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서운산 석남사

醉月 2011. 2. 13. 07:43

서운산 석남사

바르게 보고, 듣고, 말하면 서있는 곳이 극락
▲ 금광루 마루에 앉아 대웅전을 바라본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웅전 안의 부처님과 내 마음 속 부처님의 얼굴이 겹쳐진다.

풀벌레 울음소리에 실려 오는 밤기운이 서늘합니다. 창문을 열자 잠은 저만치 달아나고, 한 줄기 바람이 마음 한 귀퉁이를 뚫고 지납니다. 메마른 마음 밭엔 먼지만 풀썩입니다. 뒤늦게 숙제를 챙기는 아이처럼 허둥거려 보지만 도무지 수습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자리와 지난 여름에 흘린 땀방울의 상관관계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되, 그것과 비례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부지런을 떨든 게으름을 피우든, ‘일대사(一大事)를 마치지 못한’ 삶은 ‘꾸어 사는 것’이나 매한가지일 테니까요. 꾸어 사는 형편에 늘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겠지요.

한가한 절을 찾고 싶었습니다. 훌쩍 떠나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인적이 드문 절에서, 내 마음의 법당이 얼마나 빈한한지를 살피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찾은 절이 경기도 안성의 서운산 석남사였습니다.

안성 시내에서 313번 지방도를 타고 진천쪽으로 달리다 상촌 마을을 지나자 절로 드는 작은 길이 열려 있습니다. 1.2Km쯤 되는 그 길은, 오로지 절로 드는 사람들이나 서운산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길입니다. 막다른 그 길이 불러일으키는 격절감은, 산과 절을 찾는 일의 본질이 ‘무용(無用)의 용(用)’임을 일깨워줍니다. 산사(山寺)는 이렇게, 범부에게도 ‘아무것도 구하는 바 없는 일의 즐거움’을 허락합니다.

서운산(瑞雲山, 547m)은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솔가한 호서정맥이 서북쪽으로 휘돌아 흐르다 안성의 칠장산에서 한남정맥을 갈래친 다음 남서쪽으로 꺾어져 내리는 초입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산줄기는 계속 남쪽으로 내달려 서천을 지나 금강 하구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서운산은 높고 우람하지는 않지만 산세가 부드럽고 웬만해선 물이 마르지 않는 계곡을 품고 있어서 산의 동서 양쪽에 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쪽 산자락에 앉아 있는 절이 남사당의 근거지로 알려진 청룡사이고, 동쪽 기슭의 절이 바로 석남사입니다.

▲ 금광루 앞 마당에서부터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상승감이 수직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길고 높다.(왼쪽) 단청을 하지 않아 더 단아해 보이는 해우소.

잘 버릴 줄 알아야 잘 채울 수 있는 법(오른쪽)길이 끝나자 계곡의 물소리가 발을 씻어 줍니다. 고개를 드니 절집의 기왓골로 이른 가을볕이 흘러내립니다. 석축을 쌓아 누그러뜨린 기슭 위로 금광루(金光樓)와 단청을 입히지 않은 해우소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금광루의 누하(樓下)는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오직 한군데 대웅전을 향한 쪽으로만 시야가 열립니다. 계단으로 몸을 세우기 전, 먼저 고개가 젖혀지면서 대웅전에 시선이 고정됩니다.

대웅전에 이르는 돌계단이 아스라해 보일 정도로 가팔라 보입니다. 금광루 아래의 폐쇄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웅전의 상승감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진입구조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형식은 아니었고 2003년에 현 주지인 정무 스님이 금광루를 신축하고 도량정비를 하면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 금광루의 벽화.(위쪽) 영산전 아래 물확에 익살과 운치를 더하고 있는 돌두꺼비 조각.(아래쪽)석남사는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담화 스님이 초창했습니다. 고려 광종 때인 970년에 혜리 국사가, 원종 때인 1265년에 태원 스님이 중창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태종 7년(1407)에 자복사(資福寺·국가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정한 사찰)로 지정되어 이 지역의 으뜸 사찰이 되었으나, 우리나라 대부분 절이 그랬듯이 임진왜란 때 잿더미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후 인조 27년(1649)부터 10여 년간 해원 선사가 영산전을 중수하는 등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합니다.

보물 제823호인 영산전은 조선 중기의 특징을 지닌 건물로, 암막새기와에 ‘영조 1년(1725)에 번와(飜瓦·기와를 바꾸는 일)했다’는 명문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절대연대는 최소한 17세기로 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기둥은 물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하나씩 공포가 있는 다포식 건물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 건물은 2003년에 기와 수리를 시작했다가 건물이 너무 낡아서 해체 보수로 계획을 바꾸어 2006년 9월20일까지 마치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마무리를 하려면 한참 더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절에 가는 이유가 건물을 보는 데 있는 건 아니지만, 오랜 세월의 풍화와 사회적 변고를 겪고도 살아남은 건물은 시대와 시대를 이어주는 역사와 문화의 징검다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보며 시간 여행을 해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몇 년째 비닐 천막을 두르고 전기톱 소리를 내며 참배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은, 종교적 의미를 떠나 정부(문화재청)의 태도가 국민에 대해 여간 무례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 영산전 옆 계단 양쪽에는 2기의 화강석 석탑이 서 있다(향토유적 제19호)

 

석남사는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서 크게 세 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금강루의 마루에 잇닿은 첫 번째 단에는 좌우로 요사로 쓰이는 중심당과 종무소, 한 단을 더 오르면 오른쪽으로 영산전, 뒤편으로 도중당, 그리고 맨 위의 단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영산전 앞에 대웅전이 있었으나 1978년에 사찰의 일반적인 형식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겼다 합니다. 영산전 옆 계단 좌우에는 고려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는 2기의 석탑(향토유적 제19호)이 서 있습니다. 체감율이 낮아서 조금 불안해 보입니다.

석남사는 작은 절이지만 크기에 걸맞게 아늑합니다. 둘러싼 산들도 부드럽습니다. 계곡도 크고 깊지 않지만 굽이돌 때마다 작은 못을 이루어 구름을 쉬어가게 합니다. 도량의 분위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계단 옆이나 석축 위에는 여염집 마당이나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스모스, 백일홍, 맨드라미, 메리골드, 베고니아 같은 꽃이 한창입니다. 조경 전문가의 눈에는 산사에 어울리지 않는 꽃들이라 할 법도 합니다만, 보는 이의 눈길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 대웅전의 뒷모습. 순한 산들로 둘러싸인 모습이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을 안온하게 해 준다.

 

이렇게 절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초입의 금광루로 돌아와 누각 마루에 앉아서 대웅전을 바라봅니다. 지붕과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보여서 오히려 건물의 존재감이 부각됩니다. 그렇게 올려다보지만 말고 네 스스로 부처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읽어봅니다만, 그것도 부질없는 짓 같습니다. 그저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해도 법당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해집니다. 하염없이 앉아있고 싶은 곳입니다.

주지 스님과 중창 불사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산으로 옮겨갔습니다.
“왜 밥 싸들고 물 지고 힘들게 산으로 다닙니까. 뭐 하러 산을 지고 다니듯 합니까. 계곡에서 물 떠먹고, 절에서 밥 얻어먹으면 되지 않아요? 절만 한번 하면 되는데.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밥을 먹어라 해도 안 먹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것까지 있나 싶지요. 자연에 왔으면 자연스럽게 살아야지요. 인자요산(仁者樂山)란 말이 있잖아요. 산을 좋아하면 어진 사람이 됩니다.”

모든 산행을 스님 말처럼 할 수는 없겠지만, 산과 절이라는 곳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공간인가를 일깨워 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신흥사에 들른 김에 설악산을, 해인사에 간 걸음에 가야산을 오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석남사처럼 산과 절이 거의 포개져 있는 곳은 산을 한 바퀴 도는 일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서운산의 경우는 절에서 정상까지 왕복 3.6km로 1시간30분 정도면 족합니다. 그 정도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절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애불(도유형문화재 제109호)은 꼭 만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절에서 계곡을 따라 500미터 쯤 오르면 바위에서 부처님이 나타나 반겨 준다(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09호).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계곡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뒷짐을 지고 10분쯤 오르자 마애불을 가리키는 표지가 나타납니다. 산기슭 옆 바위에 부처님이 돋을새김돼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마애불로 추정합니다. 오랜 풍상으로 마멸이 심합니다만, 이목구비와 두광과 신광은 뚜렷합니다. 가슴에 얹은 양손은 설법인을 하고 있고 옷주름의 매듭은 방금 묶은 듯 사실적입니다.

상체보다 훨씬 짧은 하체는 유난히 발을 강조했고, 발 아래 대좌의 연꽃잎은 현대 조각이 아닌가 싶은 정도로 과감합니다. 세상을 두루 살피면서 바로 보고 듣고 말하면, 자신이 선 곳이 바로 연꽃세상이라는 가르침으로 새겨도 좋을 듯합니다. 

내친 김에 정상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숲은 편안하게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계곡이 끝나는 정상 직전의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 편안한 능선에 오르자 몸도 마음도 한결 편안해집니다. 내 가난한 마음속 부처님이 편안히 웃는 모습을 보려면 앞으로도 걷고 또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