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복판에 언제나 말이 서 있다
탈라스 전쟁터를 지나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로 가는 산간 초원지대는 말들이 자라기에 적격인 천혜의 방목장이다. 오토맥 고갯길의 풀밭에서 천연스럽게 풀을 뜯어 먹고 있던 한 떼의 말들은 낯선 일행이 다가서자 이내 경계를 하며 저만큼 피했다.
‘천마의 후손’ 한혈마나 서극마 같은 명마의 주산지는 톈산산맥 북서쪽 기슭의 초원지대다
중앙아시아 어디를 가나 말을 형상화한 구조물을 발견하게 된다. 말이 국가의 상징물인가 하면, 건물 장식물로, 심지어 길의 표시물로까지 등장한다. 형상도 날개 달린 천마에서 대지를 주름잡는 준마, 앞발을 치켜들고 포효하는 용마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가끔 뛰어난 조형미가 눈길을 멈추게도 한다. 이렇듯 말과 중앙아시아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말을 이승과 저승을 잇는 영매체로, 성인의 탄생을 알리는 예시동물로, 수호신으로까지 여기고 숭상한다. 여기에 더해 초원이란 태생적 자연환경 속에서 ‘한혈마(汗血馬)’ 같은 전설적 명마가 생겨나 역사 무대에서 중앙아시아를 부각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말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애착은 남다르다.
땀과 피 흘리는 ‘한혈마’
한혈마, 문자 그대로 땀과 피를 흘리는 말이란 뜻이다. 학명까지 있는 점으로 미뤄 실존한 말임에는 틀임없는 것 같다. 한적에는 기생충이 말의 뒷목과 어깨 사이의 피하조직에 서식하는데, 그 부위가 부어올라 달릴 때면 혈관이 늘어나 창구가 생기면서 땀과 피가 함께 흘러내리는 데서 그런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천마(天馬)의 후손이라고 언급한 한혈마의 비조에 관해서는 신비스런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옛날 대원국에는 하늘에 닿는 높은 산이 있어 그 위로 천마가 내려와 노니는데, 이를 잡을 수 없게 되자 산 아래 오색 암말을 풀어놓아 암내를 피우게 했다. 그러자 천마가 내려와 교배하고 새끼를 낳은 것이 바로 ‘천마자(天馬子)’라고도 하는 한혈마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천운을 타고 난 이 말은 하루에 천리씩 달린다고 하여 ‘천리마’라고도 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천리마가 비약의 상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기원전 2세기,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장건은 대원(大宛, 현 중앙아시아 페르가나)에 최상의 말이 있으나 숨겨 기르고 있다고 한무제에게 보고한다. 한무제는 황금으로 등신대의 금마를 만들어 한 필을 얻고자 다시 사신을 파견한다. 그러나 대원측이 거절하자 사신은 홧김에 금마를 망치로 깨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온다. 결국 한무제는 장군 이광리로 하여금 두 차례 원정을 단행케 해 겨우 순종 몇 마리를 구해다 번식시켰다고 한다. 한혈마에 이어 전한은 오손(烏孫, 현 키르기스스탄 중서부 지역)으로부터 또다른 명마인 ‘서극마(西極馬)’를 들여왔고, 후한 때는 멀리 월지(月氏, 현 아프가니스탄 동부 일원)에서도 ‘월지마’를 수입했다. 그리하여 한무제 때 벌써 중앙정부가 관장하는 군마수만 40만필이나 되었으며, ‘농민은 말을 경작과 운반에 이용했으며, 백성치고 말을 타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 널리 보급되어 국력 향상에 이바지했다.
한혈마나 서극마 같은 명마의 주산지는 한나라 때 대원이나 오손을 에워싼 텐산 산맥의 남북쪽 기슭의 초원지대다. 10여년 전 한 일본 학자가 텐산 산맥 인근에서 한혈마를 직접 보고 촬영까지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늘 그 실체가 궁금해 오던 터라 답사길에 현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탈라스에서 동쪽으로 290km 떨어진 수도 비슈케크로 향하는 산간오지길이 그 현장이다. 탈라스 시외를 빠져나오자마자 서서히 산길로 톺아오른다. 오른 편은 탈라스강의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저 멀리 탈라스 연산이 바라보이며, 왼편은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선인 알라타우 산맥의 멧부리들이 우중충하게 늘어섰다. 이 두 산맥 사이의 오지는 천혜의 방목지다.
한 시간쯤 달리자 20~30마리의 말떼가 나타난다. 윤기 흐르는 검붉은 갈색 털에 미끈하고 탄탄한 몸매. 채찍만 들면 금방이라도 갈기를 휘날릴 당찬 기상이 옛적 한혈마를 떠오르게 한다. 맨눈으로는 뒷목과 어깨가 부어올랐는지 가늠할 수 없다. 생물은 세월의 풍상 속에 순화적인 변이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이 시점에서 2000여년 전의 것을 찾는다는 것은 무모한 짓일 수 있다. 유르트 앞에서 담배만 뻐끔뻐끔 빨던 주인은 우리가 말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못내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진실여부는 차치하고, 명마의 고향을 찾아서 그 흔적이나마 더듬어 봤다는 데서 일말의 만족감을 느꼈다.
기마민족의 영물이자 기둥
해발 2000미터로 치닫자 갑자기 날씨는 변덕을 부린다.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먹구름이 산허리를 휘감는다. 순간 산봉우리들이 구름바다 위에 두둥실 뜬다. 이윽고 햇님이 벙긋하더니 영롱한 무지개가 숲속에 비낀다. 신비로운 대자연의 파노라마다. 그 변덕 속에서도 산기슭이나 계곡에 삼삼오오 흩어져 사는 유목민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태연스레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 삶의 한복판에 언제나 말이 서있다. 말은 기마유목 민족들에게는 숭상하는 영물일뿐만 아니라,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자 밑천이다. 또한 말은 자고로 농경민들에게도 중요한 축력과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기병은 전력의 중추 구실을 해왔다.
말은 상당히 영특한 동물로서 우리 삶 속에 깊숙히 파고들어 왔다. 그래서 이른바 ‘명마론(名馬論)’이란 미담도 전해온다. <삼국지>에는 ‘붉은 몸체에 토끼처럼 날쌘 말’이란 뜻의 ‘적토마(赤兎馬)’가 나온다. 이 말은 원래 동탁의 소유였는데, 정원을 살해하기 위해 부하 여포에게 하사한다. 그 뒤 여포가 살해되자 조조의 손에 넘어가는데, 조조는 항복한 관우에게 선물로 준다. 고락을 같이 한 관우가 죽자 오나라의 마충이 가져가지만 먹이를 거부해 며칠 뒤 굶어 죽는다. 무모한 인간들에게 농락 당하지만, 명마는 인간에 대한 충절만은 잊지 않았다. 당대의 시선 두보는 ‘고도호총마행(高都護?馬行)’이란 7언시에서 고선지를 태우고 전장을 누비던 총마(한혈마)는 “사람(고선지)과 더불어 한 마음이 되어 큰 공을 이루었도다(與人一心成大功), 공을 이루고 은혜로운 사랑을 입어 주인이 입조하는 데 따라오니(功成惠養隨所致)…”라며 주인을 따라 입조한 말의 감격을 토로했다. 이어 ‘푸른 실로 머리를 동여매고 그대(주인)를 위해 늙고 있으니(靑絲絡頭爲君老), 어느 인연으로 다시 싸움터로 나가리오(何由?出橫門道)’라고 읊는다. 주인과 함께 더 이상 싸움터로 가지못하고 늙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다. 조선 광해군 때 부원수로서 만주 정벌에 나섰다가 오랑캐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金應河) 장군은 전사 직전 옷에다가 유서를 써서 애마로 하여금 고향에 전하도록 한다. 애마는 머나먼 요동에서 강원도 고향까지 찾아와 임무를 마친 뒤 북녘에 묻힌 장군을 그리며 굶어 죽었다. 인간에 못지않은 충절이다.
말의 조상은 약 5800만년 전 아메리카 대륙의 북부와 중부에 나타난 ‘페나코두스’다. 키가 50여cm 밖에 안되었던 이 동물은 발가락이 다섯 개였으나 여우만큼 커지면서 발가락은 네 개로 줄어든다. 그것이 다시 오늘날 말처럼 단굽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은 약 200만년 전이다. 말이 가축으로 길들여진 것은 또 오랜 시간이 지난 신석기시대인데, 처음에는 식용으로만 쓰였다. 말이 가축화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이란 고원에 자리잡은 기원전 4000년께의 시아르크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오랜 세월 번식해 온 말의 품종은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다종다양하다. 오늘날 말은 가축화하기 시작한 때의 유럽산 야생마인 타판을 비조로 하여 약 40종으로 나뉜다. 크게는 북방종과 남방종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북방종은 털이 길고 육중하며, 남방종은 털이 짧고 날씬한 편이다. 북방종은 몽골계 말의 조상으로서, 중국, 한국의 재래종 말이 이에 속한다. 남방종은 아랍계통 말이 대표종인데, 한혈마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말들이 대를 이어갔다.
신라 목숙전 두고 명마 관리
사회경제 발전의 수요에 따라 말은 품종이 개량되고 사육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 여파는 동방의 한반도까지도 밀려왔다. <삼국사기>를 보면, 목숙전(??典)의 운영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목숙(거여목, 개자리)이란 원래 아랍말 계통인 서역 명마들의 먹이풀이었는데, 한무제 때 이런 명마들이 유입되면서 자연히 따라 들어왔다. 신라시대 목숙전이란 관리기구를 백천과 한지 등 네 곳에 설치하고 전담 관리까지 배치했다는 기록은 이 시기 서역말들이 전래되었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삼국시대 무덤, 벽화에는 말과 관련된 유물이나 그림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한반도를 통해 목숙을 전수 받은 일본에서는 ‘우마고야시(馬肥, 말을 살찌게 하는 것)’라고 이름하여 말먹이로 쓰다가 지금은 약재로 전승하고 있다.
탈라스에서 한혈마와 서극마, 목숙의 고향을 찾아 떠난 길은 고산준령을 넘는 험로였다. 정상인 해발 3586m의 탈라슌 고개에서 1000m의 터널을 빠져나와 하산하는 데만 족히 한시간이 걸렸다. 밤 9시 40분께 비슈케크에 도착했으니, 장장 7시간이 걸린 길고도 험한, 하지만 보람있는 여정이었다.
실크로드의 견마무역
한 무제, 한혈마 얻기 위해 2차례 대원정
당, 비단길 막히자 말 찾아 북방우회로 개척
사마천의 역사서인 <사기>권 24에는 통큰 정복 군주인 한나라 무제가 기쁨에 들떠 지은 한시 한편이 전한다. 기원전 102년 수하의 장군 이광리가 서역 원정에서 이겨 명마 3000여필을 이끌고 장안성에 개선하는 광경을 묘사한 내용이다. 당시 중국 문헌들이 ‘천하의 큰 소동’이라고 한껏 치켜올렸던 이 서역 원정은 텐산산맥 너머 중앙아시아 페르가나(당시엔 대원국)의 한혈마를 얻으려고 무제가 애첩의 오라버니 이광리에게 명령해 단행한 작전이었다. 기원전 104년 치른 첫 원정은 전체 군사의 8할을 잃는 대참패로 끝난다. 격노한 한무제는 둔황 서쪽 옥문관으로 패주해 돌아오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엄명을 내린다. 이광리는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중원의 부랑배 등 3만 대군을 끌어모아 2차 원정을 벌인 끝에 마침내 대원성을 항복시켰다. 한 왕조는 숙적 흉노와의 일전에서 필요불가결한 군사장비인 말을 얻기 위해 결사적으로 서역 공략에 집착했다. 중국 왕조가 타림 분지와 파미르 고원 일대의 유목 지대를 평정하고 서역 교역의 기초를 다진 데는 좋은 말을 얻고자하는 욕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말을 사고 파는 견마교역은 비단과 더불어 실크로드 경제를 먹여살린 중요한 젖줄이었다. 말은 가장 중요한 군수품이자 실크로드의 필수적 교통수단이었던 만큼 실크로드가 막혔어도 견마교역은 계속되었다. 751년 탈라스 전쟁에서 당군이 패배한 뒤 하서 지방의 실크로드는 토번에 의해 막혔지만, 당나라는 몽골 북방 지역에서 위구르인들과 말 교역을 지속하기 위해 하서 회랑 북방에 별도의 우회로를 뚫었다. <당서>‘회홀전’을 보면 748~760년 위구르인이 이 길을 통해 여러 차례 말을 비단과 바꾸는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통상 말이 부족했던 역대 중국 왕조들은 흉노, 위구르, 투르크 같은 서역 이민족들에게 막대한 비단을 주고 좋은 말을 사들였고, 이민족 제국은 이들 비단으로 다시 서방이나 이슬람 문명의 진기한 문물들을 사들여 중국에 되파는 중계 무역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갔다. 당이 멸망한 뒤인 10세기초 오대시대에는 돈황의 사주귀의군, 감주회골 같은 하서회랑 일대의 오아시스 소국가들이 중국 왕조와 활발한 견마 교역을 벌인다. 실크로드의 퇴락기라는 18세기 중엽~19세기초에도 카자흐·코칸드·부하라 칸국 등의 중앙아시아 상인들은 신장성에 다시 진출한 청나라 왕조와 견마 중계교역의 전통을 꾸준히 이어갔다. 말 교역은 역대 실크로드를 맥동하게 했던 물류의 핵심 구실을 톡톡히 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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