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산성기행 | 남한산성
숨쉬는 역사
백제사는 어디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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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 유적지를 찾기 위해서는 서울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은 백제 유적지 하면 흔히 공주나 부여만 떠올린다. 그러나 백제가 서울을 도읍으로 삼았던 기간은 493년이고, 웅진·부여가 도읍지였던 기간은 185년이다.
서울은 백제의 500년 도읍지다. 그럼에도 서울은 백제의 고도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 대해서만 설명하겠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 죽이기에 나섰다. 그 중요한 논리 중 하나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김부식이 자의로 창작한 것이라는 희한한 논리다.
김부식이 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해야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아니 밝힐 수가 없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고분군이 서울, 그것도 롯데월드가 멀리 보이는 강남 중심부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지하철 8호선 석촌역에서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1917년만 해도 60여 기의 고분이 남아 있었지만 백제사에 대한 무지와 개발 바람에 다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불과 8기만 남아 있다. 석촌(石村)이라는 지명 자체가 ‘돌마리’ ‘돌마을’ 등으로 불린 데서 나온 것이다.
그만큼 돌이 많은데, 돌로 무덤을 축조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장법(葬法)이었다. 대부분 적석총이지만 토광묘도 존재하는데, 길이 10m, 폭 2.6~3.2m, 높이 0.8m의 대형 토광 안에 8기의 목관을 나란히 안치했다. 토광묘는 백제 건국세력이 남하하기 전부터 있던 토착세력의 묘제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중 가장 큰 3호분은 기저부가 50.8m×48.4m로 압록강 대안 지안(集安)시에 있는 고구려 국내성의 최대 적석총인 태왕릉과 비슷한 크기다. 무너진 적석 사이에서 기와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정상부에 향당(享堂) 등 목조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호분을 처음 보는 일행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탄성이 흘러나온다.
이 거대한 3호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통설은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에서 무슨 명문(銘文)이 나왔다거나 하는 구체적 사료에 따른 견해는 아니다. 백제는 3~4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때문에 이런 큰 무덤은 근초고왕 이후에나 만들어질 수 있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다.
백제가 3~4세기 들어서야 고대국가로 발돋움한다는 논리 자체가 일제 식민사학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창안해낸 인물은 조선사편수회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다. 그는 1919년 발간한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의 부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 같은 일본 기록에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관을 설치했다고 나오지만 <삼국사기>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그 시기에 한반도 중남부에는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쓰다 소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상대(上代)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다”고 서술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장했으면서도 많은 학자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한 것은 그 스스로 논리가 궁색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서도 객관적 고대사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국수적인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는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희한하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신봉하고 있다. 그 결과 백제는 <삼국사기> 기록대로 서기전 1세기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 서기 3~4세기에 건국되었다는 등의 백제사 깎아 내리기가 정설로 행세하는 것이다. 이렇게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개발론자들에 의해 유적은 파괴되었지만 가까스레 살아남은 일부 유적은 백제사의 진실을 상처 입은 몸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석촌동뿐 아니라 가락동·방이동·광장동과 하남시 금암산에도 백제고분군이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한성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몽촌토성·춘궁리 등과 인접해 있다. 석촌동을 비롯한 백제고분군은 만주 지안의 국내성을 생각하게 한다. 국내성의 배후산성인 환도산성 아래 고구려의 떼무덤이 있는 것처럼 백제도 도성 영역 내에 거대한 고분군을 조성했던 것이다.
도성 영역 안에 국왕이나 왕족, 혹은 귀족의 집단무덤을 배치하는 고구려식 장법을 백제인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라는 문헌사료와 서울 일대의 각종 유적·유물은 백제가 서기전 1세기에 한강변에 국가를 건국해 빠른 속도로 팽창했음을 말해준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가락동·방이동·광장동의 백제고분을 거닐면서 2000년 전 만주에서 남하해 이곳에 거대한 고분을 세운 선조의 혼과 교감해 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감회를 느낄 것이 분명하다.
롯데월드에서 멀지 않은 강남 중심부의 백제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인 3호분. 기저부가 50.8m×48.4m로, 지안(集安)시에 있는 고구려 최대 적석총인 태왕릉과 비슷한 크기다. |
이성산성과 남한산성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는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다. 해발 209m로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올라가보면 시야가 확 트인 전형적인 요새지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인접해 있고, 한강 본류와 남한강·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도 보인다. 둘레는 약 1.7km, 높이 6~7m 정도로, 한양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한 결과 성문지·저수지, 제사유구로 추정되는 건물지 등과 함께 여러 유물이 발굴되었다.
발굴 유물로 볼 때 한성백제 후기에 축조돼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점유되었고 통일신라시대 이후 점차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二聖)’이라는 이름이 심상찮다. 신라에서는 시조 박혁거세와 그 비 알영을 이성이라고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태조와 태종처럼 두 임금을 지칭할 때 이성이라고 표현했다.
백제는 시조 온조와 그 모친인 소서노, 또는 부여 시조 동명이나 주몽과 온조를 합쳐 이성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성산성은 근초고왕 때 일시 천도했던 한산(漢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재위 26년(371)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고구려의 보복전에 대비해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는데, 이성산성이 이때의 한산이라는 추측이다. 또한 백제 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이 고구려와 혈전을 벌이다 아차산성에서 처형되기 직전까지 전투를 벌인 최후의 격전지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한강의 풍부한 물과 광범한 평야지대를 아우를 수 있는 산성이기에 빼앗고 빼앗기는 혈전을 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이성산성이 무너지면 최후의 방어선은 남한산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남한산성이 백제 도성의 배후 산성이었다는 문헌기록은 없지만 관방(關防·방어시설)이 가장 중요했던 고대에 남한산성 같은 천험의 요새를 방치했을 리 없다. 물론 지금은 병자호란의 격전지로 더 유명하다. 남한산성 답사는 남문관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남문관식당의 이종화 사장은 남한산성에서만 23대째 내려오는 광주 이씨의 후손이라는데, 이런 연유 때문에 남한산성의 역사에 해박하다. 두부전골의 맛이 깔끔하다. 식사를 끝내고 북문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북문에서 상사창동에 이르는 계곡길은 과거 수운을 통해 운반해온 세미를 등짐으로 산성까지 나르던 통로다.
북문에서 안쪽으로 포장된 길이 있고, 바깥쪽으로 성벽을 따라 걷는 코스가 있다. 성밖 코스가 성의 모습과 험준한 바깥지형을 함께 볼 수 있어 좋다. 한참을 걸어가니 최근 복원한 연주봉 옹성의 성벽이 나타났다. 옛 기록에는 포루(砲壘)라고 표기돼 있어 포대를 설치했던 장소임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20여 개가 넘는 포루가 있었다. 천험의 지리에 강력한 방어무기까지 갖추었기에 막강한 청(淸)나라 군사도 점령하지 못했던 것이다. 옹성 끝의 포루에 올라서면 발 아래로 춘궁동과 조금 전 올랐던 이성산성이 보이고, 멀리 아차산 일대와 한강도 보인다. 남한산성에 오를 때마다 착잡하다.
전쟁도 정치의 일부일진대 외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광해군 15년(1623) 3월 발생한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는 외교를 선택 가능한 정치의 일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다. 효(孝)와 충(忠)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할 유학자들이 군부(君父)를 내쫓으려니 명분이 필요했다.
서인들은 그 명분을 독특한 군주론에서 찾았다. 자신들의 군주는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라는 것이다. 조선의 군주는 명나라 황제의 신하인 제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후인 광해군이 명과 후금(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펴 임금을 배신했으니 광해군을 내쫓는 것은 황제에 대한 충성이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은 데 대한 반발은 거셌다. 그해 8월 김덕원(金德元) 등이, 10월에는 황현(黃晛) 등이 사형당했는데, 모두 쿠데타에 반발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인조 2년(1624) 광해군 때 좌의정이었던 박홍구(朴弘耉)가 사형당한 것도 쿠데타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황한 의정부는 ‘통유문(通諭文)’을 반포했는데, 그 중 “전후 여러 역적의 공초나 흉한 격문에서 말한 바는 다 동일하게 ‘폐주를 마땅히 봉환(奉還·받들어 모시고 돌아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지금의 반정은 정(正)이 아니다”라고 반발했다는 말도 적고 있다. 쿠데타에 대한 반발이 거셀수록 인조정권은 친명반청 정책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안도 철산 가도(캯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했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숱한 해악을 끼쳤고 후금을 자극했다.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는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했다. 남한산성에는 다섯 장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서장대인 수어장대만 남아 있다. 단층이던 것을 영조가 2층 누각으로 증축했다. |
모순에 빠진 인조정권
인조 5년(1627) 1월 청 태종은 대패륵(大貝勒)·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으니, 이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향도(嚮導·길잡이)는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 도주한 조선인 한윤(韓潤)이었다. 후금군의 기세를 묻는 인조의 질문에 이원익은 “철기(鐵騎)로 거침없이 쳐들어온다면 하루에 8∼9식(息·1식은 30리)을 달릴 수 있습니다”라고 답변했으니 서울까지 닷새 속도였다.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큰소리치던 모문룡은 후금군이 철산을 공격하자 신미도(身彌島)로 재빠르게 도주했다. 인조가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에게 “군병의 숫자를 아는가” 하고 묻자 “모른다”고 답변했다. 인조가 “판서가 군병의 숫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힐난했으나 이것이 친명반청의 기치를 높이 든 쿠데타 정권의 현실이었다.
대간에서 인조에게 도성 결사 사수론을 제기했으나 인조는 “태반은 현실성이 없는 의논”이라고 반대하고 세자에게 분조(分朝)해 전주로 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들어갔다. 이미 조선은 후금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해 3월3일 인조는 강화부 성문 밖에 단(壇)과 희생(犧牲)을 마련해 제천(祭天)하고 정묘약조를 맺었다.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은 후금은 철수했다. 정묘호란은 쿠데타정권의 무능을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어서 다시 쿠데타에 반발하는 봉기가 잇따랐다. 쿠데타에 대한 반발이 거셀수록 인조정권은 후금 적대정책을 강화해야 하는 모순에 빠졌다. 반면 후금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청 태종은 1635년(인조 13) 찰합이(察哈爾·차하르)를 정벌해 전 몽골족을 병합하고 이듬해 4월 국호를 청(淸)으로 개칭했다. 청 태종이 황제를 자칭하면서 조선을 ‘너의 나라(爾國)’라고 비하하는 국서를 보내자 문신들은 격분해 전쟁불사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쟁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묘호란 이후 9년이 지났지만 국방력은 전혀 강화되지 않고 있었다. 판윤 최명길(崔鳴吉)은 인조 14년(1636) 9월 “강물이 얼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인조는 묵묵부답이었고, 척화파는 최명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목청을 드높였다. 척화에 동조하자니 군사가 없고, 강화를 따르자니 쿠데타 명분을 부인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 인조정권이었다.
드디어 인조 14년(1636) 12월9일 청 태종은 1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으니,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청군은 조선의 허를 찔렀다. 조정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비롯한 여러 방어선에서 청군의 남진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은 선봉 마부대(馬夫大)의 기병부대에 백마산성을 우회해 곧바로 서울로 남하하라고 지시했다.
기병 선발부대는 산성들을 우회하며 질풍같이 남하했다. 개성유수가 청군이 개성을 지났다고 보고한 것이 14일이었으니 6일 만에 서울 코앞까지 남하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김경징·이민구·장만으로 강화를 수비케 하고, 세자빈과 봉림대군 등 왕족들을 강화도로 대피시켰다. 최명길이 홍제원 청군 진영에 가서 시간을 지연시키는 사이 인조는 세자와 강화도로 피란하려 했다.
그러나 마부대의 선발부대가 이미 서쪽 길을 차단한 상태였다. 인조는 시체가 나가던 수구문으로 빠져 나와 밤 2시께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12월15일의 일이었다. 인조가 서울을 떠날 때 <인조실록>은 “성(서울)안 백성 중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고 전해준다.
남한산성은 시세에 쫓겨 할 수 없이 들어간 장소였다. 1만3000여 명의 병력과 1만4000여 석의 양곡이 있었으나 땔감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남쪽에서 올라오던 근왕병은 청군에 패하고, 북문으로 나가 야습을 노렸던 결사대가 몰살하면서 성안의 사기는 위축되었다. 음력 12월의 혹한은 청나라 군사 못잖은 적이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던 인물이 쓴 <산성일기(山城日記)>에는 12월24일의 비참한 정경이 묘사되어 있다.
“24일 큰 비가 내려 성첩(城堞·성벽) 지킨 군사가 다 젖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상이 세자와 함께 뜰 가운데 서서 하늘에 빌기를 ‘금일 이에 이르기에는 우리 부자 득죄(得罪)함이니 일성군민(一城軍民)이 무슨 죄이겠습니까? 천도(天道)가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컨대 만민을 살리소서’라고 하니 군신들이 들으시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시더니, 미구(未久)에 비 그치고, 일기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城中人)이 감읍(感泣)하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25일 극한(極寒·극도로 추움)하다.”
이처럼 얼어 죽는 군사가 속출했다. 오늘(2월6일)이 음력 12월23일이니 바로 이맘때였다. 오랜만에 날이 풀렸음에도 산성에 오르니 꽤 쌀쌀하다. 엊그제 같은 추위라면 방한복도 소용없었을 것인데 변변한 방한장비마저 없었으니 얼어 죽는 군사가 속출했다. 농성을 계속하던 인조 15년(1637) 1월26일 비보가 날아들었다.
강화도가 나흘 전 함락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조정은 여전히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국서를 예조판서 김상헌이 찢으면서 통곡했고, 최명길이 다시 “대감은 찢으시지만 나는 도로 주워야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1월30일 인조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백관과 서문을 나서야 했다.
연주봉 옹성을 지나 성벽을 돌면 우익문(右翼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서문이 보인다. 인조가 세자와 함께 항복하기 위해 삼전도(三田渡)로 내려갔던 문이다. 임금이 거주하던 행궁터에서 서문은 우측이므로 우익문이다. 인조는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삼전도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서문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수어장대(守禦將臺)로 통하는 길이 연결된다.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는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는데, 남한산성에는 동장대 내·외, 서장대, 남장대, 북장대의 다섯 장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서장대인 수어장대만 남아 있다. 단층 누각이던 것을 영조가 이층 누각으로 증축하면서 ‘남한산성의 치욕을 잊지말자’는 뜻의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을 내렸다.
수어장대 뜰의 왼쪽에 응암·매바위 또는 장군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바위의 ‘수어서대(守禦西臺)’라는 글자는 수어사가 지휘하는 서장대라는 뜻이다. 매바위에는 이회(李晦) 장군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이회 장군은 산성 동남쪽 축성을 맡았는데 공사비도 부족한데다 완벽을 기하느라 기일을 넘기고 말았다.
이회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 공사비를 탕진했다는 소문이 돌자 조정은 참수형에 처했다. 이회 장군은 서장대 앞뜰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만약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목이 잘렸다. 이회 장군의 목에서 매 한 마리가 나와 바위에서 슬피 울다 사람들이 다가가자 날아갔다. 매가 앉았던 바위에 매 발톱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사람들은 장군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
수어장대 옆에는 이회 장군과 그의 처첩,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시는 청량당이 있다. 벽암대사도 팔도 도총섭(都摠攝)으로서 승군을 거느리고 남한산성 축성작업을 했던 승려다. 이회 장군과 벽암대사 외에 이회의 부인 송씨와 소실 유씨까지 모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두 사람은 삼남지방에 가서 축성자금을 마련해 돌아오던 길에 한강 삼전도에서 남편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송씨부인과 소실 유씨는 통곡하다 강에 몸을 던졌다. 그 후 안개가 자욱한 날이나 날이 어둑한 날 뱃사공들은 머리를 푼 여인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곡소리를 듣기도 했다. 환영(幻影)에 이끌려 한강변 무동도(舞童島) 바위섬에 부딪혀 파선되는 배들이 속출했다. 그래서 강변에 부군당(府君堂)을 짓고 송씨부인과 소실 유씨의 제사를 지냈다.
부군당은 1971년까지도 있다 한강개발사업으로 강의 지형이 크게 바뀌면서 현재는 표지석만 남았다. 남한산성 사람들은 죽은 이회 장군과 그 처첩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기 위해 도당신(都堂神)으로 모시고 해마다 음력 정월 초이튿날 청량당에서 도당굿을 차린다. 수어장대와 청량당을 나와 남문으로 향한다.
남문은 정조 연간에 개·보수하면서 ‘지화문(至和門)’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남문에서 남한산성의 남쪽 옹성을 향하는 길은 조금 가파르다. 계단을 올라 막바지 숨을 고르면 왼쪽으로 남장대터가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멀리 옹성이 내려다보인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개의 옹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제2 남옹성으로, 9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옹성은 남쪽에 3개가 집중 설치돼 있다. 동·서·북쪽에 비해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적군이 검복리 방면에서 완만한 계곡을 따라 올라와 해발 535m의 검단산 정상에 올라 화포를 쏠 경우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실제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대포 7~8문을 설치해 놓고 성안으로 사격을 가했다. 현재는 통신회사의 송신탑이 설치되어 있다. 제2 남옹성 내 초석에는 옹성을 쌓은 관원의 이름과 관직명, 그리고 니장·야장·석수·목수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다. 일종의 실명제다.
보수하지 않은 옛 성벽 오히려 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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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서남쪽 부분은 남한산성과 광지원 간 도로확장 때 잘려 나갔다. 동문에서 남한산성관리사무소로 올라오면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 서공지묘(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라고 새겨져 있는 서흔남(徐欣男) 묘비가 있다.
서흔남은 남한산성 서문 밖 널무니에서 태어난 노복(奴僕) 출신으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광주읍지인 <남한지(南漢志)>나 병자호란을 기록한 <남한일기(南漢日記)> 등에 따르면 기와 잇기와 대장간 일로 생계를 꾸리던 서흔남이 인조를 업어 남한산성으로 피신시켰다고 전한다.
또한 변장한 채 성문을 빠져나가 승려 두청(斗淸)과 함께 걸인행세를 하며 영남까지 가서 군령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천민에서 벼슬아치로 신분이 상승했는데, 전쟁이 위기이자 기회라는 말이 실감난다. 남한산성 로터리를 지나 마지막 여정인 행궁으로 향했다. 행궁은 국왕의 별궁을 뜻하는데, 인조 3년(1625) 남한산성을 수축하면서 함께 지은 행궁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머무르던 장소였다.
조선에는 강화행궁·화성행궁·온양행궁 등 전국에 10여 개의 행궁이 있었는데, 남한산성 행궁에는 특별히 종묘와 사직의 기능을 수행하는 좌전과 우실을 갖추었다. 단순한 휴식공간이 아니라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기 위해 선왕들의 혼까지 모신 셈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왕의 침전인 상궐과 집무공간인 하궐로 구분되어 있는데 상궐은 최근 복원되었고, 하궐은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인조 외에도 숙종·영조·정조가 영릉을 참배하러 오갈 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하궐은 일제가 1910년 철거했다고 전한다. 1895년 을미의병 때 이천의 김하락 의병부대가 남한산성을 점거하고 서울진공계획을 세웠다. 의병들은 남한산성에 비축돼 있던 다수의 군량과 무기를 접수하고 기세를 올렸다.
1907년 정미의병까지 일어나자 일제는 서둘러 남한산성 내의 무기와 화약을 폭파하고 주민들을 산성 밖으로 쫓아내면서 하궐까지 철거했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그간 민족 수치의 현장으로 각인돼 있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청군의 공격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남한산성은 오히려 청군의 주력부대와 추위에 맞서며 45일간 치열하게 항전한 장소다.
치욕의 현장이 아니라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민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성지로 재평가돼야 할 것이다. 인조가 항복했던 자리에 인조 17년(1639) 12월 ‘대청황제공덕비’가 세워졌다. 정면 우측은 여진문자, 좌측은 몽고문자, 뒷면은 한자로 기록한 비다. 비문을 지은 이경석은 “글을 배운 것이 한”이라고 후회했으나, 조선의 종성(宗姓·전주 이씨)으로서 치욕의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때 수치의 유물이라는 이유로 땅에 묻었다 후에 다시 세웠으나 한강물이 범람하면서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유물을 땅에 묻는다고 수치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교훈으로 삼을 지혜만 있으면 모든 역사는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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