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영원으로 聖과 俗이 숨쉬는 공간
1408년 음력 5월24일, 서울에 많은 비가 내렸다. 새벽 파루(야간통행금지 해제 때 서른세 번 타종하는 것)에 태상왕 이성계는 가래가 심해져 태종이 급히 달려와 청심원을 드렸으나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는 창덕궁 별궁에서 74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이날을 양력으로 계산하면 6월27일이다.
601년 후. 2009년 6월27일 새벽 1시30분(한국 시각), 스페인의 역사도시 세비야에서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6월21일부터 7월3일까지 열린 제33차 세계유산대회(World Heritage Committee) 기간 중 태조가 승하한 바로 그날 그 시각, 그의 후대 왕과 왕비의 유택이 모두 세계유산이 된 것이다.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다. 이런 것을 두고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걸까?
6월27일 오후 동구릉 건원릉에서 태조 승하 601주기 기신제(매년 후손들이 치르는 제사)가 황세손 이원(李源) 씨를 초헌관으로 거행됐다. 601년 전과 달리 쾌청했다. 조선 왕릉은 탁월하고 보편적인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인정받아, 세계인이 함께 보존하고 향유해야 할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됐다. 세계유산에 등재되려면 잠정등록, 등재를 위한 학술연구, 등재신청서 작성,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실사, 세계유산대회 등의 과정을 거친다. 필자는 십수 년 조선 왕릉을 연구해온 덕에 운 좋게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제 ‘신의 정원’ 조선 왕릉의 내밀한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고자 한다.
동서고금 가장 완벽한 형태의 무덤 유산
조선시대 능원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 5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조영된 무덤 유산이다. 27대에 이르는 왕과 왕비, 추존왕 등 42기의 능(陵)이 남아 있으나 조선 초기의 능인 제릉(齊陵)과 후릉(厚陵)은 북한 개성에 있고, 폐왕이 된 연산군·광해군의 묘는 이번에 세계문화유산 등재에서 제외됐다.
5000여 년의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우리 민족의 성립기이며 문화의 완성기다. 이때 조성된 궁궐과 왕릉은 대표적인 한국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조선 왕릉은 518년 동안 왕실이 철저히 관리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도 국가에서 관리해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따라서 조선 왕릉은 현존하는 능원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왕릉은 유교의 이념에 따라 능역 공간의 크기, 문·무석과 석물, 기타 시설물의 형태와 배치를 달리해 예술성을 높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1500여 개 석조물은 지상 최대의 조각공원을 유산으로 남겼다. 아울러 당대의 조영 내용을 기록한 각종 의궤와 능지가 있어 보존과 관리에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이러한 역사성 외에도 조선의 통치철학인 유교에 근거한 공간의 배치와 자연친화적인 곡선미 등 능원의 형태와 봉분의 조영 방식에서 독특한 한국의 미(美)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 왕릉은 한국인의 자연관과 세계관에 따라 조영된 문화유산으로, 비슷한 시기 타 유교문화권의 왕릉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인 길례(吉禮)의 공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린벨트의 기원이 된 능역
왕릉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10리(4km) 밖, 100리(40km) 안에 조영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능지가 결정되면 수십에서 수백만 평의 능역에 선왕의 유택만 두고 사가의 무덤과 마을을 이전하고 녹지를 철저히 보존하고 관리했다. 덕분에 능역 주변의 녹지가 잘 보전돼 오늘날 그린벨트의 근간이 됐고 왕릉 숲은 현재의 광릉수목원, 홍릉수목원 등 도시 숲이 형성되는 역사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능원은 산의 능선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마치 꽃잎에 싸인 꽃심처럼 보인다. 이처럼 중층적인 공간에서 왕릉은 외부와 분리돼 폐쇄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능침(봉분)만큼은 시계가 넓게 확보되는 곳에 자리잡는다. 즉 주종산(主宗山)을 뒤로하고 좌우가 주종산보다 낮은 산록으로 둘러싸이며 앞이 트인 지형에 있다.
능침 앞으로 좌청룡 산, 우백호 산의 능선이 감싸고 내려와서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산세가 좁아진다. 만약 지형적으로 입구가 오므라들지 않는 곳이라면 별도로 비보림(樹林)과 연못(蓮池)을 조성하기도 한다.
능원의 시설물은 능침(봉분)→장명등→정자각→홍살문의 순서로 직선 축을 이루는데 이는 유교의 위계성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 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능역의 규모에 따라 조영 방식을 달리하거나 자연 지형에 맞게 자연스럽게 축이 구부러지기도 한다.
이제 봉분과 정자각의 높이를 비교해보자. 정면에서 보면 정자각 위로 봉분이 솟아 있다. 이는 능침의 위엄성과 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성과 속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능침에서 원근산천(遠近山川)의 자연경관을 굽어 살핀다는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햇살과 배수를 위한 실용적 목적도 있다.
다음으로 재실(齋室)-금천교(禁川橋)-홍살문(紅箭門)을 잇는 능역의 참배로(參拜路)를 걸어보자. 참배로는 능역 내의 명당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갈지(之) 자나 검을현(玄) 자의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능원에 진입하는 참배객에게 성스러운 능침이 곧바로 보이지 않게 하며, 능원 공간의 신성함과 엄숙함을 상징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신의 정원’
능원의 입지 선정과 조영물의 축조 방법은 주위 지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능원을 자연환경의 일부로 여기는 풍수사상과 한국인의 자연관에 따른 것이다. 조선의 왕릉은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단독으로 조성한 것을 단릉(單陵)이라 하며 대표적인 예가 태조 건원릉이다. 언덕 위를 평평하게 조성해 곡장(曲墻)으로 두르고 그 안에 우왕좌비(右王左妃)의 원칙에 따라 왕과 왕비의 봉분을 쌍분으로 만든 것을 쌍릉(雙陵)이라 한다. 대표적인 능이 헌릉이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을 합장릉(合葬陵)이라 한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이 최초다.
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 줄기의 용맥에서 나뉜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석물)을 배치한 형태를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하고, 이러한 형태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을 들 수 있다.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에 위아래로 조성된 왕상하비(王上下妃)의 형태를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 한다. 여주에 있는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그 예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를 삼연릉(三緣陵)이라 하며, 헌종과 그의 비들의 경릉이 유일하다. 왕과 왕비, 계비를 한 봉분에 합장한 것을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이라 한다. 이것은 순종과 그의 비들의 유릉이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봉분의 형태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의 능원은 자연 지형에 어울리게 한국인의 자연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다음 호에는 조선 왕릉에서 산 자를 위한 진입 공간과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제향 공간, 그리고 돌아가신 선왕을 위한 능침 공간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창환 교수는 한국전통조경학회 부회장,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2009년 6월 조선 왕릉 40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숨은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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