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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하토야마 유키오‘일본 총리’ 연구

醉月 2009. 10. 18. 12:18

인간 하토야마 유키오‘일본 총리’ 연구
물러터진 소프트크림? 이상을 꿈꾸는 우주인!

장제국│동서대학교 부총장·국제관계학과 교수 jchang@dongseo.ac.kr

 

일본의 정권교체. 그 중심에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있다. 필자는 오랫동안 그를 곁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전후 일본을 이끌어온 자민당 주류 정치인과는 근본적으로 캐릭터가 다르다. 인간 하토야마 유키오를 심층 분석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지난 8월30일 총선유세 도중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흔히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63) 총리를 이야기할 때 신사풍이고 온화한 인상의 소유자라고 한다. 이러한 인상을 빗대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하토야마 총리를 ‘소프트크림과 같은 존재’라며 그의 물러터짐(甘さ)을 지적한 적도 있다. 그의 또 하나의 별명은 ‘우주인(혹은 외계인)’이다. 2001년 민주당 대표 시절에 붙여졌는데, 눈이 다소 튀어나온 인상에다 극히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인이 사뭇 이상주의적 느낌의 이야기를 많이 하고 다닌다는 데서 유래했다.

스탠퍼드의 로맨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그는 결코 ‘소프트크림’이 아니다. 또한 그의 정치철학이 자민당 55년 체제로 굳어진 전통적 일본 정치판에서 보면 ‘우주인’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역설적으로 그의 올곧은 이상과 믿음은 이번 총선거에서 민주당 압승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아무튼 일본 정치사에서 보면 야당인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우주인’의 도래에 필적할만한 사건이랄 수도 있겠다.

하토야마 총리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으로 평가된다. 그는 정치가 집안인 하토야마가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하토야마 가즈오(鳩山和夫)전 중의원의장. 조부는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전 총리, 그리고 부친은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郞) 전 외무대신으로 그의 가문은 일본의 케네디가로 불린다. 어머니는 일본 재벌 ‘브리지스톤 타이어’의 창업자인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郞)회장의 장녀 야스코(安子)여사다.

하토야마 총리와 부인 미유키 여사의 젊은 시절.

하토야마 총리는 도쿄대학교 공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 유학해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미국 유학 중 이미 결혼한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부인인 미유키 하토야마(67) 여사였다. 심지어 이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박사과정을 밟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와의 결혼은 전통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 명문가에서 영민하게 자란 청년이 쉽사리 내릴 수 있는 결단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권세 있는 집안 자제의 철부지 사랑은 더더욱 아니었다. 여러 증언에 의하면 그는 학창시절 동아리 모임에서도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을 정도로 내성적이었다. 그런 그가 배우 출신에 자신보다 네 살 연상의 유부녀와의 결혼을 성사시켰다는 것은 그의 집념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미유키 여사는 2008년 저서에서 “잠결에 유체를 이탈해 UFO를 타고 금성에 간 적이 있다”고 해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다.

하토야마 총리는 1986년 동생인 구니오(邦夫)보다 10년 늦게 자민당 간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정계 입문 후 신념에 기초한 거침없는 정치행보를 보여주었다. 1988년 6선, 7선 의원이 득실거리는 보수적 분위기의 자민당에서 정치초년생 하토야마는 1986년에 같이 등원한 동기의원들과 파벌을 초월한 정책모임인 ‘유토피아정치연구회’를 결성했다. 이 연구회는 정-관-재계의 유착을 강하게 비판했고 돈이 들지 않는 정치구현을 위한 개혁을 주창했다. 특히 당시 자민당 최대 스캔들이던 리크루트 의혹을 집중 공격해 당내 정치개혁의 불을 지폈다.

자민당의 금권정치에 실망한 하토야마 총리는 또 다른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한 것이다. ‘유토피아연구회’를 모체로 ‘사키가케’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이후 그는 8개 야당의 연립으로 탄생한 첫 비(非)자민당 정권인 호소카와 내각에서 내각관방부 장관에 취임했다. 동지였던 다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당시 사키가케 대표는 장관으로 취임했음에도 계속해서 자민당과 연락을 취하며 자민당 측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호소카와 총리 수석비서관을 지낸 나리타 노리히코(成田憲彦)씨의 최근 증언에 따르면, 당시 다케무라는 연립내각을 잘 추스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총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토야마 총리는 1996년 동생 구니오, 간 나오토 등과 함께 구(舊)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때 이른바 ‘배제의 논리’로 동지인 다케무라와 완전히 결별하는 결단을 내렸다.

 

배제의 논리

하토야마 총리의 또 다른 결단은 2002년 연말에 나왔다. 그는 야당세력 결속만이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신념아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이끄는 자유당과의 합당 구상을 추진했다. 오자와는 일본 정계에서 ‘육식계’로 통하는 정치9단의 인물이다. 당시 하토야마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구성원들은 오자와 그룹과 비교해 전투력이 떨어진다고 해 ‘초식계’로 불렸다. 오자와는 사실 하토야마 총리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오자와는 신진당을 파괴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민주당에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인사가 많았다. 이들은 이러한 하토야마-오자와 회담에 맹렬한 반대를 표명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 일로 대표직을 사임하면서 “작은 차이점은 뒤로하고 대동단결해야 한다. 야당이 결당하여 국난을 극복하는 길을 걸어가기를 기대한다”라는 사퇴의 변을 남겼다. 결국 하토야마 대표가 당시 오자와와의 연합을 어렵사리 이끌어낸 것은 현재의 정권교체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결단력을 보여주는 일화는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적잖이 있다. 2006년 교과서 문제, 독도 문제로 한일셔틀외교가 중단됐다. 한일관계는 살얼음판이었다. 하토야마 총리는 5월4일 서울을 방문해 한명숙 당시 국무총리를 만나 “모든 영토문제는 근본적으로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일본은 역사적 사실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한 하토야마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일관된 반대 입장을 보였다. 2006년 4월 부산 방문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정면으로 비판한 바 있고, 같은 해 5월 서울 방문에선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하지 않는 한 한국과 중국의 신뢰를 가져올 수 없다”고 했다. 같은 해 8월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하자 “민주당은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역사를 직시하여 국익의 관점에서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반대한다”라고 했다.

일본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교과서를 검정하니까 문제가 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2006년 4월 부산 방문 때 “교과서 검정제도를 없애고 한일 간에 기탄없는 공동연구를 해 검증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운데)가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씨(오른쪽)와 함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의 말을 듣고있다.

“약속은 약속이니 가겠다”

하토야마 총리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의 긴박했던 한일관계를 고려한다면 일본의 제1야당 간사장으로서 하기 힘든 일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지도자로 평가되는 이유다.

하토야마 총리는 서민적이고 겸손한 정치인이다. 그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고 명문가 출신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소탈하다. 필자도 몇 번 그를 만난 적 있다. 반드시 복도의 엘리베이터까지 나와 배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세심한 배려는 약속에 대한 존중에서 나타난다. 필자는 2005년 말 도쿄에서 하토야마 총리에게 2006년 4월10일 필자가 재직하는 동서대학교에서 민주당의 대외정책과 관련한 강연을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응했다. 그러나 2006년 2월부터 소위 ‘위조 e메일 사건’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당시 민주당 나가타 히사야스(永田壽康) 의원은 예산위원회에서 “증권거래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라이브도어의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가 사내 e메일을 통해 자민당 간사장의 차남에게 선거 컨설턴트 비용으로 3000만엔의 송금을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이후 e메일은 조작된 것으로 판명됐고 민주당은 여론의 대역풍을 맞았다.

이 사건으로 대표와 하토야마 당시 간사장이 사퇴했다. 강연 사흘 전인 4월7일 민주당 양원 의원총회가 열려 대표 선거를 하는 등 그야말로 민주당의 앞날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하토야마 강연은 물 건너간 것으로 생각했다. 초청특강 형식의 강연이니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었다. 필자는 8일 전화를 걸어 “정국이 정국인 만큼 강연을 연기해도 좋다”고 하자 “약속은 약속이니 내일 부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9일 오후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그가 가장 먼저 가기를 원한 곳은 2001년 도쿄 오쿠보역에서 술에 취해 쓰러진 일본인을 구하고 숨진 고(故) 이수현씨의 추모비가 있는 성지곡 수원지였다. 이렇게 그는 1박2일 일정의 강연 약속을 지켰다.

 

사할린 한국인 문제 노력

필자는 많은 일본 정치인과 만났다. 그러나 하토야마 총리처럼 한국을 중요시하는 정치인은 드물었다. 그는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해서인지 “어머니가 한류를 좋아해 한글을 공부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최근 만났을 때는 “어머니는 90세가 되었다. 많이 쇠약해져 의지는 있지만 한글을 계속 공부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류스타를 좋아한다. 어머니 방에는 한류스타의 포스터가 많이 붙어 있다”고 했다. “아마 한류가 지금 어머니에게 삶의 보람이 되어 있는 것 같다”라고도 했다. 부인 역시 한류 팬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토야마 총리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은 러시아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다.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는 일본과 소련 사이에 ‘일소공동선언’을 실현시킴으로써 시베리아 억류 일본인 귀국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 선언을 통해서도 사할린에 강제 징용되었던 한국인의 귀국은 성사되지 않았다.

하토야마 총리는 간사장 시절 필자가 관계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 인재양성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2004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동서대학교가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 1세의 후손들에게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징용 한국인의 후손들이 선진교육을 받고 사할린에 돌아가 지역사회의 중추인물로 성장하도록 돕는 사업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2006년 7월1일 도쿄에서 개최된 ‘사할린 잔류 한국인 후손 인재양성을 위한 심포지엄’ 기조연설에서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는 나의 할아버지가 못다 한 사업이다. 나는 사명을 가지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하토야마 총리는 일본 정기국회에서 ‘유학제도 신설’ 법안의 통과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법은 사할린국립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계 러시아인에게 6개월~1년간 일본 단기 유학 기회를 주는 것이 목적이다. 한국계 학생들은 장학금과 왕복여비를 지원받아 홋카이도대학과 규슈 대학에 유학할 수 있게 됐다.

하토야마 총리는 1991년부터 ‘사할린 잔류 한국인 문제 의원 간담회’에 참여해왔다. 또한 1999년 8월 일본 공산당, 사회민주당 의원들과 공동으로 ‘항구평화조사국설치법안’을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부결이 거듭되는 가운데 하토야마 대표는 몇 번이고 제출했다. 이 법안은 국회도서관에 ‘항구평화조사국’을 설치해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저지른 전쟁 피해 상황을 조사하는 내용이다. 조사 대상에는 사할린 잔류 한국인의 사정도 포함돼 있었다.

 

“과거 직시하는 용기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총선 공약집인 ‘민주당정책 INDEX2009’에 이 법안을 반영했다. 국립도서관에 항구평화조사국을 설치하기 위해 ‘국립도서관법’을 개정할 것을 약속하고, 시베리아 억류자에 대한 미지급 임금 문제, 위안부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할 것을 공약했다. 최근 한국 정부는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한인들이 돌려받지 못한 우편저금 1억8700만엔에 대한 환수작업에 적극 나서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강제 징용자 11명이 2007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일본 총선에서 도쿄12구에 출마한 아오키 아이(43) 민주당 후보가 8월30일 연립여당 공명당 대표 오타 아키히로(63) 후보를 꺾고 미소짓고 있다. 아나운서 출신 아오키 당선인은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대표대행 측이 영입한 ‘미녀자객’ 중 한 명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한국 관련 여러 국회 내 단체에 가입했다. ‘일한의원연맹’ 고문이고 ‘재일한국인을 비롯한 영주외국인 주민의 법적지위 향상을 추진하는 의원연맹’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민주당에선 ‘일한의원 교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또한 지난 3월 출범한 ‘민주당 내 전략적인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의원모임’의 고문이기도 하다.

그가 올해 5월 민주당 대표로 선출된 뒤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6월 서울에서 그는 일본 야당 대표로는 이례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35분간 독대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민주당은 과거 문제를 직시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고 이를 통해서 미래에 큰 문을 여는 것이 가능하다” “과거가 없는 미래는 없다”고 했다.

민주당은 자민당과 달리 파벌 결속력이 강하지 않다. 그래서 ‘파벌’이라는 말 대신 ‘그룹’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하토야마 그룹의 원조는 2002년 9월 결성된 ‘하토야마 정권을 실현하는 모임’이다. 이 그룹은 당시 하토야마 총리를 중심으로 보수계 의원들이 모여 결성한 당내 최대 계파였다. 그러나 합당 문제로 하토야마 대표가 사임하자 2003년 5월 ‘민주당 정권을 실현하는 모임’으로 개명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모임은 2005년 총선거에서 하토야마의 측근들이 줄줄이 낙선하고 2007년 참의원선거에서 오자와 그룹이 대거 등원하게 됨에 따라 오자와 그룹에 비해 약화됐다. 이번 총선에서도 소위 ‘오자와 칠드런’이 대거 유입돼 하토야마 그룹은 당내 2위 세력에 머물러 있다. 한일 관계 활동을 열심히 해온 하토야마 그룹의 지한파 의원들은 히라노 히로부미(平野博文), 오자와 사키히토(小澤銳仁), 마쓰노 요리히사(松野賴久), 오다치 모토유키(尾立源幸), 이치무라 고이치로(一村浩一郞), 이와모토 쓰카사(岩本司), 기나 쇼키치(喜納昌吉), 데즈카 요시오(手塚仁雄) 의원 등이다. 이들은 향후에도 한반도 문제에 관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러블 슈터’ 등 최측근 3인방

히라노 히로부미(60) 의원은 중앙대 이공학부 출신으로 마쓰시타전기에서 근무하다가 이후 중의원 비서를 거쳐 1996년 첫 당선된 후 이번 총선에서 5선에 성공했다. 히라노 의원은 ‘하토야마 최측근 3인방’ 중의 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국회대책위원장 대리와 간사장 대리를 지냈다. 당내 어려운 문제를 도맡아 처리한다고 해서 ‘트러블 슈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지난 5월 하토야마 총리가 대표를 맡자 대표의 수족 노릇을 하는 간부실장으로 취임했다 최근 관방장관에 임명됐다.

오자와 사키히토(55) 의원도 하토야마 ‘최측근 3인방’ 중의 한 사람이다.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도쿄은행에서 근무한 후 중의원에 당선된 6선 의원이다. 마쓰노 요리히사(49) 의원은 ‘최측근 3인방’의 막내에 해당된다. 게이오대학 정치학과 출신으로 4선 의원으로 국회대책부위원장을 역임했고 부간사장을 맡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측근그룹.

측근 3인방 외에 오다치 모토유키(45) 의원도 한국에 여러 번 다녀갔고 한국의 젊은 국회의원들과의 교류에 열성이다. 게이오대 경제학부 출신으로 세리사와 공인회계사 자격을 가진 금융통이다. 회계사 업무를 접고 하토야마 의원의 정책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는데 하토야마 총리가 한국을 방문할 때

는 항상 수행하며 일정 조율을 도맡고 있다. 이치무라 고이치로(45) 의원은 3선 의원으로 순수한 인물이다. 히토쓰바시 대학 사회학부 출신으로 마쓰시타 정경숙 정치전공을 마쳤다. 학생시절부터 한일청년포럼 회원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고 지난 6월 하토야마 한국 방문 실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역구에 인접한 오사카의 국내선 비행장인 이타미 공항과 김포공항을 잇는 일에도 열심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1986년 정계 입문 후 23년 만에 세계 제2 경제대국의 수장이 됐다. 그간 자신의 정치 신념을 바탕으로 수많은 결단을 내렸고 행동으로 옮겼다. 평생 정치신념인 ‘우애정신’을 통한 한일관계 발전에도 노력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여러 의원에게 한국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한국과의 교류를 독려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한국에 관한 한 준비된 총리다. 앞으로도 한일관계에 먹구름이 드리워질 때가 있을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가 앞으로 한일관계를 어떻게 열어갈지 주목된다.

 

張濟國
1964년 부산 생
미국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학사·석사
미국 시라큐스대 법학대학원 법학박사
일본 게이오대 정치학 박사
일본 이토추 종합상사 특별연구원
미국 몰렉스 인터내셔널 감사 변호사
동서대학교 일본연구센터 소장
(現) 동서대학교 부총장, 국제관계학과 교수,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저서/논문 : 신한일관계론(2005년), 평양을 향한 부시의 전략(Bush′s Policy toward Pyongyang: Its structure and Future·2002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