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달린다, 블레이드 러너!
21세기의 음울한 묵시록을 충격적으로 그려낸 불행한 문화영웅 ‘필립 K. 딕’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자신은 거액의 보수 대신 이런 잡동사니가 담긴 주머니를 선택한 것일까? …7개의 물건을 가지고 지워진 기억을 찾아나선 그는 자신을 잡으려는 비밀경찰과 만나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도망쳐야 한다는 현실에 부닥친다. 제닝스는 위기 때마다 자신이 주머니 속의 영문 모를 물건 하나씩을 사용하며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그리고 자기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거액의 페이첵 대신 역시 이 잡동사니 물건들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곤 경악한다.”(소설 <페이첵>)
죽은 뒤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져
“서방연합정부 범죄예방국 국장 존 앤더튼은 ‘미래의 살인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카드를 보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 모든 범죄를 1주일 전에 예견해 범죄 예정자를 미리 수용해버리는 식으로 철저한 치안을 유지하는 이 미래 사회에서 앤더튼이 체포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죽일 것이라고 나타난 사람은 서방연합동맹군(AFWA) 사령관 ‘레오폴드 캐프랜’이다. … 캐프랜은 범죄예방국의 오류 가능성을 트집 잡아 범죄예방시스템을 해체하려 한다. 만일 이 기구를 해체하지 않으면 퇴역 장교가 이끄는 군사정보국에 의해 내전으로 비화할지도 모른다고 ‘세명의 돌연변이 예지자’들이 예언했다는 것이다. … 세명의 예지자들이 미래를 똑같이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두 사람의 예언이 일치하는 ‘메조리티 리포트’(Majority Report)와 그 예언에 시간과 장소의 변수 정도가 달리 작용하는 것을 반영하는 한 사람의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가 있을 뿐이다. … 존 앤더튼은 자신이 30년에 걸쳐 완성해놓은 범죄예방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이 만일 예지자의 리포트처럼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다면… 자신은 수용소로 갈 것이지만, 이 시스템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시스템이 틀렸다면… 이 끔찍한 ‘패러독스’를 이용해 ‘미-중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해체되면서 퇴역한’ 레오폴드 캐프랜은 권력이동을 노리는 것이다. 과연 어떤 리포트가 옳은 것인가? 누가 서방연합의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소설 <마이너리티 리포트>)
1971년 미 중앙정보국(CIA)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집을 습격당하고 협박 전화까지 계속되자 안전에 대한 편집증에 시달리다가 캐나다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하고 음울한 분위기에서 살았던 그는 생전에 그다지 각광받지 못했지만, 죽은 뒤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세기는 그의 이름을 주요한 문화코드로 화려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필립 K. 딕은 무엇보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미래 사회와 가상현실을 그려내 인류에게 21세기형 실존의 물음을 내던진다.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당신을 둘러싼 현실이 진실이라고 믿는가?’ ‘당신이 실제로는 인조인간이고, 그 현실은 가상인데도 그렇게 믿는단 말인가?’
‘머신’의 세계로 귀의하다
장자의 ‘나비의 꿈’과 기독교 신비주의를 무한의 상상력으로 첨단화한 시공간에서 인간과 인조인간이 맞붙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이런 놀라운 상상력을 할리우드가 그대로 둘 리 없다. 필립 딕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해인 1982년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처음으로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로 영화화된 것을 시작으로 속속 거장들의 손을 거쳐 영화로 변신한다. 1990년 <토탈 리콜>(Total Recall), 2001년 <임포스터>(Impostor), 2002년 <마리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3년 <페이첵>(Paycheck)이 잇따라 개봉된다. 감독들도 모두 쟁쟁한 인물들이다. 게리 플래더, 스티븐 스필버그, 오우삼….
특히 첫 작품 <블레이드 러너>는 음울한 디스토피아적 분위기에서 인간과 복제인간, 현실과 허구가 충돌하고 교차하는 충격적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각인을 남긴다. 늘 산성비가 내리는 어둡고 암울한 도시, 400층을 헤아리는 고층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에어카, 인간과 숨막히는 추적전을 벌이는 복제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 과연 누가 사람이고,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살아 있는 괴물과도 같은 그런 세계가 어느새 우리 앞에 도래한 듯한 환각과 함께 전율해야만 했다. ‘너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고, 인간이라고 해봤자 결국 수명이 좀 긴 리플리컨트(<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수명 4년짜리 복제인간)가 아닌가?’
그의 작품은 그의 생애와 일정한 연관성을 유지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은 나를 미치게 한다. 기르는 고양이가 죽을 때마다 나는 신을 저주했다. …신에게 분노를 느낀다. 나는 신을 붙들고 ‘인간은 죄를 지어서 파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고통에 대한 강박관념의 반대급부일까? 그는 생명의 동일성 의식에 깊이 빠지게 된다. 여기서 그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절충론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머신’의 세계로 귀의한다. 바로 컴퓨터나 로봇이 스스로 지능을 진화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대신한다는 테마 속으로 지속해서 몰입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갖가지 정신질환으로 약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그에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헛갈릴 수밖에 없다. 진실은 그야말로 상대적이며, ‘살아 있는 생물만큼 많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여기에 시대 상황이 겹쳐진다. 그가 작품활동을 한 1950~8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상징되는 시대이다. 나아가 미국에 히피문화가 성장하고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 기세를 떨친 시기이다. 그가 청춘을 보낸 캘리포니아는 그런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그의 작품은 점점 난해하고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짙어간다. 여기에 1974년 ‘환상’을 경험하면서 일종의 변형된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서의 요소가 합쳐져 훨씬 복잡한 성격으로 발전한다. 그가 살아서 추구한 다양한 실험과 성과, 그리고 진지성은 그에게 ‘SF문학계의 셰익스피어’ ‘SF 분야의 성인’이라는 찬사를 안겨주기도 했다.
현대 첨단과학과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21세기의 음울한 묵시록을 충격적으로 그려낸 불행한 한 문화영웅을 만날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비디오의 발달은 스크린에서 참패한 <블레이드 러너>를 21세기 대중에게 연결시켜주는 훌륭한 통로가 됐고, 인터넷과 영화산업의 발전은 ‘필립 K. 딕’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현재 야후닷컴에서 검색되는 그의 관련 정보 사이트 수는 약 130여만건에 이른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발견해버린 미래의 인간은 ‘칼날 위를 달리는’ <블레이드 러너>처럼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불행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살하지 않고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 세계의 잔인성과 야만성은 이런 세계로 오는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놀라워라, 미래의 예지능력 필립 딕은 놀라운 미래기술들을 숨돌릴 틈도 없이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기술들이 쉴 새 없이 현실화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목격한다. 20~50년 전에 이토록 엄청난 첨단기술의 가능성을 정확히 내다봤다는 점에서 그는 그토록 집착했던 미래의 ‘예지자’임에 틀림없다.
가장 최근에 영화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재등장한 <페이첵>은 필립 딕의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천재성을 스크린 가득 구현해놓고 있다. 주인공 벤 애플렉은 맨손으로 허공에서 PC를 조작한다. 2년 전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톰 크루즈가 장갑을 낀 채 조작하던 ‘장갑형’에서 ‘맨손 제어형’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다. 실제로 이 기술은 현실세계에서도 가능한 수준까지 개발돼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고객에 대한 1대1 광고를 구현하는 MMS(Multimedia Messaging Service)가 단연 눈길을 끈다. 일단 대상인간의 상세 정보를 중앙컴퓨터에 내장해놓은 다음 일종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식별해내 맞춤형 정보(또는 광고)를 전달하는 것이다. 고객의 위치는 GPS(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추적 기술)로 파악한다. 현실세계에서 이 기술 역시 곧 상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영화에서는 ‘전자종이’도 선보였다. 현재 필립스에서 개발 중인 기술은 1초에 100개 정도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단계까지 와 있다고 전해진다. 망막인식 장치는 이제 새로운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다.
가장 극적인 기술은 역시 필립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들인 ‘리플리컨트’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복제양은 인류의 눈앞에 등장했다. 기술적으로는 복제인간이 충분히 가능한 수준까지 치닫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복제인간의 수명을 4년으로 설정해놓고 있는데, 최초의 복제양이 노화증으로 인해 일찍 죽은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더해준다.
특히 그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기억 추출·제거 기술은 21세기 독자들의 섬뜩한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하고 있다. |
'할리우드 영화' 소재의 보물창고
그러나 그의 작품은 오히려 21세기에 들어서 더 각광을 받고 있다. 21세기 문화에서 주요한 테마로 부상하고 있는 그의 영향력은 넓고도 깊다. 그의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이 각 문화 부문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그의 소설은 할리우드 감독들이 가장 매혹을 느끼며 달려드는 소재로 꼽힌다. 거의 해마다 그의 소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나아가 그의 이름을 딴 SF문학상도 제정돼 해마다 권위를 더해가고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발리스>는 오페라로 만들어졌고, 마이클 비숍의 <아, 필립 딕은 죽었네>와 같이 그를 소재로 한 소설들도 여럿 등장했다. 그의 작품은 이 밖에 그는 사이버 펑크와 펄프 픽션 등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내’를 무기로 천하를 얻다
일본적 경쟁력의 뿌리, 근세 일본의 기초를 닦은 ‘고난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
“피로 피를 씻는 난세, 살벌한 전국시대다… 나는 분명 욕심 많은 사람이다. 내 아버지를 내고, 아들까지도 죽였다.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뭐가 있느냐?… 누군가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는 한 그 피의 강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검의 산만 더욱 높아질 뿐….” (영화 <가케무샤> 중에서 다케다 신겐의 말)
두살 때 어머니와 생이별
2004년 3월26일 도쿄 증시는 일본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긍정적 전망으로 오전 9시20분 현재 니케이 225지수가 1.62% 상승한 11,717.77포인트를 기록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6주 연속 매수 우위를 보일 정도로 일본 주식을 계속 사대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일본 정부는 지난 2월의 근로소득 지출이 6.9% 늘었다고 발표했다. 무엇보다 이날 일본 재무성에서 나온 무역통계는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수치를 밝히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수출이 1년 전 같은 달과 비교해 14.9% 늘어나 10년 만에 흑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가 벤처 열풍과 IT(정보통신) 열풍에 빠져들고,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란 말을 들으며 세계 경제의 강자로 등극하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던 일본이 다시 용트림하고 있다. 호봉제-연공서열-종신고용의 독특한 인적 시스템과 탁월한 기술력,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고로 세계 경제를 누비던 일본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오명을 벗고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본의 경쟁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15세기 무렵까지 조선과 그다지 큰 격차를 보이지 않던 일본은 도대체 어떤 길을 갔기에 개국 이후 이처럼 짧은 시기에 세계 경제의 강자로 떠오른 것일까? 미국식 구조조정이라는 잔인한 제도가 세상에 맹위를 떨치는 21세기에도 어떻게 일본기업가들은 ‘사람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의 인생은 두살 때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고난으로 시작된다. 주변의 강대한 다이묘(大名:전국시대의 영주들)의 압력에 소국의 다이묘인 아버지가 굴복해 정략이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뒤 6살 때 볼모로 넘겨져 두 차례에 걸쳐 13년 동안 엄중한 감시 속에서 볼모 생활을 해야 했다. 볼모 기간에 그는 자신을 잡고 있던 오다 노부히데의 협력 요청을 아버지가 냉혹하게 거절해 죽을 수도 있는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19살 때 볼모로 잡고 있던 이마가와가 신흥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망한 것을 계기로 볼모에서 해방돼 선조 때부터 근거지인 오카자키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남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에 사실상 복속해야 했으며, 노부나가와 연합한 것 때문에 다케다 신겐에게 집중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 뒤 사돈을 맺은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처를 죽이고 아들마저 자결하게 만드는 비극을 겪는다.
그는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어느덧 노부나가 세력의 강자로 떠올랐지만, 노부나가가 암살될 때 자신의 주력군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주도권을 기회에 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빼앗기는 불운을 겪는다.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에게 굴종한 뒤 그는 강제로 본거지인 오카자키를 떠나 더 먼 동쪽의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겨가야 했다. 또한 히데요시의 압력으로 그의 이부여동생(조카딸)과 결혼해야 했고, 손녀딸과 히데요시의 아들이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천하통일 뒤 대륙정벌에 집착하는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명령하고 나라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을 때 이에야스는 절묘하게 조선 출병에서 빠질 수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외면상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면서 에도를 중심으로 힘을 비축한다. 그 뒤 대내외적으로 고전을 겪던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자 마침내 1600년 동군(에도를 중심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원하는 세력)을 이끌고 서군(히데요시의 근거지였던 사카이 등 오늘날의 오사카 세력)을 세키가하라에서 격파하고 사실상 통일 일본을 장악한다. 이에야스는 그 뒤 에도에 막부를 설치해 일본 전역을 통치하면서 근세 일본의 기초를 닦는다.
일본인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파란만장한 삶은 일본에서 지금껏 숱한 소설과 책, 드라마, 영화, 연극의 소재가 돼오고 있다. 나아가 일본 사람들은 그를 늘 ‘일본의 10걸’로 선정하면서 존경하고 있다. 일본의 소설가 야마오카가 밝히고 있듯이 그는 ‘고난의 영웅’으로서 국가위기, 경제위기의 시기에 일본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 인물로 꼽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21세기 일본의 관련성에서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평화 일본’을 열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교차하고 있는 ‘평화’와 ‘팽창’의 두 주제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이토 히로부미-현대의 극우파로 이어지는 대외팽창과 전쟁의 기류에 대응하는 평화 속의 대내 발전이라는 기류는 사실상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처럼 평화 기류를 유지하고 있을 때 자신의 저력을 발휘해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길-팽창의 길로 갔을 때 언제나 초기의 성공과 긍극적 패배로 이어지곤 했다.
두 번째 이에야스는 경제에 대단히 강한 지도자로 난세를 헤쳐갔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소국에서 시작한 국가를 키워나간 경험으로 경제마인드를 충분히 갖춘 지도자였다. 그가 에도막부의 건설로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동부의 발전을 이루고 전란 뒤의 경제부흥을 일으킨 것은 그의 경제감각을 잘 읽게 해준다. 이와 함께 나카센도와 같은 동일본과 서일본을 잇는 주요 도로망을 정비하고 선박운행도 활성화했다. 이에 따라 국토의 균형 발전과 농경지의 확대, 상업의 융성, 해외무역의 활성화, 인구 증가를 이룩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일본적 인간경영의 토대를 닦았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의 가신단은 먼저 충성심이 매우 뛰어났다. 이에야스가 남에게 고통을 강요하지 않고 모범을 보이며 사람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는 ‘여론’을 적극 활용해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산시켰다. 특히 그 자신이 ‘대기만성형’ 인물이었기에 일본인의 의식구조에 노인층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사회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각인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다른 나라와 달리 정년을 연장하는 놀라운 선택을 하는 이면에는 이에야스의 그림자가 분명 크고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원, 분노는 적”
다섯째, 검소·절약·저축의 미덕을 대단히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런 미덕이 근세 이후 일본인의 잠재력을 성장시키는 한편 교육열을 높이는 효과로 이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살아서 정치와 경제에서 동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그는 인간으로서 이런 교훈을 후세에 남기고 있기도 하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자유롭지 못함을 늘 곁에 있는 친구로 삼는다면 부족할 것이 없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조선군대를 철수하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는 반대했다. 1592년 히데요시가 고니시 유끼나가, 가토 기요마사, 쿠로다 나가마사 들을 시켜 20만의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하도록 했을 때 이에야스에게도 ‘동쪽 다이묘의 총독’ 이라는 이름으로 출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이에야스는 “새로 내려주신 간토 지방을 다스리기 어렵기 때문에 여유가 없습니다”면서 출진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1만5천명을 이끌고 나고야까지 가야 했다. |
결국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이에야스도 일본에 남게 되었다. 남아 있는 동안 이에야스는 특유의 인내작전으로 히데요시의 견제를 비켜나간다. 히데요시가 애첩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에게 지위를 승계시킬 생각이라는 것을 간파한 뒤 미리 알아서 실력자 두명과 나란히 그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문을 제출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으로 죽어가는 히데요시로부터 그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무를 대행해 달라는 부탁까지 받는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는 5다이로(五大老)의 우두머리로서, 내대신으로서 히데요시의 측근과 협의해 바로 조선에 나가 있는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 뒤 쓰시마의 종씨 가문을 통해 조선과 협상을 시작해 1609년 기유조약을 체결해 무역이 재개되고 관계가 개선됐다. 조선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내린 조처를 높이 평가해 호응한다.
CEO들은 왜 그를 선호하는가
%%99000%%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시대를 살았고, 시대를 통틀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로 꼽힌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천하통일을 위해 온 생애를 걸었고, 두 사람(히데요시, 이에야스)은 실제로 통일천하의 맛도 보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선명하게 구별되는 개성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세 사람은 두견새를 소재로 일본 특유의 단가인 하이쿠를 읊었다고 전한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 (오다 노부나가) 이 하이쿠만을 보면 노부나가는 성격이 급하고, 히데요시는 노회하고 음모적이며, 이에야스는 바보같으면서도 둔중한 무게가 느껴지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성격과 달리 세 하이쿠에는 세 사람이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어떻게 읽었는가를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노부나가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히데요시는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론에 몰입을, 이에야스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선 시대의 성숙을 노래하는 셈이다.
한편 일본의 한 경영전문잡지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에야스에 대한 선호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자신을 전국시대의 무장에 비유한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두 물음에 대해 1위는 모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나왔고, 2위는 오다 노부나가로 집계됐다. 이와 달리 각 기업에서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사람들은 (1)번 질문에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타입이라고 대답한 사람으로 갈리었고 그 비율도 대체로 비슷했다는 흥미로운 결과가 보도되었다.
수성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최고경영자는 ‘수비는 최고의 공격’이라고 본 이에야스를 선호하고, 공성을 해야 하는 처지라 할 수 있는 차세대 경영인들은 각각 전국시대를 헤쳐간 세 인물로부터 저마다의 강점을 찾아내고 있는 셈이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2)후계자로는 어떤 타입의 무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요셉] 신과 인류 최초의 재테크
구약성서 고난의 주인공 요셉, 그가 신의 은총을 받는 경영자로 부활하기까지
창세기 35~50장… 이집트 역사서엔 발견 안 돼
구약성서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가슴 아프면서도 감동적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 놀라운 예술성과 종교적 성격으로 수천년 동안 인류의 심금을 울려왔다.
요셉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구약성서 창세기 35장부터 50장까지에만 나와 있을 뿐 이집트 역사서에선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재했다면 거의 3700~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물인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황적으로는 적어도 한번 이상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람들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이집트 세소스트리스 2세 시대(기원전 19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베니하산(Beni Hassan)의 크눔호텝 무덤벽화는 족장 입샤(Ibsha)의 인도로 37명의 아시아계 성인남녀와 아이들이 이집트에 도착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람들이 다양한 색채의 줄무늬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채색옷’을 연상시킨다. 요셉을 편애한 아비 야곱이 요셉에게 바로 ‘채색옷’을 입히고 있다. 나아가 메르넵타 8년에 작성된 ‘보고서’에는 파라오가 에돔에서 온 베두인족에게 ‘그들과 가족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도록’ 입국을 허락하고 있다. 일곱해 동안의 풍년과 일곱해 동안의 흉년에 대해선 당시 이집트의 농업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견해도 나온다.
» 이집트 농업을 보여주는 피라미드 내부 벽화. 구약에 따르면,
요셉은 정보경영과 국가 재해대책 시스템으로 국가 주도형 재테크를 실현했다. |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의 홍수량이 25~26피트 정도에 이르기를 간구해왔다. 이 홍수량의 수치를 기준으로 그해의 소출을 대략 결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홍수량이 20~21피트 정도에 그친다면 그해 곡식 소출은 약 20% 줄어든다. 반대로 홍수량이 필요량보다 20% 많은 30피트 이상을 기록하면 모든 수로와 제방까지 무너뜨려 많은 인명피해를 낸다. 나아가 요셉과 그 형제들을 기원으로 하는 유대인의 12지파가 나중에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가나안 지역으로 간 것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860년에는 성서의 요셉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두 형제 이야기’(The Tale of the Two Brothers)가 이집트에서 발굴된 바 있다. 여인의 유혹을 거절하자 모함으로 이어져 투옥되는 구조 등이 매우 비슷하다.
이런 점을 종합할 때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능해진다.
1. 기원전 17~19세기 무렵 이스라엘 지역에서 장기적인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들어온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2. 이 사람들의 지도자가 이집트의 농업을 주관하는 지위에 올라 장기 기근에 효율적으로 대처해 이집트는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도
구원해냈다.
3. 이 지도자가 동원한 방식은 전 국가적 식량 비축, 치수 사업, 광대한 토지 재개발 사업 그리고 경작지의 국유화 사업 등이었을 것이다.
4. 종교적·혈통적 측면에서 확실한 정체성 의식을 지녔던 이 집단은 당시 이집트에 있던 실화 또는 설화에 이 지도자의 전기를 결합시켰다. (아니면 그 자신의 실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점과 관련해 구약 역사학자인 유진 메릴은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요셉이 이집트에 온 것은 기원전 19세기 말엽 세소스트리스 2세 치하 때일 것이다. 세소스트리스는 많은 아시아 노예들이나 용병을 썼다. 그의 치하에서 광대한 토지 재개발 사업과 치수 사업이 벌어졌다. 당시 파윰 분지(Payyum Bassin)와 나일강을 연결하기 위해 수로를 팠는데, 이 수로의 유적이 오늘날도 ‘요셉의 강’(Bahr Yusef)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요셉의 핏줄들을 이집트 동부 삼각주에 정착하도록 초청한 것은 세소스트리스 3세일 것이다. …세소스트리스 3세 때 전무후무한 농업정책, 국가정책이 실시됐으며… 모든 종류의 장인들과 상인들이 정확하게 이 세소스트리스 3세 때 출현했다.”
백성들의 토지 박탈과 노예화 불렀다?
과연 이집트 세소스트리스 부자의 치세 때 벌어진 일은 무엇일까? 그 일에 요셉은(실제로 그 시기에 존재했다면)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 사라진 고리를 이어주는 것은 현재로선 구약밖에 없다. 구약에 따르면 요셉은 추수기에 비축해둔 식량을 팔아… 곧 그 땅의 모든 돈을 모아들인다. 이어 그는 양식을 위한 대가로 가축을 받았으며, 나중에 토지와 사람들까지 받았다. 그 뒤 사람들에게 종자를 주어 파라오의 소유가 된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추수의 5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했다. 나머지 5분의 4는 종자와 양식으로 삼게 했다.
그러나 요셉의 사업은 역사적으로 논쟁거리가 돼왔다. 그 실재성과 상관없이 성경에 나타난 그 재테크의 도덕성 때문이다. ‘신이 실행한 인류 최초의 거대한 재테크’가 결국은 백성들의 토지박탈과 노예화라고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사회주의자는 물론 진지한 도덕주의자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
이에 대해 요셉 연구자이기도 한 작가 토마스 만은 이런 견해를 내보인 바 있다. “당시 돈이 없을 때로서 보물과 귀한 금속을 낼 수 있는 대지주나 귀족들에게는 비싸게 팔았을 것이다. (국가 경영에 전혀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그들이 표적이었다.) 그리고 돈을 대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가축들은 형식적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원래 있던 축사와 집에 그대로 있었다. 일종의 담보를 잡은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가깝다. …토지도 영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토지의 소유권을 파라오에게 넘기고 작은 영토로 나누어 소작인들에게 경작을 맡긴 것이다. 나아가 5분의 1만 국가에 세금으로 내도록 한 것은 이전의 세금 비율과 사실상 같다. …이걸 악의적인 착취와 노예화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그래도 모든 회의가 확실하게 풀리지만은 않는다. 동양에 있었던 것과 같은 국가 창고, 재해 때 무상지원 방식은 재난의 규모가 너무 크기에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쨌든 유진 메릴은 세소스트리스 3세 때의 정책이 중산층의 형성을 도왔을 것이며, 실제로 다양한 장인과 상인들이 등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이 풀리지 않는 회의랄까, 의문은 신의 도덕성, 재테크의 정당성에 대한 인류 근원으로부터의 목소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요셉, 스탈린, 괴벨스, 티토, 풀리처…
요셉은 영어식으로는 조지프로 발음된다. 스펠링은 ‘Joseph’이다. 이 이름은 고난을 받은 사람들, 신의 은총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의 이름으로 그 역사를 이어왔다. 이런 인기를 반영해 무수히 많은 사람이 이 이름을 썼다. 그 결과 성인으로부터 독재자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수많은 사람이 또다시 역사에 요셉(조지프 또는 요십, 요제프 등)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법적 아버지도 이 이름이다. 마리아와 정혼한 그는 마리아가 혼전에 임신한 셈인데도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그대로 결혼한다. 그는 성자로서 나중에 가톨릭교회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도 이 이름을 썼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금융업과 조선업, 영화산업 등으로 백만장자가 된 조지프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그 자신이 영국 주재 대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아들들이 각각 미국의 대통령, 법무장관, 상원의원이 됐다.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도 이 이름을 썼다. 레닌이 죽은 뒤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이긴 그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30여년 동안 소련공산당 서기장, 총리로서 절대권력을 누리며 소련을 통치했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을 지낸 괴벨스도 요제프라는 이름을 썼다.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로 비동맹운동을 이끈 티토도 정식 이름이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다. 나치 독일에 대한 빨치산 투쟁 등의 경력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지녔던 그의 죽음은 유고연방의 해체로 이어졌고, 그 결과 발칸반도 지역은 처참한 민족분규로 20세기 후반 대표적인 비극의 현장이 돼버렸다.
영국의 해양소설가로 콘래드(Joseph Conrad)도 ‘조지프족’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폴란드계의 이 작가는 <로드 짐>(영화로도 나왔음), <노스트로모> <어둠의 심장> 등의 작품을 남겼다. 미국 퓰리처상의 기원이 되는 언론인 퓰리처의 이름에도 조지프가 들어간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었던 조지프 퓰리처는 현대신문의 기초를 닦았으며, 그의 이름을 딴 상은 1917년 이래 미국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저널리즘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1년 정보격차에 따른 시장이론의 기초를 세운 공적으로 노벨경제학상을 공동으로 받은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교수도 이 이름을 쓰고 있고, <신화의 힘> <신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등 신화학의 걸작을 남긴 캠벨(Joseph Campbell)의 이름에도 조지프가 들어간다.
토마스 만이 사랑한 요셉
요셉의 이야기는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손으로 거의 4천년 만에 다시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인류 앞에 부활한다. 만은 장편소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일반적으로 <마의 산>이 대표작이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요셉 이야기를 다룬 <요셉과 그 형제들>을 최고의 걸작으로 꼽을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괴테가 아닌 만이 이 일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이 대소설을 쓰기 위해 문헌연구나 답사여행도 엄청나게 해야 했다. 이렇게 투여한 기간까지 합치면 소설이 나오기까지 거의 16년이 걸린 것으로 집계된다. 모두 4권으로 된 소설의 첫 번째인 <야곱 이야기>는 1933년 나왔다. 바로 그해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강연을 목적으로 국외여행 중이던 토마스 만은 체포령이 떨어져 귀국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전에 ‘반공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이다’라고 말했던 것을 꼬투리 삼아 나치 당국이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했다. 공산주의자 논쟁이 아니더라도,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하기에 이 소설은 독일에서는 출간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나치 당국에 의해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국적까지 빼앗긴다. 마치 자신이 요셉이 된 것 같은 고난을 겪으며 토마스 만은 대작 <요셉과 그 형제들>을 써나갔다. 만 자신도 힘든 상황을 이길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이 소설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역사·신화·유적 등은 물론 유럽의 지성사를 두루 섭렵하는 산고 끝에 소설이 세상에 나오자 평론가들은 맨 먼저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독서량에 혀를 내둘렀다. 나아가 같은 시대를 살던 헤르만 헤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격찬하는 등 소설은 세상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카를 슈미트] 사상가, 악마와 악수하다
나치즘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카를 슈미트, 21세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의 그림자
“정치의 기본적인 조건은 ‘전쟁’과 동일하다. …헌법은 정치적·의식적 결단이다.”
“그러한 파괴수단(초재래적인 무기)을 다른 인간에 대해 사용하는 인간은… 그의 목표가 되는 다른 인간들을 도덕적으로도 절멸시켜야 한다는 강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상대방 인간들을 전체로서 범죄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체가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유신헌법도 그의 정신을 관통
20세기 민주주의 딜레마를 예리하고 냉혹하게 분석하며 ‘악마의 사상가’로 불렸던 카를 슈미트는 2차 세계대전 뒤에 ‘전범’으로 몰려 2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일체의 공식적인 활동에서 배제됐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근본 견해를 수정하지 않았다. 한때 서구에선 그의 연구를 주석으로 다는 것조차 용인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영향력은 20세기를 통털어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한국의 유신헌법도 사실상 그의 법철학과 정치철학의 모범적인 사례라 불릴 만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헌법>이 이 땅에서 번역된 것도 유신 발발 직전인 1972년이다.
법학자로서 카를 슈미트의 견해는 역설적으로 ‘법의 무효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법이 그 자체로서 어떤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법이 합의의 산물이라는 것 따위는 믿지 않았다.
“헌법은 그것이 규범화되기 이전에 힘에 바탕한 정치적 결단이 선행된다. …힘에 바탕한 정치적 결단이 법을 만들고, 힘이 법의 효력 근거이다.”
따라서 최초로 헌법을 만든 사람들, 카를 슈미트가 ‘헌법제정권력’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정치적 결단이 국가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한국에서는 이게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 헌법재판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국가 공동체는 이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공동체의 ‘적’이다. 나치즘이 유태인들을 ‘비인도적’으로 박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국가철학의 기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 슈미트나 나치주의자들에게 이 최초의 힘은 곧 ‘게르만 민족공동체’였다. 유태인은 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비쳐졌다. 따라서 나치의 인종주의는 히틀러 개인의 광기의 소산이거나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다. 카를 슈미트는 이런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데 동조했다. 역설적으로 히틀러 등장 이전 그에게는 유대인 제자들이 여럿 있었다. 망명한 제자 가운데 좌파적 성향인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주도했고, 우파이던 레오 슈트라우스는 오늘날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었던 것이다.
» 히틀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카를 슈미트는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히틀러야말로 독일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결단력 있는 인물로 비쳤다. |
카를 슈미트가 한창 활동하던 1920~30년대는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전후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시기였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 뒤에 구성된 바이마르공화국은 역사상 가장 완전한 형식적 민주주의 사례로 기록될 수 있는 반면에 내부 갈등이 가장 심한 사회이기도 했다.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조국 독일의 1차 세계대전 패배다. 그러나 그의 전쟁관은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랐다. 그는 “(러시아혁명 이전의)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영주들 사이의 전통적인 전쟁”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러시아혁명 이후 전쟁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과거 유럽 열강의 전쟁이 국가 자체를 파괴하지는 않았던 데 반해, 러시아혁명은 전혀 달랐다. 외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도 내란을 일으키고 혁명을 관철시켜나갔다는 점에서 그때까지의 전쟁 규칙을 모두 파괴한 사건이라는 것이 카를 슈미트의 진단이다.
‘의회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
카를 슈미트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처음으로 ‘절대적인 적’을 상정한 집단이라고 진단한다. 볼셰비키들에게는 자기네 국가를 공격하고 있는 외국보다도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군주가 더 큰 적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전쟁은 ‘절대적 전쟁’이 돼버렸다. 상대방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게 된 전쟁…. 19세기까지의 전쟁은 휴전을 하거나 설사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는 경우에도 항복협상을 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무조건’ 항복을 패배자에게 요구했다. 전쟁에서 ‘적’에 대한 규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관은 카를 슈미트의 법이론이나 정치이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는 전쟁과 마찬가지다. 휴전상태에서 전시상황을 국내 통치에 적용하는 기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카를 슈미트에게 ‘자유주의’는 믿을 수 없는 동반자다.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적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를 슈미트는 ‘의회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의회주의는 적과 친구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무능한 시스템이다. 국가는 외부의 적에 대응해 만들어진 정치공동체이다. 따라서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단일한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의회주의는 누가 국가의 진정한 적인지 식별할 수 없다. 그는 일찍이 <정치적 낭만>이라는 저서에서 담론이나 토론의 힘을 조롱했다. ‘적’은 토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법이라는 것은 결국 법 해석의 문제이며, 그 해석의 정당성은 ‘정치’에 의해서 주어지지 법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 부시의 이라크 침공. 미국이 9·11 테러 이후 국제법적 적법 절차를 무시하고 전쟁에 돌입한 것도 카를 슈미트의 이론과 흡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사진/ GAMMA) |
더 엄밀히 보면 카를 슈미트에게 자유주의란 ‘승자의 지배논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패자에게 저항을 거세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전쟁 승자의 최고 목표는 안정적으로 패배자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들의 저항과 봉기를 분쇄하는 것이 승자의 목적이기 때문에 패자들이 자신을 ‘적’으로 보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데 의회에서의 자유로운 토론으로는 어떠한 ‘결의’도 이끌어낼 수 없다. 나아가 그 결의가 ‘국민총화적’ 힘을 가질 수도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던 많은 국가들에서 ‘위기’ 때 기꺼이 ‘자유’와 ‘민주’를 포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카를 슈미트가 보기에 의회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런 ‘위기’ 때에도 의회가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특수한 시기에 국가를 최종적으로 책임질 주체는 서로 갈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의회가 아니라 비상대권을 가진 ‘대통령’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헌법의 최종 수호자로서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낼 의무와 권한이 있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이런 독재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일시적인 정지일 뿐이다.
‘신보수주의’ 맹위 떨치면서 다시 조명
그의 적과 친구의 구분은 국가간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국내 정치적 의사의 통일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이런 신념 때문에 그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보다 의지의 통일성을 우선했다. 심지어는 ‘공개투표’를 찬성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는 전쟁의 시기에 자유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한 체제의 핵심원리로 되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국가를 뿌리에서부터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히틀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카를 슈미트는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히틀러야말로 독일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결단력 있는 인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나치 정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치 정권을 정치적으로 법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최고의 이론가였다. 나중에 그가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서구에서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가 힘을 떨치면서부터다. 그에 앞서 한국에 미친 영향도 크다. 대통령에게 모든 비상대권을 부여한 유신헌법은 카를 슈미트의 초기 이론과 대단히 비슷하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통치’라는 용어부터가 카를 슈미트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다.
매카시즘으로의 부활
매카시즘이 겨냥한 목표는 두 가지이다. 미국 체제는 공산주의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과, 국가를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까지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는 당시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상황 논리로 정당화됐다. 당시 중국대륙을 공산주의의 손에 ‘넘긴’데다가 소련도 원자탄을 개발하는 등 미국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다는 식의 주장이 먹혀 들어갔다.
사실상 매카시즘의 논리는 카를 슈미트가 꿈꾸었던 ‘전체국가’(total state)의 복제판이었다. 개인과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논리에다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예외적 상황’이라면 헌법의 수호를 위해 구성원들의 권리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다는 주장… 대단히 빼닮아 있다. 나치즘의 ‘게르만주의’와 매카시즘의 체제수호론은 현실이나 이론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 문제를 확대해나간 과정도 비슷하다. 독일이 체코와 폴란드 침공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열었다면, 미국은 한국전을 통해 소리 없는 3차 세계대전-냉전의 문을 연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20세기는 외면적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100년 내내 전쟁의 논리 아래 움직였던 셈이다. 민주주의는 전쟁의 공포 아래 허용된 일종의 ‘게임의 규칙’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법도 가능한 셈이다. 그 어느 순간에라도 민주주의는 중단되거나 포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카를 슈미트가 1920년대 <독재론>에서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예외적 순간의) 한 과정”이라고 썼을 때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규군은 파르티잔을 이길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뒤 거의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금지당한 카를 슈미트는 1960대 초반 파르티잔(빨치산)에 관한 논문 하나를 발표했다. 프랑스와 싸운 알제리 파르티잔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그는 파르티잔의 정치적 성격에 주목했다. 파르티잔은 정복당한 민중들의 저항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일반 정규군과 달리 그들은 민중과 구분할 수 없다. 낮에는 농부였다가 밤에는 전투원으로 바뀐다. 여기서 정규군의 어려움은 ‘적’을 식별하기 곤란하다는 데 있다. 정규군의 전쟁은 그것이 아무리 처참하더라도 일정한 전쟁의 규칙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파르티잔 전투는 그런 규범을 모두 뛰어넘는다. 파르티잔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복자의 모든 부분은 ‘적’으로 규정된다. 정복국가의 민간인 공격도 정당화된다. 파르티잔에게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다. 모든 수단이 가능하다. 오늘날 테러라고 비난되는 행위들도 파르티잔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자기방어일 뿐이다. 한쪽에서는 ‘적’을 식별할 수 없고, 다른 한쪽에서는 모두를 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이 치명적인 불일치가 바로 파르티잔 전투의 핵심이다.
슈미트가 내놓은 결론은 충격적이다. “정규군은 결코 파르티잔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규군은 적이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규군은 제도화된 ‘정치’를 통해 지배하려 하지만, 파르티잔은 ‘정치적인 것’을 통해 저항하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이런 주장은 베트남전이 본격화되기 훨씬 전에 제기됐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준다. 1980~90년대 소련이 아프간의 수렁에서 패퇴한 것이나, 2004년 현재 미국이 이라크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은 슈미트의 통찰력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은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적’의 소탕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라크인들에게는 미국이 ‘해방자’가 아닌 정복자라는 것이다. 미국이 해방시켜주었다고 생각한 이라크 사람들이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을 미국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이라크인 전부를 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슈미트의 결론은 이라크에서도 반복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