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화창한 주말 오후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서울 본정통(지금의 충무로). 상점 앞이나 식당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최근 회현동에 세워진 3층짜리 공동주택에 관한 것이었다. 일반 사무실이나 백화점은 그 이전에도 고층건물이 있었지만 주택을 3층으로 올린 것은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 건물에 한 세대가 아닌 여러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공동주택' 개념은 당시 매우 생소했다.
아파트, 첫 모습을 드러내다.
이 건물을 건립한 기업은 경성 미쿠니(三國)상사. 이 회사는 한국 주재 일본인 직원들을 위해 회현동에 관사를 짓고 그 이름을 '미쿠니아파트'라고 붙였다. 구조가 지금의 아파트와 많이 달랐지만 바로 이 관사가 한국 최초의 아파트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건물이다. 우리나라 주택의 역사에서 '아파트'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미쿠니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내기 몇년 전이었다. 지난해출간된 <한국 주거의 사회사>(돌베개, 2008)와 <대한주택공사 30년사>(대한주택공사, 1992) 등에 따르면 1920년대 일본 공영주택건설기관인 동윤회가 '아파트'를 설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 아파트로 모습을 드러낸 첫 건물은 미쿠니아파트였다.
충정아파트의 최근 모습
좁은 중정을 사이에 둔 아파트 내부
중정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1935년, 경성 미쿠니상사는 더욱 진보된 건축 기술로 내자동에 또 하나의 관사(아파트)를 짓는다. 이 건축물에 대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전해진다. 회현동 관사는 벽돌로 지었으나 이 아파트는 콘크리트 자재를 썼고 4층 높이에 외관도 현대식으로 설계됐다. 평면 구조는 4개의 다다미 방과 부엌, 화장실을 갖추었고 개별 난방을 제공했다. 제법 현대식 아파트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아파트 건물 안에 공동화장실과 식당, 오락실 등 각종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관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회현동 미쿠니아파트가 나온 이듬해관사가 아닌 임대를 위한 아파트도 등장했다. 4층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충정아파트(유림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주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임대됐다. 평면과 구조는 미쿠니아파트와 큰 차이점이 없었다. '도요타'라는 일본인 건축가가 설계했다고 해서 '도요타아파트'로도 알려진 건물이다.
충정아파트의 평면도(중정 공간 실측)
충정아파트의 종단면도
충정아파트의 횡단면도
하지만 우리나라 아파트의 역사는 미쿠니아파트와 유림아파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시대 초기인 1910년대 일본기업과 공공기관이 한국에 온 일본인 노동자를 위해 건립한 '요(寮)'라는 건축물에서 우리는 아파트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요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파트라고 할 수 없지만 '공동주택' 형태를 띠었다는 점에서 아파트와 같은 계통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파트와 요의 관계는 인류와 유인원(類人猿)의 관계와 비슷했다.
한국건축가협회가 1994년 발간한 <한국의 현대건축 1876~1990>에서는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평면 형식은 장방형(사각형)을 채택했고 (중략) 약 9.9㎡(3평) 침실은 3450*3600 또는 3600*2850 규모였으며 같은 건물내에 식당, 공동욕실, 공동화장실, 공동세면장 등이 마련돼 있었다." 아파트라기 보다는 2, 3층으로 된 군대 막사와 더 유사했던 것같다. 아파트가 주요 자재로 콘크리트를 사용한 데 비해 요는 벽돌을 사용했다는 점도 큰 차이점이다. 경성전력주식회사가 신당동에 세운 '장진요'를 비롯해 일본인 노동자가 많이 살았던 회현동, 회현동, 용산 등에 이런 요들이 많이 세워졌다. 그렇다면 당시 아파트 입주민들은 누구였을까? 신문기사나 간행물에 따르면 일제시대 아파트는 중산층을 위한 주택이었다. 노동자들이 거주했던요와는 달리 관사로 쓰인 미쿠니아파트는 주로 간부급 직원들이 살았다.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 공간에 특히 열광한 사람들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젊은 세대였다. 그들은 기존 주택에 비해 개인생활을 더 철저하게 보장해 주고 최신 설비를 갖춘 아파트야말로 미래 주거문화가 나아갈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 아파트에 대해 글을 쓴 작가나 기자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문화를 여는 첨병' 또는 '쾌적하고 즐거운 도시 생활로 이끌어 주는 주거공간'으로 찬미하고 있다. 1930년대까지 아파트는 일본인의 전유물이었다. 아파트를 건립한 사람도 일본인이었고 그곳에 사는 주민도 일본인이었다. 한국인 상류층이나 중산층은 주로한옥에 살았고 하층민들은 가마니로 만든 '토막'에 거주했다.
1942년이 돼야 한국인 손으로 건설한 아파트가 나타난다. 대한주택공사의 전신(前身)인 조선주택영단이 설립한혜화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일본식 다다미와 좌식생활을 고려해 설계됐다. 한국인 손으로 건립됐다고 하지만 1930년대 나온 아파트와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다. 결국 '한국식 아파트'는 그후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에서 그 싹을 틔운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 남아있던 1957년 여름.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학교 담장 옆 언덕에는 공사 차량과 인부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당시 이런 대규모 공사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높이 올라가는 건물과 거대한 단지가 형성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찬탄을 쏟아냈다. 전후 폐허에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이듬해 준공된 이 단지는 해방 이후 최초의 아파트로 기록된 '종암아파트'다. 산을 깎아 짓고, 들판에도 짓고, 있던 판잣집을 들어내고도 짓는 대한민국 도처의 아파트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아파트라는 이름이 붙은 집을 추적해 보면 종암아파트가 그 시조 격이다. 50여년 전인 지난 1958년 서울 성북구 종암동 언덕에 우뚝 섰던 이 공동주택은 최초라는 수식어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 최초의 아파트(논란은 있지만), 처음으로 '아파트먼트'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 우리나라 회사가 독자적인 기술로 처음 시공한 아파트, 그리고 최초로 수세식변기를 설치한 아파트다.
수세식 화장실이 집 안으로
지금 생각하면 약간 우습지만 건물을 다 짓고 기념하는 낙성식에서 이승만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축사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편리한 수세식 화장실이 종암아파트에 있습니다. 정말 현대적인 아파트입니다." 당시엔 한 건물에 여럿이 모여 사는 주택에서 집 밖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아침이면 샛노란 얼굴로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 줄 앞에서 조바심을 치던 아이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뭐 이렇게 오래 걸리냐'며 원초적인 싸움도 났다.
종암아파트 평면도
종암아파트 배치도
종암아파트 배치도
하지만 종암아파트에서는 수세식 변기를 집 안으로 들여왔다. 종암아파트의 설계 도면을 보면,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수세'하는 좌변기가 놓이고 욕조는 없었다. 이로써 한국인들은 집 안에 있는 쾌적한 공간에서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문명의 진보'를 볼 수 있었다. 중앙산업은 7260여㎡ 대지 위에 3개 동을 지었고 152가구가 입주했다. 독일에서 설계했다는 평면만 보면 '지금 아파트랑 별 차이 없잖아'라는 느낌이지만 당시는 정치인이며 예술인, 교수와 같은 상류층이 입주한 것으로 유명한 '고급'주택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 벗는 공간이 있고, 바로 옆은 화장실이다. 방2개, 거실, 주방, 창고가 있고, 발코니까지 갖추고 있었다. 주방에는 인조석 싱크대 시설이 설치됐다. 요즘에는 주방과 거실을 연결하는 설계가 주류를 이루지만 종암아파트는 현관에서 들어서면 작은 복도가 있어 주방과 거실이 분리됐다. 거실은 거실대로, 주방은 주방대로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됐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집안에서도 바닥 높낮이가 달랐다는 점이다. 뜨끈한 온돌바닥을 깔았던 침실은 현관과 주방, 거실보다 한 단이 높았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효형출판, 2009)에 따르면 '단이 높은 안방에서 발코니를 통해 내려다 보는 공간감은 옛날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내려다보던' 시각과 닮았다고 풀이한다. 전통의 좌식구조와 서양식 입식구조가 사이좋게 공존한 셈이다.
종암아파트 공사현장
종암아파트 전경
종암아파트 생활 모습
1991년 3월 2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서 한 낡은 아파트가 저층부터 철거되기 시작했다. 아파트 앞 썰렁한 공터 한쪽에 사람들이 한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크러셔’ 라는 대형 철거 장비가 열심히 시멘트 벽을 허물었다. 당시 크러셔를 작동했던 사람은 무심하게 벽을 부수었지만 이 때 철거되고 있었던 아파트는 우리 주택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건물이었다. 바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직후 ‘생활혁명’을 기치로 건립된 마포아파트다. 준공식에서 박 전 대통령은 마포아파트가 “혁명한국의 상징이 되길 바란다”며 큰 기대감을 보였다.
최초로 엘리베이터와 중앙난방시스템 적용을 시도
그렇다면 생활혁명을 내세웠던 마포아파트는 앞서 건설된 종암아파트나 개명아파트와 어떻게 달랐을까? 사업을 담당한 대한주택공사의 원래 설계안은 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주공 30년사에 따르면 마포아파트를 처음 설계했을 때는 10층 11개동 1158호 규모로 각 동마다 엘레베이터를 설치하기로 했다. 수세식화장실은 기본이고 입주자들의 편의를 위한 중앙난방시스템을 적용할 계획이었다. 비록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곤 하지만 3,4층 규모의 개별난방에 만족해야 했던 종암아파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통 가옥의 흔적이었던 온돌 마루가 완전히 사라지고 서구식 입식 구조를 제대로 구현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평면 설계만 보면 요즘 건설되는 아파트와 큰 차이가 없을 만큼 현대적인 특징을 지녔다.
1 마포아파트 철거 모습 2 Y자 형태의 마포아파트 모습 3 마포아파트의 야경(1970)
하지만 더 큰 차이점은 처음으로 ‘단지’ 개념을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주거만을 고려했던 단계를 넘어 대규모 주택용지에 여러 개의 건물을 짓는 ‘아파트 단지’ 로 설계했다는 것이 마포아파트의 ‘혁명성’이다. 단지 안에는 공원과 녹지, 운동장 등 아파트 커뮤니티의 출발점이 되는 공간도 확보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쇼핑과 레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마포아파트는 이런 발전 가능성을 보여 준 최초의 시도였다. 이런 ‘생활혁명’ 을 위해 주공은 박정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당시 기와공장이었던 마포형무소 농장터를 주택용지로 변경해 단지형 마포아파트를 건립한다.
하지만 마포아파트의 최초 계획은 자금 부족과 사회 분위기 등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100% 달성되지 못했다. 전기와 물이 부족한 마당에 한 건축물에 너무 많은 자원을 몰아준다는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이를 이기지 못해 결국 규모와 설비를 대폭 축소하는 방향으로 변경됐다. 층수가 10층에서 6층으로 바뀌었고 각 동에 설치할 엘리베이터도 없던 일이 됐다. 기름을 연료로 사용하는 중앙난방은 연탄보일러로 개별 난방하는 방식으로 대체됐다.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포아파트는 1962년 1차로 6층 높이의 Y자형 주거동 A, B형을 각각 3동씩, 6개동 총 450가구를 선보였다. 이어 1964년 11월 30일에는 2차로 6층짜리 일자형(판상형) 4개동 192가구가 준공됐다. 총 10개동 642가구의 아파트 단지로 탄생한 것이다. 연면적 6316평, 총 사업비는 3억5600만원. 이 중 정부 지원금과 주공 자금이 2억7800만원을 차지하고 입주자 부담금은 7800만원에 불과했다. 공적 자금으로 건립된 셈이다.
연탄보일러 위험 소문에 현장소장이 직접 1박 체험
마포아파트의 의미에 대해 주공 40년사는 “기본개념은 근대 서구의 집합주택 계획에서 목표로 삼았던 녹지 위의 고층주거(Tower in the park) 개념을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후일 우리나라 주거지의 단지식 개발을 견인한 선도적인 사례로서 평가되고 있으며 중산층을 위한 주택공급 정책의 산물로서 기록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마포아파트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고층 주택이었고 연탄가스 위험이 있다는 괴소문으로 초기 입주율이 10% 미만이었다. 빈집이 많아 겨울에 수도 파이프가 동파하기도 했다. 주공은 연탄가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동물 실험도 부족해 현장소장이 직접 연탄가스가 샌다고 알려진 방에서 잠을 자는 ‘인간 생체실험’ 을 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포아파트는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부상하고 나중에는 유명세를 타면서 웃돈이 붙어 거래된다. 당시 영화를 보면 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아파트가 배경이 됐는데 바로 마포아파트가 주요 촬영장 중 하나였다. 이렇듯 대중문화에 아파트가 고급 주거 공간으로 소개되면서 아파트에 사는 것은 일반 국민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아파트에 사는 꿈을 꾸었고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 강남에 있는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들이 여전히 인기를 끌면서 비싼 값에 거래되는 것도 마포아파트에서 출발했다고 보면 된다. 마포구 도화동 마포아파트 자리에는 현재 삼성이 재건축한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마포아파트를 허물고 1994년 준공된 이 재건축 아파트도 벌써 15년의 나이를 먹은 중년 건축물이 됐다. 새삼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30분. 서울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뉴스가 방송에서 흘러 나왔다. 서울시가 마포구 창전동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지상 5층, 15개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한 동이 푹석 주저 앉았다는 소식이다. 이는 준공된 지 석달 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건물은 무너지면서 가파른 경사 밑에 지었던 판잣집을 덮쳤다. 아파트에서 잠을 자던 주민 가운데 33명이 사망했고 38명이 다쳤다. 아파트 아래 판잣집에서 잠을 자던 1명도 세상을 떴다. 판잣집 주민 2명은 부상을 입었다.
시민아파트 건립의 꿈
와우아파트는 서울시가 마포아파트의 성공을 보고 서민들에게도 쾌적한 환경에서 거주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건설했다. 또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를 감당하려면 좁은 땅에 더 많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싼 값의 서민아파트가 절실했다. 문제는 의욕이 너무 앞섰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서민아파트를 건립하려는 서울시장의 의욕이 비극을 낳았다. 당시 서울시는 돈이 부족했고 사람들이 살 집은 턱없이 모자랐다. 단기간 안에 주택 보급률을 높이기 위해 서울시는 1967년 4월 서울을 뒤덮고 있던 무허가 건물 13만 동을 양성화하겠다며 보조비를 지급했지만 개량 실적이 미미했다. 그래서 내놓은 카드가 시민아파트 건립이다. 서울시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공급해 9만 가구가 입주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신속하게 입주까지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시는 아파트 골조만 짓고 나머지 내부 공사는 입주자가 담당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입주금 없이 가구당 20만원씩 15년간 대출해 주는 방법으로 돈이 없는 서민들도 쉽게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서울시의 청사진에 대해 정부 뿐 아니라 시민들도 환영했다. 여기에 힘을 받아 서울시는 건설 가구 수를 더 늘려 잡았다. 하지만 전체 예산을 늘릴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건물당 투입되는 건축비는 점점 줄었다. 1개 동에 12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야 했지만 실제 660만원에 짓기도 했다. 당시 건설업계에 만연했던 부패도 문제였다. 이는 결국 총체적 부실 공사로 이어졌다.
'아파-트'라는 표기법이 눈에 띈다
와우아파트 공사현장(1969)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및 낙성대 상량식(1974)
이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을 건물은 없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 착공해 6개월 만인 12월 준공했다. 요즘 나온 첨단 건축 기술을 적용해도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려면 착공 후 2년이 넘게 걸리니, 초스피드로 건설한 셈이다. 와우아파트는 70도 경사의 산비탈을 견디는 기둥을 만드는데 필요한 철근을 70개에서 5개로 줄였다. 건물을 견고하게 하는 시멘트도 거의 섞지 않았다. 1㎡당 280kg밖에 견디지 못하는 건물 기초에 900kg의 하중이 실렸다. 이런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을 건물은 없었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아파트 건설을 총 지휘했던 당시 서울 시장 김현옥씨가 물러났다. 구청장과 건축 설계자, 현장 감독, 건설회사 사장까지 책임을 지고 좌천되거나 구속됐다. 그 후 와우아파트는 부실 공사의 대명사가 됐다. 가수 조영남씨는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로 신고산타령을 바꿔 부르다가 ‘와우아파트 사건’을 부끄럽게 여겼던 박정희 정부의 기관원에게 끌려갔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은 서민들에게 싼 값에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해 건축비를 줄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공무원과 업체 간 부정과 비리로 기본 안전마저 무시한 결과였다.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건설 비리가 낳은 비극이었다. 이 사건 이후 서민 아파트 건립은 주춤했고 비싸지만 안전한 중산층 아파트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와우산 체육공원에서 내려다 본 전경
와우산자락 아파트 자리
와우아파트의 비탈길은 여전하다(1974)
와우아파트가 남겨준 것
와우아파트 이름은 실제 지명에서 따왔다.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에 지었던 아파트 자리에는 현재 와우산 체육공원 바위가 웅장하다. 초여름 저녁 오른 와우산 체육공원에는 홍익대 학생들이 농구공을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람들은 누워있는 소를 닮았다는 ‘홍대뒷산’을 오르며 간혹 와우아파트를 기억한다. 체육공원에서 만난 동네 주민은 와우아파트 있던 자리를 묻자 “공원과 비탈진 골목길 중간쯤에 아파트가 죽 들어서있었다. 이 산 밑에는 물탱크가 묻혀 있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 주민이 아파트가 있었다며 가리킨 곳을 따라가봤다. 산 자락 아래로 내려와보니 실제로 아파트가 설 수 있었겠다 싶게 터를 닦은 흔적이 있다. 산 비탈을 깎아 평평하게 만든 부분이다. 전체적인 지형은 언덕꼭대기에 산을 얹은 형태다. 경사가 급한 골목 초입에 세워둔 차들은 다들 45도 이상 기우뚱하다. 와우아파트 이후 ‘부실한 아파트’, ‘무너지는 집’이라는 악명을 지우기 위해 대한주택공사를 비롯한 건설업계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요즘은 지진과 충격에 강한 아파트도 등장한다. 건축 기술도 크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이 사는 집을 안전하게 지어야 한다는 양심이 기본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서민아파트의 꿈은 무너졌지만 아파트는 튼튼하게 건립해야 한다는 인식만은 확실하게 심어 놓았다.
1968년 장동운 대한주택공사 4대 총재는 일본 출장 중 호텔에서 신문을 보다가 무릎을 쳤다. 일본 신문 광고의 80%가 주택분양 광고였고 이중에는 '하이츠'와 '맨션'이라는 이름의 고급 아파트도 많았다. 당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도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에서는 고급 아파트를 분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 총재는 이 광고들을 보면서 주공도 서민아파트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생활수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주택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1970년대 초 이런 일을 수행할 민간 건설사는 거의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주공이 이 과업을 담당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서민 주택의 고급화 프로젝트
우리나라 최초의 중산층 아파트인 한강맨션아파트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 주공은 장 총재의 구상에 따라 29억7200만원을 투입해 공급면적 89㎡(27평), 105㎡(32평), 122㎡(37평), 168㎡(51평), 188㎡(57평) 등 5개 주택형 24개동(관리동 포함), 총 660가구의 단지를 조성했다. 부지는 동부이촌동 공무원아파트 옆에 수자원개발공사가 매립한 한강 북변(北邊)을 골랐다. 평면설계는 우리나라 최초로 완전 입식 구조를 채택해 마포아파트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했다. 특히 침실과 부엌을 완벽하게 분리했고 중산층 아파트라는 점을 감안해 고급 자재를 사용했다. 건축 기술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많아 주공 기술진이 현장 직원들을 지도하면서 공사를 해야만 했다. 주공은 성공적인 분양을 위해 200만원을 들여 모델하우스(견본주택)를 짓고 800만원의 광고비를 사용했다. 아파트 본 공사를 하기도 전에 견본주택을 건립한 것은 우리나라 아파트 역사에서 한강맨션아파트가 처음이다. 이런 '사적 의미' 때문이었는지 견본주택 기공식에는 국무총리까지 참석해 흥행을 도왔다. 그렇지만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서민 주택을 건립해야 할 주공이 중산층 아파트를 짓는 것은 본래 의무를 저버린 행위라는 목소리가 거셌다. 이에 대해 장 총재는 '주택개량과 주거기능 향상의 선구적 역할도 주공의 임무 중 하나'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견본주택과 분양 광고에도 불구하고 초기 입주가 저조했던 점이다. 면적이 큰 주택형은 분양을 끝냈지만 다른 평형은 신청자가 많지 않았다. 한강맨션아파트 준공에 앞서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인해 아파트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것도 초기 분양 실패의 원인이 됐다. 이런 비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주공은 분양 촉진비를 직원들에게 지급하면서 '아파트 판매'에 동원했다. 결국 이런 노력과 시간이 흐르면서 미분양은 해소됐다. 그리고 잇따라 건설된 반포와 잠실, 여의도, 압구정 현대 등 중산층 아파트의 선구적 모델을 제시했다.
1 길을 따라 늘어선 노선상가의 모습 2 한강맨션아파트의 1970년 모습 3 한강맨션아파트 전경
한강맨션아파트는 총무처가 주관해 1966년부터 3년간 건설한 공무원아파트와 1970년 건립된 한강외인아파트, 1971년 준공된 한강민영아파트와 더불어 한강변을 따라 총 3220가구로 규모로 조성된 한강아파트 단지에 속한다. 요즘에도 3000가구가 넘는 단지는 별로 많지 않은데 40년 전, 이런 대단지가 조성됐다는 것은 주택 건설 역사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특히 학교와 공공기관, 상가 등 각종 편의시설과 주거공간을 한 곳에 모아 놓아야 한다는 '근린주구론'에 입각한 아파트 단지 개발의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강아파트 단지는 한강변을 따라 주거동과 상가, 학교 등 길게 늘어선 모양으로 설계됐다. 상가들은 1층에 아케이드 방식으로 배치됐고 가로 축을 따라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계획했다. 주공 40년사는 한강아파트 단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동서방향을 관통하는 간선가로에 따라 1,2층에 점포가 복합된 5층 주거동을 노선상가 형태로 배치해 가로공간이 전체 단지의 생활축이 되도록 짜여져 있다."
한강맨션아파트의 오늘
한강맨션아파트를 비롯한 한강아파트 단지는 아파트가 중산층을 위한 주택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이 단지가 들어선 동부이촌동 일대 한강매립지는 우리나라 중산층이 모여 사는 '부촌(富村)'으로 변신한다. 영화배우와 정치인과 기업인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한강아파트에 살았다. 지금도 이 곳에 있는 아파트는 10억~20억원대를 호가하는 비싼 아파트에 속하며 입주민 중에는 대기업 그룹 회장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최근에는 용산 역세권 국제업무단지 개발과 맞물려 가격이 더 올랐다. 한강외인아파트가 'GS한강자이'로 이름이 바뀌는 등 1970년대 초 건립됐던 아파트는 대부분 재건축됐지만 한강맨션아파트는 지금도 그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강맨션아파트도 현재 재건축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있어 언젠가는 '최초의 중산층 아파트', '최초의 견본주택을 선보인 아파트'라는 추억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경제개발계획이 한창 진행되던 1960년대 후반. 선진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많은 외국인들을 초청했다. 이들 외국 기술자들은 경제발전에 꼭 필요한 존재였고, 그래서 최고 대우를 해줘야 했다. 이들을 위한 음식과 옷은 수입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살 집이었다. 짧게 머무는 외국인 사업가들은 시내 조선호텔과 도뀨호텔, 코리아나호텔에서 묵었지만 장기 체류하는 대사관직원과 상사주재원이 살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을 건설해야 했다.
힐탑아파트의 인상적인 기록들
이런 필요성에서 탄생한 아파트가 바로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힐탑아파트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인 힐탑아파트에는 새로운 것이 많았다. 엘리베이터가 처음 등장했고 밖으로 뛰어가지 않고 집에서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자동식 전화가 놓였다. 당시 귀했던 스프캔과 감자칩, 스파게티면도 힐탑아파트 내 외국인 전용매점에서 살 수 있었다. 힐탑아파트는 기획부터 준공 후 관리까지 철저하게 외국인을 위한 주택이었다. 지상11층짜리 힐탑아파트를 지으면서 우리나라에 고층아파트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주택공사는 일본 다이세이(大成)건설에서 빌린 100만 달러어치 철근과 목재를 이용해 주택공사 소유 한남동 땅에 아파트를 건립하기로 했다. 1967년 3월 공사를 시작한 후 1년 7개월만에 지하1층, 지상11층 120가구 규모의 고층 건축물이 완성됐다. 힐탑아파트는 일단 높이에서 압도했다. 이전까지 등장했던 아파트는 고작해야 5층을 넘지 않았다. 일본에서 만든 오티스(Otis)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옥상정원과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나타났다. 이 뿐 아니다. 차량소음이 시끄럽고 빛이 안 들어 입주자들이 1층을 꺼린다며 필로티 구조(건물 전체나 일부를 기둥으로 들어올려 건물을 지상에서 분리시키는 것)를 과감하게 도입하기도 했다. 건물 외벽은 단열효과를 고려해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브이자로 꺾인 건물은 단순히 멋내기용이 아니었다. 남향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더 오래 받고 북쪽 판잣집을 가리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냈다. 힐탑아파트는 내부도 넓었다. 당시는 19~23㎡(6~7평) 크기에 방1개와 부엌, 복도에 화장실이 딸린 아파트가 대부분이었지만 힐탑아파트는 62~108㎡(19~33평)으로 구성됐다. 방이 1개 있는 유형부터 방 3개짜리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1 힐탑아파트 전경(1968).이름 그대로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2 모서리의 노출된 계단은 아파트의 수직성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3 옥상정원에 설치된 미끄럼틀이 인상적이다. 4 힐탑아파트는 가구를 개체가 아닌 벽의 일부로 계획해 건설했다.
이 중 84㎡(25평)형의 내부 구조를 살펴보자. 대리석을 깐 현관으로 들어서면 양 옆으로 침실 2개와 넓은 거실 겸 부엌이 나온다. 안쪽으로는 욕실과 또 다른 침실이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단 높이를 맞췄고 온돌 대신 중앙 스팀난방을 채택했다. 요즘 설계된 아파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거실 전면이 아닌 옆쪽으로 작은 발코니가 있다는 정도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힐탑아파트의 독특한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다.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선반 등 가구 일부를 벽으로 집어 넣었다. 콘크리트로 만든 일종의 붙박이 가구인 셈이다. 또 밖으로 뚫린 발코니는 세대를 분리하면서도 이웃과 이웃을 잇는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아파트발굴사>(효형출판, 2009)에 따르면 힐탑아파트를 설계한 건축가 안병의씨는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남측으로 난 발코니는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작은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 곳이다(중략) 햇볕을 쬐고 식사를 한다. 옆집과 사이에 나있는 벽의 오프닝(공간)을 통해 이웃과 다양한 얘깃거리가 이루어진다. 화분을 놓거나 음식을 건네주고 받을 수 있고 직접 얼굴을 보며 얘기를 나눌 수도 있다.” 입주민을 위한 서비스는 호텔급이었다. 1층에는 세탁실과 외국인 전용매점이 있었고 경비도 철저했다. 외국인 학교로의 통학버스가 다녔고 미군버스도 지나갔다.
제 2의 힐탑, 남산 외인아파트
힐탑아파트만으로는 몰려드는 외국인과 미 8군 수요를 맞추기에 부족했던 정부는 본격적으로 외인아파트 공급에 나선다. 남산기슭에서 1970년 착공해 1972년 완공한 남산외인아파트는 힐탑아파트의 동생 뻘이다. 92.5~115.7㎡(28~35평) 16,17층 규모 2개동 아파트는 온수난방방식을 적용해 세대별로 온도조절이 가능했다. 비상시 대피하기 위해 옥상 헬리포트 시설을 설치한 첫 아파트이기도 하다.
1,2 16,17층 규모 2개동으로 이루어진 남산 외인아파트 전경.
3 남산 외인아파트의 입식 주방.
4 남산 외인아파트의 실내 모습.
모두 외국인을 위해 지었던 고급 주택이었지만 나중에 두 아파트의 운명은 달랐다. 남산기슭에 있어 어디서나 눈에 띄었던 남산외인아파트는 남산을 가로막는다는 바로 그 이유로 1994년 철거됐다. 1994년 11월20일, 2개동이 먼지 속에 무너지던 발파 장면이 전국에 TV로 생중계됐다. 건설할 때 선진 건축 기술을 선보였던 것처럼 철거 때도 첨단 철거 공법을 적용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남산외인아파트 자리에는 남산 야외식물원이 조성됐다. 힐탑아파트는 ‘리모델링’이라는 변형을 거쳤지만 아직 살아남았다. 2003년 리모델링 후 ‘힐탑트레저’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이제는 한국인도 살 수 있지만 여전히 외국인 임대 수요가 많은 편이다.
1966년 6월 20일. 김현옥 전 서울시장은 중구청의 6급 공무원인 이을삼씨가 낸 아이디어를 가지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다. 종묘 건너편에서 시작해 청계천로, 을지로, 퇴계로를 가로질러 형성된 종로~필동간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이곳에 민간자본을 유치해 첨단 건물을 짓는다는 내용이었다. 빈민들이 우후죽순으로 몰려 살았던 이곳은 일제시대 때는 소이탄(불을 질러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주는 폭탄) 투하에 대비해 공터로 남겨 놓았던 소개(疏開)지였다. 이 계획에 대해 박 대통령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에 고무된 김 시장은 곧 바로 이곳에 살고 있던 수천명의 빈민들을 서울 외곽으로 몰아내고 건축 설계에 들어간다. 여기에 참여했던 건축가는 당시 정치권과 두터운 인맥을 바탕으로 굵직한 사업을 전담했던 김수근씨와 그가 부사장으로 있었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다.
시대를 뛰어넘는 개념과 기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도시계획 부장이었던 윤승중씨는 <건축> 1994년 7월호의 ‘세운상가 이야기’를 통해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966년 어느 날, 시장과부시장에게 신용을 갖고 있었던 김수근 선생에게 시장이 문제의 땅(세운상가 터)의 이용방법을 물어 왔을 때 즉석에서 보행자몰, 보행자 데크, 입체도시 등의 개념을 설명하고 공감을 얻었다. (중략) 이 구상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 필자에게 명해졌고 최초의 스케치를 만들어야 하는 시간은 단 며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 청계천에서 바라본 세운상가 2 종로의 한 고층 건물에서 촬영한 세운상가 모습 3 종로에서 퇴계로로길게 늘어선 세운상가 건물들
이런 과정을 거쳐 처음 설계된 세운상가는 시대를 뛰어넘는 개념과 기술이 적용됐다. 건물과 건물을 2층이나 3층에서 연결하는 공중 보행 데크를 비롯, 5층에 인공대지를 설정해 공중정원을 만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높이 올라가면서 층을 계단식으로 후퇴하게 해 바람과 햇빛을 잘 들게 하는 구조를 적용하고 지상 1층을 자동차 전용 공간으로 할애한다는 개념도 당시에는 ‘혁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는 이를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구상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대부분 실현되지 못한다. 건설 과정에서는 최초 설계를 주도했던 서울시가 뒤로 빠지고 민간업체들이 사업을 전담했기 때문이다. 민간 사업자들은 도시 경관이나 첨단 건축 기술 보다는 분양과 임대 수익을 올리는 것이 목표였고 그러다 보니 최초 이상적인 설계는 무시됐다. 이에 대해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는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1>(한울, 2007)의 ‘아 세운상가여 -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도시파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세운상가는 현대와 대림,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6개 기업과 아세아상가번영회, 청계상가(주)를 합쳐 8개 업차가 분할, 시공하기로 결정됐다.(중략) 1968년 들면서 대림, 청계, 삼풍, 풍전, 신성, 진양 등 상가아파트와 호텔이 하나씩 준공됐다.(중략) 이 건물군은 (도도한 기업 논리에 의해) 당초의 구상과 전혀 다른 매우 추악한 모습으로 실현된 것이다.” 결국 첨단 건축 기술의 전시장이 될 뻔한 세운상가는 각각의 주상복합이나 호텔로 건립됐다. 종로~퇴계로 사이에 현대상가(13층), 세운가동상가(8층), 청계상가(8층), 대림상가(12층), 삼풍(14층), 풍전호텔(10층), 신성상가(10층), 진양상가(17층)가 특징없는 모양으로 들어섰다. 총 연면적은 20만6025㎡, 최대 864세대가 거주하는 주상복합타운이 됐다.
세상의 기운을 모두 모으려던 원대한 계획은...
세운상가가 건설될 무렵 언론들은 철근 7000t과 시멘트 87만부대 등 엄청난 자재를 사용해 만든 동양 최대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1966년 8월 세운상가 프로젝트의 첫 사업인 아세아번영회 기공식에서 김현옥 시장이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휘호를 써 ‘세운’이라는 이름을 붙었다. 하지만 이 최초의 주상복합타운은 나중에 볼품없는 외관으로 서울 도심의 경관을 해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지목된다. 세운상가는 준공 이후 7~8년간 서울의 명소로, 또 영화배우와 정치인 등 거물급들이 거주하는 고급 아파트로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강남 아파트가 개발되고 도심에 롯데와 신세계 등 최신 백화점과 용산전자상가 등이 조성되면서 슬럼화되고 말았다.
1970년말부터 세운상가는 일반 의류와 정상 제품 외에도 각종 싸구려 모조품과 해적판 레코드, 도색 잡지 등을 파는 음침한 장소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따라 도심을 살리기 위해 세운상가를 하루 빨리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랜 검토 끝에 서울시는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 조성을 위해 세운상가를 없애기로 결정했다. 세운재정비촉진사업의 하나인 세운녹지축 조성 작업에 근거해 2008년말 현대상가를 시작으로 8개 건물은 하나씩 해체될 운명에 놓여있다. 세운녹지축 건설 사업은 오는 2015년까지 계속된다. 이 사업이 끝나면 일제시대 소이탄 피해를 막는 소개지에서 전후(戰後) 빈민들의 불안한 삶의 터전으로, 그리고 경제개발시대를 대표하는 도심 랜드마크 건물로 존재했던 세운상가와 그 일대는 서울 시민을 위한 녹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으로 보인다.
1973년 7월9일 아침. 관악구 동작동(현 서초구 반포동) 한강변에는 양산을 쓴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부(富)의 상징이던 승용차도 100여대나 몰려들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반포차관아파트(현 반포1단지 중 일부) 입주자를 은행나무 열매를 이용한 추첨으로 뽑는 날이었다. 1490가구 모집에 수천명의 사람이 몰렸고 경쟁률은 5.6대1로 치솟았다. 당시 이 아파트의 72㎡(약 22평) 주택형은 360만원. 무주택자만 신청할 수 있었지만 편법이 성행했다. 친척 이름을 빌려 두 채 이상 당첨된 사람, 입주 전에 웃돈을 받고 아파트를 팔아버린 사람, 집이 있는데도 동사무소 직원에게 뒷돈으로 3000~5000원을 주고 다른 집에 세든 척 서류를 꾸민 사람들이 나중에 적발돼 노량진경찰서가 한동안 북적였다.
강남아파트 시대의 시작
반포1단지는 최초로 '강남'의 서막을 열었다. 72~138㎡(22~42평) 3786가구로 구성된 반포아파트는 처음으로 한강 남쪽에 건설된 대단지 아파트였다. 55만여㎡(16만7000평)부지에 242억원을 들여 만든 당시 최대 규모의 공사로 `남서울건설사업’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1970년대에는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중동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넘쳐났다. 정부는 전국 각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아파트를 지어댔지만 한계가 있었다. 사업지가 늘어나면서 공사기간은 길어졌고 수요가 많은 서울에서는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반포차관아파트는 임대아파트라 팔거나 임대할 수 없었는데도 아파트가격(360만원)의 25%나 웃돈이 붙어 최고 450만원을 호가했다.
1 반포아파트 노선 상가 2 반포아파트 단지 내부.지금은 쓰지 않는 주공 마크가 보인다 3 상공에서 바라본 반포 주공 아파트 단지
최초의 복층 설계 아파트
반포1단지가 단순히 덩치로 승부했던 것은 아니다. 주택 내부에는 주택공사가 처음으로 복층 설계를 도입했다. 1,2층 연결주택이라고 불렸던 이 설계는 1호당 2개층을 사용했다. 아파트는 6층 높이지만 1,3,5층에만 현관이 있었고 내부에 계단을 놓아 2,4,6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105㎡(32평C형)주택형에는 아래층에 부부침실과 식당을 겸한 13평의 넓은 거실을 뒀고 손님을 위한 화장실도 별도로 마련했다. 부엌 옆에는 가정부방, 위층에는 서재와 가족실, 아동전용욕실이 있는 중상류층을 위한 집이었다. 단지 내에서 벗어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을 갖춘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단지 앞에는 상가점포 238개가 죽 늘어섰고 유치원, 동사무소, 전화국, 은행, 학교도 모두 단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했다. 또 단지 내로 노선버스가 통과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마포, 한강아파트와 확실하게 차별성을 뒀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단지를 만들면서 소소한 부작용도 나타났다. 노선버스가 단지를 관통하면서 보수공을 가장한 좀도둑이 늘었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서 물건이 없어지는 일도 빈번했다. 도난사고가 잦아지자 요즘처럼 경비원을 두고 드나드는 사람을 통제하는 바람에 단지 앞에서는 주민과 경비원 간의 실랑이도 벌어졌다. 뜨거운 물을 이용한 지역난방시설을 설치했지만 1973년말 석유파동이 일어나 난방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석유절약정책에 따라 실내온도를 기존 23도에서 18도로 낮추자 입주자의 항의가 쏟아졌다. 결국 난방에 쓸 석유를 구하기 위해 직원이 석유공사 인천급유소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소형평형 임대주택과 중대형 분양주택이 한 단지로 묶이면서 예상치 못하게 입주자 간의 위화감 문제가 불거진 것도 반포아파트가 처음이었다. 단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현 신반포로) 남쪽에는 AID차관을 받아 지은 임대주택 1490가구, 북쪽에는 105~138㎡ 중대형 아파트 2296가구가 배치됐다. 중대형 아파트는 입주 전 집값을 모두 내야 해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입주했고 차관아파트는 봉급생활자가 많았다. 이 때문에 AID아파트 쪽 단지 경비나 청소업무를 더 소홀히 한다며 관리실에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포1단지는 1981년 8월 입주자자치관리운영위원회에 관리권을 넘길 때까지 주택공사에서 관리를 맡았다.
반포1단지, 그 이후
반포1단지 건설 후 1977년에는 반포2, 3단지 아파트가 착공한다. 반포1단지만한 규모(대지13만평, 263억원)에 5층 아파트 4120가구를 건설하는 난공사였다. 고속터미널 근처라 공사장 주변이 혼잡해 공사차량이 교통법규위반 딱지를 수차례 뗐고 공사 인력도 부족했다. 결국 완공이 되지 않은 채로 8월 입주가 이루어졌지만 한달 만인 9월, 가스폭발사고가 발생한다. 입주자 6명이 숨진 이 사고 이후 결국 어린이 놀이터가 있던 자리에 건물을 다시 지어 재입주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1단지에 비해 더 늦게 지어진 2,3단지가 재건축은 먼저 이루어졌다. 3단지가 있던 자리엔 ‘반포자이’가 올라섰고, 2단지 자리엔 ‘래미안퍼스티지’가 들어서 이제 입주를 앞두고 있다.
1970년대 중반 1차 석유파동(오일쇼크)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고 불황이 엄습하자 정부는 건설경기 활성화를 통해 난관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런 취지에서 도로와 철도 등 토목 공사와 더불어 서울에 아파트를 공급하는 일을 서둘러 추진했다. 건설은 짧은 기간 안에 일자리 창출과 소비를 늘리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잠실단지 배치도
위에서 내려다 본 잠실단지 전경
재건축 되기 전의 잠실단지 모습
아파트와 행정기관, 병원, 커뮤니티 시설이 한데 모인 뉴타운
잠실 지구는 당시 이런 경제적 요구에서 탄생했다. 1971년부터 서울시가 잠실 인근 한강변에 308만평을 매립해 용지를 조성했고 대한주택공사가 그 중 41만평을 965억 원에 매입해 1975년 3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5개 단지를 건립했다. 삭막한 강변 매립지가 총 364동, 1만9180가구, 인구 10만명의 거대한 주택 단지로변신한 것이다. 당시 이 정도 규모의 단지는 세계적으로 일본과 서독, 영국에 있는 8~9개에 불과했다. 주택공사는 처음부터 아파트 뿐 아니라 행정기관과 병원, 학교, 체육관과 오락시설, 새마을회관등 모든 것을 갖춘 뉴타운을 염두에 두고 잠실지구를 조성했다. 이를 위해 잠실단지건설본부를 만들어 90명이 넘는 기술과 관리인력을 배정하기도 했다. 이는 일반 공사 현장의 4배 이상 되는 인력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잠실 아파트 단지는 현재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는 뉴타운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잠실 단지는 아파트를 공급받을 서울 시민의 소득 수준에 따라 면적을 결정할 수 있도록 10개가 넘는 주택형으로 설계됐다. 이와 관련해 주택공사 30년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구당 월소득이 4만4000원인 가구에는 전용면적 7.1~7.4평, 5만8000원이면 9.4~9.8평, 7만300원이면 13~13.5평이 적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잠실1~4단지는 건물을 남향으로 길게 평행 배치됐던 이전 단지와 달리 건물들이 중앙을 향해 모여 있는 ㅁ자형 클러스터(cluster)방식을 채택했다. 이른바 중정형 공간구성으로 설계됐던 것이다. 단지 중앙은 놀이터나 작은 공원을 조성해 완결성을 높이려고 했다. 또 많은 나무와 꽃을 심어 쾌적한 환경을 연출했다. 아파트 단지의 이런 설계는 당시 매우 신선한 시도였다. 하지만 길게 이어진 상가에 비해 중앙에 위치한 상업시설은 이용이 불편하고 수익성이 떨어져 주민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했다. 나중에는 단지 내 차량이 늘면서 공원으로 활용하려던 중앙공간은 주차장으로 변해 처음의 설계 의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잠실아파트의 다양한 주택형 평면도 1
잠실아파트의 다양한 주택형 평면도 2
잠실아파트의 다양한 주택형 평면도 3
평면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현관에 들어서면 오른쪽이나 왼쪽에 주방공간(부엌)이 있고 거실로 바로 이어진다. 면적에 따라 2~3개 있는 침실은 거실과 분리돼 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방을 두어 전반적으로 좁다는 느낌을 준다. 요즘 나온 아파트 평면과 비교하면 공간 효율성이 떨어진다. 한강맨션이나 외인아파트와 달리 일반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공급된 것이라 내부가 소박한 편이었다. 1976년부터 건립된 5단지는 1~4단지와 개념이 완전히 달랐다. 중정형 배치를 포기하고 반포아파트와 같이 강변을 따라 나란한 모양으로 단지를 조성했다. 층수는 15층으로 당시로서는 고층 아파트였다. 또 타워형과 판상형을 혼합배치했고 실용성에 입각해 생활편의시설을 설계했다. 이와 관련해 주택공사 40년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단지의 출입구를 최소한으로 줄여 관리상의 편의를 도모하고 단지를 통과하는 교통을 억제하도록 했다. 각 블록을 한 개의 근린주구단위로 책정해 국민(초등)학교 1개씩을 유치하고 단지 중앙에 근린공원과 상가의 기능을 가진 커뮤니티센터를 배치했다." 평면 구성도 거실과 침실을 모두 강조해 1980년대 이후 거실 중심의 아파트 내부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가교(架橋)역할을 했다. 대규모로 조성된 잠실지구에서 실험된 각종 건축 기술과 도시 계획은 그 이후 생기는 대단지 아파트와우리나라 주택 건설사에많은 자양분을 제공했다. 특히각종 편의시설과주택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노하우를 남겼다.
잠실단지의 현재
2000년대 들어 잠실아파트 1~4단지는 준공 30년을 넘기지 못하고 재건축에 들어간다. 3, 4단지가 먼저 공사를 시작했고 1, 2단지가 뒤를 이었다. 5층 규모의 저층에서 3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로 변신했고 이름도 1단지는 잠실 엘스, 2단지는 리센츠, 3단지는 트리지움, 4단지는 레이크팰리스로 바뀌었다. 고밀도로 재건축돼 가구수도 단지 별로 5000세대가 넘는다. 1978년 준공된 5단지는 처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울 강남권의 대표적인 재건축 아파트 중 하나로 지금도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던 2006년 말에는 모든 면적이 10억원이 훨씬 넘는 시세를 형성하기도 했다. 최근 2년간 가격이 크게 떨어졌으나 최근에는 다시 오르는 추세다. 언젠가 잠실 주공 5단지까지 재건축이 시작되면 이제 잠실단지는 화려한 고층 아파트 촌으로 탈바꿈할 것으로 예상된다. 1970년대 중반, 불황 탈출과 서울 시민을 위한 주택 보금 차원에서 조성된 잠실지구는 역사에만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모래밭에서 어떻게 사나…” 1971년 10월 15일 오후,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분양받는 예비입주자 가족들은 단지를 둘러보고 걱정부터 앞섰다. 서울 도심에서 들어오는 버스 한 대가 없고 주변에는 온통 모래벌판 뿐인 곳에서 과연 살 수 있을지 한숨만 나왔다. 통신회선이 부족해 전화 걸기도 불편하고 변변한 상가도 없어 물건을 사려면 다리를 건너 노량진쪽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도 단지 규모는 큰 편이었다. 287만㎡(87만평)의 거대한 택지에 12층짜리 아파트 24개동이 불쑥 솟아있었다.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12층 아파트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초고층 아파트의 시작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1971년에 발표된 여의도 종합 개발계획안에 따라 ‘아름다운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시작돼 결실을 맺은 첫 작품이었다. 서울 초고층 아파트의 최초의 시도를 추적하다 보면 바로 여의도 시범아파트와 만난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이야기하면서 여의도를 빼놓을 수 없다.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한울, 2003)에 따르면 1967년 여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강변북로 너머 여의도를 개발하면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선거유세나 가끔 열리던 넓은 백사장에 불과했던 여의도를 대규모 택지로 개발하기 위해 서울시는 1968년 2월, 밤섬을 폭파했다. 여기서 나온 11만4000t의 돌로 여의도와 한강 사이 제방을 쌓았다. 1970년, 지금의 마포대교인 서울대교 준공으로 여의도는 ‘육지’로 다시 태어났다. 세운상가(1966년), 청계고가도로(1967년)를 설계했던 건축가 김수근씨는 국회와 종합병원이 있고 사람은 2층으로, 차는 1층으로 다니게 하는 보행자용 인공데크까지 갖춘 혁신적인 여의도 개발 마스터플랜까지 내놓았다.
1 여의도 백조아파트 2 여의도 삼부아파트 3 여의도 시범아파트
하지만 정작 땅이 팔리지 않았다. 서울시에서는 여의도에 조성한 택지를 민간에 팔아 부족한 재정을 충당할 계획이었지만 사겠다는 업체가 없었다. 고심 끝에 서울시가 먼저 튼튼한 고급 아파트를 짓기로 했고 1971년 10월 착공 1년 만에 24개동 1584가구 규모의 ‘시범아파트’를 준공했다. 12층 높이의 시범아파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지은 아파트 중 가장 높았다. 최신식 아파트로 불리던 이촌동 공무원아파트도 5~6층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세대마다 냉온수 급수, 스팀난방 시설을 갖췄다. 파출소, 쇼핑센터,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단지 가까이에 들인 배치 방식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였다. 여의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여의도 중학교, 여의도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는 특수학군제 때문에 사람들은 여의도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시범아파트 입주자 어머니의 70%이상이 대학졸업자라는 조사결과가 나올 정도로 고학력자, 전문직 종사자가 모여들었다.
아파트는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집이라는 시범을 보이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가장 큰 158㎡(40평)형이 571만원, 소형인 59㎡형이 212만원 선에 분양되었는데 입주 시작 후 두 달만에 158㎡형의 가격이 1000만원을 넘어섰다. 여의도시범아파트의 인기가 높아지자 민간업체들도 택지를 사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삼익주택이 1974년 시범아파트 남쪽에 삼익아파트(360가구)를, 한양주택이 은하아파트(360가구)를 지었고 대교아파트, 삼부아파트, 라이프아파트가 뒤를 이었다. 1970년대 후반 중동건설경기 호황으로 늘어난 유동자금이 여의도 아파트로 몰려 ‘투기열풍’을 빚기도 했다. 1977년 목화아파트 청약 경쟁률은 45대1를 기록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 20세기 생활문화변천사>에 따르면 한 부동산업자가 89㎡짜리 아파트 100채를 현금 2억 원을 내고 신청하는 일도 있었다. 청약결과 발표현장은 ‘당첨되면 프레미엄(당시 표기)을 붙여 팔아주겠다’고 명함을 돌리는 중개업자들로 북적였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생긴 ‘아파트에 대한 불신’을 씻기 위한 취지에서 태어났지만 파급효과는 그 이상이었다. 아파트는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집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시범아파트의 성공으로 민간 업체들이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신시가지’ 여의도의 어제와 오늘
시범아파트가 들어선 후 여의도 개발계획도 착착 진행됐다. 1975년, 국회의사당이 준공됐고 KBS 제2방송국(당시 동양방송)은 1980년 문을 열었다. 1979년에는 15층 규모의 증권거래소 건물이 완성되면서 여의도는 금융 중심지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야간인구 4만명, 주간인구 18만명으로 북적이는 신시가지를 만들겠다는 1970년대의 구상은 2009년 현재 거의 목표치에 도달했다. 여의도동에는 2008년 기준으로 1만1699가구, 3만2591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여의도는 최근 ‘제2신시가지’로의 비상을 꿈꾼다. 서울시에서 지난 1월 한강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한강공공성회복선언’을 발표하면서 여의도를 전략 정비구역으로 선정했기 때문이다. 여의도 공원 동쪽으로 시범, 삼부, 삼익아파트 등 11개 단지 6327가구가 재건축 대상이 됐다. 2010년 이후에는 새로 건립되는 재건축 아파트들로 여의도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970년대 초반 반포와 잠실에 공공주택 단지들이 조성될 무렵 지금의 한남대교인 ‘제3한강교’ 남단 압구정에서는 중대형 위주의 고급 민영아파트 단지 건립이 추진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모사(謀士) 한명회가 노년을 보낸 정자에서 유래한 압구정은 개발시대 이전에는 주변이 대부분 과수원과 채소밭이었다. 아파트 단지로 지정됐던 압구정동도 한강변 모래밭으로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를 공사하면서 외국에서 수입한 장비를 보관하기 위해 확보해 두었던 땅이었다. 하지만 제3한강교가 놓이면서 압구정 일대는 강남의 노른자위 땅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시공사인 현대건설 이름이 붙은 대규모 민영아파트인 ‘압구정 현대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강남 아파트 시대의 시작
1 한강에서 본 현대아파트 단지 2 1980년대 현대아파트 단지 모습 3 현대아파트 단지 내 모습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탄생은 제3한강교라는 기반시설과 더불어 정부의 서울 인구 분산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이 사업을 총괄했던 현대산업개발(옛 한국도시개발-현대건설 주택사업부를 모태로 설립된 주택전문 건설사)의 30년 사사(社史)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건립에 앞서 정부의 영동지구 개발촉진지구 선정이 있었다. 1972년 정부가 ‘특정지구 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해 영동지구를 개발촉진지구 1호로 지정했다. ‘영동 아파트지구 개발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강남 일대에 본격적인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1975년에 강남구가 탄생하고 1976년에는 반포동, 압구정동, 청담동, 도곡동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됐다.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 1973년 5만3000여명에 불과했으나 1978년에는 21만6000여명으로 증가했다. 이에 공동주택 건설과 함께 민간업체에 의한 아파트 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75년 4월, 제1차 사업이 시작됐다. 현대건설은 2년 전 서빙고아파트 건립에서 자신감을 얻어 본격적으로 주택 건립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이를 위해 주택사업부를 확대 발전시켜 1976년 3월, 현대산업개발의 전신(前身)인 한국도시개발을 설립했다. 이에 따라 1~3차 사업까지는 현대건설이 조성을 맡았고 4~14차는 현대산업개발이 사업을 주도하게 됐다. 1,2차 단지는 교통이 불편하고 기반시설이 부족한데다 홍보도 잘되지 않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건설’이라는 브랜드와 강남 아파트 열기를 타고 압구정으로 중산층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7차 단지까지 입주가 끝난 압구정 현대는 이미 ‘명품’ 아파트로 명성을 떨쳤다. 1977년에는 현대그룹 계열 직원에게 공급하기 위해 건립한 아파트를 사회 고위층에게 특혜 분양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현대아파트가 성공하자 압구정동 주변에는 라이프주택을 비롯해 한양과 우성, 삼익주택, 삼호, 미성 등 다른 건설사들도 잇따라 아파트를 건설했다. 이는 강남 아파트에 대한 투기 바람이 몰고 온 현상이기도 했다.
첨단 건축 기술의 도입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1987년 4월 14차까지 총 6,148가구의 대단지로 조성됐다. 주택공사가 건립했던 잠실이나 반포와 달리 중대형 면적이 많아 명실공히 중ㆍ상류층을 위한 대단지 고급 아파트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민간이 건립한 최대 고급 단지라는 것 외에 건축 기술 측면에서도 얘기할 사안이 많다. 1970년대엔 15층 아파트가 드물었다. 첨단 건축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은 고층 아파트를 건립하기 위해 새로운 설계와 구조, 시공기술을 모두 동원했다. 이런 공법들은 그 뒤 다른 건설사들이 모방해 한동안 아파트 건축 기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현대산업개발은 30년 사사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아파트 시공에서 (그 때까지)국내 보편적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 라멘 구조에서 탈피해 무량판(FLAT-SLAB)과 조립식(PRE-FAB) 구조 등 선진공법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인원 감축 작업의 표준화를 기하고 과학적 공정관리를 통해 낭비 요소를 제거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인근 중개업소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평면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 건립된 아파트에 비해서는 효율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별로 없다. 가운데 큰 거실이 있고 침실과 주방이 주변에 배치됐다. 면적이 클수록 침실 수가 많다. 가장 나중에 입주한 단지도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내부와 외부가 낡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주민은 내부를 리모델링해 살고 있다. 지금도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많은 상류층이 거주하는 대표 단지로 꼽힌다. 아파트 단지들이 조성된 이후 들어선 백화점과 학교, 행정기관 등 각종 편의시설들은 ‘압구정 현대’의 가치를 더 높였다. 기업인과 교수, 고위직 관리, 법조인, 유명 연예인이 오랜 기간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 이유다. 최근 서울시는 한강변 개발 계획의 하나로 압구정 일대를 전략정비구역으로 지정했다. 시가 요구하는 일정 규모의 땅을 기부 채납하면 50층 이상 초고층 아파트로 재건축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기부 채납 비율을 놓고 시와 주민간에 시각 차이가 워낙 커 언제 재건축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잠재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면적에 따라 10억~30억원에 달하는 현재 시세에 이미 반영돼 있다.
1989년 겨울. 4년 전부터 조성된 상계동 신시가지 한가운데 높이 솟은 아파트를 보며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분명 아파트가 4가구 들어가야 할 자리인 16~18층 사이가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고층 아파트의 뻥 뚫린 빈 공간은 보기만 해도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이 아파트는 당시 서울에서 최고 높이인 25층으로 건립된 상계 주공4단지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를 설계한 건축가 조성룡씨는 "건물이 너무 높아 고층 주민들이 자칫 바깥과 단절될 수 있다"며 중간 휴식공간을 만들었다. 그 때까지 우리나라 건축사에 없었던 첫 시도였다. 주민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에 나가는 대신 공중 휴식공간에서 주변 경관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이 공간을 놀이터 삼아 뛰놀았다. 그러나 이 특별한 공간은 벽을 타고 울리는 소음과 진동 때문에 이웃들이 불만을 제기해 나중에 폐쇄됐다.
1 단지 내에 위치한 고가수조 타워 2 상계 신시가지의 단지 배치도 3 상계 주공아파트 대단지의 모습
상계주공아파트(16개단지 4만224가구)는 1985년 11월 30일부터 1989년 12월에 걸쳐 조성됐다. 제5차, 6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라 저소득층 대상 주택을 공급하는 차원에서 건설된 것으로, 이전까지의 '아파트'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공중에 휴식공간을 두는 등 특이한 모양이었고 소비자 맞춤형 인테리어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새로운 주택 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혁신적인 시도가 돋보인 단지다.
일단 외형부터 달랐다. 판으로 찍어낸 듯한 네모 반듯한 주동(아파트 건물) 외에 Y자와 U자, V자, L자 등 다양한 건물을 지형에 맞게 배치했다. 12~15층 내외에 머물던 아파트 높이도 최고 25층으로 훌쩍 높아졌다. 다양한 외형에 걸맞게 평형 배치에서도 '믹싱' 개념을 도입했다. 29.7~82.5㎡(9~25평)으로 구성된 각 가구를 한 동에 섞어 넣었다. 최근 분양하는 아파트에서 선보이는 '부모-자녀 세대가 같이 살 수 있는 2세대형' 아파트의 원조도 상계 주공아파트다. 아래층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윗층은 자녀와 부모가 함께 쓰는 복층형, 조부모가 따로 쓸 수 있는 별도의 현관과 간이부엌, 욕실을 설치한 이웃거주형 등이다. '3대가족형'아파트로 불리는 이 아파트는 조부모, 부모, 자녀 3대가 한 곳에 살아 주택 수요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의 사생활을 보호해주는 설계로 호응을 얻었다. 또 소비자의 필요를 배려한 맞춤형 아파트를 지향했다. 큰 방과 작은방, 거실과 방 사이에 이동식칸막이를 움직이면 아이가 생기거나 손님이 방문했을 때 방 크기를 쉽게 조정할 수 있었다.
4만 가구 규모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신시가지가 조성되기 전 가옥 526채, 공장 171곳과 비닐하우스 2912건 등이 들어서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도심지 재개발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터라 원주민 반발이 컸다. 택지매수를 끝내고 나니 기반공사가 막막했다. 북한산과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으로 둘러싸인 마들평야(도봉구 상계동 창동 월계동 일원 330만㎡)는 중랑천보다 2m가 낮아 비가 오면 어김없이 잠겼다. 아파트를 세울 단단한 지반을 만들기 위해 35만㎡의 흙이 들어갔다. 연인원 1260만명이 철근 11만톤, 시멘트 500만포, 벽돌 3억2000만장을 날랐다. 신도시급인 과천(1만3522호), 개포(1만5710호)의 2배가 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 중 견본주택(모델하우스)을 처음으로 연 곳도 바로 상계지구다. 보상과 택지매수를 마치고, 기반공사를 시작하고 보니 주택경기가 침체돼 미분양이 염려됐다. 주택공사는 1214㎡(368평)규모의 대형 모델하우스를 짓고 분양 홍보영화까지 제작했다. 최근에는 분양단지마다 견본주택을 짓고 TV광고를 만드는 일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차 분양분인 4046가구는 1만8758명이 신청해 경쟁률이 4.6대1까지 올라갔다.
1,2 상계 주공아파트단지의 현재 모습
상계 주공아파트의 현재
지금은 입주한지 20년이 넘은 중년단지지만 상계주공아파트에서는 아직도 주민 자치 활동이 활발하다. 또 인근에 뉴타운이 들어서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고 있다. 단독주택과 무허가 건물, 연립다세대가 밀집한 노원구 상계3,4동 일대 64만7578㎡가 3차 뉴타운으로 지정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불암산과 수락산 사이에 위치한 상계뉴타운에는 2016년까지 자연과 어우러지는 테라스하우스와 타운하우스, 복합 고층건물 등 8600가구가 건립된다. 현재 단독주택지로 단절된 수락산과 불암산을 잇는 녹지축이 새로 만들어지고 복개도로로 쓰이는 당현천 물길도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된다. 리모델링 이야기도 솔솔 새어나온다. 상계신시가지 리모델링과 상계뉴타운 조성사업이 끝나면 다시 한번 상계지구는 새로운 시가지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1983년, 우리나라 공동주택 설계 역사에 의미 있는 이벤트가 열렸다. 서울시가 1986년 열리는 아시안게임 기간 중 선수와 코치, 심판 등 참가자들이 묵을 아파트 단지 조성을 위한 국제현상설계공모를 실시한 것이다. 개인이 짓는 단독 건축물이 아닌 일반 아파트를 대상으로 현상설계를 하기로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시도였다. 공모 결과 국내에서 26점, 재외교포와 외국인, 내국인과 외국인 공동 작품 7점을 합쳐 모두 33개 설계안이 출품됐다. 치열한 경쟁 끝에 조성룡과 문정일씨가 공동 설계한 작품이 최종 당선됐다. 이 설계안은 ‘ㄷ’자형 단지 배치와 주민들의 공동 생활 공간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1 방이동에서 바라본 올림픽공원과 올림픽선수촌아파트 2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단지 내부 3 올림픽 제 1,2체육관과 올림픽선수촌아파트
국제현상설계를 거쳐 1986년 5월 잠실 종합운동장 인근에 그 모습을 드러낸 아시아선수촌아파트는 이전에 나온 단지와 완전히 달랐다. 서울시가 발행한 <서울 20세기 생활문화변천사>는 아시아선수촌아파트의 주택사적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보행자와 차도의 분리와 함께 건물의 1층을 빈 공간으로 띄워서(이를 필로티 구조라고 한다) 주민들이 자유롭게 공동생활공간 사이를 왕래할 수 있게 해 주는 등 단지 내에서 이웃과의 공동생활을 최대한 고려했다.(중략) 이는 단기계획과 건축계획의 일체화, 일상생활동선과 공동생활공간의 유기적 연계를 통한 공간이용의 활성화 등을 보여준 사례로 현상설계의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례였다.”
선수촌아파트의 색다른 시도들
‘ㄷ’ 자 형태의 2~3개 주거동 가운데 부분은 마당의 개념으로, 주차장 뿐 아니라 입주민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특히 필로티 구조는 일반 아파트의 단점인 주민간 단절을 극복하는 장치다. 1층 빈 공간을 통해 주민들이 주거동 사이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해 공동생활의 활성화를 유도한 것이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는 9,12,15,18층, 전용면적 99~178㎡의 다양한 주택형으로 구성돼 있다. 총 1356가구로 대단지에 속한다. 지금도 개발 호재가 많은 송파구 잠실 역세권에 위치해 있는데다 관리도 잘 돼 있어 15억~26억원을 호가한다. 현상설계를 통한 아시아선수촌아파트의 성과는 올림픽선수촌아파트로 이어져 더욱 발전한 모습으로 계승됐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 국제현상설계에는 국내 건축가 30명을 포함해 총 39개 작품이 출품됐다. 당선작은 황일인과 우규승씨가 공동설계한 작품으로 건물을 방사형으로 배치한 것이 눈길을 끈다. 위에서 항공 사진을 찍으면 거미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남향이 좋다는 기존 관념을 깨고 조망권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것이다.
중심부에는 저층이 자리잡고 외곽으로 나갈수록 층이 높아지는 점도 특이하다. 6층부터 24층까지 일정한 스카이 라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같은 설계는 각 세대의 채광 효과를 높이고 주민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효과를 준다. 중앙에는 상가 시설과 광장을 배치해 공동생활의 편의성을 높였다. 순환도로가 단지 외곽을 감싸고 있으며 주민들이 주거동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동선을 설계한 것도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단지와 비교해 용적률이 낮은데다 한강물을 이용한 단지 내 하천을 비롯해 산책로와 자전거 길 등 쾌적한 환경을 조성한 점 역시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 받는다. 이런 장점으로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1988년 완공됐을 때 전문가의 찬사가 쏟아졌다. 1998년 모 일간지에서 건축가 등 전문가들의 설문 조사로 선정한, 해방 후 건립된 ‘걸작 건축물 20선’에서 4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올림픽선수촌아파트는 설계 뿐 아니라 규모 측면에서 선배 격인 아시아선수촌아파트를 뛰어 넘는다.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이 단지는 총 122개동, 5540가구에 달한다. 1가구당 평균 4명이 거주한다고 할 때 2만2000명 이상이 몰려 살고 있는 셈이다. 서울 도심에서는 최근 재건축해 입주를 끝낸 잠실 파크리오(옛 잠실 시영아파트) 다음으로 큰 단지로 꼽힌다. 82~165㎡ 9개 주택형으로 구성돼 있으며 시세는 6억~18억원을 호가한다.
선수촌 아파트가 남긴 것
두 선수촌 아파트는 주택공사나 SH공사 등 공공기관도 독창적인 공동주택 단지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실제로 선수촌 아파트 이후 중랑구 신내지구 9단지와 강서구 가양지구 2단지, 송파구 거여지구 4단지 등 서민에게 공급되는 소형 위주의 아파트 단지들까지도 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조성됐다. 두 선수촌 아파트는 준공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송파구, 아니 서울의 대표적인 아파트 단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가장 살고 싶은 아파트를 꼽으라면 여전히 두 곳은 상위권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재건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이것이 실현되려면 시간이 더 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초. 광화문에서 차를 타고 서남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여기서부터 시흥군입니다’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시흥군과 붙어 있는 ‘서울의 끝자락’은 허허벌판이었고 사람들은 이곳을 개봉동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지하철 1호선과 7호선을 비롯해 많은 버스 노선이 지나는 어엿한 서울의 서남권역이지만 1970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변두리였다. 바로 이 개봉동에 1972년 5월 9일 아침, 4,000여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든다. 삭막한 허허벌판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든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날 이례적인 사건을 모 일간지는 이렇게 전하는데 이 기사를 읽어 보면 왜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은 개봉동이 생긴 이래 아마 처음일 만큼 붐볐다.(중략) 뺑뺑이 돌리기 추첨기의 알맹이를 3000개밖에 준비 못한 대한주택공사 담당이사는 현장에 몰려든 군중을 돌아보고는 ‘큰일났다’고 비명 같은 환성을 질렀다."
서울에서 최초로 선보인 임대아파트인 개봉동 주공아파트는 250가구 입주자를 모집했는데 첫 입주자 신청 날 무려 3339명이 한꺼번에 몰렸다. 경쟁률은 13대1까지 치솟았다. 오전 8시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광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추첨 알맹이를 미처 받지 못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통에 우격다짐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터넷 청약을 통해 아무리 경쟁률이 높아도 조용하게 당첨자가 결정되는 요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인터넷 청약이 도입되기 전에는 이런 법석을 거쳐서 아파트 청약 당첨자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임대주택 탄생
1 개봉60만단지 전경
2 개봉 60만단지 대지 분양 신청 모습
개봉동 주공아파트는 처음부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1971년 4월 착공해 5개월 만에 준공했지만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시민의 48%가 집 없이 지냈지만 42㎡(13평)아파트의 분양가 135만원이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상당수 서민들이 몇만 원으로 한 달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이 정도의 금액은 서민 뿐 아니라 중산층에게도 큰 돈이었다. 이 때문에 주택공사가 비슷한 시기에 건립한 한강시영아파트와 광명아파트 등 분양주택들은 미분양으로 남아있었다. 개봉아파트는 처음 분양에 실패한 뒤 반년 넘게 논 밭 가운데 빈 집으로 방치되어있다 1972년 ‘임대주택’으로 다시 태어난다. 정부는 총 300가구 중 국가유공자 등에 제공하는 50가구를 제외한 250가구의 임대주택의 입주자를 모집하기로 했다. 다만 서민들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임대보증금을 가급적 저렴하게 책정했다. 임대보증금 7만8000원과 매달 6,500원의 임대료를 내면 거주할 수 있었다. 입주자가 저축으로 돈을 모아 분양대금을 마련하면 분양할 수 있게 해 인기가 높았다. 현재 임대주택제도와 달리 당시 임대주택 임대기간은 1~2년에 불과했다. 무주택서민에게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같은 해 10월, 2차 임대입주자 모집도 성공적이었다. 200가구 모집에 1,200명이 넘는 신청자가 몰려 6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당장 돈을 다 마련하지 않아도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임대아파트 모집을 기다렸다. 임대아파트가 인기를 끌자 당첨된 사람들 일부는 분양아파트처럼 임대 입주권에 프리미엄(웃돈)을 붙여 전매하기도 했다. 개봉 주공아파트가 들어선 개봉동 일대는 ‘개봉60만 단지’라는 거대한 주택건설용지로 조성된 곳이다. 경인국도와 철도가 지나고 안양천이 흐르는 당시 영등포구 개봉동과 시흥군 서면 철산리 일대 201만3000㎡(61만여평)을 99만㎡(30만평)씩 나눠 2개 지구로 개발했다. 인구밀도가 낮은 단독주택지구로 계획돼 단지 내 초등학교 2곳, 중학교 2곳, 시장 5개, 어린이 놀이터 7개, 공원 6곳, 극장 1곳이 함께 들어섰다. 개봉단지에는 개봉주공아파트를 비롯해 철산 광명 등 3개 아파트 단지 2,000가구를 지었다. 3만5000명이 사는 미니 신도시 규모였다.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침수되던 저지대를 높게 만들기 위해 흙을 쌓아 3m를 높였다. 성토할 흙이 부족해 인근 산을 무단으로 팠다가 주택공사직원이 특수절도혐의로 고발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개봉60만단지’는 서울 서남권인 영등포 부도심이 개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개봉단지의 현재
허허벌판이던 개봉동 일대는 37년이 지난 현재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지역으로 변했다. 개봉동 주공아파트는 재건축해 1,371가구 규모의 개봉 한진타운 아파트로 변신했다. 재건축한 한진타운 아파트도 1999년 입주했으니 벌써 10년이 지났다. 개봉동과 인근 고척동에서는 주택재개발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 사업이 끝나면 최초의 임대아파트의 탄생지였던 개봉동은 다른 모습의 주거단지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된다.
와우아파트 붕괴로 시민아파트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던 1970년 5월, 회현동 남산 언덕에 또 하나의 시민아파트가 준공됐다. 산자락에 자리 잡은 서민용 아파트라는 점에서 이 아파트는 와우아파트와 너무나 닮아 있었고, 자연스레 사람들은 이 아파트를 보고 와우의 악몽을 떠올렸다. 와우아파트의 비극을 초래했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부터 그랬으니 말이다. 아직까지 남산 언덕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40년 가까이 서민아파트의 흔적을 보여주는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했다. 김 전 시장은 와우시민아파트는 실패했지만 이 아파트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시범’을 보여 줘야 한다며 ‘회현 제2시범아파트’라 부르라고 했지만 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셈’이 됐다. 결국 김 전 시장은 와우아파트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하지만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무너지기는 커녕 지금도 그 기능을 다하고 있으니 김 전 시장의 요구대로 시범을 충분히 보여 준 셈이다.
출입구가 공중에 있는 독특한 구조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일반 아파트와는 다른 독특한 구조로 건립됐다. 출입구가 1층과 6층 두 곳에 있다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남산의 급격한 경사지에 짓다 보니 건너편 언덕이 6층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6층에 출입구를 만들고 건너편 산비탈까지 구름다리로 연결해 밖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4층에 사는 사람은 1층 출입구를 이용하고 5층 이상에 거주하는 주민은 6층 출입구를 사용하는 것이 편하다. 구멍가게와 약국 등 편의시설도 자연스럽게 1층과 6층 출입구 모두에 들어섰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연면적 1만7932㎡로 ‘ㄷ’ 모양으로 설계됐으며 지하1층, 지상 10층, 1개동으로 구성돼 있다. 총 352가구로 면적은 대부분 전용 38.34㎡다. 평면은 방 2개에 개별 화장실, 거실이 있는 구조다. 10층이지만 서민 아파트로 건설된 것이라 엘리베이터는 없고 주차공간도 없다. 차량을 소유한 사람은 골목에 어렵게 주차를 해야 한다.
6층 높이 공중에 떠있는 구름다리 출입구가 보인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의 중정(중앙정원)모습
낡은 나무문이 세월의 흐름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크기도 작고 초라하지만 당시에는 괜찮은 시민아파트에 속했다. 이 아파트가 건립되기 전 원주민들은 공중화장실을 사용했고 10㎡ 미만의 좁은 공간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이런 서민들에게 방 2칸에 개별 화장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남대문과 동대문시장도 가깝고 날씨가 좋으면 남산에 올라가 즐길 수도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러나 새 아파트가 건립되고 난 뒤 돈이 없는 원주민들이 입주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조건이었다. 이와 관련해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효형출판, 2002)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입주금 30만원을 15년 거치 2000원씩 갚아나간다는 조건이 철거민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조차 그들에게는 벅찬 돈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5000원, 연탄 한 장이 16원, 담배 한 갑이 60원할 시기에 입주금 30만원을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서울시 소유 땅에 서민들을 위해 조성한 회현 제2시민아파트에는 준공 초기 고위 공무원과 경찰, 연예인 등 중산층들이 새 주인이 됐다. 돈 없는 원주민들은 이들에게 밀려 다른 달동네를 찾아 떠나야 했다. 나중에 강남과 여의도에 진짜 ‘시범아파트’들이 건립돼 중산층이 이사를 간 뒤에야 서민들은 다시 이 아파트의 주민이 될 수 있었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는 30년 이상 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많은 추억을 남기고 있다. 성공해서 강남으로 떠난 사람도 있고 여전히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주민도 있지만 이 아파트는 이들의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을 묵묵하게 지켜보고 있다. <주먹이 운다> 같은 영화 촬영 장소가 되기도 했고 최근에는 인기 프로그램인 ‘무한도전’ 팀이 다녀가기도 했다. 지하철 회현역에서 이어지는 좁은 비탈길을 따라 ‘시범드라이크리닝’와 ‘시범상회’를 차례로 지나 언덕꼭대기에 오르면 지금도 굳건하게 서 있는 회현 제2시민아파트를 볼 수 있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 철거사업 추진 중’이라는 중구청의 안내판이 아파트 입구에 서 있지만 주민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생활하고 있다. 활짝 열린 창에는 발이 늘어졌고 창 앞에 가지런히 놓인 화분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구름다리 출입구로 들어가니 금방 어둡다. 멀리 복도 창으로 빛이 들지만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긴 복도 양 옆에 늘어선 붉은 나무 현관문에는 파란색 호수가 붙었다. 아파트 중정에는 7~8층 높이로 나무가 우거졌다.
회현 제2시민아파트의 현재
와우아파트를 반면교사로 삼아 튼튼하게 건설됐던 이 아파트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2006년 1월 서울시는 중구에 회현 제2시민아파트 정리계획을 전달했다. 위험시설 D등급으로 분류돼, 더 이상 거주 가능한 건축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남산의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서도 철거가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부터 6월까지 주민동의서를 받았으며 9월18일 보상계획을 공고했다. 철거 계획 발표를 전후로 서울 강남권 등 위치가 좋은 곳에 조성되는 아파트 특별 입주권을 노린 투자자들이 이 아파트로 몰렸다. 1채당 1억 원이 넘지 않았던 아파트 가격이 2억5000만~3억 원까지 뛰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집을 팔았고 주인이 바뀌었다. 새 집 주인들은 대부분 이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주민 중 80% 이상이 전세보증금 3500만~4000만원을 주고 사는 세입자다. 보상이 시작된지 3년이 지났지만 주민 동의율은 22%에 불과하다. 352가구 중 77가구만 보상을 받고 집을 비웠고 나머지는 더 좋은 지역의 특별 분양 아파트를 기다리고 있다. 시설이 많이 낡았지만 강제 수용을 통해 철거할 수 없다는 것이 서울시 관계자의 설명이다. 결국 서울 최고령 아파트 중 하나인 회현 제2시민아파트의 운명은 언제 집주인들이 철거 보상에 동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1960년대까지 청계천변은 서울로 몰려 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땅히 거주할 곳이 없었던 서민들은 천변을 따라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았다. 이 때문에 도심과 인접해 있었던 청계천변은 슬럼가를 형성했고 서울시는 어떤 식으로든 이들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청계천변의 삼일아파트는 1969년, 이런 배경에서 설립된 시민아파트다. 삼일아파트는 청계천로를 중심으로 종로구 창신동 400-4번지 일대, 그보다 남쪽인 중구 흥인동 162-2번지 일대에 세워졌다. 각각 12개동씩 총 24개동 1243가구에 달하는 대규모로 1~2층은 상가, 3~7층까지는 주거공간으로 계획한 주상복합아파트다.
판잣집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아파트
삼일아파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바로 ‘재개발’이다. 본래 청계천변 판잣집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주용으로 제공했던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따라 청계천로를 닦으면서 천변에 무허가건물과 판잣집 등을 모두 걷어냈고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새로 지은 시민아파트인 삼일아파트로 이사왔다. 3층을 넘는 건물이 드물던 시절 청계고가와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던 7층짜리 건물을 보고 사람들은 “박통(박정희 대통령)이 청계고가 지나실 때 판잣집 보기 싫어 가렸다지”하며 수군댔다. 삼일아파트 뒤편 황학동은 전쟁 직후 지은 낡은 한옥과 판잣집 등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1 삼일아파트 철거 모습 2 청계고가도로 주변 풍경 3 청계천 복원시기의 삼일아파트
“풍물 사진 찍어야 되는데 삼일아파트 철거 끝났나요?” “어릴적 아빠따라 황학동 시장 들를 때 오며가며 보던 아파트다” “아파트 뒤에는 옛날 판잣집이 많았는데 이제 다 사라지게 됐다”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옛날 아파트 사진 중 블로그에 많이 올려진 순으로 치면 아직 남아있는 회현제2시민아파트가 1등이다. 근소한 차이의 2등은 삼일아파트다. 지난 2005년 철거한 청와대 뒤편 청운아파트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에 사라진 아파트다. 철거된 시기도 시기거니와 풍경이 독특했기에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듯하다. 동대문시장을 질러 청계 7가, 8가를 지나면 길 양편으로 우람하게 솟아오르던 병풍같은 삼일아파트는 이 동네를 한번이라도 지나간 사람들에게는 잊기 힘든 그림이었다. 비 피하고 밤이슬 가릴 집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말 서울시는 주택난을 해소하고 곳곳에 마구잡이로 지었던 무허가 판자촌을 정비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초에는 무허가건물을 개량하자며 보조비를 지급했지만 호응이 없자 직접 시민아파트 건립에 나섰다. 서울시가 아파트 골조를 올리면 입주자가 직접 내부공사를 했다. 자고 나니 아파트가 생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서울시가 목표로 삼았던 2000동 9만 가구 건립에는 못 미쳤지만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전용면적 36㎡(10평)의 미니 가구가 종로구,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등에 우후죽순 들어섰다. 1969년에만 서대문구 금화시민아파트를 시작으로 종로구 청운 동숭 삼일 낙산 현저, 중구 삼일 용산구 산천 서부이촌 청파, 성동구 행응, 동대문구 전농 월곡 성북구 정릉, 은평구 녹번, 북아현 연희A 연희B, 창천, 마포구 서강 노고산, 양천구 김포, 강서구 김포, 동작구 본동, 관악 남현 시민아파트가 건립됐다.
1969~1971년 3년만에 서울에 들어선 시민아파트는 총 434개동, 1만7402가구였다. 장소는 달라도 시민아파트를 사는 방법은 어디나 같았다. 계약금을 먼저 내고 입주하면 분양금은 최장 15년까지 쪼개 낼 수 있었다. 서울을 뒤덮을 속도로 시민아파트를 짓던 서울시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이후 1972년, 시민아파트 공사를 중단했다. 시민아파트를 본격적으로 없애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다. 1994~1995년 성수대교가 끊기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자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구조물 안전진단을 실시했다. 서울시에서는 대부분의 시민아파트가 ‘곧 무너질 수 있다’는 E등급을 받아 1997년 8월, 시민아파트 정리계획을 내놓게 된다. 주민들이 자체 개발을 할 수 있는 지역은 재건축이나 재개발사업을 실시했고 지대가 너무 높거나 공원에 붙어있어 아파트를 짓기 어려운 지역은 건물보상비와 SH공사가 짓는 분양아파트 입주권을 주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30년의 역사를 부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숭인동과 창신동 일대 삼일아파트 주민 일부는 철거가 함께 진행된 황학동 재개발 구역과 비슷한 수준의 보상 등을 요구하며 반발했다. 집을 비우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이 많아 철거가 지연되자 빈 집에 노숙자들이 집단으로 머물기도 했다. 2008년 현재까지 31개동 철거 사업에 1907억 원이 들었다.
삼일아파트의 현재
오랜 이야기와 상처를 품은 아파트는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004년 황학동 판잣집과 중구 쪽 삼일아파트를 부순 자리에는 롯데건설에서 지은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대신 들어섰다. 종로구 쪽 삼일아파트는 2005년 3~7층 아파트 부분을 철거한 후 1~2층 상가만 남았다. 시민아파트가 없어진 자리는 구민체육센터(회현제1아파트)나 공원(동숭아파트) 등으로 바뀌었다. 내 집 장만의 기쁨과 서민아파트의 슬픔을 함께 나눴던 시민아파트도 점차 사진으로만 기억되는 ‘과거’로 변해간다.
아시안게임이 열렸던 1986년 부산 수영만에 국제 경기를 위한 요트 경기장이 생기고 주변에 새 아파트들이 잇따라 건립됐다. 세계인들의 방문을 앞둔 만큼 이전과는 다른 개념의 아파트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수영만 요트 경기장과 해운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부산 망미 주공아파트는 그 외형과 건축 기법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눈길을 끌었다.
구릉지 개발의 모델을 보이다
1 부산 망미 주공아파트 전경 2 단지 내 생태 연못 3 바다에서 바라본 모습
부산 망미 주공의 가장 큰 특징은 구릉지의 경사면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고 1층에 세대를 넣지 않은 필로티 구조를 취하는 등 바다 조망을 배려했다는 점이다. 또 건물을 테라스형과 타워형, 일자굴곡형으로 다양화한 것도 특이하다. 각 건물은 자연 훼손을 최소화해 녹지로 조성한다는 기본 원칙에 따라 세워졌다. 구릉지 개발의 모델을 보여 준 부산 망미 주공은 바다를 향한 남향 25도, 북서향 40도의 경사에 아파트를 세웠다. 1984년 착공에 들어가 1986년 준공하고 이듬해 입주를 끝냈다. 15층짜리 고층 아파트 1998가구와 5층 계단식으로 건립된 40가구로 구성됐다. 대한주택공사에 따르면 개발 당시 설계의 목표는 기존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해 다양한 주택과 단지경관을 조성하고 주택용지 조성 비용을 절감하는 것으로 돼 있다. 주공 40년사는 망미 주공의 전경 사진 옆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등고선을 따라 판상형 주거동을 배치해 토목공사를 최대한 줄이고 판상형 아파트의 1층은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필로티로 처리했다. 등고선에 수직방향으로는 타워형 주거동을 배치해 단지 경관을 재고했으며 경사가 급한 곳에는 테라스 주택을 배치하고 있다. 또한 자연지형을 이용해 단지에서 발생하는 빗물을 모아 생태 연못을 만들었다."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테라스주택을 건립하고 생태 연못을 조경한 단지 설계는 지금 봐도 획기적인 것이다. 테라스주택 두 세대 사이에 중앙정원(중정)을 조성해 주민들의 휴식 공간을 마련한 것도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 받는다. 타워형 고층 아파트는 다른 건물의 조망을 가리지 않도록 단지 외곽에 두었고 일자굴곡형은 단지 후면이나 중심부에 배치했다. 면적은 76~116㎡로 7개 유형이 있다. 소형인 70㎡대는 방 2개와 거실, 나머지는 방 3개와 거실로 구성돼 있다. 방 3개인 아파트에 현관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작은 방이 있고 거실 건너편으로 발코니를 끼고 있는 큰 방이 보인다. 획기적인 외관에 비하면 평면은 평범한 편이다.
친환경 아파트의 효시
부산 망미 주공의 백미는 역시 테라스 주택이다. 1개동에 10세대씩 총 4개동 40세대가 건설됐고 모두 116㎡로 동일한 면적이다. 중정이 각 세대의 안방과 거실에 연결돼 있다. 중정의 경계는 투시형 담장을 설치해 개인 사생활 보호와 함께 개방감을 강조했다. 각 세대에 딸린 테라스는 3단으로 데크와 잔디공간, 화단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설계는 뒷편에 자리 잡은 고층 아파트와 조화를 이루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테라스 주택들을 연결하는 계단은 복도 역할을 하는데 생태 연못 등 주변 조경과 어울려 친환경 단지임을 바로 느낄 수 있게 만든다. 테라스 주택 바로 아래에 위치한 생태 연못은 단지 안에 살고 있는 생물에게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풍경을 다채롭게 한다. 이에 대해 사업 담당자였던 주공은 "망미 주공의 테라스 주택은 국내에서 가장 모범적인 친환경 설계의 선례로 꼽히고 있으며 생태연못의 조성과 자연지형, 수목을 최대한 보전하는 개발로 인해 오늘날 우리나라 환경 친화형 아파트의 효시로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테라스주택 뿐 아니라 `S’자 모양으로 산을 끼고 아파트 동을 배치해 녹지율을 높이고 단지 안에 공원을 조성한 점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당시 조경을 담당했던 주택도시연구원 도시연구실 최일홍 연구위원은 "택지개발을 할 때 구릉지 위쪽을 공원으로 만들어 단지의 녹지율을 높이고 자연을 보전하고자 했다"며 "이런 노력에 힘입어 여전히 친환경 대표 단지로 꼽히고 있다"고 강조했다.
부산 망미 주공아파트의 현재
부산 망미 주공은 지난 2005년 일부 주민들이 재건축을 추진했다. 부산시는 서울과 달리 20년만 지나도 재건축을 할 수 있지만 당시 망미 주공은 이 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준공이 1986년이라 20년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면 여전히 튼튼하고 안전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건물이 낡아 물이 새는 등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한다. 상당수 주민은 내부를 수리해 살고 있지만 준공 20년을 넘긴 아파트는 점점 기능을 잃어 가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입주민들은 내년 부산시 도시계획심의에서 재건축이 확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부산시 고층 아파트에 비해 대지 지분이 넓어 재건축이 확정되면 사업이 빨리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재건축이 되면 살기는 편해지겠지만 ‘최초의 친환경 아파트’라는 명성은 퇴색할 수도 있다.
"민철아, 자전거 안 탈 거야?" "오늘은 공원에서 줄넘기만 하다 올 거야~" 어머니로 보이는 30대 여성은 어깨에 훌라후프를 메고, 한 손에 줄넘기를 감은 아이와 함께 간다. 또래 아이 대여섯과 이어폰을 낀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단지 입구에서 한 방향으로 향한다. 붉은 노을 기운이 가시고 땅거미가 깔리는 저녁 어스름녘, 10차로 대로변 도로 자전거주차장은 만차였다. 전구를 환하게 밝힌 자전거 도매점 앞에는 사람들이 두셋씩 서서 자전거 가격을 물었다. 도보 10분, 산책할만한 거리에 올림픽공원을 둔 강동구 둔촌동 둔촌 주공아파트 풍경이다.
강동대로를 사이에 두고 송파구와 어깨를 나란히 한 둔촌1동에는 둔촌 주공아파트밖에 없다. 둔촌주공 1,2,3,4단지 5,930가구가 둔촌1동 인구의 전부다. 지금은 10차선 대로변에 음식점이며 은행, 편의점 등이 늘어섰지만 30년 전만 해도 일대가 휑했다. 도심에서 동남쪽으로 15km, 하남시 경계와 맞닿은 서울의 동쪽 끝 벌판이었다. 그 벌판은 1970년대 서울 송파구 잠실동 잠실단지(1만 9,180가구)와 반포1단지(3786가구)공사를 시작하면서 한강 이남 개발 붐이 일 즈음, 새로운 주거단지 조성지로 꼽혔다. 둔촌단지도 거대한 공급계획의 일환이었다. 당시 주택공사의 목표는 ‘하루에 100가구씩 짓기’ 였다.
1 둔촌 아파트 전경 2 올림픽 공원에서 바라본 둔촌 단지 3 둔촌 주공아파트 현재 모습
대단지 설계의 노하우를 담다
둔촌단지는 59만4000㎡ 대지 위에 5930가구를 건설했다. 벽돌로 지은 5층 아파트와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10층 건물이 들어섰고, 주택형은 전용 24~82㎡ 5가지 종류였다. 잠실 뉴타운 건설 때 시도된 대단지 경험을 녹이되, 단점은 보완했다. 잠실단지는 지나치게 소형평형만 지은데다 아파트 높이가 모두 같아 일(一)자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둔촌단지는 대로변에는 5층짜리 낮은 아파트를, 중심부에는 10층짜리 고층아파트를 배치했다. 덕분에 햇빛이 단지 안까지 고루 들고, 바람이 잘 통한다. 한 단지 내 여러 평형을 갖췄을 뿐 아니라, 한 동 안에도 서로 다른 평형을 섞어 주민간 소통을 도왔다. 약간 언덕진 원래 지반의 높이를 일부러 맞추지 않았고, 나무와 습지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두었다. 단지 안쪽으로 들어가보면 개포주공아파트나 반포주공아파트 등 다른 저층아파트에 비해 주동 사이 거리는 좁은 편이다. 주변에 일자산 자연공원 등 녹지가 많아 내부에 따로 녹지공간을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내 주거지 면적은 79%다. 10층짜리 고층아파트를 밖에서 보면 주동 측면에 튀어나온 작은 발코니가 도드라진다. 단독주택에서 볼 법한 凹 모양의 발코니는 그 자체로 주택공사 표지와 동 호수 말고는 아무 장식이 없는 주동에 장식 역할을 한다. 입주 시에는 입주자가 자유롭게 집 분위기를 바꿀 수 있도록 거실과 침실에는 무늬 없는 초배지(도배지를 바르기 전에 붙이는 하얀 종이)만 붙이기도 했다.
둔촌 주공아파트는 단지 내에서 모든 생활이 해결되도록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췄다. 단지 입구에 상가 등 생활편의시설을 집중 배치하고, 단지 내 통학거리를 고려해 초등학교는 위례초등학교와 둔촌초등학교로 나눠 넣었다. 인근 지역 학생들도 함께 이용하는 중고등학교는 단지의 바깥쪽에, 중심상가의 기능을 나누는 미니 상가는 단지 곳곳에 배치해 동선이 엉키지 않게 배려했다. 둔촌동 인근에는 이렇다 할 상가와 학교가 없었고, 천호동의 중심상가까지는 1km 가량 떨어져 둔촌 주공 단지 하나가 동네 역할을 해야 했다. 한꺼번에 많은 주택을 짓느라 건설비가 모자랐던 서울시에서는 1978~1979년 둔촌주공아파트 등 10개 아파트(7667가구)를 분양하면서 채권을 발행했다. 분양가 외에 추가로 채권 매입해 분양 받는 방식이다. ‘마이 홈’의 꿈에 부푼 사람들은 선뜻 주머니를 열었고, 250만~850만 원의 채권을 샀다. 덕분에 서울시는 단숨에 517억 원이라는 자금을 확보했다.
둔촌 주공아파트의 현재
둔촌동 주공아파트는 현재 재건축을 준비 중이다. 1~4단지가 함께 재건축을 추진해 향후 8000~1만 가구 이상의 대단지로 변신할 예정이다. 1982~1985년에 지어진 고덕동의 1만1050가구 주거단지, 고덕 주공아파트도 재건축을 준비하고 있다. 주변 녹지에 편안하게 안긴 듯한 나지막한 5층짜리 아파트의 추억이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릴 무렵부터 부동산 가격은 미친 듯이 뛰었다. 폭등하는 집값에 전문 투기세력인 ‘복부인’까지 가세하자 정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통계청 등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87년부터 1989년까지 3년간 집과 땅값은 해마다 20~40%씩 상승했다. 1980년대 중반 조성된 ‘3저(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현상과 올림픽으로 인한 경기 호재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사려고 했고 그 결과 부동산시장 불안은 해소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집값 때문에 서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정부는 평촌과 중동, 산본 신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공급을 늘려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런 조치로 집값은 잡히지 않았다. 결국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9년 4월, 획기적인 주택 공급 확대 정책을 발표한다. 서울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하나씩 대규모 신도시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1 분당신도시 전경
2 일산신도시 전경
분당과 일산의 탄생
분당과 일산신도시는 이렇게 탄생했다. 정부가 사업을 급하게 추진한 결과 신도시 발표 이후 7개월 만에 시범단지가 분양됐고 2년만인 1991년엔 첫 입주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 보상 문제 등으로 잡음도 적지 않았다. 현재 10만 가구, 40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거주하는 분당은 일제시대 갑부인 박흥식이 도시로 개발하려고 했고 1974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젠가 긴요하게 쓰일 땅’이라고 예언할 만큼 좋은 땅이었다. 신도시로 탈바꿈하기 전에는 70%가 농경지, 23%가 임야였다. 분당에는 중산층을 위한 고급 주상복합부터 서민을 위한 각종 임대아파트까지 다양한 종류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또 오피스텔과 백화점 등 상업시설들도 건설됐다.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하철 서현역 주변에는 삼성과 한신, 우성, 현대 등 민간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민간 건설사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 토지공사에서 땅을 매입해 단지를 조성했다. 대부분 30층 건물로 고층 아파트시대를 주도했다.
분당 북쪽은 중심 상권이 형성돼 지금도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단지들이 집중돼 있다. 중산층을 겨냥한 것이라 중대형이 많고 평면도 1980년대 주택공사가 공급한 것에 비해 세련됐다. 조망권을 고려한 단지 구성과 고급 편의시설을 곳곳에 설치된 것도 눈에 띈다. 정자동도 알짜 지역에 속한다. 이곳 역시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와 주상복합 단지들이 많다. 넓은 녹지 공간도 장점에 속한다. 카페거리와 율동공원 등 명소가 조성돼 있어 다른 곳에 비해 아파트 값이 비싼 편이다. 특히 몇몇 주상복합들은 서울의 상류층까지 분당으로 유인하는 단지로 꼽힌다. 수영장과 골프연습장 등 입주민의 수준에 맞는 각종 시설을 설치해 고급 아파트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가가 의도적으로 개발한 신도시인 만큼 영구임대와 국민임대 단지들도 많다. 정자역 인근에는 서민들을 위해 건립된 아파트들도 꽤 많다.
일산은 신도시로 지정될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곳이다. 북한과 가깝고 군사시설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산은 대부분이 절대농지였다. 처음 신도시 발표가 났을 때 입주민들을 전쟁의 방패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일산신도시는 약 7만 가구, 27만 명이 살고 있다. 조성 당시 분당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신도시였던 셈이다. 택지를 개발할 때 가급적 자연 경관을 그대로 살린 것이 특징으로, 호수공원과 정발산공원 등은 일산을 쾌적한 신도시로 만든 대표적인 녹지공간이다. 아파트 특성은 분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민간 건설사들에 의해 건립됐기 때문이다. 분당과 일산신도시 조성으로 1990년 중반 집값은 안정됐다. 수도권 주택 보급률도 1997년에는 80%를 넘어섰다. 그러나 기반시설이 건설되기 전에 아파트 입주가 시작돼 초기 입주민들은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또 주택 위주로 도시를 조성해 베드타운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집값 안정을 신도시 개발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지만 분당의 경우 ‘버블세븐’ 중 하나로 부동산시장 불안을 부추기는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실제 분당과 일산 아파트 가격은 분양가보다 2배 이상 올랐다. 민간 아파트시대를 열었다는 성과가 있었지만 짧은 기간 안에 많은 아파트를 짓다 보니 설계와 디자인이 천편일률적이라는 단점도 있다.
일산, 분당 신도시 아파트들의 오늘
일산과 분당아파트들도 벌써 준공 20년을 앞두고 있다. 많이 낡아 보수가 불가피한 단지들이 있고 일부 아파트는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추가 부담금 문제와 재건축 시기에 대한 의견들로 진행 속도는 느리다. 일부 전문가들은 단순한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을 넘어 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다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드타운의 한계를 넘어 도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택 위주의 도시를 개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의견을 받아 들여 분당과 일산이 환골탈태할지 아니면 아파트만 새 건물로 바뀌는 수준에서 정리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면서 공장에 가려면 멀었는데 공장도 가깝고 탁아소도 생긴다고 하니 너무 기쁩니다”, “저번 집은 오두막집 같다고 큰딸이 질색을 했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이제 누가 와도 걱정이 없겠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데요”. 우리나라 최초의 영구임대아파트의 입주를 앞두고, 입주민들은 감회에 젖었다. 눈물 섞인 내집 마련의 소감은 2개 방송사와 19개 신문에 실려 전국으로 전해졌다.
번동 임대아파트의 탄생
1 단지 내 사회복지관 모습 2 아파트 내 공동작업장 3 영구임대아파트 입주자 실태조사 관련 기사들
1990년 11월 6일, 서울 도봉구 번동(현 강북구 번동)에서 아파트 입주식이 열렸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당시 국회건설위원장이며 건설부장관, 서울시장, 현지 주민들이 참석해 북적였다. 첫 영구임대아파트 4181가구 입주자는 대부분 철거민촌 비닐하우스에 거주하거나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지하방에서 온 식구가 모여 살던 이들이었다. 전,월세집을 옮겨 다니던 사람들도 중앙난방이 되는 방 두 칸 짜리 ‘내집’에서 이사걱정을 덜었다.
번동 영구임대아파트(번동에서 영구임대아파트로 공급된 것은 번동주공아파트 2,3,5단지다. 1,4단지는 일반 분양됐다)는 이전의 임대주택과는 달랐다. 일반 임대주택은 일단 임대료를 내면서 살다가 향후 분양가를 내고 분양전환했지만 영구임대주택은 도시 영세민에게 기간 제한 없이 임대만 하는 방식이었다. 정부에서 생계비를 보조해주는 생활보호대상자와 의료비를 지원받는 사람, 보훈대상자 중 소득수준이 낮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다. 25만호의 영구임대주택건설계획의 일환으로 1989년부터 공사가 시작됐다. 현재 서울 관내에는 중계 9단지(2634가구), 월계1단지(2298가구), 수서단지(2565가구) 등 15개 단지 2만3628가구의 영구임대주택이 있다. 1989년 3월 착공해 이듬해 11월 입주해 제 1호 영구임대주택이 된 번동주공아파트의 임대보증금은 100만~200만 원, 월 임대료는 3만~4만 원선으로 책정했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건설비용의 85%를 정부가 대고 입주자가 나머지 15%를 부담하는 식이었다.
번동주공아파트는 기획 단계부터 철저하게 입주민의 필요와 경제적 여건을 고려해 ‘맞춤형’으로 지었다. 전용 23~39㎡ 소형아파트로 짓되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도록 미닫이문을 달고, 수납공간을 위아래로 채워 넣었다. 나중에 큰 주택이 필요하게 되면 벽체를 헐고 확장할 수 있도록 가변형 벽체를 도입했다(가변형 설계를 활용해 실제 주택형을 확장한 단지는 아직까지는 없다). 관리비를 줄이기 위해 청소가 쉬운 바닥재를 사용하고, 형광등을 주로 사용해 전기비를 줄이는 등의 배려도 엿보인다. 아파트 단지 내 상가를 분양하지 않고 임대해 나오는 임대료로 관리비를 보조하기도 했다. 입주자의 가구당 월평균 소득이 31만 4000원으로,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34%선에 불과하고, 가구주 중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 33%에 달하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입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시설을 아파트 단지 내에 배치한 점도 특이하다. 인형, 완구, 수예, 조화 등을 만드는 공동작업장을 만들고 취업정보를 제공하는 취업정보센터, 여성취업자와 맞벌이 부부를 위한 탁아소 등을 넣었다.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주택에 대한 입주자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다. 서울 번동, 광명 하안, 천안 성정, 목포 상동 등 1103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에서 94%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이사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고(77.6%), 주거환경이 양호해서(13.3%)였다. 특히 부엌과 화장실을 가구마다 따로 쓰게 돼 편리하다는 응답이 93%나 됐다. 일부 응답자들은 “아이가 공부하는 태도가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답하기도 했다.
번동 임대아파트의 명암
하지만 영구임대아파트가 주는 안정감은 그림자도 함께 드리웠다. 입주자 중 65%가 계속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초기 만족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열악한 계층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은 깨지 못했다. 주택도시연구원은 ‘국민임대주택의 사회통합방안(2004)’ 보고서에서 이제까지의 임대주택이 “저소득계층의 집이라는 제한된 인식에 따라 소형위주로 건설됐고, 밖으로 보기에도 일반 주거지와 쉽게 분리되는 판상형의 편복도 위주로 공급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근 공급되는 임대아파트는 이런 지적을 받아들여 소셜 믹스를 시도한다. 분양주택 안에 임대주택을 넣어 짓거나(장기전세주택 시프트), 중대형 임대아파트도 공급하는 등 사회통합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2001년 9월, 매일경제신문에는 오랜 기간 무주택의 설움을 마감한 한 서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쫓겨날 염려 없는 집이 생겨 마음이 너무 편합니다. 빚 때문에 살 길이 막막했는데 이젠 20년은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됐어요’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수원 정자지구에 들어선 첫 국민임대 아파트에 입주한 심경과 ‘국민임대’라는 새로운 주택을 소개하고 있다. 이 서민은 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첨됐다. 16년간 살던 소형 아파트를 팔아 5000만원을 마련해 국민임대 보증금으로 1500만원을 내고 나머지 돈으로는 은행 빚을 일부 갚았다. 그러나 ‘내 집'이 아닌 ‘임대'라는 점 때문에 자녀들이 기죽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또 매달 15만원인 월세금 부담도 만만치 않다.
최초의 국민임대 단지 탄생
1 정자지구 단지 내 휴게시설
2 수원 정자지구 전경
국민임대 아파트는 1990년대 말 도시 무주택 서민의 주거 안정을 개선하기 위해 생겼다. 수원 정자지구는 이런 국민임대주택 정책에 의해 공급된 최초의 단지다. 시행자인 대한주택공사는 2000년 6월15일 수원 정자지구에 20년간 임대가 가능한 국민임대주택을 분양했다. 서민에게 공급되는 것인 만큼 소형인 전용 49.5㎡로 건설됐다. 보증금 1427만6000원에 월 임대료 14만5240원이면 입주할 수 있어 경쟁률이 높았다. 보증금은 계약 때 20%, 입주할 때 80%를 내는 조건이었다. 많은 사람이 몰려 세대주 나이와 부양가족 수, 65세 이상 노부모 부양과 세대원 중 장애인 포함 여부에 따라 점수를 합산해 당첨자를 가렸다.
정부는 국민임대를 처음 공급하면서 전용 59㎡ 이하는 10년간, 수원 정자지구와 같이 49㎡ 이하는 20년간 살 수 있도록 구분했다. 월평균 소득이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 50% 또는 70% 이하인 저소득계층이어야만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전세 보증금의 절반 수준만 내고 장기간 살 수 있어 2000년대 초부터 나온 국민임대는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수원 정자지구 국민임대주택의 의미에 대해 주택공사의 사사(社史)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택 보급율이 90%대로 올라서면서 임대주택을 선호하는 사회적 현상과 함께 주로 택지개발지구에 개발돼 주거환경이 쾌적한 입지 특성을 지닌 국민임대주택은 과거 중 장년층의 도시 영세민을 대상으로 공급되던 임대주택과 달리 신혼부부 등 젊은 계층도 공급 대상으로 하고 있다.”
주공은 최초의 국민임대주택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만큼 수원 정자지구의 단지설계와 내부 평면 구성이나 설비, 마감을 일반 분양 아파트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 또 기존 임대주택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밝은 색채를 사용하고 충분한 휴게 공간을 마련하는 등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평면은 현관을 열면 오른쪽으로 작은 방이 있고 정면으로 거실 겸 부엌이 위치한다. 또 왼쪽에는 안방이 자리 잡고 있는 전형적인 소형 아파트 평면 구조다. 관리동에는 노인정과 회의실 등이 있다. 첫 입주가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난 2001년 9월 열린 입주식에는 당시 정부를 이끌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참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입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 내부를 둘러 보고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서민을 위한 지도자임을 거듭 보여 주었다. 또 2003년까지 국민임대주택 20만 가구를 건설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수원 정자지구 국민임대아파트는 주변 전세가격의 46% 수준에 불과했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정부에서 총 사업비의 30%, 주택기금에서 40%의 건설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수원 정자지구 국민임대는 영구임대나 공공임대 등과 차별화해 임대주택의 품질을 한 단계 높여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민들도 쾌적한 주거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국민임대주택의 성과는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 보금자리주택 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수도권의 훼손된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을 풀어 주변 시세의 50~70% 수준의 서민 주택을 짓는다는 내용은 국민임대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수원 정자지구의 현재
지금도 수원 정자지구는 인기 있는 국민임대주택으로 많은 서민들이 입주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놓고 있다. 주변에서는 백설마을 주공 2차로 불리는 이 단지는 연간 50가구가 대기자로 등록되지만 신청 가구가 많아 앞으로 100가구로 늘릴 예정이다. 첫 입주 이후 매년 20~30가구가 바뀌고 있다. 보증금과 월세는 많이 오르지 않았다. 입주할 때 내야 하는 보증금이 1721만원, 월세가 17만원 수준이다. 2001년 입주 때에 비해 각각 200만원과 2만원 가량 더 부담하면 된다. 연간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거의 인상이 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놀이터를 보수했고 자전거 보관소도 확충했다. 여러가지 면에서 수원 정자지구 국민임대는 앞으로도 서민들이 선호하는 아파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00년 대림산업은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의 아파트 분양을 앞두고 ‘e-편한세상’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이전의 ‘대림 아파트'를 ‘e-편한세상’으로 바꾼 것이다. 단지 바로 뒤로 야산을 끼고 있다는 점에 착안, 공원 안에 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파트를 부각시키기 위해 고심한 결과였다.
아파트 이름, 건설사 이름대신 브랜드를 입다
1 e-편한세상 2 푸르지오 3 자이
같은 해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업계 처음으로 ‘래미안’이라는 아파트 브랜드(BI) 선포식을 열고 본격적인 브랜드시대를 열었다. 2500여 개의 외국어를 밀어내고 당선된 것은 미래지향적(래)이고 아름답고(미) 안전한(안) 아파트라는 뜻의 래미안. 래미안 시대의 장자는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분양한 ‘수원 천천(율전2차 래미안) 래미안’아파트였다. 공급면적 86㎡, 114㎡ 중형아파트 876가구로 구성된 이 아파트는 삼성아파트라는 이름 대신 래미안이라는 브랜드를 입고 2002년 4월 입주했다. 대림아파트와 현대아파트, 삼성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은 이제 ‘e-편한세상’과 ‘힐스테이트’, ‘래미안’에 산다. 지금이야 주소가 ‘롯데캐슬’이나 ‘타워팰리스’라는 대답이 어색하지 않지만 아파트 브랜드가 지금처럼 자리 잡은 지는 채 10년이 안 된다.
가장 먼저 브랜드 아파트를 분양한 대림산업이 ‘e-편한세상’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지금은 김포한강신도시나 광교신도시 등 수도권의 대형택지지구 내에 건폐율(전체 사업지 면적 중 건물을 짓는 면적의 비율)이 40%대인 널찍한 단지들이 등장하지만 당시만 해도 용적률 50%대인 아파트 단지가 드물었다. 대림산업은 동간 간격이 넓고 녹지가 많은 자연친화적인 단지에 ‘편한 세상을 경험(Experience)한다’는 브랜드를 입혔다. 사업부지를 13개로 나눠 필지당 19가구씩 따로 사업승인을 받은 덕에 아파트 단지면서도 고급빌라 같은 느낌을 주도록 지었다. 188~294㎡ 대형평형으로 구성된 232가구의 작은 단지로, 2001년 10월 입주했다. 하지만 아파트에 브랜드를 도입하겠다고 선포한 곳은 삼성물산으로 알려져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함흥냉면이나 춘천닭갈비처럼 아파트 브랜드도 원조 경쟁이 치열하다. 특허 등록날짜가 먼저냐, 대중에 공개한 시점이 먼저냐로 아웅다웅하지만 건설업계에서는 대부분 이들 2개 사의 브랜드가 2000년도 이후 브랜드경쟁시대를 열었다고 본다. 상표권은 래미안이 1999년10월26일에 출원해, 2000년1월13일 상표권을 출원한 e-편한세상보다 석 달 가량 빠르다.
브랜드 무한경쟁 시대
<시대별 아파트의 브랜드 변화>(대한주택공사, 2000)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에는 삼성사이버아파트(1999), 삼성중공업의 쉐르빌(1999), 주상복합 브랜드인 타워팰리스, 가든스위트 아크로빌(이상 2000)등 브랜드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브랜드 무한경쟁 시대를 연 계기는 1998년의 분양가 자율화였다. 분양가를 건설사가 정할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품질과 가격의 아파트가 나왔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건설사 이름 이상의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이전에도 압구정 현대아파트(1975), 부산 럭키동래아파트(1986)등 건설사 이름을 붙인 아파트들은 있었지만 건설사 이름이 쏙 빠진 브랜드의 등장은 처음이었다. 브랜드의 파워는 생각보다 강했다. 삼성중공업의 ‘쉐르빌’은 2001년 한국능률협회의 브랜드 파워 평가 주택부문에서 내내 왕좌를 지켰던 ‘현대아파트’를 밀어내고 1위에 올랐다. 한 소절만 들어도 아 무슨 아파트, 라고 떠올릴 정도로 귀를 사로잡는 짧은 ‘징글’송도 등장했다. 특허청에 따르면 아파트를 포함한 건설업 관련 특허등록건수는 2000년 초 연간 1400건에서 2002년 1600건, 2003~2005년에는 매년 2000건을 웃돌았다. 2007년 기준 시공능력평가 100위권 이내 건설사 중 주택을 짓는 91개 건설사가 브랜드를 1개 이상씩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의 저자는 “1970년대 이후 아파트에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계층의 분화를 가져왔다면 2000년대 이후 현재는 브랜드 아파트에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사회적 계층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고 말한다. 브랜드를 만들기 전에 지은 아파트에서 ‘개명신청’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브랜드냐에 따라 집값이 좌지우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7년에는 서울 동작구 롯데낙천대 아파트 입주자들이 외관 페인트칠 공사를 하면서 ‘롯데캐슬’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브랜드 아파트라는 ‘지위’를 얻게 된 사람들은 그 나름의 단지라는 개성도 원한다. 래미안 에버하임, 롯데캐슬 골드로즈 등으로 브랜드는 유지하되, 단지만의 색깔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의 이름은 날로 길어진다.
1994년, 삼성그룹은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3만3691㎡(1만193평)의 땅을 서울시로부터 매입했다. 102층짜리 초고층 건물을 지어 본사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삼성은 그 이듬해부터 사옥 건립 추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3년 만에 난관에 부딪친다.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국가 부도 상황에 빠졌고 삼성그룹도 경영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결국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사옥 건립을 포기하고 분양을 통해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 방향으로 계획을 바꾼다.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인 ‘타워팰리스’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탄생했다.
초고층 주거공간의 시대가 열리다
1 도곡동 타워팰리스 2 목동 하이페리온 3 분당 파크뷰
시공을 맡은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고급 주거공간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고안했다. 1999년 5월 공사를 시작해 2002년 10월 완공한 1차 타워팰리스는 우선 층수로 기존 아파트를 압도했다. 지하 5층 지상 42~66층으로 건립된 이 건물은 아파트에 대한 최초의 개념인 ‘공원(녹지) 위에 있는 탑(tower in the park)'을 실현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여의도 63빌딩이 가장 높은 건물로 알고 있었던 한국인에게 타워팰리스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총 1499가구에 3695대의 자동차를 주차할 수 있고 40대의 엘레베이터가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입주민을 위한 수영장과 연회장, 골프연습장, 스트리트 몰 등은 기존 아파트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시설이었다. 2003년 모습을 드러낸 타워팰리스 2차는 총 961가구로 이루어졌고 2004년 완공된 3차는 총 610가구로 두 곳 모두 1차에 비해 규모가 작다. 하지만 3차 타워팰리스는 높이가 262.8m에 달해 본격적인 초고층 주거공간의 시대를 열었다. 타워팰리스는 최고급 마감재 뿐 아니라 주민의 안전과 보안을 위해 다양한 장치를 적용했다. 출입할 때 필요한 카드(RF와 ID카드) 키와 지문 감식기 등이 그것이다. 또 첨단 정보기술(IT)을 적용해 편리하게 각종 가전과 통신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동으로 블라인드가 내려가고 문이 잠긴다. 또 하루 24시간 보안 장치가 외부 침입자를 감시한다. 엘레베이터도 69층에 도달하는데 60초 밖에 걸리지 않는 인공지능형이다. 초고층 건물을 건립하는데 필요한 고강도 콘크리트 등 첨단 건축 공법을 도입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워팰리스는 분양 당시 인기를 끌지 못했다. 요즘 나오는 주상복합아파트에 비하면 가격이 훨씬 낮았으나 전반적인 경기 침체로 미 분양된 것이다. 각종 세금 감면 혜택을 주었는데도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때 분양 받은 사람은 나중에 가격이 많이 올라 엄청난 시세차익을 얻었고 그러면서도 양도세를 부담하지 않아 이런 유사한 상황을 두고 ‘타워팰리스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나오게 했다. 타워팰리스는 또 주변 교통과 환경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지적도 받았고 집값이 폭등할 때는 주택시장 불안을 초래한 주범으로 질시를 받기도 했다. 외부 방문객에 대한 배타적인 시스템도 구설수에 올랐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타워팰리스는 우리나라 주거 문화사에서 고급 주상복합아파트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보여 준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강남의 타워팰리스에 이어 분당신도시에도 이와 비슷한 고급 주상복합이 등장한다. 포스코건설이 2004년 6월, SK건설과 함께 분당 정자동 특별설계단지에 1829가구 규모로 건설한 ‘파크뷰'가 그것이다. 용적률 355%, 지하 3층, 지상 35층 규모의 아파트 13개 동과 상가 1개 동으로 구성된 파크뷰는 ‘원스톱 리빙시스템'을 표방했다. 타워형이 아닌 판상형(일자형)으로 설계했고 지그재그 식으로 동을 배치해 전 세대가 주변의 탄천과 체육공원, 청계산, 광교산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평면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거실과 전면 발코니에 정원 공간을 둔 것이다. 또 화강석으로 맷돌 모양의 빨래터를 설치하고 장독대를 도입한 것도 눈길을 끈다. 청소년 수련관, 수영장, 실내 골프 연습장, 헬스센터 등 입주민을 위한 고급시설도 많다. 파크뷰는 공급 2시간 만에 계약이 끝났다. 전망 좋은 고층 510가구는 평균 32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해 당시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 주었다.
2000년대 초 등장한 고급 주상복합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단지가 현대건설이 목동에 건설한 ‘하이페리온'이다. 2003년 6월 완공된 목동 하이페리온 1차는 아파트 2개 동과 오피스텔 1개 동 등 726세대로 구성돼 있다. 2006년 12월 입주한 하이페리온 2차는 지하5층, 지상41층의 아파트 4개 동과 오피스텔 2개 동 등 979세대가 거주한다. 하이페리온 2차는 세계적인 조경시설 권위자인 이탈리아 출신의 마시모 벤뚜리 페리올로 교수가 직접 조경해 주목을 받았다. 지진 강도가 높아도 견딜 수 있는 내진 설계와 화상통신, 홈뱅킹, 홈쇼핑이 가능한 초고속인터넷망, 첨단중앙통제장치, 디지털 지문인식 도어록과 차량통제 자동인식센서, 출입자 기록 시스템 등 뛰어난 안전과 보안 시설을 설치했다. 모닝콜과 비서업무대행, 티켓예약 구매, 민원대행, 세탁물서비스 등 다양한 호텔식 관리도 하이페리온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주상복합아파트의 현재
요즘 들어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는 예전에 비해 인기가 떨어졌다. 일반 아파트에 비해 가격이 높다는 점도 있지만 환기와 냉난방을 위해 너무 많은 관리비가 들어가고 경쟁 상품인 아파트도 요즘에는 고급 주상복합에 버금가는 첨단 시설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통과 생활편의시설이 바로 옆에 붙어 있어 편하고 비슷한 수준의 주민들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중.상류층 중에는 여전히 주상복합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산의 자랑 광안대교를 건너면 오른편으로 하늘까지 치솟은 주상복합 아파트 불빛이 관광객을 반긴다. 해안선을 따라 밀집한 높은 건물들 사이에 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는 모습이 마치 앞머리를 삐뚤빼뚤 잘라놓은 아이 같기도 하고, 순을 자르면 다음날 어김없이 올라온다는 대나무밭도 닮았다. 낮에는 낮대로 하얗게 빛나는 다리 뒤로 나란히 늘어선 아파트가 정겹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해운대의 스카이라인은 계속 변하고 있다.
수영만 매립지에 들어선 주상복합
주상복합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아파트가 처음 발 디딘 곳은 서울이었지만 대형 건설사들이 맞대결을 벌인 곳은 부산 해운대다. 부산 수영구 광안동 쪽에서 해운대로 넘어오면 바로 수영만 요트 경기장이다. 경기장을 사이에 두고 왼쪽은 신세계 백화점과 전시회장 벡스코, 상업복합시설 등이 들어서는 센텀시티, 오른쪽은 주상복합들이 밀집한 마린시티다. 수영만 매립지로 불렸던 땅에는 바다를 눈앞에 두는 조망권을 홍보하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속속 들어섰다. 수영만 요트 경기장 인근으로 40여층 높이의 해운대 하이페리온(40층, 2006년), 두산위브 포세이돈(45층, 2007년), 대우 트럼프월드마린(42층, 2007년)등이 들어섰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층 높이의 주상복합이 들어서더니, 2000년대에는 30층으로 높아지고, 2007~2008년에는 입주하는 주상복합아파트의 평균 높이가 40층을 훌쩍 넘어섰다. 200~500가구 규모 아파트가 1년에 4~5개씩 입주하는 엄청난 속도였다. 해운대 우동에 위치한 40여개의 아파트 중 주상복합아파트만 약 15개에 달한다.
1 해운대 아이파크 반조감도
2 두산 위브더제니스 조감도
주상복합의 디자인 격돌
해운대 우동에 주상복합이 우후죽순 들어서자 사람들은 단순한 주상복합 이상을 원하게 됐다. 당초 관광지로 개발할 예정이던 수영만 일대에는 지나치게 아파트만 짓는다는 비판과 건설사의 차별화 전략 등이 맞물리면서 건축가 초빙 열풍이 불었다. 현대산업개발의 ‘해운대아이파크’와 두산건설의 ‘해운대위브더제니스’는 우동 발 디자인 전쟁의 하이라이트다. 2007년 1월 나란히 분양한 이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는 모두 외국업체가 설계했다. 현대산업개발은 서울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본사 사옥을 설계한 폴란드계 미국인 다니엘 리베스킨트에게 해운대아이파크 설계를 맡겼다. 72층 높이 초고층 건물은 부산의 바닷바람을 안은 범선 모양의 디자인을 입었다. 내부 평면은 건축물의 형태를 살려 199개 다양한 평면으로 구성했다. 주거시설이 총 3개동 1631가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약 8가구씩만 같은 평면을 갖게 되는 셈이다. 내부 인테리어는 장식을 배제하는 대신 외부의 빛을 반사하거나 머무르게 하는 백색, 투명, 반사 소재를 사용해 포인트를 줬다. 두산건설 ‘해운대위브더제니스’는 지상 80층 높이의 꽃봉오리를 짓는다. 미국 시카고의 대표적인 초고층 빌딩인 리버 이스트 센터(River East Center)와 상하이 엑스포 복합단지 등을 설계한 디스테파노앤파트너스와 도쿄 록본기 힐즈 등을 설계한 저디 파트너십(Jerde Partner ship) 등이 참가했다. 런던 밀라노 파리 등 6개 도시를 컨셉트로 한 평면이 특징이다.
분양가 경쟁도 빼놓을 수 없다. 해운대아이파크는 공급면적 기준 118~423㎡를 공급하는데, 분양가는 3.3㎡당 982만~4500만원(평균 1987만원)까지 다양했다. 3.3㎡당 4500만원인 펜트하우스는 서울 성수동 뚝섬에 짓는 고급아파트인 갤러리아 포레(3.3㎡당 4598만원)에 뒤지지 않는다. 해운대위브더제니스 역시 3.3㎡당 평균 2293만원으로 분양가가 높았다. 해운대의 입지와 고분양가를 앞세워 건설사에서는 전국구 마케팅을 폈다. 현대산업개발은 해운대 우동과 서울 삼성동 본사 인근 두 곳에서 견본주택을 열고 서울 수도권의 고객을 유치했다. 실제 서울 청약자가 전체의 20%가량을 차지하기도 했다. 청약통장을 쓰지 않는 선착순 계약에서 6대1이 넘는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계약률은 화려한 청약에 못미쳤다. 두산건설은 1~3순위 청약이 끝난 후 견본주택을 여는 일명 ‘깜깜이분양’으로 아예 선착순 청약으로만 계약자를 모집하기도 했다. 견본주택에서 패션쇼를 열고 가수를 부르고 미술전을 여는 미분양 마케팅이 다시 성업했다. 최근에는 계약률이 80%이상 올라간 것으로 알려졌다.
해운대의 초고층화는 현재 진행형
바다 위에 뜬 수영만 매립지에서는 두 개의 건물이 해운대의 스카이라인을 다시 한번 바꾸고 있다. 해운대두산위브더제니스(9월말 공정률 22%)와 해운대아이파크(공정률19%) 모두 20~25층 높이까지 골조공사를 마쳤다. 초고층으로 짓느라 다른 아파트보다 공사기간이 길어 2011년말~2012년 초 준공 후 입주할 예정이다. 마린시티에는 250실 규모의 최고급 호텔과 IT오피스, 명품쇼핑센터 등이 함께 들어서고, 해양 관광 영상 관련 시설도 입주한다. 2012년 광안대교의 야경은 조금 더 화려하고 다채로워질 것이다.
지난 2003년 5월, 구로구 신도림 인근에 전혀 새로운 개념의 아파트가 선보였다. 건물 자체는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단지 안에 조성된 정원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조경만 보면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어느 시골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물이 흐르는 개천에는 1급수 어종이 살고 생태 연못 주변에 꽃과 나무들이 무성했다.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 건물 사이로 보이는 이런 풍경이 다소 생소했지만 이 단지 이후 나무와 꽃, 개천이 어우러진 광장과 정원은 그 이후 아파트 건설 분야에서 하나의 ‘유행’이 됐다.
생태조경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다
1 운동장 2개 크기의 정원으르 가진 동탄 우미 린 2 구로구 신도림4차 e-편한세상의 생태연못 3 성남 금광 래미안의 정원
단지 조경에 ‘자연’과 ‘생태’라는 개념을 도입해 주목을 받았던 이 아파트 단지는 서울시 구로구 한국타이어 공장 부지에 건립된 ‘신도림 4차 e-편한세상’이다. 시공사인 대림산업은 대표적인 공해 시설이었던 타이어공장의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이 단지를 설계하면서 ‘생태조경'이라는 테마를 도입했다. 설계팀은 일본과 독일의 생태단지를 답사하는 등 그 이전에 국내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생태 아파트 조경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주차 공간을 지하화하고 지상은 버들치 등 1급수 어종이 살 수 있을 자연형 계류와 생태 연못을 만들었다. 개천에 있는 데크에서 물고기와 물 풀 등을 관찰할 수 있는 자연학습장을 설치하고 황토 산책로와 잔디광장도 조성했다.
아파트 조경 측면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 아파트 단지는 지난 2006년 완공된 성남 ‘금광 래미안’이다. 검단산 자락에 위치한 이 아파트는 단지 뒤편에 폭포와 정자, 개천이 입체적으로 꾸며졌다.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데 장애물이었던 지형의 높낮이를 아름다운 ‘생태 자연'으로 바꾼 역발상의 조경이었다. ‘초심원(初心園)’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정원은 옹벽을 자연석과 높이 조정을 통해 수경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특히 초심원과 연계된 자연하천 ‘초심정’은 이 단지를 대표하는 명물이다. 자연 그대로 물 흐름을 살려 단지 내 하천을 조성한 것이다. 목백일홍을 비롯한 관상수를 심었고 암반수를 활용한 약수터와 연못 2단 폭포, 과수원과 산책로는 아파트 단지 조경의 새로운 장(場)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파트 단지 내 조경이 아파트의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는 인식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분양가 자율화로 아파트의 고급화 경쟁이 시작되고 시공사들이 앞 다퉈 아파트 브랜드를 만들면서 단지 내 조경의 차별화를 통해 소비자의 눈길을 끌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아파트 단지 안에는 어느 정도의 조경 시설이 있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조건만 충족했을 뿐 요즘 건립되는 아파트처럼 적극적인 의미의 조경은 없었다. 아파트 조경의 초기 역사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준 단지는 1990년대 후반 준공된 ‘수원 금곡 LG빌리지’다. 이 단지는 ‘테마공원’의 개념을 도입하고 보행과 차도를 분리하는 시도를 했다. 또 주변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분수광장과 동산을 조성했다. 이 시기 아파트 조경은 각종 테마가 화두였다. 주차장이 지하로 들어간 것도 이 무렵이다. 차량이 없는 지상에는 각종 테마공원이 등장했고 자투리 공간에는 나무와 꽃들이 심어졌다.
아파트 조경 공법이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현재 앞서 예로 들었던 ‘신도림 4차 e-편한세상’과 ‘성남 금광 래미안’ 등 아파트 조경의 이정표를 보여 준 단지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특히 경기도 용인 수지에서 삼성과 GS 등 대형 건설사들이 공급한 아파트 단지는 주변 야산과 연계해 단지 주변으로 산책로를 조성하고 나무들도 주변 산에 있는 종류를 선택해 심는 등 자연과 생태 개념을 중시했다. 또 단순한 녹지 조성이 아니라 입체적인 느낌을 주는 공원을 만들어 아파트의 가치를 높였다. 다양한 테마로 공원을 만들고 수변공간을 조성하는가 하면 옥상 정원까지 조성해 입주민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했다.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는 조경 시설
최근에는 단지 내 정원이 더욱 넓은 광장으로 바뀌는 추세다. 준공한지 1년이 조금 넘은 동탄신도시의 ‘예당마을 우미 린 제일풍경채’는 중앙광장을 만들기 위해 건물이 들어설 자리까지 포기했다. 2개 동 건물에서 나오는 분양 수입을 포기하고 대규모 중앙광장을 조성한 것이다. 그 결과 국제규격 축구장 2개 크기의 광장 정원이 생겼고 단지 전체 부지에서 조경이 차지하는 면적 비율도 53%에 달했다. 조경 공간이 부지 전체 면적의 절반을 넘어선 것이다. 넓은 중앙광장에는 수령 50년 이상인 우람한 소나무와 각종 꽃, 실개천 등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를 위해 시공사가 투입한 돈만 100억 원이 훨씬 넘는다. 이 아파트의 널찍한 중앙광장은 조경이 아파트 단지를 건립할 때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되고 있다.
“넌 몇 동에 사니?” “난 파란 동에 살아.” 경기도 김포시 고촌동의 ‘김포 고촌 힐스테이트’에서는 이렇게 엉뚱한 대화를 듣기 일쑤다. 아이들은 동호수 대신 아파트 외벽에 칠한 색깔을 기억해 대답하고는, “이따 초록 동 앞에서 만나!”하고 총총 사라진다. 아파트 10여 층 높이 벽면은 연한 갈색, 5층은 진한 주황색, 3층은 자주색으로 칠해 색깔이 서서히 번져가는 효과를 낸 탓이다. 동마다 빨간색, 파란색, 녹색 등이 점점이 번져가는 이 아파트를 아이들은 ‘무지개아파트’라고 부른다. 현대건설은 프랑스의 색채디자이너 필립 랑클로(Philippe Lenclos)를 초빙해 ‘통합색채 디자인’을 적용했고, 그 결과 기존의 상아색이나 회색 일색이던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아파트에 색을 입히다
1 김포 고촌 힐스테이트 2 이촌 센트레빌 3 파주 1차 힐스테이스
한편 ‘파주1차 힐스테이트’는 아파트 외벽에 나무기둥을 연상시키는 패턴을 넣었다. 아파트 벽면에 색 좀 칠한 것이 뭐가 대수인가 싶지만 1958년 우리나라 첫 아파트인 종암아파트부터 지금까지 아파트에 색을 입힌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대부분 눈에 잘 띄지 않고, 깔끔해 보인다는 이유로 무난한 색을 고집했고 초기 아파트는 별다른 페인트를 칠하지 않은 채 마감하기도 했다. 비를 막아주고 더위를 식혀주는 아파트의 기능적인 측면만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더 따뜻하고 여름에는 더 시원한 집을 지으려는 노력은 아파트 디자인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직육면체 모양으로 앞쪽에는 발코니, 뒷쪽에는 부엌창과 현관문이 달린 판상형 아파트가 1950년대부터 꾸준히 지어지는 이유다. 판상형 아파트는 한 개 동에서 모든 가구가 같은 향을 바라보게 된다. 모든 가구를 한국인이 선호하는 남향 또는 남동향으로 낼 수 있는 구조다. 아파트 주동도 역시 앞 동이 뒷 동을 가리지 않을 만한 넓이, 지상 주차장을 설치할 수 있는 넓이로 일정하게 배치했다. 효율을 극대화한 아파트는 그대로 ‘병영’이 됐다.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아파트처럼 동이 나란하거나, 송파구 잠실주공아파트처럼 몇 개 동씩 모여있는 형태다. [아파트 공화국](후마니타스, 2007)에는 반포 주공아파트의 전경을 본 외국의 도시계획가가 그 아파트를 군사기지로 착각해 “한강변 군사기지 규모가 대단하다”며 놀랐다는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다른 단지와 차별화된,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아파트가 필요하게 된 것은 1988년 올림픽을 치르면서부터다. 최고 층수를 모두 같게 했던 다른 아파트와 달리 8,12,14층 등 높이를 달리해 아파트 내 스카이라인을 고려하거나(아시아선수촌) 건물을 원형 아치모양으로 배치해 위에서 보면 부채를 활짝 편 것 같은 효과를 낸(올림픽선수촌) 특성화 아파트가 등장한 것이다. 동 배치와 탑상형, 타워형 등 주동 모양은 이전보다 자유로워졌지만 아파트의 기본 형태는 아직 판상형에 머물러 있다. 건축비를 일반 아파트보다 높게 책정할 수 있는 주상복합 아파트와는 달리 일반 아파트에서는 특이한 디자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점점 다양해지는 시도들
최근에는 인천 청라지구에서 분양한 ‘한일베라체’가 일반 아파트로는 최초로 건축가 설계를 적용해 눈길을 끌었다. 건축가 조병수씨가 설계한 이 아파트는 가구마다 발코니 창의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밖에서 보면 지그재그로 창이 움직이는 듯한 모양새다. 아파트 벽면에도 곡선을 도입해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했다. 한강변 아파트 중 특이한 디자인으로는 동부건설이 지은 ‘이촌 동부센트레빌’이 꼽힌다. 이촌 동부센트레빌은 국내 최초로 아파트를 커튼월(건물의 무게는 지탱하지 않고 비바람이나 소음을 차단하는 커튼 역할을 하는 바깥벽) 방식으로 시공했다. 오피스 빌딩에 주로 사용하는 커튼월로 푸른 유리를 갖다 대어 한강과 어우러지는 느낌을 냈다. 종이를 접어놓은 듯한 올록볼록한 외관에 가운데 구멍을 뚫어 바람길을 만들기도 했다. 뒷 동 입주자들도 한강조망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한 고육지책이었다. 서울시는 지난 9월 공동주택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성냥갑 아파트를 이제 더 이상 짓기 어려울 것” 이라고 말했다. 획일적이거나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는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다. 앞으로는 아파트를 성냥갑이나 병풍에 빗대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전남 목포시 옥암동 ‘옥암 푸르지오’ 단지에 들어서면 아파트 지붕마다 붙은 검푸른 판넬이 먼저 눈에 띈다. 바닷가나 갯벌을 메운 평지에서나 봤던 태양광 발전 모듈이다. 지붕마다 붙은 682장의 모듈은 하루 최대 600kW의 전력을 만든다. 단지 내 엘리베이터 8~10대는 지붕에서 나오는 전기로 운영하는 셈이다. 7월부터 새 주인을 받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 단지는 비가 와도 심하게 질척거리지 않는다. 빗물을 모으는 집수시설이 있어 흘러 내려가는 물이 적기 때문이다. 2,444가구나 되는 대단지라 단지 곳곳에서 모으는 빗물만 해도 꽤 된다. 최대 3177t의 빗물을 한꺼번에 모아 화단에 물을 주고, 단지를 청소한다.
에너지를 잡아라
1 용인 동백지구의 제로 에너지 시범주택 그린 투모로우
2 태양광 발전시스템을 도입한 목포 옥암 푸르지오
‘미래’의 신재생 에너지로 각광받던 태양빛, 바람, 지열은 일상생활 속으로 쑥 들어왔다. 이제는 태양열을 ‘미래 에너지’라고 부르기도 약간 쑥스럽다. 새로 짓는 아파트에는 태양광 발전판을 부착한 가로등 한 두 개는 꼭 있다. 빗물을 모으는 장치도 따로 마련, 버리는 물도 알뜰살뜰 재활용한다. 하지만,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었던 아파트가 ‘뭔가를 만들어내고 재활용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인 건 그리 오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붕에 태양광 발전판을 달았다는 목포 옥암 푸르지오는 2007년 3월 입주해 채 2년이 되지 않았다. 이렇듯 태양열 발전 시스템은 아파트에 친환경 개념이 접목되면서 제일 먼저 도입된 것이다. 지하주차장에 햇빛이 많이 들게 설계하거나, 잠망경처럼 빛을 모아 지하공간을 밝히는 방법도 많이 사용됐다. 최근에는 좀 더 적극적인 방식의 친환경 아파트가 등장하고 있다. 집 자체가 에너지를 덜 쓰게끔 만든 아파트다. 집에서 새 나가는 열은 최대한 줄이고, 외부환경에서 받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일종의 아이스박스를 만드는 셈이다. 에너지 낭비를 줄이고, 필요한 에너지 중 일부는 재생에너지로 보충한다. 작년 4월 분양해 공사중인 울산 ‘유곡 e-편한세상’은 기존 아파트보다 관리비가 30% 가량 적게 드는 에너지 절감형 아파트다. 신소재 단열재와 고성능 콘덴싱보일러, 2중 유리보다 단열이 더 뛰어난 3중 유리를 적용한다. 실내 조명기구도 일반전구 대신 고효율램프를 사용한다.
친환경아파트의 목적지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집’이다. 석탄 연료를 쓰지 않고도 아파트에 필요한 에너지를 조달하는 것이 최종목표. ‘제로 에미션(zero emission)하우스’ 또는 ‘제로 에너지하우스’로 변신하기 위해 아파트는 옷을 껴입거나(외단열: 외부 벽체를 덧붙여 단열효과를 높이는 방법), 바람 구멍을 틀어막는다(슈퍼 창호: 기존 유리 사이에 진공상태를 유지하거나 유리를 더 붙여 기온차를 줄인 유리). 1년 내내 연평균 기온을 유지하는 지열을 이용해 차가운 공기를 한번 덥혀(지중덕트) 집으로 들여보내기도 한다.
점점 가까워지는 친환경 아파트
환경에 부담을 덜 지우는 친환경 건축이 화두로 떠오르자 각 건설사에서는 앞다투어 미래주택을 선보이고 있다. 각 사가 보유한 최신 기술을 자랑하는 일종의 ‘컨셉트 주택’이다. 대림산업은 등유 3리터로 냉난방을 하는 에너지자립형 주택 ‘에코-3L하우스’를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지었다. 지금 108㎡(공급면적 33평) 아파트를 냉난방 하는 데 연간 16~20리터의 등유(난방용 연료)가 필요하지만, 에코-3L하우스는 3리터만으로도 충분하다. 에너지 소비를 최대 85%까지 줄인 친환경주택이다. 삼성물산은 제로에너지시범주택인 ‘그린 투모로우’를 용인 동백지구에서 선보였다. 자연의 빛과 열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정남향으로 짓고, 빛이 잘 안드는 화장실 등에는 반사 빛으로 내부를 비추는 ‘광 덕트’를 설치했다. 연간 21MWh의 전기를 만드는 지붕형 태양광발전, 창문에 블라인드처럼 드리운 블라인드형 태양광발전 등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친환경주택에서는 가구도 폐목재를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나무 등 금방 자라는 식물을 주로 사용해 환경 부담을 줄인다. 기술적으로는 에너지를 쓰지 않는 주택을 지을 수 있지만, 문제는 역시 건축비다. 이런 친환경주택을 지으려면 현재 건축비보다 40% 이상이 더 들기 때문이다.
아직은 상용화 단계가 아니지만, 앞으로는 친환경아파트가 아니면 집을 짓기 어렵게 될 예정이다. 국토해양부는 지난 5일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해 ‘녹색도시.건축물 활성화방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주거용 건물은 2012년까지 연간 에너지 소비량을 현 수준 대비 30%(냉난방에너지는 50%)줄이고, 2017년부터는 에너지 소비를 60% 이상 줄인 ‘패시브 하우스’ 수준의 성능을 확보해야 한다. 겨울마다 ‘아파트 관리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왔지?’하는 불평은 점점 줄어들겠다.
과연 아파트와 한옥을 결합할 수 있을까? 층고를 높이고 내부에 툇마루와 중앙정원을 설치하고 한지로 창과 문을 만들면 비록 겉은 아파트지만 안에 사는 사람은 마치 한옥에 사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한옥에 사용하는 나무와 황토를 사용하고 거실을 대청 마루로 바꾼 뒤 안방과 문간방을 만들면 더욱 완벽하게 한옥의 조건을 갖추게 되는데, 이런 설계와 디자인을 아파트에도 실현시킬 수 있을까? 이런 의문과 관련해 올해 1월 구(舊) 대한주택공사(지난 10월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가 통합돼 한국토지주택공사로 바뀌었음)는 의미 있는 자료를 발표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韓)-스타일 육성 정책’에 따라 개발한 한옥 아파트의 모습을 전격 공개한 것이다. 만약 이 프로젝트가 실현된다면 우리나라 아파트 문화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한-스타일 육성 정책’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옥 외에 한글과 한식, 한복, 한옥, 한지, 한국음악 등 6가지 대표 상품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프로젝트다.
1 한옥 아파트 주동 디자인
2 한옥 아파트 주거동 저층부
이날 발표된 한옥 아파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소를 담고 있다. 여러 부문에서 한옥과 아파트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한옥 아파트 마을을 구현하고 전통적인 옥외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을 비롯해 주거동의 기단부와 외벽, 단위 세대의 평면과 인테리어, 부대시설에 한옥의 특성을 접목했다. 우선 전통 한옥 마을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건물 외관을 한옥과 유사한 모양으로 설계했다. 각 세대의 발코니를 앞마당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하고 모든 건물 옥상을 기와지붕으로 덮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기와 집들이 옆으로 즐비하게 붙어 있는 전통 한옥 마을의 모습을 연출한다. 아파트 각 동의 하단부는 한옥 대문의 디자인을 모방하고 있으며 문주 역시 한옥 스타일을 따랐다. 한옥 아파트인 만큼 옥외 시설물로 열주와 전통적인 모양의 담장 등을 설치하고 단지에는 한옥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골목길과 공터를 조성해 놓았다. 단지 내 바닥도 밋밋한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이 아니다.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어 한옥 마을의 푸근한 느낌을 전달한다. 주거동의 외벽 역시 사괴석과 전통 벽돌을 사용해 한옥 마을을 재연해 놓은 모습이다. 노인과 마을 어른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사모정(네모 반듯한 정자)을 비롯해 전통 놀이시설 등도 단지 안에 들어선다. 외관 측면에서 건물 규모가 훨씬 크다는 점 외에 한옥과 다른 점이 별로 없는 셈이다.
1 한옥 마을 조감도
2 실내로 들어온 누마루
하지만 한옥 아파트의 매력은 단지 외부보다는 내부에 있다. 일반 아파트와 달리 내부를 나무, 황토와 같은 자연 친화적 자재를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거실과 발코니 공간에 마당 개념을 도입했다. 또 사랑방과 대청 마루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고 문과 창문 등에 전통 문양을 넣었다. 화장실이 멀고 부엌과 거실이 분리되어 불편한 한옥의 단점들은 발전적으로 극복된다. 주택공사 관계자는 “우아하고 넉넉하며 환경친화적인 한옥의 장점을 살리면서 생활의 편리함이 강점인 아파트의 이점도 취하는 것이 한옥 아파트 설계의 목적”이라며 “한옥과 아파트의 발전적인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주거 문화의 진화라고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주택공사는 경기도 시흥 목감 택지개발지구 B-1블록에 11~20층 고층형 722가구의 한옥 아파트 시범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지난해 사업 승인을 받았으며 올해 말까지 기본설계를 끝내고 내년 상반기 실시 설계에 이어 하반기 착공에 들어간다. 이와 함께 전주시 덕진구 만성동 400번지 일대에는 저층형 한옥 공동주택 마을을 조성하기로 했다.
한옥 아파트가 풀어야 할 과제
그러나 한옥 아파트가 보편적인 공동 주택 단지로 자리 잡으려면 상당 기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걸림돌은 경제적인 문제다. 일반 아파트를 건설할 때에 비해 최소 10%, 최대 50% 이상 건축 비용이 높아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건설업체가 일방적으로 짓는 방식이 아니라 수요자의 요구에 따른 주문 제작이면 건축비가 2배 이상 들어갈 수도 있다. 건설사가 일괄 시공한다 해도 다양한 평면과 디자인을 설계해야 하기 때문에 싼값에 공급하기는 불가능하다. 관리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통 정자나 담장은 기존 아파트 단지 내 시설에 비해 원형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런 시설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관리비가 들어갈 것이고 이는 입주민들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한옥 아파트에 대한 개념도 아직 확실하게 정립돼 있지 않은 상태다. 주택공사에서 내놓은 청사진이 그럴 듯하지만, 실행 과정에서 이런저런 문제점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개념과 설계를 바꾸다 보면 한옥 고유의 특성이 결국 희석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옥 아파트는 천편일률적인 우리나라 공동주택 문화에 일대 혁신을 줄 수 있는 방안으로 꼽힌다. 예상되는 문제점을 감안해 좀 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대응해 나간다면, 한옥은 우리 조상들에게는 생소했던 아파트와 결합해 한국인의 주거공간으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