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교(1693년∼1765년)는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으로, 본명이 정섭(鄭燮)이고 호가 판교(板橋)지만, 정판교로 더 알려졌다. 요즘 중국에서 집안의 식구나 친지에게 보낸 편지 속에 삶의 처세나 지혜를 가르쳐 준 증국번(曾國藩)의 가서(家書)와 더불어 정판교의 가서 또한 제법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화가,서법가로서 유명하며, 난(蘭),대나무(竹),바위(石)을 즐겨 그렸지만, 대나무그림이 뛰어나다. 그는 대나무를 지극히 좋아하여, 관직에 있을 때나 관직을 그만둔 뒤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릴 때도 대나무를 좋아하였는데, 강직하여 불의에 굽히지 않는 그의 성품은 대나무를 닮았다.
그런데 관직에 있을 때,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한 인품은 대나무가 지닌 절개와 고매함이 인간애에 기초하기에 더욱 빛을 발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겠다.
또한 그의 시, 예를들어 <도황기(逃荒記)>,<환가행(還家行)>,<사부행(思婦行)>,<혹리(酷吏)> 등은 전고를 사용하지 않고 참신한 언어로써, 고통받는 백성의 참상을 그렸기에, ‘백거이와 한유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어떻게 백성의 사랑하고, 백성을 고통에서 구제하려고 노력했는지, 잠시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정판교는 어려서 부친이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렸는데, 집이 너무도 가난하여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늦게 공부하여, 강희(康熙)때 수재, 옹정(雍正)때 거인, 건륭(乾隆) 때 진사가 되었고, 44세를 전후하여 비로소 산동의 범현(范縣),유현(濰縣)의 지현(7품현관)이 되었다.
12년간 벼슬자리에 있었는데, 그가 백성이 굶어죽는 참상을 보지 못해, 관청의 곳간을 열어 그들을 구휼하였기에 탐관오리들의 이익을 침해하게 되어 무고하게 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아래의 고사는 그가 관직을 그만둔 직접적인 이유인듯 한데,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기에 소개한다.
유현의 지현으로 있을 때, 재해가 들었다. 그는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이 뿔뿔이 흩어지고 자식을 파는 참상을 시로써 그려, ‘십일에 아들 하나 팔고, 오일에 부인 하나 팔고’(도황행), ‘가축을 죽여 그 고기를 먹고, 가축이 없어지면 사람 역시 죽는다’(思婦行)고 기록하였는데, 그는 차마 이 광경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구휼하는데 힘쓰는 한편 유현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이때, 아전이 ‘관청의 창고를 마음대로 열면 관리로써 죄명을 얻을 것입니다’고 하니, 그는 ‘상부에 보고를 하는 절차를 밟는다면 백성은 그 기간에 얼마나 굶어죽을 지 모른다. 만약 죄가 주어진다면 내 혼자 받겠다’고 하여, 만여명을 살렸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산동순무(山東巡撫)에게 청죽화(淸竹畵) 한폭을 바쳤는데, “관청에 누워 쏴쏴하는 대나무 소리를 들으면 마치 민간이 고통받는 소리인 듯 합니다. 우리같은 주․현의 하급관리들은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에 관심을 기울입니다.(衙齋臥聽蕭蕭竹, 疑是民間疾苦聲. 些小吾曹州縣吏, 一枝一葉總關情.)”라고 하여, 백성의 고통에 깊이 귀기울였음을 밝혔다.
또 하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판교의 재치를 살펴볼 수 있는 고사를 하나 더 소개한다. 어느 설날기간에 판교가 바깥으로 순찰을 나섰다. 어느 집 대문에 ‘二三四五, 六七八九’로 대련(對聯)을 붙여놓은 집을 보았다.
그는 당장 아전을 불러 그집을 구제하라고 일렀다. 아전이 그 집을 열고 들어가니 집주인은 정말로 옷과 먹을 것이 없었다. 그는 대련의 앞구절에 一자가 없는 것(缺一quèyī)을 보고 옷이 없다(缺衣quèyī)는 사실을 알았고, 뒷구절에 十자가 없는 것을 보고(少十shăoshí) 먹을 것이 부족하다(少食shăoshí)는 것을 알았다.
정판교는 대나무를 좋아하였기에, 대나무와 관련된 많은 제화시(題畵)와 <석죽(石竹)>,<죽(竹)>,<이죽<籬竹)>,<순죽(笋竹)2수>등의 시를 남겼다. 그는 일생동안 난,대나무,바위와 매화,소나무,국화 등을 그렸지만,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난,수많은 세월 절개를 지키는 대나무,영원히 자리를 떠지 않는 바위”를 배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정판교가 칭찬한 ‘네 가지 미덕(四美德)’이었다.
그러므로 대나무는 강건하여 굽히지 않고, 정직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정판교의 정신을 대신한다고할 수 있다. 고통받는 백성을 도외시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탐관오리가 상관으로 있는 이상 더 이상 관직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장원포를 찢어버리고, 오사모를 벗어 던지는(扯碎壯元袍, 脫却烏紗帽)’(<道情>) 결심을 할 무렵에 <道情>10수를 써서, 어부(漁翁),나뭇꾼(樵夫),스님(和尙),도사(道士),가난한 서생(寒士),거지(乞丏) 등의 생활을 묘사하였다. 그중 <漁翁>을 보자.
<道情,老漁翁>
老釣翁, 一釣竿, 靠山崖, 傍水灣, 扁舟往來無牽絆.
沙鷗點點輕波起, 獲港蕭蕭白心晝寒, 高歌一曲斜陽晩.
一霎時波搖金影, 驀擡頭月上東山.
늙은 낚시꾼, 낚싯대 하나, 산기슭을 의지하고, 물굽이 곁에는 줄을 매지 않아 왔다갔다하는 일엽편주.
모래사장엔 갈매기 점 같은데 가벼운 파도가 일고, 포구에 들어오니 씨잉하고 바람이 불어 깨끗한 마음은 낮인데도 차갑고, 소리높여 부르는 노래 한곡에 비껴드는 석양.
잠깐 사이 물결은 금빛그림자를 움직여, 고개 높이 들어보니 달이 동산 위에 떴네.
작자는 다른 이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漁翁에게도 관심을 보이는데, 이들도 나라에 재난이 들면 사실 힘들 것이지만 도연명의 <도화원기>속의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재앙을 모르고, 산수자연과 벗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자는 이들을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지만 관계의 추악함을 파악한 뒤로는 내심 이들의 생활을 동경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의 <漁家>를 보면,
賣得鮮魚二百錢(매득선어이백전), 신선한 물고기를 200원에 팔아,
籴粮炊飯放歸船(적양취반방귀선). 식량을 사서 배로 돌아와 밥을 짓네.
拔來濕葦燒不着(발래습위소불착), 젖은 갈대 뽑아 불을 붙이니 붙지 않아,
曬在垂楊古岸邊(쇄재수양고안변). 수양버들 드리워진 옛 언덕가에서 말리네.
라고 하여, 구체적으로 어부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데, 어부의 힘든 삶 속에서 생활의 여유로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분명 어부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엔 3․4구절은 현재의 관직생활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다시 옛 고향으로 돌아가 자유로이 생활하겠다는 자신의 마음을 천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왜 그럴까? 4구에서 고(古)자를 쓴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인데...
그는 결국 12년간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予告歸里, 畵竹別灘縣紳士民>에서,
烏紗擲去不爲官(오사척거불위관), 오사모를 던져버리고 관리가 되지 않겠네,
橐橐蕭蕭兩袖寒(탁탁소소양수한). 뚜벅뚜벅 돌아오는데 씨잉 불어오는 바람에 두 소매가 차네.
寫取一枝淸瘦竹(사취일지청수죽), 맑은 야윈 대나무 가지 하나 얻어 글을 짓고선,
秋風江上作漁竿(추풍강상작어간). 가을 바람이는 강위에서 드리울 고기낚는 낚싯대 만드네.
라고 하여, 그가 관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나무로 그림을 그리고, 낚싯대를 만들어 세월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가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는 3마리의 당나귀만이 남았을 정도로 청렴했다고 한다. 한 마리에는 자신이 타고, 한 마리는 서적을 싣고, 한 마리는 시동을 태웠다고 하니 2절에서 빈털터리(兩袖寒)로 고향에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낚시를 좋아했는지는 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길이 없지만, 분명 대나무그림을 그리는 여가에 분명 낚시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자유롭고 여유로운 어부의 생활을 동경했다면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그림과 낚시를 병행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대나무 가지 하나 얻어 글을 짓고선(그림을 그리고 제화시를 짓는다는 의미)’, 그 대나무로 낚싯대를 만든다는 그의 말을 사실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나무가 그림용이든 낚시용이든 그는 이미 그림의 대가가 되었고, 대나무그림은 많은 중국인의 사랑을 받으니, 그가 고통받는 백성을 동정하고 사랑하였으며, 자신의 생활과 그림창작에 성실하게 임한 노력의 댓가가 아니겠는가?
◇ 정판교의 난죽도 |
그런데 관직에 있을 때, 백성을 사랑하여 백성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한 인품은 대나무가 지닌 절개와 고매함이 인간애에 기초하기에 더욱 빛을 발하고,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겠다.
또한 그의 시, 예를들어 <도황기(逃荒記)>,<환가행(還家行)>,<사부행(思婦行)>,<혹리(酷吏)> 등은 전고를 사용하지 않고 참신한 언어로써, 고통받는 백성의 참상을 그렸기에, ‘백거이와 한유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어떻게 백성의 사랑하고, 백성을 고통에서 구제하려고 노력했는지, 잠시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정판교는 어려서 부친이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렸는데, 집이 너무도 가난하여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늦게 공부하여, 강희(康熙)때 수재, 옹정(雍正)때 거인, 건륭(乾隆) 때 진사가 되었고, 44세를 전후하여 비로소 산동의 범현(范縣),유현(濰縣)의 지현(7품현관)이 되었다.
12년간 벼슬자리에 있었는데, 그가 백성이 굶어죽는 참상을 보지 못해, 관청의 곳간을 열어 그들을 구휼하였기에 탐관오리들의 이익을 침해하게 되어 무고하게 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아래의 고사는 그가 관직을 그만둔 직접적인 이유인듯 한데,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기에 소개한다.
유현의 지현으로 있을 때, 재해가 들었다. 그는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이 뿔뿔이 흩어지고 자식을 파는 참상을 시로써 그려, ‘십일에 아들 하나 팔고, 오일에 부인 하나 팔고’(도황행), ‘가축을 죽여 그 고기를 먹고, 가축이 없어지면 사람 역시 죽는다’(思婦行)고 기록하였는데, 그는 차마 이 광경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을 구휼하는데 힘쓰는 한편 유현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이때, 아전이 ‘관청의 창고를 마음대로 열면 관리로써 죄명을 얻을 것입니다’고 하니, 그는 ‘상부에 보고를 하는 절차를 밟는다면 백성은 그 기간에 얼마나 굶어죽을 지 모른다. 만약 죄가 주어진다면 내 혼자 받겠다’고 하여, 만여명을 살렸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산동순무(山東巡撫)에게 청죽화(淸竹畵) 한폭을 바쳤는데, “관청에 누워 쏴쏴하는 대나무 소리를 들으면 마치 민간이 고통받는 소리인 듯 합니다. 우리같은 주․현의 하급관리들은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에 관심을 기울입니다.(衙齋臥聽蕭蕭竹, 疑是民間疾苦聲. 些小吾曹州縣吏, 一枝一葉總關情.)”라고 하여, 백성의 고통에 깊이 귀기울였음을 밝혔다.
또 하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판교의 재치를 살펴볼 수 있는 고사를 하나 더 소개한다. 어느 설날기간에 판교가 바깥으로 순찰을 나섰다. 어느 집 대문에 ‘二三四五, 六七八九’로 대련(對聯)을 붙여놓은 집을 보았다.
그는 당장 아전을 불러 그집을 구제하라고 일렀다. 아전이 그 집을 열고 들어가니 집주인은 정말로 옷과 먹을 것이 없었다. 그는 대련의 앞구절에 一자가 없는 것(缺一quèyī)을 보고 옷이 없다(缺衣quèyī)는 사실을 알았고, 뒷구절에 十자가 없는 것을 보고(少十shăoshí) 먹을 것이 부족하다(少食shăoshí)는 것을 알았다.
정판교는 대나무를 좋아하였기에, 대나무와 관련된 많은 제화시(題畵)와 <석죽(石竹)>,<죽(竹)>,<이죽<籬竹)>,<순죽(笋竹)2수>등의 시를 남겼다. 그는 일생동안 난,대나무,바위와 매화,소나무,국화 등을 그렸지만,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난,수많은 세월 절개를 지키는 대나무,영원히 자리를 떠지 않는 바위”를 배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정판교가 칭찬한 ‘네 가지 미덕(四美德)’이었다.
그러므로 대나무는 강건하여 굽히지 않고, 정직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정판교의 정신을 대신한다고할 수 있다. 고통받는 백성을 도외시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탐관오리가 상관으로 있는 이상 더 이상 관직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장원포를 찢어버리고, 오사모를 벗어 던지는(扯碎壯元袍, 脫却烏紗帽)’(<道情>) 결심을 할 무렵에 <道情>10수를 써서, 어부(漁翁),나뭇꾼(樵夫),스님(和尙),도사(道士),가난한 서생(寒士),거지(乞丏) 등의 생활을 묘사하였다. 그중 <漁翁>을 보자.
<道情,老漁翁>
老釣翁, 一釣竿, 靠山崖, 傍水灣, 扁舟往來無牽絆.
沙鷗點點輕波起, 獲港蕭蕭白心晝寒, 高歌一曲斜陽晩.
一霎時波搖金影, 驀擡頭月上東山.
늙은 낚시꾼, 낚싯대 하나, 산기슭을 의지하고, 물굽이 곁에는 줄을 매지 않아 왔다갔다하는 일엽편주.
모래사장엔 갈매기 점 같은데 가벼운 파도가 일고, 포구에 들어오니 씨잉하고 바람이 불어 깨끗한 마음은 낮인데도 차갑고, 소리높여 부르는 노래 한곡에 비껴드는 석양.
잠깐 사이 물결은 금빛그림자를 움직여, 고개 높이 들어보니 달이 동산 위에 떴네.
작자는 다른 이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漁翁에게도 관심을 보이는데, 이들도 나라에 재난이 들면 사실 힘들 것이지만 도연명의 <도화원기>속의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재앙을 모르고, 산수자연과 벗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자는 이들을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지만 관계의 추악함을 파악한 뒤로는 내심 이들의 생활을 동경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의 <漁家>를 보면,
賣得鮮魚二百錢(매득선어이백전), 신선한 물고기를 200원에 팔아,
籴粮炊飯放歸船(적양취반방귀선). 식량을 사서 배로 돌아와 밥을 짓네.
拔來濕葦燒不着(발래습위소불착), 젖은 갈대 뽑아 불을 붙이니 붙지 않아,
曬在垂楊古岸邊(쇄재수양고안변). 수양버들 드리워진 옛 언덕가에서 말리네.
라고 하여, 구체적으로 어부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데, 어부의 힘든 삶 속에서 생활의 여유로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분명 어부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엔 3․4구절은 현재의 관직생활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다시 옛 고향으로 돌아가 자유로이 생활하겠다는 자신의 마음을 천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왜 그럴까? 4구에서 고(古)자를 쓴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인데...
그는 결국 12년간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予告歸里, 畵竹別灘縣紳士民>에서,
烏紗擲去不爲官(오사척거불위관), 오사모를 던져버리고 관리가 되지 않겠네,
橐橐蕭蕭兩袖寒(탁탁소소양수한). 뚜벅뚜벅 돌아오는데 씨잉 불어오는 바람에 두 소매가 차네.
寫取一枝淸瘦竹(사취일지청수죽), 맑은 야윈 대나무 가지 하나 얻어 글을 짓고선,
秋風江上作漁竿(추풍강상작어간). 가을 바람이는 강위에서 드리울 고기낚는 낚싯대 만드네.
라고 하여, 그가 관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나무로 그림을 그리고, 낚싯대를 만들어 세월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가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올 때는 3마리의 당나귀만이 남았을 정도로 청렴했다고 한다. 한 마리에는 자신이 타고, 한 마리는 서적을 싣고, 한 마리는 시동을 태웠다고 하니 2절에서 빈털터리(兩袖寒)로 고향에 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가 낚시를 좋아했는지는 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길이 없지만, 분명 대나무그림을 그리는 여가에 분명 낚시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자유롭고 여유로운 어부의 생활을 동경했다면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그림과 낚시를 병행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대나무 가지 하나 얻어 글을 짓고선(그림을 그리고 제화시를 짓는다는 의미)’, 그 대나무로 낚싯대를 만든다는 그의 말을 사실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대나무가 그림용이든 낚시용이든 그는 이미 그림의 대가가 되었고, 대나무그림은 많은 중국인의 사랑을 받으니, 그가 고통받는 백성을 동정하고 사랑하였으며, 자신의 생활과 그림창작에 성실하게 임한 노력의 댓가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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