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위대에서 독도 논문 쓴 진석근 예비역 대령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역사 바로잡기 계속하겠다”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개량한복을 입은 진석근(55) 전 대령은 암 투병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평온했다. 눈동자는 크고 맑았고 목소리는 낭랑했다. 흔히 중병을 앓는 사람에게 엿보이는 불안감이나 어두운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최근 선도(仙道) 수련으로 건강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난해 위암 말기 환자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두 시간 동안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그는 열정적인 어투와 몸짓으로 한민족의 상고사와 독도의 진실을 설파했다.
군 최고의 독도 전문가로 통하던 그가 군복을 벗은 것은 지난해 10월. 암 발병이 직접적인 전역 사유였다. 그해 7월 수술을 받았다. 전역 당시 계급은 대령. 규정대로라면 2010년 4월까지 더 근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에 누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30여 년간 몸담았던 군을 떠났다.
전역 후에도 그의 독도사랑은 계속됐다. 암과 싸우면서 ‘독도의 진실’이라는 책을 펴냈다. 지난 3월 출간된 210쪽 분량의 이 책은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돼 있는데, 본문은 만화이고 부록엔 독도 관련 각종 자료가 담겨 있다. 이 책은 그의 네 번째 저서다. 군 복무 시절 그는 이미 재야사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잃어버린 우리 상고사’ ‘우리 땅 우리 혼’ ‘민족의 닻 독도’ 등 세 권의 책을 펴냈다. 모두 비매품인 이 책들은 그가 근무하던 사령부와 사단에 장병 교육용으로 배포됐다.
‘독도의 진실’은 그가 일본에서 쓴 논문을 바탕으로 만든 책이다. 그는 1997년 일본 자위대 간부학교 고급과정을 이수했는데, 그때 작성한 졸업논문이 ‘독도 영유권에 대한 한일 양국 주장의 비교·분석’이었다. 한국군 장교가 일본 자위대 간부학교에 파견돼 교육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일 군사교류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일본 극우세력의 본거지라 할 만한 자위대에서 한국군 장교가 독도를 주제로 논문을 펴낼 줄이야.
자위대에 파견된 첫 한국군 장교
그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것은 대령으로 진급한 해인 1996년 2월. 평소 한국 고대사에 관심이 많아 생도 시절 중국어를 익히고 임관 후 일반대학에 편입해 일본어를 공부한 것이 자위대 파견 1호 장교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한학을 하신 할아버지와 동네 어른들로부터 역사 얘기를 많이 듣고 자라났다.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엉터리 역사였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걸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일본이 한민족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통해 조작한 역사다. 일본은 우리 민족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해 상고사가 기록된 역사책을 불태우고 역사를 날조했다. 그 결과 지금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역사책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권밖에 없다. 삼국시대 이전 역사가 날아간 것이다. 식민사관을 계승한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한번 입을 열자 폭포수 같다.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 이야기가 기운차게 쏟아져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 단군과 고조선은 신화가 아니다. 고조선은 2096년 동안 중국 대륙에 실존했던 국가로 모두 47명의 단군이 통치했다. 고조선은 하·은·주를 비롯한 중국의 고대 왕조들과 교류했고 일부 국가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진취적인 기상을 가진 한민족을 일본은 역사 왜곡을 통해 한반도 밖으로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한 나약하고 사대주의에 젖은 족속으로 비하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고 사관학교에 들어간 이후 조금씩 공부를 해나갔다”고 했다.
그가 자위대에 파견된 1996년은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해 2월 한국 정부가 독도 접안시설 공사를 시작하자 이케다 일본 외상은 “독도는 국제법상 일본 영토이며 이곳에 접안시설을 만드는 것은 주권침해”라는 망발로 한국인의 반일감정을 들끓게 했다.
그가 현해탄을 건넌 것도 그 무렵이었다. 육상자위대 간부학교 고급과정에 등록한 학생은 20명. 다들 대령급 장교였다. 한국군 장교로는 그말고 한 명 더 있었다. 나머지 18명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평상시 일본 장교들은 내 앞에서 독도 얘기를 전혀 하지 않다가 술 한 잔 들어가면 그 문제를 끄집어냈다. 그들은 ‘왜 남의 땅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느냐’고 따졌다. 그런데 내가 ‘독도가 어째서 너희 땅이냐. 이유를 설명해봐라’고 하면 누구도 제대로 답변을 못했다. 고작 한다는 얘기가 ‘독도는 우리 땅인데, 한국이 무단 점령하고 있다고 배웠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독도 문제에 대한 양국의 주장을 사안별로 비교하면 객관적인 자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기의 3분의 1이 지나면서 논문 주제를 결정하게 됐다. 한국에서 온 장교가 독도 영유권을 다루겠다고 하자 담당교관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이런 얘기로 교관을 설득했다.
시간 끌기 작전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알았는데 일본에 오니 일본 땅이라고 한다. 일본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일본까지 왔으니 그것을 알아내고 싶다. 양국의 주장을 비교해서 객관적으로 쓰겠다.”
어렵사리 승낙을 얻어낸 그는 ‘작전’을 짰다. 논문 통과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일본어로 논문을 쓰는 게 쉽지 않다는 핑계를 내세워 최대한 제출시기를 늦추기로 작정한 것이다.
당시 그의 가족은 일본 정부가 마련해준 외부 관사에 거주했다. 부대에서 전철로 한 시간가량 걸렸다. 논문을 쓰는 동안 같은 반의 일본인 학생장교 한 사람이 도우미 노릇을 했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진 대령의 집에 함께 가서 논문 작성을 도왔다. 해가 바뀌고 마침내 졸업일이 다가왔다. 다른 학생들은 다 논문을 제출했지만 그는 계속 시간을 끌었다.
졸업 일주일쯤 전 논문이 완성됐다. 도우미 노릇을 하던 일본 학생장교를 통해 고급과정 반 학생들에게는 논문내용이 알려졌다. 절차대로라면 일단 논문을 제출해 학교당국의 승인을 받은 다음 인쇄와 제본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은 곧바로 인쇄에 들어갔다. 졸업식이 임박한 탓에 상부에서 검토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담당교관은 그의 속셈을 눈치 채지 못했다.
육상자위대 내에는 고급과정반말고도 여러 수업과정이 있었다. 진 대령의 논문은 자위대 내에서 300부가량 배포됐다. 논문에는 한일 양국의 주장이 균형 있게 실렸다. 하지만 논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결론이 얼마나 논리정연하게 도출됐는지를.
자위대가 발칵 뒤집히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뒤늦게 논문내용을 알게 된 학교당국은 “일본 우익의 최선봉인 자위대에서 어떻게 이런 논문을 낼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지휘부는 즉각 논문 회수 결정을 내렸다. “외국인 학생이 논문까지 내는 건 무리다”라는, 이유 아닌 이유에서였다.
그러자 이번엔 진 대령과 1년 동안 수학한 일본인 학생장교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그동안 왜 한국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지 아무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진 대령이 알려줬다”며 “1년 동안 연구해 작성한 논문을 못 내게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항의했다.
난감해진 학교장은 간부회의를 거쳐 자위대 본부에 보고했다. 본부에서는 논란 끝에 “자칫 한일 양국 간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으니 조용히 매듭짓자”는 방침을 정했다. 결론은 조건부 발행이었다. 논문 발간을 허가하되 표지에 ‘이 논문 내용은 저자의 개인 의견’이라는 글을 붙이는 조건이었다.
그에 따라 논문은 표지만 바꾸어 재인쇄에 들어갔다. 다음날 진 대령은 논문 발표식을 가졌다. 한국군 장교가 일본 군대에서 일본 장교들을 상대로 독도 논문을 발표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애초 고급과정반 학생들 외에 교관 50여 명이 행사 참석을 신청했지만 발표 당일 교관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학교당국의 제동 탓이었다.
논문 발표는 1시간 반 동안 이뤄졌다. 어찌된 일인지 교실 칠판에 걸린 동북아시아 지도에도 독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돼 있었다. 일본 학생들은 놀랐다. 다들 평소 눈여겨보지 않다가 하필 진 대령의 논문이 발표된 날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발표가 끝난 후 이 지도는 조용히 철거됐다.
롯폰기의 가라오케
진 대령의 논문은 육상자위대에서 교육을 받는 군 장교 500여 명에게 배포됐다. 사흘 뒤 졸업식이 치러졌다. 1997년 2월의 일이었다.
일본 학생장교들이 진 대령의 논문 발표를 도운 것은 그간에 쌓인 돈독한 우정 때문이었다. 진 대령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1년간 정성을 다했고 그 결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이다.
학기 초 일본 학생들과 진 대령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진 대령을 은근히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학교당국의 방침에 따라 그는 중요한 군사훈련을 받을 때는 빠져야 했다. 그중엔 독도 상륙훈련도 있었다. 나중에 친해진 후 일본 학생들은 “진 대령이 독도를 방어하면 우리가 공격할 수 없잖은가”라고 농담을 했다.
그는 어떻게 일본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었을까. 도쿄 롯폰기에 있는 술집이 매개체였다. 그는 이 술집에 매주 두세 명씩 데리고 갔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가라오케였다. 주인과는 술값의 반만 내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일본 장교들에게는 한 턱 쏘는 게 상상이 안 된다. 2차도 없다. 노래방에서 캔맥주를 먹는 정도다. 롯폰기 가라오케에서 그들에게 한국 노래를 가르치고 나도 일본 노래를 배웠다. 이들과 사귀느라 군인공제회에 저축해둔 돈을 다 썼다. 이들은 한국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2학기 중간인 1996년 10월 일본 학생들은 한국으로 일주일간 연수를 떠났다. 비무장지대(DMZ)와 경주 등지를 둘러보며 한국의 정치문화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기간에 진 대령은 오사카 나고야 교토 등지를 돌며 독자적인 연수를 했다. 한편으로 육사와 고등학교 동기·후배들에게 연락해 일본 학생들에 대한 대접을 부탁했다.
“매일같이 회식을 시켜줬다고 한다.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마산고가 최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국 연수를 다녀온 후 그들은 한국 팬이 됐고 친한파(親韓派)가 됐다. 술집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게 사적인 얘기를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그들의 초청으로 고교 동기생들이 일본에 놀러갔다 오기도 했다.”
잃어버린 상고사
그가 일본어로 쓴 논문 원본은 현재 울릉도 독도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그는 뒷날 2군사령부에 근무하면서 한글 번역본을 펴내 장병들에게 배포했다.
“일본 자료를 보면 볼수록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슬픈 얘기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는 제국주의적 시각과 국제법적인 절차 외엔 아무것도 없다. 일본 역사책 중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기록된 책은 세 권밖에 없다. 나머지 수십 권의 책에는 독도가 조선 땅으로 기록돼 있다. 고(古)지도에도 분명히 그렇게 표기돼 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대표적인 논리는 이것이다. 일본은 1905년 1월28일 각의에서 독도의 영토 편입을 결정한 후 2월22일 시마네현 고시(告示)를 통해 이를 공식화했다. 이후 독도를 죽도(竹島·다케시마)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을사늑약으로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일본은 이듬해 9월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됐다는 사실을 한국에 정식으로 통고했다. 그런데 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번도 이에 항의한 적이 없으므로 독도가 일본 땅임을 한국 정부가 인정했다는 게 일본의 논리다. 일본은 또 무인도를 영토로 편입한 것이기에 국제법에 비춰봐도 하자가 없다며 국제사법재판소로 이 문제를 끌고 가려는 속셈을 갖고 있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과 옛 기록을 모조리 깔아뭉개는 터무니없는 주장이지만, 일본의 의도대로 독도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다뤄지면 한국에 불리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국내 사학계의 판단이다. 힘으로 남의 나라 땅을 차지했던 근세 서양의 제국주의 논리와 관행이 여전히 국제질서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때 일본과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면서 독도를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한 점도 불리하다. 따라서 일본의 노림수에 휘말려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분쟁을 제소하면 안 된다는 게 의식 있는 사학자들의 주장이고 진석근씨 생각도 다르지 않다.
역사 문헌에 따르면 독도는 6세기 신라 지증왕 때 우산도(于山島)라고 불렸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우산도와 더불어 삼봉도(三峰島, 성종, 15세기), 가지도(可支島, 정조, 18세기) 따위로 호칭됐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에는 석도(石島)라는 이름을 얻었다. 독도라는 명칭은 1906년 울릉군수가 정부에 올린 보고서에 처음 등장한다. 진씨는 “일본은 독도 외에 다른 명칭은 인정하지 않는다”며 “석도와 독도가 같은 지명이라는 걸 입증하기만 하면 승부가 끝나는데 아직 그런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아쉬워했다.
어린 시절 역사에 심취했던 그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가난한 집안환경 탓에 꿈을 접었다. 촌에서 육사에 진학하면 잔치를 벌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군복무를 하면서 못다 이룬 역사학도의 꿈을 다시 키워갔다.
“야전부대에 근무할 때는 공부할 여유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연대장을 마친 후였다.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모르지만,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그의 병과는 정보였다. 마침 보직도 역사공부와 관련 있는 자리로 연결됐다. 일본과 동남아 정보를 담당하는 국방부 과장으로 발령난 것이다. 이후 대령 진급에서 두 차례 탈락한 후 2003년 2군사령부 정보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군 생활 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뭔지 깊이 고민했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상고사를 찾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때부터 밤낮없이 공부했다. 부대 안에 골프장이 있었지만 공부를 시작한 후로는 공식행사 때말고는 골프를 치지 않았다. 3년간 계속 공부하면서 연구내용을 정리해나갔다.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역사를 배워왔는지를 알리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2006년 그는 28사단에 근무하면서 ‘잃어버린 우리 상고사’ ‘우리 땅 우리 혼’을 펴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그의 주장은 정통 역사교과서와는 다른, 이른바 재야사학계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그에 따르면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중국 산둥반도와 베이징 일대에 있었다는 것. 또 신라 고구려 백제가 한반도에 세워졌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삼국(三國) 모두 중국 땅에서 태동했는데, 천문학적인 연구결과가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천체물리학 박사인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의 일식(日蝕) 기록을 바탕으로 삼국이 중국 땅에서 시작된 국가임을 밝혀냈다. 박 교수는 신라 고구려 백제 연구로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의 연구방법은 역사학과 천문학을 접목한 것이다. 일식 기록을 컴퓨터에 주입해 역산한 결과에 따르면 신라는 양쯔강 하구, 백제는 산둥반도와 베이징 일대, 고구려는 몽골 일대에 세워진 국가였다. 비슷한 시기에 존립했던 당나라의 일식 관측기록을 분석해보니 틀림이 없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서기의 일식 기록을 분석한 결과 일본 열도가 아니라 신라의 아래쪽, 즉 중국대륙 남부와 타이완 일대에 세워졌던 국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의 일본열도에 위치한 기록이 나타난 것은 1190년 가마쿠라 막부에 이르러서다. 신라의 위치가 한반도 동남쪽으로 나타난 것은 AD 500년 지증왕 때다. 이후 망할 때까지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 역사에 엄청난 비밀이 있는 것이다.”
진씨는 “우리 사학계는 60년 동안 조작된 역사로 밥벌이를 해왔다”며 “새로운 학설이 나오면 싹을 없애버리는 횡포를 저질러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왜 돈벌이도 안 되는 일에 그토록 열정을 바치는가.
“글로벌시대일수록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중심에 놓고 외국 문화를 수용하고 융해해야 한다. 우리 것이 앞장서서 끌고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게 우리 세대 일이다. 우리 세대가 이를 못하면 우리 것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머잖아 외국 조상이 우리 조상으로 둔갑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언제 삶을 마감할지 모르는 중증 암환자이지만 그의 머리는 다음 책에 대한 구상으로 쉴 틈이 없다. 이번엔 중국의 동북공정이 표적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은 도를 넘었다. 중국은 지금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기네 것으로 바꾸려는 못된 짓을 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왜곡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을 쓸 생각이다.”
그의 가족은 불만스럽지 않을까.
“돈도 안 되는 일에 만날 돈을 쓰니 좋아할 리가 없잖은가. 그래도 아내가 뜻이 큰 사람이라 늘 용기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뒷바라지해서 여기까지 왔다. 몸 회복되면 더 열심히 하라며 희망을 심어준다. 그 맛에 산다.”
그는 “국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라는 기자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이렇게 반박했다.
“몸을 타고 다니는 영혼이 있듯이, 나라가 몸체라면 그것을 움직이는 건 민족의 혼이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오다보니 우리 것은 별 볼일 없고 외국 것만 좋은 것이라는 신(新)사대주의가 형성됐다. 민족의 혼을 찾으면 나라의 정기가 바로 세워진다.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에너지도 여기서 나온다. 혼을 찾는 지름길이 바로 잃어버린 상고시대 역사를 되찾는 것이다. 우리 조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우리 민족이 얼마나 큰 철학과 사상을 가졌는지를 아는 순간 세계를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청소년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세계를 이끄는 마지막 지도국으로 발돋움하는 길이라는 것을. 나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목숨만큼이나 절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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