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흔들리는 자본주의 공자 DNA를 찾아라

醉月 2010. 4. 1. 09:17

儒學(유학) 품으로 빠져들다
자기 성찰과 지적 호기심 충족 동양철학 붐  이설 기자 snow@donga.com

“신사임당을 보면 어느 겨를에 그런 명시를 썼는지 감탄스러워요. 바느질하랴 빨래하랴 바빴을 텐데, 참 대단해요.”(선병한 강사)

“사임당과 율곡 모자는 머리가 비상했겠지요. 중국에는 사임당이 천상의 서왕모가 속세로 하강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해요.”(수강생)

3월5일 서울 종로구 익선동 동인문화원에서 열린 ‘고문진보’ 시간. 수강생이 써온 한시를 받아든 강사 선병한 선생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덕분에 벌어진 ‘시’에 대한 토론 한 판. “시를 100수 정도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 풍류가 보이지만, 너무 맛들이면 집에서 구박받는다”는 선 선생의 말에 일동 웃음보가 터진다.

오늘 수업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6명. 내용이 다소 어려운 데다 오후에 개설된 이 수업은 수강생이 적은 편이다. 20대 대학원생과 50대 이상 주부, 시인 등 수강생들은 강의 내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고문진보’를 읽어나갔다. ‘고문진보’는 중국 고시와 고문의 주옥편을 모아 엮은 책.

“20대부터 70대까지, 중학생부터 전직 국회의원까지 연령도 직업도 다양해요. 서예·유학 등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분도 있지만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 오는 분도 많습니다.”

이곳 기획실장으로 일하는 이공찬(38) 씨의 말이다. 현재 서울과 경기지역에는 일반인을 위한 동양학 교실이 더러 있다. 동인문화원, 한국전통문화연구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청계서당, 성균관 한림원 등이 대표적이다. 통계로 잡히진 않지만 체감 수강생도 늘어나는 추세.

 

‘논어’ ‘맹자’는 최고의 카운슬러

대중 서당뿐 아니다. 전문·심화 과정인 성균관대 유학대학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찾는 발길도 늘어났다. 서당 체험과 예절교육 등 어린이를 위한 유학교실도 속속 생겨났다. 이런 바람을 타고 경상북도는 4~10월 ‘2010 세계유교문화축전’을 연다. 행사는 “사람을 받들고 세상을 사랑하고”라는 슬로건 아래 유교 공연과 각종 포럼을 진행한다.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금세 도태하는 21세기, 전통으로 눈을 돌린 이들을 만나 이유를 물었다.

“철학은 넘기 힘든 벽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그건 편견이었어요. 일상에 대한 생각이 철학이고,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수 있더라고요.”

대학원생인 이수빈(27) 씨는 기자에게 대뜸 수강을 권한다. “한번 들으면 절대 끊지 못할 것”이라는 깜찍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그는 동인문화원에서 4년째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강좌를 수강하고 있다. 이씨가 동양철학에 매료된 이유는?

“외로움도 많이 타고 예민한 편이었는데 요즘에는 ‘성격 좋아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요. 유학을 공부하면서 교회나 성당에 가듯 종교적인 위안을 얻는 거죠.”

5년 전부터 유학을 공부해온 한약사 김병현(40) 씨는 “당시 맹자의 제자들이 한 질문이 신기하게도 나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마음과 귀를 열고 강의를 들으면 일상의 고민이 저절로 풀어진다”고 말했다.

   

한국화를 전공한 박유순(25) 씨는 “서양화가 대세인데 왜 한국화를 하려 하느냐”는 타박에 늘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동양철학을 만난 뒤에는 반박할 논리와 선택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화 학도로서 ‘진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심에 철학공부를 하고 있어요. 인간의 근원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안목이 있어야 시대를 넘나드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테니까요.”

‘말년의 양식’을 찾아 온 이들도 있다. 장성한 두 아들의 엄마 정순임(53) 씨는 지난해 9월부터 동인문화원에서 ‘고문진보’ 등 수업을 듣고 있다. 그는 마음의 갈등이 생기면 종교보다는 자연을 찾는 편이다.

“나이가 들면 기능적 공부가 아닌 배움에 마음이 이끌리잖아요. 원래 자연이나 인문학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편인데, 유학은 철학·문학·예술을 모두 내포하고 있었어요. 한자가 어려워도 경전에 담긴 메시지가 낯설지 않고요.”

“얼음 깨고 잉어 잡아오는 건 안 바랄게. 아침에 깨우면 빨리 좀 일어나.”

문정실(51) 씨와 막내아들 정의림(13·봉은중1) 군은 지난겨울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란히 앉아 ‘사자소학’ 강의를 들은 것. 부모를 위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온 효자의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가는 길. 모자는 처음으로 ‘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은 멋쩍었지만 마음으로는 한층 가까워졌다.

“‘사자소학’은 옛날의 가치를 담고 있잖아요. 아들에게 그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이들은 한자라면 일단 겁부터 먹는데 찾아보면 재미있는 강의도 많아요. 부모들이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유학은 절대 어렵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IT기업에 근무하는 강석종(30) 씨는 유학 마니아다. 어려서 조부와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고, 최근 다시 맛을 들여 올해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수첩 두께의 책을 펼쳐 보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보세요. ‘논어’ ‘중용’ ‘대학’을 합쳐도 책이 이렇게 얇아요. 유학은 절대 어렵지도 고루하지도 않아요. 1200자 내외의 한자로 문장도 쉽게 쓰였죠. 사서삼경은 100번, 200번 읽고 또 읽어도 읽는 맛이 새롭습니다.”

‘현대판 서당’에 엄숙함은 없었다. 20대 대학원생과 은퇴한 60대가 머리를 맞대고 인생의 경험을 나눴다. 공부할 범위도 사제 관계도 자유로웠다. “사서삼경은 어렵지 않아요. 학자들 주석이 어려운 거지.” 눈높이에 맞는 강의를 찾아 꼭 들어보라는 동학들의 눈에서 순수한 유학 사랑이 읽혔다.

 

우리의 잃어버린 몸통을 찾아서
21세기 대한민국 공자의 부활 … 이제는 서구문명 떠나 전통 보듬어야 김성기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장 skkukim@dreamwiz.com    

중국에서 영화 ‘아바타’와 신경전을 벌인 ‘공자’의 한 장면.

“여왕폐하 만세!” 2010년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는 여왕폐하가 됐다. 그의 눈물에 국민의 50%가 함께 울었다. 우리에게는 또 한 명의 여왕폐하가 있다. 바로 유관순이다. 3·1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인구의 10분의 1인 200만명이 넘었고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 등 각국에 직간접 영향을 미쳤다. 그때 현장중계가 있었다면 아나운서는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유관순 여왕폐하 만세!”

두 여왕폐하는 석연찮지만 벗어나지 못했던 굴레에서 우리를 구원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늘 스스로 바닥에 던지는 자기비하에 신음했다. IMF로 경제주권을 상실한 1997년, 우리는 또 국제적 조롱거리가 됐다.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을 거듭하고 환란을 당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세계적 문명사가 기 소르망은 “한국은 고유한 문화의 변별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분석했다.

김연아와 유관순뿐 아니다. 아시아부터 아랍, 북남미의 안방까지 당당히 꿰찬 대장금도 있다. 밴쿠버의 영웅부터 3·1운동에 참가한 기생까지 합세해 무언가를 이룬 국민 모두가 금메달감이요, 여왕폐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김연아는 아사다 마오의 게임이 끝난 뒤 천주교 성호를 그으며 빙판으로 나아갔고, 유관순은 치마저고리에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대장금은 산소 같은 조선 여인의 기개를 널리 알렸다. 동떨어져 보이는 이들 간 공통의 이미지는 어디서 비롯한 걸까.

 

‘유교적 기독교인’과 ‘유교적 불교인’

이런 다름 사이의 같음, 혼란 속의 정돈은 이미 세계 종교학자들에게 감지된 바 있다. 한국은 500개의 종교가 섞인 다종교사회다.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신자가 1000만명이 넘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종교적 충돌은 거의 없다. 세계종교사적으로 계시종교인 기독교나 이슬람교, 전통종교가 만날 때는 예외 없이 큰 충돌이 일어났다.

저명한 종교학자 줄리아 칭은 이런 한국의 종교현상을 연구한 결과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와 불교 사이 완충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기독교인을 ‘유교적 기독교인’으로, 불교인을 ‘유교적 불교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와 관련 “내 생활과 삶의 방식은 유교적이다”라는 질문에 기독교 성직자 80% 이상이, 기독교 신자 90%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다. 아리송한 공통분모의 정체는 바로 유교였던 것이다.

참으로 긴 세월 우리는 방황하고 살았다. 우리 것을 무조건 버리기도 했고 맹목적으로 서구의 것을 좇은 적도 있었다. 20세기 중반을 넘어 ‘문명의 위기’는 시대의 유행어로 자리매김했다.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 인성 타락 등이 구체적 근거가 됐다.

현대의 지성은 이런 한계를 맞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당위성과는 별개로 감을 잡지 못해 헤매는 분위기다. 서양의 한 철학자는 서구문명사가 종말을 고한 것으로 보고 “새로 창출되는 문화종합은 이제 서양적인 것, 유럽적인 것, 아시아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이 돼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ET 철학’이 아니고야 어떻게 이런 철학이 가능하겠는가. 그저 새로운 철학을 기다리며 허둥대는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궁색하다. 얼마 전 내한한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런 주장에 일침을 가했다. “유교, 불교 등 풍부한 문화적·이론적 전통을 가진 한국이 왜 밖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가? 더 이상 한국의 미래를 외국에서 찾지 말라.” 우리의 ‘서구 닮기’ 꿈이 어리석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음을 깨우치는 말이다.

   

유관순 열사(왼쪽)와 김연아 선수는 한민족의 자신감을 일깨웠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을 강조하는 말이다. 물론 균형감각은 중요하다. 하지만 날개의 좌우를 다지기 전에 몸통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몸통 없이 날개만 있는 새는 날 수 없다.

필자는 진보인 사회주의와 보수의 자본주의가 좌우 날개라면, 그 몸통은 유교라고 본다. 최근 공자의 부활을 알리는 소식이 도처에서 날아든다.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중국 전역에 상영된 영화 ‘공자’다. 지난해 3월 뮤지컬 ‘공자’가 무대에 올랐고, 올해 상반기에는 CCTV가 드라마 ‘공자’를 방영할 예정이다. 중국에서는 바야흐로 공자 열풍이 불고 있다.

 

‘여왕폐하’와 ‘군자’의 DNA

하지만 다시 돌아온 공자는 부활의 초두에 만만찮은 상대를 만났다. 2010년 초 중국 당국은 세계적 화제를 모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 상영을 허가했다. 예상치 못한 인기 바람이 불었고, 당국은 뒤늦게 억제책을 펼쳤다. 그럼에도 기세는 꺾지 못했다. 이에 당국은 행정수단을 통해 ‘아바타’를 3D판만 상영하게 하고 대신 영화 ‘공자’를 올렸다. 이 내막은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중국 전역에 퍼졌고, 누리꾼들은 부당한 조치에 항의해 ‘공자’ 관람 거부운동을 벌였다. 저항은 격렬했다. 상하이에서는 고작 수백 장의 표만 팔렸고, 인터넷 게시판에는 수만 개의 댓글이 달렸다.

누가 공자의 부활을 욕되게 하고 유학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가. 21세기에 공자는 국가 이데올로기나 봉건통치자의 전유물을 꿈꾸지 않는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나 가진 자만을 위한 철학이기도 거부한다. ‘아바타’에 대응하는 문화 충돌의 선봉장으로 서겠다는 바람은 더더욱 없다.

마오쩌둥은 줄곧 ‘유교문화=종법사회=봉건’이라는 도식 타도를 외쳤다. 그래서 문화대혁명 시기 ‘봉건종법의 사상과 제도’로 규정된 유교문화를 철저히 파괴했다. 오늘날 당시의 공자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공자 부활을 목도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과 같은 ‘관방유교’에 의한 공자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삶 속에서 체득한 유교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는 부활이다. 후자의 부활은 유전자 속 유교 DNA를 발견하고, ‘여왕폐하’였던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군자’였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온전히 되살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오늘 왜 다시 유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것이 우리의 잃어버린 몸통을 찾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

 

成大 유학대학원 떴다
유교경전·예학전공에 명사들 몰려, 유학에 대한 뜨거운 관심 반영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이설 기자 snow@donga.com

김성기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장의 ‘선진유학 특강’.

“몸을 챙기는 것은 곧 밥을 챙기는 것입니다. 선조들은 밥만 챙기는 사람을 ‘밥보’, 즉 ‘바보’라고 했어요.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정말 바보가 많아요. 대부분 몸에 집착하거든요.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논어’를 공부해야죠.”

3월9일 오후 8시 성균관대 퇴계인문관의 한 강의실. 이 대학 동양학부 이기동 교수가 ‘학(學)’을 주제로 ‘사람은 무엇을, 왜 배워야 하는가’를 ‘논어’에서 찾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중용’ ‘맹자’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욕심’ 등의 글자가 강의실 화이트보드를 빼곡히 채웠다.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채워지지도 않을뿐더러 욕심을 채우는 삶의 결과도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은 밟아서 없애야 합니다. ‘논어’나 ‘맹자’를 가까이 두고 되돌아보는 것도 욕심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이 교수가 욕심을 없애는 법에 대해 말하자 참여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지낸 전윤철 경원대 석좌교수의 손이 올라간다.

“욕심을 버리라고 하셨는데, 도요타와 경쟁해서 국력을 높이겠다는 기업가의 마음이나 유학을 연구해서 학문적 업적을 세우려는 학자의 마음도 욕심입니까?”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의 전 교수에게 이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변덕스러운 마음은 욕심, 변하지 않는 마음은 본심입니다. 같은 행위라도 마음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본심과 욕심이 갈립니다. 너도 나도 행복하기 위해 일하는 기업인의 마음은 본심, 다른 기업을 무너뜨리고 나만 잘살자는 마음은 욕심인 거죠.”

두 사제 간의 문답은 두세 차례 이어졌고, 학생들은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기거나 비슷한 질문을 하며 수업에 참여했다.

 

“탈락자는 비학위 강의 들으며 재수 중”

앞서 6시부터 진행된 1교시 ‘선진유학 특강’ 수업 분위기도 마찬가지. 1교시 강의를 한 김성기 유학대학원장은 “우리 사회에서 ‘엑기스’만 뽑은 터라 학생들의 눈높이가 매우 높다. 예전에는 가끔 교수가 지각도 하고 휴강도 했지만 요즘은 교수들이 강의시간을 훌쩍 넘길 정도로 진지하다”며 웃었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이 ‘떴다’. 2006년 전기 모집인원을 채우지 못했던 유학대학원이 2007년 신입생 경쟁률 1.16대 1을 돌파하더니 올해는 1.64대 1(25명 정원에 41명 지원)을 기록할 만큼 학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1988년 3월 문을 연 유학대학원은 유교경전·예학전공(유경과)과 서예학전공이 설치됐으며, 서류와 면접 전형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올해는 유경과 정원을 7명(총 정원은 16명) 늘렸는데도 10여 명의 유명 최고경영자(CEO)가 탈락할 정도였다. 그만큼 경쟁력을 갖춘 학생들이 대거 지원했다. 탈락자 중 상당수는 비학위 과정에 출석하며 ‘재수 의사’를 밝히고 있다.”

   

1 올해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입학한 박노빈·이우희 전 삼성 CEO와 한선교 의원(왼쪽부터). 2 신입생인 전윤철 교수, 김영석 전 우석대 총장과 4학기째인 박재갑 교수(왼쪽부터).

유학대학원 행정실 김재수 계장의 설명처럼 이날 강의 시간에는 김영석 전 우석대 총장, 박노빈 전 에버랜드 사장, 송용로 전 삼성코닝 사장, 이완근 신성홀딩스 회장(성균관대 총동문회장), 이우희 전 에스원 사장, 이중구 전 삼성테크윈 사장, 전윤철 교수, 한선교 국회의원, 박재갑 서울대 의대 교수 등 유명 인사들이 눈에 띄었다. 왼쪽 맨 앞자리에는 이우희·이중구·박노빈 등 ‘전직 삼성 CEO’와 이완근 회장, 한선교 의원이, 오른쪽 뒷자리에는 김영석 총장, 전윤철 교수, 박재갑 교수가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 신입생이지만 박 교수는 4학기째, 서정돈 성균관대 총장은 5학기째인 선배. 서 총장이 지난해 9월 ‘국제유학연합회(國際儒學聯合會)’ 이사장으로 추대돼 한국 유학의 위상을 더 높였다는 평가다. 연합회는 한국, 중국, 일본 등 21개국 유학 관련 기관이 참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학단체. 서 총장은 2014년까지 학술단체의 연구 및 교류협력을 진두지휘한다.

 

정신적 황폐함으로 경쟁에서 유학으로 ‘U턴’

이들 학생은 화, 목요일 오후에 ‘선진유학 특강’ ‘논어연습’ ‘유학원론’ ‘학용연습’ 4과목을 듣는다. 그래도 학생은 학생. 학생이 된 백발의 CEO들도 수업교재와 교수의 강의 스타일을 묻거나 서로 인사하며 동문의 우의를 다졌다.

정원 채우기도 벅찼던 유학대학원의 변신 이유는 뭘까. 이기동 교수와 김성기 대학원장은 ‘현대사회의 정신적인 황폐가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한다. 김 원장은 “태극기를 든 유관순과 김연아에게는 ‘우리의 얼’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지만 몸통이 없으면 날기는커녕 생존하지도 못한다. 서구문명의 한계와 병폐를 경험한 한국인들이 이제 몸통을 찾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이 교수는 “마음이 얼어붙으면 따뜻한 바람을 그리워하는 이치다. 앞만 보고 경쟁했지만 마음은 공허하다. 이 마음을 유학이 채우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생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이날 수업시간에 40분 지각한 한선교 의원은 “정치생활에 바빴지만 뭔가 비어가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사상, 철학으로 그 부분을 채워놓고 싶었다. 우리 민족 저변에 흐르는 유학에 대한 순수한 관심에서 진학했다”고 말했다. 박노빈 전 사장은 “유학 공부로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싶다”고 했고, 이완근 회장은 “이제부터라도 이 교수가 말한 ‘철학적 방황’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윤철 교수의 진학 동기는 좀더 구체적이다.

“오랜 기간 경제 관료를 지내면서 유교와 자본주의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한 학자는 유교문화권 국가의 자본주의는 절대 번창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실체를 연구하고 싶었다. 막연히 알던 유교의 본질도 궁금했다.”

‘선배’인 박재갑 교수는 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종교에 대한 관심이 한층 깊어졌다고 말했다. 종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한국 종교를 연구하는 ‘한국종교발전포럼’을 만들었고, 박사과정에서는 그 이유를 규명해볼 의지라고.

이 밖에 36년 만에 다시 학생이 된 서정돈 총장이 입학하면서 자연스레 언론의 관심을 끌었고, 이후 서 총장 스스로 지인들에게 유학대학원 입학을 권한 것도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학교법인 성균관대 우종근 사무국장은 “중국의 공자(유학) 열풍이 정치적 사회주의, 경제적 자본주의라는 중국 내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가치철학으로서 관(官)이 주도한 것이라면, 한국에서의 열풍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과 성찰한 결과”라며 “그 중심에 600년 성균관대가 자리한다”고 말했다.

 

유학의 핵심은 동이족 한마음 사상
4300여 년 전 요임금의 ‘중용’ 원형 … 공자가 체계 세우고 맹자가 크게 선양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 kdyi0208@naver.com    

■ ‘사서삼경 완역’한 이기동 교수 지상 특강

유학은 공자(孔子)가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완성한 바람직한 삶의 길잡이다. 이를 배우는 쪽에서는 유학(儒學), 가르치는 쪽에서는 유교(儒敎), 실천하는 쪽에서는 유도(儒道)라고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흔히 ‘유학은 종교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하지만 유학을 종교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유학이 종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종교, 철학, 정치학, 교육학 등으로 영역을 나누는 것은 서구 근세에 생긴 분류법이다. 유학은 이런 분류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한의학을 내과, 외과 등으로 분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유학은 종교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며, 윤리학이기도 하고 정치학이기도 하며, 교육학이기도 하고 경영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유학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공자일까, 맹자일까. 유학의 원형은 4300여 년 전 지금의 중국 중원을 다스리던 요(堯)라는 임금이 만든 중용(中庸)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는 중국이란 나라도, 한국이라는 나라도 없었다. 다만 중원의 동부지방에 살던 동이족(東夷族)과 서부지방에 살던 서부족이 수많은 부족국가의 형태로 각각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었다.

 

종교·철학·정치학·교육학 요소 두루 포함

동이족은 종교성이 강하고 몸보다 마음을 중시하며 검은색 도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서부족은 물질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마음보다 몸을 중시하며 채색 도기를 사용했다. 이렇듯 다른 두 문화를 요임금은 중용이라는 사상으로 조화시켰다. 요임금의 중용사상은 동이족의 마음을 핵심으로 삼고, 모든 것을 잘 분별하는 서부족의 삶의 방식을 테두리로 삼았다. 중용사상을 이루는 핵심은 동이족의 사상이고, 동이족의 후예 중 대표는 한국인이므로 요임금의 중용사상의 핵심은 한국인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요임금의 중용사상을 동이족인 순(舜)이 계승했고, 다시 서부족인 우(禹)가 계승하며 동이족과 서부족이 번갈아 이어갔다. 우의 후계자는 동이족이 아니라 우의 아들로 이어졌는데, 그것이 서부족의 하(夏)나라다. 하(夏)는 동이족인 탕(湯)이 세운 상(商)나라에 멸망했다. 상은 다시 탕의 아들로 이어오다 서부족이 세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패망했다. 주나라는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 때 크게 부흥했고, 무왕의 동생인 주공(周公)에 의해 제도가 완비됐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문왕과 무왕, 주공을 동시에 존숭했다. 그러다 주나라가 혼란해지기 시작한 춘추시대에 공자가 등장했다. 공자는 요에서 시작해 순, 우, 탕, 문왕, 무왕, 주공으로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집대성해 거대한 체계를 세웠다. 그것이 유학이다.

   

공자, 이이, 이색(왼쪽부터).

공자가 집대성한 사상체계는 오경(五經)으로 정리된다. 오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예기(禮記)’를 일컫는다. 후대인 송(宋)나라 때 주자가 공자 이후에 완성된 ‘논어’ ‘맹자’, 그리고 ‘예기’ 속에 있는 ‘대학’ ‘중용’을 독립시켜 사서(四書)로 정리함으로써, 오늘날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유학의 중심 경전이 됐다. 공자의 유학은 100여 년 뒤 등장한 맹자(孟子)에 의해 선양됐는데, 맹자는 공자의 중용사상 중에서 핵심이 되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맹자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한마음임을 증명하고, 모든 사람은 그 한마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서로 사랑하게 돼 있다는 뜻에서 사람은 본성적으로 착하다는 성선설을 주창했다.

한편 맹자의 뒤를 이어 등장한 순자(荀子)는 한마음을 부정하고, 개체성을 강조해 모든 사람은 독립된 개체로서 본질적으로 서로 다투게 돼 있다고 보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창했다.

순자가 주창한 성악설이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이어서 사람들은 순자의 학설을 추종했고,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는 순자의 학설을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으로 다스려졌다. 한나라 말기에 이르러 순자 철학이 한계를 보이자 중국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를 수용했고,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는 불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다 당나라 말기에 불교의 폐단이 드러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학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유학부흥운동은 맹자의 사상과 순자의 사상을 동시에 부흥시키는 방식이었는데, 이 두 사상의 흐름이 송나라 주자에 의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으로 통합됐다.

 

한국 유학교육 시초는 고구려 태학

성리학은 성(性)과 이(理)를 중심 개념으로 한다는 뜻에서 불린 명칭인데, 이 밖에도 주자가 완성했다는 뜻에서 주자학, 정이(程)와 주자가 중심 인물이라는 뜻에서 정주학, 송나라 때 완성됐다는 뜻에서 송학, 이(理)가 중심 개념이라는 뜻에서 이학, 새로운 유학이라는 뜻에서 신유학 등으로 불린다.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나라와 명나라는 성리학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특히 명나라 때는 다시 인간의 마음을 중시하는 맹자의 요소를 강조한 왕수인이 나타나 양명학을 성립시켰다. 뒤이은 청나라 때 다시 물질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인간의 개별성을 중시하는 순자의 사상이 등장했는데, 이것은 청학 또는 실학으로 불렸다. 청학은 청나라 때의 학문이란 뜻이고, 실학은 실질적인 것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실학의 선구자는 황종희, 고염무, 대진 등이었다.

유학의 핵심은 고대 동이족의 한마음 사상이었으므로, 중국에서 수입된 유학은 한국인의 사상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그곳에서 정리된 뒤 역수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에 공자의 유학이 수입돼 교육된 것은 기록상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의 태학 설립에서 기원을 잡을 수 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때 수입한 유학은 중국 한나라와 당나라 때의 유학이었으므로 순자의 유학이었다. 마음을 중시하는 한마음을 강조하는 한국인으로서는 당시의 유학에 만족할 수 없었겠지만, 한국인의 철학적·종교적 갈증은 불교를 통해 해소됐으므로 유학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이 시기 유학은 주로 국가의 통치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그쳤다.

   

고려시대 말기에 이르러 불교의 폐단이 극에 달하자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중국의 성리학이 수입됐다. 원나라로부터 처음 성리학을 수입한 이가 안향이다. 고려의 성리학은 목은 이색 선생에 의해 완전히 한국 땅에 정착했다.

목은 선생의 사상은 하늘과 사람이 원래 하나라는 천인무간(天人無間)이 바탕이 됐고, 그의 성리학은 조선조에 이르러 세 흐름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철저한 수양을 통해 사람의 본래 모습을 되찾음으로써 하늘과 하나 되고자 하는 수양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양촌 권근, 회재 이언적을 거쳐 퇴계 이황에 이르러 완성됐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본래의 모습인 천국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정암 조광조를 거쳐 율곡 이이에 이르러 완성됐다. 나머지 한 흐름은 인간의 본래 모습인 하늘의 차원에서 세상에 초연하면서 모든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는 초탈원융철학의 흐름이다. 이는 매월당 김시습, 화담 서경덕 등을 거쳐 남명 조식에 이르러 완성됐다.

그러나 한국의 성리학이 전성기를 거치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명학, 천주학, 실학, 동학 등이 저항세력으로 등장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임란 때 잡혀간 강항 선생으로 日 유학 부흥

일본이 유학을 받아들인 것은 백제의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데서 비롯됐다. 일본의 유학은 그다지 융성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강항 선생에 의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일본의 유학을 정착시킨 인물은 강항의 제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性窩)다. 후지와라의 유학은 그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에 의해 일본의 관학으로 정착했다. 하야시는 도쿠가와 막부의 선생이 돼 유학을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일본에 정착한 유학은 주자학 중에서도 퇴계를 중심으로 하는 퇴계학이었다. 퇴계학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에 의해 강화됐는데 안사이는 벽에 퇴계 선생의 초상을 걸어놓고 매일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안사이는 퇴계학과 일본 신도의 접목을 시도하는 한편, 퇴계의 경(敬)사상을 타인에 대한 공경심으로 변용해 일본의 풍토에 맞게 정착시켰다.

일본의 주자학은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오규 소라이(荻生徠) 등의 고학파(古學派)에 의해 부정되고 일본의 독자적인 유학으로 전개됐다. 고학파의 유학은 순자의 유학이었다. 일본의 유학은 개별성과 경험성을 강조하면서 본초학·천문학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실학으로, 실학에서 국학으로 변모했다.

국학에 이어 일본의 지식인들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난학(蘭學)을 성립시켰다. 난학은 화란(和蘭)에서 따온 말이다. 난학은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줄였을 뿐 아니라, 한편으로 서양의 과학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가 됐다. 이후 일본은 급격히 서구문물을 받아들였고, 이에 힘입어 명치유신이라는 새 정치체제를 완비하고 오늘날의 형태로 만드는 기틀을 잡았다.

 

청학동 김봉곤 훈장과 신화연구가 김원익의 ‘1박2일’ 교육대담
“父母者, 子女之形 부모가 모범 보여야죠” … “그리스 신화에서도 균형과 조화를 강조했죠” 철원=배수강 기자 bsk@donga.com

김봉곤 훈장과 김원익 박사가 3월6일 오전 강원 철원군 한민족예절서당에서 시서루(詩書樓)를 지나며 대화하고 있다. 김 훈장 왼쪽 손에 회초리(回初理)가 들려 있다.

지리산 청학동을 떠나 철원에 새 둥지를 튼 김봉곤(43) 훈장을 만나러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3월5일 오후 강원 철원군 근남면 잠곡2리 마을회관 앞 463번 지방도로에서 서당 진입로를 찾는 것도 어려웠거니와 도로 입구에서 서당까지 1.5km 남짓 비포장 언덕길은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는 듯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바퀴는 계속 헛돌았다.

“탄력받아 스피디하게, 그리고 한 번에 올라오셔야 합니다. 아니면 (바퀴가) 헛돌아요.”

휴대전화를 통해 김 훈장의 코치를 받고 다시 산길을 오르지만 족탈불급. 그가 말한 ‘탄력’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때쯤 기자는 차를 한 곳에 세우고 동행한 김원익(49) 박사와 산행을 시작했다. 발목까지 쌓인 눈길을 따라 1km쯤 걸어 오르자 저 멀리 나무와 기와로만 이뤄진 우복동(又福洞) 한민족예절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약 1만6500㎡(5000여 평)에 학당과 숙박시설 등 한옥 16채가 들어선 예절학교는 150여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단다. ‘지리산 청학동 훈장’으로 널리 알려진 그가 철원에 서당을 세운 이유가 궁금했다.

“2005년 강원 화천군으로 와서 건물을 임대해 2년간 예절서당을 했어요. 그때 서당 지을 땅을 찾아 두루 돌아다녔는데 마침 이곳이 눈에 띄었지요. 예부터 동국삼승지(東國三勝地)로 지리산 청학동, 가야산 만수동, 속리산 우복동을 꼽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서당(한민족예절학교를 지칭) 좌우로 복두산(福頭山, 또는 伏主山·해발 1141.9m)과 복계산(福桂山·1057m)이 병풍처럼 둘러쳤어요. 산 이름에 또(又) 복(福)이 있는 곳이죠. 속리산은 아니지만 제가 명승지인 우복동이라고 지었습니다. 예절서당인 만큼 ‘예절 바른 사람은 복도 듬뿍 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세요.” 그는 지인과 은행의 도움이 컸다며 귀띔했다.

 

강원도 철원의 우복동 한민족예절학교

한옥의 아름다움에 이곳저곳 구경하고 있을 때 불쑥 나타난 김 훈장의 설명이다. 그는 정중히 ‘배꼽인사’를 하고는 “손님이 오신다기에 장을 보고 왔다”며 기자 일행을 반긴다. 종이 태극기가 달린 회초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거요? 2월1일부터 매월 1일은 ‘회초리데이’로 정해 그 의미를 새겨보자는 캠페인을 하고 있어요. 회초리의 한자는 ‘처음의 이치로 돌아가라’는 뜻을 담아 제가 回初理로 정했죠.”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바른 몸가짐, 말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유학 경전 구절은 지리산 청학동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 대신 한학을 한 김 훈장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능이버섯무침과 삼계탕으로 저녁을 먹고 직접 담갔다는 막걸리가 일순(一巡)하자 김 박사와 김 훈장의 대담은 카세트테이프 풀리는 듯했다. 다음 날 오전에 국화차 마시자며 기자의 숙소를 찾은 김 훈장은 전날 밤 대화가 부족했던 눈치다. ‘신화, 세상에 답하다’의 저자이자 신화연구가인 김 박사와 청학동을 나와 다양한 방송·교육활동을 해 잘 알려진 김 훈장의 이틀에 걸친 대화는 그렇게 계속됐다.

김원익 철원에 터를 잡으셨네요. 고즈넉한 서원 분위기입니다. 수도하기 안성맞춤입니다.

김봉곤 하늘 아래 첫 동네(지리산 청학동은 해발 900m에 자리한다)에서 태어나 5세 때부터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습니다. 전기도 없던 시절 부모님 말씀을 따라 도를 닦았죠. 유도(儒道)였습니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당행지로(當行之路)’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당연한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사셨고 저를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1993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지금도 죄스럽습니다.

   

교육은 환경과 적기가 가장 중요

김원익 1989년 서울 양재동에서 서당을 열었죠?

김봉곤 한평생 청학동에 살며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고집하셨던 아버지와는 좀 다르게 살고 싶었습니다. 대중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호흡하고 싶었죠.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왜냐? 어릴 적 집에서 농사지은 쌀은 반 년 지나면 떨어졌거든요. 그때는 산에서 약초나 나물을 캐 장터에 가져가 물물교환을 하면서 필요한 물건을 챙겼어요. 칡도 많이 캤죠. 그러니 4남1녀 뒷바라지하시는 어머니의 눈물을 오죽 많이 봤겠습니까. 처음 서울에 와서는 고생도 많이 했어요.(웃음)

김원익 그리스 신화를 보면 태초부터 부자갈등은 아주 중요한 테마였습니다. 신들의 아버지 우라노스는 아들 크로노스와, 또 크로노스는 제우스와 심한 갈등을 겪지요. 훈장님도 경제적인 문제로 전통을 고집하신 아버지와 갈등을 겪었습니까?

김봉곤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를 항상 깊이 존경했고 지금도 저의 우상이십니다. 청학동을 나오기 전까지 아버지와의 갈등은 부자지간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그런 사소한 것들이었죠. 하지만 제가 청학동을 나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완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오염’된다는 거였죠. 그렇다고 저를 심하게 꾸짖으셨거나, 제가 반항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와 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말없이 서로를 설득하면서 기다렸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3년 만에 아버지의 ‘반승낙(묵인)’을 얻어 청학동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김원익 어쩌면 훈장님과 아버지의 경우가 동양의 전통적인 부자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부자간 갈등이 있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갈등을 가슴에 담아둔 채 견디고 사는 것. 체념과 상호존중의 미학을 알았다고 할까요. 적당한 시간이 흘러 아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아버지가 못 이기는 체 져주었습니다. 그런데 서양은 사뭇 달랐습니다. 부자간 갈등이 생기면 먼저 아들이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오이디푸스의 경우처럼 피비린내가 진동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집니다.

 

김봉곤 그렇군요. 어쩌면 그래서 제가 서당(예절학교)을 운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당을 운영하다 보면 부모님과 갈등을 겪는 자녀를 많이 보게 됩니다. 부모님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말을 안 듣는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달라’ ‘형제끼리 싸운다’ ‘편식이 심하다’ 등등. 저는 정작 애들은 잘못이 없다고 봅니다. 문제아라고 찍힌 아이들도 배경을 보면 부모의 문제가 커요. 제때 바로잡아주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요. 옛 서당의 훈장은 하루 종일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늘 관찰했습니다.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알았지요. 그러다가 상황을 봐서 타이르거나 격려해주고, 때론 마음이 아프지만 회초리도 들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을까요. 그만큼 속이 타들어간다는 거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가정에서는 부모가 훈장이 아닐까요.

김원익 듣고 보니 저도 부모로서, 교육자로서 반성이 많이 되네요. 자녀나 제자에게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다가도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귀찮아서 모른 채 넘어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봉곤 ‘부모자(父母者)는 자녀지형(子女之形)이요, 자녀자(子女者)는 부모지영(父母之影)이라, 형정즉영정(形正則影正)하고 형부정즉(形不正則) 영역부정(影亦不正)이라.’ 부모는 자녀의 형체이고 자녀는 부모의 그림자입니다. 형체가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고 형체가 바르지 못하면 그림자도 바르지 못한 법입니다. 학교에선 선생님이, 가정에선 부모의 형체가 큰 영향을 주죠. 교육은 환경과 적기(適期)가 중요합니다. 전인교육을 위한 최적기는 유치부와 초등학교 때입니다. 순수하면서도 스펀지처럼 무한 흡입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이곳에서 초등생을 중심으로 서당을 운영합니다.

김원익 자녀교육만큼 어려운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리스 신화에 이카로스가 등장합니다.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붙여 날개를 만들고 하늘을 나는데, 아버지(다이달로스)가 ‘너무 높게 날지도, 낮게 날지도 말고 내가 선도비행 할 테니 나만 따라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말을 듣지 않고 결국 태양 가까이 높이 올라가 밀랍이 녹으면서 떨어집니다.

   

고대 그리스의 조화와 균형은 유학의 배려와 관용 정신

김봉곤 평소 이카로스가 아버지 말씀에 공손히 따르는 전인교육을 받았다면 그런 비극적인 일은 없었을 겁니다.(웃음) ‘중용(中庸)’을 보면 ‘군자 이인치인, 개이지(君子 以人治人, 改而止)’라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는 사람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고치면 그친다’는 얘기죠. 요즘 말로 치면 ‘이인치인’은 1대1 교육이면서 눈높이 교육인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 혹은 도리(以人)로서 그 사람에게 해주는 거니까요. 선생님이나 훈장은 의사와 같습니다. 정신병이나 마음의 병도 병이고 육체의 잘못된 버릇도 병입니다. 그걸 치유해야 하는데 말이죠.(그는 속이 타는 듯 국화차 두 모금을 연거푸 마셨다.)

김원익 평소 훈장님은 ‘정지(正知)’ ‘정심(正心)’ ‘정신(正身)’이라는 ‘삼정교육(三正敎育)’을 강조하시는데요, 결국 공자님이 말씀하신 ‘인(仁)’으로 요약할 수 있겠지요? 훈장님의 교육철학은 무엇입니까?

김봉곤 관용과 배려입니다. 관용과 배려는 인의 핵심이자 예수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와도 상통하는 개념입니다. 저는 학생들을 대할 때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배려합니다. 학생의 입장과 능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무한 신뢰를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화를 내거나 혼내지 않습니다. 끝까지 인내를 갖고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몇 번이고 설명합니다. 배려인 거죠. 배려는 한자를 보면 ‘짝 배(配)’와 ‘생각할 려(慮)’입니다. ‘짝하는 생각’인데, 짝을 하려는 사람처럼 대하는 게 배려이자 예절입니다.

김원익 그런데 훈장님께서는 매월 1일을 ‘회초리데이’로 정해서 행사를 치르시는데, 언뜻 보면 훈장님께서 말씀하신 배려와 관용의 정신과는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웃음)

김봉곤 충분히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말하는 회초리는 그런 회초리가 아니라 자성과 반성의 회초리입니다. 말하자면 자기반성과 겸양지덕의 회초리입니다. 요즘 세상이 자꾸만 험악해지는 것은 자기성찰이나 겸손할 줄 아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신들만이 최고이고 옳다고 오만을 떱니다. 신화에서는 어떻습니까?

김원익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둡고 불투명한 세계를 배척하고 밝고 투명하고 확실한 세계를 지향했습니다. 절제와 중용, 조화와 균형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그것들과 대치되는 탐욕과 오만을 경계했지요. 그리스 신화에 탐욕과 오만에 빠져 파멸하는 주인공을 다룬 이야기가 많은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가령 영웅 벨레로폰은 괴물 키마이라를 해치우지만 천마를 타고 우쭐한 나머지 신들의 궁전을 넘보다가 신들의 왕 제우스의 번개를 맞고 추락해 절름발이가 됩니다. 이카로스의 얘기도 마찬가지죠.

김봉곤 그리스 신화는 잔인하고 끔찍한 얘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벨레로폰, 이카로스 등의 얘기를 듣고 보니 아주 철학적입니다. 이카로스의 얘기는 특히나 유학에서 말하는 중용의 미덕을 설파하는 듯합니다.

   

추운 겨울 지나면 봄 … 비행 청소년에게도 믿음 줘야

김원익 저도 학부모입니다만, 요즘 학부모는 대학입시에 ‘올인’(다걸기)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학부모들이 자녀를 제때 ‘치유’하지 못하는 것도 교육제도의 문제가 아닐까요?

김봉곤 학문의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이냐 ‘위인지학(爲人之學)’입니다. 위기지학은 말 그대로 자신을 닦는 순수학문이고 위인지학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머리로 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위인지학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국영수’ 학원만 살아남습니다. 지난해 사교육비가 21조6000억원이라고 하죠? 저는 국내 주요 대학의 입시요강만 바꾸면 이 문제도 풀린다고 봅니다.

김원익 어떻게요?

김봉곤 요즘은 내신과 수능 점수로 사람 서열이 매겨집니다. 그리고 기능적인 지식과 권력, 물질이 많으면 일류 인간이라고 해요. 그게 최고의 가치가 됐어요. 그런데 인간사회는 인간적인 가치가 더 중요합니다. 효도 1등 한 학생은 사람이 아닙니까? 배려하고 예절 잘 지키는 학생은 또 어떤가요? 주요 대학이 착하게 사는 학생, 예절 바른 학생을 높이 평가하겠다고 입시요강을 바꾸면 됩니다. 그럼 초중고교에 예절교육이 강화되겠죠. 선생님들이 제대로 평가만 잘해주면 됩니다.

김원익 ‘김봉곤식 입시요강’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졸업식 알몸 구타 사건’ 등 요즘 청소년 비행사건 뉴스를 보면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김봉곤 청소년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행 청소년이라도 충분히 바뀔 수 있어요. 추운 겨울이 있으면 봄이 옵니다. 참고 기다려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믿음이죠. ‘여보적자 심성구지 수부중불원의(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不遠矣)’라고 했습니다. ‘갓 태어난 자식 보살피듯 하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구하면 비록 얻지 못해도 멀지는 않을 것이다’는 말입니다. 요즘 부모는 어떻습니까? 자녀나 제자는 계속 갓난아이처럼 보살펴야 합니다.

김원익 말씀을 듣다 보니 저 역시 반성하게 되고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는 듯합니다. 요즘 주변에 유학을 찾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김봉곤 현대인은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스피디한 생활과 경쟁의 연속이지요. 유학은 생수 같은 존재입니다. 잊어버린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주지 않습니까? 공맹(孔孟) 모두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인(仁)을 얘기합니다. 인을 구현하는 방법은 효제(孝悌)를 실천하는 것이죠. 가족애와 부모님에 대한 공경, 위계질서에서의 공손함도 모두 해당합니다. 물론 유(儒)는 공맹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공자님은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며 ‘내가 기술했지만 지은 건 아니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 풍습과 전통윤리가 결합된 게 유입니다. 유 혹은 유자(儒者)는 상례자(相禮者·예를 도와주는 사람)라고 합니다.

김원익 그리스 로마 문화와도 통합니다. 내세를 강조하면서 현세의 고통을 견디고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화는 현실, 현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신들이 사랑을 하고 잔치를 벌이고 노는 것도 현실을 중시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균형과 조화, 절제를 강조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핵심이었죠.

김봉곤 유학도 그렇습니다.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이상사회를 만드는 노력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일엽폐목 불견태산(一葉蔽目 不見泰山)’의 우(遇)를 범합니다. 나뭇잎 한 장이 눈을 가려 태산이 보이지 않죠. 유학은 현세에서 이런 나뭇잎을 떼어내는 것입니다.

 

노래방 몰려가서 합창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서
공맹과 유학 우리들 삶 곳곳에 산재 현실 고달파도 늘 ‘한마음’ 추구 홍호표 동아일보 어린이동아 국장·공연예술학 박사 hphong@donga.com 2008년 5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열창하는 가수 조용필과 열광하는 팬들.

미국에서 40년간 살다 온 교수와 조용필 콘서트를 볼 기회가 있었다. 2008년 5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조용필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였다. 올림픽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5만여 명의 관객과 함께 즐기면서 앙코르 공연까지 봤다. 1960년대 중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착했던 까닭에 한국 가수의 공연을 처음 본 그 교수에게 소감을 물었다.

공연이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즐거웠습니다. 잘 놀았습니다.”

‘잘 놀았다’는 느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예~, 과거에 파바로티나 도밍고의 공연을 봤을 땐 ‘아 참 노래를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조용필의 공연은 ‘나도 함께 노래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느낌의 차이가 성악과 대중음악이라는 장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의 차이에서 온 것일까. 왜 우리는 술 한잔 하고 거나해지면 ‘말아’(폭탄주), ‘원샷’을 외치는 것일까. 자연스레 이어지는 노래방에서는 누구의 신청곡인지와 상관없이 합창한다. 여기서 우리의 정서를 훑어보고 한민족은 예부터 음악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홀로 즐기기보다 모두 함께 즐기기

한민족은 오랫동안 공맹(孔孟)을 받들어왔다. 시대가 변해 서양문화와 생활양식이 급속히 고유의 삶의 방식을 대체하고 있지만, 정서 자체는 거의 바뀌지 않았거나 아주 느린 속도로 바뀐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맹과 유학은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유학의 음악 교과서 격인 ‘예기(禮記)’의 ‘악기(樂記)’편을 보자. ‘악기’는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즐기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음악의 악(樂)과 즐거움의 락(樂)은 글자가 같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노래방에서, 콘서트 현장에서 무엇을 즐기는 것일까. ‘곡이 좋구나’ ‘가사가 아름답구나’ ‘노래를 완벽하게 부르는구나’…. 본질적으로 이런 것을 즐기는 것일까. 그렇다면 ‘가창력’은 모자라도 인기가수가 되고 그 노래를 흥겹게 따라 부르며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좋은 음악을 듣고 “사흘간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할 정도로 음악에 빠졌던 공자의 말씀과 ‘예기’의 구절을 새겨보자.

“음악이다, 음악이다 하는 말이 무슨 종이나 북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아느냐.”(‘논어’)

“음악의 최고 목적은 음의 극치를 아는 것이 아니다.”(‘악기’)

음악의 최고 경지가 음의 극치를 아는 게 아니고, 악기를 잘 다루어 기술적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면? 즉 기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굳게 지키고, 인에 의지해, 예술에서 노닐었다.”(공자)

공자는 예술(음악)에서 노닐면서 즐겼으니 그것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통해 학문과 예술이 별개가 아니라 학문의 정점에 예술이 있다고 생각했음이 드러난다. 유학에서 학문이란 ‘사람이 되는 공부’를 의미한다. 이것이 대학(大學)이다. 위의 말을 살펴보면 학문, 즉 수양을 통해 자연히 이르는 경지가 다름 아닌 ‘노니는’ 예술의 경지인 것이다.

맹자는 음악의 실질은 인의(仁義)를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맹자는 “즐기면 인의가 생겨난다. 즐거움이 생기면 어찌 그치겠느냐. 그런 상태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발로 뛰고 손으로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무용이다. 맹자는 수양은 ‘갓난아이 같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갓난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는 것이 음악이고 예술인 것이다.

공맹은 음악 또는 예술이 현실을 ‘초월해서’ 현실 너머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읊으면 그것이 음악이고, 욕심을 줄여 불만이 없는 상태에서 신이 나서 저절로 손발이 움직이면 무용이라고 본 것이다. 별도로 ‘실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이 점에서 서양의 ‘근대예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노래방 동호회 ‘놀방파’ 회원들이 서울 홍대앞 한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노래방에서 한 사람이 노래를 신청해 부르면 어우러져 ‘합창’하는 것일까. 왜 음치가 ‘꽁지’를 빼면 강권해서라도 함께 노래하며 즐거워하는 것일까. 맹자가 제나라 왕과 나눈 이야기를 보자.

맹자 “홀로 음악을 즐기는 것과 남과 함께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즐겁겠습니까?”

“함께 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맹자 “몇몇 사람과 음악을 즐기는 것과 여럿이 함께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즐겁습니까?”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낫습니다.”

홀로 즐기는 것은 고립된 개체로서 즐기는 것이다. 둘이 함께 즐길 때 더 즐거워지는 이유는 적어도 두 마음의 공통적 요소가 있어 둘이 한마음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 즉 대중과 함께 즐길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한마음으로 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 정서의 핵심이다.

이러한 모습은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확인된 한마음 상태다. ‘너와 나는 같아야 한다’는 정서의 밑바탕인 ‘만물일체(萬物一體)’의 본래 모습이며 욕심과 이해타산이 작용하지 않는 모습이다. 정치적 행사에 마지못해 ‘동원’된 군중도 과연 한마음으로 즐거울까.

맹자는 ‘함께 즐기기’를 통해 정치철학인 ‘왕도(王道)’를 역설한다. 왕이 음악을 즐기는데 백성이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은 ‘왕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고 반대로 왕의 연주를 들은 백성들이 왕의 건강을 확인하면서 함께 좋아하는 것은 ‘왕이 백성과 함께 즐기기’(與民同樂)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군인 세종이 음악을 만들어 ‘여민락(與民樂)’이라고 한 데서도 왕도의 꿈은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정서를 지닌 우리는 현실이 고달프더라도 늘 ‘한마음’(仁)의 여민동락을 꿈꾼다. 이것이 살아나는 마당이 바로 우리의 콘서트 현장이고 노래방이라고 할 수 있다. 왕도의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통하는 곳에서는 계층이 달라도 한마음으로 합창하는 것이다.

‘하나’였으므로 ‘분단’, 그래서 마음 아파

조용필은 2005년 8월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북한주민을 상대로 콘서트를 열었다. 조용필은 당초 주최 측이 옛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1980년대 이후 ‘신곡’을 불렀다. 당시 북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노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굳어 있던 관객들이 ‘꿈’을 부르자 표정이 풀어지고 따라 부르는 등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조용필은 공연 뒤 “언제부터 관객과 통한다고 생각했느냐”는 질문에 “처음부터 통한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북한에서 내 노래가 히트하지 못한 점이 약점이라 하더라도, 말이 통하는 북한에서 내 음악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느냐”고 덧붙였다.

남북한은 체제로 보면 판이하다. 양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양극단은 태극(太極)이다. 그런데 유학에서는 ‘극이 없으면서 극단’이라고 한다. 주돈이가 말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다. 우리는 ‘하나’였으므로 ‘분단’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당초 둘이었다면 ‘분단’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극은 한마음 상태이며 음악의 ‘무(無)장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조용필과 북한주민은 ‘처음부터 통한 것’이다. 한마음 상태에서는 이질적인 체제를 넘어 함께 즐길 수 있다. 음악은 ‘덕의 아름다운 발현’이고 ‘교양이나 배경이 다른 사람도 함께 사랑하게 하는 것’이며 ‘천지간의 화합’(이상 ‘악기’)이다.

 

유학에 심취한 사람들
장로회신학대 배요한 교수·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서양철학자) 전헌 초빙교수

■ 유학에 심취한 사람들①

“예수 믿게 하려면 전통사상 알아야 합니다”

[장로회신학대 배요한 교수] “보수적인 신학자들에 특히 더 필요”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이하 장신대) 배요한(40) 교수. 목사이기도 한 그의 박사학위 전공은 엉뚱하게 유교철학이다. 장신대에서 학부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성균관에서 유교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왜 목사가 동양철학을 기웃거리느냐” “신학자로서 마땅치 않은 행보다”. 남다른 길을 걸으며 그간 가슴앓이도 심했다. 3월5일 장신대 캠퍼스에서 그를 만나 신학과 유학의 길을 동시에 걷게 된 사연을 들었다.

부부의 신앙이 깊어가던 겨울, 아기 울음이 울렸다. 3형제 중 둘째, 이름은 요한. 뱃속에서 “목사가 돼라”는 부모의 기도를 들었고, 걸음을 뗀 직후부터 매일 새벽 5시 반 가정예배를 드렸다. 철없는 실수조차 하지 않는 경남 진해 제일의 ‘애늙은이’, 명문대에 갈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1988년 장신대에 진학했다. 꼬마 시절부터 ‘목사가 될 아이’였던 그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현실은 달랐다.

“신학교는 ‘준(準)천사급’만 오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전국적인 데모 바람에 수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요. 울면서 기도하는 날이 늘었고, 자연히 문제의식이 싹텄습니다.”

인정받는 목회자. 신학대 학생은 대부분 같은 길을 꿈꾼다. 교회가 많고 사역지가 보장된 당시 다른 쪽에 관심을 두는 학생이 많지는 않았다. 배 교수는 1학년 2학기부터 문화신학을 고민하던 동아리인 동양사상연구회에서 ‘논어’를 읽고 ‘맹자’를 외웠다. 왜 하필 동양사상일까.

“마음 한구석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생겼어요. 저는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한국인이잖아요. 하지만 학교에서는 주로 서구신학만 강조할 뿐 한국적 뿌리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주지 않았죠. 근세 500년을 지배한 유학을 살피면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신학자로서의 고민도 있었다. 천주교를 포함한 한국 기독교는 조선후기 이래 유학자들이 도입했다. 주자학을 연구하며 느낀 염증이 새로운 가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그가 한국적 신학을 정립하려면 먼저 유학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 이유다.

“서구의 기독교와 한국의 기독교는 시작과 발달과정이 달라요. 무속신앙, 유교, 불교 등 기존 한국정서를 모르고는 한국적 신학의 성격을 규명할 수 없죠. 그럼에도 신학계는 서구이론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구의 기독교는 이미 하향길에 접어들었는데, 그쪽 이론만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죠.”

동양사상을 공부할수록 강한 확신이 들었다. 마음도 안정됐고 신앙도 제자리를 되찾았다. 다만 학문적 가르침을 구할 곳이 없어 아쉬웠다. 유학을 좀더 깊이, 체계적으로 알고 싶다는 욕심에 그는 1995년 성균관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소식이 알려지자 학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친한 선배는 그에게 “마귀새끼”라며 눈을 흘겼고, 교수들은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엉뚱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전공 교수들에게 제대로 듣는 유학 강의의 꿀맛에 시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기동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데 가뭄에 단비를 맞는 기분이었어요. 너와 내가 하나라는 ‘인(仁)’, 그들 사이에 지켜야 할 매너인 ‘예(禮)’의 개념을 알고 나니 왜 초코파이 ‘정(情)’이 그토록 인기인지, ‘나’가 아닌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지 우리 사회를 읽는 눈이 생기더군요.”

유학을 공부하며 한국적 기독교를 이해하는 통찰도 얻었다. ‘왜 한국인은 주변에서 권하면 따지지 않고 교회에 갈까’ ‘한국인의 신앙생활이 유독 열정적인 이유는 뭘까’. 유학의 잣대로 바라보니 평소 품었던 의문이 단박에 풀렸다.

   

“한국 유학의 핵심은 ‘천인무간(天人無間)’, 즉 하늘과 나는 ‘간격(사이)’이 없다는 거예요. 하늘과 내가 간격이 없는데도 나는 하늘처럼 못하니까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수양을 하는 거죠.”

유학적 배경지식은 목회활동에도 도움이 됐다. 배 교수는 학생시절부터 교육전도사와 목사로 봉사해온 마천중앙교회에서 주일마다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때로 설교도 한다. 부모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효’ ‘예’의 개념과 상황을 버무려 설교를 하니 신도들이 입을 모아 “낯설지 않고 이해하기 쉽다”고 호응한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본인의 마음이 한결 편해진 점이다.

 

목표는 비슷하되 방법론은 다른 ‘성경’과 ‘사서삼경’

“어릴 적 어딜 가나 별명이 ‘목사’였어요. 목사로서 흠이 없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고, 그 틀에 스스로를 맞춰가면서 답답함도 느꼈죠. 하지만 동양학을 공부하면서 내 마음을 자연스럽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유학은 누구나 자연스러운 절제를 타고나며 ‘중용’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해요. 희로애락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르라는 것이죠. 공자가 일흔에 ‘마음먹은 대로 했지만 하나도 법을 넘어서지 않았다’고 말한 것처럼요.”

유학이 자연스러운 감정을 인정한다면 기독교는 어떨까. 이에 배 교수는 “성경도 다르지 않지만, 유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그 점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느냐’며 엄격하게 성격을 해석할 뿐, 인간을 기쁘게 하는 복음의 진면목은 보지 못했다는 것.

그는 기독교와 유학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목표는 거의 비슷하다. 둘 다 공자와 예수가 걸어간 길을 따라 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존재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방법에 대한 시각은 엇갈린다. 유학이 나의 수양만으로 성인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반면, 기독교는 예수의 도움 없이는 완전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신학자이자 유학자인 그의 생각은 어느 쪽일까. 질문에 그는 “본인의 결정적인 정체성과 연결되는 대목”이라며 조심스레 생각을 골랐다.

“저는 기독교의 구원관이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가능성과 한계성이 있고, 한계성 때문에 죄를 짓고 실수를 하죠.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런 인간이 완벽한 존재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은 정확하게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목사로 남을 수 있는 거겠죠.”

유학을 공부하는 목사에게 신학계는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이유를 묻기 전 의심부터 했다. 비판의 도마에 오를 때마다 그는 “모든 목회자, 특히 보수적인 신학자에겐 꼭 유학 공부를 권한다”고 말한다.

“제사를 거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예수를 못 믿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유학에서 제사는 ‘정성’이에요. 내가 정성을 다하면 제사를 지내면서 조상이 함께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죠. 기독교인이라 제사를 지내는 동안 절은 하지 않더라도 기도를 하거나 음식을 더 많이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행사에 동참하면 문제 될 게 없어요. 예수를 믿게 하려면 전통종교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저런 비판은 ‘그 사건’ 이후 수그러들었다. 2001년 배 교수와 성균관대 이기동 교수가 함께 ‘도올의 일본 베끼기’(現 ‘도올논어 바로보기’)라는 책을 출간한 뒤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됐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2000년경 TV유학 강의를 하면서 기독교를 희화화했어요.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느낀 개신교에서 그와 관련한 포럼을 계획했고, 장신대 교수 한 분이 제게 관련 글을 요청했죠. 이후 개신교에서도 동양철학을 알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그의 꿈은 한국에서 새로운 종교개혁의 싹을 틔우는 것. 신학적 전통과 유학적 전통의 조화 위에 기독교가 부흥한 한국이야말로 21세기 신학의 보고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개독교’ 소리를 듣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며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동서양 사상이 융합된 기독교의 발전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 유학에 심취한 사람들②

“만물은 하나, 다양성과 변화는 즐기는 것”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서양철학자) 전헌 초빙교수] “차별 않고 돌보는 것이 바로 종교”

‘깨달음’이란 뭘까.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경지’에는 어떻게 오를까. 한국 현대불교계의 큰 족적을 남긴 성철 스님은 생전에 그 해답을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했다. 수행을 정진하다 보면 ‘갑자기 깨닫고 갑자기 닦는다’는 의미다. 그 깨달음의 경지는 더 이상 수련이 필요 없는 최고의 경지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2003년 10월16, 17일 이틀간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성철스님 열반 10주기 기념 국제학술회의’의 주제는 ‘돈오돈수론’이었다. 회의에는 세계적인 불교학자 로버트 지멜로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 쿠옹 뉴옌 조지메이슨대학 교수, 찰스 뮬러 일본 도요가쿠엔(東洋學園)대학 교수 등 불교를 비롯해 유교와 도교, 기독교, 인지과학 등 국내외 각 분야 권위자가 대거 참가해 자신들의 주장을 폈다. 이 가운데 돈오돈수론에 대한 한 재미 한국인 학자의 재해석이 주목을 끌었다.

“성철 스님은 돈(頓)을 통해 종교의 제자리 매김을 했다. 부처님도 돈의 한 지칭이요, 하나님도 돈의 이름이다. 돈오돈수론은 단번에 사이비 종교와 사이비 학문을 척결하고 종교의 제자리를 찾았다.”

이 학자의 해석대로라면 각 종교에서의 ‘신’은 곧 깨달음이라는 최고 경지에 오른 존재들이고, 이들은 모두 ‘돈’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보기에 따라 종교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문제적’ 발언인 것. 그 장본인이 바로 당시 미국 뉴욕주립대학에서 동·서 비교문학을 강의하던 전헌(68) 교수다.

신학과 철학 구분은 ‘인간 지성사의 오류’

전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에 있다. 국제학술대회 이듬해인 2004년 성균관대에 초빙교수로 와서 7년째 강의를 맡고 있다. 학술대회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현재 그는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서양철학을 가르친다. 또 국민대에선 학부생을 대상으로 책읽기와 영화 속의 철학사상을, 대학원에서는 문화교차학을 강의한다.

전 교수는 시인 전병택 씨의 아들이다. 지난해 아시아계 최초로 미국 다트머스대학 총장에 오른 김용(미국명 Jim Yong Kim·50) 하버드 의대 교수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전 교수는 김 총장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서울대 철학과(서양철학)를 졸업한 전 교수가 유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독특한 사상적 흐름과 무관치 않다. 1966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텍사스 주 댈러스 시에 자리한 남부감리교대학(SMU)에서 신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또다시 신학석사 과정을 밟았다. SMU는 부시 미 대통령의 부인인 로라 여사가 졸업한 학교로 유명하고,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은 프린스턴대학의 전신이다. 그가 신학을 선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신학과 철학에 구분이 생긴 것은 인간 지성사의 오류이자 ‘사고의 착오’다. 신학과 철학에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철학의 연속선상이라고 생각했다.”

전 교수가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강의를 선뜻 맡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성균관대에 서양철학을 가르칠 만한 교수가 없었겠느냐. 굳이 나를 초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학과 유교는 구분이 없다. 유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신학과 철학을 구분하지 않고 연구한 학자에게 서양철학을 배우면 뭔가 공유하는 ‘광장’이 있지 않겠느냐. 성균관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명륜동에 자리한 것도 나의 한국행에 영향을 미쳤다.”

전 교수가 미국 생활 내내 학문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다. 유학생활 6년 만인 1972년 공부를 접고 친형과 함께 가발사업에 뛰어들었다. 가발 수입도매상을 하던 그는 2년 후 동생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고 중동으로 진출했다. 한국 건설회사들이 중동으로 진출하면서 기술과 물자, 자재 등을 공급하는 회사가 필요하다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교학 구분하지 않는 유학이 진정한 학문

전 교수가 1974년부터 89년까지 15년 동안 운영하면서 회사는 한 해 수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미국에서 사실상 학자라기보다는 기업가로 자리매김했던 것. 하지만 인생의 반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1974년부터 미국 시카고 매코믹신학대학원(장로교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와달라는 연락이 왔던 것. 110년 전통의 매코믹신학대학원은 우리나라에 개신교 선교사들을 보내 장로교를 뿌리내리게 했던 학교다. 전 교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를 떠난 지 15년이 지났는데 왜 갑자기 자신에게 연락을 했는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매코믹신학대학원에서는 그때 이미 ‘더 이상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가 아니다. 세계화를 위한 준비를 학교가 나서서 해야 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학교는 먼저 자체평가를 하고 신학교육의 구조를 새롭게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그 일환으로 철학과 신학을 구분하지 않았던 나를 필요로 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평소 하고 싶었던 ‘철학신학’ 분야를 맡아달라고 해서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렇게 2002년까지 13년간 신학대학원에서 “교수들과 학생들을 거들어주면서 내 공부를 하는 맛”으로 강의를 하다가 2003년 뉴욕주립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코믹신학대학원에서는 2005년이면 정년퇴임을 해야 하는데, 뉴욕주립대학은 정년이 없었던 것. 하지만 1년 만에 그는 성균관대의 초청으로 한국행을 선택했다. 유학은 1989년 이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학문을 연구하면서 풀어야 했던 ‘숙제’를 한순간에 해결해줬다.

전 교수는 평소 지론인 ‘철학과 신학은 같다’를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 유학을 꼽고 있다. “교학을 구분하지 않는 유학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라는 것. 전 교수는 ‘만물은 하나’라는 유학의 가르침도 자신의 철학과 통한다고 말한다.

“어떤 종교든 ‘만물이 다 하나’라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온 우주, 만물을 차별하지 않고 돌보는 것이 바로 종교다. 다만 부처와 하느님, 알라 등의 이름으로 나뉜 것일 뿐이다.”

전 교수는 사회적 갈등과 전쟁은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만들려는 잘못된 생각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불평등과 차별주의도 같은 이유라는 것.

전 교수는 “만물은 하나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 다 다르고 달라져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서로에 대한 다양성과 창의성, 변화를 진정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주목받는 ‘유교 자본주의’
중국 급성장-삼성 세계 1위의 공통분모 … 연고주의 넘어 ‘관계의 철학’ 재발견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지난 2월5일 삼성그룹 창립자인 고 이병철 선대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축사하는 이건희 전 회장.

#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이 1938년 3월 세운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불과 3만원. 현재 가치로 치면 2억5000만원 정도다.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지금, 이 회사는 삼성그룹과 한솔그룹, CJ그룹, 신세계그룹 등 4개 그룹으로 성장했다. 총자산은 무려 346조원에 달한다. 특히 국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그룹은 지난해 약 200조원의 매출을 올렸고, 삼성그룹군의 중추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136조500억원에 영업이익 10조9200억원을 기록하면서 세계 1위의 전자업체로 올라섰다.

# 1980년 세계 교역량에서 중국산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 불과했다. 국내 총생산(GDP)은 3093억 달러로 2조8000억 달러에 육박했던 미국 경제규모의 10%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지난해 중국의 GDP는 4조7577억 달러로 미국(14조2662억 달러), 일본(5조487억 달러)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올해는 일본을 추월해 세계 2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포겔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올해 1월, 2040년에는 중국의 GDP가 123조 달러로 성장해 전 세계 GDP의 40%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반면 미국은 전 세계 GDP의 14%, 유럽연합(EU)은 5%로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막스 베버의 ‘근대화 이론’ 정면으로 부정

국내 최고 기업을 넘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그룹, 경제규모 세계 1위 대국 자리를 눈앞에 둔 중국,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최근 국내외 일부 학자는 그 해답을 ‘유교 자본주의’에서 찾고 있다. 특히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 중국이 해결사로 나서고, 한국이 다른 국가에 비해 빠르게 회복하면서 두 국가의 공통분모인 ‘유교문화’의 역할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커졌다.

‘유교 자본주의’라는 개념은 1980년 초반 두웨이밍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처음 제시했다. 1970년대 일본 경제의 성공요인과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신흥개발도상국인 이른바 ‘아시아 4용’의 경제발전 배경으로 유교적 가치관을 꼽은 것. 이는 당시 자본주의 발전이론의 틀로 확고히 자리한 막스 베버의 ‘근대화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베버는 서구 자본주의 태동의 근거를 개신교에서 찾았다. 근검절약을 요구하는 개신교의 신앙생활이 서구의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합리적 자본주의를 꽃피울 수 있게 했다는 것이 베버 이론의 골자다. 반면 유교는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됐다. 이 이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정론처럼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유교가 철저히 배척당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두웨이밍 교수의 ‘유교 자본주의’ 이론은 1990년대 중반 국내 학자들에 의해 좀더 심도 있게 연구됐다. 하지만 1997년 한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그동안 주목받았던 아시아 신흥국가들이 IMF 경제위기에 휘청거리자 ‘유교 자본주의’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재벌들의 ‘문어발식 경영’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거나, 정경유착에 의한 ‘정실자본주의’의 한계에 직면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비판이다. 실제 이런 비판은 지금도 진보학자들 사이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면 삼성의 성공과 우리나라의 빠른 금융위기 탈출, 중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은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다시 ‘유교 자본주의’다.

   

동아시아 16개국 정상이 지난해 10월 태국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했다.

최근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선임된 함재봉 전 연세대 교수는 서구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유교문화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국가 중심의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주목했다. 함 전 교수의 이야기다.

“그동안 서양 학자들이 생각한 경제발전 단계이론, 즉 자본주의가 도입되면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개인의 자유의지가 커져 민주사회가 된다는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한국과 대만도 결국 민주화가 되지 않았나. 하지만 싱가포르는 아직도 권위주의적인 국가체제가 유지되고 있고, 중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봐도 서양 학자들의 주장에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중국은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국제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신장시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중국의 체제가 자유민주국가보다 효율적으로 국가운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학자들은 굉장히 흥미롭게 보고 있다.”

한국과 대만이 서양 학자들의 경제발전 단계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서구 국가들과 같은 것은 아니다.

함 전 교수에 따르면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신흥국가의 경제발전이나 위기극복 과정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이 국가주의다. 이들 국가 국민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크다.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그 믿음은 더 커진다. 1997년 IMF 때 우리나라 전 국민이 ‘금 모으기’에 동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정서가 강한 것이다. 중세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 발전하면서 국가의 역할은 최소화하고 시장과 개인의 자율을 중시한 유럽이나 미국의 정서와는 정반대다.

 

빠른 의사결정 ‘가족 중심의 재벌경영’

함 전 교수는 “아시아 신흥국가 국민이 경제발전에 국가의 역할이 크고, 여전히 국가가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유교에 뿌리를 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무관치 않다”면서 “유교에는 국가 위기에 여론을 한데 모으고 국민의 힘을 집중시킬 수 있는 문화적 장치가 깔려 있다”고 말했다.

물론 “과거에는 유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지금은 유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한다는 주장은 모순”이라며 비판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또 “경제적 측면을 유교라는 문화적 잣대로 설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다.

함 연구원은 이에 대해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에 보여준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지적하면서 유교 자본주의의 재평가 가능성을 언급했다.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중국은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경제와 금융시스템에 구멍이 뚫려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았고, 중국에 채권을 판 돈으로 빚잔치를 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금융위기의 핵심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라는 금융에서 가장 큰 허점이 드러난 동시에 중국식 경제발전 모델이 강하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데 있다. 만약 중국이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면서 계속 발전한다면 중국의 경제발전 과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고, 여기에서 유교의 역할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평가해야 할 유교 자본주의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덕훈 한남대 경영학과 교수는 ‘가족 중심의 재벌경영’을 꼽는다. “한때 대만 경제를 이끌던 중소 규모의 부품업체가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고, 한국의 가족 중심 재벌경영을 비판하던 소니와 마쓰시다 등 일본 기업도 삼성그룹의 성공을 보고 평가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 교수의 지적이다.

이 교수는 ‘자원의 집중투자’와 ‘빠른 의사결정’ 등을 가족 중심 재벌경영의 장점으로 꼽았다. 독단적인 재벌경영의 폐해도 없지 않지만 글로벌 시대에 잦은 회의로 의사결정이 느린 전문경영인 체제보다 오히려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다.

이 교수는 삼성그룹을 예로 들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세계 경제계에서는 삼성의 상호 교차출자방식 등 재벌경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고 높은 고용효과를 나타내자 ‘굿 컴퍼니(좋은 회사)’로 평가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주장하는 유교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혈연 중심의 기업세습이다. 이 교수는 “한국과 중국 또는 아시아계, 화교계 기업은 혈연을 중시해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은 후계자로 삼지 않는다. 반면 일본 기업은 ‘의제적 혈연’을 맺은 양자를 후계자로 내세우기도 한다”고 말했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혈연과 지연, 학연 등 이른바 ‘연고주의’와 국가의 개입을 유교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꼽는다. 1997년 여름 창간한 계간지 ‘전통과 현대’에 실린 류 교수의 논문 ‘유교 자본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는 당시 국내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논문 내용 중 일부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봉건적 토지귀족의 지배질서라는 장애물을 뚫고 성장해야만 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르주아’는 새로운 사회적 장치들을 필요로 했다. 귀족의 절대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시민권과 도시, 조합 등 ‘시민사회’의 건설이다. 그러나 유교 국가에 의해 위로부터 도입된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는 서구와 같은 사회적 장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시장에의 진입과 후퇴는 국가의 통제에 의해 결정됐으며, 자본의 축적은 국가의 특혜를 받은 집단에 집중됐고, 노동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훈련됐다. 여기에 혈연·지연·학연이라는 연결망의 역할이 더욱 강화됐다. ‘가족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조직방식의 위력은 한국의 ‘재벌’과 일본의 ‘자이바쯔’라는 기업집단의 구조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동남아시아 경제를 석권하고 있는 화교 기업의 구조에서도 동향이나 친족과 같은 연결망의 중요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네트워킹 강조하며 연고 비판은 말장난

이 논문은 1997년 IMF를 겪으면서 많은 학자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류 교수의 생각은 지금도 그대로다. 오히려 업그레이드됐다. “우리나라는 ‘관계의 철학’이 지배한다. ‘삼강오륜’도 모두 관계에 대한 얘기 아닌가. 이 관계가 바로 혈연·지연·학연 등 연고에서 출발한다. 연고에 의해 민주화가 이뤄졌고, 재벌들에 의해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게 류 교수의 주장이다.

류 교수는 여기에 “근대사회에 개인주의 경향이 강해진 유럽에서는 탈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소통’이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됐다. 하지만 한국은 (연고에 의한) ‘소통’이 역사적 유산인 덕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류 교수는 ‘아이러브스쿨’이나 ‘싸이월드’ 등 연고와 관계를 중시한 인터넷 사이트가 우리나라 누리꾼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원인도 바로 ‘연고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류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도 총장이 최근 졸업생들에게 졸업 후 네트워킹을 가지라고 강조했는데, 네트워킹이 바로 연고다. 일부 학자가 네트워크의 필요성은 강조하면서 연고를 비판하는 것은 말장난”이라면서 “앞으로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하면 유교문화가 도움이 됐으면 됐지 그것 때문에 손해 볼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