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연꽃 피는 소리를 듣는 즐거움
옛 선비들의 풍류 가운데 ‘개화성(開花聲)’이란 게 있다. 한여름 새벽에 배를 타고 연지(蓮池)에 나가서 연꽃이 피는 소리를 듣는 즐거움을 일컫는 말이다. 연꽃은 동트기 전에 꽃망울을 터트리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조그만 조각배에 몸을 싣고 천천히 천천히 나아가 숨죽이고 귀를 세우다 보면, 어디선가 ‘퍽’하고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신비스럽기도 하고, 숨죽이며 귀를 세우면서 듣는 긴장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동이 트면서 햇발이 연지에 다다르면, 그 신비스럽기만 하던 개화성은 더 이상 들을 수 없다고 한다.
말로만 들었던 이 풍류를 경험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새롭기만 하다. 어느 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연엽주를 빚기 위해 고향마을에 있는 연방죽을 찾았다. 연방죽이라고는 하지만 사방 4km나 되는 매우 큰 연지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지금은 돌보는 이가 없어 수초밭이나 다름없는 폐허가 되어 있었는데, 아직도 연꽃은 피고지고를 계속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눈을 의식해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널빤지에 함석을 대서 만든 조그만 배를 빌려 타고 방죽 안으로 들어가, 연잎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개화성이 들려왔다. ‘벅’하는 소리였다. 이윽고 꽃봉오리가 터질 것 같은 연꽃 옆으로 나아가 숨죽이길 십여 분이 지났을까. 여기 저기서 ‘벅’, ‘퍽’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생전 처음이었다. 꽃잎이 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개화성’은 참으로 멋진 풍류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친화적이면서도 멋과 풍류가 깃든 연엽주 빚기
연엽주는 여러 가지 가향재(加香材) 가운데 특이하게 한여름에 피는 연잎(蓮葉)을 술에 넣는 가향주(佳香酒)이자 계절주이다. 연엽주가 언제부터 빚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는데, 500년 전부터 빚어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1600년대 말엽으로 추정되는 [주방문]에 연엽주 빚는 법이 비교적 자세히 수록되어 있고, 이후의 문헌인 [산림경제]를 비롯하여 [증보 산림경제], [고사십이집], [규합총서], [임원경제지], [양주방], [주선무쌍신식요리제법] 등 조선 중기 이후의 여러 문헌에 술 빚는 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엽주에 대한 유래는 “조선조 무장이었던 이완 장군이 부하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빚었다.”는 설과, “금주령 때 궁중의 제례용 술과 허약한 왕의 보신을 위해 신하들이 빚었다.”는 설 등 두 가지 얘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 어떤 것도 정확하지는 않다.
문헌에 따라 술 빚는 법에서 차이가 있는데, [증보산림경제]의 기록을 보면, “찹쌀고두밥에 백곡을 섞어 버무린 다음, 연잎으로 싸서 띄운다.”고 하였으나, 후대의 문헌인 [규합총서]에는 “고두밥에 물과 가루누룩을 섞어 빚은 술밑을 술독에 안칠 때, 연잎과 솔잎을 켜켜로 안치고 찬 곳에서 익힌다.”고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규합총서]보다 훨씬 후대의 문헌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증보산림경제]의 술 빚는 법과 같으나, “연못 가운데 있는 연잎에 찰밥과 누룩 섞은 것을 싸서 짚으로 동여매어 나뭇가지로 고정시켜 두면, 이틀쯤 뒤에 술이 익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은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보다 자연친화적이면서도 멋과 풍류가 깃든 술빚기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충남 아산 지방에 전해오고 있는 아산 연엽주는 예안 이씨 가문의 종부(宗婦)에게만 그 비법이 전수되어 온 궁중의 술로 알려지고 있으며, [규합총서]와 같은 방법으로서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능보유자 최황규 여사에 따르면, “예로부터 ‘남성의 양기(陽氣)를 보(補)하고 혈관을 넓혀 혈행(血行) 개선과 함께 피를 맑게 해준다’고 하여 가용 약주로 빚어져 오는 바, 이 지방에서는 ‘명약주(名藥酒)’로 더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아산 연엽주의 유래는 “과거 극심한 가뭄이 들면 쌀 소비가 많은 술을 못 빚게 하고자 금주령이 내려졌는데, 임금께서 술을 못 드시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신하들이 차(茶)보다는 도수가 높고, 여느 술보다는 도수가 낮은 약주인 연엽주를 빚어 드시게 했는데, 비서승감(秘書丞鑑)을 지낸 예안 이씨 5대조가 당시 연엽주의 양조(釀造)에 관여했던 관계로, 그 제조법이 사가에 전해져서 이후 가문의 가양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산 연엽주의 방문을 보면, 먼저 멥쌀과 찹쌀을 섞어 물에 깨끗이 씻어 불렸다가 시루에 안친 다음, 아궁이에 불을 지펴 고두밥을 짓고 익으면 퍼내서 꾸들꾸들해질 때까지 식힌다. 이어서 잘게 부순 누룩을 비롯 솔잎, 감초 등의 약재와 물을 섞어 술밑을 빚는다. 술 버무리기가 끝나면 술독에 먼저 연잎을 깔고, 그 위에 술밑과 연잎을 한 켜씩 켜켜이 안친 뒤, 안방 아랫목에서 보름 정도 익히면 완성된다. 연엽주는 “대취(大醉)하도록 마셔도 소피 한 번만 보고 나면 술이 다 깰 정도로 뒤끝이 개운하다.”는 평(評)을 얻고 있는데, 이는 ‘술을 빚는 이의 손맛과 지극한 정성이 들어가야 고유한 술맛이 살아난다’고 믿고 있는 이득선 씨의 고집 때문으로, 그의 부인 최황규 씨는 아직도 손이 많이 가는 옛 양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한여름 열기가 가라앉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가 술빚기에 가장 좋을 때
연엽주에 대한 기록을 살펴 볼 수 있는 옛 문헌 가운데, 가장 후기의 방문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수록된 연엽주는 이양주법(異釀酒法)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여느 술빚기와는 달리 술독을 사용하지 않고 발효시킨다는 점에서 와송주(臥松酒)나 죽통주(竹筒酒)와 같은 이양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방문을 보면, 찹쌀로 지은 고두밥에 팔팔 끓여 식힌 물과 누룩을 혼합하여 만든 술밑을, 연못 속의 살아있는 연잎으로 싸서 자연 상태에서 그대로 발효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연엽주는 매우 까다로운 술이다. 따라서 연잎의 수분이 가장 많을 때인 한여름은 피하고, 서리가 내리기 직전인 늦여름이나 입추 무렵에 채취한 연잎을 이용하여 빚어야 술이 시어질 염려가 없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또한 연엽주를 빚을 때는 날물(生水)을 쓰지 않도록 하고, 또 한여름의 열기가 가라앉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가 술빚기에 가장 좋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여름 다 지내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면 연잎의 수분은 점점 줄어들면서 향이 좋아진다. 따라서 이때의 연잎으로 싸서 술을 빚게 되면, 연잎 자체의 향도 오묘해질 뿐 아니라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후 때문에 적정 발효온도가 되어, 단시간 내에 술이 익게 되며 술맛이 좋아진다.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누정에 올라 연지의 연꽃을 내려다보면서 그 자리에서 술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기회가 되어 ‘개화성’까지 감상할 수 있는 풍류를 즐긴다면, 그 이상의 술자리는 없다 할 것이다.
좋은 술에 걸맞은 좋은 술자리 문화 조성이 필요
지난 10여년 간 각종 강연과 실기지도를 통해 연엽주에 대한 가치를 알려왔다. 최근에야 남양주시를 비롯한 김포, 대구, 상주, 무안 등지에서 연엽주와 연화주가 개발되어 선을 보이기 시작했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연엽주와 연화주가 등장할 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전통주의 개발과 상품화가 지역특산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과다생산과 경쟁으로 공멸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나 어두컴컴하고 난잡스런 분위기, 현란한 조명과 귀청을 때리는 음악소리에 묻혀 술이 술을 부르는 자리가 아닌,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 봄날에 가졌던 두견주음이나 도화주음, 창포주와 같이 자연과 더불어 마셨던 술자리가 생각날 때 연엽주와 그 음주문화의 가치는 새로워질 것이다.
연엽주는 특히 ‘계절성’과 ‘개화성’을 떠올릴 수 있는 풍류를 답보할 때, 애주가들로 하여금 연엽주 감상을 손꼽아 기다리게끔 하는 격조높은 명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멋과 흥이 따르는 술자리문화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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