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_04

醉月 2009. 11. 16. 08:29

미래를 달린다, 블레이드 러너!

21세기의 음울한 묵시록을 충격적으로 그려낸 불행한 문화영웅 ‘필립 K. 딕’

» 놀라운 상상력으로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미래현실을 그려내 21세기형 실존의 물음을 인류에게 던진 필립 K. 딕.(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한 하이테크회사에서 특수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천재 공학자 마이클 제닝스는 어느 날 회사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을 받는다. 그는 한 가지 프로젝트가 끝나면 기밀 누출을 막기 위해 프로젝트 기간 동안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 그런 그에게 ‘2년짜리 장기 프로젝트에 참가하라. 그러면 그 대가로 5만달러라는 엄청난 금액의 보수(Paycheck)를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출판 당시 5만달러는 엄청난 거액이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치고 깨어난 그가 받은 것은 ‘가는 철사 한 가닥과 버스 토큰 한개, 코드 키, 승차권 반쪽, 포커칩 반쪽, 천조각, 물품보관증’ 등 자질구레한 7개의 물건이 담긴 헝겊 주머니뿐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왜 자신은 거액의 보수 대신 이런 잡동사니가 담긴 주머니를 선택한 것일까? …7개의 물건을 가지고 지워진 기억을 찾아나선 그는 자신을 잡으려는 비밀경찰과 만나게 되고…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도망쳐야 한다는 현실에 부닥친다. 제닝스는 위기 때마다 자신이 주머니 속의 영문 모를 물건 하나씩을 사용하며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그리고 자기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거액의 페이첵 대신 역시 이 잡동사니 물건들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곤 경악한다.”(소설 <페이첵>)


죽은 뒤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져

“서방연합정부 범죄예방국 국장 존 앤더튼은 ‘미래의 살인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카드를 보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 모든 범죄를 1주일 전에 예견해 범죄 예정자를 미리 수용해버리는 식으로 철저한 치안을 유지하는 이 미래 사회에서 앤더튼이 체포를 피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죽일 것이라고 나타난 사람은 서방연합동맹군(AFWA) 사령관 ‘레오폴드 캐프랜’이다. … 캐프랜은 범죄예방국의 오류 가능성을 트집 잡아 범죄예방시스템을 해체하려 한다. 만일 이 기구를 해체하지 않으면 퇴역 장교가 이끄는 군사정보국에 의해 내전으로 비화할지도 모른다고 ‘세명의 돌연변이 예지자’들이 예언했다는 것이다. … 세명의 예지자들이 미래를 똑같이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두 사람의 예언이 일치하는 ‘메조리티 리포트’(Majority Report)와 그 예언에 시간과 장소의 변수 정도가 달리 작용하는 것을 반영하는 한 사람의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가 있을 뿐이다. … 존 앤더튼은 자신이 30년에 걸쳐 완성해놓은 범죄예방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자신이 만일 예지자의 리포트처럼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다면… 자신은 수용소로 갈 것이지만, 이 시스템은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시스템이 틀렸다면… 이 끔찍한 ‘패러독스’를 이용해 ‘미-중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해체되면서 퇴역한’ 레오폴드 캐프랜은 권력이동을 노리는 것이다. 과연 어떤 리포트가 옳은 것인가? 누가 서방연합의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소설 <마이너리티 리포트>)

» 쟁쟁한 감독들에 의해 영화화된 필립 K. 딕의 작품들.
맨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페이첵> <블레이드 러너> <마이너리티 리포트> <토탈 리콜>.
 
공상과학소설(SF) 작가인 필립 K. 딕은 1928년 시카고에서 푸줏간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세금검열관인 어머니 사이에서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쌍둥이 누이 제인은 태어난 지 41일 만에 죽었다.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간 그는 청소년기에 아시모프, 존 캠벨, 반 보그트 등 SF 작가들에 심취했다. 그 뒤 버클리대학을 1년 다니다 중퇴한 뒤 1982년 54살로 죽을 때까지 30여년 동안 전업작가로서 48편의 장편소설(그 가운데 생전에 출판된 것은 34편)과 100편 이상의 단편소설, 그리고 에세이 등을 썼다. 수천통의 편지를 남겼으며, ‘인조인간과 인류’ 등의 유명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결혼을 5번이나 했으며 광장공포증·자살충동·공격본능·피해망상·신경쇠약 등의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하루 60쪽씩 글을 쓰느라 각성제도 복용했다.

1971년 미 중앙정보국(CIA)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집을 습격당하고 협박 전화까지 계속되자 안전에 대한 편집증에 시달리다가 캐나다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렇게 복잡하고 음울한 분위기에서 살았던 그는 생전에 그다지 각광받지 못했지만, 죽은 뒤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1세기는 그의 이름을 주요한 문화코드로 화려하게 부활시키고 있다.

필립 K. 딕은 무엇보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미래 사회와 가상현실을 그려내 인류에게 21세기형 실존의 물음을 내던진다.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 ‘당신을 둘러싼 현실이 진실이라고 믿는가?’ ‘당신이 실제로는 인조인간이고, 그 현실은 가상인데도 그렇게 믿는단 말인가?’

 

‘머신’의 세계로 귀의하다

장자의 ‘나비의 꿈’과 기독교 신비주의를 무한의 상상력으로 첨단화한 시공간에서 인간과 인조인간이 맞붙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이런 놀라운 상상력을 할리우드가 그대로 둘 리 없다. 필립 딕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해인 1982년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에 의해 처음으로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로 영화화된 것을 시작으로 속속 거장들의 손을 거쳐 영화로 변신한다. 1990년 <토탈 리콜>(Total Recall), 2001년 <임포스터>(Impostor), 2002년 <마리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3년 <페이첵>(Paycheck)이 잇따라 개봉된다. 감독들도 모두 쟁쟁한 인물들이다. 게리 플래더, 스티븐 스필버그, 오우삼….

특히 첫 작품 <블레이드 러너>는 음울한 디스토피아적 분위기에서 인간과 복제인간, 현실과 허구가 충돌하고 교차하는 충격적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각인을 남긴다. 늘 산성비가 내리는 어둡고 암울한 도시, 400층을 헤아리는 고층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에어카, 인간과 숨막히는 추적전을 벌이는 복제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 과연 누가 사람이고,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살아 있는 괴물과도 같은 그런 세계가 어느새 우리 앞에 도래한 듯한 환각과 함께 전율해야만 했다. ‘너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고, 인간이라고 해봤자 결국 수명이 좀 긴 리플리컨트(<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수명 4년짜리 복제인간)가 아닌가?’

그의 작품은 그의 생애와 일정한 연관성을 유지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은 나를 미치게 한다. 기르는 고양이가 죽을 때마다 나는 신을 저주했다. …신에게 분노를 느낀다. 나는 신을 붙들고 ‘인간은 죄를 지어서 파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고통에 대한 강박관념의 반대급부일까? 그는 생명의 동일성 의식에 깊이 빠지게 된다. 여기서 그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절충론을 버리고 노골적으로 ‘머신’의 세계로 귀의한다. 바로 컴퓨터나 로봇이 스스로 지능을 진화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대신한다는 테마 속으로 지속해서 몰입한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갖가지 정신질환으로 약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그에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헛갈릴 수밖에 없다. 진실은 그야말로 상대적이며, ‘살아 있는 생물만큼 많이 존재하는 것’이 된다.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여기에 시대 상황이 겹쳐진다. 그가 작품활동을 한 1950~8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상징되는 시대이다. 나아가 미국에 히피문화가 성장하고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 기세를 떨친 시기이다. 그가 청춘을 보낸 캘리포니아는 그런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그의 작품은 점점 난해하고 묵시록적인 분위기가 짙어간다. 여기에 1974년 ‘환상’을 경험하면서 일종의 변형된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서의 요소가 합쳐져 훨씬 복잡한 성격으로 발전한다. 그가 살아서 추구한 다양한 실험과 성과, 그리고 진지성은 그에게 ‘SF문학계의 셰익스피어’ ‘SF 분야의 성인’이라는 찬사를 안겨주기도 했다.

현대 첨단과학과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21세기의 음울한 묵시록을 충격적으로 그려낸 불행한 한 문화영웅을 만날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비디오의 발달은 스크린에서 참패한 <블레이드 러너>를 21세기 대중에게 연결시켜주는 훌륭한 통로가 됐고, 인터넷과 영화산업의 발전은 ‘필립 K. 딕’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현재 야후닷컴에서 검색되는 그의 관련 정보 사이트 수는 약 130여만건에 이른다).

그러나 그가 일찌감치 발견해버린 미래의 인간은 ‘칼날 위를 달리는’ <블레이드 러너>처럼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불행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자살하지 않고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 세계의 잔인성과 야만성은 이런 세계로 오는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놀라워라, 미래의 예지능력

필립 딕은 놀라운 미래기술들을 숨돌릴 틈도 없이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기술들이 쉴 새 없이 현실화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목격한다. 20~50년 전에 이토록 엄청난 첨단기술의 가능성을 정확히 내다봤다는 점에서 그는 그토록 집착했던 미래의 ‘예지자’임에 틀림없다.

가장 최근에 영화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재등장한 <페이첵>은 필립 딕의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천재성을 스크린 가득 구현해놓고 있다. 주인공 벤 애플렉은 맨손으로 허공에서 PC를 조작한다. 2년 전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톰 크루즈가 장갑을 낀 채 조작하던 ‘장갑형’에서 ‘맨손 제어형’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다. 실제로 이 기술은 현실세계에서도 가능한 수준까지 개발돼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고객에 대한 1대1 광고를 구현하는 MMS(Multimedia Messaging Service)가 단연 눈길을 끈다. 일단 대상인간의 상세 정보를 중앙컴퓨터에 내장해놓은 다음 일종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식별해내 맞춤형 정보(또는 광고)를 전달하는 것이다. 고객의 위치는 GPS(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추적 기술)로 파악한다. 현실세계에서 이 기술 역시 곧 상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영화에서는 ‘전자종이’도 선보였다. 현재 필립스에서 개발 중인 기술은 1초에 100개 정도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단계까지 와 있다고 전해진다. 망막인식 장치는 이제 새로운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다.

가장 극적인 기술은 역시 필립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들인 ‘리플리컨트’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복제양은 인류의 눈앞에 등장했다. 기술적으로는 복제인간이 충분히 가능한 수준까지 치닫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복제인간의 수명을 4년으로 설정해놓고 있는데, 최초의 복제양이 노화증으로 인해 일찍 죽은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더해준다.

특히 그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기억 추출·제거 기술은 21세기 독자들의 섬뜩한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 소재의 보물창고

»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정통 SF 작가가 아니면서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이유로 ‘일본의 필립 딕’이라고 불린다.
그는 생전에 그다지 각광받은 작가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작품이 오래 기억되거나 평가받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으며, 먹고살기 위해 죽어라 하고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써댔다. 그리고 첫 영화화 작품인 <블레이드 러너>가 한창 막바지 촬영 중일 때 심장발작이 와서 눈을 감아야 했다. 결국 SF영화 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게 될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채 그를 기리는 헌사가 스크린을 장식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불행은 거듭돼 같은 날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흥행대작 에 밀려 흥행도 참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오히려 21세기에 들어서 더 각광을 받고 있다. 21세기 문화에서 주요한 테마로 부상하고 있는 그의 영향력은 넓고도 깊다. 그의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이 각 문화 부문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그의 소설은 할리우드 감독들이 가장 매혹을 느끼며 달려드는 소재로 꼽힌다. 거의 해마다 그의 소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나아가 그의 이름을 딴 SF문학상도 제정돼 해마다 권위를 더해가고 있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발리스>는 오페라로 만들어졌고, 마이클 비숍의 <아, 필립 딕은 죽었네>와 같이 그를 소재로 한 소설들도 여럿 등장했다. 그의 작품은 과 같은 TV시리즈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시리즈에 나타난 ‘정치적 편집증’ ‘외계인의 음모’ ‘약물과 감정통제에 의한 환각현실’ 등은 필립 딕의 삶과 그대로 궤를 같이 한다. 나아가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요원으로 남주인공인 폭스 멀더가 자기 여동생을 찾으려는 강박증 환자로 묘사되는 것은 그의 일찍 죽은 쌍둥이 여동생 제인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나아가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조차도 정통 SF 작가가 아니면서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이유로 ‘일본의 필립 딕’이라고 불린다.

이 밖에 그는 사이버 펑크와 펄프 픽션 등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내’를 무기로 천하를 얻다

일본적 경쟁력의 뿌리, 근세 일본의 기초를 닦은 ‘고난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

“피로 피를 씻는 난세, 살벌한 전국시대다… 나는 분명 욕심 많은 사람이다. 내 아버지를 내고, 아들까지도 죽였다.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뭐가 있느냐?… 누군가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는 한 그 피의 강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검의 산만 더욱 높아질 뿐….” (영화 <가케무샤> 중에서 다케다 신겐의 말)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두살 때 어머니와 생이별


2004년 3월26일 도쿄 증시는 일본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는 긍정적 전망으로 오전 9시20분 현재 니케이 225지수가 1.62% 상승한 11,717.77포인트를 기록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6주 연속 매수 우위를 보일 정도로 일본 주식을 계속 사대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일본 정부는 지난 2월의 근로소득 지출이 6.9% 늘었다고 발표했다. 무엇보다 이날 일본 재무성에서 나온 무역통계는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수치를 밝히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수출이 1년 전 같은 달과 비교해 14.9% 늘어나 10년 만에 흑자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가 벤처 열풍과 IT(정보통신) 열풍에 빠져들고,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란 말을 들으며 세계 경제의 강자로 등극하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 같던 일본이 다시 용트림하고 있다. 호봉제-연공서열-종신고용의 독특한 인적 시스템과 탁월한 기술력,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고로 세계 경제를 누비던 일본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오명을 벗고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본의 경쟁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15세기 무렵까지 조선과 그다지 큰 격차를 보이지 않던 일본은 도대체 어떤 길을 갔기에 개국 이후 이처럼 짧은 시기에 세계 경제의 강자로 떠오른 것일까? 미국식 구조조정이라는 잔인한 제도가 세상에 맹위를 떨치는 21세기에도 어떻게 일본기업가들은 ‘사람을 정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세력을 마지막으로 공격하기 위해 출전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맨 위 그림에서 흑마를 탄 사람).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전래된 세계지도. 당시 이런 복제본이 많이 제작됐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른바 ‘피로 피를 씻는 난세’가 절정기로 치닫기 시작한 1542년 일본 미카와(지금의 아이찌현) 오카자키성에서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십개의 작은 나라로 나뉘어 통일을 향한 크고 작은 전쟁으로 들끓던 일본의 전국시대에 그는 과연 ‘인내’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처절하게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참는 것을 최대 무기로, 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같은 천재형 경쟁자들의 견제와 억압을 견뎌내고 마침내 일본 천하를 움켜쥐게 된다.

그의 인생은 두살 때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고난으로 시작된다. 주변의 강대한 다이묘(大名:전국시대의 영주들)의 압력에 소국의 다이묘인 아버지가 굴복해 정략이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뒤 6살 때 볼모로 넘겨져 두 차례에 걸쳐 13년 동안 엄중한 감시 속에서 볼모 생활을 해야 했다. 볼모 기간에 그는 자신을 잡고 있던 오다 노부히데의 협력 요청을 아버지가 냉혹하게 거절해 죽을 수도 있는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19살 때 볼모로 잡고 있던 이마가와가 신흥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망한 것을 계기로 볼모에서 해방돼 선조 때부터 근거지인 오카자키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남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에 사실상 복속해야 했으며, 노부나가와 연합한 것 때문에 다케다 신겐에게 집중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 뒤 사돈을 맺은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처를 죽이고 아들마저 자결하게 만드는 비극을 겪는다.

그는 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어느덧 노부나가 세력의 강자로 떠올랐지만, 노부나가가 암살될 때 자신의 주력군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주도권을 기회에 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빼앗기는 불운을 겪는다.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에게 굴종한 뒤 그는 강제로 본거지인 오카자키를 떠나 더 먼 동쪽의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겨가야 했다. 또한 히데요시의 압력으로 그의 이부여동생(조카딸)과 결혼해야 했고, 손녀딸과 히데요시의 아들이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천하통일 뒤 대륙정벌에 집착하는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명령하고 나라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을 때 이에야스는 절묘하게 조선 출병에서 빠질 수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외면상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면서 에도를 중심으로 힘을 비축한다. 그 뒤 대내외적으로 고전을 겪던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자 마침내 1600년 동군(에도를 중심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원하는 세력)을 이끌고 서군(히데요시의 근거지였던 사카이 등 오늘날의 오사카 세력)을 세키가하라에서 격파하고 사실상 통일 일본을 장악한다. 이에야스는 그 뒤 에도에 막부를 설치해 일본 전역을 통치하면서 근세 일본의 기초를 닦는다.

 

일본인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파란만장한 삶은 일본에서 지금껏 숱한 소설과 책, 드라마, 영화, 연극의 소재가 돼오고 있다. 나아가 일본 사람들은 그를 늘 ‘일본의 10걸’로 선정하면서 존경하고 있다. 일본의 소설가 야마오카가 밝히고 있듯이 그는 ‘고난의 영웅’으로서 국가위기, 경제위기의 시기에 일본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는 인물로 꼽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21세기 일본의 관련성에서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평화 일본’을 열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교차하고 있는 ‘평화’와 ‘팽창’의 두 주제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이토 히로부미-현대의 극우파로 이어지는 대외팽창과 전쟁의 기류에 대응하는 평화 속의 대내 발전이라는 기류는 사실상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처럼 평화 기류를 유지하고 있을 때 자신의 저력을 발휘해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대의 길-팽창의 길로 갔을 때 언제나 초기의 성공과 긍극적 패배로 이어지곤 했다.

두 번째 이에야스는 경제에 대단히 강한 지도자로 난세를 헤쳐갔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소국에서 시작한 국가를 키워나간 경험으로 경제마인드를 충분히 갖춘 지도자였다. 그가 에도막부의 건설로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동부의 발전을 이루고 전란 뒤의 경제부흥을 일으킨 것은 그의 경제감각을 잘 읽게 해준다. 이와 함께 나카센도와 같은 동일본과 서일본을 잇는 주요 도로망을 정비하고 선박운행도 활성화했다. 이에 따라 국토의 균형 발전과 농경지의 확대, 상업의 융성, 해외무역의 활성화, 인구 증가를 이룩할 수 있었다.

 

» 도쿠가와 막부의 개막을 소재로 만든 일본의 역사신문.
세 번째 남의 강점을 모방해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자신을 초기에 크게 위협했던 다케다 신겐의 화폐경제를 계승했다. 일본 최초의 주조소판을 열어 전국에서 통용되는 금화 은화를 제조했다. 나아가 경장통보라는 동전을 주조해 사용해 화폐경제를 발전시켰다. 히데요시가 중시한 금광 은광의 몰수와 지배 원칙도 더욱더 강화시키고, 교통의 요충지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두었다.

네 번째 일본적 인간경영의 토대를 닦았다는 것이다. 이에야스의 가신단은 먼저 충성심이 매우 뛰어났다. 이에야스가 남에게 고통을 강요하지 않고 모범을 보이며 사람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는 ‘여론’을 적극 활용해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산시켰다. 특히 그 자신이 ‘대기만성형’ 인물이었기에 일본인의 의식구조에 노인층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사회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각인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다른 나라와 달리 정년을 연장하는 놀라운 선택을 하는 이면에는 이에야스의 그림자가 분명 크고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원, 분노는 적”

다섯째, 검소·절약·저축의 미덕을 대단히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런 미덕이 근세 이후 일본인의 잠재력을 성장시키는 한편 교육열을 높이는 효과로 이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살아서 정치와 경제에서 동시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그는 인간으로서 이런 교훈을 후세에 남기고 있기도 하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자유롭지 못함을 늘 곁에 있는 친구로 삼는다면 부족할 것이 없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조선군대를 철수하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는 반대했다. 1592년 히데요시가 고니시 유끼나가, 가토 기요마사, 쿠로다 나가마사 들을 시켜 20만의 대군으로 조선을 공격하도록 했을 때 이에야스에게도 ‘동쪽 다이묘의 총독’ 이라는 이름으로 출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이에야스는 “새로 내려주신 간토 지방을 다스리기 어렵기 때문에 여유가 없습니다”면서 출진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1만5천명을 이끌고 나고야까지 가야 했다.

» 에도에 들어오는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부터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 일본에 갔다.
이때 히데요시 속셈으로는 이에야스를 조선침략군에 포함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출전을 명령해본 것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직접 조선에 건너가 일본군을 진두지휘해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본심을 감추고 “그렇다면 저도 조선으로 건너가 선봉에 서겠습니다”고 대답한다. 그는 히데요시의 측근들이 히데요시의 직접 출진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히데요시와 한 묶음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논지를 성립시켜버렸다.

결국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이에야스도 일본에 남게 되었다. 남아 있는 동안 이에야스는 특유의 인내작전으로 히데요시의 견제를 비켜나간다. 히데요시가 애첩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에게 지위를 승계시킬 생각이라는 것을 간파한 뒤 미리 알아서 실력자 두명과 나란히 그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문을 제출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으로 죽어가는 히데요시로부터 그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정무를 대행해 달라는 부탁까지 받는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는 5다이로(五大老)의 우두머리로서, 내대신으로서 히데요시의 측근과 협의해 바로 조선에 나가 있는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 뒤 쓰시마의 종씨 가문을 통해 조선과 협상을 시작해 1609년 기유조약을 체결해 무역이 재개되고 관계가 개선됐다. 조선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내린 조처를 높이 평가해 호응한다.


CEO들은 왜 그를 선호하는가

%%99000%%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시대를 살았고, 시대를 통틀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로 꼽힌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천하통일을 위해 온 생애를 걸었고, 두 사람(히데요시, 이에야스)은 실제로 통일천하의 맛도 보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선명하게 구별되는 개성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세 사람은 두견새를 소재로 일본 특유의 단가인 하이쿠를 읊었다고 전한다.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야 한다.’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하이쿠만을 보면 노부나가는 성격이 급하고, 히데요시는 노회하고 음모적이며, 이에야스는 바보같으면서도 둔중한 무게가 느껴지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성격과 달리 세 하이쿠에는 세 사람이 당시의 시대적 요구를 어떻게 읽었는가를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노부나가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히데요시는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론에 몰입을, 이에야스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선 시대의 성숙을 노래하는 셈이다.

한편 일본의 한 경영전문잡지가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에야스에 대한 선호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자신을 전국시대의 무장에 비유한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2)후계자로는 어떤 타입의 무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두 물음에 대해 1위는 모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나왔고, 2위는 오다 노부나가로 집계됐다. 이와 달리 각 기업에서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사람들은 (1)번 질문에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타입이라고 대답한 사람으로 갈리었고 그 비율도 대체로 비슷했다는 흥미로운 결과가 보도되었다.

수성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최고경영자는 ‘수비는 최고의 공격’이라고 본 이에야스를 선호하고, 공성을 해야 하는 처지라 할 수 있는 차세대 경영인들은 각각 전국시대를 헤쳐간 세 인물로부터 저마다의 강점을 찾아내고 있는 셈이다.

 

[요셉] 신과 인류 최초의 재테크

구약성서 고난의 주인공 요셉, 그가 신의 은총을 받는 경영자로 부활하기까지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늙은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년 하나가 질투에 눈먼 배다른 형 10명의 음모로 웅덩이에 던져졌다가 결국 노예로 이집트에 팔려간다. 가나안 출신인 이 노예 소년은 뛰어난 재주를 보여 주인집의 총무가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동침을 요구하는 주인 처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이 여자의 무고로 다시 감옥에 갇혀버리고 만다. …그가 감옥에서 서른을 맞았을 때 이집트를 다스리는 파라오가 이상한 꿈을 꾼다. ‘물가에서 꼴을 뜯던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흉악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에게 먹히고…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다시 비리비리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에게 삼키운다.’ 온 이집트의 술객과 박사들이 이 꿈을 해몽하지 못할 때 신의 은총을 받은 이 노예는 ‘앞으로 일곱해 동안의 풍작과 일곱해 동안의 흉작이 이어질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그는 이어 풍년 때 성마다 전체 수확의 5분의 1씩 비축해 흉년에 대비할 것을 건의한다. …이 놀라운 능력으로 그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이집트 사람들을 먹여 살려낸다… 나아가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고 노예로까지 팔았던 배다른 형들을 끝내 용서하고… 아버지와 온 형제의 가족들을 이집트로 인도해 멸망으로부터 구원해낸다.”

창세기 35~50장… 이집트 역사서엔 발견 안 돼


구약성서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가슴 아프면서도 감동적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 놀라운 예술성과 종교적 성격으로 수천년 동안 인류의 심금을 울려왔다.

요셉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구약성서 창세기 35장부터 50장까지에만 나와 있을 뿐 이집트 역사서에선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재했다면 거의 3700~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인물인 것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황적으로는 적어도 한번 이상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람들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피난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이집트 세소스트리스 2세 시대(기원전 19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베니하산(Beni Hassan)의 크눔호텝 무덤벽화는 족장 입샤(Ibsha)의 인도로 37명의 아시아계 성인남녀와 아이들이 이집트에 도착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람들이 다양한 색채의 줄무늬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채색옷’을 연상시킨다. 요셉을 편애한 아비 야곱이 요셉에게 바로 ‘채색옷’을 입히고 있다. 나아가 메르넵타 8년에 작성된 ‘보고서’에는 파라오가 에돔에서 온 베두인족에게 ‘그들과 가족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도록’ 입국을 허락하고 있다. 일곱해 동안의 풍년과 일곱해 동안의 흉년에 대해선 당시 이집트의 농업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견해도 나온다.

» 이집트 농업을 보여주는 피라미드 내부 벽화. 구약에 따르면,
요셉은 정보경영과 국가 재해대책 시스템으로 국가 주도형 재테크를 실현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의 홍수량이 25~26피트 정도에 이르기를 간구해왔다. 이 홍수량의 수치를 기준으로 그해의 소출을 대략 결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홍수량이 20~21피트 정도에 그친다면 그해 곡식 소출은 약 20% 줄어든다. 반대로 홍수량이 필요량보다 20% 많은 30피트 이상을 기록하면 모든 수로와 제방까지 무너뜨려 많은 인명피해를 낸다. 나아가 요셉과 그 형제들을 기원으로 하는 유대인의 12지파가 나중에 이집트에서 빠져나와 가나안 지역으로 간 것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860년에는 성서의 요셉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두 형제 이야기’(The Tale of the Two Brothers)가 이집트에서 발굴된 바 있다. 여인의 유혹을 거절하자 모함으로 이어져 투옥되는 구조 등이 매우 비슷하다.

이런 점을 종합할 때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능해진다.

1. 기원전 17~19세기 무렵 이스라엘 지역에서 장기적인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들어온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2. 이 사람들의 지도자가 이집트의 농업을 주관하는 지위에 올라 장기 기근에 효율적으로 대처해 이집트는 물론 다른 나라 사람들도

    구원해냈다.
3. 이 지도자가 동원한 방식은 전 국가적 식량 비축, 치수 사업, 광대한 토지 재개발 사업 그리고 경작지의 국유화 사업 등이었을 것이다.
4. 종교적·혈통적 측면에서 확실한 정체성 의식을 지녔던 이 집단은 당시 이집트에 있던 실화 또는 설화에 이 지도자의 전기를 결합시켰다. (아니면 그 자신의 실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점과 관련해 구약 역사학자인 유진 메릴은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고 있다. “요셉이 이집트에 온 것은 기원전 19세기 말엽 세소스트리스 2세 치하 때일 것이다. 세소스트리스는 많은 아시아 노예들이나 용병을 썼다. 그의 치하에서 광대한 토지 재개발 사업과 치수 사업이 벌어졌다. 당시 파윰 분지(Payyum Bassin)와 나일강을 연결하기 위해 수로를 팠는데, 이 수로의 유적이 오늘날도 ‘요셉의 강’(Bahr Yusef)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요셉의 핏줄들을 이집트 동부 삼각주에 정착하도록 초청한 것은 세소스트리스 3세일 것이다. …세소스트리스 3세 때 전무후무한 농업정책, 국가정책이 실시됐으며… 모든 종류의 장인들과 상인들이 정확하게 이 세소스트리스 3세 때 출현했다.”

 

백성들의 토지 박탈과 노예화 불렀다?

과연 이집트 세소스트리스 부자의 치세 때 벌어진 일은 무엇일까? 그 일에 요셉은(실제로 그 시기에 존재했다면)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이 사라진 고리를 이어주는 것은 현재로선 구약밖에 없다. 구약에 따르면 요셉은 추수기에 비축해둔 식량을 팔아… 곧 그 땅의 모든 돈을 모아들인다. 이어 그는 양식을 위한 대가로 가축을 받았으며, 나중에 토지와 사람들까지 받았다. 그 뒤 사람들에게 종자를 주어 파라오의 소유가 된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추수의 5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했다. 나머지 5분의 4는 종자와 양식으로 삼게 했다.

» 형들에 의해 웅덩이에 던져지는 요셉. 그는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 나중에 총리직에 오른다.
정확한 농업생산량을 예측하는 정보경영, 풍작 때 흉작을 대비하는 국가 재해대책 시스템,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먹여 살리고 그 반대급부로 토지 국유화를 관철시키는 국가 주도형 재테크…. 이건 아무리 현대의 날고 기는 통치자들이나 경영자들도 입이 벌어질 지경이다. 거기다가 외국 이민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경지를 확대하는 한편 축산업이라는 새로운 첨단산업도 도입한다. 이로써 고난받는 자 요셉은 ‘신의 은총을 받는 경영자’ ‘먹여 살리는 자’ 요셉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러나 요셉의 사업은 역사적으로 논쟁거리가 돼왔다. 그 실재성과 상관없이 성경에 나타난 그 재테크의 도덕성 때문이다. ‘신이 실행한 인류 최초의 거대한 재테크’가 결국은 백성들의 토지박탈과 노예화라고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사회주의자는 물론 진지한 도덕주의자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

이에 대해 요셉 연구자이기도 한 작가 토마스 만은 이런 견해를 내보인 바 있다. “당시 돈이 없을 때로서 보물과 귀한 금속을 낼 수 있는 대지주나 귀족들에게는 비싸게 팔았을 것이다. (국가 경영에 전혀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그들이 표적이었다.) 그리고 돈을 대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가축들은 형식적으로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원래 있던 축사와 집에 그대로 있었다. 일종의 담보를 잡은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가깝다. …토지도 영주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토지의 소유권을 파라오에게 넘기고 작은 영토로 나누어 소작인들에게 경작을 맡긴 것이다. 나아가 5분의 1만 국가에 세금으로 내도록 한 것은 이전의 세금 비율과 사실상 같다. …이걸 악의적인 착취와 노예화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그래도 모든 회의가 확실하게 풀리지만은 않는다. 동양에 있었던 것과 같은 국가 창고, 재해 때 무상지원 방식은 재난의 규모가 너무 크기에 적용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쨌든 유진 메릴은 세소스트리스 3세 때의 정책이 중산층의 형성을 도왔을 것이며, 실제로 다양한 장인과 상인들이 등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이 풀리지 않는 회의랄까, 의문은 신의 도덕성, 재테크의 정당성에 대한 인류 근원으로부터의 목소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요셉, 스탈린, 괴벨스, 티토, 풀리처…

» 유고 지도자로 비동맹운동을 이끈 요시프 브로즈 티토.

요셉은 영어식으로는 조지프로 발음된다. 스펠링은 ‘Joseph’이다. 이 이름은 고난을 받은 사람들, 신의 은총을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빛과 희망의 이름으로 그 역사를 이어왔다. 이런 인기를 반영해 무수히 많은 사람이 이 이름을 썼다. 그 결과 성인으로부터 독재자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수많은 사람이 또다시 역사에 요셉(조지프 또는 요십, 요제프 등)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법적 아버지도 이 이름이다. 마리아와 정혼한 그는 마리아가 혼전에 임신한 셈인데도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그대로 결혼한다. 그는 성자로서 나중에 가톨릭교회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아버지도 이 이름을 썼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금융업과 조선업, 영화산업 등으로 백만장자가 된 조지프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그 자신이 영국 주재 대사를 지내기도 했으며, 아들들이 각각 미국의 대통령, 법무장관, 상원의원이 됐다. 소련의 스탈린(Joseph Stalin)도 이 이름을 썼다. 레닌이 죽은 뒤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이긴 그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30여년 동안 소련공산당 서기장, 총리로서 절대권력을 누리며 소련을 통치했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을 지낸 괴벨스도 요제프라는 이름을 썼다.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로 비동맹운동을 이끈 티토도 정식 이름이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다. 나치 독일에 대한 빨치산 투쟁 등의 경력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지녔던 그의 죽음은 유고연방의 해체로 이어졌고, 그 결과 발칸반도 지역은 처참한 민족분규로 20세기 후반 대표적인 비극의 현장이 돼버렸다.

영국의 해양소설가로 콘래드(Joseph Conrad)도 ‘조지프족’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폴란드계의 이 작가는 <로드 짐>(영화로도 나왔음), <노스트로모> <어둠의 심장> 등의 작품을 남겼다. 미국 퓰리처상의 기원이 되는 언론인 퓰리처의 이름에도 조지프가 들어간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었던 조지프 퓰리처는 현대신문의 기초를 닦았으며, 그의 이름을 딴 상은 1917년 이래 미국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저널리즘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1년 정보격차에 따른 시장이론의 기초를 세운 공적으로 노벨경제학상을 공동으로 받은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교수도 이 이름을 쓰고 있고, <신화의 힘> <신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등 신화학의 걸작을 남긴 캠벨(Joseph Campbell)의 이름에도 조지프가 들어간다.


토마스 만이 사랑한 요셉

요셉의 이야기는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손으로 거의 4천년 만에 다시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인류 앞에 부활한다. 만은 장편소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일반적으로 <마의 산>이 대표작이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요셉 이야기를 다룬 <요셉과 그 형제들>을 최고의 걸작으로 꼽을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다.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 토마스 만은 이 이야기를 깨알 같은 글씨로 7천장을 써내려가 4권의 소설로 만들었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1926년 12월부터 1943년 1월까지 13년이 걸렸다. (중간에 <바이마르의 로테>를 쓴 4년 정도를 빼고 계산한 것이다.) 원래 요셉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많은 성화로 재현되곤 했다. 벨라스케스도 그 가운데 하나다. 세계적인 문호 괴테도 이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쓰고 싶어했다. “(성서 속의 요셉 이야기는) 너무 짧다. …작가라면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를 세세하게 그려내야 할 것만 같은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괴테가 아닌 만이 이 일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이 대소설을 쓰기 위해 문헌연구나 답사여행도 엄청나게 해야 했다. 이렇게 투여한 기간까지 합치면 소설이 나오기까지 거의 16년이 걸린 것으로 집계된다. 모두 4권으로 된 소설의 첫 번째인 <야곱 이야기>는 1933년 나왔다. 바로 그해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강연을 목적으로 국외여행 중이던 토마스 만은 체포령이 떨어져 귀국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전에 ‘반공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이다’라고 말했던 것을 꼬투리 삼아 나치 당국이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공언했다. 공산주의자 논쟁이 아니더라도,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하기에 이 소설은 독일에서는 출간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나치 당국에 의해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국적까지 빼앗긴다. 마치 자신이 요셉이 된 것 같은 고난을 겪으며 토마스 만은 대작 <요셉과 그 형제들>을 써나갔다. 만 자신도 힘든 상황을 이길 수 있게 도와준 것이 이 소설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역사·신화·유적 등은 물론 유럽의 지성사를 두루 섭렵하는 산고 끝에 소설이 세상에 나오자 평론가들은 맨 먼저 작가의 해박한 지식과 독서량에 혀를 내둘렀다. 나아가 같은 시대를 살던 헤르만 헤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격찬하는 등 소설은 세상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카를 슈미트] 사상가, 악마와 악수하다

나치즘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카를 슈미트, 21세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의 그림자

“정치의 기본적인 조건은 ‘전쟁’과 동일하다. …헌법은 정치적·의식적 결단이다.”

“그러한 파괴수단(초재래적인 무기)을 다른 인간에 대해 사용하는 인간은… 그의 목표가 되는 다른 인간들을 도덕적으로도 절멸시켜야 한다는 강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상대방 인간들을 전체로서 범죄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체가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유신헌법도 그의 정신을 관통

»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독일 최고의 법학자로 히틀러 치하에서 대법관을 지내고, 나치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카를 슈미트(Carl Schmitt·1888~1985)의 이론이 21세기 들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무시하고 강행되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9·11테러 뒤 미국을 중심으로 이른바 서구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우적 움직임…. 냉전 이후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벌어지는 강대국의 논리를 분석하다보면 곧바로 이 무서운 정치사상가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민주주의 딜레마를 예리하고 냉혹하게 분석하며 ‘악마의 사상가’로 불렸던 카를 슈미트는 2차 세계대전 뒤에 ‘전범’으로 몰려 2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일체의 공식적인 활동에서 배제됐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근본 견해를 수정하지 않았다. 한때 서구에선 그의 연구를 주석으로 다는 것조차 용인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영향력은 20세기를 통털어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한국의 유신헌법도 사실상 그의 법철학과 정치철학의 모범적인 사례라 불릴 만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헌법>이 이 땅에서 번역된 것도 유신 발발 직전인 1972년이다.

법학자로서 카를 슈미트의 견해는 역설적으로 ‘법의 무효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법이 그 자체로서 어떤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법이 합의의 산물이라는 것 따위는 믿지 않았다.

“헌법은 그것이 규범화되기 이전에 힘에 바탕한 정치적 결단이 선행된다. …힘에 바탕한 정치적 결단이 법을 만들고, 힘이 법의 효력 근거이다.”

따라서 최초로 헌법을 만든 사람들, 카를 슈미트가 ‘헌법제정권력’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정치적 결단이 국가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한국에서는 이게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 헌법재판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국가 공동체는 이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공동체의 ‘적’이다. 나치즘이 유태인들을 ‘비인도적’으로 박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국가철학의 기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 슈미트나 나치주의자들에게 이 최초의 힘은 곧 ‘게르만 민족공동체’였다. 유태인은 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비쳐졌다. 따라서 나치의 인종주의는 히틀러 개인의 광기의 소산이거나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다. 카를 슈미트는 이런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데 동조했다. 역설적으로 히틀러 등장 이전 그에게는 유대인 제자들이 여럿 있었다. 망명한 제자 가운데 좌파적 성향인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주도했고, 우파이던 레오 슈트라우스는 오늘날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었던 것이다.

» 히틀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카를 슈미트는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히틀러야말로 독일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결단력 있는 인물로 비쳤다.

카를 슈미트가 한창 활동하던 1920~30년대는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전후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시기였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 뒤에 구성된 바이마르공화국은 역사상 가장 완전한 형식적 민주주의 사례로 기록될 수 있는 반면에 내부 갈등이 가장 심한 사회이기도 했다.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조국 독일의 1차 세계대전 패배다. 그러나 그의 전쟁관은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랐다. 그는 “(러시아혁명 이전의)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영주들 사이의 전통적인 전쟁”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러시아혁명 이후 전쟁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과거 유럽 열강의 전쟁이 국가 자체를 파괴하지는 않았던 데 반해, 러시아혁명은 전혀 달랐다. 외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도 내란을 일으키고 혁명을 관철시켜나갔다는 점에서 그때까지의 전쟁 규칙을 모두 파괴한 사건이라는 것이 카를 슈미트의 진단이다.

 

‘의회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

카를 슈미트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처음으로 ‘절대적인 적’을 상정한 집단이라고 진단한다. 볼셰비키들에게는 자기네 국가를 공격하고 있는 외국보다도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군주가 더 큰 적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전쟁은 ‘절대적 전쟁’이 돼버렸다. 상대방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게 된 전쟁…. 19세기까지의 전쟁은 휴전을 하거나 설사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는 경우에도 항복협상을 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무조건’ 항복을 패배자에게 요구했다. 전쟁에서 ‘적’에 대한 규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관은 카를 슈미트의 법이론이나 정치이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는 전쟁과 마찬가지다. 휴전상태에서 전시상황을 국내 통치에 적용하는 기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카를 슈미트에게 ‘자유주의’는 믿을 수 없는 동반자다.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적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를 슈미트는 ‘의회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의회주의는 적과 친구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무능한 시스템이다. 국가는 외부의 적에 대응해 만들어진 정치공동체이다. 따라서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단일한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의회주의는 누가 국가의 진정한 적인지 식별할 수 없다. 그는 일찍이 <정치적 낭만>이라는 저서에서 담론이나 토론의 힘을 조롱했다. ‘적’은 토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법이라는 것은 결국 법 해석의 문제이며, 그 해석의 정당성은 ‘정치’에 의해서 주어지지 법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 부시의 이라크 침공. 미국이 9·11 테러 이후 국제법적 적법 절차를 무시하고 전쟁에 돌입한 것도 카를 슈미트의 이론과 흡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사진/ GAMMA)

더 엄밀히 보면 카를 슈미트에게 자유주의란 ‘승자의 지배논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패자에게 저항을 거세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전쟁 승자의 최고 목표는 안정적으로 패배자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들의 저항과 봉기를 분쇄하는 것이 승자의 목적이기 때문에 패자들이 자신을 ‘적’으로 보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데 의회에서의 자유로운 토론으로는 어떠한 ‘결의’도 이끌어낼 수 없다. 나아가 그 결의가 ‘국민총화적’ 힘을 가질 수도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던 많은 국가들에서 ‘위기’ 때 기꺼이 ‘자유’와 ‘민주’를 포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카를 슈미트가 보기에 의회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런 ‘위기’ 때에도 의회가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특수한 시기에 국가를 최종적으로 책임질 주체는 서로 갈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의회가 아니라 비상대권을 가진 ‘대통령’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헌법의 최종 수호자로서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낼 의무와 권한이 있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이런 독재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일시적인 정지일 뿐이다.

 

‘신보수주의’ 맹위 떨치면서 다시 조명

그의 적과 친구의 구분은 국가간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국내 정치적 의사의 통일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이런 신념 때문에 그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보다 의지의 통일성을 우선했다. 심지어는 ‘공개투표’를 찬성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는 전쟁의 시기에 자유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한 체제의 핵심원리로 되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국가를 뿌리에서부터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히틀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카를 슈미트는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히틀러야말로 독일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결단력 있는 인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나치 정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치 정권을 정치적으로 법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최고의 이론가였다. 나중에 그가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서구에서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가 힘을 떨치면서부터다. 그에 앞서 한국에 미친 영향도 크다. 대통령에게 모든 비상대권을 부여한 유신헌법은 카를 슈미트의 초기 이론과 대단히 비슷하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통치’라는 용어부터가 카를 슈미트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다.

 

매카시즘으로의 부활

» 매카시(위)의 논리는 카를 슈미트가 꿈꾸던 '전체국가'의 복제판이었다.
미국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의 ‘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1949년 6월 위스콘신 출신의 초선 상원의원인 조지프 매카시가 정체불명의 서류 한장을 들고 나와 “국무부 안에 200여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깨진다. 매카시는 곧 의회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통해 수십만명을 증언대에 세우고 공산주의자라는 ‘고백’을 강요했다.

매카시즘이 겨냥한 목표는 두 가지이다. 미국 체제는 공산주의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과, 국가를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까지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는 당시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상황 논리로 정당화됐다. 당시 중국대륙을 공산주의의 손에 ‘넘긴’데다가 소련도 원자탄을 개발하는 등 미국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다는 식의 주장이 먹혀 들어갔다.

사실상 매카시즘의 논리는 카를 슈미트가 꿈꾸었던 ‘전체국가’(total state)의 복제판이었다. 개인과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논리에다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예외적 상황’이라면 헌법의 수호를 위해 구성원들의 권리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다는 주장… 대단히 빼닮아 있다. 나치즘의 ‘게르만주의’와 매카시즘의 체제수호론은 현실이나 이론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 문제를 확대해나간 과정도 비슷하다. 독일이 체코와 폴란드 침공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열었다면, 미국은 한국전을 통해 소리 없는 3차 세계대전-냉전의 문을 연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20세기는 외면적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100년 내내 전쟁의 논리 아래 움직였던 셈이다. 민주주의는 전쟁의 공포 아래 허용된 일종의 ‘게임의 규칙’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법도 가능한 셈이다. 그 어느 순간에라도 민주주의는 중단되거나 포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카를 슈미트가 1920년대 <독재론>에서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예외적 순간의) 한 과정”이라고 썼을 때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규군은 파르티잔을 이길 수 없다”

» “미군은 이길 수 없다.” 이라크 게릴라에 의해 폭파당한 미군 차량.(사진/ GAMMA)

2차 세계대전 뒤 거의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금지당한 카를 슈미트는 1960대 초반 파르티잔(빨치산)에 관한 논문 하나를 발표했다. 프랑스와 싸운 알제리 파르티잔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그는 파르티잔의 정치적 성격에 주목했다. 파르티잔은 정복당한 민중들의 저항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일반 정규군과 달리 그들은 민중과 구분할 수 없다. 낮에는 농부였다가 밤에는 전투원으로 바뀐다. 여기서 정규군의 어려움은 ‘적’을 식별하기 곤란하다는 데 있다. 정규군의 전쟁은 그것이 아무리 처참하더라도 일정한 전쟁의 규칙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파르티잔 전투는 그런 규범을 모두 뛰어넘는다. 파르티잔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복자의 모든 부분은 ‘적’으로 규정된다. 정복국가의 민간인 공격도 정당화된다. 파르티잔에게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다. 모든 수단이 가능하다. 오늘날 테러라고 비난되는 행위들도 파르티잔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자기방어일 뿐이다. 한쪽에서는 ‘적’을 식별할 수 없고, 다른 한쪽에서는 모두를 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이 치명적인 불일치가 바로 파르티잔 전투의 핵심이다.

슈미트가 내놓은 결론은 충격적이다. “정규군은 결코 파르티잔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규군은 적이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규군은 제도화된 ‘정치’를 통해 지배하려 하지만, 파르티잔은 ‘정치적인 것’을 통해 저항하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이런 주장은 베트남전이 본격화되기 훨씬 전에 제기됐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준다. 1980~90년대 소련이 아프간의 수렁에서 패퇴한 것이나, 2004년 현재 미국이 이라크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은 슈미트의 통찰력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은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적’의 소탕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라크인들에게는 미국이 ‘해방자’가 아닌 정복자라는 것이다. 미국이 해방시켜주었다고 생각한 이라크 사람들이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을 미국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이라크인 전부를 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슈미트의 결론은 이라크에서도 반복될 것인가?

 

[자야와르만7세] 앙코르의 비밀을 가슴에 묻고…

신비스럽고 찬란한 건축물의 주인공 ‘자야와르만 7세’… 그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추적해본다

“인부들은 여느 때처럼 정글 속의 석벽 앞에 몰려들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이 든 우두머리 석공들은 그늘에 앉아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작업장으로 건너와 진행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부터 한 도제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죽었대요! 그가 죽었대요!’ 도제 아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외치는 소리가 정글을 뚫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인부들은 일순간 모두 돌을 쪼던 손길을 멈췄다. 작업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기저기서 정과 망치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스웨덴 작가 얀 뮈르달)

캄보디아의 광개토대왕!


» 자야와르만 7세. 그가 앙코르 왕조를 통치할 때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높이 8m에 이르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한 변이 3km인 정사각형 모양에 그 주위를 다시 폭 113m인 거대한 해자가 둘러싸고 있는 도시… 5개의 성문 위에는 각각 동서남북을 바라보는 관세음보살상인 사면불안(四面佛顔)이 23m 높이까지 올려져 있고… 전성기에는 주민 10만명이 지냈다고 할 정도로 융성했던 도시… 그 도시가 이처럼 한순간에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돼버린다. 그리곤 400여년이 흐른다.

그러나 도시는 죽지 않고 살아나 다시 세상에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치즈나무라고 불리는 거대한 열대수가 불상을 휘감아 숨통을 조이고, 무화과나무의 뿌리가 석상의 얼굴을 파고들어 동강내는 지경인데도… 죽지 않았다. 열대밀림 속의 석조도시와 거대사원들은 거의 1천년 동안 베트남인·타이인·버마인·영국인·프랑스인·일본인 등 이름을 바꿔가며 찾아오는 약탈자들이 석상의 발목을 자르고 손을 부러뜨리고 목까지 잘라내는 것도 모두 이겨냈다. 론놀-폴포트-헹삼린 등 현대 캄보디아의 역사를 장식한 무장세력이 서로 순서를 바꿔가며 심어놓은 지뢰에 부서지고 난사하는 총탄에 신음하면서도 끝내 살아남았다.

19세기 말엽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 무오를 유혹해 과로사로 이끌고, 20세기 말엽 한 벨기에 할머니를 아름다움에 취해 쇼크사로 이끈 이 신비의 정글도시…. 앙코르를 세운 사람들은 누구일까?

자야와르만 7세(Jayavarman VII·‘자야바르만’이 아닌 ‘자야와르만’이 실제 발음에 더 가깝다). 그는 앙코르톰의 창건자이다. 우리에겐 앙코르와트가 익숙한 이름이지만 실제로 앙코르와트는 거대한 앙코르 유적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1234’로 등록된 것도 ‘앙코르의 유적군’ 전체이다. 어쨌든 앙코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시작연도인 889년부터 샴족에게 점령돼 약탈된 1431년까지 약 540년 동안 지속적으로 건설됐고, 그 가운데 건축이나 정치군사 면에서 가장 융성한 시기가 바로 자야와르만 7세 때라고 할 수 있다.

자야와르만 7세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왕조를 통치할 때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그는 동으로 베트남 중부의 참파 왕국을 정복해 바닷길을 열어놓고 중국과 조공무역까지 실시했다. 북쪽으로는 라오스의 브양트얀과 버마,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 북단에 이르기까지 인도차이나 최대의 국가를 건설했다. 이런 위업을 보면 자야와르만 7세는 캄보디아의 광개토대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 신비에 싸여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업적을 기술하고 추적하는 것도 그가 남긴 유적의 기록문을 통해서 간신히 재구성하는 정도이다. 오히려 그의 유적은 찬란하게 재확인되는데도 그의 후기통치 기록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이 수수께끼와도 같은 정황 때문에 얀 뮈르달은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

일단 유적의 기록문 등을 바탕으로 그의 생을 재구성해보자.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거의 800여년 동안 이어져오는 수수께끼들을 추적해보자.

»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유적군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자야와르만 7세 때의 건축물인 바욘사원의 대형 사면불안상.

정치종교적 토목사업에 정열을 쏟다

“자야와르만 7세는 1120년 앙코르 왕조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는 매우 신앙심이 깊고 의지가 굳은 자야라자데비라는 이름의 공주와 결혼했다. 자야와르만은 30대 후반에서부터 40대 전반까지 현재의 중부 베트남에 해당하는 참파 왕국에 머물고 있었다. 아버지인 다라닌드라와르만 2세(재위 1150~60년)가 죽었을 때 그는 참파에서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의 형제(또는 사촌형제)인 야소와르만 2세(재위 1160~66년)가 즉위하자 그는 그대로 참파에 머물렀다. 1166년 궁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캄보디아로 돌아왔으나, 이미 왕을 살해하고 반란을 주도한 트리부와나디타와르만(재위 1166~77년)이 즉위한 뒤였다. 그는 반란으로 즉위한 왕의 밑에서 지내며 언젠가 왕위 계승 권리를 주장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2년 뒤 참파족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찬탈왕은 이 침공으로 괴멸적인 상황에 빠진다. 수도 앙코르가 정복당해 약탈됐다. 그리고 이민족인 참파의 지배가 시작됐다.

이런 상황에서 50대 후반의 나이가 된 자야와르만은 일어서기 시작했다. 캄보디아에서 참파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 그는 5년 만에 캄보디아를 재통일한다. 이민족을 몰아내고 모든 정치적 라이벌들도 제압한 것이다. 1181년 그가 왕으로 즉위할 때 그의 나이 61살이었다. 그 뒤 그는 30여년 동안 캄보디아를 통치하며 왕국을 최대로 넓히는 한편 오늘날까지 인류를 경탄시키는 놀라운 건축물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처음 즉위한 뒤 그는 먼저 정복전쟁에 박차를 가했다. 라이벌인 참파를 공격해 마침내 1203년 앙코르 왕국에 병합시켰다. 이어 주변국가를 공격해 북으로는 라오스의 브양트얀 부근까지, 남으로는 말레이반도의 북단까지 점령했다. 서쪽으로는 메남강 상류지역까지 차지했다.

»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의 <왕도의 길> 표지. 말로는 앙코르 유적을 실제로 밀반출하려다 체포되기도 했다(왼쪽). 캄보디아의 5만리엘 지폐 뒷면을 장식한 앙코르와트.

독실한 불교도였던 그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종교적 토목사업에 정열을 쏟기 시작했다. 그의 치하에서 처음으로 도성 앙코르를 석벽으로 둘러싸는 재건축사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렇게 세워진 석벽이 오늘날 앙코르톰으로 불리는 장엄한 석벽도시이다. 이 앙코르톰 안에 바욘사원이 세워졌다. 이와 함께 타 프롬, 프레아 칸, 반테아이 크데이, 네아크페안 같은 사원들이 건립됐다. 앙코르톰 바깥에 다시 해자를 건설했으며, 프레아 칸 바라이 등도 건설했다. 이런 건축물은 앙코르 왕조의 최대 걸작으로서 세계사에 그 이름을 빛내고 있다.

왜 그토록 건설사업을 서둘렀을까

이와 함께 그의 치하에서 앙코르와 왕국의 주요 지점을 잇는 도로망을 대대적으로 건설하고, 이 도로를 따라 121개의 숙식시설도 세웠다.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시설도 100여개 지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인물인데도 그는 이상하게도 언제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90살 이상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 그의 즉위연도는 정확하게 나와 있는데 사망연도는 확인되지 않는 것일까? 수수께끼는 그뿐이 아니다. 이상하게 그가 이룩한 대규모 건설사업들은 규모에 비해 대단히 서둘러서 진행됐다는 특성을 지닌다. 도대체 그토록 서둘러야 할, 말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당시 힌두교의 문화적 영향력이 강한 캄보디아에 대승불교를 대대적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사후에 캄보디아는 급속하게 소승불교쪽으로 바뀌어갔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마지막으로 왜 그토록 거대하고 장엄한 시설물들이 그렇게 한순간에 버려져 오랫동안 방치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의 사망연도에 대해선 1215년부터 1218년 그리고 1225년까지 많으면 10년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이 문제는 어느 면에선 두 번째 의문인 대규모 건설사업을 대단히 서둘러 진행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말년에 홀로 지냈기에 사망연도를 정확히 기록하지 못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일부는 그 이유를 그가 나병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병을 앓았기에 격리생활을 했으며, 병을 불교의 힘으로 고치기 위해 대규모 불사 등을 서둘러 진행했다는 주장인 것이다.

실제로 캄보디아 구전설화에는 앙코르에 나병을 앓는 왕이 살고 있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선 그가 즉위했을 때 이미 61살에 이르고, 그 이전에 참파에 머물고 있을 당시 그곳에 유행하던 대승불교에 심취하면서 즉위 뒤에 펼칠 건설 구상을 이미 완성해놓았기 때문이라고 반론을 펴는 이도 있다. 이와 함께 구전설화에 나오는 ‘나병을 앓는 왕’은 자야와르만 7세 이후의 왕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반론도 있다.

자야와르만의 대승불교에 대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가 급속히 소승불교로 전환한 데 대해선 몇 가지 해석이 나온다. 먼저 몽족 언어를 구사하는 타이의 소승불교 전파자들이 궁정에서만 정성을 기울이던 대승불교나 브라만교와 달리 일반 서민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갔다는 점을 든다.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급격한 교세 확장의 근거가 됐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대규모 정복전이나 건설사업에서 볼 수 있는 자야와르만의 과대망상적 기질을 후대 집권자들이 기피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자야와르만 8세는 자야와르만 7세의 대승불교를 거부하면서 그의 대표적인 불교 사원인 바욘사원을 힌두사원으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바욘사원에 있는 일부 불상의 자세를 바꾼다든가 얼굴에 수염을 새로 새기는 등의 방식으로 힌두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상처받은 캄보디아의 구심점, 앙코르

앙코르가 한순간에 버려져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된 것과 관련해선 세 가지 정도의 설명이 나온다. 하나는 앙코르 왕국의 집단적인 노동동원 문화가 너무 과도한 부담을 백성에게 지워 민심을 잃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1430년 타이의 샴족에게 앙코르가 함락되고 당시 앙코르식 건설사업을 주도하던 건축가와 하천공사 등을 주관하던 엘리트들이 타이로 끌려가자 앙코르의 퇴조와 방치가 가속화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변화과정이 개인주의 성향의 소승불교 확산과 결합해 훨씬 강력하고 급격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의 시련을 겪은 뒤 앙코르는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오랜 국제전과 내전 그리고 학살과 가난으로 분열되고 상처받은 캄보디아를 통합하는 구심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나아가 대외적으로는 위대한 문명의 발상지로서 수많은 인류의 끊이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고마움에 대한 예의로서 캄보디아는 각종 화폐에 앙코르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있다.

 

대사원 건립에 ‘대단한 동원’

» 자야와르만 7세 때의 생활을 보여주는 부조.
자야와르만 7세는 당연히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리는 대사원도 건립했다. 어머니를 기려 세운 타 프롬(1186년 완공)에 대해 기록한 비문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타 프롬에는 400명의 남성, 18명의 최고위 승려, 2740명의 일반 승려, 2232명의 일꾼, 615명의 여성 무희들이 있다. 이곳에 일시적으로 묵는 외부 사람까지 합치면 1만2640명에 이른다. 이 밖에 신에게 공역을 제공하는 남자와 여자가 6만6625명이 더 있다. 이 사람들까지 합치면 모두 7만9265명에 이른다. 버마인, 참파인까지 합치면 그렇게 된다. 이 밖에 무게가 5t이 넘는 금과 은의 항아리, 35개의 다이아몬드, 4만620개의 진주, 4540개의 보석, 947장의 중국제 스카프, 512개의 침대, 523개의 파라솔까지 사원의 재산으로 등록돼 있다.’

엄청난 숫자다. 자야와르만 7세의 아버지를 기려 세운 프레아 칸(1191년 완공)도 같은 방식으로 계산하면 거의 10만명에 이른다. 모두 5300개 촌락이 이 사원을 짓는 데 공역을 제공했다. 이 비문은 나아가 이 두 사원과 그 앞에 언급한 다른 한 사원에 종속돼 공역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모두 1만3500개 촌락으로부터 차출됐다고 밝힌다. 이들은 이 사원을 위해 식량과 의복을 제공했다. 이런 숫자는 1960년대 캄보디아 경작지대 촌락의 평균 인구인 200명과 거의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각 사원에 귀속돼 있었다는 ‘버마인’이나 ‘참파인’은 전쟁포로로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야와르만이 건립한 각종 공공시설도 주목할 만하다. 치료시설은 중부 라오스까지 뻗어나갔다. 타 프롬 비문에 따르면 이 치료시설은 모두 838개 마을의 성인 인구 8만명에게 제공됐다. 각 시설에는 대략 100명씩의 관리인원이 있었다고 한다. 도로망은 전국 각지로 뻗어나가면서 약 16km 간격마다 숙식시설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앙코르로부터 참파의 수도까지는 모두 57개의 숙식시설이 마련됐다고 기록돼 있다.

 

[술라이만] 오스만 터키여, 술라이만이여!

한국군이 파병된 이라크 술라이마니야의 옛 주인공… 탁월한 입법가였던 화려한 황제

빈 공방전, 전 유럽을 전율시키다

» 오스만 터키의 최전성기를 연 술라이만. 술라이마니야는 바로 그의 이름을 기려 지명을 붙인 곳이다.(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술라이마니야라는 이름이 다가오고 있다. 이라크 파병 예정지로 급부상하면서 온 국민의 지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술라이마니야는 어떤 곳일까? 과연 거기선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역사를 보면 다른 어떤 곳보다 술라이마니야로 가는 것이 대단히 상징적인 성격을 띤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어느 의미에선 한국군이 중동의 뜨겁고 어두운 역사에 본격적으로 빨려들어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술라이마니야는 바로 오스만 터키의 최전성기를 연 술탄 술라이만을 기려 지명을 붙인 곳이다. 이슬람 역사는 술탄 술라이만에 대한 기본정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이름: 야우즈 술탄 셀림(야우즈는 ‘냉혹한 자, 탁월한 자’라는 뜻)
어머니 이름: 하프사 하툰
생존기간: 1495~1566년
재위기간: 1520~1566년
통치면적: 1498만㎢
통치지역 인구: 약 2천만명
별명: ‘화려한 황제’ ‘입법자’

술라이만은 1495년 흑해의 해안도시 트라브존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가 바로 2002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 이을용 선수가 진출했던 트라브존스포르의 홈코트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술라이만은 대단한 행운 속에서 오스만 터키의 최고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혼자 남은 아들이었기에 아무런 승계 분쟁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오스만 터키는 할아버지대의 230만㎢에서 아버지대의 650만㎢로 확장돼 있었고, 홍해와 동지중해의 해상권도 대부분 확보하고 있었다. 제국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와 무력을 쌓아놓은 채 유능한 통치자의 등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위 초기 이집트계의 맘루크조를 재건하려는 다마스커스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한 뒤 술라이만은 1521년 발칸반도에 대한 전격적인 원정에 나서 그때까지 난공불락이라던 베오그라드와 주변의 요새들을 점령했다. 기독교 문명권의 중동 공격이라 할 수 있는 ‘십자군 원정’에 대응하는 이슬람의 유럽 공격인 ‘지하드’(성전)가 본격화한 것이다. 그해 가을에는 다시 동지중해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성 요한 기사단이 220여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로도스섬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동지중해와 발칸반도에 성공적으로 거점을 마련한 술라이만은 드디어 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헝가리와 일대 격전을 벌인다.

» 1538년 9월27일 오스만 함대가 기독교 국가의 연합함대를 격파한 알바니아 프레베자 해전.

오스만 군단은 모하치 평원에서 헝가리군을 자기 진영 깊숙이 유인한 뒤 대포부대의 집중 포화와 정예병의 기습공격으로 몰살시켰다. 헝가리왕 루트비히 2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유럽대륙의 중심부인 헝가리는 그 뒤 145년 동안 오스만 터키의 속국이 된다. 당시 오스만 군단은 화약을 이용한 대포와 소총을 대대적으로 활용해 무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술탄은 여세를 몰아 1529년 12만명의 대군에 300문의 대포를 동원해 오스트리아까지 진출해 빈을 포위했다. 유럽 최강국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일대 위기에 놓인 것이다. 결국 오스만 군단은 보급 문제와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철수했지만, 이 빈 공방전은 전 유럽을 전율시켰다. “오스만 터키는 오늘날 지구상의 공포이다.”

 

그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었으니…

술라이만의 군대는 진격을 계속해 독일 바바리아 지방과 폴란드 국경까지 육박하고, 드네프르강 하구까지 진출했다. 이와 함께 동쪽의 이란계 사파비 왕조를 공격해 그 수도 타브리즈를 점령하기도 했으며, 아제르바이잔, 카프카스 지방, 이라크를 정복한 것도 술라이만 때의 일이다.

육지에서 오스만 군단이 위세를 떨치는 동안 오스만 함대도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누볐다. 1538년 122척의 오스만 함대가 알바니아 해안 프레베자에서 200여척으로 이뤄진 기독교 국가의 연합함대를 격파했다. 그 뒤 지중해 해상권을 바탕으로 알제리 등 아프리카 북부를 점령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는 물론 프랑스의 니스, 멀리는 대서양의 아프리카쪽 관문인 세우타까지도 오스만 함대의 작전지역이었다. 술라이만은 이런 제해권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교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확보하는가 하면, 교역과 관련된 이권을 지렛대로 유럽국가들의 반오스만 통일전선을 교묘하게 분열시키는 외교전을 성공시켰다. 그는 재위 기간에 모두 12차례의 대원정을 벌였으며, 스스로 전쟁터에서 보낸 기간도 10년에 이른다. 이런 업적에 대해 후세 역사가들은 ‘술라이만 화려한 황제’(Suleyman, the Magnificent)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 1521년 8월 오스만 군단의 모하치 전투. 대표부대의 집중 포화와 정예병의 기습 공격으로 헝가리군을 무릎 꿇게 했다.
술라이만은 탁월한 입법가이자 행정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1400만㎢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에 혼재한 수니파 이슬람교도, 시아파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가톨릭교도, 동방정교도, 유대교도, 콥트교도, 네스토리우스교도, 조로아스터교도, 힌두교도 등 다민족 다종교 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세속법 ‘카눈’의 제정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그는 이전 세대에 통용되던 법령들을 고치고 정비해 제국의 토대를 굳건히 만들었다.

그는 종교와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들 사이에 정의가 존재해야 하고, 권력자 역시 국민에 대한 정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을 관철시켰다. 오스만 터키가 ‘유럽의 병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면서도 650년 동안 유지된 배경에는 이런 법에 의한 통치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공을 기려 이슬람 역사가들은 그에게 ‘카누니’(입법자·The Lawgiver)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동시에 세계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걸출한 건축물을 후세에 남기는 데 성공했다. 이스탄불에 있는 술라이마니야 모스크와 루스템 파샤 모스크를 비롯해 예루살렘의 아크사 모스크 등이 다 그의 시대 작품이다. 오늘날에도 세계의 관광객이 끊임없이 이 걸작들로 몰려들고 있다.

 

각 민족의 연고권이 복잡하다

그러나 이런 술라이만도 어쩌지 못하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하나는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였다. 그는 총애하는 황후 록셀란이 후계 분쟁에 관여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결국 궁정은 술탄의 후계를 둘러싼 모략과 암투 그리고 피로 물들어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점차 제국은 통치권이 이완되면서 내부 분열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나아가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권을 장악한 오스만 터키는 이슬람 시아파의 지도국가인 이란-사파비 왕조와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사파비 왕조는 군사력이 현저하게 열세일 때는 후퇴하면서 식량 등을 불태우는 초토 전술로 버텨나갔다. 서부의 유럽전선에도 대응해야 했던 오스만 터키는 동부의 사파비 왕조를 끝내 복속시키지 못한 채 평화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555년 아마시야 협정을 맺어 술라이만은 터키 동부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차지하는 대신, 아제르바이잔과 카프카스에 대한 권리를 사파비 왕조에 양도했다. 술라이마니야는 바로 이런 과정에서 태어난 이름이다. 오스만 터키가 사파비 왕조와 맞바꾼 지역에 술탄 술라이만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이란과 터키 그리고 이라크를 번갈아 주인으로 섬겨야 했던 땅… 그러면서도 민족·종교적으로는 쿠르드(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를 비롯해 투르크멘(수니파)과 수니파 아랍인, 시아파 아랍인 그리고 시아파 이란인이 뒤섞여 사는 매우 불안정한 땅… 나아가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석유자원의 이권을 둘러싸고 나라와 민족 사이의 갈등과 권모술수가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땅….

이런 역사적 맥락과 경제적 배경 때문에 각 민족이 내세우는 연고권과 자기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먼저 이 지역에 관한 한 다수민족인 쿠르드인은 이번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을 적극 활용해 수천년래의 비원인 ‘쿠르디스탄’ 독립국가나 자치주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 쿠르드인들은 현재 이라크 원유수출량의 절반을 생산하는 키르쿠크를 자신들의 관할권으로 두려 한다. 터키계 투르크멘인들은 쿠르드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연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몫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925년 제정된 이라크 독립헌법 제16장은 아랍계 쿠르드인과 함께 투르크멘인을 이라크의 3대 민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더욱 엄밀히 측정하면 투르크멘인들이 쿠르드인보다 더 많다.” 그런데도 미국 중심의 서구세력이 이라크의 아랍인을 견제하기 위해 쿠르드인을 우대하는 정책에 펴는 바람에 자신들만 불이익을 겪고 있다는 논리를 편다.

» 이스탄불에 있는 술라이마니야 모스크. 술라이만 시대에 만들어진 걸출한 건축작품이다.

이라크의 다수파인 아랍인들은 현재 쿠르드인과 투르크멘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일정 한도 이상의 독립 움직임이 현실화하거나 쿠르드인 등에게 막대한 원유 관련 이권을 넘긴다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후세인은 바로 그런 잠재적 여론을 등에 업고 1988년 쿠르드인 마을을 화학무기로 공격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라크 북부지역은 상황에 따라선 국제적 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안고 있다. 후세인 시기까지 터키는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쿠르드인 문제를 밀봉하기 위해 반대급부로 이라크 내 투르크멘인에 대한 지원을 억제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의 정책에 따라 쿠르드가 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이라크 내 투르크멘 문제를 서서히 노골화하는 움직임을 보여 주목된다. 터키가 한국 군당국에 이라크 북부에 파병되더라도 투르크멘인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를 부탁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암시적이다. 술라이마니야의 옛 주인이 발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피와 모래와 기도의 땅, 그 심장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투르크멘은 술라이마니야에는 3만명, 에르빌에는 30여만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나아가 쿠르드인들이 이라크는 물론 이란·터키·시리아에 넓게 퍼져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국제 분규로 발전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한 국가의 쿠르드인 문제가 다른 나라로 불똥을 튀게 해 자연발화식으로 국제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본인 저술가 무라마쓰 쓰요시는 중동의 현대사를 다룬 저서에 <피와 모래와 기도>라는 제목을 붙였다. 피와 모래와 기도의 땅, 그 심장부로 우리 젊은이들이 가고 있다.

 

“남은 형제와 그 자녀를 죽여라”

» 술라이만과의 사이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었던 록셀란.
오스만 터키는 기이하고도 끔찍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무력이나 책략으로 집권한 왕자는 남은 형제와 그 자녀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준 것이다. 제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에서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드 2세가 이 제도를 정착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왕자간의 갈등과 투쟁이 치열했다. 후계권을 갖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물론 술탄으로 즉위한 뒤에도 경쟁자와 그 무리를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이 분열되거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늘 존재했다.

실제로 술레이만의 할아버지인 메흐메드 2세도 동생과 권력 다툼을 벌여야 했고, 아버지 셀림 1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두 차례나 반란을 일으킨 뒤 나중에 술탄의 근위부대인 예니체리 부대의 지원을 받아 양위를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즉위 뒤에는 두 형을 죽인다.

걸출한 술탄 술레이만도 이 끔찍한 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오히려 어느 의미에서는 더하면 더했다고도 할 수 있다. 술레이만은 진실로 사랑하는 여성 록셀란이 후계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결국 왕가는 승계를 둘러싼 모략과 암투 그리고 피로 물들어갔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예로 황후에까지 오른 록셀란은 술레이만과의 사이에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 황태자 메흐메드가 죽자 피의 암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유고 몬테네그로 출신의 귤헴이라는 여인에게서 낳은 왕자 무스타파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이 음모에는 딸과 사위 등 온 가문이 가담했다. 그러나 그 여파로 다시 록셀란의 아들 지한기르가 자살한다. 이복형을 몹시 사랑했던 것이다. 록셀란이 죽은 뒤 남은 두 아들 셀림과 바예지드는 서로 군대를 일으켜 사생결단을 벌인다. 여기서 아버지인 술레이만은 셀림을 지원해 바예지드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이 끔찍한 제도는 17세기 들어서야 나머지 왕자들을 살해하지 않은 채 별궁에 유폐하는 식으로 완화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