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의 여정을 시(詩) 한 편으로 시작합니다. 경북 안동에서 봉화를 넘어 강원 태백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 저물 무렵 그 아름다운 길 어디쯤에다 깃발처럼 꽂아두고 싶은 헌사(獻辭) 같은 시입니다. 저녁이 되자 모든 길들은 /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추억 속에 환히 불을 밝히고 / 6월의 저녁 감자꽃 속으로 / 길들은 몸을 풀었다. / 산 너머로, 아득한 양털구름이 / 뜨거워져 있을 무렵 / 길들은 자꾸자꾸 노래를 불렀다. / 저물어가는 감자꽃 밭고랑 / 사이로 해는 몸이 달아올라 / 넘어지며 달아나고, 식은 노랫가사 속에 길들은 / 흠뻑 젖어있었다. <김수복 詩 ‘6월’전문> 35번 국도를 찾아간 건 오로지 미슐랭 그린가이드 한국편 때문이었습니다. 미슐랭의 미식 가이드북인 레드가이드는 식당에 별점을 매기지만, 관광안내 가이드북인 그린가이드는 여행지에다 별점을 매깁니다. 미슐랭의 별점은 인색하기로 유명합니다. 만점은 별 셋이지만, 별점 하나만 받는대도 훌륭한 여행지임을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내로라하는 여행지들 중에서도 별점을 받지 못한 곳이 수두룩합니다. 이를테면 내설악의 백담사나 속초의 낙산사, 경주의 안압지, 부산의 해운대 등은 별점 하나 없이 그저 가이드북에 거론됐을 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난 2011년 출간된 그린가이드 한국 편은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태백의 초입까지 이어지는 35번 국도의 구간에 별점 하나를 매겼습니다. 미슐랭가이드가 한국의 길에다 매긴 유일한 별점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미슐랭가이드가 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듯합니다. 가이드북에는 35번 국도의 매력을 청량산을 끼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경관, 그리고 강변 마을의 허리 굽은 할머니들의 노동의 모습으로 설명했습니다. 아마도 그 길을 달리면서 청량산과 낙동강에서 맑은 기운을, 저무는 강변의 사람 사는 아름다움을 보았던 모양이었습니다. 예사로 지나쳤던 35번 국도. 그 길을 다시 찾아갑니다. 35번 국도를 따라 안동의 월영교에서 봉화의 청옥산까지 길을 이었습니다. 오래된 고택의 맑은 정신을 지나고, 누추해서 더 따스한 마을을 건너가고, 그윽한 천변과 낙동강의 물소리를 지나고, 뫼 산(山)자로 우뚝 솟은 청량산을 지나고, 청옥산의 깊은 숲도 지나갑니다. 미처 다 세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이 길은 6월 감자꽃이 다 지기 전에 꼭 다녀와 보시길 권합니다. 그때가 마침 저물녘이라면, 시처럼 ‘아득한 산 너머로 양털구름이 뜨거워져 있을’ 그런 시간이라면, 감자꽃 만발한 길 위에서 시 속에 등장하는 ‘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미슐랭가이드의 길과 퇴계의 길이 만나다 미슐랭가이드 영문판 한국 편 278쪽. 경북 안동 주변의 명소를 소개하면서 ‘35번 국도(Route 35)’를 따로 뽑아 별점(★) 하나를 매겨놓았다. 별점에 인색한 미슐랭가이드는 동해안의 바다를 따라가는 7번 국도도, 한계령을 굽이굽이 넘어가는 44번 국도도 다 못 본 척했지만, 35번 국도에는 그럴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부산에서 강릉을 잇는 총연장 421㎞의 35번 국도. 별점을 받은 구간은 그중에서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강원 태백 초입까지의 75㎞ 남짓의 길이다. 이 길이 낯설지 않은 건 일찍이 안동의 도산서원과 청량산을 오가며 마음을 닦았던 퇴계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일컬었던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다. 낙동강의 물길과 청량산의 산줄기를 따라가는 이 구간의 35번 국도의 느낌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미슐랭가이드 한국 편의 스태프들은 별점의 이유로 ‘낙동강을 따라 유연하게 이어지는 길 주변의 경관’과 ‘허리 굽은 할머니들의 포기하지 않는 노동’을 들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이 두 가지의 이유만으로 이 길을 평했다는 데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가이드북 대로라면 1시간쯤이면 지나칠 수 있는 그 길은, 실은 이틀쯤을 바친대도 길을 끼고 있는 수많은 명소들을 다 만나지 못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는 생각. 미슐랭가이드가 이 길에 한두 개쯤 별점을 더 주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제 그 길을 따라가 보자. 흐르는 길은 앞도 뒤도 없는 것이니 남쪽인 안동에서도, 또 북쪽인 태백에서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둘 중 한 곳을 고르라면 당연히 안동을 들머리로 삼아야 할 일이다. 35번 국도의 여정을 하루 일정으로 잡았다면, 전날 안동에 당도해 일대를 느긋하게 들러보는 게 순서겠다. 안동에 가면 ‘원이 엄마’는 꼭 만나고 돌아오길 당부한다. 부부가 함께 떠난 여행이라면 더 그렇다. 원이 엄마가 누구냐고? 설명하려면 16년 전에 출토된 한 무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 ‘원이 엄마’의 미투리에서 길을 시작하다 1998년 4월 안동 정하동의 택지개발지구에서 두 기의 조선시대 무덤이 발견된다. 무덤 주인이 이름은 이응태. 그가 서른한 살의 나이로 사망한 게 500여 년 전의 일이었다. 시신 가슴 위에는 편지 한 통이, 곁에는 미투리 한 켤레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편지는 죽은 이의 부인이 써서 넣은 것이었다. 젊은 나이에 죽은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애절한 눈물과 진심이 편지에 가득 번져있었다. “당신은 단지 그곳에 가 있을 뿐이지만, 아무리 한 들 내마음 같이 서러울까요.” 이렇게 시작한 편지에는 “둘이 머리가 희도록 살자다가 어찌 당신이 먼저 가시냐”는 원망도 있고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당신 모습을 자세히 보여달라”는 애원도 있다. 더 감동적이었던 건 편지와 함께 시신 곁에 둔 미투리 한 켤레였다. 오래 아팠던 남편의 쾌유를 빌면서 아내는 머리카락을 잘라 삼과 엮어 짚신을 만들었고, 그걸 남편의 주검에 함께 묻었다. 미투리를 싼 종이에는 ‘이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란 글귀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500여 년 전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면서 슬픔을 편지와 미투리로 남긴 아내가 바로 ‘원이 엄마’다. 원이 엄마의 편지와 미투리는 국립안동대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누구나 다 사랑을 하는 것이고 누구나 다 죽는 법. 남편의 죽음 앞에 누군들 슬프지 않았을 것인가. 더군다나 서른하나의 이른 죽음이었다면…. 지금도 뚜렷하게 읽을 수 있는 편지와 미투리 앞에서 오랜 시간을 건너온 사랑의 깊이를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가족을 생각하게 되는 건 이 때문이다. 원이 엄마가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를 형상화해 세웠다는 게 안동댐 하부의 월영교다. 다리 중앙에 정자를 세워둔 월영교는 제법 운치가 있다. 특히 은은하게 조명이 켜지는 저녁시간에는 그 아름다움이 배가 된다. 그러니 35번 국도 여정의 출발지점을 여기로 삼는 게 좋을 듯하다. # 안동 땅에서 만나는 나무들
나무라면 35번 국도가 지나는 도산서원 마당의 왕버드나무 두 그루도 빼놓을 수 없다. 안동 땅을 대표하는 도산서원에서는 가지를 뒤틀며 서 있는 왕버드나무의 웅장한 품새를 다시 보자. 두 그루 나무 중에서 물가의 단애 쪽에 서 있는 나무가 가지를 한껏 옆으로 뻗고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마른 붓질로 그린 듯하다. 도산서원 안에는 금송(金松)도 있다.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손수 심었던 나무가 2년 만에 말라죽자 ‘불경스러운 일’이라며 쉬쉬하다 이듬해 당시 안동군청이 비밀리에 같은 수종으로 다시 심은 것이다. 금송이 박 전 대통령이 심은 나무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3년 전에 안내판이 수정됐고, 급기야 안동시는 이 나무를 서원 매표소 밖으로 추방하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 도산서원을 지나면 길은 어깨춤까지 훌쩍 자란 담배밭과 환한 꽃밭을 이룬 감자밭, 그리고 지지대를 세워놓은 고추밭으로 가득한 부드러운 구릉을 지난다. 온혜리에서 야트막한 나불고개를 넘어 가송리에 닿으면 이제부터가 35번 국도의 하이라이트다. 일찍이 퇴계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했던 게 바로 이쪽 길이다. 모르긴 해도 미슐랭가이드에 매겨놓은 별점도 이곳의 경관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었으리라. 이 길에서는 청량산이 황급히 낮춘 능선 아래로 낙동강이 군데군데 여울을 만들며 유연하게 굽이친다. 길가의 마을은 녹음과 평화로 가득하다.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푸근해지는 풍경이다. 여기서 35번 국도는 물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지만, 가송리까지 가서 지척의 고산정과 농암종택으로 가는 샛길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낙동강의 물길 곁에 세워진 정자인 고산정이 보여주는 건 ‘품격있는 아름다움’이다. 낙동강의 너른 물길과 백사장을 정원 삼은 농암종택의 그윽한 맛도 못지않다. 여기서는 차를 두고 걸어야 마땅하다. 고산정 부근에 차를 세우고 낙동강을 끼고 농암종택까지 갔다가 되돌아나오는 데는 1시간쯤이면 넉넉한데, 그 정도의 수고만으로 주어지는 정취와 풍광이 도무지 황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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