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탁운동, ‘동아’ 오보가 없었다면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운동의 수위 낮아 3상회의 결과 수용 가능성… 분단 피하긴 어려웠어도 대규모 전면전은 없었을 것 | ||||||||||||||||||||||||||||||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1945년 12월27일치 <동아일보> 1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기사의 제목이다.
협상 결과 공개 전에 단정적 기사
“막사과(莫斯科·모스크바)에서 삼국 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 독립 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가고 있다. 즉 번즈 미국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십팔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사실 ‘합동통신 워싱턴발 25일자 보도’를 근거로 한 이 기사는 1945년 12월27일 아침 <조선일보>에 먼저 실렸다. 석간이던 <동아일보>는 몇 시간 뒤 같은 기사를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실었는데, 다만 <동아일보>의 경우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고 제목을 붙여 독자가 “미국은 우리의 독립을 위해 애쓰는데, 소련은 우리를 다시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인식을 뚜렷이 갖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당시 최대 우파 정당인 한민당과 함께(<동아일보>는 한민당의 핵심인 김성수가 창간했고,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신문이었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맹렬하게 전개했다.
3상회의의 실제 합의 사항이 보도된 것은 12월30일이었고, <동아일보>는 그 내용을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기사로 처리했다. 그사이에 서로 입장이 같지 않았던 이승만과 김구가 한목소리로 “신탁통치 반대!” “3상회의 결정 거부!”를 천명했고, 좌익에서도 인민당이 반탁을 선언했다. 일반 국민의 여론도 불붙었다. 27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데모와 파업이 잇따랐으며, 1945년은 격앙과 분노 속에서 저물어갔다.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합의된 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탁통치안을 제시한 쪽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보도와는 반대로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으며, 사실 미국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주장해왔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11월 말 카이로회담에서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와 “적절한 과정을 거친 다음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데 합의했다. 국내에는 “독립시킨다”는 문구만 강조돼 전해졌지만, 사실 ‘적절한 과정’이란 곧 신탁통치를 의미했다. 이런 구상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과도 합의됐는데, 당시 루스벨트는 “한국인은 자치 능력이 없다. 아마 40년 내지 50년 정도는 신탁통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으나, 소련의 스탈린이 “그렇게 길게는 안 된다. 5년 정도로 하자”고 했다. 미국은 최대 10년 신탁통치 주장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얼마나 오래 신탁통치를 할 것인지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리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이 문제가 의제 중 하나로 다루어진 것이었다. 한반도 문제는 결의안 7개항 중 제6항에서 4개조로 언급됐는데, “최대 5년을 기한으로, 미·영·소·중 4개국 정부가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제3조에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잘 뜯어보면 한국 국민이 격렬히 반발한 것처럼 외국이 일본의 뒤를 이어 한반도를 마음대로 통치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마 루스벨트는 그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합의 과정을 거쳐 마련된 나머지 3개조에 따르면 한국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는 신탁통치의 시한과 시행 방안 등을 4개국 정부와 협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탁통치 기간에도 통치의 기본 주체는 임시정부이며, 4개국은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역할만 맡게 돼 있었다. 따라서 나중에 소련이 남북한의 공산당에 “말이 신탁통치이지 실질적으로 후견제이므로 한국인의 주권은 침해되지 않는다”며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한 것은 이치에 맞았다. 이 과정에서도 미국은 최대 10년, 최소 5년의 신탁통치를 하며 4개국의 협의기구가 통치권을 갖도록 하는 안을 주장했으나, 소련의 반대로 ‘최대 5년, 통치권의 임시정부 귀속’으로 정해졌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27일의 오보뿐 아니라 그전에도 집요하게 소련과 좌익을 흠집 내려는 기사를 실어왔으며, 이후에도 반탁운동 정국에서 일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 및 과장 보도를 거듭했다. 가령 12월24일에는 “소련이 원산과 청진을 노리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는데, 12월3일치 <뉴스위크>를 인용한 이 보도는 정작 <뉴스위크>에서는 “노릴지도 모른다”고 단순히 예상한 것을 “노리고 있다”며 사실로 둔갑시켰다. 또한 28일 이후부터 “민족적 모독-신탁 운운하는 소련에 경고한다” 등 선동적일 뿐 아니라 마치 소련이 제2의 일제 침략자라도 되는 듯 몰아가는 사설을 연일 내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좌익 쪽에서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밝히자, 그것이 “침략자 소련의 지시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이라 규정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이 ‘북조선’ 공산당에 보내는 ‘권고’를 ‘남한’ 공산당에 내리는 ‘지령’으로 왜곡해 보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1946년의 정국이 온통 반탁 운동과 ‘찬탁하는 좌익 매국노들’에 대한 비판 및 저주로 얼룩지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한반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출범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겉돌다 못해 남북 단독정부 수립 및 영구 분단으로 이어지게 된 데는 <동아일보>를 비롯한 우익 신문들의 의도적 왜곡 보도가 큰 역할을 했다. 적어도 일반 국민은 이들 신문의 선동에 크게 자극돼 반탁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참여했던 것이다.
이승만·김구가 반탁에 나선 이유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은 어땠을까? 일반인들과 달리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그들은 3상회의의 결정이 갖는 참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여운형·백남운·조소앙 등 일부 정치인들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 3상회의 결정의 요점이다” “결의안에 임시정부의 협력이 조건으로 명시돼 있으므로, 일단 임시정부를 만들고 임시정부가 협력을 거부하면 신탁통치는 무산된다” 등의 주장을 하며 감정적 대응의 자제를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 두 사람은 ‘탁치 절대 불가’라는 태도를 천명하며 힘을 합쳐 ‘비상국민회의’를 세우고 서울과 각 지방에서 반탁집회를 개최했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동아일보> 오보와 관련해 한민당이야 이유가 뻔했다. 그들은 좌익과는 물과 기름이었다. 임시정부가 세워져서 친일 청산이 이뤄질 경우를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좌우합작으로 이뤄질 공산이 큰 임시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좌익을 궁지에 몰 수 있는 행동이라면 오보가 아니라 더한 것도 불사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편 이승만은 당시 개인으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명망 있는 정치인이었으나 국내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세력이 가장 앞서는 좌익을 억제하고, 그에 대항하는 정치 세력의 주도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면 환영할 일이었다. 또한 김구는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했지만,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면서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정치현실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3상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했다지 않은가? “그게 무슨 소리야? 임시정부는 이미 버젓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외쳤을 법하다. 한편으로는 이 사태를 기회로 국민운동을 일으켜 상해임시정부 구성원들이 당당하게 새로운 임시정부, 아니 통일한국의 새 정부로 뿌리를 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너무도 강렬한 유혹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한민당과 같은 대열에 서면서까지 반탁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 때문에 상해임시정부 요인들 중 좌익이 우익과 갈라서게 되고 결국 남북한 영구 분단이 가속화됐음을 보고 그때서야 좌우합작에 발벗고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처음에는 신탁통치라는 개념에 거부감을 보였으나(이는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해가 바뀌면서 ‘3상회의 결정 수용’으로 입장을 정리한 조선공산당과 인민당 등 좌익은 반대로 남한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튼튼하다는 자신감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동아일보> 등의 선전처럼 소련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기보다는, 소련 쪽의 설명과 권고를 참고해 스스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역시 오산이었다. 35년 강점기 동안 억눌려온 민족 감정은 결코 합리적으로만 잠재울 수 없었던 것이다. “찬탁을 주장하는 자들은 민족반역자들이다!”라는 우익의 선동이 먹혀들면서, 좌익은 해방 정국 초기에 가졌던 유리한 입지를 급속히 상실해갔다.
‘자연스런 민주주의 발전’은 장밋빛 가상
그런 상황은 또 한 사람, 김일성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애초에 소련이 한반도 처리 문제에서 ‘한국을 편드는 듯한’ 태도를 보인 까닭은 한반도에서 좌익 세력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다만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 지역은 역설적으로 기독교 우파 세력이 두드러졌는데, 여기에 좌익 세력을 결집할 사람으로 김일성을 밀고 있었다. 3상회의를 하던 당시 소련의 구상은 좌익이 우세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장기적으로 한반도를 친소국가화한다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남한에서 좌익 세력이 급감하고 분단이 고착화될 조짐이 늘면서 소련은 북한 지역에서만이라도 확실한 친소 정부를 세우려는 쪽으로 노선을 바꾼다. 여기서 새로운 통일한국 정부의 수반이 되기는 어려웠을(그는 남한에서는 거의 인기가 없었으므로) 김일성이 북한에서 이른 시간 안에 독재 권력을 구축하게 된다.
<동아일보>의 오보가 없었다면, 반탁운동도 없었을까? 적어도 그렇게 격렬한 기세로 일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불과 1년 만에 남한 정치의 역학 구도를 뒤집어버리고, 미-소 공동위원회를 무력화할 수 있었던 것은 몇몇 정치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다만 그것이 3·1운동이나 6·10항쟁처럼 자연스러운 의지의 표출이라기보다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계략의 결과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 만약 3상회의의 결정이 그대로 수용됐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좌우합작의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5년 이하의 후견정치를 거쳐 통일정부가 수립된다. 분단도 없고, 전쟁도 없다. 한국 정치는 좌와 우가 정책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자연스러운 민주주의 구도를 갖춘 채 발전해나간다.’ 이렇게 예상했다면 지나친 장밋빛 관측의 결과다. 당시 세계는 빠르게 냉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런 국제관계나 국내 정파 간의 갈등을 볼 때 그토록 평화로운 역사가 가능했으리라 보기는 힘들다. 2차 세계대전 뒤 미·영·프·소의 신탁통치가 실시된 독일 역시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점을 볼 때, 한반도가 분할 점령된 시점부터 분단은 피하기 힘든 운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거쳐 통일정부 수립이 모색됐다면, 그 도중이나 후에 여러 갈등과 음모, 폭동이나 어쩌면 내전까지도 있었을 수는 있어도, 적어도 한국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면전은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남이나 북이나 냉전을 빌미로 하는 독재 체제가 그토록 굳건히 자리잡지도 않았으리라. 동·서독의 경우는 분단이 됐다지만 냉전이 치열했을 때조차 남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이가 원만했다. 이미 1970년대부터 동·서독의 주민이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하고 편지를 교환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두 정부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기보다 ‘적국’, 아니 ‘원수’로 바라보지 않아도 좋았다. 언론과 정치인, 그들이 사욕에 눈이 어두워 대의를 물리쳐버릴 때, ‘생각하는 백성’이 그런 행위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끌려갈 때, 그토록 처절한 비극은 준비된다.
함규진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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