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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의 사나이 강희락 경찰청장

醉月 2009. 10. 16. 08:57

대운의 사나이 강희락 경찰청장
“운은 만들고, 때는 기다리는 것이다”

 이정훈│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

중요한 시험을 앞두곤 열병을 앓아야 했던 소년, 중년이 되도록 낙방을 거듭한 낭인이 치안총감을 두 번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적수공권이던 그는 ‘가요반세기’란 별명과 ‘강희락주’란 말을 만들면서 운을 더해갔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순응하며 기다림으로써 때를 만났다.

강희락(57) 경찰청장과는 경찰 문제 전반을 놓고 인터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면한 강 청장은 흥미로웠다. 기자 앞에서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활달한 그에겐 딱딱한 일문일답보다는 인물연구가 제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준비한 질문서는 탁 접어버리고 그의 삶을 따라가 들어보기로 했다.

6월4일 저녁 8시30분쯤 경찰 간부들이 모여든 수원의 G식당에선 도청 문제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경기도의 신생 통신사 기자 A씨가 상사 지시로 강 청장과 경기경찰청 간부들이 회식하기로 한 방에 MP3를 설치한 게 발각된 것. 틀림없이 폭탄주가 돌 것으로 예상하고 이런 준비를 했는데 너무 엉성해 들통 나버린 것이다.

경찰과 검찰, 군대 그리고 신문사만큼 폭탄주를 많이 돌리는 데도 없을 것이다. 이렇다보니 가장 센 사람들을 필두로 전설이 생겨난다. 검찰에서는 박만 전 수원지검장이 제일 셌고, 경찰에서는 강 청장이 최고라는 전설이 그것. 독한 폭탄주를 쭉 들이켜면 “크!~” 또는 “흐~”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리하여 생겨난 말이 검찰의 박‘흐’만주(酒)와 경찰의 강희락주(酒)다.

이 통신사가 기대한 것은 강희락주가 도는 순간이었다. 경기경찰청을 순시하러 온 경찰청장이 폭탄주를 돌리는 현장을 찍고 녹음해 공개하면 특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상사는 구속되고 잘못을 뉘우친 A씨는 불구속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경찰에서는 ‘강희락의 10년 대운(大運)’이 회자됐다. 그의 운은 그것만이 아니다.

 

강희락酒 vs 박‘흐’만酒

이에 앞서 그는 경찰청장에 내정됐다 사퇴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과 오랫동안 선의의 경쟁을 벌여왔다. 김 전 청장은 용산 참사로 정상에 오르는 계단에서 내려와야 했다. 쌍용차 사태는 제2의 용산 참사로 비화할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그는 치밀한 ‘야금야금’ 전법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는 64년 경찰 역사에서 치안총감을 두 번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지난해 3월 그는 치안총감으로 해양경찰청장이 됐다가 1년 뒤 친정인 경찰청의 총수로 돌아왔다. 그의 기록은 이것만이 아니다. 2000년 12월 경무관이 된 그는 2년 예정인 경찰청장 임기를 무사히 채운다면 10년간 ‘경찰의 별’을 단 유일한 인물이 된다.

그런데 경찰에서는 “강희락의 대운은 10년 더 남아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왜 그에게는 ‘운 좋은’이라는 관형어가 붙어 다니는 것일까.

1952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그는 가정 형편상 일찍 취직할 생각으로 대구공고에 가려고 생각하다 고교 지리교사를 하던 숙부로부터 “대학을 나와야 취직도 잘 된다”는 야단을 듣고 경북대부고에 들어갔다. 2학년 때 이과 전체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그러나 고3 여름 호된 열병을 앓는 바람에 서울대 71학번이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해 고려대 법대에 합격했는데 입학 동기가 홍준표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최낙정 전 해양수산부 장관, 이승재 전 해경청장 등이다. 대학생 시절 ‘민사법학회’ 서클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4학년 때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 졸업 직전인 1976년 1월 1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고려대 대학원에 들어가 2차를 준비했지만 2차 시험에 계속 떨어지면서 길고 긴 ‘고시 낭인’ 생활에 들어갔다. 대학원을 마친 그는 고시촌으로 유명한 대구 팔공산 인근의 도학동에 들어가 고시를 준비했으나 역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1978년 12월 육군에 입대해 양구의 2사단에서 30개월을 근무했다. 이렇게 힘들고 고독한 시간을 보낼 때 그는 중대한 인생 변곡점을 맞았다. 첫 휴가를 나와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지금의 부인 김정미(53)씨와 맞선을 본 것. 그는 대뜸 “나는 사시를 공부해야 하니까, 여자가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의 입심이 좋았던 덕분인지 결국에는 인연이 맺어졌다.

1980년 6월 제대하기 전 그는 또 사시 1차에 붙었다. 그런데 제대하자마자 미래의 장인이 “직업도 없는 사람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바람에 그해 가을 서울신탁은행에 들어갔다. 은행 입사 1주일 후 그는 김씨와 결혼식을 올리고 5개월 후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고려대 고시반에 적을 두고 사시 준비에 들어가 오랜 노력 끝에 1984년 26회 사시에 드디어 합격했다.

 

힘들었던 고시 낭인 시절, 자리를 지켜준 아내

그가 어렵게 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교사를 하던 그의 아내는 묵묵히 가정을 지켰다. 이듬해 사법연수원에 16기로 들어간 그는 함께 합격한 고려대생 중 9년 후배인 81학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300여 명의 연수원생 그는 스무 번째로 나이가 많은 원로였다.

3년의 연수원 생활을 마치는 그가 진로를 걱정하고 있을 때 그보다 2년 앞서 사시에 합격해 경찰에 들어간 고려대 법대 동기생 이승재 경정이 “나이가 많으니 경찰에 오는 게 좋겠다”라고 권했다. 그 말에 이끌려 연수원 동기 여덟 명과 함께 경정으로 경찰에 들어간 그는 첫 보직으로 충주경찰서 경비과장을 맡았다.

그 시절 대학가 운동권은 격렬한 데모를 자주 벌였는데 충주에는 건국대 분교가 있었다. 경비과장의 주요 임무는 이 학교의 데모를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충주서에는 시위진압에 투입할 전경중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치장을 지키거나 입초(보초)를 서는 전경들을 차출해 1개 소대를 만들고, 직원들까지 동원해 간신히 3개 소대를 꾸려 데모 진압에 나섰다.

강희락 경찰청장이 리더십과 운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세상은 돌고 돈다. 연수원 때만 해도 많은 나이가 고민이었는데 경찰관이 되자 많은 나이가 그를 도왔다. 사시 출신이라고 새파란 사람이 과장이면 부하들은 쉬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 35세인 그는 제법 과장 티가 났다. 그리고 ‘가요반세기’란 별명에 걸맞게 밤무대에서 분위기를 휘어잡을 줄 알았으니 직원들은 그를 따랐다. 건대 분교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다른 과 직원들을 동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이다.

당시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88서울올림픽 준비였다. 1988년 여름, 전국을 도는 성화 주자가 두 번 충주를 지나갔는데, 이 성화 봉송로를 안전하게 지키는 게 경비과의 임무였다. 그는 지프를 몰고 충주시내 곳곳을 다니며 충주에 정이 푹 들었지만 곧 발령을 받아 청주경찰서 대공과장으로 옮겨갔다.

청주서 대공과는 청주 시내 3개 대학 시위를 막고, 대통령 전용 별장인 청남대를 관리하는 게 주 임무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공(지금은 ‘보안’이라 한다) 형사들은 나이가 많아서인지 의욕이 적은 이가 많다. 따라서 운동권 학생을 잡아와 조사하다보면 ‘말발’에서 현저히 밀릴 수밖에 없다. 그는 즉시 대공간부연수 부소장을 하고 있던 이승재 경정에게 유물사관과 변증법, 민민투와 자민투에 관한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매일 발표하게 했다.

그렇게 직원들을 교육시키고 있는데 청주공단을 관리하는 청주서부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그곳은 강력사건이 많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수사 형사들의 힘이 의외로 강하다. 형사들은 계급과는 별개로 자기들끼리의 대장이 있어 그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수사과장은 말만 과장이지 허수아비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는 술잔을 들고 철옹성 같은 형사 세계를 단박에 뚫고 들어갔다. 삼겹살 집에 30여 명의 형사를 모은 그는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잔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열 잔을 받고 나니, 두세 바퀴를 돌아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주잔을 전부 맥주잔으로 바꾸게 하고 소주를 가득 채워 건배를 제의했다. 그렇게 한 잔을 털어넣고 다시 한 잔을 채워 마시자고 하니 형사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두 번째 잔을 붓고 난 후 “2차 갈 사람 따라오라”고 하니 간부를 중심으로 서너 명만 따라 나왔다.

이 회식을 계기로 그는 형사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청주서부서에서 검찰로 보낸 사건 송치서류 가운데 상당수가 ‘부적절 의견’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검찰에서 송치서류의 의견이 법조항과 맞지 않다며 되돌려 보냈기 때문이다. 사시 합격자인 그는 단박에 문제점을 알았다. 당시 일선서에서는 직원이 수사과장의 도장을 관리하며 검찰 송치서류에 의례적으로 도장을 찍는 게 관례였는데 그는 직접 송치서류를 본 후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렇게 하자 반송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는 송치서류를 쓰는 조사계 직원들을 모아놓고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강의하며 송치서류를 제대로 만들도록 했다.

 

기자단과 충돌하다

이런 일들이 소문나면서 경찰청 본청의 관심을 받은 그는 서울로 올라가면서 새로 만들어진 보직인 경찰청 공보분석계장을 맡게 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경찰은 언론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언론에서 경찰을 ‘조지면’ 경찰은 국회와 행정부의 동네북이 됐다.

이에 김우현 당시 치안본부장이 술 세고, 입심 세고, 글 잘 쓰는 기자들을 상대하려면 그만한 직원을 내세워야 한다고 판단해 그를 지명한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그가 기자실을 찾아가 첫 인사를 하자, 단박에 기자단은 “경정이 뭔데 인사를 와. 우리는 경무관 인사도 안 받아” 하고 들이받았다. 순간 자존심이 상한 그는 한바탕 속 감정을 퍼붓고 사표를 쓴 후 청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변호사 개업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김우현 본부장이 찾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다시 올라와 공보분석계장직을 수행하게 됐다.

다시 기자들을 성정이 만나보니 동아일보의 한진수 기자(연세대 출신)를 제외하곤 전부 그보다 젊었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김민배 기자를 필두로 절반 정도가 고려대 출신이었다. 기자들은 형사들과 비슷해 거센 것 같아도 한번 ‘통’하면 쉽게 마음을 연다. 그는 기질적으로 비슷한 기자들과 금방 하나가 됐다. 언론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경찰관을 뽑는 시험을 관리하는 고시계장으로 발령받아 문제도 출제하고 시험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경찰의 채점 방법이 영 구식이었다. 대입 수능을 비롯해 대부분의 시험은 OMR 카드를 이용해 금방 채점하는데, 경찰은 키펀치로 쳐서 채점하고 있었다. 그는 당장 OMR 카드로 채점하는 방식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경찰관 당락을 결정짓는 인성검사 문제를 보니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엉터리였다. 그는 한국심리학회를 찾아가 경찰관에게 맞는 인성검사 자료를 만들어달라고 해 이를 적용했다.

이어 경찰 전체 살림을 책임진 경무국에서 그를 경무계장으로 불렀다. 경무계장은 경찰의 꽃인 총경으로 진급하는데 유리한 요직. 하지만 경찰청이 발표하는 신년사 송년사를 포함한 모든 연설문을 작성하는 어려운 자리였다. 경찰을 속속들이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 많기에 경찰의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이 총경으로 올라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치는 요직이란 인식이 있었다.

이 자리를 거치지 않아도 진급할 방법이 많은 사시 출신은 결코 오지 않는 자리였다. 그는 경무계장 보직을 ‘천당과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지옥은 일 때문이었고 천당은 경찰 전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 그는 백발이 되었다. 그런데 진급을 하려면 백발을 감추는 게 좋겠다는 선배들의 조언으로 염색을 했고 지금도 염색을 한다. 경무계장을 마친 그는 ‘드디어’ 총경으로 진급해 경북 청도경찰서장으로 나갔다.

수사형사들은 이따금 총을 소지하고 출동할 때가 있다. 그러나 형사라고 해서 모두 사격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선천적으로 사격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용의자와 1대 1로 맞닥뜨렸을 때 기싸움에 눌려 사격에 실패하는 이도 많다. 그는 눈이 아주 밝다. 군에 있을 때 특별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지만 권총 사격을 아주 잘했다. 청도 같은 시골에서는 이따금 시골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 강력사건이 일어난다.

히로뽕을 즐기는 한 사내가 추종자들과 함께 한 사람을 죽이고 또 한 사람의 손목을 자르고 도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내가 왜관에 숨어 있다는 첩보가 오자 서장인 그는 “형사들 니들, 사격에 자신 없으면 총 들지 말라. 내가 놈의 다리를 쏴서 잡으마” 하고 권총을 들고 출동했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그는 사시에 합격한 단순한 책상물림이 아니라,

순간 싸움을 할 줄 아는 무인 기질의 소유자인 것이다.

 

시위 종말처리장

그리고 경기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경기도지사 후보를 뽑기 위한 민주당 경선에서 돈 봉투가 뿌려진 일이 발생했다. 그 사건을 수사하면서 그는 또다시 기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어 전국에서 가장 사건이 많다는 경기 부천중부서장이 되었다. 이런 곳에서는 경찰협력단체와 관계가 좋아야 한다. 그는 ‘가요반세기’ 실력으로 청소년선도위원회 같은 협력단체 관계자들을 휘어잡았다.

이어 본청 지능과장이 돼 1997년 대통령선거를 지켜봤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경찰에도 인사폭풍이 불었고 그는 경찰서 건제(建制) 1번인 서울 중부경찰서장이 됐다. 이때는 외환위기 후폭풍으로 실직한 사람들이 벌이는 시위가 많았다. 시위는 주로 종로서 관할인 대학로나 남대문서 관할인 서울역광장에서 시작돼 중부서 관할인 명동성당으로 옮겨가는 형태였다.

이들을 선도하는 종로서의 임무는 광교에서, 남대문서의 임무는 중앙우체국 앞에서 끝난다. 이곳까지 오면 두 경찰서 측은 “열어줘, 열어줘” 하면서 시위대가 명동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이를 경찰 세계에서는 인접 관할지역으로 ‘퍼준다’고 한다. 이렇게 명동으로 들어온 시위대는 시위가 끝날 때까지 농성을 거듭한다. 그래서 시위 문제와 관련해 중부서에 붙은 경찰 내의 별명이 ‘종말처리장’이다.

그는 거의 매일 진압복 차림으로 명동성당 건너편 골목길에 의자를 놓고 앉아 기동대장과 함께 시위를 지켜봤다. 이 지긋지긋한 임무를 그는 놀이로 견뎠다. 당시 중부서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쌍용빌딩 근처에 있는 맥주집이 유명했는데, 일과가 끝나면 그는 그곳에서 취재하느라 하루 종일 뛰어다닌 기자들과 스트레스를 푸는 강력한 뒤풀이를 했다. 그리고 서울청 형사과장을 맡았다.

그는 형사기동대를 팀별로 나누고, 수사를 잘하는 팀에겐 수사비를 더 주겠다, 가장 잘한 직원은 베스트 형사로 선정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경쟁이 붙으면서 서울청의 미제사건들이 잘 풀려나갔다. 강영권 경장은 아홉 번이나 베스트형사로 꼽히는 기적을 만들었다.

기자와 형사는 세상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직업군일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 세계엔 독특한 동아리 의식과 직업정신이 있어 일반인은 접근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쉽게 뚫고 들어갔다. 이런 그를 이무영 청장이 불러들여 경찰의 ‘별’인 경무관으로 진급시키고 공보관을 맡겼다. 또다시 기자들과 격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당시 주요 신문들은 저녁 7시쯤 가판을 내고 있었다. 이 가판을 보고 경찰 관련 내용 중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언론사를 찾아가 바꾸게 하는 것이 그의 주임무였다. 다행히 주요 언론사 사회부장 중 고려대 출신이 많았다. 그는 특히 고려대 법대 동기인 육정수씨가 사회부장으로 있는 동아일보를 자주 찾아갔는데, 육 부장은 그를 가리켜 “우리 둘 중에 하나는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리고 떠난 것이 워싱턴 주재관이었는데 가자마자 9·11테러를 겪어 관련 정보를 본청으로 보내고, 최규선 게이트로 인해 미국으로 도피한 최성규 전 총경 사건도 정보보고를 하느라 뛰어다녔지만 그는 모처럼 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년여 만에 돌아와 본청 정보심의관을 하다 치안감으로 진급해 본청 수사국장이 되었다. 전국의 경찰 수사를 지휘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제도 개선으로 조직을 살린다

수사국장 시절 그는 노건평씨 처남인 민경찬씨가 일으킨 사건과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 수능 부정사건 등을 처리하며 특유의 순발력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대구청장으로 가 먼저 경북경찰청장으로 가 있던 김석기 치안감과 조우했다. 경북경찰청도 대구 시내에 있어 두 라이벌은 자주 만나 어울렸다. 얼마 후 부산경찰청장으로 이동했는데 부산의 주업인 관광을 육성하려면 치안이 잘되는 평화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2007년 그는 치안정감으로 경찰청 차장이 되면서 또 고비를 맞았다. 이택순 청장 이후 청장 자리를 노렸으나 노무현 정부는 어청수 서울경찰청장을 경찰청장에 임명했다. 그로서는 옷을 벗어야 하는 순간이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그를 치안총감으로 진급시켜 해양경찰청장을 맡겼다. 그런데 그해 9월 목포해양경찰서가 불법어로를 하던 중국 어선을 단속하다 경찰 1명이 중국 선원이 휘두른 둔기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해경함정이 불법 조업어선을 잡기 위해 요원들을 태워 보내는 고무보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모보트가 딱딱해야 탁 차고 오르는데 그게 안 돼 상대 어선의 난간을 붙잡고 올라야 했다. 이때 선원들이 둔기로 난간을 잡은 손을 때리면 해경요원들은 바다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즉시 고무보트에 딱딱한 발판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해경청장을 끝으로 마감할 줄 알았던 경찰생활이 어청수 처장의 후임자로 내정된 김석기 서울청장이 사퇴하면서 이어졌다. 그는 1년 만에 경찰청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촛불시위로 홍역을 치를 때 경찰은 기동대 버스를 일렬로 세워 시위대를 막는 ‘차벽(車壁)’을 설치했다. 그러나 버스는 방호막을 치지 않았기에 시위대가 부수고 불을 지를 수 있었다. 해경청장으로 이를 지켜본 그는 위로 감아올렸다가 내리는 차고의 ‘셔터’ 같은 것을 제작해 기동대 버스에 올리게 했다. 그리고 시위대가 오면 이를 내려 버스를 보호했다.

경찰의 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수사와 정보다. 수사가 눈에 보이는 경찰의 업무라면 정보는 보이지 않지만 더 중요한 업무다. 경찰을 흔드는 일은 안팎에서 일어난다. 안에서는 내부 비리가, 밖에서는 언론이 주로 그 역할을 한다. 조직을 움직일 줄 아는 그는 경찰대 1기 출신 중 선두로 달려온 윤재옥 치안감을 정보국장에, 조길형 경무관을 내부조직을 살펴볼 감사관에,

김호윤 경무관을 언론을 담당할 대변인에 포진시켰다.

이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잘 하기 때문에 맡긴 것이다. 그리고 참모들이 해주는 ‘쓴소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의 이름을 반복해서 읽으면 ‘희희낙락’이 된다. 똑똑한 사람이 해주는 싫은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들을 경쟁시킬 수 있다면 그는 즐거운 조직을 이끌 수 있다. 강 청장은 사람을 붙잡을 줄 알았기에 운을 만들 수 있었고, 안 되면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기에 때를 만날 수 있었다. 그를 붙잡고 10년 대운을 물어보았다.

-경무관이 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한다는데 두 번 치안총감이 됐으니 강 청장은 어떤 줄기를 잡고 있는가.

“증조부모와 조부모 산소가 고향의 밭머리에 있는데 남들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산소는 내가 나기 전에 쓴 것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길을 가다가도 길 모르는 사람이 딴 사람에게 묻는 것을 들으면, 내가 나서서 가르쳐준다. 사시에 붙었다고 하지만 경찰에 왔을 땐 비빌 언덕이 하나도 없었다. 서울에 있는 지인이라고는 교사를 하는 숙부가 유일했다. 퇴로가 없었기에 남보다 좀 더 열심히 했고, 내 잘못으로 인해 욕을 먹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것이 내가 잡은 줄기가 아니겠는가.”

 

10년 대운은 남아 있는가

▼ 앞으로 남은 10년 대운은 무엇인가.

“그런 게 진짜로 있겠나? 하지만 없어도 있다고 해야 직원들이 나를 믿고 따른다. 리더십의 9할은 ‘나를 따르라’고 이끄는 것인데, 나를 따라오면 일이 잘된다는 믿음이 있어야 따라올 게 아닌가. 아직도 10년 대운이 더 남았다고 믿고 열심히 하면 그런 운이 정말 찾아온다.”

수장과 조직은 불가분의 관계다. 청장이 편안하면 경찰이 편안하고, 경찰이 편안하면 나라가 편안해진다. 강 청장 취임 후 경찰은 쌍용차 사건, 두 차례의 전직 대통령 국민장, 국장 행사 등 큰일을 무리 없이 처리했다. 대운이 정말 그와 함께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