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염화실의 향기_7_안성 석남사 화주 정무스님

醉月 2010. 4. 7. 08:41

경기 안성시내에서 충북 진천 방향 313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서운산(瑞雲山)이 앞을 가로막는다.

햇빛 좋은 봄날의 산자락 마을마다 벚꽃, 목련, 진달래가 한창이고, 물 가득한 상촌마을 마둔저수지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일렁인다.

계곡을 대동하고 양장(羊腸) 같은 고갯길을 따라오르면 인가와 멀리 떨어져 초연한 서운산 숲속에 석남사(石南寺)가 있다. 신라 문무왕 20년(680) 담화스님(석선스님이라는 설도 있음)이 서운산 북쪽 자락에 창건했다는 천년 고찰이다. 산 아래와 달리 봄도 늦어서 이제 막 초록이 움트는 중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금광루, 대웅전, 영산전(보물 제823호), 요사 두채와 해우소가 전부인 단출한 산사. 왼쪽 법당을 겸한 요사채에 석남사 회주 정무(正無·77)스님이 있다. 노장은 봄날의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차를 따랐다.

스님은 건강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깡마른 체구에 꼿꼿한 허리,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힘이 있었다. 수십년 자연건강법을 행하고 가르쳐온 스님답게 피부가 맑고 움직임이 가볍다.

“자연건강법은 자연 이치에 따라 올바로 사는 건강법이야. 따지고 보면 세상에 못고칠 병은 없어요. 못고치는 습관만 있을 뿐이지. 습관을 바꾸고 절제하는 것이 최고의 건강법이야.”

그는 일본 니시가츠조(西勝造)가 창안한 자연건강법 신봉자다. 의사들이 20살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을 만큼 병약했던 니시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불교 6바라밀을 탕으로 ‘건강 6대법칙’을 만들었다. 스님은 ‘피식지심(皮食肢心)’으로 건강법을 설명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피부에 ‘산득산득’ 바람이 통하게 하는 풍욕(風浴), 오곡밥과 편식하지 않는 식사, 늘 팔다리를 자연스럽게 흔들어주는 이완, ‘양(良)·능(能)·선(善)’의 긍정적인 마음이 그것이다. 스님은 특히 ‘일심정기(一心正己)’를 강조한다. ‘마음이 옳아야 몸뚱이가 옳다’는 뜻이다. 스님은 “정신의 지혜와 건강이 바로 반야지혜”라고 말했다.

정무스님은 이천 영월암에서 7년 전 석남사로 왔다. 주위에 아무렇게나 지어진 슬레이트 조립식 건물들을 철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금광루를 신축하고 어지러운 도량을 정비했다. 수질을 오염시키는 수세식 화장실을 없애버리고 목재건물로 된 전통 해우소를 마련했다. 그는 도량을 새롭게 정비한 일을 ‘정화’라고 표현했다.

정무스님의 석남사 정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전각을 짓는 것도 아니다. 형편 닿는 대로 조금씩 일을 진척시킨다. 스님의 하루는 새벽 4시 정각 예불, 5시 정각 참선, 6시 도량청소, 7시 아침공양, 12시 점심 공양, 울력과 서운산 포행, 6시 저녁공양, 7시 저녁예불로 짜여져 단조로우면서도 빈틈이 없다. 정각에 맞춰 시간표를 짜는 이른바 ‘정각 관리’다.

정무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의 대선사 중 한 분인 전강스님의 제자다. 그러나 은사스님의 선맥을 잇기보다 평생 포교와 신도교육에 힘썼다. 요즘 템플스테이로 발전한 신도수련회는 정무스님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1968년 영주포교당에서 첫 여름수련회를 열었으며 해마다 다양한 형태의 수련회를 가졌다. 대학생 불교 수련회도 그가 처음 시작했다.

석남사 곳곳에는 한글 주련이 걸려 있다. 요사의 법당문 옆 기둥에는 ‘우주는 한 집안/중생은 한 가족/서로 원망 말고/은혜만 갚아라’라고 씌어 있다. 스님은 주련의 글귀처럼 언제나 ‘효(孝)’와 ‘보은(報恩)’을 강조한다. 석남사 경내에는 ‘부모은중경탑’이 세워져 있다. 은중경은 부모의 10가지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다. 그는 1980년 화성 용주사 주지 시절에도 부모은중경탑을 세웠다. 이 바쁜 인터넷 세상에서 케케묵은 윤리관으로 치부되는 효도를 말하는 뜻이 궁금했다.

“아녀, 아녀. 요즘 모두들 부모님 은혜를 모르니 가정이 망가지고, 인성이 파괴되는 거여. 효도를 알면 가정이 평화롭고, 가출하는 청소년이 안나와요. 효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실이야. 부모은중경은 부모와 자식을 동시에 교육시키는 훌륭한 교과서라구.”

스님은 짝짝짝 손뼉 죽비를 치면서 “잘 들어봐” 하고 연방 다그친다. 스님은 ‘부모노릇’, ‘부부노릇’, ‘자식노릇’을 정리한 계명을 만들어 ‘마음공부’라는 책자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유교와 달리 윤회를 말하는 불교의 입장은 일체중생이 다 과거세의 내 부모이고 형제라는 거여. 이 한몸이 태어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연과 은혜가 있었는지를 알아야 해요. 가정에서 효도로 보살도를 실천하고, 그것이 사회로 국가로 퍼져나가게 해야 돼.”

스님은 “은혜를 아는 데서 불쌍한 사람 보면 자비심을 내고, 부정한 것을 보면 정직한 마음을 내고, 어리석은 것을 보면 지혜를 내는 마음이 연(緣)을 따라 자꾸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공부하는 것이 불교야. 죽음은 우리가 사는 연속선상에 있어. 죽음을 생각하면 한순간도 인생을 소홀하게 살 수가 없지. 죽음공부를 하면 해탈을 못하더라도 죽음을 달관할 수 있어.”

스님은 “시간과 돈을 가치있게 쓰면서 인생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죽음을 준비하고 노후는 준비하지 마라”고 했다. 일견 독특하고 일견 정곡을 찌른다.

“언론에서 노후를 위해 10억원 재테크를 부추기잖아요. 그런데 나쁜짓 하지 않고 어찌 그런 큰돈을 모아. 또 10억원을 모으려면 시간과 돈의 노예가 돼야 해. 그러면 노후에는 더 외롭고 쓸쓸해져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충실히 사는 것이 최상의 노후대책이야.”

스님은 “누구나 혼자 살 수는 없다는 것이 불교 연기법의 실상”이라며 “어리석은 사람들이 연기법을 모르니 자기독단, 이기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교의 마음공부는 계·정·혜가 핵심이야. 계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인성을 말하는 거여. 계를 지키면 마음이 고요히 집중돼 정에 이르고 지혜가 그대로 구족해져요. 막행막식(莫行莫食)으로는 지혜를 얻을 수 없어.”

그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을 말했다.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본성은 늘 밝게 빛나고 있으며 참된 수행은 궁극적으로 마음의 때를 벗겨 본성의 광명을 찾는 인생 공부라는 것이다. 매사에 낙천적인 스님이지만 요즘 수행자들에 대한 일침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한국불교의 선수행은 보편성이 부족해. 계는 소홀히 하면서 참선하다가 무엇을 깨달았네 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나타난 삿된 마구니여. 평생 참선한다고 앉아 있어도 소용없어요. 계를 지키며 포교하고 봉사도 하면서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지.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평생 실천했어. 수심(修心)보다 용심(用心)을 하라고 했잖아.”

그에게 수행은 “버리고 또 버려 물 위에 비친 달빛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선방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말은 틀린 말이란다. “생사가 둘이 아니듯이 ‘얻는 것’과 ‘버리는 것’ 또한 둘이 아니다. 번뇌와 망상, 탐욕을 비우고 버리는 속에서 문득 본성 광명이 그대로 밝게 비추고 있음을 직시하는 순간 바로 깨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은 물과 같아. 물은 얼음이나 수증기로 바뀌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지. 분별하고 욕심내고, 시비하고 우쭐대지 않고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 흘러가다가 막히면 돌아가고, 고이면 그저 머무를 뿐이야.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버려져 물이 탁해지면 열심히 자정을 하고. 물처럼 맑고 깨끗함, 그 원대한 포용력이 본래 불성이고 마음인 거여.”

돌아나오는 길에 불쑥 물었다. “더 공부할 게 남았습니까.” 곧장 대답이 날아왔다.

“자적(自適)!”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즐겁게 산다는 뜻이다. ’

 

정무스님, 국어교사 하다가 출가

정무스님은 전북대학교 농과대 수의학과를 졸업한 뒤 잠깐동안 군산중앙고등학교 야간부 국어교사를 했다. 입산할 인연이었는지 도무지 세상살이가 재미가 없어 불교와 원불교의 스승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군산 은적사에 도인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한국 불교의 근세 선풍을 날린 전강선사(1898~1974)를 만났다. 은적사를 자주 찾으면서 그때 한창 선방에 다니며 공부중이던 송담스님, 능파스님 등과 친하게 지냈다. 스님들은 “이선생도 머릴 깎지…” 하면서 출가를 권했다.

1958년 전강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했다. 당시는 불교정화가 한창이던 때였다. 스님은 “나라를 되찾았으니 불교도 되찾아야 한다는 ‘분심’도 출가의 한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스승은 바로 ‘판치생모(板齒生毛)’라는 화두를 내렸다. 어떤 납자가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물었을 때 조주선사가 “판때기 이빨에 털이 돋는 것이니라(板齒生毛)”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 공안이다.

염불 익히고, 불공 드리고 틈틈이 화두를 참구하면서 행자생활을 마치고 전강스님을 따라 도봉산 쌍룡사에서 한철을 났다. 김제 흥복사, 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방을 다니며 화두 타파를 위한 참선 수행에 몰두했다. 1968년 안거를 위해 범어사 선방으로 내려가던 중 영주포교당에서 하룻밤을 묵은 것이 인연이 돼 도심포교에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해마다 수련회를 열었다.

스님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淸規)를 실천하며 살았다. 지금도 석남사에서 제자들과 함께 1000여평의 논밭을 직접 일군다. 연료비를 아끼기 위해 어지간한 추위에는 난방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세탁기 없이 손수 빨래를 하고 중들과 함께 공양을 한다. 스님은 여행을 좋아한다. 불교유적지 등 세계 각국을 여행했다. 특히 인도는 지금까지 17차례나 다녀왔다. “인도는 기대를 아무리 높게 가져도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산에 오를 때도 제자나 젊은이들이 끄달릴 정도로 걸음이 날래다. 요즘도 한 달에 한 번은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가고, 설악산 대청봉은 연중행사로 가고 있다.

맏상좌인 심경스님(조계종 총무원 사서실장)은 “누구에게나 격의없이 대하면서도 원칙은 철저히 지키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다”면서 “생활이 편할수록 오히려 수행에는 장애가 된다는 것이 노장의 가르침”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