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트로이카’ 이재유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
“이재유(李載裕) 동지.
1930년 함경도 삼수(三水)에서 출생하여 공부하러 도일하여 연수학관에서 1년간 수학하다. 그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재일본노총위원이 되었으며 또 일본총국 당원이었다. 1928년 일본당 사건으로 피검되어 3년 징역을 받았다. 그후 귀국하여 노동농민운동에 헌신하여 망명생활로서 잠행운동을 계속하다. 동무는 두뇌가 명석하여 이론이 밝고 학구적인 동시에 실제적이었다. 그리고 동지의 민활하고 대담무쌍한 활동은 당시 적으로 하여금 분주불가하게 하였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잘 아는 것이다.
1936년 12월에 피검되어서 서대문감옥에 있으며 항상 공산주의자로 시종하였다. 동무는 옥중에 있어서도 공산당 지부를 조직하여 동포수를 위한 투쟁(과) 동지들의 교양사업 간수에 대한 혁명사상 고취 등을 볼 때 그 열렬한 투지를 알 수 있으며 더욱 조선어사용금지 반대투쟁이라든지 또는 공주형무소 이감 당시에도 일반 수인의 대우 개선 항쟁을 우리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항쟁의 결과로서 오는 암방징벌은 동무의 무서워하는 바가 아니었다.
비전향수로 독방생활 옥중사망
1944년 9월 만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전향이라 하여 그냥 독방생활을 하시다가 10월 26일 40세로를 일기로 돌아가시다.(이관술·강진·이청원 동지 제공)”
<해방일보> 1946년 4월 17일치 기사이다.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 특집으로,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추념하는 동지들은 이재유를 비롯하여 모두 22명이다. ‘김재봉 동지. 강달영 동지. 권오설 동지. 차금봉 동지. 김세연 동지. 김강 동지. 고광수 동지. 이인수 동지. 한해 동지. 이동휘 동지. 주현중 동지. 이동선 동지. 이재유 동지. 한위건 동지. 정운해 동지. 김철산 동지. 이낙영 동지. 김철 동지. 진병기 동지. 정태옥 동지. 도정호 동지. 오영세 동지.’
이재유가 태어난 해는 1905년이다. ‘40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다’라고 하면서 1903년 생이라고 한 것은 활자가 잘못 꽂힌 것으로 보인다.
이재유는 조선팔도에서 가장 외진 두메산골을 가리킬 때 쓰는 삼수갑산(三水甲山) 그 삼수에서 태어났는데, 살림은 중류 정도였다.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아버지는 재유보다 10살쯤 많은 젊은 여자를 후처로 맞아들였고, 소년 재유는 대개 할머니와 지냈다. 12살 때 삼수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보결로 들어갔으나 ‘너무나 과목이 저급하고 배울 것이 없어서’ 4개월쯤 다니다가 그만두고, 독학으로 일본어와 산술을 익혔다. 1924년 4월 상경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으나 월사금을 못 내 석 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듬해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7명 학생을 모아 맑스레닌주의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반봉건투쟁 일환으로 청년층에 널리 퍼져나갔던 반종교투쟁을 벌이다가 퇴학당하였다. 고학할 작정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들어갔는데 학자금을 못 대어 그만두고 노동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을 공부하게 된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들어가 70여 차례나 검속될 만큼 맹렬하게 운동하다가 붙잡혀 경성으로 압송, 징역 3년 6월을 받는다.
1932년 12월 22일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여 1936년 12월 25일 다시 붙잡힐 때까지 만 4년 동안 이재유는 불꽃 같은 주의자 삶을 산다. 두 번에 걸쳐 12년 징역을 살다가 끝내 감방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 주의자 삶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다. 조선 나이로 갓 마흔을 살았는데 징역살이 12년을 빼면 28년이 남는다.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 20살 때이니 이재유가 사회생활을 한 것은 겨우 8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8년 세월이나마 승냥이 같고 두억시니 같은 왜경들 핏발 선 눈길에 쫓겨야 하는 ‘죽음의 행군’이었다. 수필가 이하윤(異河潤)이라고 짐작되는 금강산인이 <신천지> 1946년 4월호와 5월호에 걸쳐 쓴 ‘조선민족해방 영웅적 투사 이재유 탈출기’ 한 갈래이다.
‘이재유 동무는 우리들과 함께 8·15일 해방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원통하게 작년(1944년)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그가 옥사하기까지의 짧은 반생은 오로지 일본제국주의 지옥 밑에서 조선의 독립과 근로대중의 행복을 위한 투쟁에 바쳤었다. 피검, 고문, 재감, 탈주, 지하활동 등 그의 걸어온 길은 형극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시라도 잊지 않은 일념은 오직 조선혁명이었다. 조선의 혁명을 위하여 살고 혁명을 위하여 죽는다는 혁명운동에 종사한 사람이 많지만 참으로 명예와 지위를 떠나 신명을 아까지 않고 일신을 바쳐 한길을 걸은 사람은 드물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세불리할 때는 혁명운동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돌아서서 보신하기에 바쁜 사람,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사람이 어찌 적다 할 수 있으랴. 혁명의 길은 평탄한 대로가 아니다. 그것은 형극의 길이다.’
두 번에 걸쳐 탈옥했다 다시 잡혀
이재유는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황토 속살처럼 부드럽고 결 고운 운문적 감수성과 함께 앎과 함이 같이 가는 굳센 실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감동시킬 줄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한 주의자’였다. 그것은 모리다(森田)라는 왜경이 보여준 행동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두 번에 걸쳐 ‘신화적 탈출’을 했다가 다시 붙잡히게 된 1934년 6월 13일 밤이었다. 손에 자동수갑을 차고 발에는 커다란 쇳덩어리를 붙들어맨 데다가 허리에는 또 방울을 채워 그야말로 옴치고 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재유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제아무리 탈출의 귀재 소리를 듣는 이재유였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흉악무도한 조선공산당 수괴’ 이재유였으니, 그를 철통같이 가둬두고 있던 서대문경찰서는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담당 간수였던 모리다 순경이 탈출을 도와준 것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산골 주재소로 좌천되었던 모리다는 그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모리다가 아무리 사회주의사상에 우호적인 젊은이였다고 하더라도 짧은 시간에 적국 경찰을 동지로 만들어버린 이재유 솜씨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재유한테 ‘당대 최고의 혁명가’며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라는 꽃다발을 걸어주게 된 터무니 가운데 하나이다.
그때에 주의자를 다루는 왜경들 족대기질 수법은 말과 글로 나타낼 수 없을 만큼 참으로 끔찍한 것이다. 여럿이 빙 둘러서서 공처럼 주고받으며 때리고 차고 물을 먹이고 거꾸로 달아매다가 불에 달구어진 인두로 넓적다리를 지지다가 생식기 끝에 전깃줄을 들이대는 것이었는데, 이재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결코 왜경들이 바라는 ‘자백’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백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자백이라고 해봐야 왜경들 다리품만 팔게 하는 것들이었으니, 적에게 잡혔을 때 최소한 24시간은 입을 다물어 동지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 ‘이재유 철칙’을 따른 것이었다.
간수 상대로 공산주의 의식화 교육
이재유가 박진홍(朴鎭洪, 1914~?)과 만난 것은 1934년 8월 초순이었다. 이재유가 보기에 ‘매우 전투적인 좌익교수’였던 경성제대 미야께(三宅) 교수집을 막 나온 참이었다. 철옹성 같은 왜경 유치장에서 세 번이나 ‘신화적 탈출’을 한 데다 일본인 좌익교수 집 응접실 마루밑을 파고 38일 동안 숨어 있던 ‘집요 흉악한 조선공산당 수괴’를 잡기 위하여 경성시대 모든 왜경들은 거의 발광상태였다. 피가 졸아드는 땅굴생활 속에서도 이재유는 가만히 몸만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응접실 탁자 다리 곁으로 젓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 구멍을 뚫어 미야께와 쪽지통신을 주고 받으며 동지들과 연락을 하였고, 맑스레닌 저서들을 넣어달래서 회중전등으로 비추어 읽었으며, 잠깐씩 굴을 나와 욕실에서 맨손체조와 목욕을 하였다. 그리고 미야께와 쪽지토론을 벌이며 운동 방침을 가다듬었다.
‘아지트키퍼’를 하면서 이재유와 한살이 된 박진홍이 신당동 셋방을 나간 것은 1935년 1월 10일이었다. 그러나 이재유가 작성해 준 ‘세말캄파니아 투쟁방침서’를 영등포 공장 프랙션에게 전해주러 나간 ‘문건레포’ 박진홍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기로 한 시간에서 딱 1분만 기다리던 이재유는 즉시 아지트를 옮긴다. 그리고 자기 아이를 밴 박진홍의 동덕고녀 은사인 이관술(李寬述)과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이제 노원구 창동)에 들어가 위장농군이 된다. 공덕리에서 이재유는 이관술과 ‘조선공산당재건그룹’을 ‘준비그룹’으로 바꾸고 그 기관지로 <적기(赤旗)>를 ‘가리방 긁어’ 경성시내 주의자들에게 돌린다.
이재유가 붙잡힌 것은 ‘준비그룹’ 성원인 최호극에게 <적기> 제3호를 건네주고 투쟁방침을 알려주기 위하여 나간 거주지 부근 산중에서였다. 이재유를 기다리는 것은 최호극이 아니라 왜경 수백 명이었던 것이다. 1936년 12월 25일 정오 무렵이었다. 왜경들에게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이재유는 목이 찢어지라고 고함을 질러 동네에 들리게 하였고, 거주지를 밝힌 것은 다음날 하오 6시쯤이었다. 스스로 정한 ‘주의자계율’을 지켜냄으로써 이관술이 도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온갖 야만적 족대기질에 시달리기 7개월 만에 내려진 언도는 징역 6년이었다. 6년 만기를 채웠으나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감호소로 옮겨진 이재유가 족대기질 후유증을 못이겨 옥사한 것은 1944년 10월 26일이었다. 향수 40세.
감옥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일제와 싸웠던 이재유였다. 다른 방에 있는 주의자들과 통방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락하여 조선말 사용금지에 반대하고, 수감자 대우 개선을 끈질기게 요구하였으며, 간수들을 상대로 공산주의 의식화 교육을 시키는 교양사업을 벌였다. 결국 서대문형무소생활 1년 만에 공주형무소로 옮겨졌지만 그의 가열찬 감방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작성한 것이 ‘조선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 능부’라는 논문이다. 조선경제의 생산관계가 반(半)봉건적·반자본주의적이므로, 노동자를 주력으로 하고 농민을 동맹자로 하여 무산대중과 진보적 학생·인테리들이 연합하여 일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생산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론이었으니, 해방 직후 박헌영이 발표한 ‘8월테제’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재유는 코민테른 노선을 맹목적으로 따른 국제주의 운동자들의 영웅주의적·권위주의적 운동 방식을 거부하고, 구체적 삶에 뿌리박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실천운동을 주장하였던 혁명가였다. 그리고 국제주의자들이 경시 내지는 무시하였던 민족문제를 운동의 중심에 두었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였다.
<푸른역사 제공> |
1930년 함경도 삼수(三水)에서 출생하여 공부하러 도일하여 연수학관에서 1년간 수학하다. 그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재일본노총위원이 되었으며 또 일본총국 당원이었다. 1928년 일본당 사건으로 피검되어 3년 징역을 받았다. 그후 귀국하여 노동농민운동에 헌신하여 망명생활로서 잠행운동을 계속하다. 동무는 두뇌가 명석하여 이론이 밝고 학구적인 동시에 실제적이었다. 그리고 동지의 민활하고 대담무쌍한 활동은 당시 적으로 하여금 분주불가하게 하였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잘 아는 것이다.
1936년 12월에 피검되어서 서대문감옥에 있으며 항상 공산주의자로 시종하였다. 동무는 옥중에 있어서도 공산당 지부를 조직하여 동포수를 위한 투쟁(과) 동지들의 교양사업 간수에 대한 혁명사상 고취 등을 볼 때 그 열렬한 투지를 알 수 있으며 더욱 조선어사용금지 반대투쟁이라든지 또는 공주형무소 이감 당시에도 일반 수인의 대우 개선 항쟁을 우리가 잊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항쟁의 결과로서 오는 암방징벌은 동무의 무서워하는 바가 아니었다.
비전향수로 독방생활 옥중사망
1944년 9월 만기임에도 불구하고 비전향이라 하여 그냥 독방생활을 하시다가 10월 26일 40세로를 일기로 돌아가시다.(이관술·강진·이청원 동지 제공)”
<해방일보> 1946년 4월 17일치 기사이다.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 특집으로, 조선공산당 이름으로 추념하는 동지들은 이재유를 비롯하여 모두 22명이다. ‘김재봉 동지. 강달영 동지. 권오설 동지. 차금봉 동지. 김세연 동지. 김강 동지. 고광수 동지. 이인수 동지. 한해 동지. 이동휘 동지. 주현중 동지. 이동선 동지. 이재유 동지. 한위건 동지. 정운해 동지. 김철산 동지. 이낙영 동지. 김철 동지. 진병기 동지. 정태옥 동지. 도정호 동지. 오영세 동지.’
이재유가 태어난 해는 1905년이다. ‘40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다’라고 하면서 1903년 생이라고 한 것은 활자가 잘못 꽂힌 것으로 보인다.
이재유는 조선팔도에서 가장 외진 두메산골을 가리킬 때 쓰는 삼수갑산(三水甲山) 그 삼수에서 태어났는데, 살림은 중류 정도였다.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아버지는 재유보다 10살쯤 많은 젊은 여자를 후처로 맞아들였고, 소년 재유는 대개 할머니와 지냈다. 12살 때 삼수공립보통학교 5학년에 보결로 들어갔으나 ‘너무나 과목이 저급하고 배울 것이 없어서’ 4개월쯤 다니다가 그만두고, 독학으로 일본어와 산술을 익혔다. 1924년 4월 상경하여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으나 월사금을 못 내 석 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듬해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다. 7명 학생을 모아 맑스레닌주의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고, 반봉건투쟁 일환으로 청년층에 널리 퍼져나갔던 반종교투쟁을 벌이다가 퇴학당하였다. 고학할 작정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들어갔는데 학자금을 못 대어 그만두고 노동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을 공부하게 된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들어가 70여 차례나 검속될 만큼 맹렬하게 운동하다가 붙잡혀 경성으로 압송, 징역 3년 6월을 받는다.
<경성일보>는 이재유와 관련된 기사를 크게 다루었다. 기사의 크기만 봐도 이재유의 영향력이 어땠는지 짐작케 한다. <푸른역사 제공> |
‘이재유 동무는 우리들과 함께 8·15일 해방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고 원통하게 작년(1944년)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그가 옥사하기까지의 짧은 반생은 오로지 일본제국주의 지옥 밑에서 조선의 독립과 근로대중의 행복을 위한 투쟁에 바쳤었다. 피검, 고문, 재감, 탈주, 지하활동 등 그의 걸어온 길은 형극의 길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시라도 잊지 않은 일념은 오직 조선혁명이었다. 조선의 혁명을 위하여 살고 혁명을 위하여 죽는다는 혁명운동에 종사한 사람이 많지만 참으로 명예와 지위를 떠나 신명을 아까지 않고 일신을 바쳐 한길을 걸은 사람은 드물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세불리할 때는 혁명운동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돌아서서 보신하기에 바쁜 사람,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사람이 어찌 적다 할 수 있으랴. 혁명의 길은 평탄한 대로가 아니다. 그것은 형극의 길이다.’
두 번에 걸쳐 탈옥했다 다시 잡혀
이재유는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황토 속살처럼 부드럽고 결 고운 운문적 감수성과 함께 앎과 함이 같이 가는 굳센 실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감동시킬 줄 아는 ‘사람의 얼굴을 한 주의자’였다. 그것은 모리다(森田)라는 왜경이 보여준 행동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두 번에 걸쳐 ‘신화적 탈출’을 했다가 다시 붙잡히게 된 1934년 6월 13일 밤이었다. 손에 자동수갑을 차고 발에는 커다란 쇳덩어리를 붙들어맨 데다가 허리에는 또 방울을 채워 그야말로 옴치고 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재유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제아무리 탈출의 귀재 소리를 듣는 이재유였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흉악무도한 조선공산당 수괴’ 이재유였으니, 그를 철통같이 가둬두고 있던 서대문경찰서는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담당 간수였던 모리다 순경이 탈출을 도와준 것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산골 주재소로 좌천되었던 모리다는 그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모리다가 아무리 사회주의사상에 우호적인 젊은이였다고 하더라도 짧은 시간에 적국 경찰을 동지로 만들어버린 이재유 솜씨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재유한테 ‘당대 최고의 혁명가’며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라는 꽃다발을 걸어주게 된 터무니 가운데 하나이다.
그때에 주의자를 다루는 왜경들 족대기질 수법은 말과 글로 나타낼 수 없을 만큼 참으로 끔찍한 것이다. 여럿이 빙 둘러서서 공처럼 주고받으며 때리고 차고 물을 먹이고 거꾸로 달아매다가 불에 달구어진 인두로 넓적다리를 지지다가 생식기 끝에 전깃줄을 들이대는 것이었는데, 이재유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결코 왜경들이 바라는 ‘자백’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백을 하기는 한다. 그러나 자백이라고 해봐야 왜경들 다리품만 팔게 하는 것들이었으니, 적에게 잡혔을 때 최소한 24시간은 입을 다물어 동지들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 ‘이재유 철칙’을 따른 것이었다.
간수 상대로 공산주의 의식화 교육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은 이재유를 체포한 기념으로 잠복 때 변장했던 차림 그대로 경찰서 마당에서 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두 손이 묶인 사람이 이재유다. <푸른역사 제공> |
‘아지트키퍼’를 하면서 이재유와 한살이 된 박진홍이 신당동 셋방을 나간 것은 1935년 1월 10일이었다. 그러나 이재유가 작성해 준 ‘세말캄파니아 투쟁방침서’를 영등포 공장 프랙션에게 전해주러 나간 ‘문건레포’ 박진홍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기로 한 시간에서 딱 1분만 기다리던 이재유는 즉시 아지트를 옮긴다. 그리고 자기 아이를 밴 박진홍의 동덕고녀 은사인 이관술(李寬述)과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이제 노원구 창동)에 들어가 위장농군이 된다. 공덕리에서 이재유는 이관술과 ‘조선공산당재건그룹’을 ‘준비그룹’으로 바꾸고 그 기관지로 <적기(赤旗)>를 ‘가리방 긁어’ 경성시내 주의자들에게 돌린다.
이재유가 붙잡힌 것은 ‘준비그룹’ 성원인 최호극에게 <적기> 제3호를 건네주고 투쟁방침을 알려주기 위하여 나간 거주지 부근 산중에서였다. 이재유를 기다리는 것은 최호극이 아니라 왜경 수백 명이었던 것이다. 1936년 12월 25일 정오 무렵이었다. 왜경들에게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이재유는 목이 찢어지라고 고함을 질러 동네에 들리게 하였고, 거주지를 밝힌 것은 다음날 하오 6시쯤이었다. 스스로 정한 ‘주의자계율’을 지켜냄으로써 이관술이 도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온갖 야만적 족대기질에 시달리기 7개월 만에 내려진 언도는 징역 6년이었다. 6년 만기를 채웠으나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감호소로 옮겨진 이재유가 족대기질 후유증을 못이겨 옥사한 것은 1944년 10월 26일이었다. 향수 40세.
감옥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일제와 싸웠던 이재유였다. 다른 방에 있는 주의자들과 통방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락하여 조선말 사용금지에 반대하고, 수감자 대우 개선을 끈질기게 요구하였으며, 간수들을 상대로 공산주의 의식화 교육을 시키는 교양사업을 벌였다. 결국 서대문형무소생활 1년 만에 공주형무소로 옮겨졌지만 그의 가열찬 감방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작성한 것이 ‘조선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 능부’라는 논문이다. 조선경제의 생산관계가 반(半)봉건적·반자본주의적이므로, 노동자를 주력으로 하고 농민을 동맹자로 하여 무산대중과 진보적 학생·인테리들이 연합하여 일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생산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론이었으니, 해방 직후 박헌영이 발표한 ‘8월테제’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재유는 코민테른 노선을 맹목적으로 따른 국제주의 운동자들의 영웅주의적·권위주의적 운동 방식을 거부하고, 구체적 삶에 뿌리박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실천운동을 주장하였던 혁명가였다. 그리고 국제주의자들이 경시 내지는 무시하였던 민족문제를 운동의 중심에 두었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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