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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숙의 뇌중산책

醉月 2009. 10. 18. 12:21

뇌 껍데기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보면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단호하게 외치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나 인간의 뇌에서는 껍데기가 가장 중요하다. 절대로 껍데기를 가라 할 수 없다. 껍데기가 가면 곧 알맹이가 가는 것이다.

돼지고기로 치자면 2근 남짓의 무게인 인간의 뇌는 수많은 신경세포가 뭉쳐 있는 덩어리다. 물론 그 덩어리 안에는 혈관도 있고 신경세포가 아닌 다른 세포들도 섞여 있지만 주인공은 역시 신경세포다. 이 신경세포 덩어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우리가 피질이라고 부르는, 덩어리의 표면 부위, 즉 껍데기다. (뇌의 껍데기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 분들은 식당에서 드셔본 돼지 껍데기를 상상하시면 되겠다.)

» (일러스트레이션 / 조승연)

뇌 껍데기는 뇌를 구성하는 커다란 세 덩어리의 구조 중에서 진화적으로 가장 늦게, 다시 말해 가장 최근에 생겨난 부분이다. 껍데기보다 앞서 생겨난 부분이 뇌의 속 알맹이 부분이고 그보다도 더 앞서, 가장 먼저 생겨난 부분이 속 알맹이를 받치고 있는 뇌 기둥(뇌간)이다. 뇌간에는 기본적인 생명유지 장치가 모여 있고 뇌의 속 알맹이에는 감정중추가 들어 있다. 그리고 뇌의 속 알맹이를 감싸듯 뒤덮고 있는 뇌 껍데기, 피질에는 언어나 사고 같은 고등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구역들이 자리하고 있다. 피질은 속 알맹이 부분과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해석해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의사결정을 내리며 이를 집행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의식이라는 매우 복잡한 정신상태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도 피질 덕택이다.


진화의 사다리에서 위쪽에 있는 고등한 동물일수록 피질의 면적이 넓어서 예컨대 조류는 피질 면적이 정말 작고 포유류는 넓은데 영장류, 그중에서도 사람의 피질이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사진으로 종종 나오는 뇌 피질 표면에 주글주글 주름이 진 것도 기실은 신문지 한 면 넓이의 뇌 껍데기를 두개골 뼈로 한정된 공간 속에 집어넣으려다 보니 구겨 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어서 그리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가끔 머리 나쁜 것을 비하해 표현할 때 사용하는 새 대가리라는 말이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국어사전에서 알맹이의 뜻을 찾아보면 사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부분이라는 풀이가 나오고 껍데기의 뜻을 찾아보면 알맹이를 뺀 나머지라는 풀이가 나온다. 알맹이나 껍데기의 정의가 그것이 놓인 자리만이 아니라 그것의 역할이나 기능도 고려한 것이라면 신동엽 시인의 외침대로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할 때, 뇌의 알맹이는 그것이 알맹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남아야 할 것이고, 뇌의 껍데기는 비록 껍데기 자리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알맹이라서 남아야 할 것이니, 우리 뇌는 이래저래 버릴 데가 하나도 없다. 살코기는 물론이요 껍데기에 힘줄까지 구워먹는 돼지고기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뇌 껍데기가 돼지 껍데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돼지 껍데기는 살코기와 분리시켜도 하나의 메뉴가 되지만 뇌 껍데기는 그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속 알맹이와 분리되어서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하긴 어떤 식당에서는 돼지 껍데기가 단독 메뉴라 해도 그것만 주문하는 것은 허용이 안 되고 반드시 삼겹살 같은 살코기와 함께 주문해야만 이를 맛볼 수 있게 해준다니 이 또한 뇌 껍데기와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 여자의 뇌, 그 남자의 뇌

매일 신문과 TV의 스포츠 뉴스를 화려하게 꾸며주던 아시안게임이 끝났다. 운동선수들이 달리기, 높이뛰기, 양궁 등등의 종목에 출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필자는 수렵채집기 때 중요했던 삶의 기술들이 이제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경기장에서 보존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박물관에 가면 고대나 중세 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각종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운동경기장에 가면 그 옛날 인류의 생존에 필요했을 기술 목록들이 한눈에 보인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그러나 인류는 이제 수렵에 의존하지 않고 따라서 움직이는 목표물을 쏘아 맞히는 기술이나 멀리 던지고 빨리 달리는 기술이 생존에 꼭 필요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그 옛날 생존에 필요했던 기술들은 인간의 유전자에 깊이 박혀서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도 인간 행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렵채집기가 무려 20만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지속되었던 까닭에 우리 유전자에서 그 흔적을 지우려면 그 못지않게 긴 시간이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수렵채집기 생활방식의 흔적은 스포츠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도 남아 있으며 우리가 종종 이야기하는 여자와 남자의 차이 역시 수십만 년 동안 남자와 여자가 함께 생존을 위해 노력해온 흔적과 다름없다.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차이인 여성의 임신, 출산, 수유 능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성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결과 여자들은 사냥에 따라 나서는 대신 양육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의사표현이 서툰 아이들과 소통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했고 부족 내의 다른 여자들과도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반면에 출산과 수유 능력이 없는 남자들은 외부 침입자나 위험한 동물들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 멀리까지 나가서 사냥으로 먹을거리를 구해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여자들에게는 표현능력, 공감능력, 섬세한 손동작 등이 요구되었고 남자들에게는 방향감각, 공간능력,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능력 등이 필요해졌다.


남녀에게 생활의 기술이 달리 요구되는 상황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되자 아예 각자에게 필요한 기능을 좀더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장치를 뇌에 내장하기에 이르렀다. 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가 약간 다른 생김새를 갖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장 장치의 차이는 영구적인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생활환경이 변화하고 그래서 생존에 필요한 생활 기술이 변화하면, 그러한 변화가 지속되면 변화된 생활 기술을 잘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장치가 뇌 안에 내장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여자와 남자의 행동양식의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는 후기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생존에 필요해서 생긴 차이가 결코 아니다. 또한 어떤 필연에 의해 선험적으로 주어진 차이도 아니다. 우리의 뇌 구조나 유전자가 외부 환경의 변화를 따라잡는 과정에서 시간차가 발생한 탓에 생겨난 결과적인 현상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 중에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 키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있다. 그 근거로 생물학적으로 남녀가 다르다는 것을 든다. 남녀의 생식기 구조와 더불어 이를테면 뇌 구조마저도 다르다는 사실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자의 뇌가 그 여자의 행동을 만드는 게 아니다. 길게 보면 그 여자의 행동이 그 여자의 뇌를 만든다. 그 남자의 뇌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여자와 남자를 구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출산을 할 수 있으면 여자, 할 수 없으면 남자이다. 수유를 할 수 있으면 여자, 할 수 없으면 남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고추가 있으면 남자, 없으면 여자라고 말한다.(고추의 상징성은 옛날 할머니들이 손자의 남성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종종 사용했던 “고추 떨어진다”는 위협적인 표현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여자만이 할 수 있거나 갖고 있는 온갖 것을 두고 굳이 여자에게 없는 것을 들어 차이를 말하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길들여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성경에서조차도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내서 만들어낸 파생형일 뿐이다. 하지만 태아의 성 분화 과정을 살펴보면 자연이 만든 기본형은 여성이고 여기에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 호르몬 옵션이 추가될 때 남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옵션 추가가 없으면 기본형인 여성이 탄생한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수정된 직후의 태아는 남녀 구분 없이 동일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테스토스테론에 노출되지 않을 경우 여성으로 발달한다. 우리의 신체 중에는 성 호르몬의 신호를 받으면 미리 정해둔 방식대로 발달하도록 약속된 세포들이 있기 때문에 성 호르몬이 분비되면 신체 구조가 변화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생식기 구조의 성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성 호르몬은 뇌 구조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성인의 뇌를 보면 영역별 신경세포의 개수라든가 크기, 연결 패턴, 밀도 등에서 다양한 성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면, 성 행동과 관련이 있는 특정 뇌 영역은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크다. 반면에 언어 기능과 관련이 있는 몇몇 뇌 영역은 평균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크다. 또 같은 일을 수행할 때 남자들의 뇌는 제한된 부분에서만 활동이 일어나는 데 비해 여자들의 뇌는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부분에서 활동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여자의 뇌와 남자의 뇌는 구성 방식뿐 아니라 일을 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마치 우리가 문서 작성을 위해 한글을 사용할 수도 있고 MS워드를 사용할 수도 있는 것처럼 그 여자의 뇌와 그 남자의 뇌는 다른 길을 통해서도 종종 같은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런데 성 호르몬에 의해 만들어지는 뇌 구조의 성 차이를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역설이 발견된다. 남자의 뇌를 만드는 데 남성 호르몬이 필요하긴 하지만 실제로 뇌 구조를 남성화하는 것은 남성 호르몬이 아니라 여성 호르몬이다. 그렇다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왜 필요할까? 그 답은 호르몬 물질을 순환시키는 혈관의 벽을 통과해 뇌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물질이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데 있다. 뇌를 남성화하려면 여성 호르몬이 특정 뇌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여성 호르몬은 혈관 벽을 통과할 수 없다. 그래서 선택된 옵션이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 호르몬인 것이다. 뇌 안으로 들어간 테스토스테론은 효소의 작용에 의해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라디올로 전환돼서 남자의 뇌를 만든다.

여성 호르몬에 의해 남성화되는 뇌 구조, 그렇지만 남성 호르몬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다시 말해 여성 호르몬의 형태로는 혈관 벽을 통과해서 뇌 구조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이 흥미로운 역설을 통해 이 땅의 여성성과 남성성이 대립해서는 안 되는 이유 한 가지를 더 보태어본다.

 

현명한 분산투자자

어떤 패스트푸드 업체에서 기존의 채 썬 감자튀김 대신 통감자 메뉴를 선보이면서 중견 여자 탤런트 두 명이 등장하는 광고를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한 적이 있었다. 광고 속에서 통감자와 썬 감자 사이의 경쟁이 팽팽했는데, 우리 뇌가 작동하는 방식과 관련해서도 한때 그와 유사한 논쟁이 유행했다. 인간의 마음이 심장이 아니라 뇌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겨났던 것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기억하는 것 같은 마음의 모든 기능에 뇌 전체(즉, 모든 뇌세포)가 동등하게 개입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뇌도 나름대로 업무 분담을 하여 기능별로 뇌 구역을 나누어서 개입하는 것일까?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이 논쟁은 두 입장 사이를 오가며 한동안 엎치락뒷치락을 반복했는데 모든 기능에 뇌 전체가 동등하게 개입할 수 있다는 이른바 ‘통뇌’ 관점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새나 쥐, 개 같은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였다. 동물들에게 부분적인 뇌 손상을 입힌 뒤 행동을 관찰해보니 뇌의 어디가 손상되었는가에 관계없이 얼마나 넓은 면적이 손상되었는가에 따라 상실되는 기능이 달라지는 경향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뇌 전체가 어떤 기능이라도 맡아서 수행할 수 있는 비슷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뇌의 특정 부분이 손상되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얼마든지 그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이른바 ‘10% 속설’(사람은 평생 자기 뇌의 10%도 채 활용하지 못한다는, 터무니없는 속설)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이런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뇌 전체가 어떤 기능이라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뇌세포에 여분이 많다고 본 것이다(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반면에 뇌가 여러 영역으로 나뉘어서 기능을 분담한다는 ‘조각뇌’ 관점(정확한 전문 용어로는 국재화 관점)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뇌의 지극히 제한된 한 부분만 손상된 어떤 사람이 말하는 능력을 상실하였다는 사례보고이다. 말을 하는 능력은 상실되었으나 말을 알아듣는 능력이나 그 밖의 지적인 기능은 손상되지 않은 이 놀라운 사례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통뇌 관점이 판정패를 당하였다.


그러나 뇌의 일부분이 손상됐는데도 지능지수나 일상생활에 아무런 문제를 보이지 않는, 믿기 힘든 사례들 또한 종종 발견되고 있으니 뇌가 구역을 나누어 각각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조각뇌 관점도 완벽하지는 않은 셈이다. 이런 모순된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덧붙인 설명은 한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구역이 항상 뇌의 한 부분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군데 흩어져 있으면서 서로 긴밀히 공조하는 연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뇌의 각기 다른 부위에 흩어져 있는 구역들이 어느 정도 상호 보완적으로 기능함으로써 그중 한 부분이 손상돼도 기능 전체가 손상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재산도 위험을 피하려면 분산 투자가 현명하다고 하는데 우리 뇌야말로 경제적인 분산투자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혀보다 눈을 더 즐겁게 해주는 케이크 전문점 앞을 지나다 보니 여러 종류의 조각 케이크를 모아서 두루 맛볼 수 있게 해놓은 케이크 샘플러가 눈에 들어온다. 대개는 각기 맛이 다른 조각 케이크들로 샘플러를 구성하지만 오늘은 한번 분산투자형 조각뇌 방식으로 샘플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초콜릿, 치즈, 블루베리, 딸기, 치즈, 초콜릿, 딸기, 치즈 케이크 순서로….

 

버리는 지혜

유기농 식품이 유행이다. 건강을 각별히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다 보니 가격이 좀 비싸도 유기농 식품을 선호하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상추 같은 간단한 채소를 직접 길러 먹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 번이라도 상추씨를 직접 뿌려본 사람이라면 채소 상자 가득하게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상추 잎을 경이롭게 바라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추를 제대로 길러 먹으려면 그 촘촘하게 올라오는 상추 싹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아깝지만 어린 잎새들을 중간중간 뽑아내는 솎아내기를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상추 잎이 제대로 자란다. 제대로 자라기 위해 버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뇌가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도 버리는 지혜가 필수적이다. 버리는 것이 쉽지 않은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 만일 선택권이라도 주어졌더라면 참 큰일날 뻔했다. 상추의 어린잎을 솎아버리는 것은 그다지 아깝지도 어렵지도 않지만 내 뇌 속의 신경세포를 솎아내는 일을 내 손으로 해야 했다면 좀처럼 손을 대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다행히도 내 뇌는 주인인 나와 의논하지 않고 바깥세상과의 교류를 통해 스스로 솎아내기를 한다.

솎아내기를 통해 버려지는 것 중에 신경세포 자체도 있지만 가장 많이 버려지는 것은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통로이다. 하나의 신경세포가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을 맺는 것을 뇌 과학에서는 ‘시냅스’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두 신경세포가 접점을 만들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통로를 구축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신경세포는 일단 주변의 수많은 다른 신경세포들과 수없이 많은 접점, 즉 시냅스를 형성해놓은 뒤 바깥세상과 교감하면서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버릴지를 결정한다. 이때 버려지는 것들은 대개 하는 일이 시원찮은 연결 통로들이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보자. 인적이 드문 산이나 벌판에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생겨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다녀본 뒤에는 가장 다니기 편하고 빠른 길만 남고 나머지 길들은 다시 잡초에 묻혀버릴 것이다. 만일 그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어느 하나가 선택되지 못하고 모든 길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위험한 길, 멀리 돌아가는 길, 중간에 막힌 길 등을 미리 알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것이다. 우리 뇌의 신경 연결 통로 역시 그와 비슷한 시험 가동을 통해 쓸모있는 것만 남게 되는데 이것이 뇌 발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아기가 ‘자란다’ 혹은 ‘발달한다’는 말을 할 때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리는 이미지는 커지고 무거워지고 많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뇌 발달은 조금 다르다. 신경세포가 많다고 꼭 좋은 것이 아니고 신경 연결 역시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군살이 옷맵시를 망치고 군더더기 문장이 글맵시를 망치듯 쓰임새가 없는 신경세포와 신경 연결은 뇌 기능을 오히려 저하시키고 뇌 발달을 방해할 수 있다.

몸집을 불리는 것보다는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채식을 하고 식사 조절을 하고 운동을 하며, 기업들은 그래서 구조조정을 하고 조직개편을 하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불필요한 살, 불필요한 조직을 떼어내듯 불필요한 신경세포와 신경 연결을 아낌없이 버리는 지혜가 있기에 우리 아기의 뇌가 쑥쑥 자라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보는가

우리의 일상에서 시각 경험이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 오죽하면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이처럼 중요한 ‘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우리의 신체 기관은 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눈이 멀었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은 눈과 더불어 뇌가 있기 때문이다. 눈이 하는 일은 바깥 세상의 이미지를 카메라처럼 찍는 것뿐이고 그 이미지를 뇌로 보내서 해석하는 과정이 진행되지 않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미국에서 활동하는 신경외과 의사이면서 자신이 만난 뇌 질환 환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유명해진 올리버 색스 박사의 저서 가운데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첫 번째 글에 등장하는 사람은 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뇌에서 시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에 부분적인 손상을 입은 까닭에 자신의 아내와 모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당혹스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 눈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므로 사물의 부분적인 특성, 예컨대 뾰족하다거나 둥글다거나 길쭉하다거나 노란색이라거나 하는 것들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전체적으로 사람의 얼굴인지 아니면 모자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사물을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사물을 잡거나 들어올리는 등의 행동을 해야 할 때에는 그 사물에 매우 적절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연필과 사과를 눈앞에 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연필을 쥐거나 사과를 잡을 때의 손놀림은 매우 자연스럽고 능숙하다.

이와는 반대로 뇌의 시각 영역 중에서 또 다른 부분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눈앞의 사물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연필 혹은 사과라고 정확히 말하면서 막상 그 물건들을 손으로 잡아보라고 하면 그 물체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행동을 보인다. 예컨대, 엄지와 검지를 모아서 사과를 잡으려 한다든지, 손바닥을 펼친 상태로 연필을 잡으려 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들의 행동을 보면 이들이 눈앞의 사물이 무엇인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한데 막상 물어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시각 장애는 우리 뇌의 시각 영역에서 형태와 색깔을 해석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기능과 그 사물이 놓인 위치와 움직임을 분석해서 그것에 대해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이 분리돼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때에는 그 두 기능이 통합적으로 작용하므로 우리 의식 속에서는 보는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과정과 그 대상에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과정이 분리돼 있지 않다. 그 둘이 분리돼 표출되는 것은 뇌의 정상적인 작동 기제가 깨졌을 때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인식과 그 대상에 대한 행동이 분리되는 현상이 뇌 손상 환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알면서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전혀 몰랐음에도 제대로 행하는 경우도 있다. 눈앞의 사물에 대해 적절한 행동을 할 수는 있으나 그 사물에 대한 인식 혹은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 비극과, 눈앞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있으되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비극 중에 더 큰 비극은 어느 쪽일까. 인식과 행동의 괴리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의 시각은 그저 보기만 하라고 만들어진 것은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뇌는 행동주의자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말할 때 심리학자들이 종종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고등 인지 기능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지적인 기능 중에서도 수준이 높은 능력을 일컫는데 언어, 사고, 추론 같은 추상적인 능력들이 대개 이 범주에 들어간다. 인간의 고등 인지 기능은 우리 뇌의 피질(껍데기) 중에서도 앞쪽 부위에 해당하는 전두엽에서 수행된다. 전두엽의 기능은 대뇌 피질의 다른 부위에서 처리된 시각, 청각, 촉각 등 온갖 지각 정보들을 총망라해 시시각각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해석하고 그 상황에 가장 적절한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반면에 시각, 청각 등의 지각 과정은 외부 세계의 정보를 입수하는 데 주목적이 있으며 이들 처리 과정의 결과물은 전두엽에서 상황을 판단할 때 요긴하게 활용된다. 이러한 지각 과정 덕택에 우리는 저만치 앞에서 다가오는 버스가 우리 집에 가는 버스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고, 멀리서 외치는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지각 처리 과정은 그때그때 나타나는 시각 혹은 청각 자극 자체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제공할 뿐 그것이 나의 의도나 목표, 계획(예컨대, 오늘만큼은 일찍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싶은 바람) 등과 어떻게 연결되며 나에게 어떤 함의를 주는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전두엽의 기능을 이야기할 때 ‘뇌 경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기업의 최고경영자 역할에 비유하기도 한다. 뇌에 입력되는(때로는 뇌가 이미 ‘기억’이라는 형태로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전두엽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용하는지에 따라, 마치 식재료가 같아도 조리법이나 조리사의 솜씨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가 만들어지듯이 전혀 다른 솔루션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두엽은 우리 뇌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고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고등한 특별 기능이 자리하고 있는 전두엽에 전혀 특별하지도 고등하지도 않은 ‘운동 기능’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운동 기능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는 데 특별히 기여하는 바가 없어 보이는, 모든 동물들이 별반 차이 없이 보유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기능이다. 그런 운동 기능이 왜 인간의 수많은 인지 기능 중에서도 ‘고등한’ 기능들만 모여 있는 전두엽에 자리를 잡고 있을까? 진화의 사다리에서 상대적으로 하위에 놓인 운동 기능과 최상위에 놓인 고등 인지 기능을 한데 묶어 서로 이웃하도록 설계해놓은 조물주의 저의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의문은 우리 뇌의 궁극적인 기능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아마 이에 대한 대답은 전두엽이 수행하는 고등 인지 기능을 통해 매순간 최적의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두엽이 내놓는 솔루션은 추상적인 형태(예를 들면 결심이라든가 결정 같은 마음상태)이다. 추상적인 솔루션 자체는 현실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금연 혹은 주 3회 운동 같은 ‘결심’을 해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전두엽의 솔루션은 ‘행동화’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고 행동화는 운동 기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뇌의 복잡하고 오묘하고 경이로운 온갖 기능들은 결국 우리 근육, 몸을 움직이기 위해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해주는 것은 고등 인지 기능 자체가 아니라 고등 인지 기능의 지원을 받는 운동 기능이 아닐까? 뇌와 몸(근육)의 연결이 빈약하신 분들은 깊이 반성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