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선시(禪詩)감상_10

醉月 2011. 2. 16. 08:54

추운 달(拈頌第八九六則公案頌)

寒月依依上遠峰  平湖萬頃練光封
漁歌驚起汀沙驚  飛出蘆花不見


추운 달 외로이 먼 봉우리에 걸리면
넓고넓은 저 호수에 달빛 덮이네
고기잡이 노랫소리 해오라기 깨웠으나
갈꽃 차고 날아가 그 흔적 없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단하자순(丹霞子淳, 1064~1117)
송(宋)나라 때 사람.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스승. 부용도개로부터 사법(嗣法)했다. 조동종 사람으로 등주(鄧州)단하산(丹霞山)에서 오랫동안 주석했다.
수주(隨州)의 대홍산(大洪山)으로 법좌(法座)를 옮겨 여기에서 천동정각(天童正覺)에게 제일좌(第一座)를 맡겼다.

저 강물 위에(拈頌第九百四六則公案頌)

長江澄澈印蟾華 滿目淸光未是家
借問漁舟何處去 夜深依舊宿蘆花


저 강물 위에 배어드는 달빛이여
눈 가득 그 푸른빛마저 거부하네
고기잡이 저 배여 어디메로 가는가
밤이 되면 어제처럼 갈숲 속에 잠드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단하자순(丹霞子淳, 1064~1117)
송(宋)나라 때 사람. 천동정각(天童正覺)의 스승. 부용도개로부터 사법(嗣法)했다. 조동종 사람으로 등주(鄧州)단하산(丹霞山)에서 오랫동안 주석했다.
수주(隨州)의 대홍산(大洪山)으로 법좌(法座)를 옮겨 여기에서 천동정각(天童正覺)에게 제일좌(第一座)를 맡겼다.

 깨달음(悟道)

昨日夜叉心 今朝菩薩面
菩薩與夜叉 不隔一條線


어제는 야차(夜叉)의 마음이었는데
오늘은 보살의 얼굴이네
보살과 야차가
백지 한 장 차이도 안 되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문수심도
(文殊心道, ?~1129)
송(宋)나라 때 사람.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문수는 주석 사명이고 속성은 서(徐)씨. 사천성 미주(眉州)출신이다.
30세에 출가하여,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유식학을 공부하고 출유(出遊)하여 안휘성 서주(舒州) 태평(太平)에 이르러 불감혜근(佛鑑慧懃)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양주(襄主)의 청에 의해 천녕사(天寧寺)에서 개당하고, 후에 호남성 상덕부(常德府)의 문수원(文殊院)으로 옮겼다. 건염(建炎) 3년 3월에 입적했다.

지인을 보내며(送化士分衛)

大地撮來栗米粒  一毫頭上現乾坤
居家不離途中事  常在途中不出門

대지를 움켜쥐자 쌀 한 톨만하니
한 오라기 털끝 위에 천지가 나타나네
집 안에 있으면서 길을 떠나지 않고
길을 가면서 문밖을 나가지 않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호구소륭
(虎丘紹隆, 1077~1136)
안휘성(安徽省) 함산현(含山懸)에서 태어났다. 원오극근(圓悟克勤)의 법을 이어 대혜종고(大慧宗皐)와 쌍벽을 이루었다.
임제선의 거장으로 저서로는 《호구화상어록(虎丘和尙語錄)》(1권)이 있다.

 

임종게(臨終偈)

要行便行  要去便去
撞破天關  地軸

올 때는 문득 오고
갈 때는 미련 없이 가네
하늘을 후려쳐 뚫어 버리고
대지를 뒤집어엎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대위선과(大善果, 1079~1152)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의 선승. 상서성에서 태어났다. 황룡사심(黃龍死心)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저서에는 《월암과화상어요(月菴果和尙語要)》(1권)가 있다.

 

달 속의 여인(拈頌第七二則公案頌)

 

月裡姮娥不畵眉 只將雲霧作羅衣
不知夢逐靑鸞去 猶把花枝蓋面歸


달 속의 여인(항아)은 화장도 않고
구름과 안개만으로 몸을 감았네
꿈속에서 푸른 난새 쫓아가던 일 잊고
여전히 꽃가지로 얼굴 가리고 돌아오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죽암사규(竹庵士珪, 1083~1146)
1083년 사천성에서 태어났다.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사씨(史氏)의 아들로 처음에 대자종아(大慈宗雅)에게 배우고, 나중에 용문(龍門)의 청원(淸遠)에게 가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정화(政和) 말 천녕(天寧)에 출세(出世), 여러 이름난 사찰에 두루 주석했다. 조(詔)를 받들어 안탕산(雁蕩散)에 개산(開山)했다. 송(宋) 소흥(紹興) 16년 7월 18일에 입적했다. 고산(鼓山)에 영골(靈骨)을 장사하였다.

죽암송(竹庵頌)

種竹百餘箇  結茅三兩間  才通溪上路  不碍屋頭山
黃葉水去住  白雲風往還  平生只如此  道者少機關

백여 그루 대나무 심어
두세 칸의 풀집 마련했나니
개울 위로 겨우 난 길은
산의 능선을 가리지 않네
낙엽은 흐르다가 머물고
흰구름 바람 따라 오가네
평생이 다만 이와 같거니
은자(隱者)의 조촐한 살림살이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죽암사규
(竹庵士珪, 1083~1146)
1083년 사천성에서 태어났다.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사씨(史氏)의 아들로 처음에 대자종아(大慈宗雅)에게 배우고, 나중에 용문(龍門)의 청원(淸遠)에게 가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정화(政和) 말 천녕(天寧)에 출세(出世), 여러 이름난 사찰에 두루 주석했다. 조(詔)를 받들어 안탕산(雁蕩散)에 개산(開山)했다. 송(宋) 소흥(紹興) 16년 7월 18일에 입적했다. 고산(鼓山)에 영골(靈骨)을 장사하였다.

 

탄생(無題)

老潢生便著忙 周行七步似顚狂
他無限癡男女 開眼堂堂入


이 노인네 태어나면서부터 수선을 떨어
마치 미친놈처럼 일곱 걸음 걸었네
수많은 선남 선녀 눈멀게 하고는
두 눈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
1089년 안휘성 영국(寧國)에서 태어났다. 1105년 17세에 동산(東山) 혜운사(慧雲寺)에 입산하였다. 혼자 선적(禪籍)연구에 몰두하다가 동산미(洞山微)에게서 조동종의 선지(禪旨)를 배웠다. 다음 담당문준(湛堂文準)을 찾아가 참선수행에 전념하다가 문준(文準)이 입적한 뒤(1115) 그의 유언으로 1124년 원오(悟)의 문하에서 각고의 수행 끝에 대오(大悟)하였다.
1134년 금(金)과의 전쟁을 피해서 복건성의 양서암(洋嶼庵)에 머물면서 묵조선(照禪)비판의 포문을 열며 간화선(看話禪)을 부르짖었다. 금과의 전쟁이 평화적으로 성립되자 주전론자(主戰論者) 장구성(張九成)과 함께 승적을 박탈당하고 호남성으로 유배되어 10년 동안 여기에 머물렀다. 후에 경산(俓山)의 능인선원(能仁禪院)으로 다시 돌아와 임제선풍의 재건에 힘썼다. 당시 묵조 의 거장 천동정각(天童正覺)과 그는 절친한 도반이었다.
1163년 75세에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대혜어록(大慧語錄)》외에 여러 권이 있다.

화음산(拈頌第七二則公案頌)

華陰山前百尺井 中有寒泉徹骨冷
誰家女子來照影 不照其餘照斜領


화음산 앞 백 길 벼랑에
한 샘물 솟아 뼛속까지 차갑네
이 물위에 그림자 지니 뉘집 새댁인가
그 몸짓 닿기 전 옷자락이 비치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대혜종고
(大慧宗, 1089~1163)
1089년 안휘성 영국(寧國)에서 태어났다. 1105년 17세에 동산(東山) 혜운사(慧雲寺)에 입산하였다. 혼자 선적(禪籍)연구에 몰두하다가 동산미(洞山微)에게서 조동종의 선지(禪旨)를 배웠다. 다음 담당문준(湛堂文準)을 찾아가 참선수행에 전념하다가 문준(文準)이 입적한 뒤(1115) 그의 유언으로 1124년 원오(悟)의 문하에서 각고의 수행 끝에 대오(大悟)하였다.
1134년 금(金)과의 전쟁을 피해서 복건성의 양서암(洋嶼庵)에 머물면서 묵조선(照禪)비판의 포문을 열며 간화선(看話禪)을 부르짖었다. 금과의 전쟁이 평화적으로 성립되자 주전론자(主戰論者) 장구성(張九成)과 함께 승적을 박탈당하고 호남성으로 유배되어 10년 동안 여기에 머물렀다. 후에 경산(俓山)의 능인선원(能仁禪院)으로 다시 돌아와 임제선풍의 재건에 힘썼다. 당시 묵조선의 거장 천동정각(天童正覺)과 그는 절친한 도반이었다.
1163년 75세에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대혜어록(大慧語錄)》외에 여러 권이 있다.

 

묘희암송(妙喜庵頌)

生滅不滅 常住不住
圓覺空明 隨物現處


생멸은 불멸이요
상주(常住)는 부주(不住)라
원각(圓覺)의 허공 밝거니
사물을 따라 곳곳에 나타나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대혜종고
(大慧宗, 1089~1163)
1089년 안휘성 영국(寧國)에서 태어났다. 1105년 17세에 동산(東山) 혜운사(慧雲寺)에 입산하였다. 혼자 선적(禪籍)연구에 몰두하다가 동산미(洞山微)에게서 조동종의 선지(禪旨)를 배웠다. 다음 담당문준(湛堂文準)을 찾아가 참선수행에 전념하다가 문준(文準)이 입적한 뒤(1115) 그의 유언으로 1124년 원오(悟)의 문하에서 각고의 수행 끝에 대오(大悟)하였다.
1134년 금(金)과의 전쟁을 피해서 복건성의 양서암(洋嶼庵)에 머물면서 묵조선(照禪)비판의 포문을 열며 간화선(看話禪)을 부르짖었다. 금과의 전쟁이 평화적으로 성립되자 주전론자(主戰論者) 장구성(張九成)과 함께 승적을 박탈당하고 호남성으로 유배되어 10년 동안 여기에 머물렀다. 후에 경산(俓山)의 능인선원(能仁禪院)으로 다시 돌아와 임제선풍의 재건에 힘썼다. 당시 묵조선의 거장 천동정각(天童正覺)과 그는 절친한 도반이었다.
1163년 75세에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대혜어록(大慧語錄)》외에 여러 권이 있다.

법왕의 몸(無題)

撲落非他物  縱橫不是塵
山河大地   全露法王身


서 떨어뜨려 보니 다른 물건 아니었네
종횡무진 치달아도 먼지(번뇌) 일지 않으니
저 산하와 이 대지가
그대로 온통 법왕의 몸이었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수암요연(誰菴了演, ?~?)
송(宋)의 선승. 대혜종고의 문하. 나머지 내용은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물이 흐르고 구름 가는 이치(無題)

流水下山非有意 片雲歸洞本無心
人生若得如雲水 鐵樹開花遍界春


물이 산 아래로 흐르는 것은 별다른 뜻이 없고
조각구름이 골로 들어오는 것 또한 무심의 소치니
물이 흐르고 구름 가는 이치를 깨닫는다면
무쇠나무에 꽃 피어 온 누리가 봄이리.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차암수정(此菴守淨, ?~?)
송(宋)의 선승. 대혜종고의 법을 이었다. 저서에는 《차암정선사어요(此菴淨禪師語要)》<1권>가 있다.

경지(姚道人乞頌)

慈悲方便事 觸處有工未
應變隨聲色 團團盤走珠


자비 방편이여
먹고 잠자는 이대로가 수행이네
소리와 형상을 딸라 자유롭기
쟁반 위에 구슬 구르는 것 같네.

<해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엮음/민족사>


천동정각(天童正覺 , 1091~1157)
굉지정각(宏智正覺). 산서성 습주에서 태어났다. 11세때 정명사(淨明寺) 본종화상(本宗和尙)에게 머리를 깎았다. 14세에 진주(晋州) 자운사(慈雲寺)의 지경화상(智瓊和尙)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8세에 구도행각 길에 올랐다. 여주(汝州)의 향산(香山)에 가서 고목법성선사(枯木法成禪師)를 만났다. 여기에서 깨침을 얻고 법성(法成)의 지시에 따라 단하산의 자순(子淳)을 찾아갔다. 자순에게서 확연히 크게 깨달았다. 검소하기 이를 데 없었고, 문하에는 언제나 1,200여 납자(衲子)가 모여들었다. 많은 납자에 비해 식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럴 때면 죽을 쑤어 먹었다. 죽으로도 안 되면 불어난 사람 수만큼 물을 부어서 죽을 쑤었는데 그 죽에 천장이 비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30여년 간 천동산(天童山)에서 조동가풍(曹洞家風)을 드날렸다. 소흥(紹興) 27년 67세로 입적했다. 후세 사람들은 천동정각을 일컬어 대혜종고와 함께 ‘선문(禪門)’의 2대 감로(甘露)라고 했다.
저서 : 《천동송고백칙(天童頌古百則 : ‘從谷錄’의 원전)》, 《천동굉지각선사어록(天童宏智覺禪師語錄)》(4권),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9권)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