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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37년 한반도 북부 동가강(冬佳江·비류수) 연안에 이 지역의 토착민인 부여족의 지도자 가운데 한명인 주몽이 세웠다고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가들은 기원전 2세기에 건국됐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다. …서기 371년부터 384년까지 통치한 소수림왕 때 왕권 강화를 위해 각종 율령을 반포했다. 고구려의 영토는 광개토대왕(재위 서기 391~412년) 때 크게 넓어졌으며, 장수왕(재위 서기 413~491년) 때 더 넓어졌다. 고구려 전성기에는 한반도 북부와 요동반도 그리고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의 상당 지역이 고구려의 통치를 받았다.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성격은 많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수나라(서기 581~618년)와 당나라(서기 618~907년)라는 통일왕조가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점차 중국의 침략을 받기 시작한다. 고구려 왕국은 서기 668년 한반도 남부의 왕국인 신라와 중국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패망했으며, 그 뒤 한반도는 통일신라 왕조(서기 668~935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고구려 멸망 뒤 만주 북부에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대조영의 지도 아래 발해를 건국했으며, 곧 신라와 대립했다. 발해는 한때 중국인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문화로 성장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역사가들은 신라에 더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왔다. 북방 유목민족에게 그 영토가 흡수된 이후 발해 지역은 더 이상 한국사의 영역에 편입되지 않았다.”
브리태니커에 이렇게 기술돼 있는 것은 그 집필을 한배호 교수 등 한국 학자들이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중국이 고구려사에 대한 학술적·정치적 공세를 강화하는 현재의 기조를 계속 밀고 나간다면 브리태니커의 내용도 바뀔 수 있다. 2000년 올림픽 유치전에서 패배한 중국이 엄청난 시장 등 잠재적·경제력에다 다국적기업까지 동원하는 로비력으로 결국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따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상천하 중화독존!
‘중국발 역사전쟁’… 왜 그들은 지금 ‘이념의 만리장성’을 쌓으려고 하는가
“그 뒤 청조 통치자들은 이 세계적 대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가 크다고 착각한 채 스스로를 닫아버리고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는 것을 거부했다. 마침내 100여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서방국가보다 크게 뒤떨어져 서방 열강의 군함과 대포 앞에 놓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역사적 교훈을 절대로 잊지 말라.”(중국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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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민족의 독자성을 가둬버려라”
1990년대 후반 중국에선 이른바 ‘강건성세’(康乾盛世)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강희제로부터 시작해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에 이르는 청나라의 최전성기인 강건성세가 200여년 만에 되살아나 중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중국 작가 이월하의 ‘제왕 3부곡’이 4억권이나 팔리는 슈퍼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대학은 대학대로 갑자기 청나라와 세 황제에 대한 연구를 봇물 터지듯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중국은 21세기 개막을 앞둔 이 시기에, 1661년에서 1799년에 이르는 138년의 과거사에 이토록 집착한 것일까? 왜 그들이 자랑하는 ‘중국 상하(上下) 5천년 역사’ 가운데 유독 이 시기를 지목해 장쩌민 국가주석과 주룽지 총리 등 국가 지도부까지 나서 총력적인 이념사업을 펼친 것일까?
그 해답은 오늘날 중국이 한국을 비롯해 주변국가 거의 모두를 향해 벌이는 ‘역사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강건성세에 대해 중국의 역사가들이 주목하는 논점을 살펴보자.
첫째, 이 시기에 이른바 ‘국가 대통일적 국면’을 실현했다는 점을 역사가들은 강조한다. 오늘날 유지되는 중국의 영토가 사실상 이때 대부분 그 뼈대가 정해졌다는 인식이다. 특히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가 강희제의 아버지인 순치제 때 입조하기 시작한 뒤 사실상 이 시기에 티베트가 중국의 영향권에 안정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강조하는 분위기다. 이때부터 티베트는 중국에선 ‘서장’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둘째, 이때 중국의 인구가 3억명을 돌파했다는 것이다. 역사상 남송 소희황제 시대에 처음으로 1억명에 도달한 이후 약 1200년 만에 인구 3억 고지를 돌파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셋째, 이 시기 황제들이 만주족이라는 소수민족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대중국’의 관념을 관철시키고 있었다고 파악한다. 실제로 만주족과 한족의 융합과 화해를 상징하는 초대형 음식인 만한전석이 탄생한 것이 이 시기이며, ‘통일중국 군림천하’를 선언한 것도 이 시기의 황제 옹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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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학계에선 이 사업이 역사상의 가상 영토를 겨냥한 역사전쟁으로 발전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참여하는 역사학자들은 이 전쟁의 전략가이자 장군들이다. 그들이 채택하는 기본 전략은 ‘현재 중국 판도 위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사에 귀속된다’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의 이론체계이다. 현재의 국경을 기준으로 그 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민족과 국가, 문명의 역사는 현재의 중국사라고 규정해버리는 식이다. 바로 ‘이념의 만리장성’을 쌓고 모든 민족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가둬버리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현재 중국에 존재하는 56개 소수민족의 역사가 송두리째 중국 역사로 편입된다.
모든 분리독립세력을 ‘가상의 적’으로
이 이론체계는 근본적으로 연역법적일 수밖에 없다. 결론을 미리 만들어놓고 그것을 역으로 실증하기 위한 사례를 수집해 정리하는 식이다. 그 작업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붓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이 지난 1992년 ‘만리장성의 출발점은 이제까지 알려져 있는 하북성 산해관이 아니라 요녕성 단동시 압록강변’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도 이런 의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만리장성의 동쪽 출발점을 압록강변으로 잡는 것은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세력이 여기까지 진출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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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북한과 남한) 학자들은 고구려와 지금 조선반도의 승계 관계들을 제멋대로 선전하고 고구려가 생활하던 지구는 그들의 고토라 하고, 중국의 동북지구에 대한 역사주권을 극력 부정한다. ‘만주는 자고로 우리 선조들의 땅’이고 ‘장백산은 우리 조상의 성산이다’고 헛소리를 치고 있으며, 공공연히 북방 영토를 수복하자고 (국회에까지) 제출하고 있다.”(동북사범대학 유후생 교수)
중국이 북한의 신의주 경제특구 계획에 대해 기술적으로 제동을 걸고 나선 것도 이런 역사전쟁과 관련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당연히 이 ‘이념의 만리장성’은 고구려 문제 때문에 한민족(조선족)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만주지역(중국으로 보면 동북지역)에만 쌓아지는 것은 아니다. 장성의 밖과 안에 있는 잠재적 강대 세력이나 분리독립 세력이 모두 ‘가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티베트·몽고·신장위구르가 다 그런 대상 지역이자 대상 민족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부시 부자의 2차에 걸친 이라크 전쟁이 실행되고 미군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잇따라 진주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중동지역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국 서부내륙으로부터 중국 중심부로 들어오는 에너지 라인이 군사적으로 포위되거나 위협에 노출되기 시작한 셈이다. 나아가 21세기 세계 패권적 지위를 놓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질 전면전적인 경쟁은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결정적으로 불안정 기류 속으로 밀고 갈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언젠가 시도할 전략이 중국 주요 지역의 분리독립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 진영에 견제당할 것
중국은 이런 불안정한 역학관계 속에서 ‘이념의 만리장성’ ‘역사의 방풍림’에 점차 쏠려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전략은 중국의 의도와는 달리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우선 한민족을 비롯해 티베트·몽고·신장위구르 등 주변 강대 소수민족의 반발과 문화적 반중 기류가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이 선봉으로 나설 이 문화전쟁의 양상은 (1) 한국-중국간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한 인터넷 대전 (2) 중국 당국의 의도적인 한류 차단 (3) 한국-중국 스포츠에서의 국민감정적 경쟁심 촉발 (4) 상대방 제품에 대한 민간 차원의 자연발생적인 불매운동 확산 (5) 세계의 미디어와 주요 사이트를 겨냥한 양국간 전면적 홍보전 격화 (6) 민간 차원의 ‘한민족-몽고-티베트-신장위구르 역사동맹’ 형성 등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1차적으로 한국이 대중교역 등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은 매우 높다.
국제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미국과 유럽 진영은 중국을 견제하는 전략으로 기울 공산이 크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1월22일 “한국 정부가 많은 자금을 투입해 고구려 연구학회를 발족키로 하는가 하면, 남북이 이 문제에 공동 대응해 한목소리를 내는 등 한국인의 민족감정이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은 이런 개입의 시발일 뿐이다. 중국 내부에서도 이런 식의 역사전쟁에 대한 비판여론이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념의 만리장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전제가 한족 중심주의의 전면 폐기라는 대단히 예민하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이 쌓는 ‘21세기판 이념의 만리장성’은 매우 불안정하다. 나아가 체제 수호적이라기보다 전쟁 유발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부정적이다. 역사적으로 만리장성은 북방 기마민족의 무력이 아니라 민족갈등의 국면에서 성을 지키는 쪽에서 스스로 방어를 포기하고 문을 열어버림으로써 돌파되곤 했던 것이다.
자객, 이데올로기에 무릎을 꿇다
중국 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한 장이모 감독의 영화 <영웅>은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원래 사마천의 <사기열전> 가운데 ‘자객열전’의 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형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결정적으로 변용시키는 방법으로 진시황의 무자비한 통일 과정을 정당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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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개봉한 이 영화는 1년 뒤인 지난 1월 춘절 연휴기간의 황금시간대에 중국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재방영됐다.
무협지로 동양권에서 폭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김용의 작품들도 사실상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 <사조영웅문>을 비롯해 <천룡팔부> 등 많은 작품들이 다민족끼리의 충돌을 거쳐 궁극적으로 화합에 이르는 과정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몽고와 금나라, 남송 등이 각축을 벌이는 <사조영웅문>에서 주인공 곽정은 몽고에서 자라 결국 몽고와 싸우는 남송의 영웅으로 부상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길러준 칭기즈칸과는 결정적으로 적대하지 않고 화해를 이룬다. 역시 거란과 대리국 등 소수민족과 한족의 애증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천룡팔부>에서 거란인 주인공 소봉은 전쟁을 막기 위해 마지막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김용의 흥미진진한 무협 공간 속에서 개인과 개인은 원수일 수 있지만, 민족 대 민족의 갈등은 절묘하게 원한 관계로부터 비껴나고 있다.
바로 이런 이념적 지향성 때문에 <영웅>과 김용은 중국 정부쪽으로부터 환대받고 있는 것이다.
“영웅 악비를 폄하하지 말라”
중국 역사논쟁 주인공으로 부활한 남송의 한족 명장… 교과서 통한 격하 움직임에 전 민중적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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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
2003년 12월 중국은 갑자기 때 아닌 ‘민족영웅 논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12월9일 <베이징청년보> 등 언론들이 “신판 고등중학교 역사 대강에서 ‘악비(岳飛)와 문천상은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므로 더 이상 ’민족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정의했다”고 보도하면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sohu.com’을 비롯해 중국 유수의 사이트는 이 조처를 비난하는 글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우스워 죽을 지경이로다. …이 귀여운 변증법과 중국 역사학자들이여! …이건 정말 중국 역사상 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이다.”(‘sublexical’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
“진짜 열받는다. 나는 지금까지 정말로 조국을 사랑했다. 어릴 적부터 국가의 민족영웅들을 숭배해왔는데… 이렇게 악비가 민족영웅이 아니라면… 진짜 사람 마음을 소름끼치게 한다.”(‘운해옥궁연’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
“애국은 당연히 불변하는 정의이다. …한번 물어보자. 어느 날 중국이 일본을 병합했다고 치자. 그러면 일제 침략에 대항해 싸운 장군들은 결국 애국을 한 게 아니란 말인가? 결과적으로 한 나라가 됐는데 무슨 애국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있단 말인가?”(‘람성목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
권위 있는 대학교수들마저 공개적으로 당국을 비판하고 나섰다. 중국 사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원로학자 대일 박사와 중국 송사(宋史)연구회의 왕증유 회장까지 나서 어떻게 교육 당국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고 분노했다. 일부 네티즌들과 학자들은 당국의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압도적인 비판 여론에 휩쓸려 소수로 몰려버렸다.
기록적인 경제성장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엑스포까지 잇따라 유치하고, 나아가 최초의 유인 인공위성 선저우(神舟) 5호의 발사 성공으로 국가적 자존심과 국민적 통합 열기가 한층 고조되던 중국에 이상한 여론의 먹구름이 형성돼버린 것이다.
도대체 악비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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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전파이던 악비는 화평파인 재상 진회의 견제를 받는다. 금나라와 화평을 추진하던 진회는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황제 고종을 움직여 악비군 등 주전파 장군들을 군대로부터 격리시키는 방식 등으로 지휘권을 제한시켰다.
39살에 반란죄 뒤집어쓰고 독살당해
이런 화평의 움직임에 반발한 악비가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자, 진회는 기습적으로 악비와 그 아들 악운에게 반란죄를 뒤집어씌워 독살해버렸다. 그때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악비는 후세에 충절과 공적을 인정받아 죽임을 당한 지 37년이 지나서 ‘무목’이라는 시호를 추증받고, 70년 뒤에는 ‘악왕’으로 추서된다.
무엇보다 그는 (1) 한족의 송나라가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차례나 이민족에게 시달리던 시기에 무력 면에서 유일하게 자랑할 수 인물, (2) 가장 중국적인 문화를 꽃피운 시대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송왕조 때 명장이면서도 시문에 능한 등 문화인물의 성격을 함께 갖췄다는 매력, (3) 어머니가 등에 새겨준 ‘정충보국’이라는 문신이 상징하듯이 가장 한족적인 가치관에 투철한 인물 이미지, (4) 젊은 나이에 아들과 함께 한을 품고 죽은 비극적인 성격 등이 어울려 오늘날까지도 역사상의 스타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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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가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라는 논리의 근거는 대략 이렇다.
(1) 악비는 금나라 사람과 싸웠다. 그런데 당시 금과 송은 ‘형제끼리 담을 쌓고 집안에서 싸운 것’이다. 따라서 악비는 국가와 민족을 보위한 공로가 없다. 당연히 그를 민족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다.
(2) 중국은 50여개 민족으로 이뤄진 대가정이다. 한족중심주의적인 악비를 민족영웅이라고 하면 그건 한족중심주의의 노골화 그 자체이다.
(3) 악비가 남송을 보위할 무렵 고종을 황제로 한 당시의 남송은 극도로 부패해 망해야 마땅한 나라였다. 따라서 망해야 할 나라를 보위한 악비는 역사의 흐름을 거역한 것으로써 민족영웅이라고 할 수 없다.
(4) 외래 침략자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민족영웅으로 정의한다면, 악비는 그냥 한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악비가 활약하던 당시 중화민족은 일체화되기 전이었다. 중앙정부가 직접적으로 서장·운남·몽골·신장에 행성을 설치하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관리를 시행한 것은 원나라 이후부터인 것이다.
한족중심주의만 자극하고 끝날 수도
신악비론에 대한 민중적인 반발은 중국 당국의 의도대로 사태가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강력한 경고의 성격을 띤다. 비판의 뼈대는 이렇다.
첫째, 신악비론에서 제시하는 결과론적인 접근방법은 역사와 민족의 정의를 결정적으로 해칠 것이라는 논리이다. 예컨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 현실화됐다면 왕정위 등 친일파의 거두들은 모조리 영웅이 되고 항일전쟁 중 숨진 3500만명의 영웅들은 모두 천벌을 받은 셈이 된다.
둘째, 악비의 부정은 중국 과거사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침략전쟁이 전혀 없었다는 대단히 비합리적이고 황당하기조차 한 논법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이다.
셋째, 악비의 가치는 시대와 민족의 한계성을 넘어 통시대적인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송·금 시대의 악비에 대해 지금 여러 민족이 영웅으로서 존경하는 것은 외부의 침략과 압박에 저항하는 정신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런 여론에는 싱가포르 등의 해외 화교들까지 가세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결국 중국 당국은 후퇴하는 자세를 취한다. 중국 교육부 기초교육과정교재발전중심의 관계자는 기자회견을 열고 “원래 내용과 보도된 내용이 다르다”고 밝혔다. 실제로는 교과서가 아닌 참고서인 ‘학습지도’에서, 그것도 참고자료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일찍이 50년대 어떤 학자가 악비를 민족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민족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와 그 대비책으로 전문가와 학자들의 개인적인 관점을 정리해 보급했다.”
이 논쟁은 중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는 중국 당국의 의도와는 달리 한족중심주의를 자극하고, 비한족들도 그 귀추를 주시하도록 이끌고 있다.
과연 악비 논쟁은 어디로 갈 것인가? 중화민족의 운명이 사실상 거기 숨겨져 있다.
[ 문관 문천상의 비극적 최후 ]
문천상은 포로가 돼 북으로 호송되던 중 탈출해 다시 근황군을 일으킨다. 그는 복건성 복주에서 탁종의 장자 익왕을 받들며 게릴라전을 지휘했다. 익왕에 의해 전직인 우승상 겸 추밀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 뒤 1277년 군을 조직해 이웃 강서로 진격해 여러 주와 현을 수복하기도 했으나 군사 수가 적어 다시 광동으로 퇴각했다. 결국 그는 오파령전투에서 패해 다시 몽골군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호송됐다. 그는 투옥 중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그의 재능을 아껴 원 왕조에 충성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끝까지 응하지 않은 채 죽여달라고 했다. 결국 문천상은 3년간 투옥됐다가 46살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참수됐다.
그는 시에도 능해 옥에 있을 때 ‘정기가’를 짓기도 했다. 애국주의적인 호소력을 지닌 이 시는 강렬한 예술적 감동을 남기는 작품으로 지금까지 애송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문집 <문산전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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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비를 죽인 진회는… ]
당장 악비를 죽인 남송의 화평파 재상 진회는 더 이상 민족반역자가 아니게 된다. 오히려 ‘민족통일적 과정’에서 중화민족 대가정의 가치를 일찌감치 꿰뚫어 보고 중화민족 전체의 힘을 분산시킬 송금전쟁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한 이른바 ‘민족영웅’이 된다. 그가 화평파의 우두머리로서 주전파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악비처럼 죽이거나 숙청한 일들도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정당화돼야 한다. 이에 따라 악비를 떠받들기 위해 악왕묘 앞에 세워 침세례 등 모욕을 받도록 만든 진회 부부의 조각상은 없애거나 새롭게 세워야 할 판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악왕묘 자리에 오히려 진회를 위한 묘를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역사상 주전파의 피와 죽음을 딛고 권세와 천수를 누린 진회는 이제는 더 큰 영화를 누려도 될 판이다.
몽골의 중원 점령과 함께 대거 등장한 한족 출신의 토호들인 이른바 ‘한간세후’(漢奸世侯)들 역시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전령사들이 된다. 이들에게 붙인 간신의 ‘간’자를 떼는 등 실질적인 명칭도 바뀌어야 한다. 쿠빌라이의 장군이 되어 몽골의 벌송군 총대장 바얀과 함께 전공을 세운 사천택 같은 사람은 중국 통일을 실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새로운 ‘민족영웅’으로 기록돼야 한다. 쿠빌라이의 참모로 활약했던 유병충, 장문겸 같은 유학자들 역시 그렇다.
명말청초 때 명을 배신하고 청을 위해 일한 오삼계 역시 민족통일에 기여한 인물로 정리돼야 한다. 오삼계는 난공불락의 요새 산해관을 관할하고 있으면서 명의 반란군인 이자성군으로부터 산해관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더 큰 강적인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사실상 명의 멸망을 결정지었다. 비록 그가 나중에 삼번의 난을 일으켰지만, 어쨌든 민족통일적 관점에서 보면 청의 대의에 순종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통일에 기여한 공이 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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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벤처와 M&A의 승리!
기존 시스템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벤처창업을 상징하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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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는 아기 대신 닷되들이 알을 낳는다. 부여 궁중에서는 그 알을 불길하게 생각해 마구간에도 버려보고 급기야 산속에까지 버렸으나 오히려 알은 뭇짐승의 보호를 받는다. 결국 알에서는 준수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아이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활로 파리를 잡는 등 백발백중의 활솜씨를 보인다. 아이는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주몽으로 불렸다. 주몽이 활도 잘 쏘고 용력도 있고 부하도 아끼고 덕까지 갖춰 사람들의 존경을 받자 대소왕자를 비롯한 일곱 왕자는 그를 시기하고 질투한다. 주몽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망명을 결심한다. 유화 부인은 아들의 망명을 위해 준마를 고른다. 주몽이 좌천돼 책임을 맡고 있던 목장으로 가 채찍을 들어 말들을 갈겨 가장 높이 뛰어 울타리마저 성큼 넘는 말을 골라 그 혓바닥에 바늘을 꽂아놓은 것이다. 말은 빼빼 말라 결국 주몽에게 하사품으로 내려진다.
주몽은 그 말을 다시 잘 먹여 명마로 되돌려놓은 다음 남쪽으로 향한다. 유화 부인은 아들에게 보리를 비롯해 오곡의 씨앗을 준다. 오이, 마리, 협부와 함께 떠난 주몽은 모둔곡에서 재사, 무골, 수거 세 사람을 만난다. 주몽 일행은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운다. 고구려가 탄생한 것이다. 그때 주몽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주몽은 이웃의 말갈족을 공격해 굴복시킨다. 그 뒤 주몽은 비류국의 송양왕과 경합을 벌여 비류국까지 흡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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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은 고씨가 아니라 해씨?
고구려 건국설화는 매우 낭만적이다. 배경도 제법 아름답고 스케일도 크다. 그런 설화에서 비과학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좀더 진실에 가깝도록 조명하는 작업을 역사학자들은 벌여왔다. 이제는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중국쪽의 갑작스런 역사 공세까지 겹쳐 진실을 찾는 작업은 훨씬 복잡하고 어렵게 돼가고 있다.
해모수는 부여족의 한 지도자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는 하백족과 싸워 이겨 유화와 결혼한 뒤 결국에는 이탈 도주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따라서 주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씨’가 아닌 ‘해씨’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씨’를 ‘해’(태양)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모수를 우리 옛말에 비춰 해석하면 ‘헴수’ ‘갬수’ ‘검수’가 되는데, 검은 신(神)을 말하고 수는 남성을 말하니 결국 ‘남신’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그런 그가 고구려 왕조의 혈통의 신비화를 위해 신으로 격상된 셈이다.
난생설화는 일반적으로 남방의 설화로 알려지는데 고구려에서도 채용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설화도 난생설화를 채용하고 있다. 유화의 입술이 ‘석자’나 늘어지는 것은 조류숭배 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결국 늘어진 입술을 여러 차례 잘라낸 뒤에 벙어리에서 벗어나 말을 하게 된다. 이런 조류숭배 사상은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 설화에서도 발견된다. “알영이라는 우물가에 한 계룡(鷄龍)이 나타나더니 왼쪽 옆구리로 옥 같은 여아 하나를 낳았는데 그 입부리가 닭같이 뾰족하여 월성 북쪽 냇물가에다가 그 입부리를 떼어버리고 나니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일부에서는 알영 대신 아리영(阿利英)이라고도 적혀 있다. 이 ‘알’ ‘아리’라는 말이 다 우리 옛말에서는 거룩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인기 TV드라마 <인어아가씨>의 아리영도 여기서 따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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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건국 과정은 오늘날 관점에서도 매우 눈길을 끈다. 어느 의미에서는 주몽은 유능한 벤처창업가로서 이른바 인수·합병(M&A)에 대단히 능했던 대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주몽의 남하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거부이자 새로운 벤처창업을 상징한다. 기존의 틀을 버리고 새 판을 벌인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초기 잠재역량(지분)은 북부여를 함께 탈출한 오이, 마리, 협부 등 북부여 세력이다.
부여에서 분사해 ‘중소기업 고구려’를 세우다
거기에 재사, 무골, 묵거 등 모둔곡 세력이 합류한다. 이 과정은 우호적 인수·합병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 뒤 졸본천을 중심으로 한 졸본부여(중국 요녕성 환인시 지역)의 토착세력과 연합하는 제2차 인수·합병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선 ‘정략결혼’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졸본부여의 연합세력을 대표하는 것은 이 지역의 유력자인 소서노이다. 졸본의 부호 연타발의 딸로 우태와 결혼해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던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다. (일부에서는 두 아들이 주몽과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하지만, 별다른 후계 논쟁 없이 북부여에서 내려온 유리로 결정된 것을 보면 역시 우태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다.) 소서노는 주몽과 재혼한 뒤 전 재산을 기울여 주몽의 창업을 돕는다.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과의 제3차 인수·합병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큰 틀에서는 우호적 인수·합병이라고 할 수 있다. 비류국의 송양왕이 스스로를 ‘선인’이라고 한 점에서 이 나라는 단군의 후손이자 고조선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일부 역사가들은 비류국이 소노 집단을 상징하며, 비류국의 합병은 바로 고구려연맹체에서 주도권이 주몽의 계루 집단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파악한다. 나중에 송양왕은 ‘송양후’ 또는 ‘송양왕’으로 명칭을 유지한다. 재위 6년에 있었던 행인국(혜산 일대) 정벌과 재위 10년에 있었던 북옥저(함경도 지역) 정벌은 적대적 인수·합병의 형태를 띤다. 두 나라는 그대로 고구려의 성읍으로 편입됐고 스스로의 지분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이처럼 주몽은 우호적 인수·합병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고구려의 영역을 확대해나가는 데 성공한다. 부여라는 기존틀에서는 성장할 수 없는 사업 부문을 이끌고 별도로 분사해 고구려라는 중소기업을 세운 뒤 우호적, 적대적 인수·합병 등을 적절히 결합시켜 경쟁력 있고 성장성이 높은 첨단기업으로 발전시킨 셈이다. 2대 유리왕, 3대 대무신왕 때는 동명성왕 때와는 달리 정벌 방식이 기본으로 정립되고 있다. 적대적 인수·합병과 신사업 진출이 더욱 일상화된 셈이다.
북한의 독특한 역사론
한편 북한은 독특한 역사론을 전개해 눈길을 끈다. 주체사관을 내세우는 북한의 고구려 건국에 대한 논리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고구려는 이제까지 알려진 것보다 240년을 더 거슬러올라가 기원전 277년에 건국됐다. (2)그 고구려의 왕계도 지금과 달리 2대부터 6대까지 다섯 왕이 더 있었다. (3)동명왕릉이 고구려의 평양 천도 때 환인에서 평양으로 옮겨와 지금도 존재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북한의 주장은 그 대담한 발상법만큼이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앞으로 중국과 벌어질 역사 논쟁에서 북한과 협력하게 될 우리 역사계로서도 북한의 논법은 비켜갈 수 없는 논쟁거리다.
고구려의 건국을 상징하는 동명성왕은 이처럼 건국 연대, 건국 당시의 정확한 위치와 영역, 동명왕 이후의 역대 왕계도, 고구려 건국세력과 우리 민족의 연관성 등 미해결된 주제들로 둘러싸여 있다. 과연 고구려는 21세기 한민족에게 무엇인가? 저마다 역사책 하나라도 펴봐야 할 때다.
고구려 건국설화와 여걸들
고구려 건국설화는 그대로 백제 건국설화로 이어진다. 혈통적으로 고구려 건국 주도세력의 1대나 2대가 백제 건국의 주인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설화에서 모두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높게 자리매김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주몽을 낳고 양육한 유화 부인을 보자. 그녀는 부여 금와왕의 왕비가 돼 알에서 태어난 주몽을 양육하다가 주몽이 금와왕의 왕자들에게 위협을 받자 많은 일을 한다. (1)금와왕의 일곱 왕자로부터 주몽을 보호하기 위해 예씨와 결혼시키고 (2)아들의 망명을 돕기 위해 지혜를 발휘해 명마를 골라주는가 하면 (3)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5가지 씨앗을 아들에게 준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녀는 고구려의 농업신으로 추앙받는다. 실제로 6대 태조대왕 등 역대 고구려 왕들은 부여 땅에 있던 유화 부인의 묘에 제사하기도 했으며, 사신을 보내 제사를 정기적으로 지낸 것으로 보인다. 부여에서도 그녀가 죽자 왕의 어머니에 준하는 예로 장사지낸다. 어떻게 보면 미혼모인데도 국가의 신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주몽의 후처이자 비류 온조의 어머니인 소서노도 걸출한 여걸이다. 소서노는 주몽이 남하해 처음 자리잡은 졸본부여 실력자의 딸(또는 공주)이다.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아 졸본부여의 지도자 그룹에 속했던 소서노는 주몽과 재혼해 고구려 창업에 크게 기여한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 남겨두고 왔던 아들 유리가 졸본으로 와 결국 적자로서 왕위 계승권을 가져가자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과 함께 남하한다. 일부 사학자들은 당시 남하한 일행이 곧바로 미추홀(인천지방·비류백제)과 위례홀(한강유역·온조백제)로 나뉘지 않고, 일정 기간 소서노를 사실상 군장(왕)으로 한 시기를 지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소서노는 남하한 뒤 13년 동안 더 살았다. 적어도 소서노가 고구려의 창업에 참여하고 기여한 경험을 백제 건국 과정에서도 충분히 발휘했으리라는 추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소서노 역시 백제의 건국을 이끈 신으로 추앙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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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자들, 북한에 자극받았나
중국에서는 1990년대까지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고구려는 중국사’라는 주장이 나오긴 했어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 북한은 1979년 주체사상에 입각해 연구한 성과를 토대로 <조선전사>를 새롭게 내놓는다. 특히 고구려사를 다룬 <조선전사> 3권에서는 대외투쟁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다뤄 고구려의 ‘반침략적 애국투쟁 정신’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내용은 중국 학자들을 상당히 자극했다고 평가된다. 마침내 북한과 중국은 공식석상에서 고구려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이기에 이른다. 고구려연구회 대표 서길수 교수가 전하는 1993년 8월11일 중국 집안에서 열린 ‘제1차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토론회’의 논쟁 장면을 보자.
“이 토론회에는 중국, 한국, 북한, 일본, 대만, 홍콩에서 많은 학자들이 참석했다. …첫날 종합토론에서 북경대의 정인갑 교수가 (고구려의) 귀속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나섰다. 당시 집안박물관 부관장이던 경철화가 ‘나 개인의 학설이자 중국 동북지방 역사 및 고고학의 성과인데,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서기 427년부터는 고구려가 조선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 문화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지방의 용(龍)문화에 속한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북한 김일성대학의 역사학계 원로인 박시형(당시 84살) 교수가 반박하고 나섰다. ‘과거의 고조선-고구려 땅이 지금 중국 영토가 됐다고 해서 그 역사를 어떻게 중국사에 갖다 붙여 중국 소수민족 운운하는가 이해할 수가 없다. 고구려야 옛날부터 고조선-부여와 함께 중국인들 스스로가 역사책에서 동이족이라고 독립해 지칭했고, 중국의 한 소수민족이란 서술은 역대 어느 사서에도 없다.’
그러자 다시 중국쪽 심양동아연구중심 손진기 주임이 되받는다. ‘우리들이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국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상 고구려는 오랫동안 중국의 중앙 황조에 예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후예는 조선족이라고 할 수 없고, 대부분은 오늘날 중국의 각 민족이 됐다.’ 당시 회의에 참가한 한국의 학자들은 경악했다. 한번도 고구려 역사가 한국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컸던 것이다. 이런 충격은 중국인 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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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선왕들의 치욕을 딛고 한반도 역사상 가장 광대한 땅을 정복한 광개토대왕이 부활한다
분단되면서 우리의 조국은 사실상 ‘섬나라’가 돼버렸다. 젊은이들이 방학이면 갖가지 차량에 올라탄 채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달려갈 수 있는 북쪽 길이 막힌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조국을 동강낸 철조망의 벽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우리가 부모 세대에게 분단의 시작에 대해 원망했듯이, 이제 우리는 자녀 세대에게 분단의 지속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할 판이다. 따라서 통일은 우리에겐 단순한 민족의 재결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잃어버린 대륙을 향해 날아오르는 화려한 비상이 민족 재결합의 감동 뒷면에 장엄하게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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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정복전의 동기, 원한!
우리에게 해방의 꿈, 대륙의 꿈, 천하의 꿈을 안겨주는 존재가 있다. 광개토대왕이다. 20세기 역사에서 우리 민족에게 자연스럽게 생성된 그런 꿈이랄까 잠재의식에 이어 21세기 벽두부터 몰아치고 있는 중국의 역사전쟁 때문에 광개토대왕은 더더욱 존경받는 한국인이 돼가고 있다. 과연 광개토대왕은 부활하는가? 우리의 꿈(★)은 이뤄질 것인가?
광개토대왕(재위 서기 391~413년)의 휘는 담덕(談德)이다. (이름도 좋다! 덕을 말하다, 담덕.) 역사서에조차 “어려서부터 체격이 뛰어나게 훌륭했으며 뜻이 고상했다”고 기록된 그는 제왕학-군사학을 마스터했다. 10대 나이의 태자 때 이미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갔다. 동서남북 모든 방면을 향해 달려나간 그는 마침내 우리 민족사에서 최대로 꼽히는 정복 군주가 된다.
무엇이 그를 이처럼 사방으로 치닫게 했을까? 그의 끝없는 정복전의 동기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제1차적 동인은 ‘원한’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면이 적으로 둘러싸인 채 아직 충분히 강력하게 성장하지 못한 국가는 필연적으로 주변 국가들과 싸울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선 어쩔 수 없이 치명적인 상처도 입게 마련이지 않은가. 담덕이 물려받은 고구려는 강력한 정복국가-완성형의 국가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서기 371년 평양까지 치고 올라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 처참한 지경에까지 밀리고 있었다. 백제쪽의 위대한 영웅은 근초고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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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설욕을 위해 먼저 남쪽을 향했다. 고국원왕의 아들이자 담덕의 큰아버지인 소수림왕은 아버지 고국원왕이 죽은 지 4년 뒤인 서기 375년을 시작으로 376년, 377년 그렇게 해마다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는 담덕도 태어나 있을 때다. 역사학자 김용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처음 말을 배우고 사물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때에 담덕이 본 것은 고구려 군대가 백제를 공격하러 가는 장면들이었다. 어린 담덕에게 고구려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적이 백제라는 사실은 뇌리에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 즉위 다음해인 서기 392년 7월 왕은 친히 4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황해도 지역을 공격해 10여개 성을 빼앗았다. 9월에는 북쪽의 거란을 쳐 남녀 500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거란에 빼앗겼던 백성 1만명을 설득해 이끌고 돌아온다. 그 뒤 10월에는 다시 남쪽의 백제로 진격해 백제가 자랑하는 수군기지인 관미성(그 위치에 대해선 오늘날의 강화도, 또는 강화의 부속섬인 교동도, 또는 예성강 하구 설의 3가지 정도가 있다)을 20일 만에 함락시킨다. 이 관미성 공격을 위해 광개토대왕이 쓴 전법이 눈길을 끈다.
관미성은 바다로 둘러싸인데다 사면이 절벽으로 이뤄진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여기를 공격하기 위해 대왕은 해군을 동원해 7개 길로 진격하였다. 관미성의 함락은 서해 지배권이 고구려로 넘어간다는 것이자, 한강변에 위치한 백제의 수도 한성이 고구려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관미성을 탈환하기 위해 서기 393년 백제 아신왕 자신이 1만명을 거느리고 공격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이듬해에도 백제 아신왕은 황해도 수곡성을 공격하고, 그 이듬해에도 좌장 진무 등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모두 실패한다. 이 수곡성을 둘러싼 싸움에는 광개토대왕이 친히 7천 병력을 이끌고 참전해 백제군 8천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대전과를 올린다. 이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 백제 아신왕은 자신도 광개토대왕과 같은 규모의 병력인 7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진격했다가 큰 눈을 만나 철수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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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백제와의 전쟁에서 대왕이 빼앗은 것이 58개성, 700여 마을에 이른다. 결국 고구려의 설욕전은 광개토대왕 때 한강유역까지 육박해 백제의 항복을 받은 뒤, 그 아들 장수왕 때 백제의 수도를 함락해 개로왕을 죽이는 것으로 한 매듭을 짓는다. 이때 백제는 한강유역을 버리고 남쪽 웅진으로 천도한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광개토대왕은 공격뿐만 아니라 방어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대륙을 달린 것만 아니라 배를 타고 거대 병력의 해군도 훌륭하게 지휘하는 등 ‘전쟁의 신’과도 같은 면모를 보인다.
백제 아신왕, 무릎을 꿇고 항복하다
광개토대왕의 남진은 서기 399년 백제와 왜의 연합군에게 공격받은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해 대왕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5만이라는 대병력을 신라로 출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고구려군은 신라로 가서 왜군을 물리치고 가야 지방까지 진격해 왜군을 완전히 물리친다. (바로 광개토대왕비에 나와 있는 이 부분의 비문 해석을 놓고 일본의 사학자들이 당시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의도적 오역은 당시 백제와 왜가 동맹 관계였다는 가장 기본적인 역학 관계에서 보면 출발부터 타당성을 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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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에 이어 만주와 중원 향한 북벌로
나아가 고구려의 남진은 민족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남진정책을 통해 삼국의 민족문화적 동질성이 강화 발전했다는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에 고구려의 문화가 대거 한반도 남쪽으로 밀려 들어왔다고 파악한다. 문화적으로 ‘경주 호우총에서 광개토대왕의 제사에 사용된 제기가 출토되고, 서북총에서는 장수왕의 연호가 새겨진 은그릇이 출토된 사실’은 고구려와 한반도의 문화적 융합·동질화가 획기적으로 가속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핵심적인 먹거리로 자리잡고 있는 된장·간장이 바로 고구려를 통해 이 시기에 들어왔다는 논문도 발표됐다. 남진정책의 결과로 민족적 정체성이 발전해 결국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의 대대적인 신라 귀순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남진은 이어 만주와 중원을 향한 북벌로 이어진다. 환도성을 함락하고 고구려에 치욕을 안겨준 선비족에게 설욕하기 위해 대왕은 먼저 서북방을 안정시켜 공격의 여건을 완전히 갖춰놓는다. 서기 395년 선비족의 북쪽 배후라 할 수 있는 거란을 치고, 다시 서기 398년 북방의 숙신을 안정적으로 복속시킨다.
그 뒤 선비족이 후연을 세우자 서기 407년 후연에 대한 전면전을 벌인다. 이때 광개토대왕은 백제 공략 때처럼 치밀하게 준비한 뒤 전격적으로 사면에서 들이치는 ‘필승 전법’을 구사한다. 백제의 관미성을 칠 때처럼 우회작전을 동원해 후연의 수도 용성을 사면에서 한꺼번에 압박한 것이다. 이때도 해군을 동원하였다. 후연은 결국 이런 공세에 굴복해 내부 반란이 일어나 고구려 출신인 고운을 왕으로 옹립하고 후연 대신 북연을 세운다. 광개토대왕은 고운을 고구려의 제후왕으로 받아들인다. 그 뒤 서기 410년 동부여도 정벌해 동쪽도 안정화한다.
이 결과 고구려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의 북부 전역을 강역으로 거느린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확고하게 군림하게 됐다.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인 위기의 나라, 왕이 전사하거나 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치욕을 겪는 국가를 이제는 부챗살 모양으로 그 국력이 사면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중심제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왜 그리도 일찍 죽었을까
이 전성기를 가져온 광개토대왕에게 고구려 백성들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彊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극존칭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렇게 칭송했다. “태왕의 은혜는 하늘에 이르고, 태왕의 위력은 사해에 떨쳤나이다.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하고,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나이다.”
그런데 대왕은 왜 이리도 일찍 죽었을까? 아쉽다. 왜 그 아들 장수왕은 수를 충분히 누렸는데 39살에 죽었을까? 의문이다. 고구려 역대 군왕 가운데는 동명성왕처럼 40도 안 돼 죽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태조왕처럼 재위기간만 94년에 이른 것으로 기록된 왕도 있기에 그렇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정열을 전력으로 쏟아부은 사람들은 왜 그리도 일찍 가야만 하는 것일까? 아, 주몽이여, 담덕이여!!!
그들의 논리는 해괴하다 2003년 초 중국에서는 <중국고구려사>란 제목의 책이 출판됐다. ‘중국+고구려’ 논리를 노골화한 셈이다. 저자는 통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 경철화 교수이다. 고구려를 중국으로 간주한 이 책은 나아가 ‘중국 역사에 따라 고구려의 시대를 구분하는’ 해괴한 논리까지 폈다.
(1) 양한(兩漢·전한과 후한) 시기: 추모왕(주몽왕)~산상왕 BC37~AD227년 이에 대해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대표는 “한 나라의 시대를 구분하면서 다른 나라의 왕조에 따라 시대 구분을 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고구려가 적어도 705년을 존속하는 동안 중국과 몽골에선 모두 35개의 나라가 생겼다가 사라졌다고 분석하면서 “도대체 705년 동안 꿋꿋이 이어온 고구려가 수없이 흥망을 반복해온 중국의 어떤 나라에 속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서 교수에 따르면 고구려가 존속하는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진 35개 왕조 가운데 70% 가까운 24개 국가가 50년도 못 가서 망했다. 100년이 안 돼서 망한 국가는 30개로 늘어나 전체의 86%를 넘는다. 200년 이상 간 나라는 한나라(221년)와 당나라(290년), 단 두 나라뿐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35개 나라 가운데 절반 정도는 중국의 한족이 아닌 북방민족이 지배한 나라이다. 이 35개 나라는 모두 중국이 자기 나라의 역사로 간주하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경철화 같은 학자는 고구려사를 한족 위주의 4단계로 나누고 있다.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역사의 한 장면은 고려의 서희와 거란침입군 장군 소손녕 사이에 벌어진 역사 논쟁이랄까 외교 논쟁이랄 수 있다.
고려 성종 12년(993년) 거란의 요나라가 80만 병력을 동원해 침입해오자 고려 조정은 들끓었다. “거란의 군세를 당할 수 없으니 항복을 하자”는 ‘항복론’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강화를 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조정의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 서희는 홀로 담판에 나선다. 소손녕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대의 나라 고려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나라 소속인데 당신들이 이 땅을 침식하고 들어왔다. 나아가 우리와 땅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와 관계를 맺으므로 오늘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제 땅을 베어 바치고 조공을 하면 무사할 것이다.”
이에 대해 서희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따라서 국호를 고려라 하고 수도도 평양으로 정한 것이다. 만약에 경계를 가지고 말한다면 귀국의 동경(요양)도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한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가 침범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만일 여진을 구축하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거기에 성과 보루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약 나의 의견을 귀국의 임금에게 전달한다면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결국 서희의 이 논거가 받아들여져 요나라 군사는 철수하게 된다. 이 담판과 관련해 한편에서는 요나라로서는 고려가 송나라와 국교를 끊고 자신들과 국교를 맺도록 하는 것을 받아들였기에 철수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담판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을 국제적으로 선언하고 불완전하나마 관철시킨 한 장면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고려세계>에서는 왕건의 조부 작제건을 ‘고(구)려인’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왕건 스스로도 “발해는 본래 나의 인척의 나라”라고 발언하는 등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송나라 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고려 왕씨의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
중국 역사지도 속의 고구려 중국의 역사지도에선 고구려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특히 고구려의 귀속 문제로 논쟁이 가열되는 지금 이 문제는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에서 제시하는 역사지도가 본격적으로 출판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1982년 처음 출판돼 지난 1996년 6월 2차 인쇄를 한 중국지도출판사 발행 <중국역사지도집> 전 8권이 나름대로 최고의 권위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지도집은 중국사회과학원이 주판공청이며, 담기양 교수가 편집 총책임을 맡았다.
고구려와 관련된 지도 부분은 동북공정의 방향성과 달리 이전까지의 중국쪽 역사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지도1: 전한시대=고구려는 일단 현토군 안에 들어가 있다(초록색의 한나라 영역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를 큰 글씨로 표시해 주변의 한나라 영역 밖에 있는 부여·숙신·옥저 등과 동격으로 표시하고 있다. 반면에 도시로서의 고구려(高句驪)는 한자 표기를 다르게, 아주 작게 표시해놓고 있다.
지도3: 5호16국시대=고구려가 중국에서 분리된 별도의 영역으로 표시돼 있다. 중국쪽의 보라색 제나라와는 거란에 의해 확실하게 분리돼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는 하나의 같은 영역으로 된 채 나라별로 구별돼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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