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 무측천

醉月 2009. 11. 18. 09:07

중국 유일의 여제(女帝) 무측천
봉건의 한계 뚫고 스스로 天子가 된 혁명적 여성 정치가 시대를 지배했던 남자들의 눈에 그녀는 악행과 허영을 일삼은 요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냉철한 눈은 그녀가 정사를 주관한 기간 중국이 어느 때보다 빛나는 물질적 풍요와 과학기술의 진보를 누렸다고 평가한다.
한낱 후궁에 불과했던 여인이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이해관계를 넘나드는 정치적 리더십으로 권력을 쟁취하기까지.

 

중국 유일의 여제 무측천과 그녀를 기리는 비석 무자비(無字碑).

무측천(武則天)은 중국 역사 240여 명의 황제 중에 유일무이한 여성이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녀가 집권하던 시기가 중국 역사에서 봉건사회가 가장 발달한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황제의 아내인 황후로서, 다음에는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로서, 그리고 마지막 10여 년 동안은 황제로서 중국을 거의 반세기 가까이 통치했다.

군대를 동원했다거나 수구세력과 원로들을 억압했다거나 반대세력을 뿌리 뽑는다거나 하는 유혈혁명으로 권좌를 차지한 것이 아니다. 왕가의 신분도 아니었다. 무측천은 천한 궁녀의 지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최고의 자리를 쟁취한 것이다.

당나라 시대를 연구하는 중국 당사(唐史)학회는 1985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무측천 학술토론회를 열고 있다. 그 열기가 사뭇 대단해 첫 토론회는 3년 내내 열렸다고 한다. 성인과 위인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한 중국 역사를 통틀어 사후 1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이런 역사적 영예를 누리는 인물은 흔치 않다.

 

요녀와 악녀

무측천에 대한 평가는 중국 내에서도 오랜 기간 인색했다. ‘무측천 평전’을 번역한 역자들에 따르면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라 할 수 있는 신당서(新唐書)는 ‘무측천이 악행을 일삼고도 도륙을 당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요행(운)이다. 음란한 짓거리를 내놓고 하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써놓았다. 심지어 근대 중국의 저명한 문학가 린위탕(林語堂)조차 ‘중국역사상 가장 교만하고 음탕하고 허영기가 있고 고집스럽고 명성이 나쁜 황후이며 잔인한 살인마’라고 비난했다.

무측천을 향한 비난은 그녀가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식을 죽일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며 남첩을 둘 정도로 색을 밝힌 사람이었다는 것에 집중된다. 이와는 반대로 남북조 이래 파괴되었던 중국의 사회와 경제를 회복시키고 민족화합을 공고히 했던 통치력과 생산성을 높인 탁월한 업적에 대해 초점을 맞춘 연구가 부각된 것은 최근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신하들의 직언을 과감히 받아들인 도량이 넓은 군주였으며,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고 사람을 귀히 여겨 인재발굴을 위해서라면 반대파라도 적극 등용했던 현군(賢君)이었다. ‘군주의 도리는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란 철학을 갖고 농업발전에도 힘써, 그의 통치기간 중 중국 인구는 652년 380만호였던 백성이 705년 615만호로 늘어나는 등 풍요로움을 구가했다고 기록돼 있다.

무측천의 삶은 그 자체로 박진감 넘치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그녀가 권력을 쟁취하고 사용하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의 본질이란 게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시절은 변하고 사람도 변했으나, 권력이라는 목표에 돌진하기위해 치러야 할 대가와 남(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변함이 없다. 무측천이 무려 1300여 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진정한 여제(女帝)로 추앙받는 것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미모와 얄팍한 술수로 황제나 주변 사람들을 유혹하거나 중상모략과 이간질로 적을 물리치는 대신 백성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업을 이룬 정치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악운을 행운으로

무측천이 태어난 624년은 통일 당나라가 세워진 해다. 그해에 하남 하북 강회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가 차례로 진압되면서 새로운 통치자 앞에 놓인 과제는 어떻게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건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고조 이연은 각종 규칙과 제도를 만들고 국가기관을 완비했으며 인재등용에 힘쓰고 지방통제를 강화했다. 이연에게는 아들이 네 명 있었는데 장남은 일찍 죽어 그가 황제에 오를 때는 세 아들만이 남았다. 결국 둘째 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는 참혹한 권력투쟁의 끝에 626년 8월 제위에 오른다. 이때 그는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바꾸는데 중국역사에서 유명한 당 태종의 ‘정관의 치(治)’가 시작되는 때다.

무측천은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처음 궁과 인연을 맺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본래부터 비천한 신분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 무사확은 목재상으로 크게 돈을 벌어 나중에 고위관직까지 오른 장안의 신흥 권세가였다.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재상 친척의 딸로 학식과 교양을 갖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모친의 영향으로 무측천도 불교를 믿었고 어려서부터 경전을 읽었다. 아버지 무사확이 마흔여섯, 어머니 양씨가 마흔네 살에 나은 둘째딸이 바로 무측천이었다.

무측천은 아버지가 일곱 개 주의 도독으로 옮겨 다닌 덕분에 어릴 적부터 중국 땅의 절반 정도를 다 경험할 수 있었다. 규방에 머물면서 가사를 배우는 대신 비교적 개방된 환경에서 책을 읽고 그림과 음악과 춤을 배웠으니 성장 환경부터 비범했던 셈이다.

무측천은 교양과 학식도 뛰어났지만 인생을 바꾼 것은 탁월한 미모였다. 그녀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마침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태종은 즉시 조서를 내려 무측천을 입궁시키고 재인(才人·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는다. 딸을 배웅하며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무측천은 “사람들은 천자를 뵙는 일을 복(福)으로 알고 있는데 왜 슬퍼하시느냐”며 달랬다고 한다.

   

궁녀가 되다

당 태종은 무측천을 보자마자 맘에 들어 한다. 얼굴도 예쁘고 배움도 출중했기 때문. 태종은 그녀가 꽃과 옥같이 어여쁘다며 ‘미(媚)’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태종의 총애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측천이 너무 ‘튀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태종에게 서역에서 공물로 보낸 ‘사자총(獅子?)’이라는 말이 도착한다. 너무 몸집이 크고 성질이 포악해 길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무측천이 나섰다.

“제게 철편(鐵鞭), 철과(鐵戈), 비수가 있으면 길들일 수 있습니다.”

태종이 궁금한 표정으로 “어떻게 말이냐?”고 물었다. 무측천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철편으로 때려 말을 듣지 않으면 철과로 머리를 내리치고 그래도 안 들으면 비수로 목을 찌르겠습니다.”

섬뜩한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은 무측천을 태종은 “대범하다”고 칭찬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경계심이 일었다고 한다.

이런 탓인지 무측천이 궁에 있던 10여 년 동안 수많은 비빈이 승진했지만 그녀는 보통의 재인으로 알아주는 이 없는 쓸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며 시기하고 질투하던 궁녀들은 시간이 갈수록 경멸하고 비웃었다. 하지만 그 힘든 시간 동안 그녀는 상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사랑에 기대기보다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겠다는 마음을 굳힌 것이다.

‘기회는 또 온다, 때를 기다리자’며 마음먹고 한 일은 ‘궁내 정보수집’이었다. 그녀는 부패한 환관들을 상대로 뇌물을 주면서 궁 안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온갖 정보를 사들였다. 돈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인심을 쓰면서 항상 따뜻한 말과 깍듯한 예로 궁 안 사람들을 대하니 점점 많은 사람이 그녀 편이 된 것은 당연지사다.

이 시기 무측천에게 또 하나의 큰 수확은 당 태종으로부터 ‘정치 리더십’을 배운 것이다. 당 태종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용했고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인 봉건 제왕의 본보기였다. 그가 통치한 기간 정치는 투명했고 경제는 발전했으며 사회는 안정되었고 국력은 강성했다. 무측천은 비록 정사에 간여할 수 있는 권력은 없었지만 태종을 시봉하면서 그의 통치술을 옆에서 보고 익혔다.

권력의 무상함도 느꼈다. 황궁이란 곳이 결코 모든 사람의 천당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황궁 한켠에는 화장을 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면서 미소를 짓는 얼굴들도 있지만, 또 다른 한켠에는 늙은 궁녀의 고됨과 슬픔도 있었다.

어떻든 평범한 궁녀로 끝날 삶이 아니었다. 무측천은 말년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태종을 시봉하다 인생을 바꿔줄 한 남자를 만난다. 다름 아닌 태종의 아들 이치였다.

이치는 무측천보다 네 살 연하였다. 두 사람은 엄밀히 따지면 모자관계다. 봉건적 윤리도덕에 의하면 상궤를 벗어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나라 초기 황족의 윤리관념은 비교적 엷었고 남녀 간 금기도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이치는 무측천의 아름다움에 매료당했다. 오랜 세월 냉대를 받았던 무측천도 이치에게서 한 가닥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뀐다.

 

다시 나락으로

649년 5월16일 당 태종은 죽는다. 이틀 후 이치가 즉위했는데 바로 고종이다. 고종은 태종의 비빈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부처님을 믿었던 그가 비빈들에게 태종을 위한 염불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무측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감업사(感業寺)로 가서 비구니가 되었다. 오직 궁중 여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감업사는 이름 없는 평범한 암자에 불과했지만, 황제에 관한 궁중비사의 유포를 막기 위해 외부 세계와 철저히 차단된 채 바깥출입은 물론 외부손님 방문도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몇몇 비구니는 목숨을 끊거나 미쳐버렸고 영양실조로 죽기도 했다.

무측천은 독실한 불교신자였긴 했지만 비구니가 되기를 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그녀가 택한 것은 ‘인내’였다. 언젠가 고종이 반드시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주리라는 강한 믿음으로 비구니들의 조롱과 멸시를 견뎌냈다.

그녀의 간절함이 멀리 떨어진 고종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마침내 1년 뒤 고종은 그녀를 찾았다. 태종 서거 1주년 의식을 마치고 감업사로 와 분향하고 절을 올린 뒤였다. 무측천은 그를 만나자마자 와락 달려들어 흐느꼈다. 애틋한 연정이 되살아나기는 고종도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그녀를 궁궐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구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고종의 황후와 숙빈 사이에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측천의 황궁 귀환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당시 궁궐 내에서 고종의 마음은 황후보다는 숙빈에게 기울고 있었는데, 황후는 무측천을 데려오면 숙빈에 대한 고종의 애정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측천과 숙빈이 서로 질투해 다툰다면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측천을 황궁으로 데려오자고 먼저 건의한 것은 바로 황후였다.

무측천은 마침내 4년간 비구니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입궁 이후 무측천은 누구보다 황후를 모시는 데 최선을 다한다. 반면 황후는 자신의 계산대로 숙빈은 점점 고종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갔지만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측천을 증오하기 시작한 황후는 이번에는 숙빈과 한통속이 되어 무측천을 제거하기로 의기투합한다.

무측천의 대응은 한수 위였다. 고종을 지극히 보살피는 한편 황후에게 배척당한 후궁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후궁들을 통해 얻은 황후와 숙빈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정보에다 거짓을 보태 고종에게 고했다. 이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암투도 이어졌다. 무측천이 자신이 갓 낳은 어린 딸을 황후가 보고 간 뒤 딸을 목 졸라 죽이고는 이를 ‘황후 짓’이라고 모함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이 일화는 여인들의 궁중암투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 와중에 고종의 총애가 무측천에게 집중될수록 안절부절 못하던 황후는 굿을 하다 무당에게 황제를 저주하는 말을 쏟아낸다. 이 사실은 바로 무측천에게 보고되고, 무측천은 바로 고종에게 일러바쳤다. 고종은 본격적으로 황후 폐위 문제를 제기했다.

655년 10월 황후와 숙빈이 모두 유배된다. 마침내 무측천이 승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황후자리를 손에 넣는 것 못지않게 자리를 지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언제 또 어떤 비빈이 고종의 총애를 얻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황후와 숙빈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 감히 무측천과 겨루는 비빈은 없었다.

   

당나라의 수도였던 현재의 중국 시안(西安)에 조성된 민속촌 ‘대당부용루’의 당시(唐市) 광장. 한 중국인 관광객이 당나라 궁녀 복장으로 갈아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무측천의 정치개입

고종은 아버지 태종에 버금가는 현명한 군주였다. 신하들에게 간언을 하도록 독려했으며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긴 자를 단호히 처벌했다. 인사를 하면서도 사사로운 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고종이 우매하고 나약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무측천 평전’의 저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한다.

무측천이 정치에 개입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적 요소가 있었다. 다름 아닌 고종의 건강악화였다. 660년 고종은 현기증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력저하에 시달린다. 학질에 걸리기도 했다. 한번 병이 나면 한 달을 앓아 누어야 할 정도로 허약했다. 마음은 있으나 기력이 모자라 국정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럴 경우 그의 뒤를 이어 정사를 돌볼 사람은 아들이지만 당시 황태자 이홍은 여덟 살에 불과한데다 얼마 뒤 죽고 만다.

결국 아내 무측천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일상에서는 연인이었고 정치에서는 동반자였다. 게다가 무측천은 정치적 두뇌가 명석해 걱정스러운 문제와 곤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정세파악 능력도 대단했다.

황후로서 무측천의 국정참여는 683년 고종이 병사할 때까지 23년간 계속된다. 정사에 개입한 지 14년이 지난 674년 8월 고종은 천황으로, 무측천은 천후로 칭해진다. 한때 고종은 아예 무측천에게 황위를 넘기려고까지 했지만 재상들의 반대로 포기한다.

무측천은 국정에 참여한 이후에도 ‘한 사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무엇이든 남편 고종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항상 낡은 옷을 입고 근검절약을 실천하기도 했다. 대체로 황후가 할일도 하면서 정사에도 애쓴 현모양처였다는 평가다.

많은 중국 역사가는 그녀가 황제가 되려고 아들 이홍을 독살했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태자는 무측천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 훗날 밝혀진 바 있다. 683년 12월4일 고종이 죽었을 때에도 무측천의 박해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돌았다. 심지어 고종이 위독할 때 어의가 고종 머리에 침을 찔러 피를 내자 “어찌 감히 천자의 머리를 찔러 피를 낼 수 있느냐? 참형을 받을 짓이다”며 꾸짖은 일이 병을 낫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모함하는 에피소드로 탈바꿈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종은 오히려 무측천 덕분에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약한 몸으로 34년간 집정하며 당 왕조의 태평성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 고종이 죽고 이현이 황제로 즉위했으니 바로 무측천의 셋째 아들인 중종이다.

 

자식도 버려라

683년 12월4일 고종 사망부터 이듬해 684년 8월11일 장례까지는 9개월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다. 이 기간 중 당나라는 정치적 격동을 겪는데, 이는 ‘중종의 폐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었다.

중종은 부인인 황후를 총애했다. 문제는 중종이 사사로운 인연에 끌려 다녔다는 것. 황후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위현정에게 고위관직을 주려 하면서 사단이 벌어졌다. 나아가 자신의 유모 아들에게도 고위관직을 주려 했다. 이를 안 재상들이 “불가하다”고 간하자 중종은 크게 노하며 “나는 장인에게 천하라도 줄 수 있는데 무슨 간섭이냐”고 했다. 두려워진 신하들은 이를 무측천에게 알렸다.

무측천은 중종이 황제가 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침내 신하들과 함께 중종을 폐위시킬 계획을 꾸며 684년 2월6일 조정백관을 소집해 폐위조서를 발표한다. 중종이 승복하지 않고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고 따지자 무측천은 “네가 천하를 장인에게 주려 하지 않았느냐. 그러고도 죄가 없단 말이냐”라고 맞받아쳤다. 중종은 폐위되었고 왕으로 강등되어 별채에 유폐된다.

홧김에 내뱉은 말을 가지고 아들을 폐위시킨 것은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한 구실을 삼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주장이 있다. 반면 무엇보다 당시 불안했던 국내외 정세를 노심초사하던 무측천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평가도 만만찮다.

고종이 통치했던 기간은 당나라의 중흥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랜 병고와 말년의 지병 악화로 정사를 거의 돌보지 못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무측천이 대신했다 해도 에너지가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주변 소수민족들의 반란과 소요가 골칫거리였다. 고종과 무측천은 군대를 연이어 파견해 승리를 거뒀지만 인력과 물자의 소모가 컸고 변방을 완전히 안정시키지 못했다.

자연재해도 극심했다. 680년 9월 하남과 하북 지역 여러 마을에서 홍수가 났고 이듬해 8월에는 수해가 들었다. 자연재해가 몇 년간 이어지자 이민족 침략으로 야기된 재정난이 더욱 심해졌다. 장안과 낙양 사이 거리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하고 사람이 사람을 먹는 비극까지 초래되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고종이 죽으면서 정국은 매우 불안해졌다. 어느 때보다 남다른 수완과 강인한 의지가 필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황위를 계승한 중종은 기대 이하였다. 무측천은 일찍이 중종의 자질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황제가 된 후 중종의 행동은 우려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었다.

684년 2월 중종이 폐위된 후 고종의 여덟 번째 아들이며 무측천의 넷째이자 막내아들인 이단이 계승하니 예종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형 중종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정치적인 두뇌와 정사처리 능력은 없었다. 예종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다. 무측천이 정사를 주관하고 예종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국면이 이렇게 해서 형성된다.

중종을 폐위하는 과정에서 무측천은 혹여 중종의 측근들이 정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종이 돌연 거처에서 죽는다. 일부 학자들은 무측천 명에 따라 살해됐거나 자살했다는 주장을 내놓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어떻든 당나라는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는 활기를 띠었다. 무측천 집권 시기 국력은 강성해져 영토가 동쪽으로는 고려,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남쪽으로는 임읍, 북쪽으로는 대사막에 이르렀다. 당 태종 때보다 더 넓었다.

   

중국 산시성 셴양(咸陽)에 있는 당 고종과 무측천의 합장묘 첸링(乾陵).

마침내 등극하다

무측천은 태후 신분이었지만 권세는 황제와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정식 황제는 아니었다. 그녀가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지 알려주는 역사 기록은 없다고 전한다. 워낙 오랜 기간 남편과 아들을 대신해 집권해온지라 황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서경업의 반란도 있었고 “여자가 어찌 황제를…”이라고 생각하는 반대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여성이 황제가 되는 것도 순리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까.

그녀는 신중하고 치밀했다. 우선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밀고제’를 법제화해 밀고를 장려했다. 잔인하고 포악하며 형벌을 남용하는 ‘혹리(酷吏)’도 장려했다. 혹리가 발호하면서 무고 고문 멸족 등 각종 형벌이 남용되는 부작용이 있었으나, 어떻든 정적(政敵) 제거에 이만한 무기는 없었다. 분명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정적을 제거한 황제들은 그전에도 있었다. 당시는 군주의 권한이 막대한 봉건시대였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반대파를 없애는 일 못지않게 지지 세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했다. 불규칙하게 시행되던 과거제를 상설하고 선발과목을 조정하는 등 관료 선발 개혁에 앞장서는 방식으로 인재양성에 몰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사를 올리는 명당 같은 건축물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방식으로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에 적절한 이벤트를 시시때때로 벌인 것이다.

이론적 근거도 마련했다. 중국에서는 여성이 황제는커녕 관료가 되어 직책을 갖고 권리를 행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측천은 역사에 없는 전례를 만들기 위해 경전을 파고들었다. 불행히도 유가의 시경, 서경, 예경, 역경, 춘추, 도가의 도덕경은 남존여비를 주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불교경전에는 여성이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있었다. ‘대방등무상대운경(大方等無想大雲經)’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정광(淨光)이라는 천녀(天女)가 있다.…부처님이 이르기를…중생을 위해 여자의 몸으로 나타날 것이다…그때 신하들은 이 여인을 받들어 왕위를 이어갈 것이고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인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받들 것이고 저항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당 태종이 “백성들 대부분이 불교를 믿는 것 같다”고 말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중국은 사대부에서 여성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불교를 숭배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여성이 왕이 될 것이라는 불경의 논리에서 새 왕조를 세울 근거를 찾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무측천은 이 경전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누구 하나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국 어디서나 무측천을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그래도 무측천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급기야 지지자들이 “무측천을 황제로 모시자”는 청원에 나섰다.

1차 때는 관중지역 노인 수백여 명이 자발적으로 낙양 황궁에 와서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할 수 없다’고 외쳤다. 예종을 황태자로 강등하고 무측천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무측천은 사양했다. 그러자 청원인구는 갈수록 늘었다.

2차 때는 노인, 변방지역 수장들, 승려와 도사 1만2000여 명이 황궁에 와 청원을 했다. 3차 때는 문무백관, 황실 종친, 황제인 예종까지 청원에 참가해 무려 5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주장하고 이내 돌아가는 식이 아니라 아예 황궁 앞에 머물며 버텼다.

무측천이 꿈꿔왔던 새로운 왕조 건립은 이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무측천은 결국 “하늘의 뜻이 이러하고 백성들의 정성이 이와 같으니 어찌 민의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청원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그녀는 들뜬 마음으로 “기쁘도다!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하고 신하들에게 새로운 왕조 건립에 관한 의례를 준비시켰다.

마침내 690년 9월9일 무측천은 당나라를 주(周)나라로 바꾸고 낙양을 수도로 하며 연호를 천수(天授)로 바꾼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7일간 술을 내리고 사면령을 선포했다. 닷새 후 신하들은 무측천에게 ‘성신황제’라는 존호를 올렸다. 예종은 황태자로 강등되어 무씨 성을 받고 예전처럼 동궁에 거처하게 된다.

무측천이 국호를 당에서 ‘주’로 바꾼 이유는 무씨라는 자신의 성이 옛 주나라 성씨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주나라 평왕의 작은아들이 손바닥에 무(武)자를 새기고 태어나 그것을 성씨로 했다고 전한다.

 

위대한 여제

무측천은 무엇보다 천하의 근본은 농사이며, 그 근본이 탄탄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판단해 농업을 장려하고 수리시설 개선에 주력했다. 통치기간 중 개설하고 보수한 수리시설만 44개에 달하고 내륙 운송망도 본격적으로 구축된다. 진정으로 백성의 어려움에 다가가려고 노력해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를 입은 지역에 양식과 물품을 보내 구제하며 걱정했다.

무측천은 무엇보다 관용과 포용의 정치인이었다. 세 번이나 반역죄 혐의를 받은 사람도 주변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추천하자 과감하게 재상으로 썼고, 반대파의 딸도 기용했다. 목숨을 내놓고 간언하는 사람들을 중용했다. 개인의 가문이나 배경, 사사로운 은원(恩怨)관계를 탈피해 인재를 등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도 강해 모친상 때도 부친상과 마찬가지로 3년간 상복을 입도록 했다. 여성을 광대로 만들어 희롱하지도 못하게 했다.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아들의 성 이씨를 자신의 성인 무씨로 바꾸게도 했다.

무측천의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측천’이란 칭호는 그녀가 죽기 직전 대를 이은 황제 예종이 올린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와 죽은 후 나라에서 내린 시호 ‘측천대성황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전통시대 중국 역사가들은 그녀를 ‘측천황후’ ‘무후’ 또는 비하하는 의미로 ‘무씨’로 부르기도 했다. 이는 모두 황제였음을 인정하지 않는 호칭으로 봐야 한다. ‘무측천 평전’의 번역자들은 ‘무측천이란 말이 황제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호칭’이라고 소개한다.

그녀는 무엇보다 남존여비사상이 지배적이던 시절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기존 체제와 통념에 일침을 가했고 실제로 이를 성취한 사람이었다. 가히 대단한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무측천은 집권하는 동안 태종 이래 모든 성과를 끌어안으면서 제국의 강대함을 유지했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이후 현종의 태평성대를 위한 기초를 다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 묘비엔 아무것도 쓰지 말라”

무측천은 말년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사를 돌본다. 704년 결국 병석에 눕게 되자 오로지 몇몇 측근에게만 수발을 들게 했다. 죽기 며칠 전 “내가 죽으면 황제 칭호를 없애고 황후로 부르도록 하라. 고종 옆에 묻어달라”는 유시를 내린다. 삶의 동반자이자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남편의 계승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아내 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705년 11월26일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이른 새벽, 무측천은 숨을 거뒀다. 향년 81세였다. 비문에는 생전 그녀의 바람대로 아무 글자도 새겨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질곡의 인생을 살아온 그녀였지만 결국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라는 것을 보여준 장엄한 퍼포먼스라고나 할까.

‘역사 인물을 평가할 때는 그 인물의 모든 언행 및 사상의 여러 측면을 고찰해야 하지만, 금에 순금이 없듯 사람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다만 그 인물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가 이전 사람과 동시대 사람에 비해 조국의 부강과 통일에 대해, 민족의 흥성과 발전에 대해, 생산력의 회복과 발전에 대해, 과학기술문화의 혁신과 번영에 대해 공헌했는지를 따져본다면, 무측천은 의심의 여지없이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역사적 인물이며 걸출한 여성정치가였다.’ (‘무측천 평전’ 중에서)

‘참고도서’

‘무측천 평전’-1985년 10월 중국 당사학회가 건릉박물관에서 무측천연구회를 만들고 저자 자오원룬(趙文潤)과 왕솽화이(王雙懷)가 집필에 들어가 8년 만에 완성한 책이다. 무측천이 일개 미관말직인 후궁에서 황후, 황태후, 황제가 되기까지의 과정, 집권기간 실시했던 여러 정책 등 전 생애에 걸쳐 방대한 1차 사료와 연구 성과를 토대로 객관적 입장에서 소상하게 정리, 분석했다. 무측천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책이다.

‘심리공략의 기술’-‘사람 마음을 내면에서 굴복시킨 용심술의 달인’이라는 주제 아래 무측천이 어떻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전략론으로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