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화려한 벚꽃뒤엔…일본 ''검은 속셈'' 있었나
본지, 60년대이후 묘목기증 명단입수…일본인 조직적 개입
전문가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문화적 침략''"비판
당시 이같은 벚꽃 심기는 반일감정을 자극하며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확인돼 해방 20여년만에 벚꽃 심기가 다시 국민정서를 무시한 채 추진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남 진해 벚꽃의 ‘부활’, 국회를 감싸고 있는 여의도 벚꽃길, 일제시대 호남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가던 ‘수탈의 길’, 전군가도(전주∼군산 26번 국도)의 벚꽃길 등 상당수 국내 대단위 벚꽃 나무들이 이렇게 심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묘목을 기증했던 재일교포, 담당 공무원, 향토사학자들의 증언과 취재팀이 재일교포의 친지에게서 단독 입수한 관련 자료 등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 전라북도,진해시,군산지,전주시 등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산하 기관엔 관련 기록이 전무했다.
이에 따라 ‘교묘한 문화 침투’라는 지적과 함께 이들, 특히 일본인들이 왜 한국의 벚꽃 심기에 발벗고 나섰는지 그 배경과 의도에 ‘역사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벚꽃 심기가 추진될 당시 국내에선 벚꽃 묘목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게 당시 실무자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벚꽃이 곳곳에서 베어져나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취재팀이 입수한 당시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의 묘목 기증 명단과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76) 회장의 기록에 따르면 1966년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벚꽃 묘목 약 6만그루를 진해시에 기증했다. 여기엔 재일교포 10명과 일본의 중견 언론인, 식물학자, 관광회사 간부 등 일본인 15명, 전자회사 후지쯔(富士通), 동경항공 등 9개 일본 기업이 협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기증을 주도했던 재일교포 문태일(76· 일본 사이타마현 거주)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왜 원수의 나라 국화를 기증하느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증오심만 갖고는 한일 관계에 미래는 없다는 생각에 기증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문씨는 당시 일본 NHK에서 대한방송 뉴스 진행을 맡고 있었다. 문씨는 일본인과 일본기업의 협찬에 대해 “친분이 있는 언론인과 기업에 협조를 요청했으며 이름만 빌려줬을 뿐 실제 돈을 낸 사람은 몇 안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문씨의 형 문시정(84·진해)씨는 “관광객 유치가 목적이었는데 일본인들이 기증에 나선 것은 진해가 러일전쟁 전승지인 것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벚꽃 묘목 기증이 이뤄질 당시 진해시는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와 자매결연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고시마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일본의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해군 대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의 고향이다.
1970년대 초·중반 국회 뒷길에 심어진 벚꽃 묘목과 전군가도에 심어진 벚꽃 나무도 전부 또는 일부를 재일교포가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군산 월명공원의 벚나무 200그루는 일본 로터리 클럽이 기증한 것이란 증언이 나왔다. 군산시청 김중규 학예사(39)는 “전쟁후 일본인들은 과거 자기들의 식민지였던 지역에 자매결연이든 기술협약이든 인연이 닿게 되면 맨 처음 하는 일이 벚나무 기증이었다”며 “월명공원의 벚나무도 그렇게 기증된 것이란 얘기를 당시 군산에서 로터리 클럽 활동을 했던 분(사망)에게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문화적 침략’”이라며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일본이 한반도내에서 자신들의 과거 (침략자로서의) 문화적 향수를 구현하기 위한 욕심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벚꽃의 비밀…일본, 겉으론 친선 속으론 "식민지배 그리워"
대체로 재일교포의 묘목 기증 동기엔 그들 스스로 “고향 발전에 기여하고 싶었다”고 말하듯 애향심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증오심만 갖고 한일관계에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기증하게 됐다”(재일교포 문태일씨)거나 “일본 군국주의의 쓰라린 기억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보낸 것으로 전해들었다”(군산 향토사학자 김양규씨)는 증언 처럼 나름의 역사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씨는 “일본인들도 이런 뜻에 공감해 협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라고 볼 만한 뚜렷한 근거는 없다. 정녕 그런 뜻이었다면 사과와 반성의 표현이 기록으로 남아있어야 할텐데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일부는 조선을 지배하던 군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한 흔적을 남겨 진의를 의심케 한다.
#재일교포의 애향심
“일본은 벚꽃을 국화로 삼고 있으며 따라서 벚꽃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한국인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지대합니다. 그러므로 진해를 벚꽃의 세계적인 고장으로 정비해 일본인 관광객의 한국유치의 단서를 마련하는 의미에서의 진해 벚꽃의 가치는 막중하다 아니할 수 없읍니다.”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가 작성한 벚꽃 묘목 기증·협찬자 명단 앞머리엔 이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이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공식적인 기증 취지다. 이같은 상업적 목적 외에 문태일씨는 “미래지향적으로 한일 관계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고향 발전에도 기여하고 한일 관계도 개선하자’는 취지였다”는 얘기다.
다른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시 기획관리실장이었던 손정목(78) 서울시립대 명예 교수는 “1971년 봄 재일교포 한 분이 애국심으로 벚꽃 묘목 2400그루를 서울시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시 녹지과장이었던 허형식씨(75)는 “60대 재일교포로만 기억하고 있으며 무슨 이유로 기증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국내엔 벚꽃 묘목을 생산하는데가 없어 고맙게 받았다”고 회고했다. 전군가도 벚꽃 기증에 대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은 “1975년 전군가도 확장 당시 재일본 관동지구 전북인회 회원 2000여명이 700만원을 기증해 국가 및 시·군·도 예산 총 3500만원을 더해 6400여 그루를 심었다”고 말했다.
벚꽃 기증에 나선 재일교포들은 사업가나 언론인 등이었으며 드물게 범죄조직에 몸담은 이도 있었다는 증언이다. 문씨의 경우 NHK에서 대한방송 뉴스 진행을 맡고, 영어회화 학원을 운영한 성공한 교포였다. 문씨는 “1976년 1만그루를 기증하라며 100만엔을 내놓은 방모씨는 진해 출신으로 일본 어느 지방의 야쿠자(일본의 전통적 범죄집단) ‘오야붕’(親分·두목)이었는데 아주 점잖고 멋진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일본인, 왜 발벗고 나섰나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가 작성한 기증자 문건은 “일본인 유지 및 기업의 자청적(自請的)인 협찬이 있었다는 것을 명기해 두고자 한다”며 해당 기업과 협찬자 명단을 소개했다. 협찬자로는 히가시 노부오(東信夫· 사망· 당시 50대) AP통신 동경지국장, 구니미쯔 가즈시게(邦光一成·사망· 당시 40대후반) NHK프로듀서 등 중견 언론인 7명, 식물학자 나카무라 쯔네오(中村常男), 묘목업자 우다가와 다케오(宇田川猛夫), 요미우리 신문 기자 출신의 관광회사 간부, 마수다 유키히코(增田幸彦·70) 등 모두 15명이 기록돼 있다. 협찬기업으로는 후지쯔(富士通)주식회사, 동경항공, 일본콘살턴트협회 등 9개 기업·단체가 기록돼 있다.
문건에서는 이들의 ‘자청적 협찬’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제발로 협찬에 나섰다는 얘기다. 그러나 문씨의 설명은 다르다. 그는 “냉소적인 고향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해 친분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협조를 요청해 대부분 이름만 빌렸을 뿐이며 실제 돈을 낸 사람은 히가시 노부오를 비롯해 서너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문씨에 따르면 히가시 노부오는 1940년대에 징집돼 만주에서 종군기자로 복무하다 일본 패망과 함께 소련군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경력이 있다. 이에 대해 문씨는 “캐나다에서 유학한 히가시 노부오는 종군기자를 하면서도 만주에서 조선독립군을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줬다고 했다”고 말했다. 문씨는 또 “벚꽃 기증에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마수다 유키히코도 ‘추악한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씨에 따르면 그는 요즘도 벚꽃철이면 “흘러간 꿈과 우정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며 문씨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대부분 이름만 빌렸으며 같은 생각이었다는 문씨의 말과는 달리 몇몇 일본인들은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생각도 달랐던 것 같다. 문씨의 형 문시정(84·진해)씨에 따르면 식물학자 나카무라 쯔네오, 묘목업자 우다가와 다케오, 관광회사 간부 마수다 유키히코는 수차례 진해를 방문해 비료를 주는 등 정성을 쏟았다. 마수다 유키히코는 처음 보낸 1만그루가 대부분 죽자 진해를 방문해 풍토 조사를 했고 우다가와 다케오는 벚나무가 병충해를 입지 않도록 약을 가져다 뿌리기도 했다.
이들은 진해시가 자기들이 기증한 묘목을 잘 키우지 못하는데 대해 불만을 나타냈고 이에 문태일씨가 김중도 진해시장과 심하게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문태일씨는 “기증한 나무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 ‘이런 시장은 잘라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 다음날 진해로 가 따졌다”고 회고했다.
특히 마수다 유키히코는 진해 제왕산 꼭대기에 있던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인 ‘일본해해전기념탑’이 철거된 데 대해 “그대로 보존했으면 일본 사람들이 많이 찾을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문시정씨는 전했다. 이 전승기념탑은 이승만 정권 시절 진해 별장을 찾은 이 대통령이 “저걸 왜 그냥 두나”고 한마디한 뒤 바로 철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시정씨는 또 기증 재원에 대해 “그 당시 재일교포가 그리 큰 돈이 어디 있나. 돈은 일본 사람들이 거의 댔다”고 했다가 “(일본 사람이 댄 돈은 얼마 안된다는)동생말이 맞을 것”이라고 번복했다. 문태일씨에 따르면 당시 1만그루를 사서 비행기로 나르는 데 드는 비용은 150만엔 정도로 당시 NHK 초임(1만4000엔) 기준으로 거의 10년치 월급이다.
#무시된 국민정서
1960년대 중반 벚꽃 심기 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논거는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라는 학설이었다. 이는 1962년 박만규, 부종유 두 식물학자가 수차례 한라산을 답사해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하고 발표한 연구결과였다.
하지만 이같은 연구결과가 발표되고도 벚꽃이 일본의 나라꽃이라는 인식은 여전했고 이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 벚꽃 심기 운동에 비판 여론이 형성됐다. 문태일씨는 “‘왜 일본놈 돈을 받느냐’‘왜 일본 나라꽃을 기증하느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병훈(82) 전 군산문화원장은 “전군가도의 경우 70년대초 재일교포의 기증으로 벚꽃길이 조성될 당시 상당한 반대가 있었는데도 당시 도청 등이 일사천리로 기존 가로수를 베어버리고 벚꽃으로 바꿔버렸다”고 회고했다. 향토사학자 김양규씨도 “일제가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것이 전군가도이며, 당시 재일교포가 기증하는 벚꽃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시 녹지과장이었던 허형식씨도 “왜 국회 주변에 일본 나라꽃을 심느냐는 언론의 비판이 있었지만 원산지설로 돌파했다”고 말했다. 당시 비판여론에 대해 박상진 전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는 “벚꽃이 일본을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로 이해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판여론이 잠잠해진 데는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진해 사람들은 당시 박 대통령이 “진해를 세계적인 벚꽃 도시로 가꾸라”고 지시한 것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문태일씨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문씨는 “박 대통령이 진해 별장에 들렀을 때 진해시장이 벚꽃 심기 계획을 보고하자 박 대통령이 ‘좋은 생각’이라며 정부 예산을 배정해줬다 ”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벚꽃 심기를 지시했다는 증언도 있다. 허형식씨는 “서울 강변북로엔 박 대통령의 지시로 벚꽃을 많이 심었는데 병충해로 많이 죽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벚꽃, 일본 우경화 ''먹잇감''으로어린시절 벚꽃 추억→군국주의 수용 자연스레 문화침투로 악용 가능성
“일본의 한 보수 신문에서 몇 년 전 한국 벚꽃 특집기사를 실었지요. 어느 여류 소설가가 썼는데 제대로 취재하지도 않고 모두 일본인들이 심은 것처럼 썼기에 항의를 하려다 말았습니다.” 벚꽃 묘목 기증에 앞장섰던 재일교포 문태일(76)씨가 밝힌 이 사례는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 속에서 한국의 벚꽃이 악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 증거다. 문씨는 “한일 관계 개선의 취지로 벚꽃 묘목을 기증했는데, 독도 문제며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과거 역사를 잘 알지도 못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는 회피하는 요즘 일본 사람들을 보면서 애가 탈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벚꽃 기증은 결국 문화 침투”라며 “일본 우파들이 ‘한국이 일본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애당초 벚꽃 문화는 일제 때 우리 민족문화 말살에 이용된 상징인데도 사과 한 번 없이 벚꽃을 기증한 것 자체가 본말이 뒤바뀐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린 시절 창경궁(일제 때 창경원으로 불림)에 벚꽃 구경을 갔던 사람들은 이를 일본 군국주의 문화로 인식하지 않고 어린 시절 추억으로 간직하지요. 추억이 뒤섞이면서 군국주의 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는거죠.” 박 실장은 문화 침투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이유로 봄이면 전국 곳곳에서 떠들썩하게 벌어지는 벚꽃 축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적잖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벚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은 좋지만 전국 각지에서 야단법석을 떤다면 스스로 우월감을 갖고 있는 일본 보수층이나 지식층이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의 자존심이나 정체성은 뭐가 되겠냐”고 개탄했다. 요란한 벚꽃 축제가 문화적 침탈을 정당화해주는 꼴이란 지적이다.
벚꽃 축제가 지역 연례행사로 자리잡은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은 “조성 당시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했지만 늦었다”면서 “지금은 민족감정을 앞세우기보다는 특색 있는 관광축제로 지역경제 활성화와 여가 차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진 전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는 “제주도 원산지설은 식물학적 가치는 클지라도 문화적 측면에서는 의미를 부여할 당위성을 찾기 어렵다”며 “조금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나라꽃을 전통 문화 유적지에까지 심는 것은 당장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벚꽃의 악연…화려한 꽃길 그뒤엔 부끄러운 역사가
진해의 경우 러일전쟁(1904년 2월∼1905년 9월) 전승지인 것과 관련이 깊다. 러일전쟁 승리에 환호하던 일본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은 대를 이어 벚꽃 심기에 참여한 데서도 감지된다.
여의도 국회뒷길에 벚꽃이 심어지진 과정에도 청산되지 못한 식민 역사가 녹아 있다. 미국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벚꽃을 흉내낸 것이나, ‘윤중로(輪中路)’라는 일본어가 오랜 세월 사용돼 온 것은 ‘청산되지 않은 부끄러운 역사’를 상징한다.
러일전쟁과 진해의 인연 |
러일전쟁 승전 기념으로 일본군이 경남 진해 제왕산 꼭대기에 세운 ‘일본해해전기념탑’. 1929년 5월29일 준공됐으며, 광복 후 이승만 정권 때 철거됐다. 높이 121척(36m)에 원형으로 건립됐으며 진해 토박이인 문시정(84)씨에 따르면 일본 히로시마에서 실어온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준공 기념으로 스모 대회를 열고 있는 일본군의 모습(왼쪽 사진). 사진 제공=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 |
일본인들이 진해 ‘벚꽃 부활’에 정성을 쏟은 것은 러일전쟁의 전승지인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자기 나라의 몇 십배나 되는 나라를 이겼으니 얼마나 큰 자랑거리였겠어요. ” 당시 일본군은 섬이 많은 진해 앞바다에 함대를 숨겨 놓았다고 한다. 문시정씨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고향인 가고시마(鹿兒島) 사람들이 특히 벚꽃과 전승탑을 보러 많이들 왔었다”고 말했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무찔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 대장이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는 포츠머스 강화회담과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거의 빼앗기고 망국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일본은 1910년 한일합병 후 전승지인 진해에 해군기지를 만들고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사실상의 일본 국화 벚꽃을 심음으로써 진해는 세계적인 벚꽃 도시로 변모했다.
진해와 도고의 인연은 벚꽃 기증 운동과 함께 진해·가고시마 자매결연 움직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문태일씨에 따르면 벚꽃 기증 운동이 벌어질 즈음 이선철 진해시장은 가고시마를 방문해 자매결연을 약속하고 귀국했으나 진주시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중단됐다.
가쓰라태프트밀약과 여의도국회
국회뒷길에 벚꽃이 심어지게 된 과정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국이 일본 조선 지배를 승인한 가쓰라태프트밀약과 관련이 있는 미국 워싱턴 DC 의 벚꽃을 흉내냈기 때문이다. 서울시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손정목(78)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재일교포가 기증한 꽃을 어디에 심을까 고민하다 미국 워싱턴 DC 포토맥 강변의 벚꽃처럼 여의도 윤중제에 심을 것을 제안했다”고 회고했다.
워싱턴에 벚꽃이 처음 등장한 것은 27대 윌리엄 H 태프트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12년. 일본 도쿄가 워싱턴에 벚나무 3000그루를 기증한 것이 계기였다.
그런데 태프트가 누구인가. 1905년 미국 특사 자격으로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만나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승인한 장본인이다. 대한민국 국회 주변의 조경이 조선 지배를 승인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이 담겨 있는 선물로 꾸며진 워싱턴 벚꽃길을 흉내낸 셈이다.
오랜 세월 난해한 윤중제(輪中堤), 윤중로라는 단어가 계속 쓰여온 것도 마찬가지다. 명지대 일문학과 최경국 교수는 “윤중제라는 말은 ‘와주테이’의 한자어를 우리말로 읽은 것으로, ‘취락과 농지를 홍수로부터 지키기 위해 주위 제방을 둥글게 쌓아올린 지역’을 뜻하며, 일본 에도(江戶·1603∼1867년) 시대에 발달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서울 영등포구청 문화체육과 김광태 팀장은 “일본말이라는 지적에 따라 지금은 공식 명칭을 ‘여의도서로’ 또는 ‘국회뒷길’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벗꽃의 비밀''…일본 ''낙화의 미학'' 희생으로 조작 ''메이지'' 이후 군국주의자들 변용…가미카제대원 사쿠라 꽂고 출정
같은 훈련소의 연병장에 피어
한번 핀 꽃이라면 지는 것을 각오했다
멋지게 지자꾸나, 나라를 위해
(중략)
너와 나는 동기 사쿠라
서로가 멀리 떨어져 진다고 해도
사쿠라의 수도 야스쿠니 신사
봄 가지에 피어 다시 만나자.
―1938년 작곡된 일본 군가 ‘동기(同期)의 사쿠라’ 중에서
군가 ‘동기의 사쿠라’에서 보듯, 벚꽃은 ‘죽음’과 ‘산화(散華)’를 떠올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사쿠라(벚꽃)는 또 사무라이(무사계급의 구성원)가 활보하던 시절 ‘할복’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 속에서 벚꽃은 곧 절대 충성과 희생이라는 ‘일본의 정신’이었다. 이 때문에 공식 국화는 아니라고 하지만, 벚꽃은 사실상 일본의 ‘나라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본문화원 스기야마 도모쓰구 공보담당관은 “사쿠라를 국화로 지정한 법은 없지만, 일본인들은 관습적으로 사쿠라를 나라꽃으로 여기고 있다”고 밝혔다.
태평양전쟁(1941∼45년) 당시 미군 함대에 전투기를 몰고 투신했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들은 가슴과 어깨에 벚꽃 가지를 꽂고 임무를 수행했다. 어린 여학생들은 벚꽃 가지를 흔들어 사지로 향하는 이들을 배웅하며 용감무쌍함을 예찬했다. 1870년에서 1943년 사이 일본군 휘장에 꽃과 잎, 가지가 주요 모티브로 사용될 정도로 벚꽃은 일왕과 국가를 위한 희생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대표적 상징물이었다.
본래부터 벚꽃에 이런 군국주의의 이미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만났던 님 그리워하네 벚꽃 그리워 마중 나왔음에”(만요 8권), “다유라키 산봉우리 드높이 벚꽃 피는 봄이면 그대 더더욱 그리워지네”(만요 9권), “봄 안개 자욱한 미카사 산에 달님 나왔네, 사키산 피는 벚꽃 보고 싶어라.”(만요 10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집인 만요슈(萬葉集)에 실린 작품에는 꽃의 아름다움과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운 정서만이 배어 있을 뿐이다. 명지대 최경국 교수(일어일문학)는 “일본 고전문학에서 벚꽃은 일본인에게 친근한 꽃이자 단지 감상의 대상이었고, 눈(雪)과 가장 많이 비유됐다”고 말했다.
헤이안 시대(794∼1185년) 이후 일본에서는 꽃이라고 하면 벚꽃을 지칭하게 됐고, 현대적인 ‘벚꽃놀이’(花見:하나미)와 관련된 문학작품도 많아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벚꽃은 아름다운 ‘꽃’ 그 자체에 머물러 있었다.
◇가미카제 특공대 출격 때 사쿠라 가지를 흔들며 전송하는 일본 고등여학교 학생들(1945년 4월).
사진:출판사 모멘토(‘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출간) 제공
그러나 ‘꽃’으로서의 사쿠라는 일왕 친정 형태의 통일국가가 형성된 근대 일본의 정치·사회적 변혁인 메이지유신(1868) 이후 서서히 변용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용의 한가운데에는 군국주의자들의 상징 조작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군국주의자들이 벌인 벚꽃의 이미지 변용은 “꽃은 벚꽃이요, 사람은 무사”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주저함 없이 순간적으로 지는 아름다움으로, 주군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쪽으로 모아졌다.
광운대 이향철 교수(일본학)는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예로부터 일본인들에게 친근한 꽃이었던 벚꽃에 부국강병과 대외 침략의 희생을 미화하기 위한 대대적인 이미지 조작이 가해졌다”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활짝 피었다가 순식간에 지는 벚꽃에 담긴 ‘낙화의 미학’을 확대 재생산하기 시작했고, 2차대전에서는 전사(戰死)를 미화하려는 유력한 상징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당시 아시아 여러 민족에게 가슴 아픈 기억이 돼 버린 벚꽃은 현대를 살아가는 상당수 일본인들에게 감상하는 ‘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 교수는 “일본 국민에게 벚꽃은 그냥 아름답기 때문에 즐기는 꽃일 뿐”이라며 “과거의 군국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배제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군국주의의 이미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교수는 “군국주의의 상징물로 악용된 벚꽃의 이미지를 잊은 채 꽃놀이를 즐기는 일본인들에게는 문화적으로 청산되지 않은 벚꽃에 대한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집권 이후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벚꽃 붐이 다시 일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때”라고 말했다.
실용적으로 이용한 한국
한국인들에게도 벚꽃 구경은 이제 자연스런 문화다. 하지만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제가 을사조약 이후 ‘사쿠라’를 서울 도심부터 전국으로 심어 정서의 일본화를 꾀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한반도에 보급하기 전만 해도 우리 민족이 벚꽃을 보는 시각은 달랐다. 유희의 대상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맞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등 각종 기록과 고전에는 매화, 복숭아, 살구 등 수많은 나무가 등장하지만 정작 벚나무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선조들이 벚나무 껍질을 벗겨 활의 재료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실제 벚나무는 재질이 치밀하고 말라도 비틀어지지 않아 가구재나 건축 내장재로 요긴하게 쓰인다.
그러나 ‘꽃’으로서의 사쿠라는 일왕 친정 형태의 통일국가가 형성된 근대 일본의 정치·사회적 변혁인 메이지유신(1868) 이후 서서히 변용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변용의 한가운데에는 군국주의자들의 상징 조작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군국주의자들이 벌인 벚꽃의 이미지 변용은 “꽃은 벚꽃이요, 사람은 무사”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주저함 없이 순간적으로 지는 아름다움으로, 주군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쪽으로 모아졌다.
광운대 이향철 교수(일본학)는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예로부터 일본인들에게 친근한 꽃이었던 벚꽃에 부국강병과 대외 침략의 희생을 미화하기 위한 대대적인 이미지 조작이 가해졌다”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활짝 피었다가 순식간에 지는 벚꽃에 담긴 ‘낙화의 미학’을 확대 재생산하기 시작했고, 2차대전에서는 전사(戰死)를 미화하려는 유력한 상징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당시 아시아 여러 민족에게 가슴 아픈 기억이 돼 버린 벚꽃은 현대를 살아가는 상당수 일본인들에게 감상하는 ‘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 교수는 “일본 국민에게 벚꽃은 그냥 아름답기 때문에 즐기는 꽃일 뿐”이라며 “과거의 군국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배제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군국주의의 이미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교수는 “군국주의의 상징물로 악용된 벚꽃의 이미지를 잊은 채 꽃놀이를 즐기는 일본인들에게는 문화적으로 청산되지 않은 벚꽃에 대한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집권 이후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벚꽃 붐이 다시 일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때”라고 말했다.
실용적으로 이용한 한국
한국인들에게도 벚꽃 구경은 이제 자연스런 문화다. 하지만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제가 을사조약 이후 ‘사쿠라’를 서울 도심부터 전국으로 심어 정서의 일본화를 꾀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한반도에 보급하기 전만 해도 우리 민족이 벚꽃을 보는 시각은 달랐다. 유희의 대상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을 맞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등 각종 기록과 고전에는 매화, 복숭아, 살구 등 수많은 나무가 등장하지만 정작 벚나무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선조들이 벚나무 껍질을 벗겨 활의 재료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실제 벚나무는 재질이 치밀하고 말라도 비틀어지지 않아 가구재나 건축 내장재로 요긴하게 쓰인다.
◇천연기념물 제38호인 전남 구례군 화엄사 올벚나무. 병자호란 이후 인조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활 재료로 심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국립수목원 생물표본연구실 이유미 연구관은 “화엄사 올벚나무나 정릉 주변 수양벚나무 등은 활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감상이 아니라 부국강병이 목적이었다”고 말했다.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전남 구례 화엄사의 올벚나무는 병자호란(1636) 이후 인조가 오랑캐에게 짓밟힌 기억을 되새기며 전쟁에 대비하고자 심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팔만대장경 경판도 벚나무 목재로 깎았다. 옛날 우이동 계곡에도 벚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면서 궁재(弓材·활재료)로 쓰기 위해 이곳에 대규모 벚나무 숲을 조성했다는 학설이다.
악기 재료로 쓰인 기록도 나온다. 조선시대 음악 지침서인 악학궤범에는 “나무의 잎사귀를 말아서 풀피리를 만드는데, 지금은 벚나무 껍질을 쓴다”고 적혀 있다.
벚꽃이 그 화사함에도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활짝 피었다가 곧 지고 마는 다소 경박한 특성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꽃을 사랑하면서도 은근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 민족이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나는 매화를 선호한 것도 이 같은 민족 정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광복 이후 군사독재정권 시절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 행세를 하는 이를 ‘사쿠라’로 부른 것도 벚꽃의 특성을 빗댄 한국적 변용이다.
역사 기록이나 전통적으로 꽃을 사랑하는 민족성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이 벚꽃을 두고 시 한 수나 전설 하나 남기지 않은 것 자체가 국민들로부터 소외받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팔만대장경 경판도 벚나무 목재로 깎았다. 옛날 우이동 계곡에도 벚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면서 궁재(弓材·활재료)로 쓰기 위해 이곳에 대규모 벚나무 숲을 조성했다는 학설이다.
악기 재료로 쓰인 기록도 나온다. 조선시대 음악 지침서인 악학궤범에는 “나무의 잎사귀를 말아서 풀피리를 만드는데, 지금은 벚나무 껍질을 쓴다”고 적혀 있다.
벚꽃이 그 화사함에도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활짝 피었다가 곧 지고 마는 다소 경박한 특성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꽃을 사랑하면서도 은근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 민족이 추위를 견뎌내고 피어나는 매화를 선호한 것도 이 같은 민족 정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광복 이후 군사독재정권 시절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 행세를 하는 이를 ‘사쿠라’로 부른 것도 벚꽃의 특성을 빗댄 한국적 변용이다.
역사 기록이나 전통적으로 꽃을 사랑하는 민족성에도 불구하고 선조들이 벚꽃을 두고 시 한 수나 전설 하나 남기지 않은 것 자체가 국민들로부터 소외받았다는 증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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