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란보라의 중국속으로_04

醉月 2010. 3. 25. 08:47

한국사 5천년은 중국상고사의 식민지?

말로만 반만년 역사, 이제라도 기록보존에 힘써야

5000년 역사, 우리의 역사는 어디로 갔나
 
한반도는 반만년의 문명사를 자랑하지만 중국사서에서 자기의 상고사를 찾아야 하는 우리와는 달리, 중국은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같은 대재난을 겪었어도 중국땅에서는 가는 곳마다에서 역사기록 문헌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제 아버지 성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이천 여년 전의 우물. 바로 여기서 36000만 쪽, 20만자에 달하는 간독(簡牘, 문자를 기록한 대나무 쪽이나 나무쪽)이 나왔다. 중국사서기록에 공백이었던 부분들을 보완해 준다    ©인터넷사진
11월 20일 신화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안후이(安徽)성 사오제(首界)시의 한 주민사무소에서는 요즘 15살 가량되는 한 소년의 민원을 접수했는데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었다고 한다.
 
이 소년이 주민사무소를 찾은 이유는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주민사무소에서 자기의 성을 고치는데 필요한 증명서를 떼 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14일, 이 소년이 학교에 공부하러 가지 않았다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소년의 아버지는 홧김에 소년에게 손을 댔다. 이에 불복한 소년은 아버지와 대들어 보았자 더 얻어 맞을 것 같고 해서 앞에서는 잘못했다고 하고는 그 날 저녁으로 가출을 하여 이튿날에는 주민사무소를 찾아 성을 고치겠으니 파출소에서 자기 요구를 접수하도록 증명서를 떼 달라고 했다.
 
성이 "공"씨인 소년은 이제 다시는 "공"씨 성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주민사무소와 파출소 경찰이 함께 반시간이나 입씨름을 하며 파출소에서 성을 고쳐주지 않는다고 해서야 일은 겨우 매듭을 짓게 되었다.
 
어리석고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인들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자기의 맥을 중시하는 그들의 심성을 잘 말해주는 뉴스다.  
 
▲후난리예(湖南里耶)에서 출토된 간독(簡牘, 문자기록을 한 대쪽이나 나무쪽). 중국 진나라 때의 편지. 지금까지 발견된 중국 최초의 서한이다.     ©인터넷사진
중국사람들은 한국인처럼 흔히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성을 갈겠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형제와 부모자식 사이 갈등을 해결할 수 없을 경우, 마지막 조치가 바로 "성을 바꾸"는 것이다.
아버지가 다시는 내 성을 따르지 말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자식이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면 끝이다. 다시 돌려세울 여지가 없다. 가출은 별로라고 생각한다. 나갔던 사람은 도로 들어올 수 있지만 성을 고친 사람은 도로 돌아올 수가 없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자기 자식이 그 친구의 성을 따르게 한다. 그러면 평생을 두고 잊지를 않는다. 같은 성을 가짐으로 피를 함께 나눈 혈육의 형제로 되는 것이다. 
 
▲(帛書, 문자기록을 한 비단천) "노자". 어떤 귀부인이 죽으면서까지 가져간 "책"이 오늘 중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되었다.     © 인터넷사진
대륙과 대만사이 역시 그런 관계이다. 대륙에서 요구하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를 따르라는 것도 아니고, 대륙의 지령을 따르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다 같은 하나의 중국, 이것만 인정하면 다른 모든 것은 별로라는 말이다.
 
중국사람들은 자기의 성씨를, 자기의 맥을 상당히 중히 여긴다. 그래서 옛날부터 "백가성(百家姓, 즉 중국 모든 성씨에 대한 기록과 해석)과 같은 계몽교양서가 나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만큼 종적인 연관성과 자기 소유를 중요시하고, 자신에 대한 모든 자료와 기록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 되겠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꼭 기록을 남겨 놓고, 비석을 세우고, 흔적을 남긴다. 
  
상고시대 간독과 "노자"의 출토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대해서는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자기가 통합한 6개국의 학자들이 자기에 대한 비난의 말을 많이 하고, 또 자기의 진나라까지 7개국의 도량형과 문자기록방식이 가지각색이라 통일정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데다 6국의 반란이 잦아 자기의 통치에 위험을 주는 상황에서 진시황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학자들과 자기의 비위에 어긋나는 역사기록의 "책"들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이것이 고금내외에 이름난 "분서갱유"이다.

그러나 이처럼 분서갱유와 같은 끔찍한 재난을 당했지만 중국 상고사는 여전히 거의 완전하다고 할 수 있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관청에서 불살라버린 책들이 민간에 보존되었던 것이다.

1975년 창사 마왕퇴(長沙馬王堆)라는 무덤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문물들과 함께 백서(帛書, 즉 비단천에 붓글로 기록을 한 "책")로 된 노자의 "도덕경"이 나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같지 않은 판본으로 된, 중국고고학계에서 "갑종본"과 "을종본"이라고 하는 두개 판본의 "도덕경"이 나왔던 것이다. 죽으면서도 책을 가지고 갔고, 시신과 함께 역사의 기록을 가져갔던 것이다.
 
▲창사마왕뚜이(長沙馬王堆)에서 출토된 백서. 당시 혜성의 출현에 대한 기록이 20여차나 된다. 죽어서 무덤에 가지고간 기록들이 오늘 역사과학의 더 없이 소중한 역사과학의 근거가 되었다     ©인터넷사진

그러나 이보다 더 대단한 고고학 발굴이 바로 지난 2003년에 거의 완성되었다. 20세기 중국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발굴 중 하나로 인정받는 후난성 리예(湖南省 里耶)의 한 옛날 우물터에서 36000쪽에 20만자에 달하는 간독(簡牘, 즉 대쪽이나 나무쪽에 붓으로 글을 썼거나 칼로 오려 기록을 한 "책")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이를 정리하자면 적어도 6년 이상 걸려야 한다고 한다. 이 전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간독은 겨우 4000쪽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 한번의 발굴의 량은 과거 총량의 거의 9배나 되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 죽간들은 진시황의 진나라 시대를 전후로 정부관공서의 문서기록들인데 거기에서 중국 고고학자들은 진나라 때에 벌써 중국에는 관방의 문서를 전문 전달하는 배달부가 있었고, 사람들이 이주하려면 먼저 호적을 옮겨야 하는 등 역사사실들을 고증해냈다.

간독 중 일부는 인위적으로 훼손한 흔적과 불에 탄 흔적들이 있었다. 이로보아 고고학자들은 이는 어떤 사람이 문서를 처리하던 중 급히 우물에 집어넣어 숨긴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기록은 어디로 갔는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왕 부차의 검. 검에도 문자기록이 있어 오늘까지도 어느 시대, 누가 쓰던 검인지,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인터넷사진
그러나 우리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불쌍하게도 우리의 상고사는 중국사서에서 고증을 해야 하는 처지다.

우리에게 상고시대의 사서기록이 없는 상황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삼국시대 조조 수하의 부하들이 책들을 모조리 빼앗아 가면서,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은 다 태워버렸다거나, 연이어 닥쳐드는 왜란으로 훼손되었다거나,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소실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전란을 놓고 말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 남북조와 수, 당에 걸쳐 5대10국과 송, 원, 명, 청을 거치면서 한반도 보다 수 십배나 더 겪었으며 외세의 침략을 더 많이 받아 왔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그냥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기록이 계속 자기의 맥을 이어 올 수 있는 것은 관청의 문서관리가 잘되어서라기 보다도 민간의 보관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금도 중국 내지에서 옛날의 집들을 허물다 보면 벽 틈에서 고서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유전되고 있는 "시경"의 세가지 판본 역시 산동 공자의 고향에 있는 어느 옛날 집의 벽틈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래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같은 끔찍한 재난을 겪었어도 고스란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상고시대의 역사기록들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의 역사기록을 이들처럼 아끼고 간직하지 않았단 말인가?

전란이나 약탈 등 외적인 원인으로 잃어버렸다면 무엄 속에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 어느 왕조대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의 무덤에서든지 사서가 출토되었다는 뉴스는 볼 수가 없다.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반만년의 문명사가 어쩌면 우리 선인들의 어떤 원인으로 인한 홀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오늘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역사는 역전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기록을 어떻게 했는지, 어째서 찾을 수 없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늘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잘 정리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면서 중국을 찾은 학자들이나 학생들을 가끔 볼 수가 있고, 중국지역에서 있었던 문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민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찾아 보기가 어렵다. 중국의 큰 대학들이나 학술단체들에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것과 신문사나 잡지사에 문학상을 세우는 기금회나 학술단체들은 있지만 조선족들의 이민사를 정리하고 조선족들의 정착사, 조선족들의 생활사, 조선족마을들의 연혁사를 정리하라고 인력적, 재력적 지원을 해주는 단체나 학자나, 기업인은 하나도 볼 수가 없다. 한번만이라도 보고 죽자고 해도 없다.

▲갑골문. 소의 견갑골에 글을 새겨 기록한 문서. 오늘 역사를 연구하는데 더 없이 소중한 자료로 되고 있다.     ©인터넷사진
그것이 눈앞에 실적이 나타나는 일도 아니고, 한국사회에서 공적을 인정해주는 일이 아니니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백년, 아니 10년, 20년만 지나면 우리들은 또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민 1,2세가 거의 다 돌아간 상황에서 경제사회의 발전과 생활의 필요로 조선족들의 동화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그러니 세월이 흐른 다음 조선족들의 이민사를 연구하자면, 그때 가서 다시 현지답사를 하면서 찾자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기록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정리해 놓지 않았는데 어디서 기록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우리의 상고사도 이런 상황에서 공백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역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오늘이다.
고구려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오늘 이민사에 대한 기록이다.
오늘을 잘 기록하는 것이 진정 역사에 책임지는 자세인 것이다.

역사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가 없다.
역사는 누구도 왜곡을 할 수가 없다.
역사는 누구도 지워버릴 수가 없다.

오로지 스스로 잊고,
오로지 스스로 잃고,
오로지 스스로 버리고
오로지 스스로 포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