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찬구 교수의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_02

醉月 2011. 2. 14. 08:49
<6> 조화와 공존의 가락, 만파식적
바다를 노래하는 피리소리, 그것은 민중의 목소리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6> 조화와 공존의 가락, 만파식적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6> 조화와 공존의 가락, 만파식적
  감은사지 삼층석탑. 이 웅장한 자태만큼이나 지배층의 허영과 어리석음도 크지 않았을까
문무대왕릉은 봉길해수욕장 저 앞에 떠 있다. 그런데 이 수중릉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곳이 있다. 바로 이견대(利見臺)다. "이로운 것이 보이는 둔덕"이라는 뜻인데 지금은 이견정(利見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바로 이곳에서 용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고 한다. 물론 그 용은 죽어서 용이 되겠다고 한 문무왕일 것이다.

이 이견대에서 내륙으로 조금만 가면 감은사지(感恩寺址)가 있다. 두 개의 커다란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어서 멀리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금당(金堂)이 있었던 터에는 초석들만 남아 있는데 바로 그 금당 섬돌 아래에 구멍이 하나 있었고 그 구멍으로 용이 들어와서 서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견대에서 보았다는 그 용이다.

· 안에 도사리고 있는 적들

감은사는 말 그대로 "은혜를 고맙게 여겨서 세운 절"이다.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선왕인 문무왕을 위해서 지은 절이다. 가까이에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고 또 이견대가 있으니 문무왕이 죽어서까지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그 뜻을 기리어 지은 것임을 알겠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서는 이 절이 신문왕 2년(682)에 완성되었다고 적고 있다. 신문왕 2년!

문무왕을 이어서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즉위 초부터 곤란을 겪었다. 왕위에 오른 지 한 달 만인 8월 8일에 장인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반역을 도모한 자들을 처형하기는 했지만 왕으로서는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신문왕 1년의 기사를 보면 왕은 즉각 교서를 내려서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멀거나 가까운 곳에 걱정거리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과연 걱정거리가 없어졌을까?

왕은 또 이찬인 군관(軍官)의 목을 베고서 교서를 내렸는데 거기에서는 "윗사람을 섬기는 법도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기본이요, 관직에 있는 의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이 교서에서는 신하들이 자신들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고 줄곧 꾸짖으면서 군관의 목을 베는 것으로 경계하겠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어디에도 왕이 자신의 허물을 탓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교서를 접한 백성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말로 걱정거리가 없어졌다고 여기고 왕에 대한 충성심이 솟아났을까?

문무왕이 오랜 세월 동안 바깥의 적들을 상대하여 이윽고 통일을 이룩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모든 환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통해서 보더라도 밖에 있는 적들보다는 안에 있는 적들이 더 무섭고 두려운 존재들이다. 통일을 이루고 당나라까지 몰아낸 신라에도 "안에 적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김흠돌의 반란에서 드러났다.

· 신문왕의 착각

그런데도 신문왕은 큰 착각을 하였다. 반역을 꾀한 자들을 처형한 뒤에 "멀거나 가까운 곳에 걱정거리가 없어졌다"고 한 데서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음이 드러났고 아랫사람들이 왕을 섬기는 것만 말하고 그들이나 자신이 백성들을 섬겨야 한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이런 신문왕의 착각을 일깨워주려고 민중은 '만파식적'이라는 이야기를 널리 퍼뜨렸다.

신문왕이 즉위한 이듬해 5월이었다. 동해에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를 향해 떠오는데 물결을 따라서 왔다 갔다 하였다. 왕이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살펴보니 산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고 그 위에는 한 그루 대나무가 있으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이튿날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자, 이레 동안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어두웠다고 한다. 이는 산고(産苦)와 같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이윽고 왕이 산에 들어갔다.

용은 왕에게 옥대(玉帶)를 바쳤다. 왕은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해지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용은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며 소리가 나는 것과 같소"라고 대답하면서 대나무는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고 또 거룩한 왕은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문무왕과 김유신이 마음을 함께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왕과 신하들, 즉 지배층이 화합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 용의 대답은 곧 민중의 대답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화합하여야 하는가?

왕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리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이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백성들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고 한 맹자의 말을 제쳐두더라도, 제왕과 신하들은 백성들을 결코 잊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얼마나 자주 또 쉽게 잊어버리는가! 국학(國學)을 설립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데 앞장선 신문왕이기에 그의 착각은 더욱 중대하다. 왕이 그러한데, 그 신하들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민중은 용을 내세워서, 아니 정확하게는 이야기를 통해서 일깨우려 하였다.

· 만파식적, 조화와 공존의 소리

신문왕은 용의 말을 통해 새삼스럽게 정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리라. 그래서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다. 만파식적은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는 뜻이다. 파도는 무엇이며 피리는 무엇인가? 파도는 인간 세상의 갖가지 분란과 소란, 혼란을 의미한다. 특히 지배층의 탐욕과 대립, 갈등에서 빚어지는 온갖 어지러움이 바로 파도다.

피리는 곧 음악이다. 그러나 피리를 분다고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리에 율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음률이라 한다. 소리는 무수히 많고 다양하지만, 그것을 잡도리하지 않으면 소음에 불과하다.

음률은 소리를 다스리는 원리요 원칙이며 이치다. 이 음률을 통해서 다양한 소리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음악이 된다. 음률은 곧 다양성을 용인하면서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피리는 조화와 공존의 매개로서, 여기에 참된 정치의 원리가 담겨 있다.

파도는 바다에서 인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난 대나무가 파도를 잠재운다. 땅에서 바다의 파도를 잠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파도를 일으킨 당사자가 파도를 잠재워야 한다. 분란을 일으키고 혼란을 부추긴 자들이 있다면 바로 그들이 그 분란과 혼란을 다스려야 한다. 천하가 어지러운 것은 백성들 탓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층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지배층에서 해결해야 한다. 민중은 그저 이야기를 통해 일깨워줄 뿐이다. 아, 힘없는 민초에게는 이야기가 유일한 무기였다!

이야기는 백성이라는 바다에서 솟아난 대나무와 같다. 갖가지 비유와 상징, 역설 따위가 하나의 음률 속에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어 '만파식적'이라는 피리가 되었다. 이제 그 피리를 백성들은 왕에게 건네주었다. 왕은 제 입술로 그 피리를 불어야 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담아낸 가락, 참된 다스림과 어울림이라는 가락을 뽑아내야 한다. 신하들도 그 가락을 듣고 함께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면 탐욕과 어리석음, 분열과 대립 따위 마음에서 이는 모든 파도가 잠잠해지고, 세상은 태평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왕은 그 가락을 제대로 뽑아낼 수 있을까? 관리들은 그 가락을 듣고 깊이 흥취를 느낄 수 있을까? 그 참된 가락을 뽑고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 또한 이야기 속에 있다. 그것은 용이 왕에게 바친 옥대 속에 숨겨져 있다.

· 옥대, 나를 먼저 잡도리하라

처음에 신문왕은 옥대를 그 뜻도 모른 채 받았다. 왕은 바다에서 나와 감은사에서 하룻밤 묵고는 기림사(祇林寺) 쪽으로 갔다. 감은사에서 경주 보문단지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곧 길갈래를 만나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함월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에 기림사가 천 년이 넘는 세월을 품고 앉아 있다.

왕이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고 있으니 대궐을 지키고 있던 태자가 말을 달려서 왔다. 그리고 옥대를 살펴보더니 "옥대의 구멍에 있는 눈금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어찌 아느냐고 물으니 태자가 눈금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었다. 눈금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왕은 눈앞에 있는 용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옥대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는 말이다. 그러면 옥대의 의미는 무엇인가?

옥대는 '옥으로 만든 띠'다. 띠는 옷이 헐거워지지 않도록 졸라매는 구실을 한다. 이는 곧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단단히 잡도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옥대는 왕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이 공복(公服)에 두르는 것이다. 따라서 옥대는 왕과 관리들이 자신들을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하를 화평하게 할 피리를 불고 그 가락을 맛보려면 탐욕으로 날뛰는 마음을 먼저 잡도리해야 한다. 마음이 날뛰는데 가락이 맞겠는가? 제대로 맛을 볼 수 있겠는가?

신문왕은 반란이 일어났을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했다. 아랫사람이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고 꾸짖고 탓하기 전에 자신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 그런데 그 윗물도 아랫물도 모두 시냇물이나 개울물에 지나지 않는다. 크다고 해봐야 강물이다. 이 모두 가장 낮은 곳으로 가서 바닷물을 만나면 가뭇없다. 그 바다가 곧 백성이다. 가장 낮지만 가장 거대한 바다! 그 바다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가락 '만파식적'!

 

<7> 해양 강국을 이룩한 김수로왕
하늘에서 내려온 왕과 바다 건넌 왕후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7>  해양 강국을 이룩한 김수로왕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

 

토요일 오전. 만덕터널을 지나서 흐린 듯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김해로 향했다. 동김해 IC에서 김해 시내로 들어가서는 곧장 나아갔다. 사거리가 나올 때까지 가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대로 계속 가니 수로왕릉을 가리키는 표지가 보이고, 이내 수로왕릉(首露王陵)이 오른쪽에서 나타났다. 김해민속박물관이 있는 수릉원과 이웃하고 있었다.

입구인 숭화문(崇化門)을 들어서니 가락루(駕洛樓)라는 현판을 단 누각이 나오고, 그 아래를 지나가니 '납릉정문(納陵正門)'이라 쓰인 문이 바로 보인다. 그 문 너머에 거대한 봉분이 나지막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봉분 앞에는 거대한 빗돌이 서 있고, 그 좌우에는 문관과 무관으로 보이는 석상이 둘씩 서서 왕을 시위하고 있다. 또 그 앞에는 세 가지 동물의 석상들이 좌우에 나란히 서 있다. 석상들은 후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고, 봉분 또한 본래의 모습은 아닌 듯하다. 이제 이야기 속에서 그 자취를 더듬어 봐야겠다.

·하늘에서 내려온 왕

수로왕과 가야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다. 원래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文宗, 1047~1083 재위) 때 지금의 김해인 금관(金官)에 관리로 파견된 문인이 찬술한 글이다. 이를 일연 스님이 간략하게 줄여서 '삼국유사'에 실었다. 간락하게나마 실어 두지 않았다면 가야의 역사는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가락국기'를 보면 천지가 개벽한 뒤에 이 땅에 아직 나라 이름이 없고 또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을 때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수로(首露)'라 하였다고 한다. 물론 백성들이나 그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이들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구간(九干)이라는 아홉 명의 우두머리가 백성들을 이끌고 있었다. 다만 왕이라 불릴 만한 이가 없었고 비로소 처음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면 수로왕은 어디서 처음 나타났는가? 지금 왕릉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거기에 구지봉(龜旨峰)이 있다. 말 그대로 '거북이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꼭대기에서 금합에 싸인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때인 42년, 음력 3월 3일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가 수로왕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황금색 알 여섯은 12일이 지나자 모두 어린이로 변했고 다시 10여 일이 지나자 풍채 당당한 사내가 되었다. 이들은 각기 여섯 가야국을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은 그 가운데서 대가락(大駕洛)을 다스렸다. 수로왕은 먼저 도읍을 세울 만한 땅을 골라서 외성을 두르고 궁궐을 짓게 하였다. 이로써 대가락은 하나의 국가로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수로왕이 '수로'라 불린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대가락을 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이는 무얼 의미하는가?

·바다를 건너온 왕후

'가야'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부산에도 '가야'로 불리는 곳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말은 아궁이가 '불의 신'을 뜻하는 산스크리트 '아그니'에서 온 말인 것처럼 인도에서 건너 왔다. 인도 서북부의 비하르에 가야(Gaya)라는 곳이 있다. 본래 가야는 힌두교의 주요 성지다. 거기서 서쪽으로 가면 우타르 프라데쉬라는 곳이 나오는데 바로 그곳에 옛날에 아유타라는 왕국이 있었다. 거의 2천 년 전, 그곳에서 한 여인이 바다를 건너오면서 '가야'는 이 땅에서 나라 이름이 되고 땅 이름이 되었다.

48년 5월 즈음, 아유타의 국왕과 모후는 딸에게 "꿈에 상제가 나타나, 공주를 가락국의 왕에게 보내어 배필로 삼게 하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하면서 가락국으로 떠나라고 하였다. 공주는 부모와 작별하고 생면부지의 남편을 찾아서 아득한 바닷길을 나섰다. 공주의 성은 허(許)요,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이제 갓 피어난 꽃 같은 소녀가 그저 부모의 명을 받아서 위험천만한 항해에 나섰으니, 대담하기 짝이 없다.

음력 7월 27일 즈음, 배는 김해 앞 바다의 서남쪽에서 북쪽으로 들어섰다. 배는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고 있었다. 망산도(望山島)라는 곳에서 수로왕의 신하인 유천간이 기다리고 있다가 맞아들였다. 그러나 허황옥은 경솔하게 따라 나서지 않았다. 공주는 위엄과 절도가 있었고 예의에 맞게 행동하였다. 수로왕은 행궁(行宮)에서 허황옥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해서 허황옥은 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다. 허황옥은 수로왕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았다. 말하자면 연상의 여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혼인을 한 뒤에 왕후가 타고 온 배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과연 쉽사리 돌아갈 수 있었을까? 사실 왕후가 탄 배는 아유타국에서 두 달가량이 지나서 김해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는 참으로 빠른 속도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당시 인도 서북부의 벵골은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인도양을 통해서 서쪽 로마에서 동쪽 중국까지 무역을 주도했던 이들은 벵골 사람들이었다. 인도의 동쪽 바다를 '벵골만'이라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벵골 서쪽에 이웃해 있는 곳이 바로 가야와 아유타국이었으니 허황옥의 일행이 바다를 통해서 김해로 오는 것이 어찌 용이하지 않았겠는가.

· 해양국가로 나아간 가락국

수로왕의 가야국은 여섯 가야 가운데 하나였다. 말하자면 통일국가도 아니었고 거대하지도 않았다. 반면 허황옥의 고향인 아유타국은 이미 상당히 발달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22~기원전 185)를 통해 거대한 제국이 건설되면서 정치 제도가 체계화되고 찬란한 문화가 이룩되는 시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국가 체제의 발달은 곧 문명의 발달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다를 건너 온 허황옥은 신분만 높은 공주가 아니었다.

허황옥은 인도의 발달한 문명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더구나 공주였으니 상당한 정도로 문명을 체득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막 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있던 가락국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원군을 얻은 셈이다. 수로왕은 왕후를 통해서 선진 문물을 배우고 또 국가를 운영하는 요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왕후를 맞이한 뒤에 수로왕은 본격적으로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수로왕은 나랏일을 체계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직위와 명칭을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다고 여겨서 신라의 직제를 채용하는 한편, 중국 주나라의 제도와 한나라의 법도도 아울러 썼다.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는 중국이나 인도가 다르지 않았겠으나, 구체적인 제도나 법도는 아무래도 중국의 것이 용이하고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체제를 정비한 수로왕은 이윽고 해양국가의 면모를 갖추려고 하였다.

가락국은 바다를 앞에 두고 또 강을 끼고 있었으니 바다와 강을 활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아직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했다. 그때 마침 아유타국에서 배가 온 것이다. 왕후가 타고 온 배는 동양과 서양을 오갈 수 있는 선박의 건조 기술, 그리고 먼 바다를 다닐 수 있는 항해술의 집약이었다. 비록 본국으로 되돌아갔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교류가 끝난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토록 쉽게 오갈 수 있었다면,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로왕과 가락국은 더없이 긴요한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을 배우고 익혔을 것이다.

·탈해 또는 신라를 쫓아내다

가락국이 해양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가락국기'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것은 수로왕과 탈해의 대결이다. 알다시피 탈해는 바다를 건너 온 인물이다. 따라서 탈해 또한 상당한 정도의 해양 세력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가 수로왕에게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라고 선언하면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수로왕과 탈해는 갖가지 기이한 술책으로 대결을 벌였고 왕이 이겼다. 항복한 탈해는 곧장 나루터로 가서는 '중국 배가 와서 대는 뱃길을 따라' 떠났고 수로왕은 그가 반란을 꾸밀까 염려하여 '수군을 실은 배 5백 척을 보내어 그를 쫓았다'. 수로왕과 탈해의 대결은 곧 해양세력간의 대결을 상징한다. 수로왕의 승리는 외부의 해양세력을 물리친 것이며 그 위세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징성 외에도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하나는 중국의 배가 김해 앞으로 오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는 당연하다. 멀리 인도에서도 배가 오가는데 가까운 중국에서 배가 오가지 않겠는가. 남해 바다는 2천 년 전에도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락국에 500척의 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크기는 알 수 없으나 크기와 상관없이 당시에 500척의 배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적어도 500척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바로 가락국이 해양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후로 오랫동안 가야는 남해 바다를 주름잡았다.

그런데 이렇게 강력했던 해양국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고 일본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야가 왜 삼국보다 먼저 쇠망하게 되었는가? 그 실마리는 왕후 허황옥에게 있으며 '삼국유사' 속 다른 이야기에 숨겨져 있다

 

<8> 이루지 못한 불국토의 꿈
철학없는 가락국은 흩어져 버렸네

[삼국유사 속 바다 이야기] <8> 이루지 못한 불국토의 꿈
[삼국유사 속 바다 이야기] <8> 이루지 못한 불국토의 꿈
  장유화상사리탑. 이루지 못한 불국토를 꿈꾸는 듯, 고향 아유타국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김해에서 수릉원 일대를 돌아보다 보면, 경주만큼은 덜하지만 고도(古都)의 정취가 느껴진다. 수릉원 가운데에는 민속박물관이, 또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대성동고분박물관이 있다. 대성동의 고분군은 김해가 고도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곧장 가면 이내 국립김해박물관이 보인다. 박물관 동쪽에 구지봉이 있다. 마치 국립경주박물관이 월성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구지봉 바로 곁에 수로왕비릉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늘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온 수로왕의 능도 구지봉에서 남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구지봉과 수로왕비릉 사이에는 길이 나 있어서 쉽사리 오갈 수 있다.

어찌하여 수로왕비릉을 여기에 두었을까? 이는 단순한 예우를 넘어선 애정의 표현이자 숭앙의 표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허황옥이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땅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하였다고 되어 있는 데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 바다의 신을 달랬던 파사석탑

한 무리의 아이들이 수로왕비릉 아래의 '파사각(婆娑閣)'을 둘러싸고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곁에 다가가서 들여다보니 나지막한 오층탑이 있다. 탑이라고 보기에는 사실 별 볼품이 없다. 단순히 평평한 돌을 차례로 쌓아 올린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파사석탑'이다. 파사석탑에 대한 이야기는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에 나온다.

파사석탑은 48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 부모의 명을 받들어 가락국으로 향해 바닷길을 나섰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서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수신의 노여움이란 바닷길의 험난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당시 인도, 특히 벵골 사람들이 아무리 바닷길에 익숙했다고 하지만 바다로 나서서 항해하는 일은 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전쟁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를 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를 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부왕은 딸에게 석탑을 주며 싣고 가라고 했다. 그 덕분에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서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이를 수 있었다. 일연 스님은 이 일을 두고, "탑 싣고 붉은 돛 달고 붉은 기 펄럭이며, 신령께 빌어서 거친 파도 잠재우고 왔구나"라고 노래하였다.

과연 탑 하나를 실었다고 해서 바다의 파도가 잠잠해졌을까? 물론 아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탑은 하나의 상징이다. 본래 탑은 무덤이었다. 부처의 사리를 넣기 위해서 흙이나 돌을 쌓아올린 것이 바로 스투파(Stupa)였고, 이를 한역(漢譯)하여 탑이라 불렀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이 거룩한 구조물은 부처와 그 가르침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부처는 우주의 이법을 깨달은 존재이고, 그 이법을 어리석은 중생에게 일깨워준 성자다. 중생에게 부처는 신과 같은 신령한 존재로, 그에게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었다. 그 가르침 즉 불법(佛法)은 자연과 인간 세상의 횡포를 누그러뜨리거나 견뎌낼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 호계사의 연화대석

파사석탑이 지금은 수로왕비릉 아래에 서 있지만 본래는 호계사(虎溪寺)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호계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유사'에서도 그 이름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더욱더 재미난 것은 호계사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 '연화대석(蓮花臺石)'이 지금 수로왕릉이 있는 납릉정문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연화대'는 연화좌(蓮華座)라고도 하는데 부처가 앉는 자리를 뜻한다.

이 연화대석은 신라 황룡사 터에서 나왔다는 '가섭불연좌석'을 연상시킨다. '금관성파사석탑' 바로 앞에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섭불이 좌선을 할 때 앉았던 돌을 가리킨다. 가섭불은 과거칠불 가운데 하나이니 그 돌은 참으로 아득한 때로부터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말하자면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신라에 부처가 와서 머물었다고 하는 것으로, 신라가 불국토라고 하는 근거다. 이와 같은 발상에서 호계사의 연화대석도 이야기되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물론 신라와 달리 가락국은 불국토를 구현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가락국의 비극이었다. 가락국은 허황옥이 왕후가 되면서 해양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위세를 떨쳤다. 게다가 철이 생산되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역사를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로 나누는 것처럼 철은 문명의 발전에서 매우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마디로 당시에 철은 선진과 후진을 가르는 우듬지였다.

그러나 철을 앞세워 해상무역을 주도한 가락국은 결코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가야는 그 탄생에서부터 여러 소국들의 연맹이었고 멸망에 이를 때에도 연맹 체제를 지속하고 있었다. 가락국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가락국 또는 다른 가야국들은 연맹체가 아닌 통일된 가야를 이루고 싶지 않았을까? 그 열망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바다를 건너온 왕후에게는 그런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왕후 허황옥은 인도의 역사, 특히 아쇼카왕의 위업을 잘 알고 있었다. 아쇼카왕은 인도를 통일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불교를 널리 펴는 일이었다. 단순히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에서가 아니라 다시는 그런 전쟁과 분란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 '무력'이 아닌 '이법'의 다스림에 있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허황옥이 아유타국을 떠나오던 당시의 쿠샨 왕조도 불교를 통해 통합과 번영을 구가했으니 불교의 의의는 매우 컸다. 그러나 왕후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불국토의 꿈이 서린 불모산 장유사

수로왕비릉이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빠져 나와 서남쪽으로 내달리면 장유로 들어서고 그러면 이내 불모산(佛母山)을 마주하게 된다. 불모라니! 말 그대로는 '부처의 어머니'를, 상징적으로는 지고무상한 '반야지혜'와 광대무변한 '자비'를 의미한다. 이 말은 신라의 '불국토'와 다를 바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연화대석처럼 말이다.

이 불모산에는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절, 장유사(長遊寺)가 있다. 도로에서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그 동안 비가 적지 않게 내린 덕분에 어귀에서 시원한 폭포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소리를 뒤로한 채 꾸불꾸불 한참을 올라가면 세월에 빛이 바랜 종루가 눈에 들어온다. 종루 너머에 장유사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뒤편에 그 유명한 '장유화상사리탑'이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했다'고 한 뒤 '그로부터 5백 년 후에 또 장유사를 세웠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장유화상이나 그 사리탑에 대해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장유화상이 허황옥의 동생이라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문헌에 남아서 전하지 않았을까? 사리탑 또한 그 모양새로 보자면 결코 가락국 때의 것이 아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허황옥은 아유타국에서 올 때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 이는 불교도 다른 문물과 함께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가르침이었고 그 가치를 알기에는 시기가 너무 일렀다. '금관성파사석탑'에서도 일연 스님은 "수로왕과 왕후가 나라를 다스릴 때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어서 이 지방(금관) 사람들이 불교를 믿지 않았고, 그래서 <가락국기>에도 절을 세웠다는 글이 없다"고 하였다. 아직 시절인연이 익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먼 훗날, 가야가 멸망에 이른 뒤에야 민중들은 불교가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했던 종교이자 철학이었는지를 비로소 느끼고 깨달았던 것이다. 장유사의 장유(長遊)는 "길이 노닌다"는 뜻인데 그런 염원이 담겨 있는 셈이다.

오늘날에는 장유를 장유(長有)로 쓰는데 "오래도록 있다"는 뜻이니 역시 상통한다. 이 장유사를 품은 산을 불모산이라 부른 것은 불국토를 이루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허황옥의 꿈을 기리는 뜻을 담은 것이리라.

● 금이 아닌 쇠의 바다, 김해

불교는 보편적인 원리나 이치를 가르친다. 불교가 비록 고대에 등장했지만 중세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도의 고대는 각 부족들 또는 민족들이 서로 치열하게 다투던 때였다. 그런 다툼을 그치게 할 종교나 철학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불교가 탄생했던 것이다. 그런 불교는 지배층에게는 통합과 통일을 이루고 유지하는 토대로 여겨졌고 민중에게는 억압받고 핍박받는 삶을 기댈 안식처로 여겨졌다.

가야와 이웃해 있던 백제와 신라도 본래 여러 부족 집단들의 연합체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각기 통합과 융합을 꾀하였고 결국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제도의 정비와 함께 불교를 받아들여서 통합과 융합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가락국은 그러하지를 못했다. 그 결과 신라에 복속되었다. 이는 허황옥을 통해 불교를 가장 일찍 접했음에도 그 가치와 필요를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락국은 해상무역으로 짧은 기간 이익을 누렸을 따름이고 강력했던 해양국가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진정한 '금의 나라'가 되지 못하고 '쇠의 나라'에서 그쳤다. 가락국의 역사, 김해(金海)라는 이름은 철학, 나아가 문화야말로 굳은 쇠를 누를 수 있는 부드러움의 힘을 지녔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9> 철강과 철학의 조화, 황룡사장륙존상
광활한 빈 터에 남아 있는 삼국통일의 이유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9>  철강과 철학의 조화, 황룡사장륙존상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9> 철강과 철학의 조화, 황룡사장륙존상
  신라시대 동축사에는 인도 아쇼카왕 시대에 실어 보냈다는 세 불상이 800년의 세월을 거쳐 모셔졌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가야에서 싣고 온 것이었다. 울산 염포바다 인근에 있는 이 자그마한 동축사를 '동쪽의 천축'이라고 자부했던 신라인의 기상이 새삼스럽다.
며칠 동안 구름과 비 때문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던 햇살이 아침부터 눈부시다. 마침 토요일이기도 해서 일찍 아침을 챙겨 먹고는 길을 나섰다. 노포동에서 울산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덕계, 웅상을 거쳐 율리를 지났다. 어느새 울산 시내로 들어섰다. 조용한 게 공업도시 같지가 않다. 그러나 삼산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방어진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갈아타니, 풍경이 달라졌다.

버스는 울산항 앞으로 흐르는 명촌천을 따라 내달렸다. 차창 바깥으로 자동차 선적장이 보인다. 수백, 수천 대의 자동차가 선적을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다. 선적장 반대편에는 굴뚝들이 우뚝 서 있다. 울산이 공업도시임을 새삼 느낀다. 울산이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국의 산업 전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런데 1천500년 전에도 이곳이 신라를 강대국이 되게 한 전초기지였음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 동쪽의 천축, 동축사

자동차 선적장을 지나면 이내 성내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염포삼거리다. 이 삼거리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다. 거기에는 '염포(鹽浦) 삼포개항지'라고 쓰여 있다. 조선조에 부산포(釜山浦), 내이포(乃而浦)와 함께 일본과의 교역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바위 뒤로 길게 능선이 이어져 있는데, 마골산이라 한다.

이 마골산을 왼쪽으로 끼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니, 남목동이다. 거기서 내려 길을 건넜고, 남목초등학교를 지나서 감나무골공원까지 갔다. 마골산의 오른쪽 자락인데, 바로 거기에 '동축사(東竺寺)'를 가리키는 표식이 있다. 표식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니 계단이 나왔고, 계단을 다시 5분쯤 오르니 그 끝에서 백구(白狗) 한 마리가 맞아준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이 백구는 절간 삼년에 한 소식 했을까? 무심하게 오는 손님을 맞는 품이 그럴 듯하다. 백구가 지키고 있는 이곳이 바로 '동축사'다. 그 이름은 '동쪽의 천축에 있는 절'이라는 의미다. 왜 '동축'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삼국사기'에 <황룡사장륙(黃龍寺丈六)>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573년 또는 574년의 일이다. 바다 남쪽에서 큰 배 한 척이 떠와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에 닿았다. 사포는 지금의 '염포'다. 이 배에는 철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이 실려 있었다. 서축(西竺), 즉 서쪽의 천축인 인도에서 아쇼카왕이 불상 셋을 만들려다 실패하자 그 재료를 배에 싣고는 "인연 있는 국토에서 장륙존상이 이루어지기를 비노라"는 기원과 함께 띄운 것이었다. 그리고 800여 년 만에 사포에 닿았던 것이다.

배에는 한 부처와 두 보살의 상도 실려 있었는데 그것은 모형이었다. 하곡현의 관리가 왕에게 이 일을 아뢰자 왕은 그 고을 동쪽의 높고 메마른 땅을 골라 절을 세우고 세 불상을 모시게 하였다. 그 절이 바로 동축사다. 동축사는 신라가 서축 아쇼카왕의 기원이 이루어질 "인연 있는 땅"임을 명백하게 선언한 절이다.

● 철이 들어오던 염포

동축사에서도 동남쪽으로 멀리 바다가 보인다. 동축사에 처음 모셔진 세 불상은 그 바다로 들어왔으리라. 그래서 포구를 찾아 나섰다. <황룡사장륙>에서 '사포'라 했던 염포. 차를 타지 않고 걸어 가기로 했다. 다시 남목동으로 내려와서 아까 버스로 넘어온 고갯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동축사에서 한 시간 가량 지났을까? 염포삼거리를 지나서 성내삼거리에 이르렀다. 거기서 오른쪽으로는 자동차선착장이어서 어림잡고 왼쪽으로 길을 잡았다.

15분 정도 더 걸으니 '염포'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염포부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 바로 왼쪽에 조선소가 있는데 거대한 배가 떠 있다. 문득 "참으로 기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400여 년 전, 이 바다로 인도에서 띄운 배가 철과 황금을 싣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철로 '황금 같은' 배가 만들어지고 다른 나라로 수출되어 나가고 있으니.

그런데 이야기 속의 그 배는 정말로 아쇼카왕이 띄운 것이었을까? 어떻게 800년이나 바다에서 떠돌다가 이 포구로 들어섰을까? 어찌하여 진흥왕 때였고, 하필이면 황룡사가 창건된 뒤였을까? 민중의 이야기는 사실보다 진실을 들려준다. 그리고 역사가 놓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숨겨진 역사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시외버스터미널로 돌아와서 경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황룡사에 가기 위해서다. 버스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울산은 한국 자동차 산업의 메카다. 자동차는 철강 산업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그 철강 산업의 원재료는 이미 6세기에 염포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 장인들은 그 철로써 황룡사의 장륙존상을 빚어냈다. 지금은 그 장인들이 경주가 아닌 울산에 있는 셈이지만.

● 철강과 철학이 빚어낸 장륙존상

진흥왕 때 신라는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고, 북쪽으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까지 진출하였다. 그때 남긴 '북한산순수비'와 '마운령비' 등으로 입증된다.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과업은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법흥왕이 다져 놓은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법흥왕은 517년에 병부(兵部)를 설치하였고, 524년에는 남쪽 국경을 순행하면서 땅을 넓혔다. 이윽고 532년에 금관국(가락국)의 왕이 왕비 및 그 아들들과 함께 금관국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단순히 군사력을 갖추는 데만 힘쓴 것이 아니었다. 520년에 법령을 반포하였고, 528년에 처음으로 불법(佛法)을 시행하였다. 정치와 문화에서도 혁신이 있었다.

금관국의 항복은 신라에게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철의 생산지를 확보함과 동시에 철과 관련된 기술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해의 해상권도 장악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그렇다면 진흥왕 때, 염포를 통해 들어온 그 배는 실제로 인도 아쇼카왕이 보낸 배가 아니었다. 가야 지역에서 철을 싣고 온 신라의 배였다.

그렇다면 왜 인도, 게다가 아쇼카왕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불교 그리고 통일 때문이다. 법흥왕에 의해서 시행된 불법은 진흥왕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진흥왕 때인 544년에 흥륜사가 낙성되었고 또 출가하여 승려나 비구니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누구든지 승려가 되어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549년에는 유학승 각덕이 남조(南朝)의 양(梁)나라에서 돌아왔다. 양나라는 남조에서 가장 불교가 흥성한 나라였다. 565년 남조의 진(陳)나라에서 불경 1천700여 권을 보내 왔다. 남조와의 교류는 당연히 남해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566년에는 기원사(祈園寺)와 실제사(實際寺)가 낙성되고 황룡사도 완성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불교라는 보편적인 종교 또는 철학이 신라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574년 3월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주조되었다. <황룡사장륙>에서는 그 일이 "단번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단번에'라는 말은 철의 제련 기술과 불교 철학의 결합이 절묘하게 또 제대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인도에서 불교도들에게 이상적인 왕으로 칭송되었던 아쇼카왕조차 이루지 못한 것을 신라에서는 이루어냈다는 말이다. 물론 아쇼카왕은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라인이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장륙존상은 "철강과 철학의 조화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 열반에 든 장륙존상

황룡사는 월성 동쪽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태를 볼 수 없다. 웅장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터만 남아 있다. 한가운데에 신라 삼국통일의 상징이었던 구층탑을 떠받쳤을 초석들이 남아 있고, 거기서 북쪽으로 바로 앞에 금당 터가 있다. 넙적한 바위만 셋 있는데 바로 여기에 한 부처와 두 보살의 장륙존상이 앉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황룡사장륙> 뒤에 나오는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에는 신라 사람들이 만든 불상을 보고 당나라 대종(代宗)이 "신라 사람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지 사람의 기교가 아니다"라고 탄복하는 대목이 나온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하늘의 조화(天造)'라고 했겠는가. 장륙존상이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하늘의 조화' 탓이 아닐까? 그 조화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한 셈이니 말이다.

황룡사장륙존상은 석가모니처럼 열반에 들었어도 여전히 우리에게 가르침을 베풀어주고 있다. 다만 그 가르침이 경전이 아니라 민중의 이야기로 남아 전하기는 하지만. 장륙존상은 신라가 어떻게 강대국이 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무력만으로는 강대국이 될 수 없으며 철학을 바탕으로 한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장륙존상이 만들어진 뒤로 100년 만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 가야를 포함한 네 나라 가운데서 가장 후진이었던 신라가 말이다. 그리고 그 100년 사이에 신라의 불교 철학은 그 이후 오늘날까지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그러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해를 건너야만 하듯이, 그 경이로움은 아쇼카왕의 배가 오랜 세월 거친 바다를 헤치고 신라에 이르렀던 것과 같은 그런 과정을 겪고서야 나온 것이다.
 
<10> 유교 이념에 묻힌 여인, 김제상의 부인
국가에 목숨 바친 가장, 국가가 왜곡한 가족의 비애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0>   유교 이념에 묻힌 여인, 김제상의 부인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0> 유교 이념에 묻힌 여인, 김제상의 부인
  박제상은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적혀 있다. 그는 왕족이었으니까 김씨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민중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이곳 강원도 화진포는 김제상이 눌지왕의 아우로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보해를 데리고 빠져 나온 곳으로 추정된다. 사진제공=고성군
노포동에서 울산 가는 버스를 타고 울산대학교를 지나자마자 내렸다. 무거동이다. 거기서 좀 더 가니, 삼호지하차도가 나왔다. 곁에 태화강이 흐르고 있다. 무거동과 삼호동은 50년 전까지만 해도 범서면이었다. 범서면은 신라 경덕왕 때 하곡현으로 불리었다. 태화강을 끼고 오가는 봉계행 버스(802번)를 탔다. 시원하게 달리는 차창 밖으로 국수봉이 솟아 있다. 바로 그 아래에 은을암(隱乙巖)이라는 바위가 있다고 한다. 은을암은 '새가 숨은 바위'를 뜻하는데, 그 새는 박제상 부인이 망부석이 되자 그 영혼이 변한 것이라 한다. 국수봉 남쪽 끝자락이 범서읍이다.

아래하리에서 버스를 내렸다. 동북 방향으로 눈을 돌리니 멀리 봉우리가 보인다. 바로 치술령이다. 그쪽을 바라보며 30여 분 걸으니, 박제상기념관이 나왔다. 기념관 곁에는 치산서원이 있다. 서원의 동북쪽 너머로 치술령이 솟아 있다. 이 서원은 본래 사당이었고, 신모(神母)가 된 박제상 부인을 모셨던 곳이다. 조선조에 사당을 서원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왜 부인은 신모가 되었는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인질로 간 왕자들

'삼국유사'에 <내물왕김제상(奈勿王金堤上)>이 나온다. 널리 알려진 바와 다르게, '박제상'이 아니라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 박제상으로 알려진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랐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 쪽 기록이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왜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서 '김제상'이라 하였는가? 민중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 박혁거세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왕족 출신이다. 민중이 혼동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전승하던 민중에게는 박씨나 김씨나 모두 신라의 왕족이었으니, 성씨를 무엇으로 하든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성씨를 쓰게 되었고, 그것이 김씨였던 것이다. 13대 미추왕이 처음으로 김씨로서 왕위에 오르고, 17대 내물왕(356~402년 재위)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이으면서 박씨와 석씨는 잊혀져갔던 것이다.

내물왕 때부터 신라는 정치와 사회에서 변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시작은 미약했다. 그런 만큼 시련을 적지 않게 겪었는데, 내물왕의 두 아들이 각각 왜국과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된 데서도 드러난다. 390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와서 왕자 한 명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왜인들의 잦은 침입을 받으면서 국력이 소진되어 가고 있던 신라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내물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美海)를 보냈다. '삼국사기'에서는 실성니사금(實聖尼師今)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미사흔이 곧 미해다.

다시 눌지왕 때, 고구려의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 왕의 아우인 보해(寶海)가 지혜와 재주가 남다르다고 하니 사귀고 싶다는 말을 전하였다. 이는 화친을 하고 싶다는 말이지만, 속뜻은 인질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내물왕 때 고구려 광개토왕의 도움으로 가야의 군사들을 물리치면서 고구려의 속국처럼 되어버린 신라로서는 역시 거절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보해를 복호(卜好)라고 적고 있으며, 실성니사금이 인질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실성니사금이 두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고 했을 때는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던 일에 대한 복수로 여겨질 수도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그런 의미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내물왕이나 눌지왕이 보낸 것이라고 하면, 부자 또는 형제 사이의 슬픔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그 슬픔은 국력의 미약함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더욱 깊어진다. 민중은 사실적 차원이 아니라 정서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또 다른 진실을 담아냈다.

● 왕의 그리움과 신하의 충렬

국력이 미약해서 왕자들을 인질로 보냈으니, 그 안타까움과 그리움은 더욱 컸으리라. 425년, 눌지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아버님이 미해를 인질로 보낸 것은 백성의 일을 지극하게 생각한 까닭이고, 자신이 보해를 보낸 것은 이웃 나라가 강성하기 때문이다"라고. 백성의 일을 지극하게 생각했다는 것도 기실은 국력이 미약했다는 뜻이다.

눌지왕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아우들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신라는 인질을 돌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만한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계책을 세워서 일을 이룰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추천을 받은 이가 바로 김제상이었다. 지혜와 용기를 아울러 갖추었을 뿐 아니라, 바다에 대해서도 잘 알았던 인물이었으리라. 왕을 만난 김제상은 곧바로 변복을 하고 북해(北海)의 길을 통해 고구려에 갔다. 북해의 길은 곧 동해의 바닷길이거나 해안을 따라 이어진 길이었을 것이다.

보해가 있는 곳으로 몰래 가서 도망할 날짜를 정하고, 5월 15일에 고성(高城)의 포구에서 기다렸다. 그 포구가 지금의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략 화진포 근처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도망쳐 나온 보해를 김제상은 배에 태우고 곧장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보해를 본 눌지왕은 더욱 미해가 떠올랐다.

"임금에게 걱정이 있으면, 신하는 욕을 당한다"고 여긴 김제상이었다. 김제상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율포(栗浦)로 달려갔다. 김제상은 먼저 왜왕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틈을 노렸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날, 김제상은 미해를 배에 태워 떠나게 하였다. 이때 강구려(康仇麗)라는 신라 사람을 딸려 보냈다. 어린 나이에 인질이 되어 갔던 미해가 신라로 가는 바닷길을 알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왕의 회유에도 김제상은 신라의 신하로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았다. 참으로 대단한 충성이요 절개였다. 그래서 오늘날 그를 '충렬공(忠烈公)'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충렬'이라는 칭호에 가려진 여인의 사랑이 있고, 깊어진 여인의 한이 있다.

● 유교 이념에 가려진 여인의 한

미해가 돌아오자 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나라 안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김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책봉하고, 그 딸을 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 왕의 근심이 해소되었으니, 잔치를 베풀 만하다. 그리고 김제상의 공이 컸으니, 그 아내와 딸을 높이는 것도 마땅하다. 그러나 이 모두 왕의 생각이고 지배층의 논리일 뿐이다.

'삼국사기'의 <박제상열전>을 보면, 왕이 형제를 만난 기념으로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기면서 스스로 '우식곡(憂息曲)'을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우식'이란 "근심이 사라졌다"는 뜻인데, 왕이야 신하 덕분에 근심이 사라졌겠지만 그 신하의 아내와 딸의 슬픔은 어떻게 위로해 줄 것인가? 신하와 백성들 모두 왕의 소유요 왕을 위한 존재였던 왕정 시대였으니, 어떻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고구려에서 돌아온 김제상이 곧장 율포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은 말을 타고 뒤쫓아 갔지만, 배는 이미 떠났다.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다할 것인가. <내물왕김제상>의 말미에는 <박제상열전>에는 없는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처음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은 망덕사(望德寺) 남쪽 장사(長沙)에 드러누워 길게 부르짖었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 한다고 하였다.

그 후, 그리움에 사무친 부인은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동쪽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부인과 딸들의 눈에 비친 그 바다, 왕에게는 아우를 데려다 준 그 바다. 둘은 같은 바다이면서 달랐다. 왕에게는 안도의 바다였고, 여인에게는 탄식의 바다였다. 과연 왕이나 지배층은 짐작이나 했을까? 여인의 한이 바다만큼 깊었으리라는 것을.

● 한풀이로서 민중의 이야기

아마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그랬으니 그 한을 풀어주기는커녕, 자신들의 지배 논리에 따라 '정절부인(貞節夫人)'이라 일컬었다. 도대체 한 여인의 그리움과 한을 어떻게 '정절'이라는 건조한 말로 재단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유교적 관념의 소산이다. 유교가 중세에 동아시아 문명의 발전에서 기여를 한 바도 있지만, 문제는 여성을 소외시킨 지배층의 이념이요 남성의 논리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여인의 한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렇다면 그 한은 풀지 못했을까? 아니다. 동병상련이었을까? 역시 소외되었던 민중이 풀어주었다. 이야기라는 굿으로 말이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부인은 치술신모가 되고 사당에 모셔졌다. 그 사당이 지금의 치산서원이다. 이는 여인의 한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면서 그 한을 풀어준 일종의 '오구굿'이다. 지금은 치술령 꼭대기에 '신모사지(神母祀址)'라 적은 빗돌이 서 있고, 바로 그 아래에 망부석이 있다. 이 또한 하나의 이야기요 굿이다.

그런데 사당을 서원으로 바꾸었다. 서원은 유교 이념을 구현하는 곳이다. 이야말로 횡포요 폭력이다. 유교 이념의 희생자인 부인을 다시 그 이념으로 짓밟은 셈이다. 이는 여인의 절절했던 마음을 끝내 외면한 것이고, 민중의 소박한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짓이다. 근대에 사는 우리도 이를 묵과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제 다시 이 버젓한 서원 대신에 작고 소박한 사당을 두어 해마다 굿판을 벌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유교는 상층과 남성 중심의 논리와 윤리를 제공했으므로 하층과 여성을 껴안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유교를 대신하여 더 크고 넓게 아우를 수 있는 철학이나 종교가 필요했다.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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