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이 성공했다면
[1910~2010 가상역사 ‘만약에’]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 남북통일의 마지막 기회, 좌우합작이 물 건너가자 분단은 쏜살같이 진행되고 그 끝에는 전쟁이… | ||||||||||||||||||||||||||||||||||||||||
1948년 남과 북은 분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피할 수는 없었을까. 어쩌면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는 ‘마지막 기회’였다. 4월19일 김구는 38선을 넘어 북행길에 올랐다. 경교장에 구름처럼 몰린 군중은 가지 말라고 했다. 그들에게 김구는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달라. 이대로 가면 조국은 분단되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백범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역사는 백범 김구의 예고대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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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정치인 “참례만 하라고? 그래도 갈 수밖에”
1948년 4월의 남북 연석회의는 남북관계 역사에서 ‘최초의 정상회담’으로 기록된다. 또한 분단을 막으려는 마지막 협상이었다. 남북 연석회의는 세 개의 회의로 구성됐다.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그리고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이른바 ‘4김 회담’이다. 대표자 연석회의에는 남한의 41개 정당·사회 단체를 대표한 395명과 북쪽 민주주의민족전선 아래 15개 정당·사회 단체 대표 300명이 참석했다. 미군정은 남쪽에서 참여한 사람들이 “잘 알려진 사람도 있으나 대다수는 공산주의자의 도구로,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어보려고 애쓴 자들”로 규정했다(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1948년 4월6일 성명).
그러나 그렇게만 볼 수는 없었다. 정작 남로당 세력은 남북협상을 반기지 않았다. 좌우합작에서 별로 얻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연석회의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에 비해 우익 민족주의 세력과 중간파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분단으로 가는 폭주기관차에 몸을 실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 김구는 북행에 인생을 걸었고, 온건 합리주의자 김규식도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김구·김규식은 요인회담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북쪽은 연석회의를 중시했다. 북쪽은 조직적으로 참여했고, 남쪽은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북쪽은 실질적인 집권세력이었고, 남쪽은 미군정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당연히 북쪽은 치밀한 준비를 했고, 남쪽의 사전준비는 부족했다.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이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정당성과 합법성을 부여하는 들러리였다는 평가가 있다. 김구와 김규식도 알고 있었다. 3월31일 김일성·김두봉의 답신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의가 없지 않으나, 우리는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는 심정을 밝혔다. 그들은 알고도 갔다. 바보다. 현실의 정치에서 패배할 줄 알지만, 그 일이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하는, 그래서 훗날 역사가 평가하는 ‘바보 정치인’ 말이다. 어쩌면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북한에서는 이미 헌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1947년 11월 북조선인민회의 3차 회의에서 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고, 1948년 2월 초부터 ‘전 인민 토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한은 단독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1948년 2월26일 유엔소총회에서는 유엔 조선임시위원단의 임무 수행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안을 가결했다. 미군정 당국은 3월4일 남한 단독선거를 실시한다는 특별 성명을 발표했으며, 3월17일 선거법을 공포했다. 선거일은 5월9일(실제로는 5월10일)로 예고됐다.
미군정이 좌우합작 지지했던 1946년
그렇다면 만약에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이 조금 더 일찍 추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분단을 피할 수 있는 기회는 존재했다. 그것이 설령 바늘구멍이라도 말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물론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의 주체적 활용이다. 임시 통일정부를 수립해서 주도적으로 연합국과 협상을 해나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좌와 우는 찬탁과 반탁으로 나누어져 대립했고, 기회는 사라졌다.
1946년 5월, 다시 기회의 공간이 생겼다. 미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은 1946년 초 중국의 장제스에게 특사를 보내 국공합작을 권했다. 마찬가지로 남한의 좌우합작도 지지했다. 당시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파 민족주의 세력이 가세해 반탁운동이 벌어졌고, 미소공동위원회는 난관에 봉착했다. 미국은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면서 소련까지도 거부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싶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은 김구와 이승만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신 한국 정계를 주도해나갈 새로운 정치인을 찾고 있었다. 그들이 주목한 정치인은 여운형과 김규식이다. 여운형은 좌우의 대립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좌우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김규식은 미국에서 유학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미국식 문화에 익숙한 합리주의자였다. 미국의 생각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우선 좌파가 유연하지 못했다. 조선공산당은 7월27일 모스크바 3상 결의 전면 지지, 토지의 무상 몰수 등을 포함한 ‘민주주의민족전선 5원칙’을 발표했다. 미국에 비판적인 방향으로의 전환이었다. 통일전선을 포기한 것이다. 신전술에 따라 9월 총파업, 이어 ‘10월 대구 사건’이 발생했다. 좌우합작은 물 건너갔다. 1946년 3·1절 기념행사에 이어, 8·15 기념행사도 좌우가 분열되어 각각 치를 정도였다. 8·15 행사를 우익 쪽은 미군정 당국과 함께 군정청 광장에서, 좌익 쪽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했다. 1947년 7월19일 여운형이 암살되었을 때, 벽초 홍명희가 그를 추도하는 한시에서 탄식했듯, “애닯도다 좌익 우익 다투다가 함께 망하는 꼴”이었다. 만약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에 참여해 미군정의 탄압을 피하려 했다면, 그래서 여운형과 김규식이 중심이 되는 중도파가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좌우합작을 지지했던 미국 국무부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그랬다면 혹시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임시 통일정부 수립 논의가 힘을 받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른바 ‘조선 문제’가 유엔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1947년 10월18일 62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간 것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가 파기되었음을 의미했다. 연합국의 합의로 임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 물 건너갔다는 뜻이다. 국제적으로 미-소 냉전이 조금씩 짙어갔다. 기회의 창은 시간이 가면서 줄어들고 있었다.
먼 훗날이 된 지금의 가정이 다소 허망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래도 기회는 있었다. 더 좁아졌지만 말이다. 1948년 1월8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UNTCOK)이 서울에 도착했다. 이 기구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만들어졌지만, 그들은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그들의 임무는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 실시였다. 북한이 그들의 입북을 거부했지만, 그들은 38선 이북까지 자신들의 권한을 행사하고자 했다. 유엔 임시위원단은 중국·프랑스·필리핀·시리아·인도·오스트레일리아·엘살바도르·캐나다 정부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임시위원단 임시의장 메논은 1월21일 서울 중앙방송을 통해 “조선은 단일체이며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될 나라”라고 역설했다.
임시의장 메논의 의지와 애절한 편지
김구는 1월26일 그들과 협의해 미-소 양군 철수, 남북 요인회담,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제시했다. 2월4일 김구와 김규식이 북의 김일성·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남북 요인회담을 제안하자는 결정을 했다. 편지는 2월16일 발송되었다. 애절한 편지였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반쪽을 낼지언정 허리가 끊어진 조국이야 어찌 차마 더 보겠나이까?” 만약 유엔소총회가 열리기로 예정된 2월26일 이전에 남북협상이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한 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한 단독선거 지지 17.2%, 남북통일 총선거 지지 70.5%로 나타났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2월19일치). 실제로 그때 북한이 적극적으로 화답해서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최소한 5·10 선거는 연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미군정은 남북협상이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약화시키고 유엔의 권위를 심각하게 추락시킬 것이라고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연석회의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빛나는 순간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을 포함한 우파 민족주의자와 중도파들은 분단을 막기 위해 온 몸을 던졌다. 성과는 현실 정치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역사의 평가로 돌려졌다. 4월30일 전조선 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명의의 공동 성명은 4개항으로 이루어졌다. 1항이 외국군 동시 철수, 2항이 외국군 철수 이후 내전 불가, 3항이 외국군 철수-전조선 정치회의 소집-임시정부 수립-헌법 제정-정부 수립, 4항이 남조선의 단독선거 반대였다. 남북이 이 가운데 외국군 동시 철수를 논의하면서 최소한 정치회의를 소집함으로써 남한의 단독선거가 연기되었더라도 분단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4월의 역사적인 남북협상을 계기로 중도파와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의미 있는 정치적 구심체로 단결하는 계기는 되었을 것이다. 당시 현실은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의 원심력으로 인해 중도의 공백이 발생해 있었다. 그것은 타협의 공간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국제적 냉전 환경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민중의 염원을 담아, 남북협상파가 정국의 구심력으로 존재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졌을 수 있다. 그렇게 되었으면 미군정은 합리적인 중도파를 포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 역시 좌우합작 노선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면
좌우합작이 물 건너가고 남북협상이 중단되자, 분단은 쏜살같이 달려갔고 그 길의 끝에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북협상이 계속되었다면 최소한 전쟁의 길은 막았을 것이다. 전쟁이 없는 분단과 전쟁을 치른 분단은 다르다. 전쟁은 점선으로 그어진 38선을 굵은 실선으로 변화시켰다. 세계적 냉전 환경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대화의 끈을 놓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화해와 협력의 시점은 실제 역사보다 빨리 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국내 정치에서 반공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비극적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은 역사로 남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야 다시 살아났다. 문익환은 1989년 방북할 때, 김구의 심정을 회고했다. 김구는 발자국을 남겼고, 후배들이 그 길을 따라 길을 냈다. 그리고 52년 뒤인 2000년, 2차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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