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baebs@ysu.ac.kr│ |
제자 번지(樊遲)가 농사일 배우기를 청하였다.
번지가 또 ‘밭농사 배우기’를 청하였다.
공자, 말했다. “내가 노숙한 농사꾼은 아니지 않으냐!”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소인배다. 저 녀석은!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이 공경하지 않을 리 없고,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함에 백성이 복종하지 않을 리 없으며, 윗사람이 믿음(信)을 좋아하는데 백성이 마음 주지 않을 리 없다. 대저 이렇게만 하면, 온 사방에서 농사꾼들이 아이는 들쳐 업고 세간은 짊어지고 몰려들 터인데, 어디 농사지을 겨를이 있다는 말이냐.”(논어, 13:4)
농사일 배우기를 요구한 번지의 질문은 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의문점을 대변한다. 당대의 ‘실학자’라고나 할까? 그의 질문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말씀인즉슨 지당하지만 먹고사는 기술 곧 생산 활동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 않으냐’라는 의심이 깔려있다. 공자의 가르침이 실용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번지의 질문은 우리가 지난 백년간 공자에게 던진 힐문과 전혀 다르지 않다. 공리공담, 탁상공론, 허학(虛學)과 같은 말들이 유교를 비판하는 표현들이었다. 공자 당대에, 더욱이 그의 제자가 이런 식의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이에 대해 공자는 자기 학문이 농사기술이 발휘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근본적 기술이라는 점, 컴퓨터 용어를 빌리자면 운영체계(OS)와 같은 것이라고 알려준다. 또 그 운영체계의 요소들을 예법과 정의 그리고 신뢰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 대화에서 주목할 점은 시대의 핵심과제를 ‘시스템’의 문제로 인식하는 공자의 시각이다. 공자가 실용기술을 요구하는 번지에 대해 소인배라고 짜증을 낸 것은, 춘추시대의 본질적 문제는 생산을 위한 작업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토대, 즉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농사기술을 천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시대의 본질적 문제점이 경영체계의 미비에 있고 따라서 혁신의 과제는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화는 공자가 시스템의 중요성과 경영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생활 속의 달인’(SBS방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보듯, 전문적 기예를 갖춘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한다. 문제는 이들이 제 기예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공자는 이 점을 당대 지식인의 가장 큰 책무로 파악했던 것이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대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용어로 하자면 ‘사회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던 사상가다. 단순히 물질적 기술(physical technology)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 기술(social technology)에 대한 전면적 혁신이 요구되는 때라고 보았다.
이런 시스템이 마련되기만 하면 ‘날고 기는’ 농사꾼들이 “온 사방에서 아이는 들쳐 업고 세간은 짊어지고 몰려들 터”이므로, “농사지을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공자는 피터 드러커가 규정한 경영의 정의, 곧 “경영이란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조직에 통합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재규, ‘피터 드러커에게 경영을 묻다’, 103쪽)이라는 점을 최초로 인식하고 실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논어에는 인(仁)과 덕(德) 같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들과 함께 실제 현장의 구체적 인간관계와 조직경영의 사례들이 다양한 금언의 형태로 담겨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참에 유명한 스티븐 코비의 경영개발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든지 ‘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과 같은 식으로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경영 원칙을 논어에서 뽑아보면 어떨까. 공자에게 드리워진 엄격하고 엄숙한 느낌을 불식하면서 또 논어에 대해서도 좀 더 친근하고 가까운 ‘경영의 지혜서’로 다가갈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생각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닌 까닭은, 논어에서 다음 대목을 접할 때면 꼭 어느 회사의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곤 했기 때문이다.
공자, 말씀하시다. “군자의 특징은 모시기는 쉽지만, 그의 마음에 들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마음에 들기 어려운 까닭은 업무의 성취가 마땅하지 않으면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모시기가 쉬운 까닭은 아랫사람들을 부릴 적에 그 각각의 기량에 맞춰서 업무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인의 특징은 모시기는 어려운데, 그의 마음에 들기는 쉽다는 점이다. 업무 이외의 일로써도 그를 기쁘게 할 수 있지만, 반면 아랫사람에게 다 갖추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논어, 13:25)
이런 대목은 2500년 전의 말이라기에는 그 숨결이 오늘날에도 너무나 생생하다. 마치 서울 강남의 어느 오피스 빌딩에서 일어난 일을 사실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이 장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으리라.
제대로 된 상사(上司)는 모시기는 쉬워도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기는 어렵다. 모시기가 쉬운 까닭은 업무 밖의 사사로운 관계에서는 대범하고 또 부담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업무에 관련해서는 제대로 일처리를 하지 않는 한, 그는 만족하지 않는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대범하면서도 공적인 업무에서는 엄격하다는 것. 한편 아랫사람에게 일을 맡길 때는 각각의 장단점과 기량의 높낮이를 감안하여 분담시킨다. 그러므로 담당자는 맡은 일을 해내기가 쉽다. 이것은 리더가 업무 전반을 파악하고 있고 또 부하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사는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모시기가 쉽기 때문에, 조직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화목할 가능성이 높다.
경영이론서, 논어
반면 이런 상사도 있다. 모시기는 까다로워도 그의 마음에 들기는 쉬운 사람. 이런 리더는 자신이 상사라는 자의식이 강하다. 그래선지 걸핏하면 사소한 트집을 잡는다. 그만큼 모시기가 어렵다. 반면 그를 만족시키기는 어렵지 않다. 과장된 복종의 몸짓과 업무 외의 사사로운 ‘기름치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반면 사람을 부릴 때는 담당자가 팔방미인이기를 요구한다. 매양 “그것도 못하냐!”는 식이다.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리더가 업무 전반을 파악하지 못하고 직원 각각의 특성과 기량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이런 리더는 좋은 성과는 본인 덕택이요, 실패한 것은 아랫사람 탓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이런 직장의 분위기는 위축되어 있고, 정상적인 의사결정과정보다는 비선 조직이 힘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미국 광고업계의 유명한 경영자이자 광고기획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길비(David Ogilvy·1911~99)의 다음 비평은 마치 위의 두 직장상사에 대한 총평처럼 느껴진다.
“나는 스스로를 성공으로 이끌 만큼 훌륭한 부하를 고용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고용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오길비, ‘나는 광고로 세상을 움직였다’, 57쪽)
동서고금이 어쩌면 이렇게 다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논어를 읽고 해석하다보면 2500년 전부터 오늘까지 인간은 거의, 아니 전혀 진보하지 않았다. 케케묵은 책인 논어가 아직도 고전으로 살아남은 비극적(?) 원인도 여기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자, 그렇다면 공자가 권하는 경영 원칙의 첫 번째는 “모두 갖춘 사람을 바라지 말라”는 대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공자가 평생을 두고 존경했던 노나라 건국자, 주공(周公)은 그의 아들에게 국가경영의 요체를 전수하는 자리에서 “오래된 동지를 큰 잘못 없는데 자르지 말고,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갖추기를 요구하지 말라”(논어, 18:10)는 가르침을 내린 바 있었다. 누군들 입속의 혀처럼, 혹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완벽한 부하를 바라지 않으랴. 허나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안다면, 그런 완벽한 사람을 딴 데서 구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위의 소인배 상사와 같은 꼴이 나고 만다.
갖춘 사람을 구하지 말라
흥미롭게도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조선의 이지함에게도 유사한 일화가 전해온다. 어떤 양반이 “마음에 드는 하인이 없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소연을 했던 모양이다. 이에 대해 토정선생은 “이모저모 잘 갖춘 머슴을 바라느니, 여러모로 잘 갖춘 주인이 되는 길이 빠를 것”이라는 뼈있는 지적을 했다는 것.
공자 역시 탁월한 재능을 갖춘 제자를 바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승의 눈에 동료로 삼을 만큼 성숙한 제자를 얻기가 어디 쉽겠는가. 이에 공자는 “중용을 행하는 사람을 얻어 함께하지 못할 바엔, 반드시 광(狂)하거나 견(·#53399;)한 사람을 얻어야 하리라. ‘광자’란 진취적이고, ‘견자’는 우직함이 있는 사람이지.”(논어, 13:21)라고 눈을 낮춘다. 광자란 곧 실력은 미치지 못하나 이상은 높은 젊은이를 말하고, 견자는 지켜야 할 가치라면 결코 양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곧 공자는 모가 난 사람을 바란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스펙’을 갖춘 학생이 아닌 ‘에지’있는 사람이라고 할까?)
실은 둥글기만한 사람은 모난 사람보다 쓰임새가 덜하다. 둥근 돌이 관상용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집을 짓는 데는 쓰임새가 없는 것과 같다. 돔이나 아치와 같이 둥근 형태의 건축물도 둥근 돌이 아니라 모난 돌을 가지고 둥글게 쌓아서 만드는 것일 따름이다.
흥미롭게도 현대의 많은 기업 경영자가 이런 견해에 찬동한다. 미국의 광고경영자 오길비가 “재능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규범을 따르지 않고 관습에 반대하는 반항아들이다”(오길비, 65쪽)라고 토로한 것이나, 일본의 피터 드러커라는 평가를 받는 시부사와 에이치가 “지나치게 둥글면 변질하기 쉽다”(‘논어와 주판’, 76쪽)라는 일본 전래의 속담을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양하게 모난 사람들을 모아서 둥근 건축물로 만드는 작업은 경영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역시 오길비가 “광고대행사를 경영하는 것이 항상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광고 일을 시작하고 14년이 지난 다음, 나는 CEO가 반드시 지녀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창의력이 뛰어난 독불장군들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오길비, 53쪽)라고 지적한 것은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공자가 “윗사람의 자리에 있으면서 관대하지 않은 자를 내 어찌 리더로 여길 수 있으리오.”(居上不寬, 吾何以觀之哉?” 논어, 3:26)라며 개탄한 까닭도 모난 사람들을 조직의 목표 아래로 인도하여 조화시킬 수 있는 자질을 리더십의 핵심으로 보았던 때문이다. 여기서 리더의 자질로 지적한 관대함(寬)이란 그저 아랫사람들의 뜻에 따라주는 무골호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여기 관대함이란 이모저모로 모난 부하들을 모아 한군데로 결집할 적에 요구되는 빈 공간을 뜻하는 것 같다. 작가 한승원은 돌을 쌓아 탑을 만들다가 터득한 지혜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이 속에 모난 사람들을 아울러 쓰는 관대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들어있다.
세모진 것이 필요한 자리, 네모진 것이 필요한 자리, 마름모꼴인 것이 필요한 자리, 그러한 특이한 자리에 알맞은 돌을 고르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두루뭉수리한 것은 그 어느 장소에든지 무난하게 들어맞기는 한데, 그것의 흠은 다음 놓을 돌과의 아구짓기가 힘들었다. 밑돌의 아구하고 잘 맞을 뿐만 아니라 그 위의 돌에 놓일 돌하고의 아구가 잘 맞으려면 어떤 형태로든지 모가 나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옆에 놓일 돌과도 아구가 맞아야 하고. (…) 사회나 국가 단체의 구성도 마찬가지일 터다. 모든 구성원들은 옆 사람과의 관계,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가 정교하고 튼튼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리에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들어가야 하고, 두루뭉수리하게 닳고닳아있기 때문에 그 어떤 동반자 관계나 상하 관계에서도 단단하게 아구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은 자잘한 조약돌들과 함께 그 탑의 내장 속에 깊이 넣어 두어야 하고 겉에 둘러쌓지 않아야 한다. 삶의 밀도도 그와 같을 터이다. (한승원, “돌탑 혹은 삶의 밀도에 대하여”, ‘출판저널’, 215호 12쪽)
한승원의 관찰을 빌리자면 관대함이란 모난 아귀들이 아귀가 지게끔 만드는 틈새를 뜻한다. 결코 두루뭉수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도 좋다고 흥, 저것도 좋다고 흥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돌탑이 만들어지도록 예비해둔 빈자리, 빈 틈새를 말한다. 그리고 이 틈새가 있을 때만 모난 돌들을 모아서 돔형 탑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경영의 핵심은 人事
지난 백년 동안 유교가 신랄하게 비판받은 이유 중 하나는 법치가 아닌 인치, 곧 ‘권력자 자의로 행하는 정치’를 숭상한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특히 국제법의 강제성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탓에 서양제국과 허술하게 조약을 맺었다가 크게 혼이 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은 법과 제도에 대한 부실한 인식 탓을 유교에 돌리곤 했다. “형벌과 법제로 다스리면 인민들은 부끄러움을 잃고, 덕과 예의로써 다스리면 제 스스로 바로잡힌다”라는 논어 구절이야말로 그런 비난의 표적이었다.
하지만 유교의 입장에서 인치(人治)는 나쁜 뜻이 아니다. 덕과 능력을 겸비한 정치가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정치의 사활이 걸려있다는 뜻으로 쓰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있으면 정사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사가 사라진다”(‘중용’)라는 말 속에 정치에서 사람의 중요성이 담겨있다.
무성(武城) 땅의 성주로 부임한 제자에게 공자가 던진 단 하나의 질문도 “자네는 사람을 얻었는가?”였다. 여기 ‘사람을 얻음’ 즉 득인(得人)이란 현능한 사람을 찾아 기용하는 것이 국가경영(통치)의 출발이자 그 목적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노나라 임금의 질문에 답한 내용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애공이 물었다. “어찌하여야 백성들이 복종할 수 있겠소?”
공자가 아뢰었다. “바른 사람을 찾아 굽은 사람 위에 등용하면 백성들은 복종할 것이요, 굽은 사람을 바른 사람 위에 쓰면 백성들은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논어, 2:19)
제자에게 질문한 득인이 재능 있는 사람을 얻는 것이라면, 임금께 아뢴 것은 용인(用人) 즉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는 일이다. 득인과 용인은 두루 인사(人事)에 관한 요소니까, 오늘날 식으로 하자면 인사가 경영의 핵심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곧 현능한 사람을 뽑아서 적재적소에 맞춰 등용하기가 경영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뜻이다.
공자의 후예인 맹자가 “옛 성왕인 요임금의 고민은 ‘순’과 같은 훌륭한 재상을 얻지 못할까 하는 데 있었고, 역시 순이 임금이 되고난 후 가장 큰 고민은 ‘우’와 ‘고요’ 같은 재상감을 얻지 못할까에 있었다”(堯以不得舜爲己憂, 舜以不得禹皐陶爲己憂. ‘맹자’ 3a:4)라던 지적도 유교정치에서 사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교문화권에서 전통으로 이어져온 인재와 사람에 대한 강조는 학교와 교육의 중요성으로 연결되었고, 또 이것이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이른바 ‘유교 자본주의’라는 꽃을 피우는 동력이 된 것이리라.
어쨌건 맹자가 요순임금의 근심으로 지적했던 ‘현능한 사람을 찾는 일’이야말로 유교 경영론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된다. 미국의 광고경영자 오길비 역시 “한 광고대행사의 성패는 무엇보다 대표가 훌륭한 광고를 만들어낼 열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오길비, 60쪽)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 뜻이 다 같다.
흥미로운 사실은, 경영자의 행동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또 덕성에 하자가 있을지라도 인사만 잘하면, 즉 인재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기만 하다면 나라를 잘 경영할 수 있다고 보는 공자의 눈이다. 윤리적 리더십을 강조해마지 않으리라는 선입관과 달리 공자에게 이런 현실적인 면모가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공자가 위령공의 도덕적 문제를 비판하였다.
노나라 집정자 계강자가 물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요?”
공자가 답했다. “중숙어가 외교를 담당하고, 축타가 의례를 맡고 있으며, 왕손가가 국방을 책임지고 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겠소이까?” (논어, 14:19)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를 뽑아서 제자리에 등용하는 인사경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화다. 삼성그룹의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도 사람에게 집요한 관심을 기울인 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어록 가운데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썼다”는 대목이나 이른바 ‘인재제일’(人材第一)이 그 회사의 오랜 경영이념이었다는 것은 논어에서 두루 강조한 인사경영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요타 사태의 교훈
성경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로고스의 선언으로 시작한다면, 논어는 배움으로부터 시작한다. 잘 알려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 곧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또 기쁘지 않으랴’가 논어의 첫 장인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자에게 배움이란 사람다움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이니, 배울 때에야 사람이요, 배움을 멈추면 곧바로 짐승으로 추락한다. 스스로 “아침에 진리를 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朝聞道, 夕死可矣. 논어, 4:8)라고 하였으니 배움이야말로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배움이란 삶의 현장에서 몸소 배우고 익히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工夫’를 ‘공부’라고 읽어 책을 읽고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을 연상하지만, 중국어로는 ‘쿵푸’라고 읽어 몸의 수련을 의미한다. 이 틈새에서 우리는 공부라는 말의 본래 뜻과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본시 배움이란 ‘머리 공부’가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체험하고 익히는 것이었다.
공자가 “내 일찍이 종일토록 밥도 먹지 않고 또 밤새 잠도 자지 않고 생각에 골똘해봤지만 얻는 것이 없었다, 현장에서 배우는 것만 못하더라”(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無益, 不如學也. 논어, 15:31)라는 회고도 ‘머리 공부’가 아닌 ‘몸 공부’를 강조한 것이다. 즉 공자는 책상머리에서 머리와 눈으로 하는 지식 위주의 공부법에 대해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지식과 경험은 상호보완적으로 전개해나가야 하지만, 지식은 현장에서의 배움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그 본래적 가치를 잃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 군인의 진면모가 보병이요, 회사원의 본래 기능이 영업에 있듯, 각 분야의 근간은 현장에 있다. 현장은 위에 있지 않고 아래에 위치한다. 진실과 욕망 그리고 요구는 저 위가 아니라 아래(현장· 시장)에 존재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은 자연의 이치부터가 그러한 듯하다.
가령 “풀은 처음에는 아주 작게 돋아나서 차근히 기초를 다져 나갑니다. 하늘로 치솟는 대나무도 뿌리들은 촘촘하게 단단한 마디를 지우면서 바탕을 다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나무는 꺾일지언정 쓰러지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벼도 뿌리에서 두세 마디가 웃자라면 쓰러질 때 그곳이 꺾입니다.”(전우익,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현암사, 60쪽)
이런 식물의 생장원리는 사람의 조직 원리와 직통하는 데가 있어 보인다. 진실이, 소비자의 요구가, 또는 유권자의 바람이 아래에 있다는 이치를 알고 그 ‘아래에서 배운다’는 원칙을 놓치지 않을 때 그 조직은 위로 뻗어갈 수 있지만, 윗자리에 올랐다고 혹은 조직의 덩치가 커졌다고 현장을 잊어버린다면 전우익이 관찰한 바대로 “벼가 뿌리에서 두세 마디가 웃자라면 쓰러질 때 그곳이 꺾이는” 자연의 원칙이 적용될 것이다.
역시 공자가 스스로의 길을 두고 “하학이상달”(下學以上達)이라, 곧 ‘아래에서 배워서 위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규정한 것도 같은 뜻이다. 이는 또 지위가 높아질수록 본래의 마음 즉 초심을 잃어버려서는 조그만 성취도 곧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로도 읽을 수 있겠다.
아래에 위치한 현장의 변화와 요구를 도외시한 채, 외부의 충격이나 위로부터의 지시에 부응하는 식으로 경영하다가 하루아침에 일패도지한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참의 도요타 사태도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은 현대 기업경영 사상가, 피터 드러커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올바른 기업 경영자는 예기치 못한 실패를 부하직원의 무능력이나 우연한 사고 따위로 지나쳐버리지 않는다. 대신 이를 시스템 실패(system failure)의 한 징후로 파악한다. 또 바른 경영자는 예기치 못한 성공 역시 자신의 업적으로 돌리지 않는다. 대신 이를 경영이론의 가정에 대한 도전으로 취급한다.”(이재규, ‘피터 드러커에게 경영을 묻다’ 134쪽)
그러니까 제대로 된 경영자들은 예상하지 못한 실패나 성공 앞에서, 그 현상을 탓하거나 즐기거나 하지 않고, 도리어 그 원인을 현장에서 찾아 확인하거나 배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공자와 드러커는 같은 권고를 하고 있는 셈이다. 곧 책상에서 벗어나 현장으로 가라. 아래에 소비자의 요구와 생산자의 바람이 존재한다.
경영자는 책임자다
공자에게 경영자는 지위를 누리는 자가 아니요, 사태의 궁극적 책임자다. “지도자의 덕성은 바람이요 부하의 덕성은 풀과 같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게 마련이라”(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논어, 12:19)는 경구가 이를 가리킨다.
다만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세간에 ‘내가 하는 사랑은 로맨스요 남이 하는 사랑은 불륜이라’는 농담이 있듯, 잘못의 탓을 바깥에서 찾기가 쉽지 안에서 찾기는 어렵다. 당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공자도 “그만두자구나! 잘못을 안에서 발견하고,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따지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더라”(논어, 5:27)고 푸념했던 것이리라. 어쩌면 배운다는 것은 사태의 원인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그 책임을 자기 내부로부터 찾으려는, 자기성찰의 훈련과정인지도 모른다.
리더는 책임지는 자
그렇다면 공자가 “군자는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소인은 문제를 남에게서 찾는다”(논어, 15:21)라고 지적한 대목은 리더십의 보감(寶鑑)으로 삼을 만한 것이다. 요컨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나아가 책임을 본인 스스로 지려는, 이를테면 ‘내 탓이로소이다’를 체화한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위기에 가볍게 휘둘리지 않는다. 공자가 문제의 책임을 “자신에서 찾아 심하게 질책하고, 남에게는 가볍게 책임을 물을 때, 조직의 원망은 사라질 것”(躬自厚而薄責於人, 則遠怨矣. 논어, 15:15)이라고 진단한 대목도 바로 이점을 겨눈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리더십은 지식의 출중함이나 업무처리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인격과 도덕성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것이다. 피터 드러커가 성난 목소리로 질책하고 있는 다음 대목도 궤를 같이한다.
“전문지식이 없고 업무 처리가 미숙하며, 능력과 판단력이 부족하더라도 이런 경영자는 조직에 그리 막대한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하지만 품성이나 성실성이 부족한 경영자는 제아무리 지식이 풍부하고, 똑똑하고 유능하다 하더라도, 조직을 파괴한다. 그는 기업의 가장 소중한 자원인 사람을 파괴한다. 정신을 파괴한다. 그리고 성과를 파괴한다.” (피터 드러커, ‘경영학’(개정판), 2008. p. 287)
● 1959년 출생
●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과(정치학 박사)
● 한국사상사연구소 연구원
● 現 영산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 저서:‘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한글세대가 본 논어’ ‘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등
자, 이렇게 하여 ‘논어’에서 추출한 네 가지 원칙을 통해 공자의 경영론을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모두 갖춘 사람을 구하지 말라는 원칙이다. 이는 곧 모난 사람들을 원활하게 기용할 수 있는 관용의 리더십과 연결된다. 두 번째는 경영의 핵심이 인사경영과 사람을 중시함에 있다는 점이 지목되었다. 세 번째는 경영자는 내내 배우는 존재라는 것과 그 배움은 책상 앞에서 머리로 생각하기보다 현장에서 몸소 느끼고 배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 꼽혔다. 네 번째 원칙은 경영자란 그 지위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사태의 궁극적 책임을 지는 도덕적 존재임을 살펴보았다. 이 외, 또 다른 공자의 경영원리들은 이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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