지만 소동파가 항저우에 부임한 적이 있어서 항저우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미리 조리해서 식혀 두는 차가운 음식으로 시후미어우(西湖密藕)도 있습니다. 연근으로 만든 단맛의 에피타이저 비슷하지요.
‘아바오라오항저우’서 부담 없는 항저우 음식
러우와이러우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저장성 박물관과 미술관을 만나게 됩니다. 두 곳을 둘러보고 호숫가를 좀 더 걸으면 호수공원 일주가 끝납니다. 그러면 가오인미식가로 다시 가서 황판얼(皇飯兒) 이외의 다른 식당을 찾아 항저우의 다양한 미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아바오라오항저우(阿鮑老杭州)라는 식당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말린 채소(干菜)를 넣은 민물새우(干菜燒河蝦) 요리는 이 식당에서 꼭 맛봐야 하는 음식입니다. 말린 채소에 들어있는 간이 적절하고 새우의 육질도 담백합니다. 가벼운 맥주 한잔을 곁들이면 더 좋을 듯합니다. 말린 해파리로 만든 황과하이저(黃瓜海) 역시 오이의 상큼한 맛과 해파리의 식감이 잘 조화된 음식이지요.
샤오청구스(小城故事)라는 식당에서 게요리를 한번 맛보는 것도 좋습니다. 돌냄비에 게를 넣고 새콤한 맛과 매콤한 맛을 섞어 조리한 셰황바오(蟹皇堡)도 훌륭합니다. 살짝 익힌 맛살에 약간 단맛이 나는 소스를 얹고 그 위에 가늘게 썬 파를 듬뿍 얹어 나오는 잉여유청쯔(營油子) 역시 젓가락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습니다. 이 식당에서 먹었던 자차이러우쓰탕(搾菜肉絲湯)은 국물이 참 시원합니다. 이 탕은 중국 어딜 가나 어떤 음식에나 잘 어울리고 한국 사람 입맛에도 잘 맞기 때문에 이런 이름은 하나쯤 외워둘 만합니다.
만일 테이블을 그득 채운 상이 아니라 가벼운 한 끼를 원한다면 바오산멘관(爆面館)에서 국수 한 그릇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가오인미식가에서 골목을 통과하면 허팡제보행가가 나오는데, 이 허팡제 동쪽 끝에 있는 식당입니다. 항저우의 대표적 국수는 펜얼촨(片兒川)인데 육수도 구수하고 중간 굵기의 면도 맛있습니다. 이 식당은 국수만 하는 식당으로 주문을 하면서 먼저 음식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영웅 ‘악비’ 아직도 유효한가?
항저우를 떠나면서 한 가지 생각합니다. 악비가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데는 정서적으로 중국인에게 깊숙한 그 무엇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뛰어난 인재였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그런데 그가 ‘구국의 영웅’이라면, 그가 물리쳤던 금나라의 여진족과 그 후손인 청나라의 만주족은 망국의 원수일까요?
구국의 영웅이라는 악비가 구하려던 나라는 사실 썩어빠진 북송이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나라였기 때문에 충성을 다했지만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은 모함과 살해였고 그 나라조차도 멸하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망국의 원수 위치에 있던 여진족(훗날의 만주족)은 자신의 강역이던 만주뿐 아니라 신장성과 티베트까지 최대의 판도를 만들어 오늘의 중국에 붙여주었습니다. 악비와 그의 적군의 후손들도 지금은 한 나라 국민이 되었습니다. 이제 악비를 남방의 영웅으로 볼 수는 있어도 ‘중국의 영웅’으로 보는 것은 어색해졌습니다.
그러면 송나라가 아닌 ‘21세기 중국’의 영웅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중국은 과연 새로운 영웅관을 제시하거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아직도 악비가 영웅인 것은 아닐까요? 그것을 관찰하는 한국인들은 악비와 여진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중국 음식을 여행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조조가 새 세상을 꿈꾸던 곳 관우 저택, 식당으로 성업 중
허난성 쉬창
▲ 춘추러우 관성전의 관우상 |
허유는 중국에서 은둔의 원조로 일컬어집니다. 요(堯)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은 순(舜)임금은 자신도 적임자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하고, 허유에게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은둔거사로 살려고 했던 허유는 순임금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심지어 그는 더러운 속세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귀를 강물에 가서 씻었답니다. 그 이후 이 지역은 허현(許縣)이라 불렸고, 허유는 중국 역사에서 은둔의 원조로 기록됐습니다.
조조는 허유의 은둔과는 정반대로 나갔던 인물입니다. 역사 인물로서의 조조는 소설 삼국지의 ‘간웅 조조’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는 권력과 군사력으로 자신의 힘을 조직화하고, 전란과 부패로 황폐화되었던 농업경제를 둔전제로 되살렸으며, 개방적 인재 등용으로 사회의 비전을 만들었고,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 수백 년간 망가져왔던 중원문명을 되살리려 했던 야망가이자 개혁가였습니다. 그러나 적벽전의 패배라는 덫에 걸려 절반의 성공으로만 생을 마감했죠.
‘개혁가’ 조조 재평가 작업 시작
중국의 첫 통일국가 진을 이은 한 제국은 6대 황제인 무제가 40여년간 흉노를 비롯한 주변 민족과 끝이 없는 전쟁을 강행하다가 국가의 재정을 파산시킴으로써 중원문명은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몰락하는 중원문명을 구하겠다고 나선 자가 둘이 있었으니, 이상주의자 왕망과 현실주의자 조조였습니다.
조조는 어느 정도 자기 세력을 구축한 다음에는 비참하게 내버려졌던 한 제국의 황제를 모셔오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천도한 곳이 허현, 즉 허도(許都)입니다. 그의 아들 조비는 중원문명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창(昌)을 붙여 허창이란 오늘날의 지명이 탄생된 것입니다.
조조의 후손들은 조조가 이룬 절반의 성공도 유지하지 못한 채 사마의 집안에 권력을 탈취당하고 말았지요. 사마의 집안이 세운 진(晉)나라에 이르러 중원문명은 완전히 그 바닥을 드러낸 채 북방에서 내려온 선비족의 나라 수와 당으로 흡수됐고, 쉬창 역시 다시는 제국의 수도 반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쉬창에는 삼국시대와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있으나 조조를 제대로 평가하는 곳은 없습니다. 쉬창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 춘추러우(春秋樓)나 관공사조처(關公辭曺處)는, 포로로 잡힌 적군 장수에 지나지 않던 관우를 과도하게 미화하는 것들입니다. 관우 미화에 조연으로 등장한 조조는 황당하리만큼 심한 역사 왜곡을 당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조조기념관 성격의 조승상부(曺丞相府)가 멋지게 만들어지는 등 조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허구의 조조가 아니라, 역사 삼국지의 실재의 조조를 음미하는 틈새도 열렸습니다.
쉬창은 역사에 기초하여 조조를 재평가하고자 할 때 가장 어울리는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과 돈과 권력과 사회를 한데 유기적으로 엮어낸 조직가, 몰락하는 중원문명에 비전과 희망을 세워주려던 개혁가, 건안문학(建安文學)의 태두로서 지금 중국 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시문이 게재될 정도로 훌륭했던 문학가로서의 조조를 음미하는 여행 말이죠.
후이족의 후라탕으로 부담 없는 아침
그래도 하루 세끼는 잘 찾아 먹어야지요. 쉬창에서는 후이족이 파는 가벼운 아침식사부터 맛보면 좋습니다. 수이젠바오(水煎包)와 후라탕(胡辣湯)을 함께 먹습니다. 아주 넓은 프라이팬에 물을 흥건하게 붓고 만두를 넣어 강한 불로 익힌 다음, 물이 자작자작해지면 다시 기름을 넉넉하게 둘러서 익혀낸 것이지요. 아주 맛있습니다. 후이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만두 소는 전부 소고기나 양고기를 씁니다.
후라탕은 걸쭉하게 쑨 죽으로, 후추로 낸 매운맛이 풍부하고 그 속에 달콤한 기운이 있어서 아침식사로 잘 어울립니다. 한국인에게는 해장용으로도 괜찮지요. 뜨거운 죽을 살살 떠서 먹다가, 약간 식은 다음엔 후루룩 후루룩 마시는 기분도 좋습니다.
후이족은 약 1000만명 정도로 전체 중국 인구 중 그리 많지는 않지만 가장 넓게 퍼져 있고, 또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사는 소수민족 중 하나입니다. 서역에서 들어와 서안을 거쳐 황하를 따라 이곳 허난성에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쉬창의 전통적인 서민음식으로는 라오만취안더우푸자(烙饅券豆腐渣)가 풍성하고 맛있습니다. 손바닥만한 밀전병에 비지나 채소 등을 싸서 먹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정월 보름에 먹는 나물과 거의 똑같아 보이는 나물들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이 음식은 쉬창의 어디서나 찾을 수 있지만, 쉬창역 건너편 훙바오(紅寶)호텔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쉬수이콰이찬(許稅快餐)이란 식당이 유명합니다. 겉보기는 허름해도 이 식당은 제1회 허난성 요리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던 곳이고, 식사 시간에는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입니다.
쉬창에서의 멋진 한끼로는 춘추러우 핀밍팡(春秋樓 品茗坊)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춘추러우는 인재를 귀하게 여기던 조조가 포로로 잡혀온 관우에게 내준 저택입니다. 이곳에 살게 된 관우는 밤이면 춘추를 즐겨 읽었다고 해서 지금도 춘추러우라고 합니다. 춘추러우에는 관성전이 있고, 그 안에 높이 15m나 되는 관우의 상이 있는데 실내에 있는 관우상으로는 제일 크다고 합니다.
토마토 넣은 생선찜 색다른 맛
관우는 일개 무장이었지만, 그의 사후에 관우의 고향 산시성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장사를 다니면서 재물과 안전을 기원하는 대상으로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중국인 누구나 관우를 재물의 신으로 생각합니다. 살아서는 무장이었으나, 죽어서는 왕으로, 황제로 다시 성인으로 추앙됐습니다. 중국에서 황제의 무덤은 릉(陵)이라 하고 그보다 한 단계 위로 성인의 무덤을 림(林)이라 하는데, 림에는 공자의 공림과 관림 두 개밖에 없답니다. 중국 사람들의 관우 숭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지요.
아무튼 이 춘추러우는 쉬창에 온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찾아가는 명소인데, 그 정문 바로 옆에 ‘춘추러우 핀밍팡’이라는 간판이 걸려있습니다. 핀밍은 차를 음미한다는 뜻이지만, 이곳은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춘추러우 안의 작은 연못가에 있는 식탁에 앉아 춘추러우를 정원 삼아 호젓한 한 끼를 즐길 수 있다면 쉬창에서 가장 근사한 식사를 한 것입니다.
이 핀밍팡에서는 닭가슴살에 신선한 패주와 버섯 등의 채소를 넣고 고추기름을 조금 넣어 볶은 요리가 좋습니다. 닭가슴살은 성인병을 앓고 계신 분들이 마음 놓고 드셔도 좋은 살코기입니다. 패주는 조개 속에 있는 기둥인데 색과 질감이 닭가슴살과 유사합니다. 건강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요리입니다.
중국에서 생선요리를 주문할 때는 살아 있는 생선을 담백하게 쪄 내는 조리법이 제일 좋습니다. 맑게 찐다고 해서 칭정위(淸蒸魚)라고 하지요. 핀밍팡의 생선찜은 생선을 담백하게 찌면서 토마토와 푸른잎 채소를 곁들이고, 파를 얹어 파 향기까지 더합니다. 생선찜에 토마토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생선에서도 이런 맛이 날 수 있구나 감탄사가 절로 납니다.
일반 식당으로는 쉬창런자(許昌人家)도 1인당 30위안 수준으로 저렴하게 풍성한 식탁을 즐길 수 있습니다. 춘추광장의 서북쪽에 있습니다. 주소 許昌 建設路 296號 春秋廣場 西北側, 문의 0374- 266-8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