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치가 박순의 업적과 유적지(上)
우국의 구도자 창계 임영의 삶과 사상(上)
-하루 7번 자신을 돌아보다-
# 8세에 시를 지은 신동(神童)
큰 빗방울 연잎에 떨어지니 大雨落蓮葉
하얀 옥구슬 푸른 쟁반에 구르네 白璧轉靑盤
우국의 구도자 창계임영의 삶과 사상(下)
-벼슬도 버리고 道를 구하다-
# 창랑대(滄浪臺)에서 학문연구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의 벼슬과 전라감사에 개성유수의 높은 지위도 모두 응하지 않고, 창계는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학문에만 전념하겠다고 고향인 회진고리(會津故里)에 ‘창랑대’라는 집을 짓고 다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러던 시절에 지은 시인 듯, ‘한중음(閒中吟)’이라는 7언 절구 다섯 수는 그의 시문학과 철리(哲理)가 겹해진 수준 높은 작품으로 그의 학문의 깊이가 어디쯤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인도 다름 아닌 인륜(人倫)을 다함이라
上聖無他只盡倫조금이라도 물러서고 미룬다면 바로 사람이 아닐세 재生退托卽非人
하늘의 분수나 사물의 이치 본디부터 흠결이 없나니 天分物理元無欠
다만 사(私)만 용납하지 않는다면 바로 참이라네但不容私便是眞
참(眞)을 추구하던 구도자 창계는 세상의 이치를 그렇게 밝혔다. 아무리 높은 성인이라도 일반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도리인 인륜(人倫), 즉 효제(孝弟)를 제대로 실천만 한다면 성인의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조금이라도 물러서고 우물거리면 사람이 아니라니 얼마나 독한 말인가. 성인으로 가는 구도의 길에는 공(公)이 있을 뿐이지 사(私)는 있을 수 없다. 사만 이기고 공으로만 간다면 거기에 바로 참이 있고 진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의 진지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그냥 짐작할 수 있다. 창랑대를 세우고 3년째에 세상을 떠났으니 더 긴 한세월이 있었다면 그의 경지가 어디쯤임을 알기도 어려웠으리라.
# 창계의 학문 세계
창계는 젊은 시절에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5인의 저술에서 대체(大體)에 관계되고 일용에 절실한 내용을 뽑아서 10여권으로 책자를 편찬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방문헌의 아름다움이 이에서 더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계획의 결과 ‘퇴계집’과 ‘율곡집’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독서차록(讀書箚錄)을 각각 남겼다. 그런 정도로 퇴계와 율곡에 대한 창계의 존모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창계는 학문의 길을 내면적 심화에서 찾았던 터여서 이(理)의 주체성과 적극성을 요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이발(理發)에 사상의 근거를 둔 퇴계 쪽으로 기울고 기발(氣發)의 율곡 논리에는 덜 찬성하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다(非氣則不能發), 발하게 하는 것은 기다(發之者氣也)”라는 율곡의 학설은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고칠 수 없다고 믿던 율곡의 후학들에게, 창계의 주리적(主理的) 입장은 결코 달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계의 그런 입장을 농암 김창협이나 절친한 친구이자 친척이던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는 찬성해 주었기 때문에 뒷날 ‘조선유학사’에서 현상윤(玄相允)은 창계·농암·졸수재 모두를 퇴계와 율곡의 이론을 절충했던 ‘절충파’라고 명명했다. 더구나 창계는 최근에 발견된 그의 편찬서인 ‘퇴계언행록’에서 보여주듯, 퇴계학을 기호학파에 매개해 준 역할을 공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당파싸움에까지 연결되어 극심한 논쟁으로 치닫고 있을 때에 퇴계 학문을 깊숙이 연구한 결과로 그의 언행록을 편찬하여 알리려던 마음이 바로 극단으로 치닫는 분쟁을 조절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이 점은 그 당시에 한창 큰 싸움으로 전개되던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서도 창계는 그 뒤의 화란을 걱정하면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절하려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도 본다. 그러나 고질적인 당파싸움은 창계의 노력으로도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침잠하려던 뜻도,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당파싸움의 해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가 벼슬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그렇게도 간절한 참된 선비였지만,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묻히려던 뜻을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더구나 스승이던 약천 남구만이나 현석 박세채와 명재 윤증이 모두 소론의 입장에 섰고, 절친한 벗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 등이 소론으로 강한 주장을 펴면서 창계는 사후에도 소론계로 분류되어 그의 학문과 사상이 크게 현양되지 못하는 불행도 겪게 되었다.
# 농암 김창협의 창계 옹호
‘병제설(兵制說)’을 짓고, 호포(戶布)의 문제점을 지적한 상소를 올린 우국의 구도자 창계를 누구보다 이해해주고 옹호해준 사람은 노론계의 거물 학자 농암 김창협이었다. 청음 김상헌의 증손자로,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로, 영의정 김창집의 아우로 안동 김씨 벌열의 후예로 예조판서에 대제학에 오른 농암은 소년 시절에 서로 만난 창계의 죽마고우였다. 장인인 이단상의 제자요 처남인 이희조의 친구이던 창계였기에 처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정말로 다정한 학우요 지기지우였다.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창계가 세상을 뜨자 농암은 울면서 제문과 만사를 지어 바치고, 뒷날 ‘창계집’을 간행하자 서문을 지어 그의 탁월한 문장과 학문을 찬양하고 성리학의 높은 수준에 정곡을 찔러 분명하게 해설해 주었다. 농암은 창계의 인품과 학문을 글자 여덟자로 압축해서 설명했다. ‘소견자대 소존자실(所見者大 所存者實)’, 즉 ‘관찰한 바는 크고 간직한 바는 실(實)하다’라는 말은 한 사람의 학문 업적에 대한 평가로는 더할 수 없는 찬양의 말이다.
농암 김창협의 아우 삼연 김창흡도 대단한 명성의 학자였는데 창계를 높이 평가했고 영의정 남구만, 영의정 최석정 등도 모두 그의 인품과 학문을 찬양하면서 짧은 삶에 한없이 애석한 뜻을 표해 마지않았다. 왕조실록에도 그의 졸기(卒記)를 통해 경전에 깊은 연구가 있었고 임금을 보도(輔導)함에 큰 공이 있는 강설을 했다는 평가를 했다.
# 창계의 유적지를 찾아서
지난 8월 하순 우리 일행은 창계 임영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더위도 한창인데 국지성 집중호우가 쏟아져 여행길은 막막했지만, 천우신조인지 억수로 쏟아지던 비도 유적지에 이르면 그쳐서 탐방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우리는 창계의 후손 임형택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아래의 ‘창계서원’을 찾았다. 창계가 세상을 떠난 16년 뒤인 1711년 고향인 회진 마을에 후학들이 창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계서원을 건립했다. 그러나 회진에는 그 서원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그 서원은 1767년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면 가운리의 선산 아래로 옮겼고 그 서원은 1868년 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말았다. 창계가 세상을 떠난 304년 뒤인 1999년에 마침내 후손들과 유림들의 힘으로 가운리 옛 서원터에 오늘의 창계서원이 복원되었다.
가운리의 신걸산은 나주임씨의 세장지(世葬地)다. 귀래정 임붕, 백호 임제 등 임씨의 현조(顯祖)들의 묘소가 즐비하고 영성각(永成閣)이라는 제실(祭室)이 높다랗게 서 있다. 그 입구에는 창계의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이조판서에 홍문관·예문관을 겸한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의 글로 최근의 명필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영성각 뒤로 창계사(滄溪祠)라는 신실이 있고 그 곁에는 매계영당(梅溪影堂)이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님을 못 잊고 청도 군수 시절에 형님 창계의 문집을 간행했고, 창계 사후의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해준 창계의 아우 매계(梅溪) 임정(林淨)의 영정을 모신 곳이 바로 매계의 영당이다. 매계 임정의 노력이 없었다면 창계의 사후 일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형님에 그런 아우가 있었음은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형제의 정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창계의 묘소는 애초에 나주에서 가까운 함평 땅에 모셔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오늘의 묘소가 있는 영암군 금정면 월평리 학송마을의 뒷산에 이장하여 300년이 가깝도록 거기에 계신다, 형님을 위해서 온 정성을 바친 아우 매계의 공이 보이듯, 창계 묘소 앞의 빗돌은 중국에서 구입한 것인데, 아우 매계가 빗돌만 구해놓고 세우지 못했던 것을 뒤에 후손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빗돌의 질이 너무 좋아,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새 빗돌처럼 완전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도를 구하고 진리만 찾으며 사느라, 벼슬도 버리고 부(富)도 멀리했던 창계의 성품대로 묘소도 소박하고 단아했다. 한창 묘소에 풀이 우거져 있을 때이건만 우리 일행이 찾아간다는 이야기에, 후손들이 동원되어 말끔하게 벌초한 모습에서 후손들의 따스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300년이 지났어도 후손들에게 창계의 피는 흐르고 있고, 도와 진리가 묻혀서 세상은 온통 인륜이 망가진 현실이지만, 창계가 실천하려고 밝혀 둔 인륜의 정당한 도리와 공정한 세상의 삶은 그의 저서에 그대로 살아있다.
호남의 학자로 고봉 기대승과 한말의 노사 기정진 사이에 호남의 학맥을 이어준 대표적 학자가 창계 임영이다. 그만한 학자의 유적지는 초라했고, 그만한 학자에 대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분에 대한 기념사업 하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세상이 이렇게 야박해서야 되겠는가. 고관대작도 초개처럼 버리고 학문과 진리, 도와 인생의 원리만 밝히며 살았던 창계. 그에 대한 업적을 현양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나기만 빌고 빌 뿐이다.
뛰어난 시인으로, 높은 수준의 학자로, 탁월한 정치가로 모두에게서 칭송을 받았던 조선의 영의정 사암(思菴) 박순(朴淳:1523~89)을 요즘 기억하는 사람은 너무 적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의 역사적 평가는 어떠했고, 그가 높은 수준의 학자나 정치가들에게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살펴보자. 우선 조선 500년의 정사(正史)인 왕조실록부터 읽어보자. 선조수정실록 1589년 음력 7월21일의 기록이다.
“전 의정부 영의정 박순이 세상을 떠났다. 박순의 자(字)는 화숙(和叔)이며 호는 사암(思菴)이다. 순은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화평스러워 모난 점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부터 화담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웠고 퇴계 이황과도 교류했다. 이황이 항상 칭찬하기를 ‘박순과 상대하다보면 한 가닥의 맑은 얼음을 대한 것 같이 정신이 상쾌해짐을 깨닫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 잘하기로 이름을 날렸다. 명종 임금이 친히 과거시험을 보인다기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임금은 그를 큰 인물로 여기고 아주 중요하게 대접하였다. 그래서 박순이 관각(館閣)에 근무하면서 권신(權臣)들의 의견을 거슬러서 중벌에 처하려는 논의가 있었을 때 파면으로 그칠 수 있었다. 뒷날에 다시 발탁되어 두 사람의 권신(윤원형·이량)을 탄핵하여 쫓아내고나서야 선비들의 주장이 펼칠 수 있었고, 조정이 숙청되어 박순은 착한 무리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14년 동안 정승의 지위에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에게 무거운 신망을 얻고 있었지만 임금에게 건의하여 밝혀낸 것이 많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박순은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에는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면서 전적으로 어진 이를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힘껏 추천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합해 나라를 구하려 했다. 동서분당에 이르러 박순이 이이와 성혼의 편을 든다고 무거운 탄핵을 받으며 간사한 사람이라고 지목받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세 사람은 얼굴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임금은 ‘착한 부류끼리 상종함이 도(道)에 무슨 손상이 있겠느냐’라고 무시해 버렸다. 박순은 이미 은퇴했으나 임금은 다시 등용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자 나이 겨우 67세였으니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박순은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한(漢)이나 당(唐)나라의 격과 법도를 따르려 하였으며, 더욱이 시에 뛰어나 한 시대의 시인 종주(宗主)가 되었다. 이른바 3당 시인이라 칭찬받던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은 모두 그의 문인이었으니, 이때로부터 문체가 크게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암집(思菴集)’이 세상에 나와 있다.
이런 긴 기록이 사암 박순의 졸기(卒記)로 왕조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조목조목 분석해보면 사암의 일생과 그의 업적의 대강은 모두 열거된 셈이다. 명종(明宗)의 친시(親試)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고, 어린 시절부터 글 잘한다는 문명이 나서 세상에 이름이 크게 났고,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의 지위에 올라, 당대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논했기에 퇴계로부터 ‘맑은 얼음(淸氷)’과 같은 인품이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윤원형·이량을 퇴출시킨 곧은 신하
중종 때부터 시작된 사화(士禍). 뛰어난 선비들이 무참히 죽어갔고 귀양으로 내쳐진 사화. 정암 조광조 등의 대학자들이 무참히 죽어간 기묘사화는 그 대표적인 참극이다. 인종이 재위 8개월에 세상을 뜨고 어린 명종이 등극하자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패악한 정치가 모든 백성들의 눈물만 흐르게 하였다. 이른바 인종의 외척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척 윤원형(尹元衡)을 대윤과 소윤으로 부르며 이들이 싸우다가 모든 권력이 문정왕후의 친정 형제이던 윤원형에 넘어가면서 권력의 독재로 세상은 패악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명종은 자신의 외숙인 윤원형의 횡포를 막아보려고 왕비 심씨의 외숙인 이량(李樑)을 등용하였으나 이량은 윤원형보다 더욱 심한 학정을 베풀어 세상은 더 비참해졌다. 당년 43세의 사암 박순은 대사간(大司諫)의 지위에 오르자 당대의 직신(直臣)이자 대사헌(大司憲)의 지위에 있던 이탁(李鐸:1509~76)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양사(兩司)합동으로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늘을 찌르던 윤원형의 권력에 맞서 그를 탄핵한 사암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직위에 죽겠다(挽回世道者 吾責也 死職耳)”라는 대담한 각오 없이는 감행하기 어려운 엄혹한 시기가 그때였다. 한 번의 상소로 되지 않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첫번째의 상소는 을축년(1565년) 음력 8월3일이었는데 두번째 상소는 8월14일이었으니 11일 만이다. 다시 상세하게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낱낱이 열거하여 밝히니 윤원형의 생질인 명종도 어찌할 수 없게 되어 끝내 그를 퇴출시킬 수 있었다. 이량도 그런 방법으로 쫓아내고 마침내 윤원형에게 빌붙어 온갖 비리를 감행하던 정승 심통원(沈通源)까지 퇴출시키자 비로소 정부가 숙청되고 선비들이 사기가 앙양되어 조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남에서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에게 벼슬이 다시 내려지고 대곡 성대운, 고봉 기대승이나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이 발탁되면서 착한 선비들이 조정으로 들어오자 사암 박순은 마침내 착한 무리(善類)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승 14년
14년 동안 정승의 지위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대사간·대사헌, 이른바 간쟁기관(諫諍機關)의 장으로 있을 때에는 그처럼 당당하던 사암도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는 자신이 인정했던 대로 경국제세의 통치능력은 부족했던 때문인지 큰 정책의 건의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했던 바와 같이 ‘어진 이를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함(薦賢讓能)’에는 뛰어나 율곡이나 우계 같은 대학자들이 나라에 봉사할 기회를 주었고, 당대의 어진 신하들이 사암의 추천으로 나라를 위해서 일할 기회를 가졌다.
▲대제학의 지위를 퇴계에게 양보
선조수정실록 원년(1568) 음력 8월 초하루의 기록을 보면 퇴계 이황이 홍문관 겸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야말로 사암 박순이 어떤 인물인가를 그냥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이황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라는 기사에 이어 “이때에 박순이 대제학이 되자 이황은 제학(提學)으로 있었는데 박순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높은 나이의 대석학이 다음 자리의 벼슬에 있고 제가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한 사람으로 감히 윗자리에 있음은 합당하지 않으니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런 임명이 있었다. 이황도 다시 힘껏 사양하여 다시 교체되어 사암이 대제학이 되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참으로 아름다운 역사의 하나가 바로 그 사건이다. 지위야 정승의 아래이지만 만인이 선호하는 벼슬이 대제학이 아닌가. 그런 벼슬을 흔쾌히 선배 학자에게 양보할 줄 알았던 사람은 분명히 정치사의 한 획을 긋는 선비임에 분명했다.
▲공정하게 조정하려다 당인으로 몰리다
선조 8년에 일어난 동인과 서인의 분당은 조선을 당쟁국가로 비난받을 소지를 제공하였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추천하고 권장하여 나라를 건지게 하려 했던 사암은 율곡의 친구인 송강 정철과 함께 싸잡아 서인(西人)으로 몰려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율곡이 세상을 떠나고, 우계가 귀향하자 사암은 조정에서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동인(東人)의 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 등은 사암만 조정에서 나가면 권력을 손에 쥔다고 여기고 온갖 방법으로 사암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지친 사암은 마침내 세상에서 물러나 은거하기를 결행했으니 외동딸이 사는 경기도 포천의 백운계곡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14년의 정승 생활도 마지막 겸하던 병조판서까지 모두 버리고 사위 이희간(李希幹:뒤에 군수 역임)이 살던 곳으로 찾아간다. 세상을 뜨기 4년 전인 63세 때의 일이다.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라는 곳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산수가 아름답기로 세상에 이름난 곳이다. 창옥병(蒼玉屛)이라는 절벽이 백운계곡을 휘감고 있으며 맑고 깨끗한 백운계곡의 물은 바위를 돌고 돌며 세상의 근심을 잊게 해주는 곳이다. 이곳에는 당대의 시인 봉래 양사언(楊士彦) 형제들이 시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며, 당대 명필 석봉 한호가 찾아오는 곳이어서 절벽에 많은 글씨를 써서 새기고 세상을 관조하며 사암은 말년을 보냈다.
바로 자신이 마련한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에서 거처하면서 그 곁에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우들이 모여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적자가 없는 사암은 서자가 있었으나 그를 믿지 않고(뒷날 서자 박응서는 ‘칠서의 난’에 희생된다) 외동딸과 사위에게 의지하면서 포천에서 살았다. 거기에 묘소가 있고, 옥병서원(玉屛書院)을 후학들이 세워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도 우뚝 서서 그의 일생을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옥병서원. 사진작가/황헌만 |
“전 의정부 영의정 박순이 세상을 떠났다. 박순의 자(字)는 화숙(和叔)이며 호는 사암(思菴)이다. 순은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화평스러워 모난 점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부터 화담 서경덕에게 학문을 배웠고 퇴계 이황과도 교류했다. 이황이 항상 칭찬하기를 ‘박순과 상대하다보면 한 가닥의 맑은 얼음을 대한 것 같이 정신이 상쾌해짐을 깨닫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 잘하기로 이름을 날렸다. 명종 임금이 친히 과거시험을 보인다기에 응시하여 합격하자, 임금은 그를 큰 인물로 여기고 아주 중요하게 대접하였다. 그래서 박순이 관각(館閣)에 근무하면서 권신(權臣)들의 의견을 거슬러서 중벌에 처하려는 논의가 있었을 때 파면으로 그칠 수 있었다. 뒷날에 다시 발탁되어 두 사람의 권신(윤원형·이량)을 탄핵하여 쫓아내고나서야 선비들의 주장이 펼칠 수 있었고, 조정이 숙청되어 박순은 착한 무리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14년 동안 정승의 지위에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에게 무거운 신망을 얻고 있었지만 임금에게 건의하여 밝혀낸 것이 많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박순은 스스로 경세제민(經世濟民)에는 재주가 부족하다 여기면서 전적으로 어진 이를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힘껏 추천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합해 나라를 구하려 했다. 동서분당에 이르러 박순이 이이와 성혼의 편을 든다고 무거운 탄핵을 받으며 간사한 사람이라고 지목받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세 사람은 얼굴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임금은 ‘착한 부류끼리 상종함이 도(道)에 무슨 손상이 있겠느냐’라고 무시해 버렸다. 박순은 이미 은퇴했으나 임금은 다시 등용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자 나이 겨우 67세였으니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박순은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한(漢)이나 당(唐)나라의 격과 법도를 따르려 하였으며, 더욱이 시에 뛰어나 한 시대의 시인 종주(宗主)가 되었다. 이른바 3당 시인이라 칭찬받던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은 모두 그의 문인이었으니, 이때로부터 문체가 크게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암집(思菴集)’이 세상에 나와 있다.
이런 긴 기록이 사암 박순의 졸기(卒記)로 왕조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조목조목 분석해보면 사암의 일생과 그의 업적의 대강은 모두 열거된 셈이다. 명종(明宗)의 친시(親試)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고, 어린 시절부터 글 잘한다는 문명이 나서 세상에 이름이 크게 났고,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의 지위에 올라, 당대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논했기에 퇴계로부터 ‘맑은 얼음(淸氷)’과 같은 인품이라는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윤원형·이량을 퇴출시킨 곧은 신하
중종 때부터 시작된 사화(士禍). 뛰어난 선비들이 무참히 죽어갔고 귀양으로 내쳐진 사화. 정암 조광조 등의 대학자들이 무참히 죽어간 기묘사화는 그 대표적인 참극이다. 인종이 재위 8개월에 세상을 뜨고 어린 명종이 등극하자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패악한 정치가 모든 백성들의 눈물만 흐르게 하였다. 이른바 인종의 외척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척 윤원형(尹元衡)을 대윤과 소윤으로 부르며 이들이 싸우다가 모든 권력이 문정왕후의 친정 형제이던 윤원형에 넘어가면서 권력의 독재로 세상은 패악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사암 박순의 신도비.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사진 위) 사암 박순과 부인 고씨의 묘소. (아래) |
하늘을 찌르던 윤원형의 권력에 맞서 그를 탄핵한 사암의 용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세도를 만회하는 일은 나의 책임이다. 직위에 죽겠다(挽回世道者 吾責也 死職耳)”라는 대담한 각오 없이는 감행하기 어려운 엄혹한 시기가 그때였다. 한 번의 상소로 되지 않자 다시 상소를 올렸다. 첫번째의 상소는 을축년(1565년) 음력 8월3일이었는데 두번째 상소는 8월14일이었으니 11일 만이다. 다시 상세하게 윤원형의 부정과 비리를 낱낱이 열거하여 밝히니 윤원형의 생질인 명종도 어찌할 수 없게 되어 끝내 그를 퇴출시킬 수 있었다. 이량도 그런 방법으로 쫓아내고 마침내 윤원형에게 빌붙어 온갖 비리를 감행하던 정승 심통원(沈通源)까지 퇴출시키자 비로소 정부가 숙청되고 선비들이 사기가 앙양되어 조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영남에서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에게 벼슬이 다시 내려지고 대곡 성대운, 고봉 기대승이나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이 발탁되면서 착한 선비들이 조정으로 들어오자 사암 박순은 마침내 착한 무리(善類)들의 종주(宗主)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승 14년
14년 동안 정승의 지위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대사간·대사헌, 이른바 간쟁기관(諫諍機關)의 장으로 있을 때에는 그처럼 당당하던 사암도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는 자신이 인정했던 대로 경국제세의 통치능력은 부족했던 때문인지 큰 정책의 건의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했던 바와 같이 ‘어진 이를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양보함(薦賢讓能)’에는 뛰어나 율곡이나 우계 같은 대학자들이 나라에 봉사할 기회를 주었고, 당대의 어진 신하들이 사암의 추천으로 나라를 위해서 일할 기회를 가졌다.
▲대제학의 지위를 퇴계에게 양보
선조수정실록 원년(1568) 음력 8월 초하루의 기록을 보면 퇴계 이황이 홍문관 겸 예문관 대제학에 오르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야말로 사암 박순이 어떤 인물인가를 그냥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이황으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게 하다”라는 기사에 이어 “이때에 박순이 대제학이 되자 이황은 제학(提學)으로 있었는데 박순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높은 나이의 대석학이 다음 자리의 벼슬에 있고 제가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부족한 사람으로 감히 윗자리에 있음은 합당하지 않으니 서로의 자리를 바꾸어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이런 임명이 있었다. 이황도 다시 힘껏 사양하여 다시 교체되어 사암이 대제학이 되었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참으로 아름다운 역사의 하나가 바로 그 사건이다. 지위야 정승의 아래이지만 만인이 선호하는 벼슬이 대제학이 아닌가. 그런 벼슬을 흔쾌히 선배 학자에게 양보할 줄 알았던 사람은 분명히 정치사의 한 획을 긋는 선비임에 분명했다.
▲공정하게 조정하려다 당인으로 몰리다
선조 8년에 일어난 동인과 서인의 분당은 조선을 당쟁국가로 비난받을 소지를 제공하였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추천하고 권장하여 나라를 건지게 하려 했던 사암은 율곡의 친구인 송강 정철과 함께 싸잡아 서인(西人)으로 몰려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율곡이 세상을 떠나고, 우계가 귀향하자 사암은 조정에서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동인(東人)의 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 등은 사암만 조정에서 나가면 권력을 손에 쥔다고 여기고 온갖 방법으로 사암을 공격하고 나섰다. 이에 지친 사암은 마침내 세상에서 물러나 은거하기를 결행했으니 외동딸이 사는 경기도 포천의 백운계곡으로 은퇴하고 말았다. 14년의 정승 생활도 마지막 겸하던 병조판서까지 모두 버리고 사위 이희간(李希幹:뒤에 군수 역임)이 살던 곳으로 찾아간다. 세상을 뜨기 4년 전인 63세 때의 일이다.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라는 곳이다. 이곳은 옛날부터 산수가 아름답기로 세상에 이름난 곳이다. 창옥병(蒼玉屛)이라는 절벽이 백운계곡을 휘감고 있으며 맑고 깨끗한 백운계곡의 물은 바위를 돌고 돌며 세상의 근심을 잊게 해주는 곳이다. 이곳에는 당대의 시인 봉래 양사언(楊士彦) 형제들이 시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며, 당대 명필 석봉 한호가 찾아오는 곳이어서 절벽에 많은 글씨를 써서 새기고 세상을 관조하며 사암은 말년을 보냈다.
바로 자신이 마련한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에서 거처하면서 그 곁에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문우들이 모여들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적자가 없는 사암은 서자가 있었으나 그를 믿지 않고(뒷날 서자 박응서는 ‘칠서의 난’에 희생된다) 외동딸과 사위에게 의지하면서 포천에서 살았다. 거기에 묘소가 있고, 옥병서원(玉屛書院)을 후학들이 세워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도 우뚝 서서 그의 일생을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시인 정치가 박순 업적과 유적지(下)
-시비선악 명쾌한 정승-
사암 박순의 영정. |
임금의 외숙이자 간신이던 윤원형, 왕비의 외숙인 권력자 이량, 두 권신(權臣)을 추방한 용기의 사나이 박순은 선조대왕의 믿음직한 대신이었다. 선조대왕이 박순을 칭찬한 말에, ‘송균절조 수월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이라는 대찬사를 거리낌없이 말했다. 소나무나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이나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이었으리라. 한 신하에게 바치는 찬사로는 대단한 내용이다. 그만큼 지절이 높았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뜻이었다. 희대의 정치가 백사 이항복은 사암의 시장(諡狀)에서 “옛말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공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말하여 위대한 그의 용기를 찬양했다.
# 청음 김상헌의 박순론
어린 시절 사암 박순이 살던 집의 이웃에 살면서 영의정으로 조정에 드나들던 사암의 풍모를 목격하면서 그의 제자가 되고 싶었는데 세상을 일찍 떠나 그러할 기회를 갖지 못해 안타깝다고 탄식했던 청음 김상헌은 ‘사암집’의 서문을 썼다. 사암이 세상을 뜬 지 56년 만에 병난에 잃고 흩어진 글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었는데, 약간의 글이지만 시는 제법 모아졌고, 윤원형을 탄핵한 그 멋지고 용기 있는 상소문 두 편이 실려 있는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면서 사암의 인물평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사암 정승은 조선 제일의 시인이라던 눌재 박상(訥齋 朴祥)의 조카로, 한성 우윤이자 시인이던 눌재의 아우 육봉 박우(六峰 朴祐)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상은 기묘명현이고 박우는 장원급제의 문사였으니 우선 그 가계가 훌륭하다고 했다. 젊어서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동료학자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수준 높은 학자였다고 했다. 간흉(奸兇)들이 왕권을 농락할 때 그들을 쫓아낸 직절(直節)의 신하였다고 했다. 퇴계·율곡·우계 등 당대의 학자들이 가장 존숭하는 당세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찬한 사람이라고 했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면 가장 접반을 잘했기에 사암을 제대로 알아보고 ‘송나라 인물에 당나라의 시풍을 지닌 인물’이라고 칭찬했으니 조선의 인물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40년 가까운 벼슬살이에 이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하고 14년의 정승 생활에 모든 녹봉은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희사하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청렴결백하기가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다. 뛰어난 문장과 시로 일세의 맹주(盟主)였으나 자신의 자랑은 일절 하지 않았다. 지은 글이나 시마다 인구에 회자하며 온 세상에 전송되었으나 자신은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하는 선비나 학자는 극구 천거해서 좋은 벼슬과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즉 ‘호사석재(好士惜才)’, 선비를 좋아하고 재주를 아끼는 정신이 그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간사한 벼슬아치는 물리치고 어진 신하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에 늘 걱정을 아끼지 않았고 국가의 안위만 염려하여 바른 말과 곧은 마음으로 임금을 섬겨 모든 음험한 벼슬아치를 내쫓고 시비선악에 그처럼 명쾌한 정승이 없었다고 했다. 도(道)가 행해지지 못하고 올리는 상소가 시행되지 못함을 알자 관복을 벗어던지고 높은 정승의 지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계곡에 숨었으니 그만한 염퇴(恬退 : 미련 없이 물러남)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찬양했다.
김상헌의 결론은 이렇다. 이러한 자신의 주장은 모든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다 아는 바고 세상의 남녀노소나 귀천이 다 아는 바다. 그러니 선생은 하늘과 땅 사이의 기운이시고 국가의 보배이며 사림의 종장(宗匠)이라고 총평했다. 청음이 누구인가. 저 병자호란에 척화의 대표자로 심양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선민족의 혼을 끝까지 지킨 당대의 정승이자 대제학이 아니었던가.
# 태생지는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 청음 김상헌의 박순론
어린 시절 사암 박순이 살던 집의 이웃에 살면서 영의정으로 조정에 드나들던 사암의 풍모를 목격하면서 그의 제자가 되고 싶었는데 세상을 일찍 떠나 그러할 기회를 갖지 못해 안타깝다고 탄식했던 청음 김상헌은 ‘사암집’의 서문을 썼다. 사암이 세상을 뜬 지 56년 만에 병난에 잃고 흩어진 글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었는데, 약간의 글이지만 시는 제법 모아졌고, 윤원형을 탄핵한 그 멋지고 용기 있는 상소문 두 편이 실려 있는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면서 사암의 인물평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사암 정승은 조선 제일의 시인이라던 눌재 박상(訥齋 朴祥)의 조카로, 한성 우윤이자 시인이던 눌재의 아우 육봉 박우(六峰 朴祐)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상은 기묘명현이고 박우는 장원급제의 문사였으니 우선 그 가계가 훌륭하다고 했다. 젊어서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동료학자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수준 높은 학자였다고 했다. 간흉(奸兇)들이 왕권을 농락할 때 그들을 쫓아낸 직절(直節)의 신하였다고 했다. 퇴계·율곡·우계 등 당대의 학자들이 가장 존숭하는 당세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찬한 사람이라고 했다. 중국의 사신들이 오면 가장 접반을 잘했기에 사암을 제대로 알아보고 ‘송나라 인물에 당나라의 시풍을 지닌 인물’이라고 칭찬했으니 조선의 인물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40년 가까운 벼슬살이에 이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하고 14년의 정승 생활에 모든 녹봉은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희사하고 가진 것 하나 없이 청렴결백하기가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했다. 뛰어난 문장과 시로 일세의 맹주(盟主)였으나 자신의 자랑은 일절 하지 않았다. 지은 글이나 시마다 인구에 회자하며 온 세상에 전송되었으나 자신은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하는 선비나 학자는 극구 천거해서 좋은 벼슬과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즉 ‘호사석재(好士惜才)’, 선비를 좋아하고 재주를 아끼는 정신이 그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간사한 벼슬아치는 물리치고 어진 신하는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에 늘 걱정을 아끼지 않았고 국가의 안위만 염려하여 바른 말과 곧은 마음으로 임금을 섬겨 모든 음험한 벼슬아치를 내쫓고 시비선악에 그처럼 명쾌한 정승이 없었다고 했다. 도(道)가 행해지지 못하고 올리는 상소가 시행되지 못함을 알자 관복을 벗어던지고 높은 정승의 지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계곡에 숨었으니 그만한 염퇴(恬退 : 미련 없이 물러남)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찬양했다.
김상헌의 결론은 이렇다. 이러한 자신의 주장은 모든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다 아는 바고 세상의 남녀노소나 귀천이 다 아는 바다. 그러니 선생은 하늘과 땅 사이의 기운이시고 국가의 보배이며 사림의 종장(宗匠)이라고 총평했다. 청음이 누구인가. 저 병자호란에 척화의 대표자로 심양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조선민족의 혼을 끝까지 지킨 당대의 정승이자 대제학이 아니었던가.
# 태생지는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경기도 포천의 옥병서원 편액. |
이런 당대의 위인 사암의 혼은 어디서 태동했을까. 사암의 선대는 충주박씨로 개성에서 살았다. 조선왕조 개국 뒤에 서울에서 살았으나 난리를 피해 충청도의 공주와 회덕에 은거했다. 그 뒤 사암의 조부이자 눌재 박상의 아버지인 박지흥(朴智興)이 처가인 광주의 서씨(徐氏)마을에 정착하면서 광주 사람이 된다. 눌재의 아우 박우는 사암의 아버지로 나주로 장가들어 분가하면서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에서 살아가는데, 사암은 바로 거기에서 태어나 그곳이 바로 사암의 고향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 사암의 유적지이지만, 나무 하나가 제법 오래되어 사암을 아는 듯했고, 사암이 말을 탈 때 타고 내린 하마석 하나만 마당가에 흙에 묻혀 있었다. 그 집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 육봉 박우의 묘소가 있으니 그곳이 사암의 탄생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암집’을 보면 광주와 나주를 찾으면서 지은 시가 여러 편이 있는데, 벼슬 하면서 자주 성묘를 다니고 고향을 찾았던 기록이 있으니 전라도 사람임이 분명했다.
다만 적자의 후손이 없자 그 당시의 예대로 양자를 들이지 않고 외동딸이 시집간 포천을 낙향할 곳으로 삼아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은퇴하여 포천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마쳤기에 거기에 묘소가 있고 유적지가 있으며 서원이 세워져 있다.
# 당대 시단(詩壇)의 종주(宗主)
세상을 떠나자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기고 슬퍼했다는 사암. 문장은 한당(漢唐)의 품격을 되찾는 수준에 이르고 특히 시에 뛰어나 한 시대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니, 당대의 시인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문학사에서 널리 알려진 3당 시인이라던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이 바로 사암의 문하에서 공부한 시인이라는 것이 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사암의 많은 시에는 절창이 많기도 하지만, 유독 절창의 하나로 꼽히는 시는 ‘방조운백(訪曹雲伯)’이라는 시 2편이 있다. 그 첫째 시에
술 취해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醉睡仙家覺後疑
구름 낀 널따란 골짜기에 달이 지는군 白雲平壑月沈時
서둘러 혼자서 쭉쭉 뻗은 숲속으로 나오니 소然獨出脩林外
돌길의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듣더라
참으로 시인다운 시다. 얼마나 이 시가 유명했으면 한 때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朴宿鳥)’였다는 전설이 있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듣더라’의 자던 새의 구절이 너무나 좋아 ‘숙조’가 별명이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 허균의 사암 숭배
허균의 아버지는 유명한 초당 허엽이고 허균의 형이 하곡 허봉이다. 그들은 모두 동인으로 언제나 사암을 공격하던 정치의 반대파였다. 허봉이 유독 사암을 공격했는데, 그의 아우 허균은 ‘시화’에서 사암을 매우 존숭하는 마음을 보였다. 사암이 별세하자 수백편의 만시(輓詩)가 지어졌는데 그중에서 우계 성혼의 시(‘挽思菴’)가 절창이었다고 허균은 평했다.
세상 밖의 백운산은 깊고 또 깊더니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의 초가집 다시 찾기 어렵겠네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지붕 위에 뜬 삼경의 밝은 달은 拜鵑窩上三更月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어 준다네 應照先生一片心
세상 밖의 백운계곡으로 깊이 숨어버린 사암의 높은 염퇴(恬退)정신을 찬양하고 선생이 없는 초옥은 다시 찾기 힘들다면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했다. 뻐꾸기가 많은 그곳의 집을 ‘배견와’라 일컬었는데, 그 지붕 위의 밤중에 뜨는 달은 선생의 일편단심을 반영해주고 있다니 얼마나 청아한 시격인가. 시인으로, 은퇴한 노재상의 서거를 슬퍼한 내용이 흔적 없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다. 그래서 허균은 그 시가 최고의 절창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 쓸쓸하고 처량한 유적지
다만 적자의 후손이 없자 그 당시의 예대로 양자를 들이지 않고 외동딸이 시집간 포천을 낙향할 곳으로 삼아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은퇴하여 포천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마쳤기에 거기에 묘소가 있고 유적지가 있으며 서원이 세워져 있다.
# 당대 시단(詩壇)의 종주(宗主)
세상을 떠나자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기고 슬퍼했다는 사암. 문장은 한당(漢唐)의 품격을 되찾는 수준에 이르고 특히 시에 뛰어나 한 시대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니, 당대의 시인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문학사에서 널리 알려진 3당 시인이라던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 손곡 이달이 바로 사암의 문하에서 공부한 시인이라는 것이 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사암의 많은 시에는 절창이 많기도 하지만, 유독 절창의 하나로 꼽히는 시는 ‘방조운백(訪曹雲伯)’이라는 시 2편이 있다. 그 첫째 시에
술 취해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醉睡仙家覺後疑
구름 낀 널따란 골짜기에 달이 지는군 白雲平壑月沈時
서둘러 혼자서 쭉쭉 뻗은 숲속으로 나오니 소然獨出脩林外
돌길의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듣더라
참으로 시인다운 시다. 얼마나 이 시가 유명했으면 한 때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朴宿鳥)’였다는 전설이 있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듣더라’의 자던 새의 구절이 너무나 좋아 ‘숙조’가 별명이 될 정도였다는 것이다.
# 허균의 사암 숭배
허균의 아버지는 유명한 초당 허엽이고 허균의 형이 하곡 허봉이다. 그들은 모두 동인으로 언제나 사암을 공격하던 정치의 반대파였다. 허봉이 유독 사암을 공격했는데, 그의 아우 허균은 ‘시화’에서 사암을 매우 존숭하는 마음을 보였다. 사암이 별세하자 수백편의 만시(輓詩)가 지어졌는데 그중에서 우계 성혼의 시(‘挽思菴’)가 절창이었다고 허균은 평했다.
세상 밖의 백운산은 깊고 또 깊더니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의 초가집 다시 찾기 어렵겠네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 지붕 위에 뜬 삼경의 밝은 달은 拜鵑窩上三更月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어 준다네 應照先生一片心
세상 밖의 백운계곡으로 깊이 숨어버린 사암의 높은 염퇴(恬退)정신을 찬양하고 선생이 없는 초옥은 다시 찾기 힘들다면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했다. 뻐꾸기가 많은 그곳의 집을 ‘배견와’라 일컬었는데, 그 지붕 위의 밤중에 뜨는 달은 선생의 일편단심을 반영해주고 있다니 얼마나 청아한 시격인가. 시인으로, 은퇴한 노재상의 서거를 슬퍼한 내용이 흔적 없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시다. 그래서 허균은 그 시가 최고의 절창이라고 칭했을 것이다.
# 쓸쓸하고 처량한 유적지
사암 박순이 말을 타고 내렸다는 하마석. <사진작가 황헌만> |
우리가 찾은 포천의 창수면 사암 유적지는 외손마저 혈맥이 끊긴 탓인지 덩실한 묘소나 우뚝 솟은 신도비, 넉넉한 모습의 서원인 ‘옥병서원’의 건물이 있어도 어딘가 쓸쓸함이 서려있다. 다행히 포천의 유림들이 해마다 서원에 제향을 올리고 충주박씨 종친회에서 묘소에 시제를 지낸다니 그것만이라도 덜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한 학문과 문학, 그만한 정치가로서의 대인다운 사암의 후사로는 그래도 처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민족적 인물이나 위인에 대해서는 나라가 좀 나서서 유적지도 관리하고 기념사업도 펼쳐야 하지 않을까. 너무나 야박한 세태에 아픈 마음을 달래기 힘들었다. 사암이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사암의 유물이나 유저는 대부분 사라졌으며, 후손도 빈약하여 챙길 수 없었는데, 더구나 6·25 전쟁은 그곳 포천의 창수면 일대가 격전지여서 아무것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니 더욱 비통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다행히 외증손자 때에 이르러 겨우 모은 유작을 정리해 ‘사암집’으로 간행했고, 1850년쯤인 19세기에 와서야 전라도 감영인 전주에서 목판으로 증보로 간행하여 현재까지 전해지니 그것만이라도 다행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당대의 제일 인물, 14년의 정승, 시단의 종주, 당나라 풍의 시를 복원한 시인. 그 큰 인물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이조판서·대제학·영의정의 높은 벼슬에 문학과 학문에 깊은 조예까지 인정받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임금은 내렸건만, 그의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그를 잊어서야 되겠는가. 국민적 호응으로 사암을 기리고 기념하는 사업이 활성화되기만 기대해본다.
당대의 제일 인물, 14년의 정승, 시단의 종주, 당나라 풍의 시를 복원한 시인. 그 큰 인물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이조판서·대제학·영의정의 높은 벼슬에 문학과 학문에 깊은 조예까지 인정받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임금은 내렸건만, 그의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그를 잊어서야 되겠는가. 국민적 호응으로 사암을 기리고 기념하는 사업이 활성화되기만 기대해본다.
우국의 구도자 창계 임영의 삶과 사상(上)
-하루 7번 자신을 돌아보다-
# 8세에 시를 지은 신동(神童)
큰 빗방울 연잎에 떨어지니 大雨落蓮葉
하얀 옥구슬 푸른 쟁반에 구르네 白璧轉靑盤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에 있는 창계서원 신도비. |
창계 임영(1649~1696)이 여덟살 때에 지은 시다. 이런 시를 읽어보고 신동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임영은 외가가 서울에 있었다. 임천(林川) 조씨로 인조 때에 병조참판 벼슬을 지낸 데다 학문까지 높아 당대에 큰 명성을 날리던 죽음 조희일(竹陰 趙希逸)의 아들에 근수헌 조석형(近水軒 趙錫馨)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임영의 외조부였다. 그의 집이 서울의 장의동(壯義洞 : 지금의 북악산 밑 경복고 일대)에 있었고, 임영은 거기에서 인조26년에 태어났다.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글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벼슬도 승지에 오른 운강 조원(雲江 趙瑗)은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峯)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분인데, 그의 아들이 죽음이고, 죽음의 아들이 근수헌이다. 이 3대가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조선의 명가로 그만한 집안이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으니, 그런 외가의 피를 이은 임영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드러냈다고 한다.
태어난 곳이야 서울이었지만 임영의 고향은 전라도 나주의 회진 마을이다. 지금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지만, 고려 때에는 회진 고을이었다. 관향이 나주이지만 임씨들을 회진 임씨라고 부르는데, 천재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고향이어서 세상에 더욱 이름을 날린 마을이다. 회진은 백호를 비롯한 시인이 많이 배출되어 ‘시점(詩店)’이라는 이칭도 있었다. 기묘사화 때의 귀래정 임붕(林鵬)은 승지의 벼슬을 지내고 크게 의리를 지켜 이름이 높던 분인데, 후손들이 연달아 높은 벼슬에 오르고 시문에도 뛰어나 인물의 보고로 알려진 마을이었다. 백호는 곧 귀래정의 손자이고 귀래정의 후손인 임영은 백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이니 바로 당내(堂內)의 친족이었다.
귀래정 임붕 이후의 회진 임씨의 학문과 벼슬은 임영과 같은 학자를 길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임붕의 손자로 백호는 물론 그의 사촌 아우 서(서)는 호가 석촌(石村)으로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는 당대의 문사였으며, 서의 아들 담은 문과에 급제후 이조판서에 올라 시호가 충익공이니 임영에게는 재종조(再從祖)가 된다. 할아버지 타는 상주목사를 지냈고 그의 아우로 임영의 종조할아버지인 위는 호가 동리(東里)인데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아 은일(隱逸)로 지평(持平)에 오른 당대의 학자였다. 임영은 소년시절에 대체로 그분의 슬하에서 학문을 익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 일유(一儒)는 학행으로 천거받아 여러 고을의 원을 지내며 높은 치적을 올린 이름난 선비며, 어머니 조씨도 이름난 가문의 따님으로 식견이 높은 분이어서 천재적인 임영은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시문에 뛰어나다는 명성을 얻었다.
문집에 실린 ‘영화(詠畵)’라는 제목의 시는 11세 때의 작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림을 보고 화제로 지은 것 같은데 시격이 뛰어나게 높아 보인다.
푸르고 푸른 큰 소나무 아래 蒼蒼長松下
그 사이에서 흰 구름이 솟는구나 白雲生其間
강가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 臨溪有釣客
아마도 부춘산의 강태공 아닐는지 恐是富春山
한 편의 시는 바로 한 폭의 그림이다. 11세 소년의 시로는 정말로 좋다. 7~8세 때에 글을 대부분 깨쳤고 한글까지 쓰고 읽을 줄 알아 신동에 값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 10대에 도(道)를 찾아 나서다
고관대작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여러 벼슬과 여러 곳의 고을살이를 했던 관계로 임영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임소를 따라다니느라 전국의 각처에서 두루 거주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향인 전라도 나주 회진에 터전을 두고 생활하였고 학문을 익혔지만, 역시 서울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주 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 때에 아버지의 명으로 당대의 학자 정관재 이단상(靜觀齋 李端相)의 문하에 들어가 돈독하게 도학(道學) 공부에 침잠한다. 월사 이정귀의 손자요, 백주 이명한의 아들인 정관재에게 학문을 익힌 임영은, 정관재의 소개로 18세에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 들어가 깊고 넓게 학문을 익혔다. 그 무렵에 정관재의 사위인 농암 김창협(金昌協)과 평생의 친구로 사귀게 되고, 정관재의 아들인 지촌 이희조(李喜朝)와도 죽마고우로 평생의 학문친구가 되었다. 높은 수준에 이른 학자로 명망이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당시의 학계 거물들인 우암 송시열이나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고 명재 윤증(尹拯)과도 많은 학문적 토론이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창계는 확실히 구도자로서의 공부하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일반 학자들과는 다르게 창계는 ‘칠성례(七省例)’와 ‘일방권점획례(日傍圈點劃例)’라는 특별한 의식을 정해놓고 매일매일 착실하게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칠성례란 글자의 뜻대로 일곱 차례 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인데, 자신을 깨우치고 반성할 자료가 되는 글이나 격언을 선정해놓고 하루에 일곱 차례인, 새벽·조반을 들기 전후·정오·석식 전후·잠들기 직전의 시간에 자기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일방권점획례란 자아의 반성과 자기비판을 계속하는 일이다. 매일 자신이 행하고 말한 일을 적어놓고 행한 일과 말을 자기 스스로 비판해보는 일이다. 했던 일이나 말이 양심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으면 동그라미를 치고,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획을 긋고, 잘한 일과 못한 일이 섞여 있으면 점을 찍어 표시해두고 자기 행위를 스스로 평가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학문태도를 견지하여 구도자로서의 명확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런 성찰이 계속되고 높은 수준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10대에 그의 학문은 뚜렷한 성과를 얻기에 이른다. 특히 자신의 내적 기반을 견실하게 닦은 뒤에 사회적 실천에 옮기려던 그의 공부와 수양의 자세는 성리학자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 18세에 진사과에 장원
창계의 벼슬살이는 화려했지만 벼슬에 종사한 기간은 매우 짧았다. 왕조실록에서 사관이 말했던 대로 ‘다퇴소진(多退少進)’, 즉 ‘물러남이야 많았지만 벼슬에 나아가기는 몇 차례 아니었다’라는 뜻이니, 그야말로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과에 장원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고, 23세에 학문이 익은 뒤에야 문과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이 내리면 사직소를 올려 자신의 간절한 우국충정을 토로하면서 벼슬은 사양하기 다반사였다. 애초에 부귀영달에는 뜻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학문의 진리를 밝히고 양심적인 선비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라는 우국의 마음만이 가슴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좋은 벼슬일수록 응하지 않고 사직소만 올렸다.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던 창계는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 퇴계와 율곡 선생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분들의 뜻을 세상에 밝히려는 내심으로 언제나 학문에 침잠하는 것이 그의 본령이었다. 더구나 창계가 활동하던 시기는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때이고 말년에는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의 당파가 격렬히 싸우던 때여서 정직한 선비가 마음 놓고 벼슬할 기회가 아니던 때였다. 숙종 임금 초년에는 더구나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여 서인계이던 창계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할 기회가 있었다. 27세에서 31세 때까지 5년간 강원도 통천에 은거하면서 마음껏 경전연구에 시간을 보냈고, 숙종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물러가자 32세 때부터 청요(淸要)의 벼슬이 연이어 내려졌다.
# 대제학의 물망에도 오르다
35세에서 38세 때까지 부모상을 치르고 나자 의정부 사인(舍人), 검상(檢詳), 승정원 동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고관의 벼슬이 내렸으나 취임하지는 않았고, 오직 임금과 경학을 강론하는 경연관으로 어전에 참석하여 높은 수준의 이론으로 임금을 계도한 공로가 있었다는 것이 사관의 평이었다. 얼마 뒤에는 이조참의·호조참의의 벼슬이 내리고 전라감사와 대사간·대사헌·개성유수·공조참판이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고, 개성유수에 마지못해 취임차 상경하여 모진 질병으로 숙종22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홍문관의 부제학이 내려졌을 때에는 조야에서 다음에는 대제학에 오르리라는 기대가 컸다는 것이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 48세의 짧은 생애
송시열, 송준길, 이단상, 박세채 등 스승의 문하에서 학문을 넓혔고, 김창협·이희조 등의 동료들과 강학을 통해 경전의 연구와 성리학의 깊은 공부를 한 시대의 석학이던 창계는 48세라는 너무나 짧은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익은 학문과 경륜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세상을 건질 벼슬살이도 역임해야 했건만 그러한 시간적 여유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단명에 아픔을 이기지 못했던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고향인 나주의 회진에 근거를 두고 학문을 연구하고 도를 구하는 일에 매진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일대의 많은 제자들이 운집하여 학단을 이룩함직도 했지만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이유로 스승에 버금갈 만한 제자들이 나오지 못한 점도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창계는 고봉 기대승 이후에 호남 출신으로는 최고의 학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짧은 생애를 마쳤으나, ‘창계집’이라는 27권 14책의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27권 중에서 10권이 사우들과 주고받은 서간문인데, 이 서간문은 바로 창계의 대표적인 논학문자(論學文字)로 그의 사상과 철학은 물론 성리학과 경학의 구체적인 이론이 그대로 담겨있어, 조선 유학자에서 혁혁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농암 김창협은 창계의 서간문에 대하여 “퇴계 이후에 드문 글”이라고 평했던 것이다.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글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벼슬도 승지에 오른 운강 조원(雲江 趙瑗)은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峯)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분인데, 그의 아들이 죽음이고, 죽음의 아들이 근수헌이다. 이 3대가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조선의 명가로 그만한 집안이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으니, 그런 외가의 피를 이은 임영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드러냈다고 한다.
태어난 곳이야 서울이었지만 임영의 고향은 전라도 나주의 회진 마을이다. 지금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지만, 고려 때에는 회진 고을이었다. 관향이 나주이지만 임씨들을 회진 임씨라고 부르는데, 천재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고향이어서 세상에 더욱 이름을 날린 마을이다. 회진은 백호를 비롯한 시인이 많이 배출되어 ‘시점(詩店)’이라는 이칭도 있었다. 기묘사화 때의 귀래정 임붕(林鵬)은 승지의 벼슬을 지내고 크게 의리를 지켜 이름이 높던 분인데, 후손들이 연달아 높은 벼슬에 오르고 시문에도 뛰어나 인물의 보고로 알려진 마을이었다. 백호는 곧 귀래정의 손자이고 귀래정의 후손인 임영은 백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이니 바로 당내(堂內)의 친족이었다.
귀래정 임붕 이후의 회진 임씨의 학문과 벼슬은 임영과 같은 학자를 길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임붕의 손자로 백호는 물론 그의 사촌 아우 서(서)는 호가 석촌(石村)으로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는 당대의 문사였으며, 서의 아들 담은 문과에 급제후 이조판서에 올라 시호가 충익공이니 임영에게는 재종조(再從祖)가 된다. 할아버지 타는 상주목사를 지냈고 그의 아우로 임영의 종조할아버지인 위는 호가 동리(東里)인데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아 은일(隱逸)로 지평(持平)에 오른 당대의 학자였다. 임영은 소년시절에 대체로 그분의 슬하에서 학문을 익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 일유(一儒)는 학행으로 천거받아 여러 고을의 원을 지내며 높은 치적을 올린 이름난 선비며, 어머니 조씨도 이름난 가문의 따님으로 식견이 높은 분이어서 천재적인 임영은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시문에 뛰어나다는 명성을 얻었다.
문집에 실린 ‘영화(詠畵)’라는 제목의 시는 11세 때의 작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림을 보고 화제로 지은 것 같은데 시격이 뛰어나게 높아 보인다.
푸르고 푸른 큰 소나무 아래 蒼蒼長松下
그 사이에서 흰 구름이 솟는구나 白雲生其間
강가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 臨溪有釣客
아마도 부춘산의 강태공 아닐는지 恐是富春山
한 편의 시는 바로 한 폭의 그림이다. 11세 소년의 시로는 정말로 좋다. 7~8세 때에 글을 대부분 깨쳤고 한글까지 쓰고 읽을 줄 알아 신동에 값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 10대에 도(道)를 찾아 나서다
고관대작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여러 벼슬과 여러 곳의 고을살이를 했던 관계로 임영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임소를 따라다니느라 전국의 각처에서 두루 거주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향인 전라도 나주 회진에 터전을 두고 생활하였고 학문을 익혔지만, 역시 서울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주 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 때에 아버지의 명으로 당대의 학자 정관재 이단상(靜觀齋 李端相)의 문하에 들어가 돈독하게 도학(道學) 공부에 침잠한다. 월사 이정귀의 손자요, 백주 이명한의 아들인 정관재에게 학문을 익힌 임영은, 정관재의 소개로 18세에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 들어가 깊고 넓게 학문을 익혔다. 그 무렵에 정관재의 사위인 농암 김창협(金昌協)과 평생의 친구로 사귀게 되고, 정관재의 아들인 지촌 이희조(李喜朝)와도 죽마고우로 평생의 학문친구가 되었다. 높은 수준에 이른 학자로 명망이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당시의 학계 거물들인 우암 송시열이나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고 명재 윤증(尹拯)과도 많은 학문적 토론이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창계는 확실히 구도자로서의 공부하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일반 학자들과는 다르게 창계는 ‘칠성례(七省例)’와 ‘일방권점획례(日傍圈點劃例)’라는 특별한 의식을 정해놓고 매일매일 착실하게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칠성례란 글자의 뜻대로 일곱 차례 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인데, 자신을 깨우치고 반성할 자료가 되는 글이나 격언을 선정해놓고 하루에 일곱 차례인, 새벽·조반을 들기 전후·정오·석식 전후·잠들기 직전의 시간에 자기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일방권점획례란 자아의 반성과 자기비판을 계속하는 일이다. 매일 자신이 행하고 말한 일을 적어놓고 행한 일과 말을 자기 스스로 비판해보는 일이다. 했던 일이나 말이 양심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으면 동그라미를 치고,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획을 긋고, 잘한 일과 못한 일이 섞여 있으면 점을 찍어 표시해두고 자기 행위를 스스로 평가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학문태도를 견지하여 구도자로서의 명확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런 성찰이 계속되고 높은 수준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10대에 그의 학문은 뚜렷한 성과를 얻기에 이른다. 특히 자신의 내적 기반을 견실하게 닦은 뒤에 사회적 실천에 옮기려던 그의 공부와 수양의 자세는 성리학자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 18세에 진사과에 장원
창계의 벼슬살이는 화려했지만 벼슬에 종사한 기간은 매우 짧았다. 왕조실록에서 사관이 말했던 대로 ‘다퇴소진(多退少進)’, 즉 ‘물러남이야 많았지만 벼슬에 나아가기는 몇 차례 아니었다’라는 뜻이니, 그야말로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과에 장원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고, 23세에 학문이 익은 뒤에야 문과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이 내리면 사직소를 올려 자신의 간절한 우국충정을 토로하면서 벼슬은 사양하기 다반사였다. 애초에 부귀영달에는 뜻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학문의 진리를 밝히고 양심적인 선비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라는 우국의 마음만이 가슴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좋은 벼슬일수록 응하지 않고 사직소만 올렸다.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던 창계는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 퇴계와 율곡 선생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분들의 뜻을 세상에 밝히려는 내심으로 언제나 학문에 침잠하는 것이 그의 본령이었다. 더구나 창계가 활동하던 시기는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때이고 말년에는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의 당파가 격렬히 싸우던 때여서 정직한 선비가 마음 놓고 벼슬할 기회가 아니던 때였다. 숙종 임금 초년에는 더구나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여 서인계이던 창계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할 기회가 있었다. 27세에서 31세 때까지 5년간 강원도 통천에 은거하면서 마음껏 경전연구에 시간을 보냈고, 숙종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물러가자 32세 때부터 청요(淸要)의 벼슬이 연이어 내려졌다.
# 대제학의 물망에도 오르다
35세에서 38세 때까지 부모상을 치르고 나자 의정부 사인(舍人), 검상(檢詳), 승정원 동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고관의 벼슬이 내렸으나 취임하지는 않았고, 오직 임금과 경학을 강론하는 경연관으로 어전에 참석하여 높은 수준의 이론으로 임금을 계도한 공로가 있었다는 것이 사관의 평이었다. 얼마 뒤에는 이조참의·호조참의의 벼슬이 내리고 전라감사와 대사간·대사헌·개성유수·공조참판이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고, 개성유수에 마지못해 취임차 상경하여 모진 질병으로 숙종22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홍문관의 부제학이 내려졌을 때에는 조야에서 다음에는 대제학에 오르리라는 기대가 컸다는 것이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 48세의 짧은 생애
송시열, 송준길, 이단상, 박세채 등 스승의 문하에서 학문을 넓혔고, 김창협·이희조 등의 동료들과 강학을 통해 경전의 연구와 성리학의 깊은 공부를 한 시대의 석학이던 창계는 48세라는 너무나 짧은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익은 학문과 경륜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세상을 건질 벼슬살이도 역임해야 했건만 그러한 시간적 여유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단명에 아픔을 이기지 못했던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고향인 나주의 회진에 근거를 두고 학문을 연구하고 도를 구하는 일에 매진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일대의 많은 제자들이 운집하여 학단을 이룩함직도 했지만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이유로 스승에 버금갈 만한 제자들이 나오지 못한 점도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창계는 고봉 기대승 이후에 호남 출신으로는 최고의 학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짧은 생애를 마쳤으나, ‘창계집’이라는 27권 14책의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27권 중에서 10권이 사우들과 주고받은 서간문인데, 이 서간문은 바로 창계의 대표적인 논학문자(論學文字)로 그의 사상과 철학은 물론 성리학과 경학의 구체적인 이론이 그대로 담겨있어, 조선 유학자에서 혁혁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농암 김창협은 창계의 서간문에 대하여 “퇴계 이후에 드문 글”이라고 평했던 것이다.
우국의 구도자 창계임영의 삶과 사상(下)
-벼슬도 버리고 道를 구하다-
나주임씨들의 제실이자 창계서원의 강당인 영성각(永成閣). 창계서원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아래에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
# 창랑대(滄浪臺)에서 학문연구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의 벼슬과 전라감사에 개성유수의 높은 지위도 모두 응하지 않고, 창계는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학문에만 전념하겠다고 고향인 회진고리(會津故里)에 ‘창랑대’라는 집을 짓고 다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러던 시절에 지은 시인 듯, ‘한중음(閒中吟)’이라는 7언 절구 다섯 수는 그의 시문학과 철리(哲理)가 겹해진 수준 높은 작품으로 그의 학문의 깊이가 어디쯤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인도 다름 아닌 인륜(人倫)을 다함이라
上聖無他只盡倫조금이라도 물러서고 미룬다면 바로 사람이 아닐세 재生退托卽非人
하늘의 분수나 사물의 이치 본디부터 흠결이 없나니 天分物理元無欠
다만 사(私)만 용납하지 않는다면 바로 참이라네但不容私便是眞
참(眞)을 추구하던 구도자 창계는 세상의 이치를 그렇게 밝혔다. 아무리 높은 성인이라도 일반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도리인 인륜(人倫), 즉 효제(孝弟)를 제대로 실천만 한다면 성인의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조금이라도 물러서고 우물거리면 사람이 아니라니 얼마나 독한 말인가. 성인으로 가는 구도의 길에는 공(公)이 있을 뿐이지 사(私)는 있을 수 없다. 사만 이기고 공으로만 간다면 거기에 바로 참이 있고 진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의 진지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그냥 짐작할 수 있다. 창랑대를 세우고 3년째에 세상을 떠났으니 더 긴 한세월이 있었다면 그의 경지가 어디쯤임을 알기도 어려웠으리라.
# 창계의 학문 세계
창계는 젊은 시절에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5인의 저술에서 대체(大體)에 관계되고 일용에 절실한 내용을 뽑아서 10여권으로 책자를 편찬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방문헌의 아름다움이 이에서 더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계획의 결과 ‘퇴계집’과 ‘율곡집’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독서차록(讀書箚錄)을 각각 남겼다. 그런 정도로 퇴계와 율곡에 대한 창계의 존모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창계는 학문의 길을 내면적 심화에서 찾았던 터여서 이(理)의 주체성과 적극성을 요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이발(理發)에 사상의 근거를 둔 퇴계 쪽으로 기울고 기발(氣發)의 율곡 논리에는 덜 찬성하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다(非氣則不能發), 발하게 하는 것은 기다(發之者氣也)”라는 율곡의 학설은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고칠 수 없다고 믿던 율곡의 후학들에게, 창계의 주리적(主理的) 입장은 결코 달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계의 그런 입장을 농암 김창협이나 절친한 친구이자 친척이던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는 찬성해 주었기 때문에 뒷날 ‘조선유학사’에서 현상윤(玄相允)은 창계·농암·졸수재 모두를 퇴계와 율곡의 이론을 절충했던 ‘절충파’라고 명명했다. 더구나 창계는 최근에 발견된 그의 편찬서인 ‘퇴계언행록’에서 보여주듯, 퇴계학을 기호학파에 매개해 준 역할을 공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당파싸움에까지 연결되어 극심한 논쟁으로 치닫고 있을 때에 퇴계 학문을 깊숙이 연구한 결과로 그의 언행록을 편찬하여 알리려던 마음이 바로 극단으로 치닫는 분쟁을 조절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이 점은 그 당시에 한창 큰 싸움으로 전개되던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서도 창계는 그 뒤의 화란을 걱정하면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절하려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도 본다. 그러나 고질적인 당파싸움은 창계의 노력으로도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침잠하려던 뜻도,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당파싸움의 해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가 벼슬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그렇게도 간절한 참된 선비였지만,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묻히려던 뜻을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더구나 스승이던 약천 남구만이나 현석 박세채와 명재 윤증이 모두 소론의 입장에 섰고, 절친한 벗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 등이 소론으로 강한 주장을 펴면서 창계는 사후에도 소론계로 분류되어 그의 학문과 사상이 크게 현양되지 못하는 불행도 겪게 되었다.
# 농암 김창협의 창계 옹호
‘병제설(兵制說)’을 짓고, 호포(戶布)의 문제점을 지적한 상소를 올린 우국의 구도자 창계를 누구보다 이해해주고 옹호해준 사람은 노론계의 거물 학자 농암 김창협이었다. 청음 김상헌의 증손자로,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로, 영의정 김창집의 아우로 안동 김씨 벌열의 후예로 예조판서에 대제학에 오른 농암은 소년 시절에 서로 만난 창계의 죽마고우였다. 장인인 이단상의 제자요 처남인 이희조의 친구이던 창계였기에 처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정말로 다정한 학우요 지기지우였다.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창계가 세상을 뜨자 농암은 울면서 제문과 만사를 지어 바치고, 뒷날 ‘창계집’을 간행하자 서문을 지어 그의 탁월한 문장과 학문을 찬양하고 성리학의 높은 수준에 정곡을 찔러 분명하게 해설해 주었다. 농암은 창계의 인품과 학문을 글자 여덟자로 압축해서 설명했다. ‘소견자대 소존자실(所見者大 所存者實)’, 즉 ‘관찰한 바는 크고 간직한 바는 실(實)하다’라는 말은 한 사람의 학문 업적에 대한 평가로는 더할 수 없는 찬양의 말이다.
농암 김창협의 아우 삼연 김창흡도 대단한 명성의 학자였는데 창계를 높이 평가했고 영의정 남구만, 영의정 최석정 등도 모두 그의 인품과 학문을 찬양하면서 짧은 삶에 한없이 애석한 뜻을 표해 마지않았다. 왕조실록에도 그의 졸기(卒記)를 통해 경전에 깊은 연구가 있었고 임금을 보도(輔導)함에 큰 공이 있는 강설을 했다는 평가를 했다.
# 창계의 유적지를 찾아서
지난 8월 하순 우리 일행은 창계 임영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더위도 한창인데 국지성 집중호우가 쏟아져 여행길은 막막했지만, 천우신조인지 억수로 쏟아지던 비도 유적지에 이르면 그쳐서 탐방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우리는 창계의 후손 임형택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아래의 ‘창계서원’을 찾았다. 창계가 세상을 떠난 16년 뒤인 1711년 고향인 회진 마을에 후학들이 창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계서원을 건립했다. 그러나 회진에는 그 서원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그 서원은 1767년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면 가운리의 선산 아래로 옮겼고 그 서원은 1868년 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말았다. 창계가 세상을 떠난 304년 뒤인 1999년에 마침내 후손들과 유림들의 힘으로 가운리 옛 서원터에 오늘의 창계서원이 복원되었다.
가운리의 신걸산은 나주임씨의 세장지(世葬地)다. 귀래정 임붕, 백호 임제 등 임씨의 현조(顯祖)들의 묘소가 즐비하고 영성각(永成閣)이라는 제실(祭室)이 높다랗게 서 있다. 그 입구에는 창계의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이조판서에 홍문관·예문관을 겸한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의 글로 최근의 명필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영성각 뒤로 창계사(滄溪祠)라는 신실이 있고 그 곁에는 매계영당(梅溪影堂)이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님을 못 잊고 청도 군수 시절에 형님 창계의 문집을 간행했고, 창계 사후의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해준 창계의 아우 매계(梅溪) 임정(林淨)의 영정을 모신 곳이 바로 매계의 영당이다. 매계 임정의 노력이 없었다면 창계의 사후 일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형님에 그런 아우가 있었음은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형제의 정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창계의 묘소는 애초에 나주에서 가까운 함평 땅에 모셔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오늘의 묘소가 있는 영암군 금정면 월평리 학송마을의 뒷산에 이장하여 300년이 가깝도록 거기에 계신다, 형님을 위해서 온 정성을 바친 아우 매계의 공이 보이듯, 창계 묘소 앞의 빗돌은 중국에서 구입한 것인데, 아우 매계가 빗돌만 구해놓고 세우지 못했던 것을 뒤에 후손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빗돌의 질이 너무 좋아,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새 빗돌처럼 완전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도를 구하고 진리만 찾으며 사느라, 벼슬도 버리고 부(富)도 멀리했던 창계의 성품대로 묘소도 소박하고 단아했다. 한창 묘소에 풀이 우거져 있을 때이건만 우리 일행이 찾아간다는 이야기에, 후손들이 동원되어 말끔하게 벌초한 모습에서 후손들의 따스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300년이 지났어도 후손들에게 창계의 피는 흐르고 있고, 도와 진리가 묻혀서 세상은 온통 인륜이 망가진 현실이지만, 창계가 실천하려고 밝혀 둔 인륜의 정당한 도리와 공정한 세상의 삶은 그의 저서에 그대로 살아있다.
호남의 학자로 고봉 기대승과 한말의 노사 기정진 사이에 호남의 학맥을 이어준 대표적 학자가 창계 임영이다. 그만한 학자의 유적지는 초라했고, 그만한 학자에 대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분에 대한 기념사업 하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세상이 이렇게 야박해서야 되겠는가. 고관대작도 초개처럼 버리고 학문과 진리, 도와 인생의 원리만 밝히며 살았던 창계. 그에 대한 업적을 현양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나기만 빌고 빌 뿐이다.
화서 이항로의 삶과 사상(上)
반백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닦고 쌓은 학문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져 이조판서의 추천으로 초직인 참봉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벌열의 집안도 아니고 세신고가(世臣故家)의 집안도 아닌 시골 선비가 학문적 명성이 높아 참봉의 벼슬에 임명됨은 우선 가장 명예롭던 산림(山林)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어서 환호작약할 만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화서 이항로는 그런 직책에 취임하지 않고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부족한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간곡하게 밝히고 말았다.
다시 24년이 지난 1864년 고종이 등극하고서 이항로에게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에 임명하고 전라도사로 바꾸었으나 사퇴하고 벼슬에 오르지 않았으니 73세이던 3월의 일이었다. 73세의 극노인에게 하급의 벼슬을 내렸으나 24년 동안 갈고 닦은 경술(經術)의 덕택이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로부터 벼슬 복이 터져 선망의 산림(山林)벼슬이 잇따라 내려졌다. 그해 7월에는 사헌부 지평의 벼슬이 내렸으니 산림으로 대접함이 분명해졌다. 같은 해 겨울에는 사헌부 장령이 내려지고 75세인 1866년 9월8일에는 통정대부 정3품 당상관인 동부승지에 임명되면서 천하에 이항로의 이름이 벽계산림(檗溪山林)으로 울려퍼졌다. 이 무렵은 고종3년의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때로 도하에 인심이 흉흉하고 난리가 났다고 세상이 온통 뒤집히던 때여서 이항로가 동부승지로 입궐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민간에서도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면서 국민적 기대를 안게 되었다.
이항로는 나라에서 보내준 관마(官馬)도 거절하고 집안의 종들이 메는 가마를 탔고, 둘째 아들 이박과 제자 김평묵(金平默)이 도보로 수행하였다. 나라의 큰 은혜를 입은 산림 이항로는 궁궐에 이르자 바로 사직상소와 함께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정책건의서인 상소를 올렸다. 바로 이 상소가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백년 이래의 가장 바른 목소리인 명상소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상소였다. 상소를 올린 며칠 뒤에는 그의 최종 벼슬이자 재신(宰臣)의 지위인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올랐다. 상소로 사직했으나, 그는 산림으로서의 국가적 예우는 충분하게 받은 셈이었다.
이항로는 공조참판이 내린 2년 뒤인 1868년 77세의 3월18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후 34년이 지난 1902년 광무6년에야 정2품인 자헌대부 내무대신에 증직되고, 1905년인 광무9년 황제의 칙명으로 시호를 내렸으니 문경(文敬)공이라는 영예로운 명칭이었다.
벽계산림인 화서 이항로는 청화산(靑華山) 서쪽으로 10리 지점인 벽계수가 철철 흐르는 물가에서 태어났다. 정조 16년인 1792년 2월13일 해 뜰 무렵인 묘시(卯時)에 경기도 양평군(당시는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이란 곳이었다. 바로 그 태어난 집이 ‘청화정사’이다.
이항로의 아버지는 글 잘하는 선비 이회장(李晦章)으로 호가 우록헌(友鹿軒)인데 선대에는 경기도 고양군의 벽진이씨 집성촌에서 살다가 그처럼 깊은 산속으로 피난 와서 살면서 고향이 된 곳이었다. 우록헌 이회장은 전답도 많지 않은 산골인 그곳에서 큰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나 화전(火田)농으로 조를 백석 이상을 수확했다니, 그런 벽지에서는 상당한 재산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화서 이항로가 태어난 ‘청화정사’는 아버지 때부터 와가로 덩실하게 세워졌고, 그곳이 바로 화서학문의 보금자리였으며, 한말 의병운동과 척양척왜의 기본논리인 주리척사(主理斥邪)의 시대정신이 싹텄던 곳이다. 화서의 영향을 받은 대유들로 일본을 물리치고 조선의 전통사상을 고수하자던 화서의 문하 제제다사들이 그곳에서 배출되었다. 중암 김평묵(1819~1891), 성재 유중교(1832~1893), 면암 최익현(1833~1906), 의암 유인석(1842~1915) 등은 위정척사운동의 이론가로, 실천가로서 모두 벽계리의 ‘청화정사’에서 배출된 조선의 마지막 의인들이자 당대의 학자들이었다.
# 화서의 유적지
양평(楊平)은 본디 양근군(楊根郡)과 지평군(砥平郡)이 합쳐져 된 군인데, 화서는 양근 출신이다.
화서 이항로의 삶과 사상(下)
-理를 중심에 두고 氣로써 이끌다-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철학
청화정사 주변에 비가 갠 달밤의 정취를 느끼려고 지어놓은 제월대(霽月臺)에 시를 짓고 노닐던 이항로, 젊은 날의 시심은 곱기만 했다.
시·서·예를 강습하다가 講習詩書禮
맑은 밤엔 때로 술을 마시네 淸夜時酌酒
술 마시며 밝은 달을 보노라면 酌酒對明月
밝은 달은 온 세상을 비추네 明月照九有
이는 제월대에 올라서 젊은 시절에 지은 시다. 갠 달처럼 밝고 맑은 마음을 지니자는 화서의 뜻이 담겨 있다.
‘명옥정’ 아래에 느티나무를 심고 지었다는 시도 보인다. 이렇게 경학과 문학을 함께 익히며 깊고 넓게 사색에 잠기던 화서는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사유의 세계를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일생동안 끌고 가던 학문적 논리이자, 그곳 청화정사를 찾은 제제다사들의 제자들에게 전해준 그의 이론이었다. “이(理)가 주가 되고 기(氣)가 객이 되어야 한다.” 그가 깨달은 지혜이자 표방한 학문의 기치였다. 원리와 원칙에 충실하여 근원적인 주체성을 끝까지 지키자면 이를 중심에 두지 않을 수 없고, 중심의 뜻과 이론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이끌어주는 힘인 기가 객의 자리를 지켜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화서의 핵심 사상이었다.
조선유학사에서 정설로 굳어진 주장의 하나가 한말 3대 성리학자가 경기와 호남, 영남에서 태어나 그들은 서로의 학문적 교류나 사승(師承)의 관계도 없었건만 동일하게 주리(主理)적인 성리학 체계로 같은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기호의 화서 이항로, 호남의 노사 기정진(奇正鎭:1798~1879), 영남의 한주 이진상(李震相:1818~1886)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 지역의 대표적 학자의 위치에 올랐는데, 동일하게 주기(主氣)를 배척하고 주리적 성리학 체계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화서와 노사는 서양의 세력이 물밀듯 몰려오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혼란한 시기를 살면서 강고하게 사(邪)인 서양을 물리치고 정통의 유교논리이자 공맹(孔孟)의 논리이면서 중화주의(中華主義)에 포괄된 논리만을 굳게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확고하게 주장한 학자였다.
척사위정의 확고한 논리 때문에 화서와 노사는 대원군의 뜻과 부합하여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이라는 높은 산림(山林)의 지위에 올랐고, 그런 산림의 영향 아래 수많은 제자들이 척사위정의 운동에 앞장서고 의병대장이 되어 망해가는 나라에 마지막 충성을 바치는 애국자들이 속출하였다. 화서의 제자로 척사운동의 효장은 중암 김평묵이며 의병대장은 면암 최익현과 의암 유린석이었다. 노사의 제자로는 손자 송사 기우만과 집안의 조카인 성재 기삼연이 호남의 의병장으로 스승의 뜻을 계승할 수 있었다.
애군여부(愛君如父) 우국약가(憂國若家)
화서 이항로의 정치사상은 간략하고 명확했다. 기묘사화에 정암 조광조가 억울한 누명으로 사약을 받고 유배지 호남의 능주에서 죽으면서 지은 유시(遺詩)에, “아버지처럼 임금을 사랑했고, 집안 걱정하듯 나라를 걱정했다”(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라고 읊었는데, 화서 이항로는 언제나 그 시를 외우면서 나라의 신민(臣民)이라면 언제나 아버지처럼 임금을 섬기고, 집안 걱정하듯이 나라를 걱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지녔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청화정사의 주변에 맴돌고 있었기에, 화서의 문하에서 최익현이나 유인석 같은 뛰어난 의병장이자 탁월한 애국자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공자는 “나라가 위급한 상태임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見危授命), 맹자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捨生取義)라고 했는데, 화서는 생활철학에서 언제나 그런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가 병인양요 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올린 상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당시의 긴급한 대책을 말하고 백성의 질곡을 제대로 올려 바쳐, 100년 이래의 최고 명상소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어떤 고관대작도 나라의 문제점을 전혀 지적할 수 없을 때에, 73세 고령의 벽계산림은 감히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백성의 아픔을 당당하게 상소로 말했으니, 그의 용기와 실천력이 어느 정도였나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주리(主理)이면서 이기(理氣)는 이물(二物)
노사 기정진은 이(理)가 절대적이라는 유리론(唯理論)을 폈으나 화서는 이기(理氣)는 단정적으로 이물(二物), 즉 두 존재임을 역설했다. 그러나 화서의 이기이물(理氣二物)은 이기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 반드시 차등이 있다고 하여, 이는 높고 기는 낮다는 이존기비(理尊氣卑)이고, 이는 명령하고 기는 명령을 받는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가 주(主)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이는 순수해지고 기는 올바르게 되어 만 가지 일이 제대로 다스려지고 온 세상은 편안해진다”(理爲主 氣爲役 則理純氣正 萬事治而天下安矣)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리론을 통해 중화문물(中華文物)의 정통사상을 고수해야 하고, 중화주의와 반대되는 왜양, 즉 서양이나 일본은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와 결합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척사위정의 논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외세의 침입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급한 시기에 유교적 조선의 정통을 고수하는 논리가 주리(主理)와 연결되고 그러기 위한 행동강령은 왜와 양을 배척하는 주전론(主戰論)으로 이행될 수밖에 없었다. 병인양요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화이론(和夷論)을 배척하며 싸움을 독려했던 이유가 거기서 나왔다.
요즘의 논리로야 세계정세에 어두운 보수주의로 매도할 수 있고, 반세계화의 퇴영적인 논리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부터 150년 전의 유교주의 국가로서의 대응은 그런 점을 정통의 논리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일 수 있었다. 만약 그 무렵 척사위정의 논리조차 없었다면, 개항과 교역의 준비가 전혀 없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척사위정의 논리와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이 한다는 논리가 합해져 의병운동과 직접투쟁의 실천이 가능하여 애국운동과 구국운동이 망해가는 나라의 민족혼을 불태우는 역사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않을까. 화서의 제자들이 이끈 의병운동은 그래서 한말의 마지막 역사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낙지암(樂志巖)은 그대로 있네
다시 벽계리의 아름다운 경치로 돌아가 보자. 송나라의 주자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경영했다. 퇴계는 도산구곡(陶山九曲), 율곡은 고산구곡(高山九曲), 우암 송시열은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경영했듯이, 화서는 벽계구곡을 경영하였다.
굽이굽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며 도도히 흐르는 벽계수는 현인군자가 세상을 잊고 학문연마에만 마음을 기울일 수 있도록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선중기의 시인이자 학자이며 영의정이던 사암 박순이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이제신(李濟臣), 남언경(南彦經), 김창흡(金昌翕) 등 당대의 명인들이 또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백계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는 어진 이들이 살아갈 흥취를 일게 했던 곳이다. 수천년을 흐르는 물에도 한 치의 변화 없이 화서가 뜻을 즐기면서 노닐었던 ‘낙지암’은 오늘도 그대로 있었다.
책을 덮고 말없이 앉았다가는 斂卷無言坐
문을 열고 가고 또 가보네 出門時復行
지는 꽃이 세상의 적막 잊게 하는데 落花忘世寂
흐르는 물이야 사람 마음 맑게 해주네 流水逼人淸
만 가지 나무에 봄빛이 퍼지는데 萬樹春心發
온 전답에는 빗물에 곡식 자라네 千畦雨澤生
한가롭게 살면서 세월을 붙잡으니 閒居留歲月
괜스레 옛사람의 정취가 떠오르네 聊得古人情
‘낙지암’이라는 제목의 시다. 흐르는 물속에 솟아 있는 바위를 ‘뜻을 즐기는 바위’라고 이름하고 때때로 올라가 시를 짓고 마음을 맑게 하는 수양의 장소로 삼았다. 지금도 물은 흐르지만 바위는 굳게 버티면서 화서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넉넉한 제자들의 훈훈한 정
한말의 비슷한 시기에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고산 임헌회(鼓山 任憲晦)-간재 전우(艮齋 田愚)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맥이 있었고, 화서-중암 김평묵-성재 유중교-의암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학맥이 같은 노론에서 대립하였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 학맥이다. 전우 일파가 나라가 망해가도 선비는 도(道)만 지키면 된다고 은둔의 생활로 일생을 마칠 때, 화서학맥의 많은 제자들은 의병운동과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역사는 누구 편을 들어줄 것인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중암 김평묵은 화서의 사상과 철학을 계승한 철저한 척사위정파로 화서의 수제자였다. 그는 화서의 행장(行狀)을 지어 선생의 일생을 유감없이 기록했고 화서어록(華西語錄)을 저술하여 그의 철학사상을 소상하게 밝혔다. 성재 유중교도 선생의 사상을 남김없이 추출하여 어록으로 정리했으니 부족함이 없는 기록이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의 신도비명을 저작하여 화서의 삶과 사상을 넉넉하게 서술해놓았다. 그 이외의 수많은 제자들이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정리하고 기록하여 문하의 번성함으로는 화서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화서의 철학과 사상은 원집 32권, 부록 9권으로 22책인 ‘화서선생문집’으로 간행되어 온전히 전해지고, 그의 일생은 ‘연보’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화서가 세상을 떠난 30년 뒤인 1899년에 문집은 간행되었는데, 후학들의 연구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영남 최후의 성리학자-한주 이진상(上)
-주리세가(主理世家)-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성주(星州) 이씨의 집성촌으로 ‘한개’라고 부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민속관광 마을이다. 한자로는 대포리(大浦里)인데, ‘큰 개’ 대신 ‘한개’라고 부르며 세상에 이름이 크게 알려진 마을이다. 그곳에 ‘주리세가’라고 현판을 걸고, 한주(寒洲)·대계(大溪)·삼주(三洲)라는 세 개의 편액을 현판으로 붙인 한주의 종택이야말로 말 그대로의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다.
한주 이진상(1818~1886), 그의 아들 대계 이승희(李承熙:1847~1916), 또 대계의 아들 삼주 이기원(李基元)의 3대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일본과 싸우는 독립정신을 키워 만주 벌판에서 투쟁한 대계의 혼이 자랐으며 대계의 제자이자 탁월한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의 혼이 무르익었던 곳이다.
한주의 종택인 ‘주리세가’는 역사가 깊고 인물의 보고인 집이다. 한주의 증조부 이민검(李敏儉)이 영조 43년인 1767년에 건립하였고 고종 3년 1866년에 증손자 한주 이진상이 새로 고쳐짓고 지금에 이르도록 그대로 보존되어오는 유서 깊은 종가다. 조부 이형진(李亨鎭)은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라는 이름 높은 학자의 제자로 성균생원으로 학자의 이름이 컸으며, 그분이 낳은 두 아들로 진사(進士)에 오른 한고 이원호(寒皐 李源祜)와 대학자에 공조판서에 오른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형제가 바로 그 집에서 태어났다. 한고는 바로 이진상의 아버지이고 응와는 숙부였다.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성리학자요,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 망국을 당하자 만주벌판으로 망명하여 공교회(孔敎會)를 설립하여 유학사상을 통한 독립투쟁으로 항일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고, 그 문하에서 심산 김창숙의 독립정신이 배태되었다.
-한주 이진상의 탄생-
조선왕조 말엽인 순조18년(1818)은 다산 정약용이 수백 권의 저서를 안고 강진의 유배지에서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해배되었던 해다. 기호지방의 대표적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가 27세의 나이로 학문이 무르익고, 호남의 대학자 노사 기정진이 21세의 청년으로 독특한 사상체계인 유리척사(唯理斥邪)의 새로운 논리를 구상하고 있던 때였다. 바로 그 해에 영남을 대표하는 최후의 큰 성리학자 이진상이 유서 깊은 종택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도 승승장구로 올라 공조판서에 이른 대감이었지만, 당대의 대학자로 성리학 이론으로도 높은 수준에 이른 한주의 숙부 이원조는 영특한 조카 한주를 그냥 두지 않고 스승이 되어 본격적으로 가르쳐주었다.
한주는 20세에 영남 학문의 고향인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에 대한 숭모의 정을 표한 이래, 집에 돌아와 집안 서재의 이름으로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운곡노인(雲谷老人)이라던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도산(陶山)에 살았던 퇴계를 법받겠다는 자신의 각오를 천명한 내용이었다. 약하여 ‘운도재(雲陶齋)’라 호칭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철학의 뿌리는 주자와 퇴계에 있음을 그냥 알게 해준다.
한주는 학맥이나 학통에서 특별한 스승을 내세우지 않아 독자적으로 학문체계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마치 화서 이항로나 노사 기정진도 특별한 사승 없이 독자적으로 학문을 개척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젊은 시절에는 숙부 응와공에게서 배우고, 장복추(張福樞)·이정상(李鼎相)·허훈(許薰) 등과 강론(講論)하였고, 35세 때에야 당시의 이름 높은 영남의 학자 정재 유치명을 찾아뵙고, 40세에는 안동으로 서산 김흥락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심즉리설(心卽理說)-
가학(家學)을 잇고 여러 동료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큰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40전후에는 이미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는 이채로운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44세에 완성한 그의 독특한 성리학설인 ‘심즉리설’이라는 논문은 당시 영남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퇴계의 학설과 완전하게 합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으나 그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연구와 사색을 거듭하여 독창적인 학설을 끊임없이 발표하였다. 한주는 그의 노년인 51세에야 거유이던 성재 허전(性齋 許傳)을 찾아가 예(禮)를 논하였고, 회갑해인 61세에 그의 대저인 22권의 ‘이학종요(理學綜要)’라는 주저를 저술하였고, 67세에는 다시 손질하여 완성본으로 확정하였고,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성리학의 기본은 ‘성즉리(性卽理)’란 명제에서 출발하여 ‘성리학’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송나라의 여러 어진 학자들에 의하여 그것에 대한 학설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한주는 성(性)이 아닌 심(心)이 곧 이(理)라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여, 주자나 퇴계의 본뜻이 그런 내용이었다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의 성리학은 본디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설과 율곡의 ‘기발이리승일도(氣發而理乘一途)’설이 큰 주류를 이루면서 발전해왔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자 영남일대에서는 퇴계의 ‘호발설’을 적극 옹호하면서 율곡의 ‘기발설’은 극력 배척했었다. 이런 사상계의 분위기에서 한주 이진상은 ‘이발일로(理發一路)’설을 주장하여 한편으로는 퇴계의 ‘호발설’에도 동의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율곡의 ‘기발설’에도 동조하지 않아 사상계에 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한주문집을 불태우다-
한주 이진상이 세상을 떠난 뒤, 자손과 제자들에 의하여 ‘한주선생문집’ 53책이 간행되자, 퇴계학문을 절대시하던 영남의 학자들이 크게 분노하고 한주문집을 불태우는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수십년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으나, 한주의 본뜻은 퇴계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결론으로 퇴계후손들의 양해 아래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최근에는 간행하지 못한 많은 저작까지 함께 합하여 ‘한주전집’ 85책이 새롭게 간행되어 조선 6대 성리학자이자 조선 후기 3대 성리학자인 한주의 학문 전체가 학자들에게 공람될 수 있게 되었다.
-척사(斥邪)와 의병운동-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은 기호와 호남에서 독창적인 성리학을 연구하여 나라가 망하던 망국의 세월에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성리학의 높은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학자였다. 순조 때의 대학자 대산 김매순은 당색이 다르면서도 다산 정약용과 많은 학문적 교유를 했었고 아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그가 다산에게 보낸 편지에, 동양의 유학사를 거론하면서 성리학의 본래 입장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대목이 있다. 바로 ‘약정복성(約情復性)’이라는 네 글자로 압축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리학의 본디 목표가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정(情)을 제약하고 본디 타고난 착하고 선한 성품을 제대로 회복하는 것이 성리학의 요체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성리학의 원리는 너무나 사변적이고 관념적으로 논쟁이 계속되면서 본래의 목적에서는 멀어지고 당동벌이(黨同伐異)의 당쟁무기로 둔갑하여 자신들과 다른 당파에 공격의 역할이나 하고 있던 것이 한말의 사상계 동향이었다. 이러던 시절에 화서·노사·한주의 세 성리학자는 자신들의 주리(主理) 이론을 ‘이존기비(理尊氣卑)’ ‘유리척사(唯理斥邪)’ ‘이발일로(理發一路)’와 ‘심즉리’로 압축하여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망국에 즈음하여 뜨거운 민족혼으로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의 불꽃을 피우게 하는 몸으로 실천한 성리학자들이 되었다.
화서의 제자들인 면암 최익현과 의암 유린석, 노사의 제자인 송사 기우만, 녹천 고광순, 성재 기삼연, 한주의 아들 이승희와 그의 제자 심산 김창숙으로 이어지는 의리와 독립의 성리철학은 마지막 조선의 혼을 지켜주는 대들보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대계 이승희의 의혼-
한주의 아들로 태어나 한주의 성리학과 사상을 계승한 한계(韓溪)·강재(剛齋)·대계라는 호로 불리던 이승희는 독립지사이자 큰 학자였다. 뒷날 망국의 시절에 북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풍찬노숙의 고난을 겪다가 끝내 고향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지 낯선 타국에서 70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인 1908년에 만리타향인 소련 영토 블라디보스토크에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자 망명객인 의암 유린석(당시 67세)과 한주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당시 62세)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나라의 독립을 찾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에 앞장선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만난 것이다. 의암의 기록에 이승희와 만나 ‘심즉리설’을 토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들이 어찌 ‘심즉리’의 성리학설만 토론했겠는가.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과 나라를 독립시키자는 원대한 포부와 뜻도 함께 토론했음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리라.
한주 이진상은 59세이던 1876년 운양호 사건으로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자 망국의 징조를 느끼며 의병을 일으키려고 동지들을 규합하다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실천적 성리학자 이진상은 조국의 안위를 잊은 적이 없었기에 그런 혼이 아들과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우국의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이승희와 함께 한주 문하의 큰 학자인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도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뒷날 장석영은 스승 한주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그의 높은 학문과 덕행을 유감없이 기술하여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영남 최후의 성리학자 한주 이진상(下)
-한주학단(寒洲學團)-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유명종 교수) 한말 영남 일대에 한주의 학문은 크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후산 허유(后山 許愈), 물천 김진호(勿川 金鎭祜),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 대계 이승희, 홍와 이두훈(弘窩 李斗勳), 자동 이정모(紫東 李正模), 면우 곽종석등 당대의 학자들이 학단을 이루어 한주의 학문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몇몇 제자들은 망국의 의리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사람도 있었으나 아들 이승희나 제자 장석영 등은 스승의 학문과 사상의 실천에 앞장 서서 북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특히 ‘한주학단’의 학자들과 호남의 노사 기정진의 문하인 ‘노사학파’와의 연결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한주학파와는 다르게 호남에 기반을 둔 노사학파는 그 제자들이 호남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남 우도인 경남지역에도 많은 학자들이 노사문하를 출입했다. 월고 조성가(趙性家), 계남 최숙민(溪南 崔淑民), 노백헌 정재규(老栢軒 鄭載圭:1843~1911) 등이 대표적인 영남의 노사학파이다. 그중에서도 노백헌 정재규가 노사문하의 고족(高足)인데, 그는 한주의 제자 후산 허유와 가까운 벗으로 일생 동안 학문논쟁과 토론을 그치지 않아 노사학문과 한주학문이 결합되는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 이룩되었다.
허유와 함께 사칠설(四七說)을 논하고 이기설을 논했던 정재규는 한주 이진상과도 어울리면서 많은 학문적 토론을 거듭했다. 주리설(主理說)에서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한 노사의 학문과 이발일로설(理發一路說)의 한주 사상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을 서로 인정하여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이후 몇 백 년 만에 영남과 호남의 학문적 교류와 학자들의 접촉이 성대하게 이루어졌던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호남의 학문 교류-
삼가(三嘉)의 물계리(勿溪里)에 살던 정재규의 집에는 호남에서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나 노사의 제자 일신재 정의림(日新齋 鄭義林)이 찾아오고, 한주학파의 대계 이승희가 찾아오면서 영남학과 호남학이 격의 없이 토론하는 아름다운 학문 활동이 전개되었으니 얼마나 부러운 일이고 보기 좋은 일인가. 허유나 이승희 이외에 한주의 제자인 자동 이정모(李正模) 등과도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성리설을 논했던 점은 주리학파의 시대적 요구에 응한 아름답고 훌륭한 지역 타파의 본보기였기에 두고 두고 찬양해야 할 멋진 일임에 분명하다. 이 점은 오늘의 이 나라 지역갈등의 해결을 위한 문제로 여겨 심도 있는 학술적 연구가 계속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더구나 한주가 직접 노사의 학설을 읽고 그에 대한 해석을 했던 점으로 보아 이들의 학문적 견해와 사상이 어떻게 일치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히는 점도 한번쯤 연구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한주학단의 간재학파 비판-
한주의 제자로 가장 높은 성망의 학자는 역시 면우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었다. 한주학설을 계승하고 부연하여 179권의 방대한 문집을 남긴 면우는 학문적 명성에 의하여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이라는 고관에 올랐다. 을사늑약이 이룩되자 조약을 폐지하고 5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한 적도 있으나 경술(1910)년 망국의 무렵에는 몸을 사려 주변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기미독립운동 무렵에는 마침 제자 김창숙 등과 함께 파리장서사건을 일으켜 투옥되는 등 만절(晩節)을 지켜 한주의 제자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 간재 전우(艮齋 田愚)라는 학자는 곽종석에게 내리지 않는 학자로서의 성망을 얻었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재야 학자였으나 임금의 은혜로 산림(山林)의 대접으로 감역(監役), 장령(掌令),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라는 높은 지위를 받았으나, 나라의 일에는 재야학자가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서해의 섬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지냈다. 그때가 어떤 때인가. 나라는 전복되고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는 도탄에 빠지고 온 나라가 요동치던 때여서 어리석은 여자로서도 안방에서 눈물을 금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던 때에 사류(士類)로서 도만 지키고 살면 된다고 일체의 나랏일에 관여 안했던 사람이 간재 전우였다. 대계 이승희, 심산 김창숙 등은 그런 점에서 간재학파의 색은행괴(索隱行怪)의 행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실천적 행위에 힘쓰지 않는 공리공언(空理空言)의 관념적 성리학이라고 비판했었다. 이 점은 현상윤(玄相允)의 ‘유학사’(儒學史)에서도 자세히 논했으니 참고할 일이다.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의 한주 방문-
1882년 임오(壬午)년은 한주의 나이 65세가 되어 노학자로 한창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해에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이던 교리(校理) 이건창(1852~1898)이 한주를 찾아 한개마을을 방문했다. 한주의 높은 성망을 듣고 방문한 영재 이건창은 학문적 토론을 쉬지 않았다. 영재가 한주에게 학문하는 대도(大道)를 물었다. 한주의 답변이 바로 그의 실천철학이자 몸으로 실천하는 성리학의 논리였다. “학문을 연구함에는 반드시 실심(實心)을 지녀야 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물(事物)에는 모두 실리(實理)가 있는데, 실심을 지닌 뒤에야 실견(實見)이 있게 되고 실견이 있는 뒤에야 실행(實行)을 하게 됩니다. 실(實)이란 정성(誠)일 뿐입니다”(爲學必須實心 天下事事物物 皆有實理 有實心而後有實見 有實見而後有實行 實者誠而已)라는 명답을 해주었다고 한주연보(寒洲年譜)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실심·실리·실견·실행, 즉 그런 실이라는 성(誠)이 없는 학문이나 성리학은 공소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실행, 실천, 실견의 행실과 행위가 없는 성리철학은 관념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행동이 없는 어떤 논리도 실익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주 학문의 요체였다. 이런 학문의 실체 때문에 실천과 실행에서 벗어난 간재학파의 논리는 한주학파로부터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유서 깊은 한개마을-
오랫동안 이름만 들었던 한개마을, 대포리(大浦里)는 멀리 큰 들을 건너 낙동강의 한 가닥이 보이고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형국이어서 인물의 보고임을 그냥 짐작할 수 있었다. 민속관광마을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마을 입구에는 큰 간판이 마을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크고 넓은 와가들이 즐비해 있어, 이름 있는 마을임을 보아서도 알게 해준다. 판서댁, 진사댁, 한주댁 등의 입간판이 있어서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초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에 우리가 찾은 한주종택에는 다음 날이 종택의 시제(時祭)를 지내는 날이어서 주부 한 분이 열심히 제수를 장만하느라 바쁜 이유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
한주의 증조부 이민검(李敏儉)이 짓고 한주가 개수(改修)했으니 150년이 넘은 고택이다. 몸체 곁에 세가(世家)라는 이름에 걸맞게 3대(한주·대계·삼주)의 호를 판각한 현판이 걸린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를 지나 별채로 한주정사(寒洲精舍)라는 정자가 오래된 나무에 가려 고즈넉이 서 있었다. 이곳 사랑과 정자에 얼마나 많은 한주학단의 문제자들이 출입했을까. 당대의 학자 영재 이건창이나 노백헌 정재규도 출입했다. 심성철학이 논해지고 이기사칠(理氣四七)의 높은 학문이 논해졌으리라. 또 이 종가를 중심으로 일제하 가장 큰 유림단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사건도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모의되고 실천되었다.
종손마저 출타하고 없는 집안의 모든 건물은 아무런 말이 없다. 역사가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망국을 당해 독립운동이나 의병활동에 동참하지 않는 나약한 성리학자들을 질타하던 대계 이승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퇴계를 본받자던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의 현판이 뚜렷하여 주자와 퇴계의 혼까지 이 종택의 주변을 맴도는가 여겨졌다. 독창적이고 실천적인 성리학 체계를 새롭게 세워, 기호의 이항로, 호남의 기정진과 함께 영남을 대표했던 당대의 철학자 한주 이진상의 혼도 이 종택에 맴돌고 있겠지만, 그는 지금 한개마을에서 멀지 않은 뒷산에 다소곳이 누워계신다.
한주이선생지묘(寒洲李先生之墓)라는 소박한 비 하나가 묘소 앞에 세워져 있을 뿐, 초라하기 그지없는 묘소다. 1886년 10월15일 대학자 한주선생은 눈을 감았고 그 다음해인 1887년 2월20일 2000여 명의 사림(士林) 등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다. 1895년 25책의 문집이 간행되었고 22편 10책의 ‘이학종요’라는 한주의 주저는 그 2년 뒤인 1897년에야 간행되었다.
문인 장석영의 저술인 ‘묘지명’은 1908년 구워서 묘소에 묻었으며 아들 이승희가 지은 묘표(墓表)가 묘소 앞의 빗돌에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문인 곽종석이 지은 장문의 행장과 묘지명은 모두 문집에 수록되어 그의 일생을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묘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5세에 모든 경전을 꿰뚫어 이해하였고, 18세에 중부(仲父) 이원조공으로부터 인심과 도심, 정일(精一)의 뜻을 강론받자 그로부터 뭇 성인들의 학설을 널리 구하고 주리(主理)의 뜻을 얻어내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였다”(十五淹貫經籍 十八講人道精一之旨于仲父定憲公 因慨然博求群聖之說 得主理之訣 篤信而實踐之)라고 설명하여 그의 실천철학을 높이 평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있음을 한개의 양반 마을은 보여주고 있었다. 화서·노사·한주의 제자들인 유린석·정재규·이승희의 만남에서 한말의 성리학이 이 마을에서 만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국 지도자 서애(西厓) 유성룡 上
퇴계 제자로 ‘화합과 조정’의 명수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선조 40년인 1607년 5월6일 6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래서 지난해인 2007년은 서애가 세상을 떠난 400주년으로 대대적인 기념과 추모행사가 열렸었다. 1542년인 중종 37년 10월1일, 서애는 외가인 당시의 의성현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고향은 당시는 풍산현, 지금은 안동시 풍산면 서쪽에 자리한 하외라는 마을이었다. 이제는 ‘하회(河回)’로 바뀌어 세상에서 유명한 곳이 바로 서애의 고향이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 그 강이 돌면서 만들어진 마을이 서애의 고향이어서 강물이 돌아가는 하회(河回)가 되었고, 마을에서 강 건너 서쪽 절벽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그곳을 사랑했던 이유로 서애(西厓)라는 호를 자호로 삼았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아버지 유중영(柳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님 겸암 유운룡(謙唵 柳雲龍)도 문과에 급제하여 서애보다는 벼슬이 낮았으나 학문과 덕행으로 서애에 버금가는 이름 높은 학자이자 관인(官人)이었다. 우선 태어나기를 좋은 집안에서 유복하게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넉넉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에 정성을 바칠 수 있었다.
학자로서의 소양을 제대로 갖추려면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풍산현의 이웃고을인 예안(禮安:지금의 안동)현에 당대의 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陶山)에서 강도(講道)하고 있던 때였다. 서애는 가정에서 학문을 익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른 21세에 퇴계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인 도학(道學) 공부에 몰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퇴계에게서 직접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학을 배우고 몇 달을 도산에 머무르면서 깊고 넓게 도(道)를 얻어들었다고 한다.
23세에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1등과 3등으로 합격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태학(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고 과거공부에도 열중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열렸고, 29세에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의 예를 다하며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벼슬은 오르고 올라 47세에는 대제학으로 나라의 문권(文權)을 쥐었고 49세에는 우의정이라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정승에 올랐다. 51세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으로 국난에 임하는 임금 다음의 최고의 사령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퇴계의 제자로 익힌 학문을 후학들에게 전수했으니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 당대의 학자들이 서애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그래서 서애는 뛰어난 정치지도자이자 퇴계의 학맥을 이은 학자로서도 큰 명망을 얻었다. 서애가 세상을 떠나자 고족(高足)인 우복(愚伏) 정경세는 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수준 높은 학자로서 스승인 서애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서애의 일생을 상세하게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스승은 재능으로는 온갖 실무를 처리하기에 넉넉하였고, 학문으로도 세상을 다스려 백성들을 구제하기에 넉넉하였다”(才足以應務 學足以致用)라는 결론을 내렸다. 실무처리능력과 학문역량을 함께 지녔던 서애의 인품을 제대로 기술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화합과 조정의 정치지도자
지도자는 조화를 이루고 조정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극단적인 대립이 벌어지고 각을 세운 논쟁이 치열할 때에 거중조정을 통하여 실마리의 얽힘을 풀어서 화합의 분위기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 서애는 모두가 인정했던 당대의 정치지도자였다. 화합과 조정의 명수가 서애였음을 알게 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31세에 서애는 옥당벼슬이라는 명예로운 홍문관의 수찬(修撰)으로 재직하였다. 이 무렵 어느 날,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와 여러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어떤 수준의 임금인가?”라고 묻자, 정이주(鄭以周)라는 신하가 먼저 답했다. “전하는 요순과 같은 임금입니다”라고 답했다. 서애와 쌍벽으로 퇴계의 제자로 이름 높던 학봉 김성일(金誠一)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학봉은 곧고 바른말 잘하기로 세상에 명성이 높던 분이다. 학봉이, “전하는 요순과 같은 임금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세상에 포악한 임금의 대명사)와 같은 임금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는 순간 임금의 얼굴에 극도의 분노가 보이며 좌중이 전율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서애는 뛰어난 기지와 조정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서애가 사뢰기를 “정이주가 말한 바의 요순과 같은 임금이란 임금님을 그런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미이고, 김성일이 말한 걸주 같은 임금도 될 수 있다는 것은 걸주 같은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말이니, 두 사람 모두 임금님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라고 능숙하게 답변하자, 임금이 그때에야 기뻐하며 얼굴빛을 바꾸고 술상을 가져오라 명하여 즐겁게 지내다 파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서애가 아니었다면 김성일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서애의 말솜씨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지도자는 인재를 천거할 줄 알아야
서애의 인물됨이야 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그래도 가장 많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의 한 분이다. 그는 영의정이라는 국가의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여 구국의 정치지도자라는 호칭에 걸맞게 행동한 인물이다. 그러나 서애라고 약점은 없고 장점만 있는 인물은 아니다. 율곡 이이는 후배인 서애에 대하여, “서애는 재주나 식견이 높아 임금께 올려 바치는 건의를 잘하였다. 더욱 경연에서 아뢰는 내용은 모두가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일관된 마음으로 봉직하지 못하고 이롭고 해로운 점만 따지려는 부분이 있어 식자들이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라는 평을 하였고, 문장·학문·청빈 등 모든 것이 다 좋으나 어떤 경우 골경(굳세고 곧은 성품)의 풍모가 부족한 점을 남들이 한스럽게 여겼다는 평가도 있었다. 화합과 조정의 능력에 온화한 성품이 뛰어나 강하고 굳세지 못한 성격을 탓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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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단점이 있으면서도 서애가 지도자로서 우뚝 서있었고 무거운 성망을 잃지 않았던 데에는 그가 인재를 제대로 천거하고 능력을 알아보아 발탁하는 뛰어난 지감(知鑑)을 지녔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의 비참한 패망에서 승리의 두 장군을 들자면 충장공 권율(忠壯公 權慄)과 충무공 이순신이다. 바로 이 두 위대한 애국자이자 뛰어난 전략가들 때문에 나라가 중흥될 수 있었으니, 그 두 사람을 천거한 서애야말로 임진왜란으로 패망해버린 조선이라는 나라를 중흥시킨 주인공이었다.
본디 서애는 인재발탁에 대한 높은 정치철학을 지닌 분이었다. 그의 유명한 논문이자 국가에 바친 정책건의서인 ‘청광취인재계(請廣取人才啓)’라는 글에 서애의 뜻이 담겨있다. 널리 인재를 발탁하기를 청하는 건의서인데, 1594년 53세의 서애가 전쟁이 한창이던 난리통에 임금에게 바친 건의서는 지금 우리가 읽어도 바르기만 한 주장이다. 아무리 천한 사람,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도 약간의 재주만 있다면 무조건 등용시켜 활용토록 해야 한다고 했다. 단점은 묻어두고 장점만 취해야 하고 신분이나 문벌로 인재를 고르는 악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인재발굴의 10대 원칙을 열거했으니 병법(兵法)에 밝은 사람, 학식이 있고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 담이 크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 집안에서 효제(孝悌)에 뛰어난 사람, 문장에 뛰어나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 농사일에 밝고 농업기술이 있는 사람, 염업·광산업·무역업에 밝은 사람, 수학과 회계에 밝은 사람, 병기를 잘 만드는 사람 등 열 가지 종류의 인물들은 신분이나 가문을 따지지 말고 조건 없이 발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발탁되지 못했다면 그때의 조선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삼한(三恨)을 지녔던 서애
66세에 생을 마친 서애, 그 당시로는 천수를 제대로 누린 나이다. 대제학에 이조판서,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라 모든 복을 다 받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모진 전쟁에 온갖 시달림을 받았고, 당파싸움의 격화로 반대파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서애, 그는 노년에 자신에게는 세 가지의 한(恨)이 있노라는 술회의 기록을 했다. 첫째는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했다. 둘째, 벼슬은 지나치게 높았는데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했다. 셋째, 망령스럽게 도(道)를 배우겠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다. 바로 그 세 가지가 자신의 한(恨)으로 여겼다니 얼마나 겸허하고 공손한 삶의 자세였는가.
서애의 어머니 안동 김씨는 남편을 잃고도 매우 오랫동안 살았다. 유운룡·유성룡 두 형제의 지극한 효도로 온갖 영화를 누리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서애는 효도로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뛰어난 효심의 발로다. 임진왜란에 그만한 공업을 이루었건만,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마음도 얼마나 훌륭한 정신인가. 퇴계의 학통을 이은 도학자로 많은 제자들에게 도를 전해준 학자였지만, 도학에 뜻을 두고도 이룬 바가 없다는 그의 겸손함이 바로 그와 같은 큰 정치지도자로 대접받게 했던 것이 아닐까. 못된 일은 다 하고도 자기만 잘 했다고 떠드는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서애의 ‘삼한’은 많은 반성의 자료가 될 것이다.
구국 지도자 서애(西厓) 유성룡 下
전란을 경계삼아 비전을 제시하다
눈을 감은 지 400년이 지났지만
4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서애는 지금의 안동시 풍산면 수동리(壽洞里)라는 마을의 뒷산에 누워있다. 우리가 서애 유적지를 찾은 초겨울의 그날은 바로 수동리 서애의 묘소에서 묘제를 지내는 날이었다. 서애 400주년 기념 묘제인데, 전국에서 모인 유림, 후손들이 합쳐 수백명이 넘는 대단한 인파였다. 그가 남긴 유덕(遺德)이 얼마나 크기에 그만한 인파가 모여 묘제를 올리는 것일까. 400년, 이제는 잊을 만큼 세월도 흘렀건만 그의 마음과 혼이 살아계신 듯, 참으로 공손하고 엄숙하게 제를 올린다. 모인 모두가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쓴 모습으로 보기도 아름답게 제를 올리고 있었다.
묘소에도 일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서애의 뜻이 살아있었다. 6대 후손 운(澐)이라는 분이 지은 간단한 묘비가 하나 서있을 뿐, 그 흔한 신도비 하나 없었다. 서애의 일대기는 그의 제자 정경세의 행장만 남아있을 뿐, 신도비는 애초에 짓지도 않았다니 그러한 낭비를 하지 말라는 서애의 유훈에 의해서 지켜진 일이라고 했다.
어지간한 인물의 묘소에는 의당 제각도 있고 여러 가지 치장이 있게 마련인데 서애의 묘소에는 제각 하나 없이 초라하지만 검소하고 청렴한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서애의 서세 400주년 기념행사가 전국 도처에서 열렸던 것도 큰 지도자의 유덕은 그렇게 후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의 하나였다.
충효당(忠孝堂)을 찾아서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마을이 하회마을이다. 겸암 유운룡의 종가인 양진당(養眞堂)과 서애의 종가인 충효당이 있기에 하회는 시골마을로 나라 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민속관광촌으로 대표적인 곳이 바로 그곳이다. 서애의 14대 종손 유영하(柳寧夏)가 거주하면서 하루에도 수백명의 방문객과 관광객을 맞는 그곳이 바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낙동강으로 둘러싸여 아름답기로도 비길 곳이 없지만, ‘하회탈’과 ‘하회탈춤’이라는 탈과 춤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곳이다. 얼마 전에 영국 여왕의 방문으로 전세계에 잘 알려지기도 했다.
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학문세계上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라”
-호남 3천재 학자-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 1727~1798)는 호남 3천재로 호칭되던 학자의 한 사람이다. 누구에 의하여 호칭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오래 전부터 조선왕조 중엽 이전에는 호남에 3걸(傑)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3천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높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문학이나 학문에 큰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하게 생을 마쳤던 사람들이 3걸로 호칭된다. 화순의 동복에 살았던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 1483~1536), 해남의 유성춘(柳成春 : 유희춘의 형), 고산 윤선도의 선조인 귤정(橘亭) 윤구(尹衢 : 1495~1542)가 바로 그들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옥당 벼슬에 호당에 들어간 명사들이었으나, 사화(士禍)에 좌절하고 말았기 때문에 세 걸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남 3천재는 순창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申景濬 : 1712~1781), 고창의 이재 황윤석(臣頁 齋 黃胤錫 : 1729~1791), 존재 위백규가 그들이니 바로 18세기의 한 세기를 살아가면서 조선 후기의 찬란한 실학이라는 학문을 꽃피운 3대 천재 실학자들이었다. 신경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에 올라 세상에 큰 이름을 날렸으나, 황윤석과 위백규는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학문적 업적 때문에 임금의 은혜로 시골의 재야학자로서는 그래도 낮은 벼슬이나마 역임할 수 있던 행운을 얻기도 했었다.
오늘날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언급하려면, 의당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기호지방에 근거지가 있던 분들이 거론되는데, 유독 호남의 3천재는 호남이라는 시골에서 특별한 실학관계 학문의 연원도 없이 자생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문에 도달했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빛나는 업적으로 다루게 된다. 위백규와 황윤석은 비슷한 연배로 서로 교류까지 하면서 학문을 논하였고, 기호학계 성리학의 대가들의 제자이기도 했다. 위백규는 병계 윤봉구(尹鳳九 : 1683 ~ 1767)의 문인으로 성리학에도 밝았지만, 시대적 진운에 눈감지 않고 실학에 전념했던 학자였다. 이재 황윤석은 미호 김원행(金元行)이라는 노론계 성리학자의 제자로 실학에 큰 업적을 남겨 이채로운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위백규의 생애-
한말에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역임하여 문장과 학문으로 큰 명성이 있던 전재 임헌회(全齎 任憲晦)는 ‘존재집’(存齋集)이라는 위백규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지은 서문(序文)에서 간략히 위백규의 삶을 서술했다. “존재는 2세에 육갑(六甲)을 외웠고, 6세에 글을 지을 수 있었으며, 8세에 ‘주역’을 공부했다. 10세 이후에는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복서(卜筮), 율력(律曆)·선불(仙佛)·병법(兵法)·의약·관상학·배와 수레·공장(工匠) 등 온갖 기술에까지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모두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천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25세에 병계 윤봉구 선생에게 집지(執贄)한 제자가 되어 잡다한 예전의 학문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성리학에 침잠했다”고 하여 벼슬할 생각보다는 자신의 수양에 더 치중하는 학문에 힘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침내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건질 방책까지 강구하여 체용(體用)이 구비된 학문에 통달했으니 대표적인 저서가 ‘정현신보’(政絃新譜)라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임헌회의 스승이자 기호지방 노론계의 대표적 문장가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 : 1776~1852)은 산림(山林)으로 형조판서에 오르고 시호가 문경(文敬)이었는데, 위백규의 ‘묘지명’(墓誌銘)에서, 호남의 학문은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을 이어서 손재 박광일(朴光日)과 목산 이기경(木山 李基敬)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의 학맥을 이은 대학자가 바로 위백규라며 높은 찬사로 그의 학문 수준을 평가했다.
홍직필의 대선배로 노론계 큰 학자이던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는 위백규의 ‘행장’(行狀)에서 일생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높은 수준의 성리학과 뛰어난 실학의 학문업적을 남겼다고 밝혔다. 39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거주하던 장흥군 관산읍 다산(茶山)에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것이 41세 때부터였다.
-벼슬길이 열리다-
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학문세계 下
부패한 조선, 실용학문 개척한 ‘호남의 천재’
율곡의 개혁사상을 본받다
여섯 조항의 큰 줄기 강령을 열거하고, 그 강령의 세부적 실천논리를 개진한 내용이 다름 아닌 ‘만언봉사’였다. 여섯 조항 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두고 주장한 대책은 바로 마지막 조항인 법제개혁의 논리였다. “혁폐(革弊)의 주장은 율곡 선생이 오래 전에 누누이 설명했습니다. 지금 그분의 문집을 가져다가 고찰해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만약 그 당시에 율곡 선생의 대책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임진왜란의 화란도 그처럼 혹독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법제의 폐단은 율곡 선생 때보다는 백배나 더 심한데,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단 한 사람도 율곡 선생의 주장을 임금에게 진언하는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분노에 찬 주장을 계속하였다.
율곡이 누구인가. 위백규보다는 한 세대 선배인 탁월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오래 전에 율곡의 위대함을 넉넉하게 설파하였다. “근세의 율곡 선생 같은 분은 법제개혁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당시의 집권자들은 옳지 않다고 말했지만, 지금 다시 고찰해보면 너무나 명쾌하고 절실한 대책이었다. 그러니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대체로 조선왕조 이래로 현실적으로 처리할 일을 가장 잘 알던 분은 율곡이었다”라고 성호는 그의 글 ‘논경장’(論更張)에서 설파하고 있다. 위백규 역시 실학자답게 율곡의 경장(更張)이론에 영향을 받아 당시의 부패한 제도와 무너진 국가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펴고 있었다.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新我之舊邦)라고 외치며 국가개혁의 마스터플랜인 ‘경세유표’를 저작한 다산 정약용은 위백규의 한 세대 뒤의 후배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연면한 사상을 총정리하고 종합하여 실학을 집대성한다.
위백규의 유적지를 찾아서
전라도의 땅끝 마을 장흥. 장흥읍 입구에는 존재 위백규의 동상이 우람하게 서있다. 육지의 땅 끝에 가장 우람하게 서있는 산은 장흥의 천관산이다. 천관산 산자락을 제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게 자리한 마을이 장흥군 방촌(傍村)이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방촌마을은 수백년 동안 장흥위씨(長興魏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했던 마을이다. 산이 좋고 물이 좋은 탓인지, 마을의 어느 구석에도 가난은 보이지 않고 부귀의 모습만 보이는 마을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마을 앞의 넓은 들판을 건너 마주보는 천관산은 현인들의 거주지임에 의심을 지니지 못하게 하였다. 산자락에 쭉 이어져 벌려있는 기와집, 최상단에 위치한 우람한 기와집에 존재 위백규의 선조들이 살아왔으며, 거기서 존재가 태어나 오래도록 생활했던 가옥이다.
존재라는 호는 스승 윤봉구가 위백규에게 써준 ‘존존재’(存存齋)라는 세글자에서 따온 호이고, 마을이 계항산(桂港山) 아래의 계항(桂港)에 자리잡고 있어서 계항일민, 계항운민 등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지난해 추석 무렵 우리 일행은 위백규의 유적지를 찾아 존재의 생가를 들렀다. 땅끝 장흥의 관산 바닷가에서 충청도의 덕산(德山)에 살던 스승 윤봉구를 찾아다닐 수 있었다면 당시 위백규 집안의 살림 형편을 짐작할 만하다. 가세가 그만큼 넉넉하였기에 그만한 와가가 생존시부터 지금까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강진의 다산초당과 장흥의 다산정사
장흥군과 강진군은 군청 소재지로 보면 불과 4~5㎞의 거리다. 장흥군 방촌 마을의 뒷산 자락 한 부분이 다산(茶山)인데, 강진의 만덕산 아래 산자락의 한줄기가 또 다산이다. 장흥의 다산에서는 존재 위백규가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학문에 힘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강진의 다산초당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위백규는 전라도 출신의 큰 실학자였고, 정약용은 경기도 출신이지만 다산초당에서 학문을 완성하였다. 이런 우연도 있는 것인가. 세상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위백규는 노론계통의 학자였고, 정약용은 남인계열의 학자였다. 귀양오기 3년 전에 타계하여, 위백규의 학풍이 다산이 살아가던 곳에도 남아 있었겠지만, 다산의 저서에 위백규는 언급된 바가 없다. 이 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계항 마을 출신으로 위백규에게는 방손(傍孫)인 위황량(魏滉良)씨의 안내로 생가도 둘러보고, 다산정사에도 올라가 위대한 학자, 천재학자의 흔적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다산정사의 바로 곁 산등성이에는 위백규의 묘소가 있었고 선대의 묘소도 쭉 이어져 있었다. 1798년에 세상을 떠난 존재, 200년이 훨씬 넘게 그곳에 잠들어있으나, 묘역은 정말로 초라했다. 높은 학문에 비교하여 겨우 현감이라는 낮은 벼슬 때문에 신도비도 세울 수 없고, 화려하게 묘역을 치장할 신분이 되지도 못했다. 그래서 재야 선비의 묘소로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곳 어디에 무슨 지령이 있었기에 이만한 천재가 이곳에서 태어나 그만한 학문의 업적을 이룩했을까. 존재의 아버지는 진사(進士)로 호가 영이재(詠而齋)이던 위문덕(魏文德)이었고, 조부는 삼족당(三足堂) 위세보(魏世寶)로 시·서·화 3절로 유명했던 당대의 문사였다고 한다. 글과 시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가문의 유풍을 이어받고 다산의 산자락에 자생하는 차가 자랐기에 그런 향기로운 운치를 타고나서 그만한 대학자가 탄생했으리라. 계항산 속 다산정사에서 은자로 숨어살면서 희대의 실학사상을 완성한 존재의 풍모가 그려졌다. 다산사(茶山祠)에는 존재의 신주가 모셔져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문집인 『존재집』과 많은 저서
학문이 높고 실학에 뛰어난 학자라는 명성이 서울까지 울리자, 정조 20년인 1796년에 70세 노인의 저작이 상자에 곱게 담겨 임금에게로 전달된다. 이 때의 문집은 위백규 자신이 정갈하게 편집하여 제책한 24권이었다. 내각(內閣)에 보관되었을 그 문집은 뒷날 잃어버려서 후손들의 손에 의하여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다시 편집하여 1875년에 활자로 인쇄하여 책이 간행되었다. 24권에 12책으로 꾸며져 오늘까지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는 문집이다. 이 문집을 원집(原集)이라 부르고, 간행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고금’(古琴)과 ‘환영지’ ‘황명사략’(皇明史略) 등의 서적이 있는데, 근래에는 모두 영인되어 ‘존재전서’로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문집을 살펴보면 넓고 깊은 존재의 학문세계가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경세학자도 경(經)에 밝지 않고는 정통의 학자가 될 수 없었음은 그 시대의 엄연한 사실이었다. ‘독서차의’(讀書箚義)라는 글에는 대학·논어·맹자·중용 등의 사서(四書)에 대한 골똘한 연구결과가 모두 담겨 있고, 서경(書經)에 대한 연구결과로 ‘요전설’(堯典說), ‘우공설’(禹貢說) 등의 글을 통해 정리되어 있다. 이런 학문의 밑바탕을 튼튼하게 닦은 결과로 그의 실학사상이나 경세학(經世學)의 실용논리도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만덕사(萬德寺)에서 노닐던 존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는 만덕사라는 절이 있다. 다산초당에서 오솔길을 따라 등선 하나만 넘으면 있는 절이다. 18년의 귀양살이 동안에 다산 정약용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절이다. 그렇게 절친했던 스님 혜장선사(惠藏禪師)가 머물던 절로, 만덕사 또는 백련사라고 부르던 절이다. 위백규도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다산이 찾아오기 이전의 일이었다.
동백꽃 떨어져 푸른 잔디를 덮자
금모래 위 게으른 걸음으로 명승지 찾았네
한 곡조 뱃노래에 강위 해가 저물자
사람들 홀연히 동정루(洞庭樓)에 오르네
(山茶花落綠莎 懶步金沙選勝遊 一曲漁歌江日晩 忽然人上洞庭樓)
‘만덕사’라는 제목의 위백규의 시다. 만덕사의 동백꽃 군락지는 세상에 유명한 경관이다. 위백규가 찾았던 그때의 만덕사에도 동백숲은 우거져 꽃이 지고 피었나보다. 이런 시를 짓고 만덕사에 노닐었던 위백규가 세상을 떠난 3년 뒤에 강진으로 다산은 귀양왔고, 그 8년 뒤에 다산초당에 은거하면서 수시로 백련사에서 노닐었다. 정약용의 동백꽃 시는 너무 많아 인용할 수도 없다. 당대의 실학자들이 노닐었던 만덕사에는 지금도 동백숲이 푸르게 우거져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학술과 정치·경제의 중심지 서울에서는 천리의 외딴 바닷가 시골에서 조선후기 학문을 대표하던 호남 3천재의 학문은 중심이 실학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존재 위백규의 학문은 정통유학의 맥을 이으면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학문영역을 개척하였다.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노론 학맥, 권상하의 큰 제자가 병계 윤봉구였다. 윤봉구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시대를 넘어 새로운 학풍을 열었던 존재는 그의 천재성과 눈을 감을 수 없는 부패한 현실이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후배 학자 매산 홍직필은 존재의 ‘묘지명’에서, “천관산 높고 높아/ 전라도 전체에서 우러러보네/ 울창한 다산이여/ 가을 동백도 시들지 않네”(天冠峨峨 一路仰止 有鬱茶山 秋栢不死)라고 읊으며 존재의 유풍여운(遺風餘韻)은 천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만큼 그의 실학사상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논리라는 해석을 내렸다고 여겨진다. 72세로 영면한 그의 혼은 아직도 장흥 고을의 곳곳에 학풍을 식지 않게 하고 있었다.
구한말 시대정신 이끈 시골선비
# 청화정사(靑華精舍)의 화서 고택
첩첩산중의 흐르는 계곡 곁 우람한 왕골 기와집에 몸을 숨기고 도(道)와 진리만 추구하던 화서 이항로(1796~1868)의 서재에 나랏임금에게서 벼슬에 임명했다는 교지(敎旨)가 내려왔다. 학생 이광로(李光老 : 항로의 초명)에게 장사랑(將仕郞)의 품계에 휘경원(徽慶園) 참봉(參奉)이라는 종9품에 해당되는 말단의 벼슬이 내려진 것이다. 그때가 1840년 6월22일, 화서의 나이 49세였다.
# 청화정사(靑華精舍)의 화서 고택
첩첩산중의 흐르는 계곡 곁 우람한 왕골 기와집에 몸을 숨기고 도(道)와 진리만 추구하던 화서 이항로(1796~1868)의 서재에 나랏임금에게서 벼슬에 임명했다는 교지(敎旨)가 내려왔다. 학생 이광로(李光老 : 항로의 초명)에게 장사랑(將仕郞)의 품계에 휘경원(徽慶園) 참봉(參奉)이라는 종9품에 해당되는 말단의 벼슬이 내려진 것이다. 그때가 1840년 6월22일, 화서의 나이 49세였다.
화서 이항로의 생가이자 학문의 도장이었던 청화정사(경기 양평 소재).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등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이론가 및 실천가들이 모두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사진작가 황헌만> |
반백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닦고 쌓은 학문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져 이조판서의 추천으로 초직인 참봉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벌열의 집안도 아니고 세신고가(世臣故家)의 집안도 아닌 시골 선비가 학문적 명성이 높아 참봉의 벼슬에 임명됨은 우선 가장 명예롭던 산림(山林)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어서 환호작약할 만한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화서 이항로는 그런 직책에 취임하지 않고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부족한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간곡하게 밝히고 말았다.
다시 24년이 지난 1864년 고종이 등극하고서 이항로에게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에 임명하고 전라도사로 바꾸었으나 사퇴하고 벼슬에 오르지 않았으니 73세이던 3월의 일이었다. 73세의 극노인에게 하급의 벼슬을 내렸으나 24년 동안 갈고 닦은 경술(經術)의 덕택이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로부터 벼슬 복이 터져 선망의 산림(山林)벼슬이 잇따라 내려졌다. 그해 7월에는 사헌부 지평의 벼슬이 내렸으니 산림으로 대접함이 분명해졌다. 같은 해 겨울에는 사헌부 장령이 내려지고 75세인 1866년 9월8일에는 통정대부 정3품 당상관인 동부승지에 임명되면서 천하에 이항로의 이름이 벽계산림(檗溪山林)으로 울려퍼졌다. 이 무렵은 고종3년의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때로 도하에 인심이 흉흉하고 난리가 났다고 세상이 온통 뒤집히던 때여서 이항로가 동부승지로 입궐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민간에서도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면서 국민적 기대를 안게 되었다.
이항로는 나라에서 보내준 관마(官馬)도 거절하고 집안의 종들이 메는 가마를 탔고, 둘째 아들 이박과 제자 김평묵(金平默)이 도보로 수행하였다. 나라의 큰 은혜를 입은 산림 이항로는 궁궐에 이르자 바로 사직상소와 함께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정책건의서인 상소를 올렸다. 바로 이 상소가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백년 이래의 가장 바른 목소리인 명상소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상소였다. 상소를 올린 며칠 뒤에는 그의 최종 벼슬이자 재신(宰臣)의 지위인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올랐다. 상소로 사직했으나, 그는 산림으로서의 국가적 예우는 충분하게 받은 셈이었다.
이항로는 공조참판이 내린 2년 뒤인 1868년 77세의 3월18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후 34년이 지난 1902년 광무6년에야 정2품인 자헌대부 내무대신에 증직되고, 1905년인 광무9년 황제의 칙명으로 시호를 내렸으니 문경(文敬)공이라는 영예로운 명칭이었다.
벽계산림인 화서 이항로는 청화산(靑華山) 서쪽으로 10리 지점인 벽계수가 철철 흐르는 물가에서 태어났다. 정조 16년인 1792년 2월13일 해 뜰 무렵인 묘시(卯時)에 경기도 양평군(당시는 양근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이란 곳이었다. 바로 그 태어난 집이 ‘청화정사’이다.
이항로의 아버지는 글 잘하는 선비 이회장(李晦章)으로 호가 우록헌(友鹿軒)인데 선대에는 경기도 고양군의 벽진이씨 집성촌에서 살다가 그처럼 깊은 산속으로 피난 와서 살면서 고향이 된 곳이었다. 우록헌 이회장은 전답도 많지 않은 산골인 그곳에서 큰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나 화전(火田)농으로 조를 백석 이상을 수확했다니, 그런 벽지에서는 상당한 재산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화서 이항로가 태어난 ‘청화정사’는 아버지 때부터 와가로 덩실하게 세워졌고, 그곳이 바로 화서학문의 보금자리였으며, 한말 의병운동과 척양척왜의 기본논리인 주리척사(主理斥邪)의 시대정신이 싹텄던 곳이다. 화서의 영향을 받은 대유들로 일본을 물리치고 조선의 전통사상을 고수하자던 화서의 문하 제제다사들이 그곳에서 배출되었다. 중암 김평묵(1819~1891), 성재 유중교(1832~1893), 면암 최익현(1833~1906), 의암 유인석(1842~1915) 등은 위정척사운동의 이론가로, 실천가로서 모두 벽계리의 ‘청화정사’에서 배출된 조선의 마지막 의인들이자 당대의 학자들이었다.
# 화서의 유적지
양평(楊平)은 본디 양근군(楊根郡)과 지평군(砥平郡)이 합쳐져 된 군인데, 화서는 양근 출신이다.
화서 이항로의 영정 |
필자의 증조부 박임상(朴琳相)은 젊은 시절 중암 김평묵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전남 무안군의 지도(智島)에 귀양 왔던 중암의 문하를 찾아 10대 말에 공부하였고, 30대 초반에는 경기도 포천에 계시던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화서 이항로는 바로 우리 집안의 학문연원이다. 시간만 허용하면 우리 집안 학문의 고향인 벽계리를 찾으려는 마음을 잊지 못했는데, 이번 가을에야 겨우 짬을 내서 평생 동안 찾고 싶던 계곡의 시냇물이 콸콸 흐르는 그곳, 벽계리를 찾았다. 화서의 고택인 ‘청화정사’는 우람한 고가이자 근래에 새로 보수하여 볼품이 좋은 건물이다.
금년으로 화서가 세상을 떠난 지 139년, 잊혀질 세월이 흘렀으나, 양평군에서 유지관리하는 화서기념관에는 그래도 몇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후손 이록기씨의 안내로 찾은 당시 화서의 유적지는 그런대로 은은한 옛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시절 이래로 세상을 뜨던 날까지 그가 거닐고 소요하면서 이름을 짓고 시를 쓰며 표지 글씨를 남긴 명소들을 찾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청화정사의 동쪽 언덕 위 제월대(霽月臺)의 터가 있고, 정사 앞의 시냇가에 우람하게 자란 느티나무가 화서를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정사 근처의 명옥정(鳴玉亭)의 터도 있고, 낙지암(樂志巖)이라는 바위는 개울 속의 커다란 바위인데, 물이 주는 때는 언제나 화서가 그 바위에 올라가 쉬고 즐기면서 마음을 달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낙지암에서 50여m를 올라가면 바위에서 내려오는 물결이 하얀 눈을 뿌리는 것 같아, 분설담(噴雪潭)이라는 조그마한 물웅덩이니 그런 이름도 모두 화서가 운치 있게 명명하여, 오늘까지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니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화서는 바로 그런 유적지에서 진리와 도를 찾느라 80평생을 배회하고 소요하면서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학문의 대업을 완성했다.
# 고달사의 옛터는 찾을 길 없고
한 가지 아쉬움은 화서가 평생 동안 독서하고 강론했던 고달사(高達寺)라는 절이 벽계마을 동쪽으로 머지않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오래전에 폐사가 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화서의 시집이나 연보에는 수시로 등장하는 절이자 암자인 고달산사인데 애석한 일이다. 연보 24세 조항을 보면 25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해 28세에 복을 벗자, 그해 겨울에는 고달산의 절에서 독서를 했다고 기록하고는, “선생의 평생 동안의 독서는 고달산에 있는 절에서 가장 많이 했다”라고 적고는 고달사에서 전에 지었다는 시 한수를 써놓았다.
바위와 물의 마을 30년 생애 石泉三十年
이 산골짜기에 몇 번이나 왔던가 幾來此山曲
간단없이 천고를 회상해보지만 疊疊千古懷
책읽기가 언제나 부족일세 讀書常不足
이렇게 자주 찾았던 화서의 연구실이 지금은 흔적도 없으니 애석할 뿐이다.
북한강의 동쪽에 위치한 벽계리, 벽계산림 이항로는 젊은 시절 여행을 즐기던 때 이후에는, 평생토록 북한강을 넘어 서울 쪽인 서쪽으로는 발 한 번 내디디지 않을 정도로 외부의 출입을 그치고 오로지 독서와 사색으로 세월을 보내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강론하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들이 거닐고 놀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강했던 청화정사의 아름다운 주변은 우선 흐르는 벽계수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당시 그곳의 지형을 그린 그림이 전하는데, 그때는 마을 곁의 시냇물 위에 배가 그려져 있으니, 아마도 북한강을 타고 배가 오르내리면서 교통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후손이 설명해준 이야기였다.
# 면암 최익현이 지은 신도비
화서의 혼이 서려있는 벽계리, 청화정사의 뒤쪽 등성이로 오르면 화서 이항로의 무덤을 비롯하여 벽진이씨의 세장산이 아름답게 가꿔져있다. 본디 화서의 묘소는 마을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으나, 최근에 선산으로 옮겨서 오늘의 자리에 있다고 했다. 묘소로 오르는 입구에는 커다란 화서의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에는 면암 최익현의 도도한 문장의 글이 새겨져 있다. 면암은 화서의 큰 제자이자 한말의 의병장으로 의병싸움에 패하여 일본헌병대에 붙잡혀 일본의 영토 대마도에 유폐되었다가, 왜놈의 쌀은 먹을 수 없다고 단식하다가 노환이 도져 끝내 순국했던 의인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 화서와 면암, 이(理)를 높여서 왜군을 퇴치하자던 그들의 혼은 지금도 그곳에 살아 있었다.
금년으로 화서가 세상을 떠난 지 139년, 잊혀질 세월이 흘렀으나, 양평군에서 유지관리하는 화서기념관에는 그래도 몇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후손 이록기씨의 안내로 찾은 당시 화서의 유적지는 그런대로 은은한 옛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 시절 이래로 세상을 뜨던 날까지 그가 거닐고 소요하면서 이름을 짓고 시를 쓰며 표지 글씨를 남긴 명소들을 찾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청화정사의 동쪽 언덕 위 제월대(霽月臺)의 터가 있고, 정사 앞의 시냇가에 우람하게 자란 느티나무가 화서를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정사 근처의 명옥정(鳴玉亭)의 터도 있고, 낙지암(樂志巖)이라는 바위는 개울 속의 커다란 바위인데, 물이 주는 때는 언제나 화서가 그 바위에 올라가 쉬고 즐기면서 마음을 달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낙지암에서 50여m를 올라가면 바위에서 내려오는 물결이 하얀 눈을 뿌리는 것 같아, 분설담(噴雪潭)이라는 조그마한 물웅덩이니 그런 이름도 모두 화서가 운치 있게 명명하여, 오늘까지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니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화서는 바로 그런 유적지에서 진리와 도를 찾느라 80평생을 배회하고 소요하면서 제자들과 어울리면서 학문의 대업을 완성했다.
# 고달사의 옛터는 찾을 길 없고
한 가지 아쉬움은 화서가 평생 동안 독서하고 강론했던 고달사(高達寺)라는 절이 벽계마을 동쪽으로 머지않은 골짜기에 있었는데 오래전에 폐사가 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화서의 시집이나 연보에는 수시로 등장하는 절이자 암자인 고달산사인데 애석한 일이다. 연보 24세 조항을 보면 25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해 28세에 복을 벗자, 그해 겨울에는 고달산의 절에서 독서를 했다고 기록하고는, “선생의 평생 동안의 독서는 고달산에 있는 절에서 가장 많이 했다”라고 적고는 고달사에서 전에 지었다는 시 한수를 써놓았다.
바위와 물의 마을 30년 생애 石泉三十年
이 산골짜기에 몇 번이나 왔던가 幾來此山曲
간단없이 천고를 회상해보지만 疊疊千古懷
책읽기가 언제나 부족일세 讀書常不足
이렇게 자주 찾았던 화서의 연구실이 지금은 흔적도 없으니 애석할 뿐이다.
북한강의 동쪽에 위치한 벽계리, 벽계산림 이항로는 젊은 시절 여행을 즐기던 때 이후에는, 평생토록 북한강을 넘어 서울 쪽인 서쪽으로는 발 한 번 내디디지 않을 정도로 외부의 출입을 그치고 오로지 독서와 사색으로 세월을 보내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과 강론하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들이 거닐고 놀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강했던 청화정사의 아름다운 주변은 우선 흐르는 벽계수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당시 그곳의 지형을 그린 그림이 전하는데, 그때는 마을 곁의 시냇물 위에 배가 그려져 있으니, 아마도 북한강을 타고 배가 오르내리면서 교통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후손이 설명해준 이야기였다.
# 면암 최익현이 지은 신도비
화서의 혼이 서려있는 벽계리, 청화정사의 뒤쪽 등성이로 오르면 화서 이항로의 무덤을 비롯하여 벽진이씨의 세장산이 아름답게 가꿔져있다. 본디 화서의 묘소는 마을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 장사지냈으나, 최근에 선산으로 옮겨서 오늘의 자리에 있다고 했다. 묘소로 오르는 입구에는 커다란 화서의 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에는 면암 최익현의 도도한 문장의 글이 새겨져 있다. 면암은 화서의 큰 제자이자 한말의 의병장으로 의병싸움에 패하여 일본헌병대에 붙잡혀 일본의 영토 대마도에 유폐되었다가, 왜놈의 쌀은 먹을 수 없다고 단식하다가 노환이 도져 끝내 순국했던 의인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 화서와 면암, 이(理)를 높여서 왜군을 퇴치하자던 그들의 혼은 지금도 그곳에 살아 있었다.
화서 이항로의 삶과 사상(下)
-理를 중심에 두고 氣로써 이끌다-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철학
청화정사 주변에 비가 갠 달밤의 정취를 느끼려고 지어놓은 제월대(霽月臺)에 시를 짓고 노닐던 이항로, 젊은 날의 시심은 곱기만 했다.
면암 최익현이 지은 화서 이항로 신도비./사진작가 황헌만 |
시·서·예를 강습하다가 講習詩書禮
맑은 밤엔 때로 술을 마시네 淸夜時酌酒
술 마시며 밝은 달을 보노라면 酌酒對明月
밝은 달은 온 세상을 비추네 明月照九有
이는 제월대에 올라서 젊은 시절에 지은 시다. 갠 달처럼 밝고 맑은 마음을 지니자는 화서의 뜻이 담겨 있다.
‘명옥정’ 아래에 느티나무를 심고 지었다는 시도 보인다. 이렇게 경학과 문학을 함께 익히며 깊고 넓게 사색에 잠기던 화서는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사유의 세계를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일생동안 끌고 가던 학문적 논리이자, 그곳 청화정사를 찾은 제제다사들의 제자들에게 전해준 그의 이론이었다. “이(理)가 주가 되고 기(氣)가 객이 되어야 한다.” 그가 깨달은 지혜이자 표방한 학문의 기치였다. 원리와 원칙에 충실하여 근원적인 주체성을 끝까지 지키자면 이를 중심에 두지 않을 수 없고, 중심의 뜻과 이론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이끌어주는 힘인 기가 객의 자리를 지켜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화서의 핵심 사상이었다.
조선유학사에서 정설로 굳어진 주장의 하나가 한말 3대 성리학자가 경기와 호남, 영남에서 태어나 그들은 서로의 학문적 교류나 사승(師承)의 관계도 없었건만 동일하게 주리(主理)적인 성리학 체계로 같은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기호의 화서 이항로, 호남의 노사 기정진(奇正鎭:1798~1879), 영남의 한주 이진상(李震相:1818~1886)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 지역의 대표적 학자의 위치에 올랐는데, 동일하게 주기(主氣)를 배척하고 주리적 성리학 체계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화서와 노사는 서양의 세력이 물밀듯 몰려오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혼란한 시기를 살면서 강고하게 사(邪)인 서양을 물리치고 정통의 유교논리이자 공맹(孔孟)의 논리이면서 중화주의(中華主義)에 포괄된 논리만을 굳게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확고하게 주장한 학자였다.
척사위정의 확고한 논리 때문에 화서와 노사는 대원군의 뜻과 부합하여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이라는 높은 산림(山林)의 지위에 올랐고, 그런 산림의 영향 아래 수많은 제자들이 척사위정의 운동에 앞장서고 의병대장이 되어 망해가는 나라에 마지막 충성을 바치는 애국자들이 속출하였다. 화서의 제자로 척사운동의 효장은 중암 김평묵이며 의병대장은 면암 최익현과 의암 유린석이었다. 노사의 제자로는 손자 송사 기우만과 집안의 조카인 성재 기삼연이 호남의 의병장으로 스승의 뜻을 계승할 수 있었다.
애군여부(愛君如父) 우국약가(憂國若家)
화서 이항로의 정치사상은 간략하고 명확했다. 기묘사화에 정암 조광조가 억울한 누명으로 사약을 받고 유배지 호남의 능주에서 죽으면서 지은 유시(遺詩)에, “아버지처럼 임금을 사랑했고, 집안 걱정하듯 나라를 걱정했다”(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라고 읊었는데, 화서 이항로는 언제나 그 시를 외우면서 나라의 신민(臣民)이라면 언제나 아버지처럼 임금을 섬기고, 집안 걱정하듯이 나라를 걱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지녔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청화정사의 주변에 맴돌고 있었기에, 화서의 문하에서 최익현이나 유인석 같은 뛰어난 의병장이자 탁월한 애국자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공자는 “나라가 위급한 상태임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見危授命), 맹자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捨生取義)라고 했는데, 화서는 생활철학에서 언제나 그런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가 병인양요 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올린 상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당시의 긴급한 대책을 말하고 백성의 질곡을 제대로 올려 바쳐, 100년 이래의 최고 명상소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어떤 고관대작도 나라의 문제점을 전혀 지적할 수 없을 때에, 73세 고령의 벽계산림은 감히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백성의 아픔을 당당하게 상소로 말했으니, 그의 용기와 실천력이 어느 정도였나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주리(主理)이면서 이기(理氣)는 이물(二物)
노사 기정진은 이(理)가 절대적이라는 유리론(唯理論)을 폈으나 화서는 이기(理氣)는 단정적으로 이물(二物), 즉 두 존재임을 역설했다. 그러나 화서의 이기이물(理氣二物)은 이기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 반드시 차등이 있다고 하여, 이는 높고 기는 낮다는 이존기비(理尊氣卑)이고, 이는 명령하고 기는 명령을 받는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가 주(主)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이는 순수해지고 기는 올바르게 되어 만 가지 일이 제대로 다스려지고 온 세상은 편안해진다”(理爲主 氣爲役 則理純氣正 萬事治而天下安矣)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리론을 통해 중화문물(中華文物)의 정통사상을 고수해야 하고, 중화주의와 반대되는 왜양, 즉 서양이나 일본은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와 결합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척사위정의 논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외세의 침입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급한 시기에 유교적 조선의 정통을 고수하는 논리가 주리(主理)와 연결되고 그러기 위한 행동강령은 왜와 양을 배척하는 주전론(主戰論)으로 이행될 수밖에 없었다. 병인양요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화이론(和夷論)을 배척하며 싸움을 독려했던 이유가 거기서 나왔다.
요즘의 논리로야 세계정세에 어두운 보수주의로 매도할 수 있고, 반세계화의 퇴영적인 논리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부터 150년 전의 유교주의 국가로서의 대응은 그런 점을 정통의 논리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일 수 있었다. 만약 그 무렵 척사위정의 논리조차 없었다면, 개항과 교역의 준비가 전혀 없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척사위정의 논리와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이 한다는 논리가 합해져 의병운동과 직접투쟁의 실천이 가능하여 애국운동과 구국운동이 망해가는 나라의 민족혼을 불태우는 역사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않을까. 화서의 제자들이 이끈 의병운동은 그래서 한말의 마지막 역사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서의 친필 글씨./사진작가 황헌만 |
낙지암(樂志巖)은 그대로 있네
다시 벽계리의 아름다운 경치로 돌아가 보자. 송나라의 주자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경영했다. 퇴계는 도산구곡(陶山九曲), 율곡은 고산구곡(高山九曲), 우암 송시열은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경영했듯이, 화서는 벽계구곡을 경영하였다.
굽이굽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며 도도히 흐르는 벽계수는 현인군자가 세상을 잊고 학문연마에만 마음을 기울일 수 있도록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선중기의 시인이자 학자이며 영의정이던 사암 박순이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이제신(李濟臣), 남언경(南彦經), 김창흡(金昌翕) 등 당대의 명인들이 또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백계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는 어진 이들이 살아갈 흥취를 일게 했던 곳이다. 수천년을 흐르는 물에도 한 치의 변화 없이 화서가 뜻을 즐기면서 노닐었던 ‘낙지암’은 오늘도 그대로 있었다.
책을 덮고 말없이 앉았다가는 斂卷無言坐
문을 열고 가고 또 가보네 出門時復行
지는 꽃이 세상의 적막 잊게 하는데 落花忘世寂
흐르는 물이야 사람 마음 맑게 해주네 流水逼人淸
만 가지 나무에 봄빛이 퍼지는데 萬樹春心發
온 전답에는 빗물에 곡식 자라네 千畦雨澤生
한가롭게 살면서 세월을 붙잡으니 閒居留歲月
괜스레 옛사람의 정취가 떠오르네 聊得古人情
‘낙지암’이라는 제목의 시다. 흐르는 물속에 솟아 있는 바위를 ‘뜻을 즐기는 바위’라고 이름하고 때때로 올라가 시를 짓고 마음을 맑게 하는 수양의 장소로 삼았다. 지금도 물은 흐르지만 바위는 굳게 버티면서 화서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넉넉한 제자들의 훈훈한 정
한말의 비슷한 시기에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고산 임헌회(鼓山 任憲晦)-간재 전우(艮齋 田愚)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맥이 있었고, 화서-중암 김평묵-성재 유중교-의암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학맥이 같은 노론에서 대립하였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 학맥이다. 전우 일파가 나라가 망해가도 선비는 도(道)만 지키면 된다고 은둔의 생활로 일생을 마칠 때, 화서학맥의 많은 제자들은 의병운동과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역사는 누구 편을 들어줄 것인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중암 김평묵은 화서의 사상과 철학을 계승한 철저한 척사위정파로 화서의 수제자였다. 그는 화서의 행장(行狀)을 지어 선생의 일생을 유감없이 기록했고 화서어록(華西語錄)을 저술하여 그의 철학사상을 소상하게 밝혔다. 성재 유중교도 선생의 사상을 남김없이 추출하여 어록으로 정리했으니 부족함이 없는 기록이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의 신도비명을 저작하여 화서의 삶과 사상을 넉넉하게 서술해놓았다. 그 이외의 수많은 제자들이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정리하고 기록하여 문하의 번성함으로는 화서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화서의 철학과 사상은 원집 32권, 부록 9권으로 22책인 ‘화서선생문집’으로 간행되어 온전히 전해지고, 그의 일생은 ‘연보’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화서가 세상을 떠난 30년 뒤인 1899년에 문집은 간행되었는데, 후학들의 연구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영남 최후의 성리학자-한주 이진상(上)
-주리세가(主理世家)-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성주(星州) 이씨의 집성촌으로 ‘한개’라고 부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민속관광 마을이다. 한자로는 대포리(大浦里)인데, ‘큰 개’ 대신 ‘한개’라고 부르며 세상에 이름이 크게 알려진 마을이다. 그곳에 ‘주리세가’라고 현판을 걸고, 한주(寒洲)·대계(大溪)·삼주(三洲)라는 세 개의 편액을 현판으로 붙인 한주의 종택이야말로 말 그대로의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다.
한주 이진상(1818~1886), 그의 아들 대계 이승희(李承熙:1847~1916), 또 대계의 아들 삼주 이기원(李基元)의 3대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일본과 싸우는 독립정신을 키워 만주 벌판에서 투쟁한 대계의 혼이 자랐으며 대계의 제자이자 탁월한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의 혼이 무르익었던 곳이다.
경북 성주군 대산리 한개마을에 있는 이진상의 생가. 1767년에 지어져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성주 이씨의 유서깊은 종택이다. 한주(寒洲), 대계(大溪), 삼주(三洲) 3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
한주의 종택인 ‘주리세가’는 역사가 깊고 인물의 보고인 집이다. 한주의 증조부 이민검(李敏儉)이 영조 43년인 1767년에 건립하였고 고종 3년 1866년에 증손자 한주 이진상이 새로 고쳐짓고 지금에 이르도록 그대로 보존되어오는 유서 깊은 종가다. 조부 이형진(李亨鎭)은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라는 이름 높은 학자의 제자로 성균생원으로 학자의 이름이 컸으며, 그분이 낳은 두 아들로 진사(進士)에 오른 한고 이원호(寒皐 李源祜)와 대학자에 공조판서에 오른 응와 이원조(凝窩 李源祚) 형제가 바로 그 집에서 태어났다. 한고는 바로 이진상의 아버지이고 응와는 숙부였다.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성리학자요,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 망국을 당하자 만주벌판으로 망명하여 공교회(孔敎會)를 설립하여 유학사상을 통한 독립투쟁으로 항일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고, 그 문하에서 심산 김창숙의 독립정신이 배태되었다.
-한주 이진상의 탄생-
조선왕조 말엽인 순조18년(1818)은 다산 정약용이 수백 권의 저서를 안고 강진의 유배지에서 57세의 나이로 고향으로 해배되었던 해다. 기호지방의 대표적 성리학자 화서 이항로가 27세의 나이로 학문이 무르익고, 호남의 대학자 노사 기정진이 21세의 청년으로 독특한 사상체계인 유리척사(唯理斥邪)의 새로운 논리를 구상하고 있던 때였다. 바로 그 해에 영남을 대표하는 최후의 큰 성리학자 이진상이 유서 깊은 종택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도 승승장구로 올라 공조판서에 이른 대감이었지만, 당대의 대학자로 성리학 이론으로도 높은 수준에 이른 한주의 숙부 이원조는 영특한 조카 한주를 그냥 두지 않고 스승이 되어 본격적으로 가르쳐주었다.
한주는 20세에 영남 학문의 고향인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에 대한 숭모의 정을 표한 이래, 집에 돌아와 집안 서재의 이름으로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현판을 걸었다. 운곡노인(雲谷老人)이라던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도산(陶山)에 살았던 퇴계를 법받겠다는 자신의 각오를 천명한 내용이었다. 약하여 ‘운도재(雲陶齋)’라 호칭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철학의 뿌리는 주자와 퇴계에 있음을 그냥 알게 해준다.
한주는 학맥이나 학통에서 특별한 스승을 내세우지 않아 독자적으로 학문체계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마치 화서 이항로나 노사 기정진도 특별한 사승 없이 독자적으로 학문을 개척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젊은 시절에는 숙부 응와공에게서 배우고, 장복추(張福樞)·이정상(李鼎相)·허훈(許薰) 등과 강론(講論)하였고, 35세 때에야 당시의 이름 높은 영남의 학자 정재 유치명을 찾아뵙고, 40세에는 안동으로 서산 김흥락을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심즉리설(心卽理說)-
가학(家學)을 잇고 여러 동료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큰 학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40전후에는 이미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는 이채로운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44세에 완성한 그의 독특한 성리학설인 ‘심즉리설’이라는 논문은 당시 영남학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퇴계의 학설과 완전하게 합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였으나 그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연구와 사색을 거듭하여 독창적인 학설을 끊임없이 발표하였다. 한주는 그의 노년인 51세에야 거유이던 성재 허전(性齋 許傳)을 찾아가 예(禮)를 논하였고, 회갑해인 61세에 그의 대저인 22권의 ‘이학종요(理學綜要)’라는 주저를 저술하였고, 67세에는 다시 손질하여 완성본으로 확정하였고,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성리학의 기본은 ‘성즉리(性卽理)’란 명제에서 출발하여 ‘성리학’이라는 용어가 나오고 송나라의 여러 어진 학자들에 의하여 그것에 대한 학설이 이룩되었다. 그러나 한주는 성(性)이 아닌 심(心)이 곧 이(理)라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여, 주자나 퇴계의 본뜻이 그런 내용이었다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의 성리학은 본디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설과 율곡의 ‘기발이리승일도(氣發而理乘一途)’설이 큰 주류를 이루면서 발전해왔다. 특히 조선후기에 이르자 영남일대에서는 퇴계의 ‘호발설’을 적극 옹호하면서 율곡의 ‘기발설’은 극력 배척했었다. 이런 사상계의 분위기에서 한주 이진상은 ‘이발일로(理發一路)’설을 주장하여 한편으로는 퇴계의 ‘호발설’에도 동의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율곡의 ‘기발설’에도 동조하지 않아 사상계에 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한주문집을 불태우다-
한주 이진상이 세상을 떠난 뒤, 자손과 제자들에 의하여 ‘한주선생문집’ 53책이 간행되자, 퇴계학문을 절대시하던 영남의 학자들이 크게 분노하고 한주문집을 불태우는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수십년 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으나, 한주의 본뜻은 퇴계의 사상과 일치한다는 결론으로 퇴계후손들의 양해 아래 그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최근에는 간행하지 못한 많은 저작까지 함께 합하여 ‘한주전집’ 85책이 새롭게 간행되어 조선 6대 성리학자이자 조선 후기 3대 성리학자인 한주의 학문 전체가 학자들에게 공람될 수 있게 되었다.
-척사(斥邪)와 의병운동-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은 기호와 호남에서 독창적인 성리학을 연구하여 나라가 망하던 망국의 세월에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성리학의 높은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학자였다. 순조 때의 대학자 대산 김매순은 당색이 다르면서도 다산 정약용과 많은 학문적 교유를 했었고 아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그가 다산에게 보낸 편지에, 동양의 유학사를 거론하면서 성리학의 본래 입장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대목이 있다. 바로 ‘약정복성(約情復性)’이라는 네 글자로 압축하고 있는 구절이다. 성리학의 본디 목표가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정(情)을 제약하고 본디 타고난 착하고 선한 성품을 제대로 회복하는 것이 성리학의 요체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성리학의 원리는 너무나 사변적이고 관념적으로 논쟁이 계속되면서 본래의 목적에서는 멀어지고 당동벌이(黨同伐異)의 당쟁무기로 둔갑하여 자신들과 다른 당파에 공격의 역할이나 하고 있던 것이 한말의 사상계 동향이었다. 이러던 시절에 화서·노사·한주의 세 성리학자는 자신들의 주리(主理) 이론을 ‘이존기비(理尊氣卑)’ ‘유리척사(唯理斥邪)’ ‘이발일로(理發一路)’와 ‘심즉리’로 압축하여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망국에 즈음하여 뜨거운 민족혼으로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의 불꽃을 피우게 하는 몸으로 실천한 성리학자들이 되었다.
화서의 제자들인 면암 최익현과 의암 유린석, 노사의 제자인 송사 기우만, 녹천 고광순, 성재 기삼연, 한주의 아들 이승희와 그의 제자 심산 김창숙으로 이어지는 의리와 독립의 성리철학은 마지막 조선의 혼을 지켜주는 대들보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대계 이승희의 의혼-
한주의 아들로 태어나 한주의 성리학과 사상을 계승한 한계(韓溪)·강재(剛齋)·대계라는 호로 불리던 이승희는 독립지사이자 큰 학자였다. 뒷날 망국의 시절에 북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풍찬노숙의 고난을 겪다가 끝내 고향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지 낯선 타국에서 70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인 1908년에 만리타향인 소련 영토 블라디보스토크에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자 망명객인 의암 유린석(당시 67세)과 한주 이진상의 아들 대계 이승희(당시 62세)의 해후가 이루어졌다. 나라의 독립을 찾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에 앞장선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만난 것이다. 의암의 기록에 이승희와 만나 ‘심즉리설’을 토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들이 어찌 ‘심즉리’의 성리학설만 토론했겠는가.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민족과 나라를 독립시키자는 원대한 포부와 뜻도 함께 토론했음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리라.
한주 이진상은 59세이던 1876년 운양호 사건으로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자 망국의 징조를 느끼며 의병을 일으키려고 동지들을 규합하다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다. 실천적 성리학자 이진상은 조국의 안위를 잊은 적이 없었기에 그런 혼이 아들과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우국의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이승희와 함께 한주 문하의 큰 학자인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도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뒷날 장석영은 스승 한주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그의 높은 학문과 덕행을 유감없이 기술하여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영남 최후의 성리학자 한주 이진상(下)
-한주학단(寒洲學團)-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유명종 교수) 한말 영남 일대에 한주의 학문은 크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후산 허유(后山 許愈), 물천 김진호(勿川 金鎭祜),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 대계 이승희, 홍와 이두훈(弘窩 李斗勳), 자동 이정모(紫東 李正模), 면우 곽종석등 당대의 학자들이 학단을 이루어 한주의 학문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몇몇 제자들은 망국의 의리에 소극적으로 대처한 사람도 있었으나 아들 이승희나 제자 장석영 등은 스승의 학문과 사상의 실천에 앞장 서서 북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경북 성주 대포리 유서깊은 한개마을에 위치한 이진상의 종택. 세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3대(한주·대계·삼주)의 호를 판각한 현판이 걸린 사랑채가 있고, 별채로 한주정사라는 정자가 있다. |사진 작가 황헌만 |
특히 ‘한주학단’의 학자들과 호남의 노사 기정진의 문하인 ‘노사학파’와의 연결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한주학파와는 다르게 호남에 기반을 둔 노사학파는 그 제자들이 호남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남 우도인 경남지역에도 많은 학자들이 노사문하를 출입했다. 월고 조성가(趙性家), 계남 최숙민(溪南 崔淑民), 노백헌 정재규(老栢軒 鄭載圭:1843~1911) 등이 대표적인 영남의 노사학파이다. 그중에서도 노백헌 정재규가 노사문하의 고족(高足)인데, 그는 한주의 제자 후산 허유와 가까운 벗으로 일생 동안 학문논쟁과 토론을 그치지 않아 노사학문과 한주학문이 결합되는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 이룩되었다.
허유와 함께 사칠설(四七說)을 논하고 이기설을 논했던 정재규는 한주 이진상과도 어울리면서 많은 학문적 토론을 거듭했다. 주리설(主理說)에서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한 노사의 학문과 이발일로설(理發一路說)의 한주 사상에는 일맥상통하는 점을 서로 인정하여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이후 몇 백 년 만에 영남과 호남의 학문적 교류와 학자들의 접촉이 성대하게 이루어졌던 점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호남의 학문 교류-
삼가(三嘉)의 물계리(勿溪里)에 살던 정재규의 집에는 호남에서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나 노사의 제자 일신재 정의림(日新齋 鄭義林)이 찾아오고, 한주학파의 대계 이승희가 찾아오면서 영남학과 호남학이 격의 없이 토론하는 아름다운 학문 활동이 전개되었으니 얼마나 부러운 일이고 보기 좋은 일인가. 허유나 이승희 이외에 한주의 제자인 자동 이정모(李正模) 등과도 함께 도의를 강마하고 성리설을 논했던 점은 주리학파의 시대적 요구에 응한 아름답고 훌륭한 지역 타파의 본보기였기에 두고 두고 찬양해야 할 멋진 일임에 분명하다. 이 점은 오늘의 이 나라 지역갈등의 해결을 위한 문제로 여겨 심도 있는 학술적 연구가 계속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더구나 한주가 직접 노사의 학설을 읽고 그에 대한 해석을 했던 점으로 보아 이들의 학문적 견해와 사상이 어떻게 일치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히는 점도 한번쯤 연구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한주학단의 간재학파 비판-
한주의 제자로 가장 높은 성망의 학자는 역시 면우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었다. 한주학설을 계승하고 부연하여 179권의 방대한 문집을 남긴 면우는 학문적 명성에 의하여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이라는 고관에 올랐다. 을사늑약이 이룩되자 조약을 폐지하고 5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한 적도 있으나 경술(1910)년 망국의 무렵에는 몸을 사려 주변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기미독립운동 무렵에는 마침 제자 김창숙 등과 함께 파리장서사건을 일으켜 투옥되는 등 만절(晩節)을 지켜 한주의 제자임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 간재 전우(艮齋 田愚)라는 학자는 곽종석에게 내리지 않는 학자로서의 성망을 얻었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재야 학자였으나 임금의 은혜로 산림(山林)의 대접으로 감역(監役), 장령(掌令),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라는 높은 지위를 받았으나, 나라의 일에는 재야학자가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서해의 섬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지냈다. 그때가 어떤 때인가. 나라는 전복되고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는 도탄에 빠지고 온 나라가 요동치던 때여서 어리석은 여자로서도 안방에서 눈물을 금하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던 때에 사류(士類)로서 도만 지키고 살면 된다고 일체의 나랏일에 관여 안했던 사람이 간재 전우였다. 대계 이승희, 심산 김창숙 등은 그런 점에서 간재학파의 색은행괴(索隱行怪)의 행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실천적 행위에 힘쓰지 않는 공리공언(空理空言)의 관념적 성리학이라고 비판했었다. 이 점은 현상윤(玄相允)의 ‘유학사’(儒學史)에서도 자세히 논했으니 참고할 일이다.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의 한주 방문-
1882년 임오(壬午)년은 한주의 나이 65세가 되어 노학자로 한창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해에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이던 교리(校理) 이건창(1852~1898)이 한주를 찾아 한개마을을 방문했다. 한주의 높은 성망을 듣고 방문한 영재 이건창은 학문적 토론을 쉬지 않았다. 영재가 한주에게 학문하는 대도(大道)를 물었다. 한주의 답변이 바로 그의 실천철학이자 몸으로 실천하는 성리학의 논리였다. “학문을 연구함에는 반드시 실심(實心)을 지녀야 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물(事物)에는 모두 실리(實理)가 있는데, 실심을 지닌 뒤에야 실견(實見)이 있게 되고 실견이 있는 뒤에야 실행(實行)을 하게 됩니다. 실(實)이란 정성(誠)일 뿐입니다”(爲學必須實心 天下事事物物 皆有實理 有實心而後有實見 有實見而後有實行 實者誠而已)라는 명답을 해주었다고 한주연보(寒洲年譜)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실심·실리·실견·실행, 즉 그런 실이라는 성(誠)이 없는 학문이나 성리학은 공소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실행, 실천, 실견의 행실과 행위가 없는 성리철학은 관념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행동이 없는 어떤 논리도 실익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주 학문의 요체였다. 이런 학문의 실체 때문에 실천과 실행에서 벗어난 간재학파의 논리는 한주학파로부터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유서 깊은 한개마을-
오랫동안 이름만 들었던 한개마을, 대포리(大浦里)는 멀리 큰 들을 건너 낙동강의 한 가닥이 보이고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형국이어서 인물의 보고임을 그냥 짐작할 수 있었다. 민속관광마을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마을 입구에는 큰 간판이 마을의 내력을 설명해주고 크고 넓은 와가들이 즐비해 있어, 이름 있는 마을임을 보아서도 알게 해준다. 판서댁, 진사댁, 한주댁 등의 입간판이 있어서 문화재로 지정된 주택을 찾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초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에 우리가 찾은 한주종택에는 다음 날이 종택의 시제(時祭)를 지내는 날이어서 주부 한 분이 열심히 제수를 장만하느라 바쁜 이유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
한주의 증조부 이민검(李敏儉)이 짓고 한주가 개수(改修)했으니 150년이 넘은 고택이다. 몸체 곁에 세가(世家)라는 이름에 걸맞게 3대(한주·대계·삼주)의 호를 판각한 현판이 걸린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를 지나 별채로 한주정사(寒洲精舍)라는 정자가 오래된 나무에 가려 고즈넉이 서 있었다. 이곳 사랑과 정자에 얼마나 많은 한주학단의 문제자들이 출입했을까. 당대의 학자 영재 이건창이나 노백헌 정재규도 출입했다. 심성철학이 논해지고 이기사칠(理氣四七)의 높은 학문이 논해졌으리라. 또 이 종가를 중심으로 일제하 가장 큰 유림단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사건도 이곳을 중심으로 해서 모의되고 실천되었다.
종손마저 출타하고 없는 집안의 모든 건물은 아무런 말이 없다. 역사가 침묵하고 있는 것인가. 망국을 당해 독립운동이나 의병활동에 동참하지 않는 나약한 성리학자들을 질타하던 대계 이승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주자(朱子)를 조술(祖述)하고 퇴계를 본받자던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의 현판이 뚜렷하여 주자와 퇴계의 혼까지 이 종택의 주변을 맴도는가 여겨졌다. 독창적이고 실천적인 성리학 체계를 새롭게 세워, 기호의 이항로, 호남의 기정진과 함께 영남을 대표했던 당대의 철학자 한주 이진상의 혼도 이 종택에 맴돌고 있겠지만, 그는 지금 한개마을에서 멀지 않은 뒷산에 다소곳이 누워계신다.
한주이선생지묘(寒洲李先生之墓)라는 소박한 비 하나가 묘소 앞에 세워져 있을 뿐, 초라하기 그지없는 묘소다. 1886년 10월15일 대학자 한주선생은 눈을 감았고 그 다음해인 1887년 2월20일 2000여 명의 사림(士林) 등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가 치러졌다. 1895년 25책의 문집이 간행되었고 22편 10책의 ‘이학종요’라는 한주의 주저는 그 2년 뒤인 1897년에야 간행되었다.
문인 장석영의 저술인 ‘묘지명’은 1908년 구워서 묘소에 묻었으며 아들 이승희가 지은 묘표(墓表)가 묘소 앞의 빗돌에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문인 곽종석이 지은 장문의 행장과 묘지명은 모두 문집에 수록되어 그의 일생을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묘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5세에 모든 경전을 꿰뚫어 이해하였고, 18세에 중부(仲父) 이원조공으로부터 인심과 도심, 정일(精一)의 뜻을 강론받자 그로부터 뭇 성인들의 학설을 널리 구하고 주리(主理)의 뜻을 얻어내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였다”(十五淹貫經籍 十八講人道精一之旨于仲父定憲公 因慨然博求群聖之說 得主理之訣 篤信而實踐之)라고 설명하여 그의 실천철학을 높이 평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 있음을 한개의 양반 마을은 보여주고 있었다. 화서·노사·한주의 제자들인 유린석·정재규·이승희의 만남에서 한말의 성리학이 이 마을에서 만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국 지도자 서애(西厓) 유성룡 上
퇴계 제자로 ‘화합과 조정’의 명수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선조 40년인 1607년 5월6일 6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래서 지난해인 2007년은 서애가 세상을 떠난 400주년으로 대대적인 기념과 추모행사가 열렸었다. 1542년인 중종 37년 10월1일, 서애는 외가인 당시의 의성현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고향은 당시는 풍산현, 지금은 안동시 풍산면 서쪽에 자리한 하외라는 마을이었다. 이제는 ‘하회(河回)’로 바뀌어 세상에서 유명한 곳이 바로 서애의 고향이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 그 강이 돌면서 만들어진 마을이 서애의 고향이어서 강물이 돌아가는 하회(河回)가 되었고, 마을에서 강 건너 서쪽 절벽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그곳을 사랑했던 이유로 서애(西厓)라는 호를 자호로 삼았다.
서애의 서원인 병산서원이 자리잡은 터. 사진작가 황헌만 |
그는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아버지 유중영(柳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님 겸암 유운룡(謙唵 柳雲龍)도 문과에 급제하여 서애보다는 벼슬이 낮았으나 학문과 덕행으로 서애에 버금가는 이름 높은 학자이자 관인(官人)이었다. 우선 태어나기를 좋은 집안에서 유복하게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넉넉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에 정성을 바칠 수 있었다.
학자로서의 소양을 제대로 갖추려면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풍산현의 이웃고을인 예안(禮安:지금의 안동)현에 당대의 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陶山)에서 강도(講道)하고 있던 때였다. 서애는 가정에서 학문을 익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른 21세에 퇴계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인 도학(道學) 공부에 몰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퇴계에게서 직접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학을 배우고 몇 달을 도산에 머무르면서 깊고 넓게 도(道)를 얻어들었다고 한다.
23세에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1등과 3등으로 합격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태학(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고 과거공부에도 열중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열렸고, 29세에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의 예를 다하며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벼슬은 오르고 올라 47세에는 대제학으로 나라의 문권(文權)을 쥐었고 49세에는 우의정이라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정승에 올랐다. 51세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으로 국난에 임하는 임금 다음의 최고의 사령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하회마을의 서애 유성룡 종택인 충효당 전경. 사진작가 황헌만 |
퇴계의 제자로 익힌 학문을 후학들에게 전수했으니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 당대의 학자들이 서애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그래서 서애는 뛰어난 정치지도자이자 퇴계의 학맥을 이은 학자로서도 큰 명망을 얻었다. 서애가 세상을 떠나자 고족(高足)인 우복(愚伏) 정경세는 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수준 높은 학자로서 스승인 서애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서애의 일생을 상세하게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스승은 재능으로는 온갖 실무를 처리하기에 넉넉하였고, 학문으로도 세상을 다스려 백성들을 구제하기에 넉넉하였다”(才足以應務 學足以致用)라는 결론을 내렸다. 실무처리능력과 학문역량을 함께 지녔던 서애의 인품을 제대로 기술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화합과 조정의 정치지도자
지도자는 조화를 이루고 조정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극단적인 대립이 벌어지고 각을 세운 논쟁이 치열할 때에 거중조정을 통하여 실마리의 얽힘을 풀어서 화합의 분위기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 서애는 모두가 인정했던 당대의 정치지도자였다. 화합과 조정의 명수가 서애였음을 알게 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31세에 서애는 옥당벼슬이라는 명예로운 홍문관의 수찬(修撰)으로 재직하였다. 이 무렵 어느 날,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와 여러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어떤 수준의 임금인가?”라고 묻자, 정이주(鄭以周)라는 신하가 먼저 답했다. “전하는 요순과 같은 임금입니다”라고 답했다. 서애와 쌍벽으로 퇴계의 제자로 이름 높던 학봉 김성일(金誠一)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학봉은 곧고 바른말 잘하기로 세상에 명성이 높던 분이다. 학봉이, “전하는 요순과 같은 임금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세상에 포악한 임금의 대명사)와 같은 임금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는 순간 임금의 얼굴에 극도의 분노가 보이며 좌중이 전율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안동시 풍산면 수동리에 있는 서애의 묘소. 사진작가 황헌만 |
그런 위기의 순간에 서애는 뛰어난 기지와 조정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서애가 사뢰기를 “정이주가 말한 바의 요순과 같은 임금이란 임금님을 그런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미이고, 김성일이 말한 걸주 같은 임금도 될 수 있다는 것은 걸주 같은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말이니, 두 사람 모두 임금님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라고 능숙하게 답변하자, 임금이 그때에야 기뻐하며 얼굴빛을 바꾸고 술상을 가져오라 명하여 즐겁게 지내다 파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서애가 아니었다면 김성일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서애의 말솜씨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지도자는 인재를 천거할 줄 알아야
서애의 인물됨이야 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그래도 가장 많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의 한 분이다. 그는 영의정이라는 국가의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여 구국의 정치지도자라는 호칭에 걸맞게 행동한 인물이다. 그러나 서애라고 약점은 없고 장점만 있는 인물은 아니다. 율곡 이이는 후배인 서애에 대하여, “서애는 재주나 식견이 높아 임금께 올려 바치는 건의를 잘하였다. 더욱 경연에서 아뢰는 내용은 모두가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일관된 마음으로 봉직하지 못하고 이롭고 해로운 점만 따지려는 부분이 있어 식자들이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라는 평을 하였고, 문장·학문·청빈 등 모든 것이 다 좋으나 어떤 경우 골경(굳세고 곧은 성품)의 풍모가 부족한 점을 남들이 한스럽게 여겼다는 평가도 있었다. 화합과 조정의 능력에 온화한 성품이 뛰어나 강하고 굳세지 못한 성격을 탓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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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단점이 있으면서도 서애가 지도자로서 우뚝 서있었고 무거운 성망을 잃지 않았던 데에는 그가 인재를 제대로 천거하고 능력을 알아보아 발탁하는 뛰어난 지감(知鑑)을 지녔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의 비참한 패망에서 승리의 두 장군을 들자면 충장공 권율(忠壯公 權慄)과 충무공 이순신이다. 바로 이 두 위대한 애국자이자 뛰어난 전략가들 때문에 나라가 중흥될 수 있었으니, 그 두 사람을 천거한 서애야말로 임진왜란으로 패망해버린 조선이라는 나라를 중흥시킨 주인공이었다.
본디 서애는 인재발탁에 대한 높은 정치철학을 지닌 분이었다. 그의 유명한 논문이자 국가에 바친 정책건의서인 ‘청광취인재계(請廣取人才啓)’라는 글에 서애의 뜻이 담겨있다. 널리 인재를 발탁하기를 청하는 건의서인데, 1594년 53세의 서애가 전쟁이 한창이던 난리통에 임금에게 바친 건의서는 지금 우리가 읽어도 바르기만 한 주장이다. 아무리 천한 사람,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도 약간의 재주만 있다면 무조건 등용시켜 활용토록 해야 한다고 했다. 단점은 묻어두고 장점만 취해야 하고 신분이나 문벌로 인재를 고르는 악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인재발굴의 10대 원칙을 열거했으니 병법(兵法)에 밝은 사람, 학식이 있고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 담이 크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 집안에서 효제(孝悌)에 뛰어난 사람, 문장에 뛰어나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 농사일에 밝고 농업기술이 있는 사람, 염업·광산업·무역업에 밝은 사람, 수학과 회계에 밝은 사람, 병기를 잘 만드는 사람 등 열 가지 종류의 인물들은 신분이나 가문을 따지지 말고 조건 없이 발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발탁되지 못했다면 그때의 조선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삼한(三恨)을 지녔던 서애
66세에 생을 마친 서애, 그 당시로는 천수를 제대로 누린 나이다. 대제학에 이조판서,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라 모든 복을 다 받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모진 전쟁에 온갖 시달림을 받았고, 당파싸움의 격화로 반대파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서애, 그는 노년에 자신에게는 세 가지의 한(恨)이 있노라는 술회의 기록을 했다. 첫째는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했다. 둘째, 벼슬은 지나치게 높았는데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했다. 셋째, 망령스럽게 도(道)를 배우겠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다. 바로 그 세 가지가 자신의 한(恨)으로 여겼다니 얼마나 겸허하고 공손한 삶의 자세였는가.
서애의 어머니 안동 김씨는 남편을 잃고도 매우 오랫동안 살았다. 유운룡·유성룡 두 형제의 지극한 효도로 온갖 영화를 누리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서애는 효도로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뛰어난 효심의 발로다. 임진왜란에 그만한 공업을 이루었건만,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마음도 얼마나 훌륭한 정신인가. 퇴계의 학통을 이은 도학자로 많은 제자들에게 도를 전해준 학자였지만, 도학에 뜻을 두고도 이룬 바가 없다는 그의 겸손함이 바로 그와 같은 큰 정치지도자로 대접받게 했던 것이 아닐까. 못된 일은 다 하고도 자기만 잘 했다고 떠드는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서애의 ‘삼한’은 많은 반성의 자료가 될 것이다.
구국 지도자 서애(西厓) 유성룡 下
전란을 경계삼아 비전을 제시하다
눈을 감은 지 400년이 지났지만
4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서애는 지금의 안동시 풍산면 수동리(壽洞里)라는 마을의 뒷산에 누워있다. 우리가 서애 유적지를 찾은 초겨울의 그날은 바로 수동리 서애의 묘소에서 묘제를 지내는 날이었다. 서애 400주년 기념 묘제인데, 전국에서 모인 유림, 후손들이 합쳐 수백명이 넘는 대단한 인파였다. 그가 남긴 유덕(遺德)이 얼마나 크기에 그만한 인파가 모여 묘제를 올리는 것일까. 400년, 이제는 잊을 만큼 세월도 흘렀건만 그의 마음과 혼이 살아계신 듯, 참으로 공손하고 엄숙하게 제를 올린다. 모인 모두가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쓴 모습으로 보기도 아름답게 제를 올리고 있었다.
서애의 서원인 병산서원의 강학공간(사진 위)과 하회마을의 겸암 유운룡의 종택인 양진당 전경(아래 왼쪽). 아래 오른쪽 사진은 징비록 표지. <사진작가 황헌만> |
묘소에도 일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서애의 뜻이 살아있었다. 6대 후손 운(澐)이라는 분이 지은 간단한 묘비가 하나 서있을 뿐, 그 흔한 신도비 하나 없었다. 서애의 일대기는 그의 제자 정경세의 행장만 남아있을 뿐, 신도비는 애초에 짓지도 않았다니 그러한 낭비를 하지 말라는 서애의 유훈에 의해서 지켜진 일이라고 했다.
어지간한 인물의 묘소에는 의당 제각도 있고 여러 가지 치장이 있게 마련인데 서애의 묘소에는 제각 하나 없이 초라하지만 검소하고 청렴한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서애의 서세 400주년 기념행사가 전국 도처에서 열렸던 것도 큰 지도자의 유덕은 그렇게 후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의 하나였다.
충효당(忠孝堂)을 찾아서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마을이 하회마을이다. 겸암 유운룡의 종가인 양진당(養眞堂)과 서애의 종가인 충효당이 있기에 하회는 시골마을로 나라 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민속관광촌으로 대표적인 곳이 바로 그곳이다. 서애의 14대 종손 유영하(柳寧夏)가 거주하면서 하루에도 수백명의 방문객과 관광객을 맞는 그곳이 바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낙동강으로 둘러싸여 아름답기로도 비길 곳이 없지만, ‘하회탈’과 ‘하회탈춤’이라는 탈과 춤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곳이다. 얼마 전에 영국 여왕의 방문으로 전세계에 잘 알려지기도 했다.
충효당에서 멀지 않은 낙동강가에 서애의 서원인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서애의 후학들이 서애의 학문을 기리고 후학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의 도장으로 세웠다. 요즘도 수시로 학회가 열리고 학술토론이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서애의 학문과 사상, 우국충정의 뜨거운 혼이 식지 않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학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임진왜란을 치른 탁월한 공신으로 서애가 받은 서훈은 참으로 거창하다. 조선국(朝鮮國)을 앞에 놓고, 수충(輸忠)·익모(翼謀)·광국(光國)·충근(忠勤)·정량(貞亮)·효절(效節)·협책(協策)·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는 칭호에 풍원부원군의 봉호를 받았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글자마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건져낸 그의 충성심과 효성을 기리기 위한 공신의 칭호였다.
천추에 전해질 ‘징비록(懲毖錄)’
서애는 그만한 공훈을 세우고도 당파싸움에 밀려 노년기는 불우하게 은거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겨를은 또 하나의 행운이었으니, 그런 여가를 이용하여 그의 학문은 익어갔고 그의 사업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다른 동문들과 함께 퇴계가 세상을 떠난 31년째인 59세의 서애는 ‘퇴계집’을 편찬하여 간행하고 퇴계의 연보를 손수 편찬하는 위업을 이룩하였다. 퇴계의 학문과 일생이 서애의 손을 거쳐 이룩되었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임을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퇴계선생연보’의 발문에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가 수집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연보를 기술했노라는 서애의 글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은퇴하여 한세월을 보내던 서애는 초당(草堂)을 짓고 은자의 생활을 즐겼다. 그렇다고 임금과 나라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 혹독한 전쟁, 난후의 가난과 병마가 휩쓴 조선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참한 현실이 전개되었다는 것이 서애의 기록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전쟁이 나지 않고, 국방이 튼튼한 나라가 될 수 있는 방책을 세우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가 아니던가. 이래서 서애는 그 유명한 ‘징비록’이라는 명저를 남긴다. 시경(詩經)에 ‘징전비후(懲前毖後)’라는 글귀가 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취하여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전쟁의 비참상, 무너지던 나라의 처참한 상태, 그런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서애는 나라의 재건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으니 그게 ‘징비록’이다. 이제는 영어로까지 번역되어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 책 하나만으로도 서애는 영원한 역사적 인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제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마는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어둔다”라는 서애의 징비록 저작 목적이 지금에 더욱 새롭다.
이조판서로서의 서애
46세에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하여 59세에 간행한 서애는 50세에 이조판서로 있으며 국가적 대업을 이룩했으니 자신의 권한인 인재 천거를 정확하게 해낸 일이다. 그 해는 선조 24년으로 1591년인데 이조판서에 임명된 서애는 수상하기 그지없던 일본의 정정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임금께 상주하여 통신사를 파견토록 건의한다. 전례가 없이 우의정에 이조판서를 겸직한 서애는 국사의 중요 부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상주한 상반된 내용으로 시끄럽던 무렵이 바로 그때의 일이다. 많이 알려진 그 부분은 언급을 생략한다.
임진왜란을 치른 탁월한 공신으로 서애가 받은 서훈은 참으로 거창하다. 조선국(朝鮮國)을 앞에 놓고, 수충(輸忠)·익모(翼謀)·광국(光國)·충근(忠勤)·정량(貞亮)·효절(效節)·협책(協策)·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는 칭호에 풍원부원군의 봉호를 받았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글자마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건져낸 그의 충성심과 효성을 기리기 위한 공신의 칭호였다.
천추에 전해질 ‘징비록(懲毖錄)’
서애는 그만한 공훈을 세우고도 당파싸움에 밀려 노년기는 불우하게 은거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겨를은 또 하나의 행운이었으니, 그런 여가를 이용하여 그의 학문은 익어갔고 그의 사업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다른 동문들과 함께 퇴계가 세상을 떠난 31년째인 59세의 서애는 ‘퇴계집’을 편찬하여 간행하고 퇴계의 연보를 손수 편찬하는 위업을 이룩하였다. 퇴계의 학문과 일생이 서애의 손을 거쳐 이룩되었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임을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퇴계선생연보’의 발문에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가 수집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연보를 기술했노라는 서애의 글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은퇴하여 한세월을 보내던 서애는 초당(草堂)을 짓고 은자의 생활을 즐겼다. 그렇다고 임금과 나라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 혹독한 전쟁, 난후의 가난과 병마가 휩쓴 조선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참한 현실이 전개되었다는 것이 서애의 기록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전쟁이 나지 않고, 국방이 튼튼한 나라가 될 수 있는 방책을 세우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가 아니던가. 이래서 서애는 그 유명한 ‘징비록’이라는 명저를 남긴다. 시경(詩經)에 ‘징전비후(懲前毖後)’라는 글귀가 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취하여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전쟁의 비참상, 무너지던 나라의 처참한 상태, 그런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서애는 나라의 재건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으니 그게 ‘징비록’이다. 이제는 영어로까지 번역되어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 책 하나만으로도 서애는 영원한 역사적 인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제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마는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어둔다”라는 서애의 징비록 저작 목적이 지금에 더욱 새롭다.
이조판서로서의 서애
46세에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하여 59세에 간행한 서애는 50세에 이조판서로 있으며 국가적 대업을 이룩했으니 자신의 권한인 인재 천거를 정확하게 해낸 일이다. 그 해는 선조 24년으로 1591년인데 이조판서에 임명된 서애는 수상하기 그지없던 일본의 정정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임금께 상주하여 통신사를 파견토록 건의한다. 전례가 없이 우의정에 이조판서를 겸직한 서애는 국사의 중요 부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상주한 상반된 내용으로 시끄럽던 무렵이 바로 그때의 일이다. 많이 알려진 그 부분은 언급을 생략한다.
서애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그해인 임진왜란 1년 전에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인재를 발탁하여 천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형조정랑(刑曹政郞) 권율을 추천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삼았고, 정읍현감 이순신을 추천하여 전라좌도수사(全羅左道水使)로 삼았다”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대신으로 사람을 천거함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감을 수사(水使)에 오르게 하는 일은 유례없는 승진이니 서애의 안목을 그런 데서 알 수 있다. 이런 충신(忠臣)이자 명장(名將)을 천거했었기에, 그래도 임진왜란과 같은 큰 난리에도 나라를 다시 중흥시킬 수 있었으리라 여기면, 서애의 공은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나라가 어려우면 생각나던 재상
옛말에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에 난리가 나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家貧思賢妻 國亂思良相)라고 했는데, 서애야말로 나라가 어지럽고 난리가 날 때에는 언제나 생각나는 재상의 대표적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만한 학식, 그만한 능력, 그만한 지혜를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나라가 망한 지경에서 중흥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 재상이던 백사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의 일대기에서,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의 부음이 들리자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일반 백성들까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울었다고 했는데, 서애의 업적이 참으로 훌륭했던 이유에서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슬픈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나라가 어려우면 생각나던 재상
옛말에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에 난리가 나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家貧思賢妻 國亂思良相)라고 했는데, 서애야말로 나라가 어지럽고 난리가 날 때에는 언제나 생각나는 재상의 대표적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만한 학식, 그만한 능력, 그만한 지혜를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나라가 망한 지경에서 중흥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 재상이던 백사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의 일대기에서,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의 부음이 들리자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일반 백성들까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울었다고 했는데, 서애의 업적이 참으로 훌륭했던 이유에서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슬픈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나라에는 충성, 부모에게는 효도
서애의 어머니 안동 김씨(1512~1601)는 지례현감이던 김극해의 손녀요, 진사로서 시골에 은거했던 김광수(金光粹)의 따님이었다. 운룡과 성룡을 비롯한 훌륭한 아들을 길러냈고 세 딸을 키워 좋은 사위들을 맞았다. 90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 김씨는 생전에 내외의 손자·손녀·증손자·증손녀에 이르기까지 66명에 이르렀다니 부귀·다남·장수까지 누린 당대의 복인이었다. 겸하여 운룡·성룡 형제는 세상에서 이름난 효자였고 두 형제는 세상에 알려진 우애하던 사이였다. 성룡은 효심이 뛰어나 일부러 어머니 봉양을 위해 안동에서 가까운 상주목사를 지냈고, 또 어머니를 모시기 편하도록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운룡도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서 안동에서 멀지 않은 인동현감과 원주목사를 역임하여 두 형제가 번갈아가면서 노령의 편모를 봉양하는데 온갖 정성을 바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29년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30년 가까이 지극정성으로 늙은 어머니를 모셨기에, 그 형제의 효도는 온 나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임란을 극복하며 나라에 바친 그 뛰어난 충성심, 어머니에게 바친 그 효도 때문에 충효(忠孝)가 함께 빛나게 되어, 살아가는 집의 이름을 ‘충효당’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서애연보’를 살펴보면 벼슬하다가도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아뵈었으며, 두 형제가 경치가 좋고 찾아가 볼 만한 명승지를 수시로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 다녔던 기록이 있다. 어머니께서 기뻐하는 일은 가능한 한 다 해드리며 반드시 뜻에 맞게 모셨다고 여겨진다. 인간 행위의 근본은 효도에 있다. 그러한 효심이 있었기에 그만한 충성심을 나라에 바칠 수 있었다. 60세의 노인 연령에 형님이 세상을 떠나고 바로 이어서 90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노인의 몸으로도 온갖 효성심을 발휘하여 초종(初終) 장례의 모든 절차를 예에 맞게 치렀으니 효자로서의 본분을 다 했다고 일컬어졌다.
서애는 아버지의 일대기도 슬프게 기술했지만, 특히 혼자서 오랫동안 사셨던 어머니 김씨에 대하여 ‘선비정경부인묘지(先 女比 貞敬夫人墓誌)’라는 장문의 글을 지어 어머니의 훌륭한 인품을 기록하여 잊을 수 없는 사모(思母)의 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효도를 근본에 두었기에 4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서애의 훌륭함을 기리는 것이다.
서애의 어머니 안동 김씨(1512~1601)는 지례현감이던 김극해의 손녀요, 진사로서 시골에 은거했던 김광수(金光粹)의 따님이었다. 운룡과 성룡을 비롯한 훌륭한 아들을 길러냈고 세 딸을 키워 좋은 사위들을 맞았다. 90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 김씨는 생전에 내외의 손자·손녀·증손자·증손녀에 이르기까지 66명에 이르렀다니 부귀·다남·장수까지 누린 당대의 복인이었다. 겸하여 운룡·성룡 형제는 세상에서 이름난 효자였고 두 형제는 세상에 알려진 우애하던 사이였다. 성룡은 효심이 뛰어나 일부러 어머니 봉양을 위해 안동에서 가까운 상주목사를 지냈고, 또 어머니를 모시기 편하도록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운룡도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서 안동에서 멀지 않은 인동현감과 원주목사를 역임하여 두 형제가 번갈아가면서 노령의 편모를 봉양하는데 온갖 정성을 바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29년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30년 가까이 지극정성으로 늙은 어머니를 모셨기에, 그 형제의 효도는 온 나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임란을 극복하며 나라에 바친 그 뛰어난 충성심, 어머니에게 바친 그 효도 때문에 충효(忠孝)가 함께 빛나게 되어, 살아가는 집의 이름을 ‘충효당’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서애연보’를 살펴보면 벼슬하다가도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아뵈었으며, 두 형제가 경치가 좋고 찾아가 볼 만한 명승지를 수시로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 다녔던 기록이 있다. 어머니께서 기뻐하는 일은 가능한 한 다 해드리며 반드시 뜻에 맞게 모셨다고 여겨진다. 인간 행위의 근본은 효도에 있다. 그러한 효심이 있었기에 그만한 충성심을 나라에 바칠 수 있었다. 60세의 노인 연령에 형님이 세상을 떠나고 바로 이어서 90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노인의 몸으로도 온갖 효성심을 발휘하여 초종(初終) 장례의 모든 절차를 예에 맞게 치렀으니 효자로서의 본분을 다 했다고 일컬어졌다.
서애는 아버지의 일대기도 슬프게 기술했지만, 특히 혼자서 오랫동안 사셨던 어머니 김씨에 대하여 ‘선비정경부인묘지(先 女比 貞敬夫人墓誌)’라는 장문의 글을 지어 어머니의 훌륭한 인품을 기록하여 잊을 수 없는 사모(思母)의 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효도를 근본에 두었기에 4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서애의 훌륭함을 기리는 것이다.
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학문세계上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라”
-호남 3천재 학자-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 1727~1798)는 호남 3천재로 호칭되던 학자의 한 사람이다. 누구에 의하여 호칭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오래 전부터 조선왕조 중엽 이전에는 호남에 3걸(傑)이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3천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높은 벼슬에도 오르지 못하고, 문학이나 학문에 큰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불행하게 생을 마쳤던 사람들이 3걸로 호칭된다. 화순의 동복에 살았던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 1483~1536), 해남의 유성춘(柳成春 : 유희춘의 형), 고산 윤선도의 선조인 귤정(橘亭) 윤구(尹衢 : 1495~1542)가 바로 그들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옥당 벼슬에 호당에 들어간 명사들이었으나, 사화(士禍)에 좌절하고 말았기 때문에 세 걸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존재의 아버지와 존재가 살았던 영이재 <사진작가 황헌만> |
호남 3천재는 순창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申景濬 : 1712~1781), 고창의 이재 황윤석(臣頁 齋 黃胤錫 : 1729~1791), 존재 위백규가 그들이니 바로 18세기의 한 세기를 살아가면서 조선 후기의 찬란한 실학이라는 학문을 꽃피운 3대 천재 실학자들이었다. 신경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에 올라 세상에 큰 이름을 날렸으나, 황윤석과 위백규는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학문적 업적 때문에 임금의 은혜로 시골의 재야학자로서는 그래도 낮은 벼슬이나마 역임할 수 있던 행운을 얻기도 했었다.
오늘날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언급하려면, 의당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기호지방에 근거지가 있던 분들이 거론되는데, 유독 호남의 3천재는 호남이라는 시골에서 특별한 실학관계 학문의 연원도 없이 자생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문에 도달했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빛나는 업적으로 다루게 된다. 위백규와 황윤석은 비슷한 연배로 서로 교류까지 하면서 학문을 논하였고, 기호학계 성리학의 대가들의 제자이기도 했다. 위백규는 병계 윤봉구(尹鳳九 : 1683 ~ 1767)의 문인으로 성리학에도 밝았지만, 시대적 진운에 눈감지 않고 실학에 전념했던 학자였다. 이재 황윤석은 미호 김원행(金元行)이라는 노론계 성리학자의 제자로 실학에 큰 업적을 남겨 이채로운 학자였음이 분명하다.
-위백규의 생애-
한말에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역임하여 문장과 학문으로 큰 명성이 있던 전재 임헌회(全齎 任憲晦)는 ‘존재집’(存齋集)이라는 위백규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지은 서문(序文)에서 간략히 위백규의 삶을 서술했다. “존재는 2세에 육갑(六甲)을 외웠고, 6세에 글을 지을 수 있었으며, 8세에 ‘주역’을 공부했다. 10세 이후에는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여 천문(天文)·지리(地理)·복서(卜筮), 율력(律曆)·선불(仙佛)·병법(兵法)·의약·관상학·배와 수레·공장(工匠) 등 온갖 기술에까지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모두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천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25세에 병계 윤봉구 선생에게 집지(執贄)한 제자가 되어 잡다한 예전의 학문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성리학에 침잠했다”고 하여 벼슬할 생각보다는 자신의 수양에 더 치중하는 학문에 힘썼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침내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건질 방책까지 강구하여 체용(體用)이 구비된 학문에 통달했으니 대표적인 저서가 ‘정현신보’(政絃新譜)라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임헌회의 스승이자 기호지방 노론계의 대표적 문장가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 : 1776~1852)은 산림(山林)으로 형조판서에 오르고 시호가 문경(文敬)이었는데, 위백규의 ‘묘지명’(墓誌銘)에서, 호남의 학문은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을 이어서 손재 박광일(朴光日)과 목산 이기경(木山 李基敬)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의 학맥을 이은 대학자가 바로 위백규라며 높은 찬사로 그의 학문 수준을 평가했다.
홍직필의 대선배로 노론계 큰 학자이던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는 위백규의 ‘행장’(行狀)에서 일생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높은 수준의 성리학과 뛰어난 실학의 학문업적을 남겼다고 밝혔다. 39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거주하던 장흥군 관산읍 다산(茶山)에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것이 41세 때부터였다.
-벼슬길이 열리다-
위백규가 기거했던 존재의 현판. <사진작가 황헌만> |
위백규의 저서 ‘환영지’( 瀛誌)는 실학자의 독창적인 책이었다. 높은 학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방관들이 위백규를 등용할 것을 임금에게 상주하자 69세 때부터 벼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부사용(副司勇)의 낮은 벼슬이 내려지면서 저서인 ‘환영지’를 나라 임금에게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다. 70세에는 나라로부터 ‘환영지’ 이외의 모든 문집을 올리라는 명이 내려졌고, 지은 글을 모두 올렸더니 선공감(繕工監) 부봉사(副奉事)라는 벼슬이 내려졌고, 오래지 않아 학행으로 천거받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으니 70고령의 노년기에 임금의 알아줌을 입었었다. 지금이야 담양군 옥과면이지만, 당시에는 당당한 고을인 옥과현이었으니, 시골의 선비에게 수령의 벼슬이 내리는 일은 역시 대단한 학자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해는 정조대왕 20년으로, 인재 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임금이 전라도 끝인 장흥의 천관산 아래 숨어살던 위백규를 발탁한 자랑스러운 벼슬살이였다. 노병으로 오래 근무하지도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72세인 11월2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정조대왕 22년이었다. 위백규가 세상을 떠난 그해에는 장흥에서 멀지 않은 순창에서 노사 기정진이 태어났고, 위백규가 세상을 뜨고 3년 뒤인 순조 1년 1801년 겨울에는 장흥에서 멀지 않은 강진에 40세의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로 도착했다. 실학자 위백규의 학풍이 장흥·강진 일대에 퍼져 있을 때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살이가 시작되었던 것은, 구체적 교류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어떤 영향이 있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9세에 시를 짓다-
아홉 살의 어린 위백규는 어른들을 따라 고향의 명산인 천관산(天冠山)에 올라서 시를 지었다. “천관산의 절에 이르자/ 공중으로 사다리 놓으면 하늘 끝에 오르겠네/ 인간들이 사는 세상 굽어보니/ 3만리에 티끌이 끼었네.” (發跡天冠寺 梯空上春昊 俯視人間世 塵埃三萬里) 어린이의 시로는 통이 크기 짝이 없다. 원대한 꿈을 지녔고 뜻이 큰 사람이었음을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꿈이 크고 뜻이 높았던 위백규는 나라를 경륜하고 인류를 구제하려는 포부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살아가던 조선 후기는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전정(田政)이 문란하여 서민들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나라 안에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평소에 율곡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존중했던 그는 임금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나 ‘봉사’ 등에는 제도를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과 애민정신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정치경제 사상-
위백규는 학문이 깊고 사상이 온축된 65세에 그의 대표적 저서인 ‘정현신보’를 저술하고, 옥과현감에 제수된 70세의 완숙한 노령에야 임금에게 올리는 정책 건의서인 ‘만언봉사’라는 장문의 글을 지어 자신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견해를 밝혔다. ‘만언봉사’를 읽어본 정조대왕은 높은 경륜에 감탄하여 간략한 답변을 내렸다. 그 답변에 나타난 내용으로도, 위백규의 경륜과 학문이 어느 정도인가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첫번째의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라는 주장은 칭찬할 만하다. 나의 뜻이 세워지지 않아 백성들의 뜻이 하나로 모아질 수 없었다. 바른 학문이 밝혀지지 못하자 사학(邪學=천주교)을 종식시키지 못했으니 내가 반성할 부분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답한 내용에서 위백규의 주장을 알게 해준다. 그러면서, “그대의 건의를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고 다짐까지 하는 정조의 마음에서 위백규의 학문이 보이고 있다.
“어진 사람을 발탁하여 등용시키라는 그대의 주장도 옳다고 여긴다. 사람을 천거하여 임금을 섬기게 하는 것이 대신(大臣)들의 책임이다. 그렇지 못하는 요즘의 정승들에게 사람 천거를 바랄 뿐이다”라는 대목에서도 인재발탁의 중요성을 주장한 위백규의 사상을 알 만하다. 그러면서 정조는, “3항, 4항, 5항, 6항의 주장 등은 말마다 절실하고, 시대의 패악상에 적중되는 말이다”라고 답하고 당시의 세상에는 사유(四維 : 禮·義·廉·恥)가 확산되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도덕성이 확산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한다는 정조의 답변을 끌어냈으니, 위백규의 건의가 얼마나 시의적절한 주장이었음을 금방 알게 해준다. ‘만언봉사’에서 위백규는 여섯 조항의 정책을 건의했다. 첫째 성지(聖志)를 세우고 성학(聖學)을 밝힐 것, 둘째 보필할 신하를 제대로 고르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라고 했다. 셋째 염치를 장려하고 국가의 기강을 떨쳐야 한다고 했다. 넷째 선비들의 습관을 바르게 하고 지나친 경쟁심을 억제토록 했다. 다섯째 탐관오리들을 의법처리하고 사치풍조를 금해야 함을 논했다. 여섯째 옛날의 옳은 제도를 살려내고 폐단 많은 법제는 뜯어고치자고 주장했다. 마지막 법제개혁의 주장은 200년 전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면서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야만 나라가 제대로 통치된다는 경세논리를 펴고 있었다.
그해는 정조대왕 20년으로, 인재 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임금이 전라도 끝인 장흥의 천관산 아래 숨어살던 위백규를 발탁한 자랑스러운 벼슬살이였다. 노병으로 오래 근무하지도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72세인 11월2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정조대왕 22년이었다. 위백규가 세상을 떠난 그해에는 장흥에서 멀지 않은 순창에서 노사 기정진이 태어났고, 위백규가 세상을 뜨고 3년 뒤인 순조 1년 1801년 겨울에는 장흥에서 멀지 않은 강진에 40세의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로 도착했다. 실학자 위백규의 학풍이 장흥·강진 일대에 퍼져 있을 때에 다산 정약용의 유배살이가 시작되었던 것은, 구체적 교류는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어떤 영향이 있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9세에 시를 짓다-
아홉 살의 어린 위백규는 어른들을 따라 고향의 명산인 천관산(天冠山)에 올라서 시를 지었다. “천관산의 절에 이르자/ 공중으로 사다리 놓으면 하늘 끝에 오르겠네/ 인간들이 사는 세상 굽어보니/ 3만리에 티끌이 끼었네.” (發跡天冠寺 梯空上春昊 俯視人間世 塵埃三萬里) 어린이의 시로는 통이 크기 짝이 없다. 원대한 꿈을 지녔고 뜻이 큰 사람이었음을 어린 시절부터 보여주고 있었다. 이렇게 꿈이 크고 뜻이 높았던 위백규는 나라를 경륜하고 인류를 구제하려는 포부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살아가던 조선 후기는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전정(田政)이 문란하여 서민들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나라 안에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평소에 율곡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존중했던 그는 임금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나 ‘봉사’ 등에는 제도를 개혁하고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과 애민정신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정치경제 사상-
위백규는 학문이 깊고 사상이 온축된 65세에 그의 대표적 저서인 ‘정현신보’를 저술하고, 옥과현감에 제수된 70세의 완숙한 노령에야 임금에게 올리는 정책 건의서인 ‘만언봉사’라는 장문의 글을 지어 자신의 정치와 경제에 관한 견해를 밝혔다. ‘만언봉사’를 읽어본 정조대왕은 높은 경륜에 감탄하여 간략한 답변을 내렸다. 그 답변에 나타난 내용으로도, 위백규의 경륜과 학문이 어느 정도인가를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첫번째의 뜻을 세우고 학문을 밝히라는 주장은 칭찬할 만하다. 나의 뜻이 세워지지 않아 백성들의 뜻이 하나로 모아질 수 없었다. 바른 학문이 밝혀지지 못하자 사학(邪學=천주교)을 종식시키지 못했으니 내가 반성할 부분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답한 내용에서 위백규의 주장을 알게 해준다. 그러면서, “그대의 건의를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고 다짐까지 하는 정조의 마음에서 위백규의 학문이 보이고 있다.
“어진 사람을 발탁하여 등용시키라는 그대의 주장도 옳다고 여긴다. 사람을 천거하여 임금을 섬기게 하는 것이 대신(大臣)들의 책임이다. 그렇지 못하는 요즘의 정승들에게 사람 천거를 바랄 뿐이다”라는 대목에서도 인재발탁의 중요성을 주장한 위백규의 사상을 알 만하다. 그러면서 정조는, “3항, 4항, 5항, 6항의 주장 등은 말마다 절실하고, 시대의 패악상에 적중되는 말이다”라고 답하고 당시의 세상에는 사유(四維 : 禮·義·廉·恥)가 확산되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찬동하면서 도덕성이 확산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한다는 정조의 답변을 끌어냈으니, 위백규의 건의가 얼마나 시의적절한 주장이었음을 금방 알게 해준다. ‘만언봉사’에서 위백규는 여섯 조항의 정책을 건의했다. 첫째 성지(聖志)를 세우고 성학(聖學)을 밝힐 것, 둘째 보필할 신하를 제대로 고르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라고 했다. 셋째 염치를 장려하고 국가의 기강을 떨쳐야 한다고 했다. 넷째 선비들의 습관을 바르게 하고 지나친 경쟁심을 억제토록 했다. 다섯째 탐관오리들을 의법처리하고 사치풍조를 금해야 함을 논했다. 여섯째 옛날의 옳은 제도를 살려내고 폐단 많은 법제는 뜯어고치자고 주장했다. 마지막 법제개혁의 주장은 200년 전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면서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야만 나라가 제대로 통치된다는 경세논리를 펴고 있었다.
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학문세계 下
부패한 조선, 실용학문 개척한 ‘호남의 천재’
율곡의 개혁사상을 본받다
여섯 조항의 큰 줄기 강령을 열거하고, 그 강령의 세부적 실천논리를 개진한 내용이 다름 아닌 ‘만언봉사’였다. 여섯 조항 중에서도 가장 역점을 두고 주장한 대책은 바로 마지막 조항인 법제개혁의 논리였다. “혁폐(革弊)의 주장은 율곡 선생이 오래 전에 누누이 설명했습니다. 지금 그분의 문집을 가져다가 고찰해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만약 그 당시에 율곡 선생의 대책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임진왜란의 화란도 그처럼 혹독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법제의 폐단은 율곡 선생 때보다는 백배나 더 심한데,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단 한 사람도 율곡 선생의 주장을 임금에게 진언하는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분노에 찬 주장을 계속하였다.
존재 위백규가 태어나 일생을 살았던 방촌마을 전경. |사진작가 황헌만 |
율곡이 누구인가. 위백규보다는 한 세대 선배인 탁월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오래 전에 율곡의 위대함을 넉넉하게 설파하였다. “근세의 율곡 선생 같은 분은 법제개혁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당시의 집권자들은 옳지 않다고 말했지만, 지금 다시 고찰해보면 너무나 명쾌하고 절실한 대책이었다. 그러니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대체로 조선왕조 이래로 현실적으로 처리할 일을 가장 잘 알던 분은 율곡이었다”라고 성호는 그의 글 ‘논경장’(論更張)에서 설파하고 있다. 위백규 역시 실학자답게 율곡의 경장(更張)이론에 영향을 받아 당시의 부패한 제도와 무너진 국가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펴고 있었다.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新我之舊邦)라고 외치며 국가개혁의 마스터플랜인 ‘경세유표’를 저작한 다산 정약용은 위백규의 한 세대 뒤의 후배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연면한 사상을 총정리하고 종합하여 실학을 집대성한다.
위백규의 유적지를 찾아서
전라도의 땅끝 마을 장흥. 장흥읍 입구에는 존재 위백규의 동상이 우람하게 서있다. 육지의 땅 끝에 가장 우람하게 서있는 산은 장흥의 천관산이다. 천관산 산자락을 제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게 자리한 마을이 장흥군 방촌(傍村)이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방촌마을은 수백년 동안 장흥위씨(長興魏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했던 마을이다. 산이 좋고 물이 좋은 탓인지, 마을의 어느 구석에도 가난은 보이지 않고 부귀의 모습만 보이는 마을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마을 앞의 넓은 들판을 건너 마주보는 천관산은 현인들의 거주지임에 의심을 지니지 못하게 하였다. 산자락에 쭉 이어져 벌려있는 기와집, 최상단에 위치한 우람한 기와집에 존재 위백규의 선조들이 살아왔으며, 거기서 존재가 태어나 오래도록 생활했던 가옥이다.
존재라는 호는 스승 윤봉구가 위백규에게 써준 ‘존존재’(存存齋)라는 세글자에서 따온 호이고, 마을이 계항산(桂港山) 아래의 계항(桂港)에 자리잡고 있어서 계항일민, 계항운민 등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지난해 추석 무렵 우리 일행은 위백규의 유적지를 찾아 존재의 생가를 들렀다. 땅끝 장흥의 관산 바닷가에서 충청도의 덕산(德山)에 살던 스승 윤봉구를 찾아다닐 수 있었다면 당시 위백규 집안의 살림 형편을 짐작할 만하다. 가세가 그만큼 넉넉하였기에 그만한 와가가 생존시부터 지금까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강진의 다산초당과 장흥의 다산정사
장흥군과 강진군은 군청 소재지로 보면 불과 4~5㎞의 거리다. 장흥군 방촌 마을의 뒷산 자락 한 부분이 다산(茶山)인데, 강진의 만덕산 아래 산자락의 한줄기가 또 다산이다. 장흥의 다산에서는 존재 위백규가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학문에 힘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강진의 다산초당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위백규는 전라도 출신의 큰 실학자였고, 정약용은 경기도 출신이지만 다산초당에서 학문을 완성하였다. 이런 우연도 있는 것인가. 세상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위백규는 노론계통의 학자였고, 정약용은 남인계열의 학자였다. 귀양오기 3년 전에 타계하여, 위백규의 학풍이 다산이 살아가던 곳에도 남아 있었겠지만, 다산의 저서에 위백규는 언급된 바가 없다. 이 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장흥읍 입구에 서 있는 존재 위백규의 동상. |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다”라는 옛말이 있다. 이곳 어디에 무슨 지령이 있었기에 이만한 천재가 이곳에서 태어나 그만한 학문의 업적을 이룩했을까. 존재의 아버지는 진사(進士)로 호가 영이재(詠而齋)이던 위문덕(魏文德)이었고, 조부는 삼족당(三足堂) 위세보(魏世寶)로 시·서·화 3절로 유명했던 당대의 문사였다고 한다. 글과 시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가문의 유풍을 이어받고 다산의 산자락에 자생하는 차가 자랐기에 그런 향기로운 운치를 타고나서 그만한 대학자가 탄생했으리라. 계항산 속 다산정사에서 은자로 숨어살면서 희대의 실학사상을 완성한 존재의 풍모가 그려졌다. 다산사(茶山祠)에는 존재의 신주가 모셔져 그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문집인 『존재집』과 많은 저서
학문이 높고 실학에 뛰어난 학자라는 명성이 서울까지 울리자, 정조 20년인 1796년에 70세 노인의 저작이 상자에 곱게 담겨 임금에게로 전달된다. 이 때의 문집은 위백규 자신이 정갈하게 편집하여 제책한 24권이었다. 내각(內閣)에 보관되었을 그 문집은 뒷날 잃어버려서 후손들의 손에 의하여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다시 편집하여 1875년에 활자로 인쇄하여 책이 간행되었다. 24권에 12책으로 꾸며져 오늘까지 온전하게 전해지고 있는 문집이다. 이 문집을 원집(原集)이라 부르고, 간행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고금’(古琴)과 ‘환영지’ ‘황명사략’(皇明史略) 등의 서적이 있는데, 근래에는 모두 영인되어 ‘존재전서’로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문집을 살펴보면 넓고 깊은 존재의 학문세계가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경세학자도 경(經)에 밝지 않고는 정통의 학자가 될 수 없었음은 그 시대의 엄연한 사실이었다. ‘독서차의’(讀書箚義)라는 글에는 대학·논어·맹자·중용 등의 사서(四書)에 대한 골똘한 연구결과가 모두 담겨 있고, 서경(書經)에 대한 연구결과로 ‘요전설’(堯典說), ‘우공설’(禹貢說) 등의 글을 통해 정리되어 있다. 이런 학문의 밑바탕을 튼튼하게 닦은 결과로 그의 실학사상이나 경세학(經世學)의 실용논리도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만덕사(萬德寺)에서 노닐던 존재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는 만덕사라는 절이 있다. 다산초당에서 오솔길을 따라 등선 하나만 넘으면 있는 절이다. 18년의 귀양살이 동안에 다산 정약용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절이다. 그렇게 절친했던 스님 혜장선사(惠藏禪師)가 머물던 절로, 만덕사 또는 백련사라고 부르던 절이다. 위백규도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다산이 찾아오기 이전의 일이었다.
동백꽃 떨어져 푸른 잔디를 덮자
금모래 위 게으른 걸음으로 명승지 찾았네
한 곡조 뱃노래에 강위 해가 저물자
사람들 홀연히 동정루(洞庭樓)에 오르네
(山茶花落綠莎 懶步金沙選勝遊 一曲漁歌江日晩 忽然人上洞庭樓)
‘만덕사’라는 제목의 위백규의 시다. 만덕사의 동백꽃 군락지는 세상에 유명한 경관이다. 위백규가 찾았던 그때의 만덕사에도 동백숲은 우거져 꽃이 지고 피었나보다. 이런 시를 짓고 만덕사에 노닐었던 위백규가 세상을 떠난 3년 뒤에 강진으로 다산은 귀양왔고, 그 8년 뒤에 다산초당에 은거하면서 수시로 백련사에서 노닐었다. 정약용의 동백꽃 시는 너무 많아 인용할 수도 없다. 당대의 실학자들이 노닐었던 만덕사에는 지금도 동백숲이 푸르게 우거져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학술과 정치·경제의 중심지 서울에서는 천리의 외딴 바닷가 시골에서 조선후기 학문을 대표하던 호남 3천재의 학문은 중심이 실학사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존재 위백규의 학문은 정통유학의 맥을 이으면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학문영역을 개척하였다. 우암 송시열, 수암 권상하로 이어지는 노론 학맥, 권상하의 큰 제자가 병계 윤봉구였다. 윤봉구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시대를 넘어 새로운 학풍을 열었던 존재는 그의 천재성과 눈을 감을 수 없는 부패한 현실이 새로운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후배 학자 매산 홍직필은 존재의 ‘묘지명’에서, “천관산 높고 높아/ 전라도 전체에서 우러러보네/ 울창한 다산이여/ 가을 동백도 시들지 않네”(天冠峨峨 一路仰止 有鬱茶山 秋栢不死)라고 읊으며 존재의 유풍여운(遺風餘韻)은 천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찬사를 바쳤다. 그만큼 그의 실학사상은 나라와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논리라는 해석을 내렸다고 여겨진다. 72세로 영면한 그의 혼은 아직도 장흥 고을의 곳곳에 학풍을 식지 않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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