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雲門에서 華岳까지

醉月 2010. 10. 7. 08:50
산으로 들어서며 산은 우리 선조들이 기대 살아 온 언덕이다. 그 기슭을 훑어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소를 몰아 그 골짜기를 일궜다. 산줄기를 뒤져 땔감을 묶었으며 등성이를 넘어 이웃마을로 나들이했다. 자연스레 산에는 그 생활사가 배이고 고개마다에는 숱한 사연이 쌓였다.

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산줄기 사이 물길은 바로 산의 일부이자 그와 동일체였다. 산이 없으면 골이 있을 수 없고, 물이 없으면 산이 저렇게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산이 물이요 물이 곧 산이다. 선사(禪師)들은 예로부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일깨웠으나, 그 또한 둘의 분별을 가르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합쳐 함께 선조들 삶의 일부가 되고 바탕이 된 산과 물은, 사람들의 생활권을 가르고 혼인권역을 구획 지었다. 큰 산줄기는 그 양편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방언을 쓰게 만들고 노래까지 서로 다른 걸 부르게 했다. 고지도(古地圖)가 도시들은 조그맣게 그리면서 산과 물을 부각시켜 주목한 연유가 짐작될 듯하다.

산줄기 물줄기가 저렇게 중요한 것임을 우리 선조들은 진작 알았다. 신라시대부터 그랬고 고려 때는 더 했다. 700년도 더 전에 씌어진 ‘파한집’(破閑集)에서 이인로(李仁老)는 벌써 “지리산의 산맥은 백두산에서 시작된다”고 썼다. 백두대간(白頭大幹)적 인식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 산수(山水) 인식의 틀은 현대 들면서 뭉개졌다. 일제(日帝) 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산줄기를 내팽개치고 그 밑에 깔려 있을 지질(地質)과 광맥구조로 관심을 옮겨갔다. 땅 위의 산줄기가 아니라 땅 밑 흐름을 주제로 이 땅의 ‘산맥’ 그림을 그렸다. 그 ‘산맥’은 광복 이후에도 학교를 통해 우리 뇌리에 요지부동하게 심어졌다.

거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마저 엄청나게 바뀌었다. 사통팔달 도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흔해졌다. 산줄기의 위력이 더 위축됐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생활권을 구획 짓지 못하게 됐다. 산줄기를 쳐다 볼 사람이 더더욱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두 알듯, 사람이 물질적 존재만은 결코 아니다. 정신과 영혼을 못잖게 소중히 하기에 사람이다. 산줄기에 대해서도 그랬다. 우리 산줄기는 그냥 산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일부이고 우리의 몸체임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바로 거기에 우리 수천 년 생활사가 배어 있음을 다시 깨우치기 시작했다.

그 처음이 1990년 무렵이었다. 올해로 만 20년 전이다. 전통 산줄기 인식을 되찾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백두대간이니 무슨 정맥이니 하는 주요 산줄기를 종주(縱走) 답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드디어 2005년에는 국토연구원이 옛 지리인식을 되살린 ‘새 산맥지도’를 내놨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소설 속 인디언 할아버지가 들었어도 크게 손뼉 칠 일이다. 그는 무엇이든 ‘이해’가 선행된 다음에야 사랑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우리 땅도 그럴 것이다. 큰 산줄기를 걸어 나라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구역 경계를 걸어 자신이 사는 시·군 사랑을 키우는 산꾼이 늘어난 일, 이건 근년 이 나라에 나타난 틀림없이 좋은 징조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다 풀린 건 아니었다. 그건 여전히 조짐이기만 할 뿐, 현장은 더 심각한 상황 속으로 멈춤 없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전통 지리인식의 부활이 늦어져 그 발길 손길이 채 미치기 전에, 산줄기에 배어 온 우리 생활사가 순식간에 풍화(風化)돼 버릴 위기가 깊어지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그 땅의 이름들과 사연과 생활사를 전승해 줄 산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 산을 지키고 살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미 진작 도시로 옮겨갔다. 남은 사람들은 연로해졌다.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전승할 다음 세대는 이제 태어나지 않는다. 산줄기에 쌓여 온 우리의 생활사는 이래서 공중으로 흩날리고 땅속으로 묻혀들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물론 그곳 삶의 흔적들에 대한 보존 노력이 전혀 없는 바는 아니다. 전설과 민담이 채집되고 일부 지명이 ‘마을지’라는 책으로 정리된다. 산과 재 이름 또한 ‘국토지리정보원’이 만드는 국가 공식 지도를 통해 전승되기도 한다. 동네사람이 줄어드는 대신 멀리서 찾아오는 낯선 등산객들이 그곳 지명을 전파하는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명색이 국가가 만드는 지도마저 엉터리 지명을 써넣어 두기 일쑤다. 등산객들은 본의 아니게 그 잘못된 이름을 퍼뜨리는 악역을 맡는다. 마을지들은 산줄기 지도를 그릴 줄 몰라 가리키려는 게 어느 것인지 제대로 지목해 내지 못한다. 거기다 널리 유통되지 못하니 더 무력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산줄기에 얽힌 우리의 생활사를 제대로 들어 둘 기회가 자꾸 줄어든다. 지금 당장 서두르지 않으면 그 귀중한 자료들이 영원히 소멸돼 버릴 수 있다.

시리즈 ‘雲門(운문)서 華岳(화악)까지’는, 그 산줄기를 밟아 먼저 그것에 대한 ‘이해’를 키우고, 나아가서는 거기 배어 있는 삶의 흔적들을 기록해 두려는 기획이다. 매일신문의 2005년 연간 연재물 ‘八公山河’(팔공산하)와 취지를 같이한다. 그때는 팔공산이 그려내는 대구 북동부, 영천 서부, 군위 남부, 칠곡 등의 지형과 거기 배인 생활사가 관심사였다.

이번 대상은 경북 남부 구간 낙동정맥과 거기서 갈라져 나가는 비슬기맥 일대다. 시리즈 제목상의 ‘운문’은 낙동정맥 경북 구간 최남단 가지산에서 이어지는 운문산(雲門山)이다. ‘화악’은 비슬기맥의 끝자락에 솟은 밀양-청도 갈림선의 화악산(華岳山)이다.

하지만 일을 짊어지고 산으로 들어서기는 늘 두렵다. 자유로 등산배낭 메고 나설 때는 맞닥뜨릴 리 없는 무거움이다. 산은 인간이 훤히 들여다보기에 너무 넓은 터전인 탓이다. 거기 기대어 온 사람살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켜켜이 쌓인 그 삶의 나이테가 도무지 짐작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인 탓이다.

실제로 산에서는 여러 날을 쉼 없이 걷고도 거두는 바 없이 헛돌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회의가 특히 칼날같이 심장을 콱콱 베어 내린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자동차 세상, 도로 세상에 산줄기·재 이야기가 당키나 할까…. 5년 전 ‘팔공산하’를 취재할 때도 그랬다.

그 신산함을 다시 부둥켜안고 또 길을 나선다. 날이 차고 산길이 외롭지만 어떻든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비록 건지는 게 적더라도 한번 속 시원히 걸어 보기라도 하자는 심사다. 특정 누굴 위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고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는 일이며 우리 후손을 위한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산들을 읽어 두고 이야기 들어 놓는 일은 이 땅의 ‘매일신문’이 앞으로도 해 나갈 과제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결코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산천에 사는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만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누구보다 산 밑에 사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동참해 줘야 가능하다. 그곳과 인연 맺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줘야 이룰 수 있다. 그러리라 믿고 일년간 이어질 짧지 않은 길을 나선다.

 

왜 이 산줄기인가 대구 앞산은 백두산과 연결돼 있을까, 끊어진 별개일까? 비슬산은 팔공산과 이어져 있나 떨어져 있나? 청도 운문산에서 출발해 산줄기만 계속 타면 전북 진안의 마이산까지 갈 수 있다?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터무니없게 들릴 수 있는 퀴즈다. 하지만 그 답에 산줄기 철학의 요체가 스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로 답할 줄 모르고는 산줄기를 살피러 나서봐야 허사라는 말이다.

산줄기가 연결됐다는 것은 물론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엇이 산줄기를 끊을까? 물, 물줄기, 물길이다. 쭉 이어져 가던 산줄기가 계곡을 만나 끝나버리면, 그래서 그 산줄기를 타고 걷던 사람이 물길로 내려서지 않을 수 없다면, 그게 바로 산줄기가 끊긴 것이다. 산줄기는 물을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물도 산줄기를 넘을 수 없다. 물길 또한 산줄기에 의해 끊기는 것이다.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발문은 ‘山自分水嶺’(산자분수령)이란 단 한 문장으로 그 이치를 압축해 놨다. 수계(水系), 즉 물이 흐르는 계통을 나누는 게 산줄기라는 말이다. 물은 산을 나누고, 산은 물을 나누는 것이다.

그럼 산은 서로 끊어졌다는 말인가 붙었다는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는 이어진 곳도 있고 끊어진 곳도 있는데?

그렇다. 우리가 보는 산과 산은 이어진 것도 있고 떨어진 것도 있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 하나, 그것은 섬에 있거나 혼자 섬이 돼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산이 인접 다른 산 하나와 꼭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둘 사이로는 물길이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그 연결망을 통해 전국의 산이 하나로 이어진다. 감자 줄기를 뽑아 올리면 많은 씨알들이 가느다란 줄로 연결돼 함께 들려 올라오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참 묘한 일이다. 이 이치는 18세기 관찬(官撰) 지리학자 여암 신경준이 ‘산수고’(山水考)라는 저술에서 극명히 설명해 놨다.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 하나로 합하는 게 물이다.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뉘는 게 산이다. 천하의 형태는 산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어져 있는 것은 우리나라 산 끼리만도 아니다. 우리 모든 산은 백두산을 통해 다시 중국의 산으로 이어져 간다. 백두산이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백두대간’이란 게 설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 있을 터이다. 우리는 산줄기에 까막눈이지만, 선조들은 옛날에 이미 그것까지 알았다.

그럼, 전국의 그 수많은 산들은 대체 어떤 체계 아래 서로 이어져 있을까? 산림청이 2년 전 지도에 이름이 나타나는 산을 조사했더니 남한에 있는 것만도 무려 4천440개나 됐다는데.

아마 감자 씨알들이 달릴 때 그러하듯, 먼저 가장 큰 줄기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갈라져 가는 두 번째 중요한 2차산줄기가 있을 터이며, 그 이하에도 그렇게 분기돼 가는 순차가 있을 것이다.

선조들은 산줄기들이 그처럼 갈라져 나가는 양상을 족보로 정리했다. 그게 ‘산경표’(山經表)다. 이것을 실제 관계에 따라 그림으로 그려나간 건 ‘산경도’(山經圖)다. 산줄기 그림이란 뜻이다.

거기서 우리 중추 산줄기로 파악된 게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백두산에서 두류산(지리산)까지 이어 달리는 큰 산줄기다. 거기서 갈라져 나가 바다에까지 이어달리는 2차산줄기는 ‘정맥’(正脈)으로 분류했다.

정맥이라는 울타리가 생기면 그것에 에워싸여 역시 바다에까지 이어가는 큰 물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같이 형성된 물길의 권역을 해당 강의 ‘유역’(流域)이라 한다. 이런 강 중 남한에 있는 게 흔히 말하는 ‘4대강’이다.

정맥이 그러하듯 이들 강 역시 백두대간에서 발원한다. 그러니 4대강을 에워싼 산줄기 중 핵심은 말할 필요 없이 백두대간이다. 그리고 흐르는 물길 양편에 정맥들이 늘어서서 울타리가 돼 준다. 그 정맥들의 이름은 강의 명칭에다 방위를 더해 조합된다. 한강 남쪽 것은 ‘한남정맥’, 북편 것은 ‘한북정맥’이다.

서쪽으로 가는 한강과 달리 낙동강은 남해로 흐른다. 그 유역 모양은 삼각형에 가깝다. 백두대간이 그 서편 빗변이다. 그래서 이 강의 외곽이 되는 정맥으로는 동편 빗변인 ‘낙동정맥’(洛東正脈)과 남편 밑변인 ‘낙남정맥’(洛南正脈)이 존재하게 된다.

선조들의 산줄기 단계 구분은 여기까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더 낮은 단계의 구분도 꼭 필요하다. 그런 차 2004년에 ‘신산경표’라는 주목할 노작이 나왔다. 1대 25,000 지도에 이름이 실린 모든 산을 연결시켰다는 현대판 산경표다. 거기서 ‘지맥’이란 명칭이 곳곳에 부여됐다. 지금 널리 유통되는 정맥의 하위 개념이다.

그러나 정맥 이하 단계에 대해서는 아직 합의되고 정리된 구분법이 없다. 어떤 사람은 ‘분맥’이란 용어를 쓰고, 사람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한자를 빌려 ‘기맥’이란 개념을 구사하기도 한다.

‘운문서 화악까지’는 낙동강 유역 경북 땅을 보는 얼개로 정맥 아래에 ‘기맥’이란 단계를 설정키로 했다. 흔히 쓰는 ‘岐脈’이 아니라 특별히 쓰는 ‘基脈’, 지형결정에 기본 되는 산줄기라는 말이다.

그보다 더 작은 물길을 경계 짓는 산줄기는 ‘지맥’(支脈), 그냥 골짜기나 하나 만드는 정도의 것은 ‘지릉’(支稜)으로 세분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산줄기 순차는 대간-정맥-기맥-지맥-지릉의 5등급이 될 터이다.

경북 땅에는 기맥을 최소 3개 설정할 수 있다. ‘수도기맥’ ‘팔공기맥’ ‘비슬기맥’ 등이 그것이다. 수도기맥은 백두대간의 초점산 구간에서 뻗어 나와 김천의 수도산에 이른 뒤 가야산 및 금오산으로 나눠 달리며 고령-성주-김천-구미 등등의 지형을 결정하는 산줄기다. 황강과 감천, 경남과 경북이 그로써 갈린다.

팔공기맥은 낙동정맥의 포항 죽장 지점에서 분파해 팔공산까지 달린다. 낙동강이 동서(東西)로 흐르는 구간에서 그 남쪽 분수령 겸 금호강 북편 분수령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 북편에 청송-군위-칠곡, 남편엔 죽장(포항)-영천-경산-대구 등이 분포한다.

비슬기맥은 낙동정맥의 경주-영천-청도 접합점 사룡산(四龍山)서 출발해 비슬산까지 이어간다. 금호강 남편 분수령과 밀양강의 서북편 분수령 기능을 함께 수행한다. 그 북에는 영천-경산-대구가 자리하고, 남에는 밀양강 상류 하천들(동창천-청도천)이 흐르며 그 물가에 청도가 있다.

하지만 비슬기맥은 밀양강 상류 하천들의 분수령 역할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한다. 사룡산-비슬산 사이만 비슬기맥이라 구분키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머지 일은 다른 보조 산줄기가 대행해 줘야 한다. 비슬산서 남으로 굽은 뒤 수봉산을 거쳐 천왕산에 이르고, 거기서는 동으로 방향을 바꿔 화악산-철마산으로 달리는 산줄기가 그것이다.

비슬기맥은 같은 이유로 금호강 남편 울타리 역할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한다. 이 역할은 비슬산서 출발해 청룡산-앞산(대구)-미군부대-영남대병원-심인고-소화성당-두류타워-반고개-애락원-이현공단-와룡산-궁산으로 이어가 강창교에서 생명을 다하는 산줄기가 맡는다. 이 산줄기로 인해 대구 시가지조차 두 개의 유역(수계)으로 나뉜다. 신천-달서천 유역과 대명천 유역이다.

정맥이나 기맥의 역할을 대행하는 이런 보조 산줄기는 ‘분맥’(分脈)으로 분류키로 했다. 어느 정맥의 분맥, 어느 기맥의 분맥… 하는 식이 될 것이다. 분신 역할을 하는 산줄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살핀 두 분맥 중 앞의 것은 ‘화악분맥’, 뒤의 것은 ‘청룡분맥’이라 불러 두면 될 듯싶다.

비슬기맥에서는 이들 분맥 외에 다른 여러 분맥과 지맥들도 갈라져 나와 대구-경산-영천-청도-창녕-밀양 등의 지형을 결정한다. 이들 산줄기에 의지한 인구가 무려 300만 명을 넘는다. 이 땅으로 봐서는 백두대간보다 더 중요하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이 시리즈가 이쪽 산줄기들을 주제로 삼는 이유다.

그리고 이제 퀴즈에 답할 시간. 비슬산과 팔공산은 금호강에 의해 갈라져 있지만, 각각 비슬기맥과 팔공기맥을 타고는 낙동정맥으로 가서 연결된다. 운문산서 낙동정맥으로 이어 걷다가 태백 구간에서 백두대간으로 갈아 탄 뒤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남덕유산을 지난 즈음 호남정맥으로 바꿔 걸으면 마이산에 이른다.

 

정맥 들머리 풍경 우리가 먼저 따라 걸을 산줄기는 낙동정맥이다. 강원도 태백 지점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평면거리 350여㎞ 입체(등락)거리 400여㎞를 달리는 산줄기다.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 동편 울타리 능선 끝 ‘몰운대’(沒雲臺)라는 명승지가 종점이다.

분기점은 태백시 중심부 정북에 자리한 매봉산 1,145m봉. 소백산-태백산은 물론이고 함백산-은대봉-금대봉까지 다 지나 북상한 다음에 자리했다. 발전용 풍차들이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그 산 정상 천의봉(1,303m)을 지나 조금 내려선 곳, 고랭지 배추밭으로 개간돼 봉우린지 뭔지 느낌이 안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 봉우리에 빗물이 떨어져 서쪽으로 흐르면 한강, 동북으로 구르면 삼척 오십천, 동남으로 내리면 낙동강 물이 된다. 거기가 세 물길의 갈림점이란 말이고, 그래서 붙은 이름이 ‘삼수령’(三水嶺)이다. 명실상부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것이다.

현장에서는 더 아래 ‘피재’라는 태백 시내 구간 고개에 삼수령 표적비가 세워져 있다. 또 낙동강 발원지로는 ‘황지’(潢池), 한강 발원지로는 그 너머의 ‘검룡소’(劍龍沼)가 지목된다. 그러나 그 모두는 어디까지나 상징물들일 뿐이다.

낙동정맥은 1,145m봉에서 갈라져서 ‘분수령목장’을 통과하며 내려선다. 그리고는 소위 ‘작은피재’를 경계로 해서 백두대간과 결별한 뒤 ‘구봉산’으로 솟아나 본격 낙동 능선으로 출발한다.

취재기자가 끼였던 ‘대구마루금산악회’ 종주팀은 이 정맥을 22개 구간으로 나눠 걸었다. 보통 한 번에 7, 8시간씩 도합 22일에 걸쳐 답사한 것이다. 그 중 강원도 영역이 약 1.7구간, 경남-부산 영역이 5.1구간 정도고, 나머지 15.2구간이 경북이었다. 낙동정맥의 70%가 경북 땅에 있다는 얘기다.

이 시리즈가 살필 경북 최남단 부분은 그 중 3개 구간이다. 시점(始點)은 종주꾼들이 흔히 ‘아화고개’라 부르는, 영천-경주 사이 구 국도에 있는 재다. 정맥 흐름으로 보자면 영천 만불산을 거쳐 내려선 지점. 낙동은 이 고개를 지난 뒤 사룡산으로 다시 솟고 단석산을 거친 뒤 1,000m대 높이를 회복한다. 이름 하여 ‘영남알프스’ 구간. 그 첫 산이 고헌산이며 피크가 가지산이다.

‘아화고개’는 매봉산에서 출발한 낙동정맥이 거기까지 오는 동안 가장 낮게 떨어진 곳이다. 높이래야 겨우 해발 100여m. 그런데도 이 고개는 당당히 물길을 갈라 붙인다. 그 서편은 금호강으로 가는 ‘북안천’, 동편은 흔히 ‘서천내’라 불리는 경주시내 구간 형산강으로 합류해 가는 ‘대천’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도 응당 그 고개로써 경주-영천을 가르는 분계점으로 삼았다. 중요한 건 높이가 아니라 의미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개 이름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 서편에는 영천 북안면 고지리(庫旨里), 동편에는 경주 서면 아화리가 있지만 어느 쪽도 ‘아화고개’라는 이름에 고개를 쉬 끄덕이지 않았다. 산꾼들의 명칭에 문제 소지가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대신 고지리 할아버지는 그걸 ‘시모골재’라고 일렀고, 아화리 쪽에선 ‘지경고개’로 부른다 했다. 시모골은 아화에 있는 골짜기, ‘지경’(地境)은 경계선에 있는 고지리 마을 이름이었다. 영천과 경주에서 각자 재 넘어 도달할 상대편 지명을 고개이름에 끌어다 쓴 셈이다. 이번 취재서는 곳곳에서 비슷한 현상이 발견됐다. 그런 중에 고지리 할아버지는 그걸 ‘도둑골재’라고도 부른다 했다. 큰 아화시장에 가 소를 팔고 넘어오다가 그런 일을 겪곤 했다는 얘기였다.

하루빨리 고개 이름이 정리됐으면 좋겠다. 행정구역 경계선에는 흔히 ‘지경마을’이라는 게 있고 ‘지경고개’라는 것도 있으니, 이곳도 아예 ‘지경재’ 정도로 하면 어떨까 싶다. 경주-영천 양쪽이 합의해 큰 안내판 하나 세우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다.

그 고개에서 낙동정맥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걸으면 사룡산(四龍山)으로 올라선다. 대구권 지형을 형성하는 비슬기맥이 갈라져 나가는 매우 의미 있는 곳. 용 네 마리와 관련된 전설이 있기도 하고, 산봉우리가 넷이어서 사룡산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용은 풍수지리학에서 산줄기를 이르니 그거나 이거나 비슷한 말이다.

사룡산 네 봉우리 모습은 ‘지경재’ 일대에서 잘 확인된다. 하지만 그쯤에서 바라다보이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으로는 오봉산, 서로는 구룡산이 좌우 날개같이 나란히 펼쳐진다. 낙동정맥에선 사룡산을 지난 뒤 오봉산이 갈라져 나가고, 비슬기맥에선 사룡산을 지난 뒤 구룡산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대구서 경주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보자면, 경주터널 직전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봉우리 4개 솟은 산이 사룡산(최고봉 686m)이다. 만약 서행하면 그쯤서는 그 왼편으로 이어져 있는 봉우리 다섯 개의 오봉산(최고봉 633m)도 살필 수 있다. 주의 깊은 여행자라면 거기 도달하기에 앞서 사룡산 오른편으로 다소 멀리 벌려 선 구룡산(최고봉 675m)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사룡산은 워낙 중요한 산이라 다음 회(回)에 한 번 더 다루고 나중 비슬기맥 차례서도 또 한 번 살필 예정이다. 그렇지만 노정(路程)상 지금 아니고는 살펴 둘 기회 얻기가 어려운 일도 있는 법. 우리 고전 시가문학 거두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고향이 바로 이 즈음이라는 것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노계(1561∼1642)는 우리가 잘 아는 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의 시인이다. 아까 본 지경재서 출발해 사룡산으로 오르는 낙동정맥 기슭 마을인 영천 북안면 도천리서 태어났다고 했다.

32세 때 임진왜란이 터지자 수군으로 종군하기도 했으나, 40세 이후에는 고향에 은거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태평사·누항사 등 가사 9편과 시조 67편을 지어 우리 문학사에 우뚝 섰다.

아까처럼 고속도로를 달린다면 경주터널 직전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대봉지공’(大峯紙工)이라는 공장 지나 들어가는 작은 골 안에 그를 기리는 ‘도계(道溪)서원’이 있다. 1984년 3월에 세웠다는 서원 앞 ‘노계시비’(蘆溪詩碑)에 새겨진 것도 조홍시가였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 유자 아니라도 품음 즉도 하다마는 / 품어 가 반길 이 없을 새 / 글로 설워 하노라'. 노계는 분명 사룡산이 낳은 대시인일 터이다.

 

대구권 분기점 사룡산은 지경재(아화고개)서 바로 보이지만 오르는 데 3시간이나 걸린다. 산 걸음이 시속 2㎞ 정도니 대강 6㎞쯤 되나 싶다.

그 노정(路程)에서 왼편(동편)으로는 오봉산을 거쳐 내려서는 산줄기가 줄곧 바라다보인다. 정맥이 사룡산 지나 단석산을 향해 가면서 동쪽으로 갈라 보낸 지맥이다.

그 능선과 취재팀이 걷는 정맥(지경재∼사룡산) 사이에는 경주시 서면의 한 골짜기가 형성돼 있다. 그곳 사람들이 흔히 ‘샘촌’이라 부르는 천촌리(泉村里)가 산에 가장 붙었고, 다음이 서오리(棲梧里), 골 출구 밖엔 면소재지인 아화리(阿火里)가 자리했다.

반면 같은 노정에서 오른편(서편)으로는 구룡산(675m)서 북으로 출발한 산줄기가 뚜렷하다. 비슬기맥서 그쪽으로 뻗은 첫 지맥이랄 수 있는 그 산줄기는 영천 대창면과 북안면을 가른다.

취재팀이 오르는 낙동정맥 구간과 그 산줄기 사이엔 매우 넓은 골짜기가 만들어져 많은 마을들이 퍼져 있다. 산 쪽에서부터 상리 당리 명주리 신대리 등등의 순으로 낮아져 가고, 그 좌우로도 도유리 효리 도천리 등등 여러 마을이 분포한다. 거기서는 일대 지형의 핵심인 사룡산-구룡산과 그 사이 비슬기맥 상의 ‘오재’ ‘수암재’ 등 잿마루가 선명히 짚인다.

그 마을들 중에서도 중심은 명주리(明珠里) 같았다. 다양한 가게가 갖춰지는 등 면소재지 마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거기 있는 중요 기구들은 ‘명주’가 아니라 ‘원곡’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노인회관 경우 명주리 회관 바로 앞에 원곡회관이 따로 있기까지 했다.

도대체 ‘원곡’이 뭘까? 간혹 한 골짜기 안에 들어있는 몇몇 마을들이 ‘곡(谷)4리’니 ‘6동’이니 하며 한 묶음이 돼 연대감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도 그런 경우일까?

명주리 노인회관서 들은 얘기는 조금 뜻밖이었다. 이곳이 본래는 독립된 ‘원곡면’(原谷面)이었다는 것이다. 총 12개(‘경북마을지’에는 13개) 마을이 거기 속했다. 그러다 일제(日帝)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북안면으로 합쳐졌다. 통폐합 100년이 가까워 오지만 ‘원곡’ 사람들의 분별감은 여전하다는 얘기다. 얼마 전까지도 당제를 함께 지내는 등 공동행사도 숱하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원곡서는 사룡산을 ‘전방산’(戰防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후삼국시대 혼란과 전쟁 전설이 깔려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산이 사룡산이라 불리게 된 연유로 꼽히는 ‘네 마리 용’은 ‘지경재’서 거의 다 올라 정상에 가까워졌을 때 솟아오르는 600m 전후 네 봉우리다. 정맥은 지경재를 출발한 후에도 오랫동안 100m대 높이를 유지하다가 막바지에 급등해 597m봉-640m봉-659m봉-686m봉을 잇따라 올려 세우는 것이다.

서로 간에 모두 5분여 거리로 밀집해 있는 이 봉우리들 중 두 번째 것(640m봉)의 남서 사면(斜面)은 절벽이고, 그 밑으로 고속철이 뚫고 들어간다. 부산성 터의 밑을 지나 고속도 건천나들목 남쪽 지점까지 6㎞ 이상 이어지는 ‘당리터널’ 시작점이라 했다. 천촌리 골 안(숙재 북편)에는 그 터널용 시설이라는 길고 경사 심한 또 다른 터널이 뚫려있기도 했다.

세 번째 659m봉은 비슬기맥이 갈라져 가는 봉우리다. 낙동정맥은 이 봉우리만 통과할 뿐 사룡산 정상봉(頂上峰)은 비켜간다. 이 분기봉(分岐峰)에는 정상 표석(標石) 하나와 금속 이정표 하나가 서 있었다. 돌에는 ‘비슬지맥 분기점 / 656m / 2007년 5월 21일 청도산악회’라고 새겨졌고, 이정표에는 ‘밀양기맥 분기점 / 2007. 3. 18. / 부산 같이하는 산악회’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대구생활권을 중심에 둬 금호강 수계를 따라 ‘비슬기맥’이란 개념을 정립하려는 데 반해, 부산-경남 사람들은 밀양과 밀양강을 더 중시해 ‘밀양기맥’으로 설정하려는 모양이다. 정상석이 그 높이를 656m라고 널리 알리고 있으나, 1:5000 지형도는 분명 658.9m 즉 659m로 못 박고 있음 또한 명시해 둬야겠다.

지난달 다시 찾은 분기봉에서는 그 건너 오봉산 ‘주사암’ 스피커 염불 소리가 아주 가깝게 왕왕거렸다. 오봉산과 사룡산이 지호지간(指呼之間)임을 실감케 하는 풍경이었다.

그 다음 닿는 사룡산 정상봉(686m)은 앞서도 봤듯 낙동정맥이 아니라 비슬기맥에 솟은 것이다. 말하자면 기맥 첫 봉우리다. 거기서는 영천(북안)-경주(산내)-청도(운문) 세 지역이 나뉜다. 정맥-기맥은 분기봉서 갈리지만, 3개 시·군은 여기서 나뉘는 것이다. 지리지(地理誌) 시각서 보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상봉의 시야는 그야말로 제로다. 숲에 막혀 사방으로 깜깜하다. 오직 꼭짓점에 있는 묘가 뚜렷하고, 수북이 달린 등산객들 시그널만이 그 중요성을 대변할 뿐이다. 리본들 대부분은 낙동정맥 종주꾼들이 기념 삼아 잠깐 둘렀다 가며 붙인 것일 테다.

거기도 표석 2개와 금속이정표 1개가 섰다. 다듬어진 오석(烏石)에는 ‘2006. 11. 18. 북안 구룡산악회’, 자연석에는 ‘2007. 5. 21. 청도산악회’ 등이 적혀 있다. 낙동정맥에 비슬기맥까지 보태져 더 활기차진 최근의 산줄기 종주 바람을 증언하는 듯한 날짜들이다.

그 정상봉 높이는 1:5000 지도에 685.5m로 돼 있다. 그런데도 상당수 등산지도들은 683m로 안내한다.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초행자들은 분기봉을 지나 정상봉을 향해 걷던 중 눈 아래로 펼쳐진 놀라운 풍경에 놀라워하기 일쑤다. 그 높은 산꼭대기에 마을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름 하여 ‘시루미기’. 두 봉우리 사이 낮아진 재에서는 바로 마을 안길이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 마을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널찍한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분기봉에서 남쪽으로 낙동정맥이 이어 가는 한편, 불과 5분 거리로 붙어 있는 정상봉에서도 비슷한 방향으로 큰 산줄기가 하나 내려 뻗어 그 사이에 골이 형성되는 것이다.

정상봉에서 내리닫는 그 산줄기는 밀양강 최상류인 동창천 가의 장륙산(686m)까지 이어달리며 경주와 청도를 갈라붙이는 중요한 지맥이다. 낮은 재조차 높이가 400여m에 달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고, 동창천을 만나 주행을 끝내는 순간까지 대체로 600m대를 지켜 나간다. 시작하는 사룡산이나 끝맺는 장륙산이나 공히 높이가 686m인 것도 이채롭다. 그 서편 운문면이나 동편 산내면의 산세가 저다지 당당한 것도 다 이런 산줄기 덕분이다. 이 산줄기엔 ‘장륙능선’이라 이름 붙여 놔 보자.

시루미기는 그 아래 도로에서조차 거기 마을이 있는 줄 눈치 채기 어렵다. 마을과 도로 사이 낙동정맥 상에 높이 603m 봉우리가 하나 솟아 마을을 가린 결과다. 신비감을 더하는 요소다.

시루미기 출신 어르신(65) 등에 따르면 1940년대까지는 그 마을에 민가가 없었다. 그 어른 가족이 700여 평의 다랑논을 개간해 들어간 게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집은 한국전쟁이 터진 후 불태워졌다. 북한군의 1950년 9월 공세로 인접 영천 북안에서 임포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빨치산이 거점 삼아 밀려오는 등 일대가 격전지가 된 때문이다. 사룡산 북편 지경재 및 고지리 인접 마을이 임포리다.

시루미기는 1970년 전후 한 신앙인이 들어가 생식마을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면모가 달라져, 오늘날 40여 호 100여 명의 마을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곳 생식은 일반인이 따라하기에 쉽잖은, 이곳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하는 수준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세속과 달리 약초 캐고 벌 치고 해 자급자족하며 자연과 하나 돼 사는 듯했다. 만났던 주민들은 차분하고 친절했다.

‘시루미기’라는 마을 이름 중 ‘미기’는 재나 잘록이를 의미하는 ‘목’으로 짐작된다. 거기에 발음하기 쉽게 ‘이’를 붙여 ‘목이’라 하다가 ‘미기’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나 ‘시루미기’를 현지인들이 ‘히리미기’라고도 하니 ‘시루’ 혹은 ‘히리’가 뭔지 모호하다.

산꼭대기에 펑퍼짐하게 퍼진 마을 자리가 떡시루 모습이어서 시루미기란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이 수련할 때 내리 친 칼에 맞아 그 마을 안 바위가 시루떡 모양으로 잘려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었다.

시루미기 마을의 물은 ‘직현천’(直峴川)이 돼 내려간다. 시루미기가 속한 경주 산내면 우라리(牛羅里)와 그 하류 내칠리(內七里) 등의 자연마을들이 거기 펼쳐진다. ‘직현’은 내칠리 자연마을 중 하나인 ‘곧은터’의 한자 표기다. 그 물길은 산내면 신원리에서 동창천에 합류한다.

 

어느 게 '富山'일까 659m 높이의 사룡산 분기봉을 지난 낙동정맥은 시루미기 마을 직후 해발 475m쯤 되는 ‘숙재’로 180m나 떨어진다. 그리고는 다시 250m가량 치솟으며 716m봉-731m봉-711m봉 능선으로 올라섰다가, 639m재로 꺾임으로써 일단 한 산덩이를 구획한다.

그 구간에서 무엇보다 답사객을 당황케 하는 것은 ‘숙재’다. 그 이름이 뭘 의미하는지 짚이지 않아서다. 떡 해 먹는 쑥이 많이 나서 혹시 ‘쑥재’인지, 아니면 땔감인 숯과 관련돼 ‘숯재’라는 말인지… 궁리에 궁리가 꼬리를 문다. 민간 지도들이 더러 ‘숲재’라 표기하는 것도 그런 당혹감의 결과일 테다.

하나 현지 주민들은 모두에 고개를 흔들었다. 경주 서면 천촌리와 산내면 우라리 등 재 양편을 다 다녀 봐도 틀림없이 ‘숙재’라 했다. 그러면서도 “예부터 내려온 이름일 뿐 유래는 모른다”고 했다. 기껏 들을 수 있은 것은 “고지대인 우라리서 낮은 아화 쪽으로 숙진다고 숙재라 했을지 모른다”는 짐작 정도였다.

어쨌든 그 이름은 숙재로 확인됐다. 한자로는 ‘淑嶺’(숙령)이라 쓴다고 했다. 그 재에서 천촌리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는 골 이름도 ‘숙골’이었다. 거기 있는 저수지는 ‘숙곡지’라 했다. 재 이름 혼란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경주시청이 속히 나서서 표지판을 만들어 세워야겠다.

숙재 연결로는 잘 나 있다. 북편 천촌리 쪽 길은 가파르거나 길지 않고 골 안 마을들은 안정감이 있다. 남편 우라리 쪽으로도 길을 따라 마을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그 아래 내칠리~신원리 사이 도로가 부실해 지금 한창 확장 공사 중이다.

정맥은 숙재에서 716m봉-731m봉-711m봉 능선을 향해 다시 250m가량 치솟는다고 했지만, 실제 716m봉에 걸어 오르는 데는 30분이면 족하다. 거기로 나 있는 임도를 따라 주위를 구경해 가며 올라도 40분이면 된다. 길만 잘 잡으면 716m봉서 갈라져 나간 산줄기 상의 오봉산 ‘주사암’까지도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이렇게 오르는 716m봉-731m봉-711m봉 능선은 사적25호 ‘부산성’(富山城) 성벽 구간이다. 716m봉을 시점(始點)으로 해 동으로 뻗어나간 ‘오봉산’ 지릉(支稜) 위로 성벽이 쌓였다. 남으로 731m봉을 거쳐 711m봉까지 이어가는 정맥 상에도 그렇다. 마지막 711m봉서 굽어 오봉산 쪽으로 가는 산줄기에는 나머지가 축성돼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부산성 성내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산덩이로 구성돼 있다. 731m봉을 중심으로 한 정맥 구간 덩어리와, 최고 높이가 633m인 오봉산 덩어리가 그것이다. 둘은 높이에서 무려 100m나 차이 날 뿐 아니라 그 사이가 해발 520m까지 낮아진 재에 의해 갈려 있기도 하다. 재에는 그 서편 경주 서면 천촌리로 연결되는 ‘산성고개’가 있을 정도다.

그 중 731m봉을 우라리 상리마을 어르신은 ‘기통배기’라 불렀다. 예로부터 거기 깃발을 꽂아 그런 이름이 전해진다고 했다. 요즘말로 하면 ‘깃대봉’쯤 되는 셈이다.

거기서 제법 떨어져 있는 ‘오봉산’은, 추측건대 봉우리가 다섯이라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 그런 모습이 닭의 벼슬을 닮았다고 해서 별칭이 ‘닭벼슬산’이다. 꼭대기에 주암(朱巖)이라는 눈길 끄는 암괴가 있어 ‘주사산’이라고도 불리게 됐다. 주암에 얽힌 붉은 모래 전설에 바탕해 그 아래 절 이름도 ‘주사암’(朱砂菴)이다. 말하자면 오봉산이 닭벼슬산이고 주사산이다.

이렇게 사안이 명료해 보이는데도 현장서는 혼란이 심하다. 우선 ‘경주일요산악회’서 1992년 세웠다는 정상석(頂上石)은 오봉산 최고점 높이를 685m로 적어 놓고 있다. 무려 52m나 틀렸다.

그 633m 오봉산이 주사산임이 확실해 보이건만 국가 공식지도는 전혀 다른 걸 주사산이라고 짚는다. 깃대봉과 오봉산 연결 능선에 541m봉과 563m봉이 있는바, 1대 5,000 지형도는 앞의 것, 1대 25,000지형도는 뒤 것을 ‘주사산’이라 지목하는 것이다.

오봉산 덩어리는 작고 낮다. 그 비탈에는 산성 시설이 들어설 기슭이 거의 없다. 반면 깃대봉 덩어리는 높고 클 뿐 아니라 넓은 고원을 품고 있다. 성내 면적의 대부분이 그 경사면에 속한다. 그래서 자연스레 드는 생각이, 옛날 ‘부산’이라 부른 게 바로 이 산덩이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 품에 저렇게 넓고 평평한 터전을 품고 있으니 ‘부유한 산’에 제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현지 부산성 안내판도 ‘부산의 높이는 729.5m’라고 알리고 있다. 일대에 그 높이에 가까운 것이라곤 731m 깃대봉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산’의 높이를 제대로 설명하던 현지 안내판이 어느 순간 갑자기 혼란에 빠져 ‘부산은 주사산 오봉산 닭벼슬산이라고도 한다’고 설명해 버린다. 결국엔 둘을 구분 못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는 얘기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낙동정맥은 639m재로 추락해 ‘부산(富山) 덩어리’를 구획 지은 뒤, 다시 120여m 솟아 760m봉으로 높아진다. 우라리 상리마을에서는 이걸 ‘병풍(골)산’이라 지칭했다. 지나온 지경재서 앞으로 갈 당고개 사이 하룻길 산줄기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정맥 흐름이 그걸 정점으로 북서는 해발 100m(지경재), 남동은 315m(당고개)까지 낮아져 별개의 산덩이로 구분될 정도다.

--<석두산과 석두능선> (부속박스)

낙동정맥은 병풍산에서 당고개를 향해 동편으로 굽어 가기 전, 서편으로 ‘석두능선’이라 부를 만한 큰 산줄기를 하나 남겨놓는다. 우라리 마을 등이 분포하는 ‘직현천계곡’의 동편 울타리 격 능선이다. 사룡산서 뻗어 내려 직현천의 서편 울타리가 되는 ‘장륙능선’과 짝을 이루는 셈이다.

그 능선에 일대 제일 높은 775m봉이 솟았다. 낙동정맥 본줄기에선 병풍산(760m)이 높으나 지맥까지 합치면 이게 최고다. 인근서 갈라져 출발하는 비슬기맥에서도 비슬산 본체 외엔 이보다 높은 봉우리가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775m봉과 인접 봉우리들 이름은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다. 일대가 잊혀진 지형이 된 것이다. 그냥 둬 버리면 얼마 안 가 영영 지명 없는 산줄기가 될지 모른다. 거기는 그래서 좋을 지역이 아니다.

마을 어르신은 775m봉을 ‘석두산’이라 했다. 서편 상리마을(우라리)서도 그랬고 동편 장사마을(감산리)서도 그랬다. 그 산 중턱에는 ‘석두암’도 있다. 일대에서 벌어졌던 신라-백제 간 쟁투와 관련된 전설을 담고 있다는 절이다.

숙재(475m), 부산(富山)능선(716m-731m-711m봉), 639m재, 병풍산(760m), 674m재, 석두산(775m)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우라리 상리마을 동편을 빙 둘러싼 둥그런 반원형이다. 760m봉에 병풍산이란 이름이 붙는 연원이 이것 아닐까 싶다.

711m봉과 병풍산 사이 639m재는 ‘달래고개’, 병풍산과 석두산 사이 674m재는 ‘장사고개’ 혹은 ‘우라고개’라 했다. 우라리서 달래고개를 넘어가면 채석장을 지나 건천읍 송선리 달래창이라는 마을에 닿고, 장사고개 혹은 우라고개는 산내면 감산리 장사마을과 우라리 상리마을을 잇는다.

이 산줄기가 석두산 구간을 지나면 서편 우라리 지경마을과 동편 감산리 장사마을을 잇는 임도가 나타나고, 그 다음에 748m봉이 솟았다. 그걸 우라리서는 ‘만근봉’, 산 너머 장사마을에서는 ‘만병산’ 혹은 ‘만명산’이라 불렀다. ‘만병산’ 정도로 통일하면 될 듯하다.

앞서 상리마을을 반원형으로 둘러싼 산줄기가 있었듯, 병풍산-674m재-석두산-임도-만병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그 너머 장사마을을 반원처럼 감싼다. 그래서 장사마을은 매우 포근하게 느껴진다. 마을에 이르기까지 10리나 된다는 골에 전원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선 이유도 그것일 터이다.

하지만 골 밖에서는 거기 그렇게 깊고 좋은 골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하기 힘들다. 골 입구가 있는 둥 없는 둥 표가 없기 때문이다. 옛날이야기 속 무릉도원 입구가 아마 여기 같았을 듯하다.

 

선덕여왕과 여근곡 경부고속도를 타고 대구서 부산으로 가자면 ‘경주터널’을 통과한다. 그럴 때 대부분은 자신이 지금 어떤 산줄기를 지나는지 모른다. 그냥 차에 얹혀 갈 뿐이다. 그래서는 여행이 무미하다.

  그 터널 위 산줄기는 진행 방향 오른쪽(서편)으로 솟아 ‘오봉산’(五峯山)을 이룬다. 그 위에는 ‘부산성’(富山城)이 있다. 산의 동쪽 비탈, 즉 진행 방향 바로 전면(남쪽)은 삼국유사의 현장 ‘여근곡’(女根谷)이다. 무심히 지나치기 아까운 곳이다.

  터널 위 산줄기를 타고 부산성에 오른다면 동편으로 아화서 건천에 이르는 넓은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거길 거치지 않고는 경주로 들어갈 수 없는 땅, 명실상부한 옛 서라벌의 관문이다. 서편에 있는 대구·영천·경산·청도 등등에서 동편의 경주로 갈 때 거쳐야 하는 첫 땅이 바로 거기인 것이다.

  저 땅이 이렇게 목이 되는 것도 낙동정맥 때문이다. 그 동·서 지역 사이에 낙동정맥이 버티고 서서 둘을 갈라붙이는 것이다. 이런 지세에서는 어떤 군사도 그 너머 땅을 쉽게 넘보기 어렵다. 큰 부대가 넘어가려면 엄청난 양의 물자 이동이 수반돼야 하지만 산줄기가 그걸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낙동정맥은 그야말로 신라(경주)의 천혜 방어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연 방어벽도 잠시 몸을 낮춰 통행을 허용하는 구간이 있으니, ‘당고개’ ‘지경재’가 대표적이다. 이것만 넘으면 경주로 갈 수 있고, 경주로 가려면 그걸 넘지 않을 수 없는 고개라는 말이다. 그걸 넘어 처음 거치는 곳이 아화-건천이다.

  ‘당고개’는 부산(富山)을 거친 정맥이 경주 건천과 산내를 가르며 내려서는 곳이다. 높이래야 불과 315m쯤. 병풍산 이후 해발 460m 정도의 ‘독구불재’로 떨어졌다가 651m봉으로 마지막 솟은 후 200여m 추락하는 것이다. 때문에 낙동정맥도 이 재를 경계로 북편의 부산-병풍산 덩어리와 남쪽 단석산 덩어리로 나뉜다.

  당고개는, 남북 간은 그렇게 단절시키지만 동서 간에는 반대로 연결성을 높인다. 동편의 건천과 서편의 산내가 아주 완만한 비탈을 통해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이다. 거길 통하면 청도-창녕-합천권과 경주가 쉽게 하나 된다. 창녕까지 거리가 80여㎞밖에 안 됨을 알리고 서 있는 이정표가 그 증거다. 신라가 청도로 서진해 이서국을 먹고 가야권 초입 창녕으로 진격한 통로도 이것이었을 터다.

  이렇게 중요한 지형인데도 고개 이름조차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당고개’라고도 하고 ‘땅고개’라고도 했다. 그런 착종은 현장에서 더 여실해, 현지 국립공원 표지는 ‘당고개’라 하는데 인접 소공원 및 휴게소에는 ‘땅고개’라 씌어 있다. 재 서편 고개 밑 산내면 감산1리 감존마을 어르신도 “당고개인지 땅고개인지 주민들도 헛갈린다”고 했다.

  하지만 재 동편 첫 마을인 건천읍 송선2리 우중골마을 어르신은 “그 너머 산내 쪽에 옛날 당집이 있었다”며 “당고개란 이름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산내면 지명유래지도 당집이 있었다는 증언을 싣고 있다. 당고개가 옳은 이름임을 암시하는 간접 증거들이다. 산내면 지명 유래지는 그러면서, 이 고개를 ‘우중골티’ 혹은 ‘우중곡치’(雨中谷峙)라고도 불렀다고 병기하고 있다.

  앞서 살핀 바 있는 지경재는 이 당고개보다 더 낮다. 그 높이는 기껏 해발 100여m다. 합천을 통해 신라 땅을 넘봤던 백제나 후백제가 대구를 거쳐 접근하기 가장 좋던 길목이다. 팔공산 기슭 대구 해안동 일대서 벌어졌을 ‘동수대전’(桐藪大戰·927년)을 통해 고려군을 초토화시켰던 후백제 견훤 군대가 서라벌을 유린하러 왕래했던 통로 또한 이것일 터이다.

  한국전쟁 초기이던 1950년 9월에는 북한군도 지경재를 주요 통로로 주목했다. 아군의 팔공기맥 최후 저지선을 뚫고 영천으로 침공해 다음 진격 목표를 경주로 택한 뒤의 일이다. 국운을 건 사투가 지경재 인접 임포리 일대서 펼쳐지고 재 남쪽 사룡산 지구가 치열한 전장이 된 연유가 이것이었다.

  부산성 일대는 저렇게 중요한 지경재와 당고개 모두를 한꺼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관망대다. 저 아래 세상 감시하기에 좋고, 그곳으로 정찰·유격하러 다니기에 최상의 거점이라는 말이다.

  거기다 성안은 매우 넓어 많은 군사를 둘 수 있다. 성의 실제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내 지구에 사유지임을 알리며 서 있는 경고판에는 그 넓이가 100만평이라고 씌어 있을 정도다. 성의 둘레를 놓고 현지 안내문은 7.5㎞, 다른 자료는 약 5㎞(4,977m)라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성내엔 20여 호 되는 마을과 초등학교 분교가 있었을 정도라 했다. 1970년대 철거할 때 명목은 목장 조성이었지만 지금 그 넓은 경사지는 밭으로 변해 있다. 그 아래 송선리 어르신들은 사적지가 개인 소유로 넘어간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산성은 문무왕 3년이던 서기 663년 정월에 착공, 3년 만에 완공했다. 신라 도성의 안전 강화가 목적이었을 것이라 했다. 역사를 봐도 수긍할만한 관측이다.

  이 성을 쌓기 전인 서기 600년대는 신라와 백제-고구려 간 알력이 피크에 달한 쟁투기였다. 신라는 그에 앞선 24대 진흥왕(540~576, 이하 재위 기준) 때 급팽창했다. 562년에 대가야를 복속한 게 예다. 새로 넓힌 창녕·서울 등의 땅에다 비를 세운 것도 그때다. 쟁투가 심해진 건 그런 팽창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제 알력이 극심했던 것은 신라 26대 진평왕, 27대 선덕여왕 때였다. 진흥왕의 장손으로서 53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던 진평왕(579~632)은 고구려가 두려워 수나라를 불러들였다. 그의 딸인 선덕여왕(632~647) 때는 당나라에 열심히 따라 붙어야 했다. 여왕의 생질인 29대 태종무열왕(654~661)이 당나라 힘을 빌려 서기 660년 백제를 소멸시키고야 이런 상황은 해소됐다.

  부산성 현지 안내판에는 선덕여왕 때(636년) 백제군이 오봉산 여근곡까지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해 성을 쌓았다고 써 놨다. 하지만 부산성은 백제 멸망 이후에 착공하고 여근곡 사건 30년 뒤에야 완공했으니 어쩐지 좀 거리감이 생긴다.

  그때의 전설로 유명해진 ‘여근곡’은 성벽 바로 아래 있는 크잖은 골이다. 그 주위로는 산줄기가 둥그렇게 둘러쌌다. 오봉산 정상 동편 성벽 구간 지릉의 566m봉으로부터 내려 온 산줄기가 둘로 나뉜 뒤 원같이 둘러싸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두 산줄기의 복판으로도 두둑하게 언덕이 생겨 오른다. 지난 회 게재한 ‘산경도5’에 그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곳 마을 어르신은 이 산줄기를 ‘소산’, 그 사이 골을 여근곡이라 부른다고 일러줬다. ‘소산’이란 이름은, 그 외곽에 또 하나의 둥그런 산줄기 흐름이 형성되는 바 그 보다 작은 것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인가 싶었다. 여근곡 골짜기에서는 샘이 솟아 예부터 ‘소산지’라 한다 했다. 지금은 그 아래 저수지가 그 이름으로 불리지만 근세에 만든 것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렇지만 지도들이 가리키는 소산은 다른 것이다. 1대5,000 지형도는 여근곡 서편의 또 다른 산줄기 위 512m봉에다 그 이름을 붙여 놨다. 반면 1대25,000 지형도는 같은 산줄기의 한참 아래에 있는 185m봉을 지목했다. 혼란이 심하다.

  여근곡 아래쪽 땅 이름 표기도 검토가 필요해 보였다. 건천읍 신평리에 속하는 그 일대 들과 마을을 현지 어르신은 ‘섭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1대5,000 지형도에는 ‘샘들’로 나타난다.

  섭들서는 닭벼슬 같은 오봉산의 다섯 봉우리 모습도 쉽게 살펴진다. 둘이 그만큼 가깝다는 뜻이다. 마을과 정상 사이에 근래 등산로가 개설돼, 주사암까지도 얼마 안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여근곡은 오후에는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산 아래서 볼 때 역광(逆光)이 되기 때문이다.

  워낙 저명한 곳이다 보니 부산성엔 선덕여왕의 여근곡 이야기 외에 또 다른 설화들도 얽혀 있다. ‘덜자구야 다자구야’ 이야기도 그 하나다. 다시 침공해 온 백제군이 할머니 첩자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 아들 이름이라 사칭케 하고는 덜자구 다자구를 부르며 신라군이 다 자는지 덜 자는지 신호토록 했다는 게 그 내용이다. 그러나 그 시점은 무열왕 즉위년인 서기 654년으로, 그 또한 성이 착공되기 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는 소백산 죽령(竹嶺) 산신 신화에도 똑같이 나타나는 등 일반적인 설화일 뿐이다.

  부산성에는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枝朗歌) 설화도 걸려 있다. 죽지랑은 김유신 장군의 참모로 많은 전투에 참가했고 훗날 수상 직에까지 오른 왕족이다. 노래를 지은 ‘득오’란 사람은 죽지랑이 화랑일 때 낭도였다가 문득 부산성 군인으로 징발되는 곡절을 겪은 사람이다. 노래의 내용은 그런 여러 경우에서 자신을 걱정해주고 이끌어주던 은인을 그리워하는 것이라 한다. 이 에피소드는 성이 완성되고 난 후인 효소왕 때 일이라니 연대로는 일단 맞아 들어가는 셈이다.

 

단석산서 고헌산 당고개로 숙였다가 다시 솟구치는 낙동정맥은 단석산(827m)-태종고개(560m)-백운산(893m)-소호령(665m)-고헌산(1,035m) 구간을 단숨에 내달린다. 평면 기준으로 20㎞를 넘는 거리. ‘단숨에’라는 얘기는 그 사이 오르내림이 크지 않다는 말이다.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포장도로에 의해 잘리지도 않는다.

그 들머리 단석산(斷石山)은, 부산 방향 경부고속도를 탈 때 건천을 지나면 남쪽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산이다. 그 정상에서의 조망이 대단하고, 특히 경주 쪽으로 일망무제다. 경주대와 충효동 아파트단지가 나타나면서 그 사이의 ‘선도산’이 눈길을 확 끈다. 그 너머로 경주 시가지가 훤히 드러나고 보문단지까지 짚인다. 더 압권은 저 멀리 떠오르는 포항 공단 일대다.

정상에서 북서편 기슭의 ‘신선사’(神仙寺)로 가는 산줄기를 타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오봉산-부산(富山·깃대봉)-병풍산-석두산-만병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한 손에 잡힐 듯 한다. 앞서 우리가 애써 살폈던 바로 그 능선이다.

삼국 시기 신라가 제사를 올릴 다섯 산(오악·五岳) 중 중악(中岳)으로 단석산을 꼽았던 연유가 짐작될 듯하다. 불상·보살상 10채를 새겼다는 신선사 마애석불군(국보 199호) 등 대단한 문화재와 김유신 장군 전설이 곳곳에 남겨진 게 이래서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단석산은 경주뿐 아니라 인접 다른 지역에서까지 상당히 중시했다. 상당히 떨어져 있는 청도의 옛 읍지조차 그 땅 북편 담장 격인 비슬기맥이 이 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끌어다 붙인 것이 예다. 그 동편 골짜기에 고속철 ‘신경주역’이 들어설 참이니, 중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지도 모른다.

단석산 덩어리 본체는 최고봉(827m)에서 나뉘는 3개의 큰 지릉들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낙동정맥은 그 본체를 비켜간다. 최고봉에서 서남쪽으로 800여m 떨어져 있는 689m 분기봉을 통과할 뿐이다. 본체와 이 정맥 산줄기는 큰 골짜기로 파여 갈라져 있다. 북편이 건천읍 송선리 우중골, 남편이 내남면 비지리 절골이다. 거기서부터는 행정구역도 경주 건천읍에서 내남면으로 바뀌는 것이다. 분기봉서 정상까지는 20여분을 더 가야 한다.

높이 315m가량의 당고개에서 출발해 분기봉을 오르노라면, 산줄기는 먼저 한꺼번에 300m 이상 쳐 올라 최고점이 661m인 큰 산덩이로 올라선다. 그러는 중 처음 30여분 오르면 왼편(동편)으로 거대한 단석산 본체 덩어리가 위용을 드러내고, 돌아보면 지나온 부산성의 고랭지 채소밭이 훤하다.

그 산덩이에서 길은 거꾸로 100여m 떨어져 내렸다가 다시 솟아 분기봉에 이른다. 당고개서 2.6㎞라고 안내돼 있으며, 1시간 정도면 이를 수 있다. 그 높이를 695m로 표시한 경우가 보이나 그건 잘못이다.

낙동정맥은 분기봉을 지난 후 다시 100m가량 폭락했다가 60m가량 솟은 뒤 점차 하강한다. 이 구간 산줄기를 마치 정원이나 골프장 같이 가꿔 놓은 게 ‘OK수련원’으로 알려진 시설이다. 분기봉서 2㎞라 안내돼 있으나 산길답잖게 30여분이면 도달할 수 있다. 그곳에선 정맥 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은 폐쇄된 교회건물이 먼저 다가와 답사객을 놀라게도 한다.

단석산은 이 구간을 끝으로 위력을 다한다. 거길 거친 뒤 정맥은 고도를 더 낮춰, 대체로 550±50m 정도의 완만한 높이를 한참 동안 유지한다.

그렇게 4㎞쯤 진행하면 단석산~고헌산 구간에서 가장 낮은 ‘상목골재’에 이른다. 장승들이 떼를 지어 답사객을 맞는 그 지점 바로 아래에 ‘상목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재 일대에서는 3만평 땅에 주택 300채의 친환경마을을 만들려는 노력이 벌써 몇 년째 진행 중이다. 그 사업 대표는 “작년 가을 경북도청에 의해 ‘녹색마을’로 지정됐고 이곳을 지나 고속철 경주역과 연결하는 지방도 건설도 확정됐다”며, “1차 30가구분 건설이 올해 결실될 것”이라고 했다.

거길 지나 또 10리 정도 진행하면 행정구역이 경주에서 울주(울산시)로 바뀐다. 산줄기 위세는 그 변경선에 가까워질 즈음 다시 살아난다. 불쑥 700m봉을 선보이면서 높아지기 시작, 울주 구간으로 깊이 들어서서는 893m 높이의 ‘백운산’을 올려 세운다.

그러나 백운산은 별로 재미없다. 특히 마루금 위로 쳐진 방화선을 산악자동차들이 마구 올라 다녀 산을 다 망가뜨려 놨다. 백운산 정상에 나붙은 높이 표지들도 황당하다. 한 표석엔 901m, 다른 표석엔 907m로 잘못 돼 있다. 1대 25,000 지형도가 거기에 수준점(水準點)을 설정해 893m라고 명시했는데도 이런다.

1대 5,000 지형도에선 그 높이가 까딱 891.6m로 보일 소지가 있다. 하나 그건 최고봉 북사면에 있는 암괴군의 표지로 읽는 게 타당해 보인다. 이 지형도는 더 북편 845m봉에도 백운산이라는 명찰을 중복해 달아 놔 또 혼란을 부르기도 한다. 잘못된 것이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그 845m봉 역시 주목할 봉우리임에는 틀림없다. 바로 ‘호미(虎尾)지맥’이 갈라져 나가는 분기봉이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달려 천마산(621m)~치술령(767m)~토함산(745m)~추령(감포고개)을 거쳐 호미곶에 닿는 게 호미지맥이다. 그 지맥 북편은 포항으로 가는 형산강, 남편은 울산으로 가는 태화강 유역이다. 두 강이 이 845m봉에서 시발된다는 뜻이다. 단석산 정상에서 포항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것도 이렇게 형산강 물길이 틔어 통로가 돼 주는 덕분일 터이다.

하지만 그 일대는 형산강·태화강 외에 밀양강 원류인 동창천의 최상류 구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845m봉을 산꾼들은 ‘삼강봉’(三江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앞서 본 바 있는 ‘삼수령’(三水嶺)을 연상시킨다. 낙동정맥 분기점인 태백 매봉산의 그 1,145m봉에서는 한강-낙동강-삼척오십천 물길이 나뉘어졌었다.

낙동정맥은 삼강봉을 지나고 백운산을 거친 뒤 소호령으로 낮아졌다가 고헌산(1,035m)으로 치솟는다. 울진~봉화를 넘어 다니는 ‘답운치’라는 고개 남쪽의 통고산(1,067m) 이후 낙동정맥에 솟는 최고봉이다. 태백서 출발한 정맥이 얼마 안 가 잃어버리는 1,000m 높이를 참 오랜만에 회복해 보이는 첫 산이기도 하다.

이 고헌산은 저 고명한 ‘영남알프스’의 박두를 알리는 팡파르다. 숲 없이 맨몸을 훤히 드러낸 그 모습부터가 그 산군의 전형이다. 그 모습이 하도 품위 있어 보고 봐도 다시 또 보고 싶다.

그 아래 ‘소호령’에 차를 세우고 접근하면 고헌산 첫 봉우리는 30분 만에 오를 수 있다. 그건 재(665m)가 높아서일 뿐 산이 낮은 탓은 아니다. 그 정점에서는 울산이 마치 앞마당인 양 내려다보인다. 이곳이 태화강 시원지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된다.

하지만 흔한 인식과 달리 고헌산 최고봉은 울산만의 땅이 아니다. 물론 소호령서 올라 처음 도달하는 1,034m봉, 조금 더 가서 정상표석을 머리에 이고 있는 1,032m봉 등은 울주 영역이다. 그러나 최고봉은 거기서 낮은 재로 한참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는 마지막 1,035m봉이다. 그건 경주와 울주의 경계에 솟아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아니 그 마지막 봉우리가 최고봉인 줄조차 아는 이가 거의 없다. 흔히 접하는 자료들 대부분이 그 높이를 1,020m로 낮춰 표기하는 탓이다.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보니 답사객의 인식도도 떨어진다. 거기서는 곧장 재로 내려서도록 길이 이어져, 아예 하산 길목으로나 여기는 사람까지 있다.

그러나 1,035m봉은 분명 고헌산 최고봉이다. 그러니 그걸 경계 삼는 경주가 고헌산을 ‘경주의 산’이라 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그럴 경우 고헌산은 경주에서 제일 높은 산이 될 터이다. 정상석은 마땅히 1,035m봉에 세워져야 한다. 그건 경주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경주 영역은 1,035m봉뿐 아니라 고헌산 남서쪽 비탈까지 넘어가 있다. 이 때문에 그곳에 비가 내리면 경주 물이면서도 형산강이 아니라 울산 태화강으로 흘러간다. 왜 땅을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경계 지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여기서부터 경북입네’ 하고 알리는 경북지사·경주시장 이름의 엄청나게 큰 표석이 산 너머 저쪽 비탈에 세워져 있는 모습이 무척도 어색하다. 거긴 누가 봐도 울산 땅 같은 느낌이다. 그런 표석은 산줄기 고개 마루에 버티고 서 있어야 제격인 법이다.

 

기와미기 애환사 낙동정맥은 단석산~백운산~고헌산을 무던히 지나왔지만 그 이후 구간에선 한동안 변덕이 심하다. 북에서 남으로 향하던 흐름부터가 동에서 서로 옆걸음 한다.

  등락세도 급해져 고헌산 최고 1,035m봉을 지나자마자 535m 정도의 재로 무려 500여m나 내리꽂는다. 이어 건너편 산줄기가 출발하는 720m봉으로 올랐다가 해발 500m쯤의 더 낮은 잘록이로 두 번째 내려앉는다. 숙달된 산꾼들마저 맥을 놓쳐 헤매기 일쑤인 곳이다.

  그러던 산줄기가 마지막 올라서는 곳은 895m봉이다. 거기서는 소문난 ‘문복산’(1,014m)을 거쳐 이어가며 일대 판세를 가르는 산줄기가 하나 뻗어간다. 단석산 이남의 낙동정맥과 이 산줄기를 연결하면 대체로 삼각형 땅이 구분된다. 고헌산~895m봉이 밑변, 단석산~고헌산 구간 낙동정맥 산줄기가 한 빗변, 문복산줄기가 다른 빗변이다.

  그 안에는 무려 40리나 되는 긴 골이 형성돼 있다. 거기로 흐르는 ‘범곡천’이라는 장장한 물길은 사실상 산내면 소재지 마을까지 이어진다. ‘범곡’은 ‘범골’로도 불린다는 대현리(大賢里)의 한 자연마을 이름이다. 범곡천 계곡 대부분은 그 마을로 포괄돼 있다.

  하지만 이건 크게 잡은 윤곽이고, 자세히 보면 그 골의 절반 이상에 달하는 구간은 다시 범곡천-소호천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앞서 정맥 등락 때 잠깐 올랐던 720m봉에서 출발하는 산줄기가 분계령이다. 그 모습은 골 하류서 올라가며 살피는 게 편하다.

  산내면 소재지 마을서 거슬러 오르면, 물길은 얼마 안 가 먼저 200도가량 한바퀴 휘돌아 방향을 반대로 바꾼다. 그 굽는 구간 내 건너 북편, 단석산 줄기 서편 기슭에 ‘소태’라는 마을이 자리 잡았다. 산내면 내일리(乃日里)의 한 자연마을이다.

  그곳은 다른 내일리 마을들이 자리한 두 개의 골로 들어가는 통문(通門)이다. 하나는 앞서 살핀 OK수련원이 있는 골, 다른 하나는 ‘상목골’이다. 상목골은 1914년 이전엔 낙동정맥 너머 내남면에 속했다. 둘 사이의 ‘상목골재’(460m)가 그만큼 낮아 넘어 다니기 좋다는 뜻이다.

  소태 구간 이후 물길은 ‘대현지’라는 큰 저수지를 지나면서 대현리 땅으로 들어선다. 조금 뒤 보건진료소가 있는 ‘서편(西片)마을’에 도달하는바, 거기가 범곡천과 소호천의 합류점이다.

  그 중 소호천 계곡으로 들어서면 먼저 대현리 ‘시다마을’을 지나고 ‘태종마을’에 닿는다. 소호천 계곡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그 하류는 경주 대현리, 상류는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蘇湖里)다. 태종마을 자체도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시·군으로 나뉜다.

  소호리 구간은 백운산 구간과 맞아떨어진다. 태종마을서 올라서는 태종고개와 소호리 마을 끝 소호령 사이에 솟은 게 백운산 덩어리인 것이다. 그 산 기슭을 감아 도는 임도가 두 재를 연결해 준다. 넓어서 자동차도 쉽게 다닌다.

  소호리는 4개 자연마을에 실 거주 120여 가구, 주민등록 기준 174가구 340명이 사는 넓은 권역이다. 그러나 경주 산내면 대현리와는 이웃해 살면서도, 같은 울주 상북면의 다른 마을로 가려면 낙동정맥을 넘어야 한다. 불과 20~30년 전에는 소호령 너머 울주군 두서면에 속해 있기도 했었다.

  이 불안정한 위상은 근본적으로 수계(水系) 불일치에서 초래된 느낌이 짙다. 앞서 고헌산 남사면의 경주 땅 물이 울산으로 흐른다고 했지만, 이곳 소호리는 울산 땅이면서도 물은 경주(산내)로 흐른다. 경주에 속하는 게 더 합리적일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소호천 골의 끝 고헌산은 동창천의 발원지다. 소호리 물을 원류로 한 소호천은 동창천의 본류다. 출구에서 가장 먼 지점을 하천 발원지로 잡고 거기서 출발하는 물길을 본류로 보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 조건 탓에 소호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랭지 감자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산간 벽지였다고 했다. 하나 지금은 전원주택과 펜션들로 별천지가 됐다. 물 맑고 산세 좋다면 산촌일수록 인기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결과다.

  길이에서 뒤져 동창천 본류의 자리를 뺏기긴 했으나, 규모에선 그보다 훨씬 큰 게 범곡천이다. 여름철 피서객을 기다리는 휴양시설들도 이 골에 더 많다. 특히 골 최고점에는 심심산중인데도 불구하고 불고기단지가 형성돼 있기까지 하다. 앞서 봤던 해발 500여m의 재 일대가 거기다.

  그곳을 사람들은 ‘외양말랭이’라 불렀다. 산내서도 그랬고 인접 소호리나 재 너머 울주 삽재마을서도 그랬다. 한 술 더 떠 ‘양말랭이’로 더 줄여 쓴 민간지도도 있다. ‘외양 꼭대기’란 뜻이다.

  하지만 ‘외양’이라 지칭된 것은 대현3리 네 자연마을 중 하나인 ‘와항’(瓦項)이다. ‘경북마을지’는 기와 굽는 흙이 많이 생산돼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항간의 얘기를 채록해 뒀고, 산내면 지명 유래지는 일대 지형이 기와처럼 생겨 ‘기와목’으로 불렸다는 얘기를 함께 싣고 있다. ‘기와목’의 한자 표기가 와항이다.

  둘 중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건 기와목 유래설이다. 우리네 기왓장은 평면이 아니라 둥글게 굽었다. 그래서 부드럽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와항 일대 지형이 꼭 그렇다. 널찍한 골이 그 양편 높고 긴 능선들과 둥그스름하게 어울린다. 그곳이 목(재) 부분이니 기와 와(瓦) 자에 목 항(項) 자를 붙이면 자연스레 ‘와항’이 될 터이다.

  54년 전 시집왔다는 현지 할머니에 따르면, 와항 마을은 번성기 때 30여 호나 됐다. 해발 500m를 넘는 산비탈이지만 밭은 물론 논까지 숱했다. 그러나 지금 남은 것은 겨우 8~9호. 할머니가 가리켜 보인 논자리는 거의 풀숲으로 변한 듯했다.

  도로로 주행하는 외지인들은 이제 그곳에 오래된 마을이 있는 줄조차 알아채기 힘들다. 문복산줄기 높은 곳에 붙은데다, 저 아래 길 따라 많은 유락시설들이 들어서서 빛을 가리기 때문이다. 옛 마을 윤곽이나마 유지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싶을 정도다.

  증언들을 종합하면, 이 마을에 처음 찾아온 변화 바람은 1961년 군사정부가 주도한 ‘개척귀농’이었다. 와항 마을 주변 문복산줄기 비탈 억새밭 30만 평이 그 정착지였다. 현재 불고기단지로 변해 있는 와항 마을 남쪽 고개 정점 일대를 A지구, 와항 북편 범곡천 하류 구간을 B지구 C지구 등으로 나눴다.

  거기다 방·부엌 하나씩인 함석집 50채를 지은 정부는, 서울·대구 등등에 살던 50가구를 이주시켰다. 이사는 한밤중 군부대 트럭으로 진행됐다. A·B·C지구에 각 15·20·15가구가 배정됐고, 각 가구에는 땅 6천 평씩이 무상 임대됐다.

  개척자들은 맨손에 괭이만 들고 그 황무지를 일궜다. 주 작목은 조·감자였다. 감자는 가구당 적어도 100가마 이상 수확해 주식이 됐다. 하지만 너무 살기 힘들었다. 함석지붕은 태풍만 닥치면 날아가 버렸다. 2세들 중 지금껏 머물러 사는 사람은 겨우 7~8가구뿐이다. 최초 이주자들은 대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닥친 바람은 불고기식당 단지로의 변화였다. 1970년대 이후 고랭지 채소 농사가 성행한 뒤 그 매집 상인을 염두에 두고 A지구에 한 식당이 1989년 문을 연 게 시초였다. 다른 식당들도 속속 뒤를 이었다. 일대는 이제 ‘불고기단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세 번째 변화는 지난 4~5년 전 시작했다. 전원주택 바람이다. 고헌산을 앞산 삼고 문복산은 물론 가지산까지 지척이니 휴양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을 테다. 이곳의 앞날은 분명 그 쪽에 있을 듯하다.

  이렇게 변화해 온 와항 마을에서 이름을 따 ‘외양말랭이’라 불리는 고개는 옛날부터 소문난 큰 고개였다. 대현리라는 마을의 한자 표기가 본래는 ‘큰 고개’를 뜻하는 ‘大峴里’였다는 게 그 증거다. 하지만 이 고개는 아직도 제대로 된 고유명칭을 못 얻었다. 일대 사람들이 ‘외양말랭이’라 부르고, 일부에서 ‘A지구’라 지칭하며, 산꾼들이 ‘불고기단지’라고 두루뭉술하게 가리키는 게 모두 그래서 초래된 혼란의 결과다.

  일부에선 ‘와항재’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게 맞겠다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혼란이 더 커지니 또 고민스럽다. 소호리와의 사이에 있는 535m재를 그쪽 사람들이 이미 ‘와항재’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와항마을로 넘어가는 재’라는 뜻일 터이다.

  그래서 큰 고개 이름은 ‘기와목’으로 고정시키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습이 기와를 닮았음을 간파한 옛 어른들의 혜안까지 계승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토속 발음방식을 따라 ‘기와미기’라 하면 느낌이 더 잘 살아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산내면 산내군  

지금까지 우리는 사룡산서 부산(富山), 단석산, 백운산, 고헌산, 기와미기를 거쳐 895m봉과 문복산줄기까지 한참 멀리 돌았다. 독자들 중엔 현기증이 나려는 경우까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줄기만 그렇게 복잡했을 뿐, 많은 이들에게 더 익숙한 행정구역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는 다음의 딱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 전부를 다 합쳐야 경주 산내면의 외곽 산줄기에 불과하다.”

그 외곽 중 아직 우리가 살피지 못한 것은 서편의 두 산줄기다. 사룡산서 운문호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서는 ‘장륙능선’과, 그걸 향해 895m봉서 마주 달리는 문복산줄기가 그것이다. 두 산줄기는 운문호의 북동편 끝부분에서 딱 맞물린다. 그렇게 해서 경주 산내면과 청도 운문면을 구획 짓는 것이다.

그 중 장륙능선은 오는 초여름쯤 비슬기맥을 다루기 시작할 때 공들여 살피기로 하고, 우선 문복산줄기를 답사해 보자.

문복산 이후 여럿으로 갈라져 가는 그 산줄기들 가운데 산내-운문 분계선은 895m봉~문복산(1,014m)~수리덤산(837m)~옹강산(832m)~606m봉~동경마을 사이를 무려 50여리나 이어달리는 지맥이다. ‘문복능선’이라 불러 놓는 게 좋겠다. 그 서편은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동편은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일부리(日富里)다.

그 출발점인 895m봉은 산줄기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정점에 ‘청도산악회’서 2007년 세운 ‘낙동정맥’이란 정맥길 표석이 그 징표다. 금방 오를 수 있으면서 고헌산·대현리·기와미기 등이 한눈에 바라다 보이는 곳이기도 한다.

이렇게 중요한 포인트면 당연히 이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칭되고 얘기되기 쉽다. 하지만 지금껏 그러지 못했다. 전래 명칭이 묻혀 온 것이다. 앞서 본 ‘기와미기’ 같다. 895m봉 꼭짓점에 산림청이 세워 놓은 방향표지에서 또 한번 확인되는 게 무명의 설움이다. 운문령·문복산·산내 세 방향을 안내하는 이정표 중 ‘산내’는 분명 기와미기를 가리키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이름을 모르다 보니 어물쩍 ‘산내’라 하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기와미기라는 옛 이름이 드러내졌듯, 895m봉의 전래 명칭도 이번 취재 과정서 밝혀졌다. 삼계마을 옛 어른들에 의해 ‘학대사산’이라 불리다가 ‘학대산’으로 줄여졌음이 확인된 것이다. ‘학 대사’라 불리던 스님이 이 봉우리에 와 세상을 떠났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고 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천화’(遷化) 장소로 이 산을 택했던 셈이다. 지금도 거기 스님의 묘가 있고, 옆에서는 샘이 솟는다고 했다. 학대산은 북동쪽 기와미기(와항A지구)서 올라도 되고 남서쪽 운문령서도 30분이면 족히 이를 수 있다.

문복산은 학대산서 평면거리로 3.3㎞쯤 떨어져 있다. 슬슬 경관을 감상하며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도달한다. 산길도 편안하다.

하나 정작 문제는 다른 데서 생긴다. 막상 정상부에 도달해 보면 최고점이 어딘지 헷갈린다. 거기엔 봉우리가 두 개 솟았다. 먼저 돌탑 봉우리에 닿고, 곧이어 정상석 봉우리에 도달한다. 뒤의 것이 최고점이라는 뜻이다. 등산 안내서들도 흔히 앞의 것은 해발 1,010m밖에 안 된다고 소개한다. 그런데도 돌탑봉우리가 더 높아 보인다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 우리가 의지할 판단 잣대는 역시 1대 5,000 지형도다. 그 지도에는 두 봉우리 높이가 같게 나온다. 돌탑 봉우리는 1,014.1m, 정상석 봉우리는 1,014.4m다. 사람 육감이 저다지 예민할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하는 일이다.

문복산에서는 서편으로 큰 지릉이 하나 갈라져 내려선다. 끝 부분에 신원리 삼계(三溪)마을이 분포한 산줄기다. 이걸 분계령으로 해서 그 남쪽의 ‘계살피골’과 북편의 ‘수리덤골’이 나뉜다.

그 중 수리덤골 뒷능선에 있는 게 ‘수리덤산’이다. 문복산과 40여분 거리다. 그 이름으로 부르는 쪽은 서편 삼계마을이다. 그 아래 골도 수리덤골이니 짝이 잘 맞아 보인다. 반면 그 북편 산내면 일부리서는 따로 부르는 명칭이 없다고 했다. 마을로부터 워낙 외지게 돌아져 있어 자주 지칭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국가 공식 지도는 그 봉우리 이름을 ‘서담골산’이라 적어놓고 있다. 어디서 돌출한 걸까? 누군가 ‘수리덤골산’이라고 가르쳐준 것을 지명조사원이 ‘수덤골산’으로 잘못 알아들었는가 싶다. 틀린 이름의 정상석이 아직 안 선 게 그나마 다행이다. 관계기관이 서둘러 조사해 더 왜곡되기 전에 제 이름을 고정시켜야겠다.

수리덤산이란 지명 중 ‘덤’은 옆면이 절벽이고 윗면이 평평한 지형이다. 그런 곳에선 저 아래 골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등산객들에겐 시원스런 전망대가 되고, 맹금류에겐 먹이 찾는 관측소로 좋다. 그래서 수리들이 몰려 앉으면 ‘수리덤’, 부엉이가 앉으면 ‘부엉덤’이라 불린다. 전국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지명들이다.

수리덤산을 지난 뒤에 문복능선은 서편을 향해 직각으로 굽는다. 그리고는 재로 폭락했다가 봉우리로 오르고 또 떨어졌다가 다시 솟아 암봉을 이룬다. 문복산을 음미할 좋은 전망대다. 북으로는 일부리 마을과 들이 훤하다. 암봉 위 소나무도 일품이다. 한겨울에도 바람 없고 따뜻했다. 이게 수리덤 아닐까 싶었다.

거길 거친 뒤 산줄기는 해발 449m밖에 안 되는 낮은 재로 떨어진다. 이걸 지도나 등산객들은 ‘삼계(거)리재’라 지칭한다. 그러나 삼계마을에선 ‘심원재’라 했고 재 너머 일부리 어르신도 ‘심원령’이라 불렀다. 이게 더 토착적 이름일 듯했다.

‘심원’(深源)이라는 명칭에는 현실성이 있고 역사성도 있다. 당장에 재 너머 일부리 골 끝에 있는 저수지 이름이 ‘심원지’다. 그 안 유일의 건물 이름도 ‘심원사’다. 거기다 재 남쪽 ‘수리덤골’ 안에 있던 옛 마을 이름도 ‘심원’이었다. 그 마을 터였을 듯한 매우 넓은 평지엔 지금 식당과 펜션들이 들어서 있다.

심원재는 삼계마을을 경주와 직결시켜주는 통로다. 그 재에서 경주시가지 입구까지는 13㎞밖에 안 된다고 했다. 옛 어른들도 대개 말을 타고 그리로 넘어 다녔다고 했다.

심원재에서 올라서면 ‘옹강산’(832m)이다. 수리덤산과 높이가 거의 같다. 거기서는 ‘옹강남릉’이라 불리는 산줄기 하나가 남쪽으로 내려서면서 수리덤골과 그 북편의 소진리 공간을 구분한다. 그런 뒤 서쪽으로 굽어 문명분교(초교) 뒤까지 이어 달린다. 남릉이 서릉으로 변한 모양새다.

옹강산에서는 이것 외에 북서릉도 갈라져 나가 이번엔 그 남편의 ‘소진리’와 북편의 ‘오진리’를 나눈다. 덕분에 그곳 오진리는 옹강산으로 올랐다가 그 마을 동편으로 이어가는 문복능선 구간을 한바퀴 돌아오는 환종주(丸縱走) 등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마을 앞에 널찍한 주차장과 화장실이 마련돼 버스까지 숱하게 찾는다. 하산시간엔 마을 할머니들이 농산물을 팔러 나와 장이 설 정도다.

그 북서릉을 타고 오르면 1시간 50여분 만에 옹강산에 도달한다. 옛날 홍수시대에 온 산이 다 물에 잠기고 그 꼭대기만 겨우 옹기만큼 남아 ‘옹기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는 산이다. 그걸 지나 이어 걷는 오진리 동편능선의 끝에는 옹강산 이후 문복능선서 가장 높은 606m봉이 솟았다.

이 구간 서편에 분포해 있던 큰 마을들은 모두 운문호로 수몰돼 사라졌다. ‘대천’이라 불리던 일대의 중심 마을도 마찬가지다. 문복능선 맨 끄트머리에 올라앉은 ‘동경’ 마을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거기서부터는 물이 아니라 산이 주인인 것이다. 그 산과 산줄기가 바로 운문-산내의 분계령이다.

이렇게 해서 외곽이 완성되는 산내면 공간 속 물의 출구는 오직 청도 운문호 쪽 하나뿐이다. 그 외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다. 이런 땅은 여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산내’(山內)라 한다. 그 이름으로 불리는 면(面)이 전국에 넷이나 된다. 정읍 산내면, 남원 산내면, 밀양 산내면, 경주 산내면이다.

정읍 산내면은 그 중에서 가장 덜 산내답다. 산지 면적이 77%밖에 안 된다. 산지율 최고는 92%에 이르는 지리산 속 남원 산내면이다. 연하봉-토끼봉-삼도봉 및 만복대-정령치-고리봉 구간의 백두대간을 외곽으로 삼는다. 달궁계곡·뱀사골과 실상사를 포괄했다. 열린 곳이 인월·마천 쪽 등 복수인 점만이 아쉽다.

유일 출구에다 산세까지 대단한 것은 밀양 산내면이다. 가지산~운문산~억산~구만산 등 우리가 걸을 ‘운문분맥’ 전부와, 가지산~능동산~천황산~정승봉~정각산을 잇는 영남알프스의 쟁쟁한 산줄기를 그 외곽으로 했다. 하지만 산지는 80%뿐이다. 복판이 산 없이 텅 비워진 결과다.

그에 대면 경주 산내의 산세는 약하다. 1,000m 넘는 산이라곤 고헌산·문복산뿐이다. 그러나 복판까지도 온통 산이다. 산지율이 84%다. 낮긴 해도 앞뒤 모두 산이라는 얘기다. 이게 특징이다.

경주 산내 물은 동쪽에 있는 경주(형산강)를 거쳐 동해로 가지 않는다. 그 반대로 흘러 동창천이 되고 밀양강이 됐다가 낙동강을 거쳐 남해로 간다. 그래서 운문호는 청도에 있지만 거기 채워지는 것의 절반은 경주 산내 물이다. ‘산내 물은 거꾸로 흐른다’는 말은 이래서 생겼을 거다.

청도군은 동일 수계로 편입돼 있는 경주 산내면까지 포괄해서 보다 큰 복주머니 형상을 이룬다. 군이면서도 산지 면적이 73%에 이른다. 산내면의 큰형님 같은 ‘산내군’(山內郡)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복주머니 모양으로 청도군을 빙 둘러싼 산줄기, 그것이 낙동정맥이요 그 운문분맥이요, 비슬기맥이요 그 화악분맥이다. 합쳐 ‘청도산맥’이라 불러 잘못이라 하지 못할 쟁쟁한 산줄기다.

 

봄 '자연계절은 스스로 바뀌지만,…' 근년에 기자가 주로 따라다니며 산을 배우는 산악회는 ‘대구마루금’이다. 그 모임 이한성(61) 등반대장은 이번 취재를 돕기 위해 일부러 이쪽 산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해 주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지산 큰 지릉을 한창 애써 오르고 있을 때 저 앞의 봉우리가 왁자지껄했다. 힘들인 끝에 전망 틘 높은 곳에 오르게 돼 기쁘다는 표시일 터였다. 그러자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혼잣말처럼 한말씀 하셨다. “저 사람도 아침에 돼지밥 먹은 모양이네.” 처음엔 어리둥절해 했지만 모두들 곧 뜻을 알아챘다. 숨죽인 웃음소리가 은근히 동행들 속으로 퍼져나간 게 증거였다. 산에서 소리 지르지 말라고 점잖게 핀잔 먹이는 말이었다.

표현과 대화는 이렇게 은근하고 부드러운 게 좋다. 직설적이고 격하면 여유가 없어진다. 이번 시리즈를 읽는 몇몇 등산 동료들이 건네 온 지적도 그런 쪽이었다. 팩트 중심으로 너무 팍팍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 읽기 힘들지 않겠느냐, 더 재미있고 여유 있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없느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문득 다른 산 동료들 얘기가 떠올랐다. 한 친구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기에 그가 “백두대간 한다”고 답했다. 대간을 종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산을 모르는 그 친구는 그런 상호를 쓰는 호프집 장사 한다는 말로 잘못 듣고는 놀라워했다.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었다. 친구에게 백두대간 가자고 했더니 그게 술집 가자는 이야기인 줄 알고 따라나서더라는 거다. 하지만 그는 그길로 종주대열에 끼이게 됐고 결국엔 완주까지 해냈다. 해피엔딩이니 그나마 듣기 좋다.

무박 장거리 등산팀을 태워갔다가 헤드랜턴 불빛에 놀라 떤 관광버스 기사 이야기도 있다. 새벽 3, 4시쯤 산에 붙어 오르기 시작하는 산꾼들을 내려준 후 어두워 차를 돌리지 못해 그대로 머물러 있는데 난데없이 파란 불빛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틀림없이 도깨비들이다 싶어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런 풍경을 생전 처음 봤다는 얘기였다.

산은 아직도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낯선 땅이다. 휴일에 근교산을 다녀오거나 모집산악회의 안내등반에 동참하는 경우는 늘었지만, 그것과 산줄기를 아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그러니 과객 같은 산꾼들까지 잘 이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면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하나 써야 할 것은 많은데 지면이 너무 좁다. 쓰는 사람에게도 이게 가장 큰 스트레스다.

그러나 너무 걱정만 할 일은 아니려니 믿는다. 예를 들어 “날이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산에 가느냐”는 걱정은 어머니들에게 어울리는 것이다. 반면 산꾼들은 얼어야 산이 오히려 맑게 보임을 안다. 그러니 정말 산과 우리 생활사에 애정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읽기 팍팍하다는 이유만으로 불평을 다하는 일은 없을 테다.

산꾼은 높은 데 올랐다고 희희낙락하거나 낮은 재에 떨어졌다고 낙담하지도 않는다. 오르고 내리고 다시 오르고 하는 게 등산이며, 인생 또한 그러함을 안다. 신화 속의 시지프스를 이해하는 게 산꾼이다. 이들에게는 뭐든 쉽사리 읽히는 일회용 글이 되레 이상스러울 수 있다. 10년 100년 후까지 소용될 내용이 담기지 못하게 되는 걸 더 걱정할 수도 있다.

익은 산꾼들의 걸음은 그래서 여느 사람들 것과 다르다. 후다닥 후다닥하는 법이 없다. ‘■者不立/跨者不行’(기자불립/과자불행)이라는 ‘도덕경’ 구절을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그 법을 체득한다. 욕심이 앞서서 까치발을 해 봐야 높이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곤 몇 분이 채 못 되고, 빨리 가겠노라고 째질 만큼 가랑이를 벌려서는 한 걸음도 채 걷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 깨닫는다.

그들은 오직 격에 맞게 걷는 것만이 옳은 길임을 잘 안다. 힘들다 할 게 아니라 보폭 좁힐 줄 모르는 자신을 탓해야 함을 안다. 산줄기 오르다 숨이 차는 건 능선 가파른 탓이 아니라 속도 욕심에 휘둘린 자신 탓임을 안다. 오직 지키는 일은 단 하나, 결코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는 것이다. 이 또한 길고 힘든 인생길을 가는 가장 기본 되는 방법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난겨울은 혹독했다. 근래 만난 적 없는 강추위였다. 필자 또한 그걸 통과해 오기가 간단치 않았다. 하나, 그런 중에도 더러는 기쁨에 들뜰 수밖에 없었던 사안들이 있었다. ‘청도산악회’도 그 하나였다. 그 단체가 중요한 산봉우리 곳곳에 세워둔 ‘정상석’(頂上石)이 그랬다.

정상석은 산악회들이 어쩌다 의욕을 내거나 기념사업으로 세우는 표지다. 하나 청도산악회는 그런 류가 아니다. 세운 돌이 너무 많다. 사룡산서 벌써 두 개를 만났고, 학대산과 문복산 정상에서도 그랬다. 가지산 정상석도 청도산악회서 세운 것이고, 운문산에는 그런 게 둘이나 서 있다. 억산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앞으로 비슬기맥을 걷게 되면 더 많이 만나게 될 터이다.

이렇게 한 산악회가 집중적으로 정상석을 세운 경우는 전국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유별난 크기에서도 비교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뚜렷한 목표의식과 장기적인 계획이 없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필연코 뜻이 있지 않고는 이뤄낼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주목하고 있을 때 초기 리더를 맡아 헌신했던 반재돈(潘在敦·77) 명예회장과 연락이 닿았다. 3년 전 미국으로 옮겨 가 사는 분이라 했다. 어쩌다 한번 귀국하는 일정과 요행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번 취재 과정에 여러 가지로 복이 많다고 느끼고 있는바, 이 만남도 그 중 하나였다.

증언과 자료들에 따르면 청도산악회가 만들어진 것은 1982년 5월 21일이었다. 주도자는 당시 김상대 경찰서장이었다. 대단한 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군민들이 그걸 알지 못해 다른 지방에 명성을 뺏기고 있으니 청도 산 되찾기 운동을 벌이자는 게 취지였다.

하지만 김 서장은 산악회 기초만 놓은 단계에서 딴 곳으로 전근 갔다. 영입된 반 회장이 모든 걸 알아서 기획하고 추진해야 했다. 그러나 개업의이던 그는 산과 인연이 없었고 등산 다닐 시간도 없었다. 모인 산악회원 54명도 대개 산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가진 자산은 오직 애향심이었다.

반 회장은 청도 주요 산에 ▷정상 표석 세우기 ▷등산로 만들기 ▷등산안내도 만들어 알리기 등을 기본 사업으로 채택했다. 일대 주요 산들에 저렇게 많은 정상석이 세워진 것은 그 덕분이었다. 10대 산봉에 일 년 사이 표석을 거의 다 세웠다.

알고 보니 다른 지방들보다 시기적으로 늦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서 정상석 세우기를 선점한 경우가 더 많았다. 같은 산을 두고 서로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엔 자기네 호칭을 그 때문에 뺏겼다고 한탄하는 일까지 생겼다. 운문산이 예다. 산 넘어 밀양 땅에서 부르던 ‘함화산’이란 이름이 그로써 사라졌다는 거다. 운문산 서릉 초입에 그 애달픔을 기록한 표석이 서 있다.

이뿐만 아니라 청도산악회는 매 5년 단위 창립기념 기간 때마다 훼손된 표석을 다시 세우거나 보수키로 주기를 정했다. 표석 중에 5월 21일이라는 날짜 표시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운문산은 세 번이나 정상석을 바꿔 세웠고, 다른 산도 대개 두 번은 그랬다.

그렇게 열렬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애향산악회가 어느덧 전문산악회로 성장했다. 회원들의 등산 권역은 청도는 물론 전국을 넘어 해외 산으로까지 확장됐다. 반 회장은 무려 15년 7개월간 회장직을 맡아 그 과정을 이끌었다. 발자취는 ‘청도산악회 15년사’라는 세련된 단행본으로 정리됐다.

반 회장의 열정은 지난 2월 1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비슬기맥의 소위 ‘경산 육동 구간’(발백산~곱돌이재) 답사 때였다. 반 회장은 그걸 제대로 못 걸어봐 미국 가 살면서도 늘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 등산장비까지 챙겨 왔다는 것이다. 후배 회원들에겐 ‘로드메저’라는 기구를 들고 동행케 했다. 구간별 거리까지 실측하겠다는 거였다. 취재기자조차 곡선계(曲線計)로 도상 거리나 잴 뿐 엄두 내지 못하는 일이다. 세상에 이런 산악회는 다시 없지 않을까 싶었다.

현장에서 반 회장은 산 흐름을 어찌나 세세히 읽는지 기록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불투명한 구간의 산 흐름을 구분해 내기 위해 물 흐름부터 짚는 모습에선 보기 드문 전문성이 엿보였다. 그렇게 7시간이나 걷고도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우리 나이로 78세 되신 어르신 일이라곤 정말 믿기 힘들었다. 저런 열정이 있으니 그 많은 정상석 세우기와 등산로 내기를 모두 회원들 봉사로 해낼 수 있었을 터였다.

비슬산에 정상석을 세워놨더니 그게 대구 땅이라고 해서 누군가가 부숴버린 이야기, 운문산 정상에 멋진 글씨를 새겨야겠다고 해서 유명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씨 글씨를 받았던 이야기, 몇t씩 되는 정상석을 올리기 위해 육군이나 경찰 헬기 등을 고심해 섭외하던 일 등등 일화도 끝이 없었다.

그렇다. 자연 계절은 제 힘으로 바뀌지만 인간세상의 봄은 결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산에도 누군가가 일깨워야 봄이 온다. 청도산악회가 시범해 보인 일이다. 우리도 이제 다시 우리 지방사·생활사의 봄을 찾아 일어설 시간이다. 이번 한철 집중적으로 걸을 대상은 가지산~운문산~호거산~억산~구만산~육화산 구간이다.

 

운문분맥 가는 길 문복능선 분기점인 학대산(895m)을 지난 뒤 낙동정맥은 ‘운문재’(雲門嶺)로 낮아진다. 경북 청도군과 울산 울주군을 잇는 고개다. 해발 630여m. 북서로 흘러 운문호에 들어가는 ‘신원천’의 상징적 시발점이자, 가지산(1,241m) 덩어리의 출발선이다.

  가지산의 운문분맥 상 종점은 운문산과의 경계인 ‘아랫재’다. 운문령~아랫재 사이 가지산 전체 밑바닥 거리는 8.5㎞ 정도고, 운문령~정상봉이 4.8㎞, 정상봉~아랫재가 3.7㎞쯤 된다. 이 구간 산줄기는 큰 변덕 없이 꾸준히 오르거나 꾸준히 내려선다.

  운문령서 그렇게 오르기 시작한 산줄기는 10분 만에 첫 봉우리인 760m봉을 맺는다. 남쪽 석남사 골짜기의 동편 울타리 격 산줄기가 갈라져 내리는 분기봉이다. 절 주차장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나 가지산온천 등산길이 이 봉우리를 지나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꼭짓점에 헬기장이 있고 그 옆 경사면에 산불초소가 있다.

  그런데도 운문령서 오르는 등산객은 이 봉우리를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등산로로 이용하는 임도가 그 봉우리를 우회한 뒤 10여m 지난 잘록이 지점에 가 닿는 탓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잘록이와 760m봉의 높이 차가 매우 미미해 따로 봉우리가 있는 줄 알기 힘들게 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운문령서 오르다가 10여분 만에 처음으로 이정표를 만나게 되거든, 그게 760m봉 직후의 잘록이인 줄 알면 좋다. 거기서야 처음으로 석남사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산 정상과 낙동정맥 흐름이 솟구쳐 보이는 것은 이 지형적 위상 덕분이다.

  그 지점서 등산객들은 대개 둘러가는 임도를 버리고 마루금 길로 바로 치솟는다. 하지만 얼마 뒤 다시 임도를 만나서는 결국 산길을 포기하고 그길로 임도를 따라가기 예사다. 그러나 그래서는 가지산을 제대로 걷는다고 할 수 없다. 이 지점서도 한번 더 임도를 버리고 산길로 올라서야 한다. 그게 낙동정맥 흐름이다. 거기로 걸어야 중요한 지형들을 빼먹지 않고 살필 수 있다.

  이렇게 오르면 얼마 안 가 1,058m봉에 닿는다. ‘운문산휴양림’이 들어있는 북사면(北斜面) 골짜기의 외곽을 구획하는 산줄기가 갈라져 내리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1,058m봉을 주목하는 더 큰 이유는 딴 데 있다. 거기가 가지산 최고고도 주능선의 시점(始點)이라는 게 그것이다. 그 뒤로는 크게 오르는 구간도 없고 낙차 크게 폭락하는 경우도 없다. 그저 조금씩 오르락내리락 할 뿐이다.

  그런데도 1,058m봉을 오르는 데는 760m봉 잘록이에서 불과 25분, 운문령서 쳐도 35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그러고도 벌써 가지산 최고 능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많은 등산객을 운문령으로 몰리게 하는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1,058m봉 정상은 유감스럽게도 산길 바깥에 있다. 등산로가 그 옆구리를 스쳐 가 버린다. 그러고는 10분 뒤 ‘귀바위’에 이른다. 가지산 명소 중 하나이자, 석남사 계곡의 정북(正北) 지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기서 절은 안 보인다. 계곡 속에 또 자그마한 산줄기가 하나 흘러 둘 사이를 가르기 때문이다.

  가지산에는 독특하게 ‘귀바위’라 불리는 지형들이 있다. 귀를 닮은 암괴라는 뜻이다. 그런 게 여럿이다보니 지역명을 붙여 ‘청도귀바위’니 뭐니 해 구분하기까지 한다. 지금 것은 ‘울산귀바위’라는 거다. 하지만 이것에서는 귀바위란 느낌이 제대로 안 난다. 흙에 덮인 단애일 뿐 별개 봉우리로 솟지 못한 결과다.

  그 대신 봉우리로 솟은 건 7분쯤 더 가야 도달하는 그 위의 1,114m봉이다. 그 정점(頂点)에는 12년 전 세웠다는 ‘상운산’(上雲山)이라는 비목(碑木)이 서 있다. 하나 그 이름은 시비거리다. 고증된 유래 설명이 제시되지 못한 탓이다. 북편 신원리 마을에서도 그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그걸 ‘상운산’이라고 마치 별개 산인 양 지칭하는 것도 거부감을 준다. 물론 옛날에는 봉우리 하나만을 두고도 ‘산’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깊은 재에 의해 인접 산과 뚜렷이 갈라진 덩어리라야 별도의 산이라 한다. 봉우리 여럿을 포괄하는 보다 넓은 범위의 산덩이가 산인 것이다. 반면 1,114m봉은 틀림없이 가지산의 한 봉우리이자 그 일부일 뿐이다.

  그런 중에 그 일대 산덩이를 ‘귀산’이라 불러왔다는 증언도 공존했다. ‘귀를 닮은 산’이란 뜻이다. 그 북릉에 두 귀 같은 암봉(岩峰)이 솟아있어 그런 듯하다. 등산객들이 흔히 ‘쌍두봉’이라 부르는 929m봉-862m봉이 그것이다.

  이런 여러 상황을 종합해 이 시리즈는 1,114m봉을 ‘귀바위봉’이라 지칭키로 했다. ‘상운산’이란 이름은 마냥 따르기 께름칙한 반면 ‘귀바위’는 오래 전부터 널리 통용돼 온 명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산’으로 불렀다는 증언까지 나왔으니 이 정도 명칭이면 대개 수긍하리라 싶다.

   귀바위봉서는 북으로 중요한 산줄기가 하나 내려간다. 운문사 입구 마을까지 내달려 그 동편 삼계계곡과 서편 운문사계곡을 갈라붙이는 가칭 ‘지룡능선’이 그것이다. 이것과 조금 전 본 1,058m봉 지릉 사이 계곡에 휴양림 시설들이 들어 있다. 1,114m봉은 그 골의 정점이고 거기서는 휴양림 시설이 한눈에 꿰인다.

  귀바위봉 산덩이가 끝나는 곳은 임도 변에 나무 데크로 꾸며진 전망대가 있는 잘록이(재)다. 1,058m봉-귀바위봉 산덩이를 피해 그 남쪽 허리로 상승해 온 임도가 주능선에 올라서는 지점이다. 귀바위-쌀바위와 각 1㎞씩 떨어진 중간 지점이라는 거기서는 멀리 울산시가지가 훤히 바라다 보인다.

  그 이후 임도는 산줄기의 북쪽으로 돌아간다. 다음에 솟는 봉우리를 피해 가는 것이다. 그 임도 대신 산줄기를 타면 10분 이내에 1,074m봉 꼭지점에 이른다. 거기서는 남쪽 석남사 골짜기를 다시 둘로 세분하는 지릉이 출발한다.

  1,074m봉서 내려서면 ‘쌀바위’ 앞이다. 가지산 임도의 종점이고 석남사계곡 두 골 중 절골의 정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석남사와 쌀바위는 서로 간에 제대로 바라다 보이지는 않는다. 쌀바위가 절골의 전면(前面)에 솟지 않고 동편으로 구석지게 자리한 결과다.

  그 쌀바위 봉우리는 유명하긴 하되 높이(1,107m)는 귀바위봉보다 낮다. 산줄기는 그걸 지나서야 높아진다. 1,118m봉에 이르고서야 귀바위봉 고도를 추월한다. 그래서 산길도 쌀바위 이후 15분여 간 가파르게 솟는다. 처음으로 나무계단과 밧줄이 나타난다. 하나 막상 올라서면 거긴 평평한 운동장 같다. 어리둥절해지기 일쑤다. 거기 헬기장이 들어선 연유도 그것일 터이다.

  그 봉우리서 북사면으로 의미 있는 산줄기가 하나 출발한다. 귀바위봉~최고봉 사이 주능선 북편에 펼쳐지는 ‘학소대골’(속칭 학심이골)을 다시 둘로 나누는 지릉이다. 그렇게 나뉜 골짜기를 등산객들은 가끔 ‘좌골’ ‘우골’이라 구분해 부른다.

  1,118m봉에서 25분 정도 더 가면 해발 1,241m 가지산 정점이다. 거기서도 특출한 산줄기 하나가 북으로 내려선다. 흔히 ‘가지북릉’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 서편은 ‘아랫재골’(속칭 심심이골), 동편은 학소대골(학심이골)이다. 북릉이 출발 후 얼마 안 가 되돌아서듯 쏘아 올리는 1,125m봉도 장관이다. 이 암봉 또한 ‘귀바위’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청도 귀바위’라는 얘기다. 반대편의 ‘중봉’(1,167m)과 대척된다.

  낙동정맥 본맥은 북릉과 반대쪽으로 뻗는다. 그 초기 구간에 솟은 게 ‘중봉’이다. 그 뒤 석남재~능동산(983m)~배내고개~배내봉(985m)~간월산(1,069m)~간월재~신불산(1,159m)~영축산(1,081m)으로 이어 간다. 또 능동산서는 도랫재~정각산(860m) 능선이 갈라져 가고, 이 산줄기 중간서 사자봉(1,189m, 재약산)~수미봉(1,119m, 재약산)~향로산(979m)으로 나뉘어 가는 능선 등의 곁가지가 뻗어가 풍광을 더 풍요롭게 한다. 이것이 저 유명한 ‘영남알프스’다.

  그와 달리 낙동정맥의 운문분맥(雲門分脈)은, 귀바위봉 이후 그래왔던 대로 남서방향으로 계속 달린다. 가지산서 갈라져 운문산을 거쳐 이어가는 이 산줄기가 경북 영역을 마감한다. 가지산~아랫재(723m)~운문산(1,195m)~딱밭재(802m)~호거산(962m)~억산재(765m)~억산(954m)~인재(555m)~구만산(785m)~육화산(675m)이 노정이다. 가지산 정점 이후 평면거리는 24㎞, 운문령서부터 재 가지산 전 구간을 포함시키면 28.5㎞쯤 된다.

 

가지산과 억산 사이 가지-운문 두 산의 경계는 아랫재다. 가지산 정상서 거기까지는 3.7㎞ 정도다. 그런데도 이정표는 1시간 20분 걸으면 도달할 수 있다고 써 놨다. 산길이 그만큼 순탄하다는 말이다.

출발 5분 만에 산상(山上)공원 같은 헬기장을 거치고, 합계 15분이면 절벽덤에 도달한다. 거기서 시작되는 남쪽 ‘호박소계곡’(용수골) 조망대는 1,065m봉에 이를 때까지 30분 이상 계속된다. ‘호박소’는 그 골 맨 아래에 있는 돌확 모양의 엄청 큰 돌 웅덩이다. 주위는 특이한 형상의 폭포 절벽이 둥그렇게 둘러쌌다. 천연기념물인 재약산 ‘얼음골’ 진입로를 통해 접근하게 돼 있다.

호박소계곡 외곽능선은, 6시간 정도에 걸쳐 한바퀴 빙 도는 환종주 등산코스로 인기다. 주능선 1,065m봉서 백운산(891m)을 거쳐 내려서는 지릉이 계곡의 서편 외곽이다. 동쪽 울타리는 중봉서 남쪽으로 내려서는 ‘남릉’이다. 백운산 능선으로 올라 1,065m봉~정상봉~중봉을 거친 뒤 남릉을 타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 도중의 백운산 구간 풍광은 특히 유명하다. 암릉과 암괴들로 온 산에 하얀 빨래를 널어놓은 듯하다. 그게 흰 구름 같다고 해서 백운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모습은 남쪽 얼음골 일대서 더 잘 살펴진다. 하지만 그런 외모와 달리 속에는 무거운 돌을 품어 큰 중석광산이 가동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백운산이란 이름도 ‘가지산 백운봉’으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같이 불러서는 낯선 사람들에게 두 산덩이가 전혀 딴 것인 양 비치기 십상이다. 그 지릉 출발점인 1,065m봉에 지형도가 ‘아랫재’라는 이름표를 붙여 놓은 것 또한 더 시급히 손 봐야 할 대상이다. 진짜 아랫재는 거기서 1.3㎞나 떨어져 있다고 현장에 안내돼 있다. 걸어서 30여분 걸리는 거리다.

1,065m봉을 거친 후 남쪽으로 펼쳐지는 것은 삼양리 동네다. 마을의 느낌이 더없이 평화롭다. 주위가 병풍으로 빙 둘러싸인 모양새다. 동편은 백운산능선에 의해 호박소계곡과 구분됐다. 서편으로는 운문산이 솟아 좌우 균형을 맞춰준다. 남쪽에선 재약산 능선이 둥그렇게 앞을 장식해 준다.

주능선은 1,065m봉을 지난 후 얼마 안 가 본격적으로 하강해 아랫재를 향한다. 이 진짜 아랫재의 높이는 해발 723m에 불과하다. 그 남북으로 오르내리는 골길도 매우 부드럽다. 이 재가 운문령보다 100여m나 더 높다는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다. 북으로 내려서면 운문사계곡 안 ‘아랫재골’(심심이골)이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삼양리 상양마을에 금방 닿는다.

이 재를 밀양 쪽에선 그냥 ‘아랫재’라 부른다. 하지만 청도 쪽에선 으레 ‘시례아랫재’라 한다. ‘시례’(詩禮)는 아랫재 남쪽의 밀양 얼음골 일대 여섯 마을 통칭이다. 왜 아랫재라 했는지를 두고도 설이 엇갈린다. 천화령(석남고개)보다 낮아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아랫재를 분계선으로 해서 동편은 가지산, 서편은 운문산으로 나뉜다고 했었다. 하지만 재에서는 운문산 정상이 훨씬 가깝다. 평면거리가 1.3㎞밖에 안 되고, 역시 굴곡 없는 단순 오르막이기도 하다.

운문산 정상부에는 청도산악회가 세운 정상석이 두 개나 있다. 하나는 1984년 건립한 작은 것으로, 산 높이를 1,200m로 표기했다가 1,188m로 수정했다. 다른 것은 산 꼭짓점에 1996년 세운 매우 큰 자연석이다. 거기 높이도 1,188m다. 그랬다면 그 남쪽 능동산~도랫재 능선 너머에 마주 선 재약산 사자봉(1,189m, 옛 천황산)보다 1m 낮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확인되는 운문산 최고점 높이는 1,195m다. 영남알프스서 가지산에 이어 2위다.

운문산 정상서는 서편으로 ‘서릉’이 뻗어나간다. 호거산-억산의 남사면에 분포한 석골사 계곡을 꽉 틀어막는 빗장 구실을 하는 지릉이다. 이 서릉과 운문분맥 다음 구간 사이의 계곡 중 잠깐 튀어 오른 부분에 석골사 암자라는 ‘상운암’이 있다. 거기서는 청도 운문호 아래 마을과 그 너머 청도 시가지가 훤히 보인다. 인근 마을서는 그 절을 ‘삼암절’이라 불렀고 지형도에는 ‘三岩寺’(삼암사)로 남아 있다. 옛 이름일 테다.

운문산 정상에서는 ‘운문북릉’이라는 중요한 산줄기도 갈라져 나간다. ‘가지북릉’과 대칭되는 능선이다. 운문사 턱 앞까지 길게 내려서며 서편의 ‘못골’과 동편의 ‘큰골’을 구획한다.

운문분맥은 서릉과 북릉 중간의 북서쪽으로 내려선다. 그러나 그 주행도 겨우 1.7㎞(평면거리 기준) 만에 끝난다. ‘딱밭재’를 만나 산덩이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아랫재서 딱밭재에 이르는 운문산 주능선 바닥 길이는 다 해야 3㎞밖에 안 된다.

딱밭재 북편은 운문사 안 ‘못골’, 남쪽은 석골사 가는 딱밭골이다. ‘못골’ 상류는 다시 둘로 나뉜다. 운문산(정점)~딱밭재 중간에 희미하게 솟은 1,005m봉서 분계령이 출발해 내려가기 때문이다. 이 산줄기와 운문북릉 사이에 접근하기 힘든 비경이 숨었다.

높이가 해발 802m로 읽히는 딱밭재의 ‘딱밭’은 닥나무가 많은 곳이다. 한자로는 ‘楮田’(저전)이라 표기된다. ‘삼밭’과 더불어 전국 곳곳서 지명으로 쓰인다. 닥나무는 한지, 삼은 삼베 원료다.

한데 그 재의 이름을 두고도 혼란이 생겨 있다. ‘딱발재’라는 명칭이 뒤섞인 것이다. “재가 딱 버티고 서서 행인의 발길을 묶는다고 해서 딱발재라 한다”는 장난 같은 설명이 청도 ‘마을지명유래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재 남쪽 밀양 석골마을이나 북편 청도 신원리·박곡리에서는 모두 ‘딱밭재’라 했다. 남쪽 넓은 계곡에 ‘딱밭’이라 부르는 땅이 있다는 얘기다. 닥나무가 없는 지금도 여전히 ‘안딱밭’ ‘바깥딱밭’으로 세분해 부르기까지 한다고 했다.

딱밭재를 지나 솟아오르는 것은 바닥 길이가 1.8㎞쯤 되는 상당히 큰 산덩이다. 최고봉 높이도 962m나 돼 다음에 보게 될 억산(954m)보다 더 높다. 봉우리 또한 단봉(單峰)이 아니라 904m봉이 하나 더 있다.

962m봉은 딱밭재에서 15분 정도 올라야 도달된다. 헬기장처럼 평평하게 닦인 꼭짓점에서는 운문사 쪽 못골과 그 끝의 ‘문수선원’이 훤히 보인다. 거기서는 북으로 산줄기가 하나 뻗어 나가 ‘못골’을 더 세분한다. 남쪽의 딱밭재골(딱밭골)과 억산재골(대비골)을 갈라붙이는 지릉 출발점도 거기다.

962m봉서 904m봉 가는 데는 10분이면 된다. 그러나 산길은 904m봉 정점을 피해 간다. 두 봉우리 사이에 파인 880m재에서 904m봉 옆구리를 감아 돌면서 곧장 하강해 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904m봉을 빼먹지 않으려면 880m재에서 능선을 따라 곧장 올라야 한다. ‘운문산 밀양 아-9’라는 긴급구조용 지점 표시목이 서 있는 자리가 가름점이다. 거길 지나쳤다면 조금 후 904m봉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간 지릉을 산길이 감아 돌 때 그 지릉을 타고 오르면 된다. 그곳까지 지나쳤다면 마지막 ‘밀양 아-10’ 팻말 지점서 거꾸로 쳐 올라야 한다.

962m봉 산덩이를 국가 공식 지형도는 ‘억산’이라 표기하고, 등산객들은 ‘범봉’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억산도 범봉도 아니다. 그 전래명칭은 ‘호거산’이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필 계획이다. 좀 지나치다 싶게 세밀히 봐놓는 것도 그때를 위해서다.

이 산덩이를 지나면 산줄기는 또 낮아져 재가 된다. 고도는 765m. 아랫재보다 조금 높다. 남쪽으로는 밀양 산내면 원서리 석골사 및 석골마을로 이어지는 ‘대비골’이 펼쳐져 있다. 북으로 내려서면 청도 금천면 박곡리 골 안 ‘대비사’에 이르는 또 다른 ‘대비골’이다. 북편 대비골을 걸을 경우, 대비사 주차장서 한 시간 정도면 재에 오를 수 있다.

그 재에는 ‘팔풍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팔풍’은 밀양 산내면 소재지 마을인 송백리의 핵심 자연마을 이름이다. 지금도 5일장이 서고, 한때는 극장까지 있었던 대처다. 그러나 재 북쪽 박곡리나 남쪽 석골마을 어디서도 그걸 ‘팔풍재’라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양쪽 공히 ‘억산재’ ‘억산고개’라 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누가 어쩌다가 이상하고 낯선 이름을 붙였는지, 정말 희한한 일이다.

만약 억산재가 팔풍장 다니던 통로였으면 팔풍재라는 이름도 붙을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팔풍장은 거기서 직선거리로 쳐도 20리는 족히 떨어져 있다고 했다. 게다가 오르내리기조차 힘드는데 누가 물건 이고 지고 그리로 장보러 다니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밀양 쪽에서 ‘대비재’라고 부르는 경우는 있다고 했다. ‘대비골’이 그렇듯, 재 너머에 대비사가 있어 그랬을 터이다.

억산재는 특별한 경우에나 넘어 다닌 고개라고 했다. 청도 박곡리 어르신에겐 흉년에 양식 구하러 넘어 다녔던 기억이 가장 강한 듯했다. 물이 풍부한 밀양 산내에 상대적으로 곡식이 흔했다는 것이다. 반면 물이 귀한 청도에선 자주 흉년을 만났고, 그럴 때면 벼 대신 씨 뿌린 메밀꽃이 온 들을 하얗게 수놓았었다는 얘기가 가슴 아프게 들렸다.

그 억산고개 서편에 바로 붙어선 것이 ‘억산바위’이고, 그걸 넘으면 954m봉 정상에 도달한다. ‘億山’(억산)이란 정상 표석이 서 있는 봉우리다.

 

운문분맥 남쪽서 본 산과 호칭   가지산과 운문분맥 남쪽에서는 주능선 흐름과 그 위에 솟은 산봉들이 옆집 담장이나 지붕처럼 잘 보인다. 뻗어 나온 산줄기가 없다시피 해 마을과 산 몸체가 바로 붙었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가장 먼 주능선까지 거리조차 3㎞쯤밖에 안 된다.

  산줄기 위를 걸어도 다르지 않다. 운문령서 가지산으로 오르자면 10분 이내에 석남사 계곡이 훤히 모습을 드러낸다. 가지산이 끝나는 아랫재까지는 거기서 3시간30분가량 더 가야하지만 그 시간 내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것도 울산이나 밀양이 있는 남쪽이다.

  반면 북쪽 운문사계곡은 깜깜하다. 산줄기들이 하도 길고 높게 발달해 저 멀리 있는 마을은커녕 주능선 바로 아래 계곡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울산과 밀양 쪽에서 가지산과 운문분맥 산줄기를 자기네 것이라고 여기는 이유를 짐작할만하다.

  하지만 그 남쪽 지역이라 해서 각 지점에서 보는 산 모습이 모두 같은 건 아니다. 같은 산 아래더라도 어느 기슭에 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갖게 되거나, 마을에 따라 부르는 이름마저 달라질 소지가 생기는 소이다.

  가지산 경우, 울산 상북·언양 쪽에서 보이는 것은 4분의 1에 해당하는 그 남동쪽 부분뿐이다. 정상에서 석남고개를 거쳐 능동산으로 이어가는 낙동정맥 본맥이 막아서서 그 서편이 안 보이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로써 상북·언양은 고헌산~학대산~가지산~능동산~간월산~신불산으로 이어진 낙동정맥에 의해 둥그렇게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여건에서 울주 쪽이 붙인 가지산의 본래 이름은 ‘석남산’(石南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언양현 조가 그렇게 전한다. 석남사라는 절 이름서 따온 명칭이고, ‘석남’은 쌀바위 남쪽이란 뜻일 테다. 일대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능선 상 지형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신증승람에서는 그러나 ‘석남산’이라고만 할 뿐, 우리가 통상 명칭으로 쓰는 ‘가지산’은 들먹이지 않는다. 그때까지는 그런 이름이 쓰이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가지산이란 말은 ‘언양읍지’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석남산을 일명 가지산이라 하노라고 써 뒀다는 것이다. ‘상북면지’ 등 여러 군데에 나오는 설명이다.

  하지만 석남사 홈페이지는 ‘가지산’이란 이름의 본래 표기는 ‘까치산’이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걸 이두 식으로 적은 게 가지산이라는 말이다. 문자화 과정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한자표기가 생긴 것도 그 탓으로 여겨진다. 앞으로 보겠지만 까치는 운문사 창건설화에도 나타나는 이 일대에 의미심장한 동물이다.

  울주 석남사의 대척점, 즉 가지산 남서 기슭에 자리한 밀양 산내면에서는 ‘가지산’은 물론이고 ‘석남산’이란 명칭조차 거리감이 있다. 거기서는 ‘실혜산’(實惠山) ‘시례산’(詩禮山), 혹은 ‘천화산’(穿火山)이라 불러 왔다 하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있다.

  ‘실혜’ ‘시례’는 운문산~가지산~능동산~재약산~도랫재로 둘러싸인 일대, 즉 ‘밀양 얼음골’이라 불리는 남양리·삼양리 여섯 자연마을 통칭이다. 산내면 소재지서 20여리 떨어진 별개 지구로, ‘얼음골사과’를 강조할 때도 특별히 ‘시례얼음골’이라고 특화한다.

  ‘천화’ 또한 일대의 지명으로 사용됐던 고유명사다. 1800년대에 일대의 통칭으로 채택돼 ‘천화면’이 설정된 적도 있다. 신증승람은 지금의 석남고개를 ‘천화현’(穿火峴)으로 기록해 뒀다. ‘산내향토지’에 의하면 천화는 화산 분화구를 뜻한다.

  하지만, ‘가지산’이란 이름에 낯설기로는 밀양보다 분맥 북편 청도 쪽이 더 하다. 그 산의 절반을 가진 지방이면서도 청도 사람들 중엔 ‘가지산’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혹시 들은 적 있어도 그게 청도와 영 동떨어진 울산 땅에 별도로 있는 줄 여긴다. 지금 가지산으로 통하는 그 산에 운문산 외에 또 다른 이름이 붙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결과다.

  이런데도 어쩌다 이 산에 가지산이란 이름이 확고부동하게 붙어 유통되는 것일까?

  불교 영향이 컸던 듯하다. 그 종교에서 막대한 위신을 가진 산이 ‘가지산’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우선 한자 표기부터가 ‘석가여래의 지혜’를 암시하기 좋은 ‘迦智’(가지)로 굳어져 있다. 그런 가지산은 인도에 있고 중국에도 있다. 거기엔 각각 똑 같은 이름의 ‘보림사’(寶林寺)가 있다. 불교에 매우 중요한 사찰들이다. 그걸 본 따 우리나라 전남 장흥(長興)에도 가지산과 보림사가 생겼다. 지금은 송광사(松廣寺) 말사로 위축됐지만 여전히 국보·보물을 각 3점씩이나 보전하고, 인도·중국 것과 함께 ‘3보림’으로 일컬어지는 절이다.

  장흥 보림사 일대 산이 가지산으로 불리게 된 것은 선종 ‘가지산문’이 그곳 절에 자리 튼 결과일 테다. 서기 840년의 일이었다. 그 가지산문은 우리 선종불교의 적통이다. 개창조인 ‘도의(道義)국사’가 중국 선불교 법통인 6조 혜능스님의 증(법)손으로부터 심인을 받은 스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불교 조계종 뿌리는 가지산문이고, 도의국사는 조계종 종조(宗祖)다. ‘가지산’이란 이름에 따라붙을 위엄이 얼마나 커질지 짐작케 하는 자료다.

  많이들 아는 원응(圓應)국사나 일연(一然)국사 또한 그 가지산문 소속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 운문사와 인연 깊다. 원응국사는 서기 1230년 전후 운문사를 세 번째 중창했다. 일연스님은 그 40여년 후인 1277년 주지로 임명돼(72세 때) 4년간 그 절을 지키며 ‘삼국유사’를 썼다. 특히 일연스님은 영남대 부근 마을 출신이면서도 가지산문 개창조가 세운 설악산 진전사까지 찾아가 머리를 깎았던 분이기도 하다. 가지산이란 이름이 이런 스님들로 인연해 이 땅으로 흘러들고 굳어질 소지가 마련된 셈이라고나 할까.

  하나 이곳 가지산은 보림사 가지산이 아니다. 그 이름이 ‘까치산’에서 온 것으로 보는 석남사 측 판단이 청량하다. 그렇다면 한자까지 ‘迦智山’이라 맞추려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남지도’라는 고지도의 언양현 그림 표기는 ‘伽智山’이고, 청도산악회서 세운 정상석에는 ‘加智山’으로 돼 있다.

  이렇게 시각과 이름이 엇갈리는 현상은 운문산에서도 나타난다. 그걸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청도 쪽이다. 하지만 그 남쪽 밀양 산내 어르신은 ‘함화산’이라 했다. 산내향토지는 ‘함안산’ ‘화암산’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해 뒀다. ‘함화’는 含花나 函火, ‘함안’은 含眼, ‘화암’은 火岩으로 표기되고 있다.

  그런 이름의 연원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가 나와 있다. 산 서편 높은 곳에 자리한 석골사 상운암의 조선 영조 때 주지가 함화스님이고 그 암자의 당시 이름 또한 함화암이어서 ‘含花山’(함화산)이 됐다는 설명도 그 중 하나다.

 

청도선 운문분맥을 어떻게 봤을까 운문분맥 북편 청도서는 가지산~운문산~호거산 흐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가지산은 어디서도 보기 어렵다. 그 바로 아래 운문사 동네서도 마찬가지다. 운문산·호거산은 운문호 아래 방지리·대천리나 이웃 동곡리 등에서만 겨우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윤곽이 너무 희미해 현장을 특별히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게 그것인줄 알아채기 불가능하다.

  분맥서 갈라져 나온 지릉들이 길게 내달려 산의 몸체와 마을 사이를 매우 멀리 벌려 놓는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산 밖 마을 중 분맥에 가장 가까운 운문면 소재지 대천리서 가지산은 14㎞, 운문산은 12㎞나 된다. 금천면 소재지 동곡리서는 13㎞ 및 10.5㎞다. 운문사 입구의 산 속 신원리서도 무려 8.5㎞나 떨어져 있다. 직선거리로 친 게 이렇다. 뿐만 아니라 그 지릉들은 기세가 너무 높아 본체가 안 보이게 가려버리기까지 한다. 거기다 입구의 운문사가 선을 그으니 심리적 거리감까지 덧붙는다.

  이런 여건서 형성된 청도 쪽 시각은 어땠을까.

  1530년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청도군 조 경우 운문분맥에선 오직 운문산만 언급한다. "군의 동쪽 96리에 있다"는 단 한마디다. 당시 군 치소(治所·군청)가 있던 지금의 화양읍 옛 중심거리서 100리 거리라는 뜻이다. 마음속에서까지 그만큼 멀다는 얘기처럼도 들린다. 1670년대에 씌어진 청도읍지 ‘오산지’(鰲山志)의 ‘산천형세’ 항목 또한 그 산줄기서는 유일하게 운문산만 설명한다. 이 둘은 청도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기록이다. 그보다 더 권위 있거나 신뢰도 높은 기록은 없다. 그런 두 기록이 모두 운문산만 강조했다. 그럼 가지산은 어디로 갔을까?

  놀랍게도 조선시대 청도 쪽 기록에 ‘가지산’은 없다. 청도를 그린 다양한 고지도들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석남산’이라는 이름으로 뚜렷이 가리켜 보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언양현 조 기술과 다르다. ‘가지산’이라고 바로 박은 ‘영남지도’ 언양현 그림과 배치된다. 이 구간 표시가 다소 혼란스러운 대동여지도조차 운문산과 가지산을 분명하게 구분해 보인 점과도 상치된다.

  왜 그랬을까? 가지산이라고 불리는 그 산덩이의 존재 자체를 청도 쪽 서술자들이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거긴 청도 땅이 아닌 줄 알고 서술 대상에서 빼 버린 것일까?

  오산지 서술을 보면 그런 게 아님이 명백하다. “단석산 지맥이 경주 산내를 지나 가파르게 높아져 운문산이 된다”고 했다. 거기에 점차 높아져 솟아오르는 산줄기와 산덩이가 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산의 동쪽 골짜기는 언양현의 산수가 되고 서쪽 골짜기는 우리 고을의 산수가 된다”고 했다. 지금 가지산이라 부르는 바로 그 산덩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걸 ‘석남산’ ‘가지산’ 하지 않고 ‘운문산’이라 한 것만 차이다.

  그럼 지금의 운문산은 뭐라고 구분했을까? 오산지 다음 서술은 “산줄기는 굽이굽이 절경을 이루며 밀양까지 이른다”고 이어진다. 앞서 솟은 운문산이 뒤에 솟은 운문산까지 굽이굽이 이어간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가지산과 운문산을 모두 묶어 하나의 운문산으로 봤다는 얘기다.

  이런 시각은 그러나 청도 사람이나 조선시대에만 국한된 것도 아닌 듯하다. 조선조 초에 씌어진 ‘고려사’가 “남적(南賊)이 봉기했다, 극심한 건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草田) 효심이다”고 기록한 게 주목할 대상이다. 거기서 고려 때 민란의 발생지로 적시된 ‘운문’은 대개 운문산의 줄임말로 이해된다. 당시를 기준으로 볼 때 달리 비정할 지명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입장에서야 ‘운문면’이 얼른 연상될지 모르나 그건 김사미 봉기(1193년) 700년 뒤인 1900년대에야 생긴 지명이다.

  그 김사미 부대는 경상도 일대를 장악할 정도로 세가 컸다. 그를 이어 부대를 이끈 ‘패좌’ 세력은 10년이나 운문산에서 버텼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운문산에는 거기 어울릴 큰 산채가 들어설만한 공간이 없다. 그 큰 민란 근거지가 겨우 주능선 3㎞짜리 지금의 운문산으로 국한됐다고 하기는 궁색하다. ‘고려사’에서도 운문산을 훨씬 넓은 범위로 봤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억산·구만산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사미와 연대해서 공동작전을 폈던 초전 효심의 근거지가 그 구간 너머 밀양 산내면 최하단의 용전리이기도 하다.

  두 산을 하나로 보는 시각은 무의식중에 지금도 그대로 이어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곳 휴양림 이름도 한 사례다. 그 자리는 명백하게 가지산 영역이다. 하지만 거기 붙은 명칭은 ‘운문산휴양림’이다. 어느 날 일부러 찾아들어가 모르는 척하고 “여기가 어느 산이요?” 했더니, 산림청 직원들이 황당해 했다. 서로 반응을 살피더니 “운문산 아닌가? 상원산인가? 가지산인가?”했다. 운문산임을 의심해 본 적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옛날이나 지금이나, 청도나 그 밖에서나, 왜 이렇게 가지산과 운문산을 하나로 묶어 이해했고 또 이해할까?

  아까 살폈듯, 무엇보다 민가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일 터이다. 만약 가까이 있으면 분별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각각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였을 터이나 그렇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는, ‘운문사 잎산은 모두 운문산’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경우 ‘운문산’이 특정 산덩이가 아니라 구체성 떨어지는 하나의 광범한 ‘권역’ 명칭으로 굳어질 소지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운문산이란 이름이 그 절 이름서 유래했다면 이건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 인식틀이다.

  이렇게 될 경우 남는 시비 거리는 단 하나, 그럼 가지산이 운문사 앞산이고 운문사가 가지산 자락에 있는 절이냐 하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은데 ‘운문’이란 이름을 따다가 그 산에 붙였다면 그건 넌센스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석남사가 있다고 해서 석남산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운문사가 있으면 당연히 운문산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생활권에서 단절성이 높던 그 옛날, 언양은 석남산이라 하고 청도는 운문산이라고 서로 다르게 부른다 한들 이상해 할 일도 아닐 터이다.

  그럼 운문사는 가지산 자락에 있을까, 운문산 기슭에 있을까?

  어리둥절할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거긴 가지산 자락이다. 생각도 못한 일이라 할지 몰라도 분명 운문산 기슭이 아니다. 가지산 귀바위봉에서 북으로 내려서는 ‘지룡능선’ 기슭이 운문사 자리다. 절뿐 아니라 운문사계곡 입구 신원리 마을 대부분의 터전 역시 가지산 자락이다.

  운문사 담장 서편으로는 운문천이 흐른다. 만약 운문사나 마을이 그걸 건너 자리 잡았더라면 그때는 운문산 자락이 될까? 천만의 말씀, 거기마저 운문산 자락이 아니다. 거긴 호거산 아랫자락이다. 운문산은 거기까지 발조차 내려뻗지 못한다. 가지산 줄기와 호거산 줄기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이다. 운문사 산내 시설 중 운문산 자락에 자리한 것으로는 ‘문수선원’이 유일하다.

  그러면 운문사 앞능선도 운문산 것이 아니란 말일까? 그렇다. 유감스럽게도 그 60% 이상은 가지산 능선이다. 이것도 예상 밖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들로 본다면, 청도로서야 차라리 가지산을 운문산이라 부르는 게 더 합당할 수 있다.

  다만 주목해 둘 것은, 가지산이나 운문산이나 그 어느 것도 혼자서는 ‘운문사 앞산’의 역할을 다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운문사가 엄청나게 큰 계곡의 복판에 앉아 그 앞능선을 다 차지한 게 사안의 발단이다. 그 계곡 앞담에 해당하는 주능선 길이가 무려 10.2㎞(평면거리 기준)나 된다. 그 중 6.2㎞는 가지산 것이다. 가지산 전체 주능선 8.5㎞ 중 귀바위봉~아랫재 구간이 그 역할에 합류한다. 나머지 중 3㎞는 운문산, 1㎞는 호거산 주능선이다. 가지산 대부분에다 운문산 전체와 호거산 주능선 대부분이 합세하고서야 ‘운문사 앞산’ 능선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운문천 서편이 호거산 영역인 이유가 이해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가지산-운문산-호거산을 모두 ‘운문산’ 하나로 합쳐 부르는 게 현장 사정과 더 부합할 수도 있다. 그런 뒤 가지산은 운문산 가지봉 혹은 시례봉, 그 남사면 백운산은 운문산 백운봉, 운문산은 운문산 함안봉이라고 구분하면 된다. 그러면 산줄기 남과 북의 시각도 모두 포용할 수 있을 터이다.

  거대한 하나의 산 덩어리로 펼쳐져야 할 진짜 운문산은 사라지고 중치 정도에 불과한 여러 산들로 쪼개져 버린 것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쳐 하나로 했으면 14㎞나 됐을 운문산 주능선 길이가 3㎞로 짧아져 버리니 너무 초라하다.

  그에 비하면 대구권 팔공산은 하나의 산이면서도 주능선이 20㎞나 된다. 지리산은 성삼재~천왕봉 구간만도 28㎞에 이른다. 만약 ‘운문산’ ‘가지산’ 나누고 ‘상운산’ ‘백운산’까지 쪼개듯 해 버렸으면, 그 산들도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테다.

  가지산 이름에 쐐기를 박는 정상석을 세운 주체는 울산산악회가 아니라 청도산악회다. 애향운동의 하나로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돌에 ‘운문산’이라고 새겼더라면 옛 어른들 식견과 더 부합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봐야 이미 달걀로 바위치기였을까.

 

베일 벗는 호거산(虎踞山) 흔히들 운문사는 당연히 ‘운문산 운문사’이겠거니 여긴다. 운문산이란 이름부터가 운문사에 연유해 생긴 것이리니 그러는 게 당연하기도 하다. 청도 쪽에서는 가지산·운문산 구분 않고 통틀어 운문산이라 했을 정도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나 현장은 딴판이다. 그 절 문패는 ‘호거산(虎踞山) 운문사’다. 운문산 운문사가 아니다. 다시 당혹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일대 산에겐 제 이름을 따르게 해 놓고 정작 사찰 자신은 전혀 엉뚱한 이름을 끌어다 모산(母山)으로 챙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 생소한 문패는 도대체 어떤 연유로 붙은 것일까?

하지만 거기 대한 설명은 어디서도 듣기 쉽잖다. 주변 마을에 가 물어도 호거산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인터넷엔 얘기가 뒤죽박죽이다. 자의적 풀이가 난분분하고 때로는 그게 정설인 양 유통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절 남쪽 능선에 있는 여러 산들을 모두 포괄해 호거산이라 불렀다고 봐야 한다”며 “운문산이 바로 호거산일 것”이라고 쉽게 포기하고 넘어가려 한다.

또 다른 누구는 운문사로 들어가는 도중 오른편(서편)으로 솟아 보이는 특이한 돌 봉우리를 호거산일 것이라 추측한다. 뾰족한 꼭대기에 둥그런 암괴가 올라앉아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등선바위’가 그것이다. 거기에 ‘호거대’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이 덧칠해진 연유도 그런 것일 테다.

반면 어떤 이는 절 진입로 왼편(동편)으로 솟은 매우 큰 암산(巖山)을 호거산일 거라고 100% 장담한다. ‘북대암’ 위의 ‘복호산’이 그것이다. 그 모습이 ‘쭈그려 앉은 호랑이가 운문사를 바라보는 형세’이며, ‘절이 남쪽을 향해 돌아앉은’ 것은 그걸 피해서라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그 산덩이 위의 산성 이름이 ‘호거산성’이라고 주장하며 방증하려고도 애쓴다.

그렇다면, 글자로 풀 때 ‘虎踞’(호거)는 무엇을 뜻할까? 사전에 따르면 ‘踞’는 엉덩이를 높은 곳에 얹은 후 두 다리를 내려 세우고 앉기, 즉 ‘걸어앉기’를 뜻한다. 그래서 ‘虎踞’의 일차적 의미는 ‘범같이 무릎을 세우고 앉는 것’이다.

그러나 ‘호거’의 실제 쓰임새는 그 문자적 의미와 다르다. 주로 산 모습을 형용하는 말로 구사된다. ‘웅대한 산세’를 뜻한다.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하다는 뜻의 ‘龍盤虎踞’(용반호거)와 통한다. 그러면서 호거는 ‘특별하고 기이한 암괴’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도 쓰인다. 산덩이 모습과 특별한 암괴 모습 묘사에 두루 원용되는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둘이다.

그럼 청도 옛 기록에는 어떨까, ‘호거산’이 나타날까 아닐까?

나타난다. 청도읍지 ‘오산지’(鰲山志·1673년)의 다음 구절이 그것이다. “절 서쪽 산은 호랑이 형상을 해 호거산이라 부른다, 그 기운을 누르려고 골짜기 입구에 계연(鷄淵·닭못)을 뒀다, 호랑이가 닭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경내사찰’ 항목서 운문사를 설명하던 중 끼어든 기술이다. 정식으로 ‘산천형세’ 항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호거산은 이로써 운문분맥 여러 산 중 운문산 외에 설명이 붙은 유일한 산이 됐다. 귀하고 중요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하나 이것만으로는 어느 게 호거산인지 구분해내기 불가능하다. 말로썬 가리켜 보이기에 한계가 있다. 운문사 서쪽에 산이 하나 둘 아니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지목하는 데는 그림이 훨씬 유용하다. 고지도가 적격이다. 하지만 ‘동국여지도서’ 청도군도(1760년)나 청구도(1834년) 등에는 호거산이 없다. 반면 ‘대동여지도’(19C)는 호거산을 운문산 동쪽 서쪽에 두 개나 그려 놨다.

고지도 중 그래도 참고가 될 만한 건 ‘영남지도’(경상도71주군도) 청도군도다. 거기서는 호거산이 ‘대비사’ 절 바로 남쪽에 그려져 있다. 대비사는 운문분맥 904m봉(962m봉 산덩이의 일부) 및 그 서편 954m봉(억산)서 북으로 내려서는 두 산줄기 사이 금천면 박곡리 골짜기 안에 있는 고찰이다. 이로써 호거산의 대략 위치는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영남지도에는 달랑 대비사 절 그림뿐이다. 산줄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호거산이 904m봉인지 954m봉(억산)인지는 구분 안 된다.

호거산 위상이 더 선명히 표시된 지도는 18세기 중엽 것이라는 ‘해동지도’다. 거기서 호거산은 큰 산줄기가 갈라져 내리는 기점으로 그려졌다. 그 산줄기 아래에는 ‘낙화암’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이게 결정적 단서다. 주변 상황을 종합하건대 그 산줄기는 운문산과 억산 중간에 있는 산덩이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운문면-금천면을 가른다. 고지도가 그 산줄기를 주목한 이유도 바로 이 생활권 분리 기능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림 속 산줄기의 출발점도 저절로 명백해진다. 그건 904m봉이다. 962m봉과 하나가 돼 있는 그 산덩이의 동쪽 경계는 딱밭재, 서쪽 경계는 억산재다. 이게 호거산이라는 이야기다. 지금은 운문호 물에 잠겼으나, 거기서 출발해 내리는 산줄기 끝 부분에는 낙화암이라는 명소도 분명 있었다.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호거산을 희한하게도 등산객들은 ‘범봉’이라 부른다. 등산지도들에서도 그렇게 통한다. 하지만 현지 마을들에는 그 산덩이를 지칭하던 특별한 이름이 없다고 했다. 북쪽 청도 박곡리·신원리와 남쪽 밀양 원서리 석골마을서 모두 그랬다. 동편 운문산이나 서편 억산은 중시했어도 그 중간에 끼인 이것은 주목하지 않았다는 얘기일 테다.

그런데도 등산객들이 범봉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석골마을 어르신은 착오의 결과일 거라고 봤다. 운문산서 서편 석골마을 쪽으로 500여m쯤 내려선 지점에 ‘범바위’라는 게 있고 그 산줄기를 ‘범바위등’이라 부르는 바, 그 이름을 잘못 듣고 갖다 붙인 결과일 거라는 얘기다. ‘등’(嶝)은 등성이를 말한다.

기자가 만났던 현지인들 중 904m봉 산덩이를 호거산이라고 콕 집어낸 사람은 유일했다. 삼계계곡 ‘쌍두봉가든’ 박정곤(50)씨였다. 그는 단번에 그걸 ‘호거산’이라고 지칭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라 했다. 그 산덩이 생김새에도 훤했다. 7~8부 능선에 암괴들이 굴같이 얽혀 호랑이가 살 만하다고 했다.

누구도 잘 모르는 전래 지명을 그는 어떻게 알까? 듣고 보니 그는 평범하고 수동적인 지방생활사 전승자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이런 일에 관심이 많아 노트를 들고 다니며 어른들 증언을 채록했다. 친·외가가 일대에 고르게 분포해 옛 지명이나 생활사 이야기를 두루 채집할 좋은 조건도 갖췄다. 그가 모은 적 있는 자료 중에는 매우 희귀한 것도 적잖은 듯했다. ‘불매노래’ 같은 것이 단적인 예였다.

그럼 962m-904m봉 산덩이에는 정말 ‘호거산’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을까? 옛 사람들 소감을 짐작해보기 위해 운문사 입구 신원리 마을서 운문사계곡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봤다. 생각지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 전면으로 잡히는 풍경의 핵심에 바로 그 산덩이가 솟아 있었다. 동편으로 운문산 일부가 나타나고 962m봉이 중앙에 앉았으며 서편으로 억산바위가 솟았다. 다른 지점서 볼 때는 워낙 특징 없어 존재마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던 962m봉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962m봉 자체서는 별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냥 어디에서나 만나는 평범한 산덩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인상 깊게 올려다 보인 것은 억산바위였다.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이 연상될 듯했다. 둘을 합쳐 하나로 보고 ‘호거산’이라 통칭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앞서 살핀 해동지도가 962m봉만을 호거산이라고 지칭했다고 볼 근거도 전혀 없었다. 그것과 주변 다른 산을 구분하는 어떤 흔적도 남겨놓지 않았다. 정밀한 지도제작법이 없던 조선시대에 그렇게 산덩이를 세밀히 구분해서 봤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무리일 수 있다. 게다가 호거산이라고 해서 굳이 호랑이와 연관 지어 보려 애쓰는 것도 잘못일 수 있다. ‘기이한 암괴’ 모습 또한 ‘虎踞’라고 표현한다는 사전의 설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억산바위가 ‘호거’에 더욱 제격이 돼 가는 셈이다.

다른 곳에서는 어떨까 싶어 운문호 아래 방지초교 앞에서 바라다봤다. 동편으로는 길디긴 호거능선이 이어져 있었다. 가지산은 그 뒤로 묻혀 한 치도 안 보였다. 호거능선 서편으로는 억산~인재~육화산 능선이 펼쳐져 있었다. 962m봉은 억산 동편에 조그맣게 드러날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보는 풍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 역시 억산바위였다.

방지고개 너머서는 어떻게 보일까 해서 동곡리 우회도로 변 119센터 앞에 섰다. 동편으로는 역시 호거능선이 좍 펼쳐졌다. 시루봉이 매우 선명히 짚였다. 전면으로는 운문산~962m봉~904m봉~억산바위~억산~인재~육화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억산에서 북으로 출발해 내리는 능선(억산북릉) 끝부분에 돌출한 ‘귀천봉’(개물봉)까지 그랬다. 그러고 보니 운문분맥 최상위급 관망대는 바로 여기였다. 하지만 거기서 보는 962m-904m봉에도 호랑이 모습은 없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억산바위였다.

아무래도 962m봉 산덩이와 억산바위 일대가 하나 돼 빚어내는 풍경, 그걸 ‘호거산’이란 단일개념으로 뭉뚱그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시리즈에서는 지목 편의상 964m-904m봉 산덩이를 호거산으로 지칭은 하되, 실제는 인접 억산바위까지 아우른 포괄적 명칭이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기로 했다.

 

신원천 삼계계곡 지난번 본 지룡능선은 신원천 계곡의 서편 울타리다. 그 계곡의 동편 울타리 역할은 이미 살핀 대로 문복능선이 맡았다. 두 산줄기가 호응해 신원천 삼계계곡이라는 독립 권역을 형성한 것이다.

흔히 삼계계곡은 신원리 두 계곡 중 운문사계곡보다 훨씬 작은 줄 생각하기 십상이다. 보이는 것이라곤 길 양옆으로 바짝 다가선 산덩이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적어도 밑면적에서는 두 계곡이 거의 같다. 문복능선 속의 계살피골과 수리덤골 등 큰 골짜기가 삼계계곡으로 합류해 들어서는 게 변수다.

그러나 운문사계곡과 삼계계곡 사이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특징이 있다. 저쪽은 막혔고 이쪽은 트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문사계곡은 수행의 터전이 된 반면, 삼계계곡은 교통 요충지가 됐다.

이 계곡이 틘 것은 그 남쪽 낙동정맥을 넘는 ‘운문령’에 큰 잿길이 났기 때문이다. 덕분에 남쪽의 울산·양산과 북의 청도·경산·대구가 직결된다. 경부고속도로로 인해 사정이 달라지긴 했으나 지금도 창녕·합천·달성 등지서는 이 통로를 통해 울산으로 내왕한다. 대구~울산 간 최단거리 연결로기 때문이다.

삼계계곡 관문인 운문령은 조선 후기 지도에 ‘가슬현’으로 나타나는 그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남지도’ 청도군도에는 ‘加瑟峴’(가슬현), 언양현도에는 ‘加鋤乙峙’(가서을치)로 돼 있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 주(註)를 통해 ‘가서’(加西·嘉栖)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면서 우리말의 이두식 표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구 팔공산 서편 산을 그 가에 있다고 해서 ‘가산’이라 부르면서 ‘架山’(가산)이라 표기하는 것과 같이, 이것 또한 가에 있는 재라고 해서 ‘갓재’라 부르다 ‘가슬현’으로 표기됐는지 모를 일이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 그 길목을 통해 운반된 최고의 생존필수품은 소금이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산지인 서해에서 배로 울산까지 운송된 뒤 이 계곡을 거쳐 갈라져 갔다는 얘기다. 신원리 중심 자연마을이 ‘염창’이라 불리게 된 것도 거기 있던 소금창고 때문이라 했다. 그 소금이 내지(內地) 여러 곳으로 분산돼 가던 산길 들길은 ‘소금길’이라 부를 만하다고 누군가가 강조해줬다.

그 길은 거꾸로, 이 계곡 주요 산물을 외부로 날라주던 통로이기도 했을 테다. ‘속계솥’도 이 루트를 통해 서해안까지 보급됐으리라 했다. 운문천과 신원천이 합류해 이루는 무적천 계곡 일대서 생산된 속계솥은 근세 전국 솥 생산량의 70%나 차지한 청도 특산품이었다.

운문령 아래 삼계계곡 최상류 계곡은 ‘생금비리골’이다. 지금은 가게들만 있으나 1960년대에는 살림집도 있었다. 하지만 무장공비들이 숨어들어 1967년 6월 정두표씨 살해사건을 일으킨 뒤 동네가 비워졌다고 했다.

일대 무장공비 사건은 해묵은 것이었다. 1949년 6월에는 토벌 나가던 경찰공무원·행정공무원·소방대장 등 여러 명이 습격 받아 숨졌다. 석 달 뒤에는 공비들이 면사무소와 경찰지서까지 내려와 4명을 살해했다. 그런 와중에서 오진리에선 토벌 과정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는 참사까지 벌어졌다고 했다.

생금비리골의 서편(지룡능선 자락)에는 ‘운문산자연휴양림’이 있다. 겉으로는 있는 둥 마는 둥하나 막상 들어서보면 상당히 넓은 골 안에 자리했다. 그 골 상부에 ‘용미(龍尾)폭포’가 있다. 평소에는 말라붙는 건폭(乾瀑)이지만 겨울에는 얼음이 두텁게 언 빙폭(氷瀑)으로 변해 장관을 이룬다. 그 모습을 보면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저술이 이 폭포서 시작됐다는 전설이 사실로 믿기려 할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현지 설명서였다. “이 계곡에 천년을 살던 백룡 한 마리가 소원 성취해 승천하느라 서두르다 바위에 걸려 떼어놓고 간 꼬리가 변해 높이 20m의 폭포가 됐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게 “산두봉 계곡에 있다”는 대목이었다. ‘쌍두봉’이란 이름을 제대로 몰라 ‘산두봉’이라 하고 만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폭포가 쌍두봉계곡에 있다는 설명은 묵과할 수 없는 잘못이었다.

진짜 쌍두봉은 거기서 한참 더 내려간 곳에 있다. 그게 ‘귀산’이라고도 불려온 봉우리들임은 몇 차례에 걸쳐 이미 살핀 바다. 그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는 곳은 음식점 ‘쌍두봉가든’ 마당이다. 거기서 보면 쌍두봉은 정말 귀를 닮았다. 귀는 본래 둘이 나란히 솟아야 제 모습이다. 반면 머리가 둘인 ‘쌍두’는 이 세상에 없는 괴물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귀산’이라 부르는 게 자연스럽고 더 적합하겠다는 판단이 절로 들었다.

그 ‘쌍두봉가든’ 자리는 삼계마을의 일부다. ‘삼계’는 세 방향 계곡물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라 했다. 운문령 아래 복판 골인 ‘생금비리골’, 동편 문복능선이 품은 ‘계살피골’, 그 맞은편 ‘지룡능선’ 속의 ‘배너미골’ 등이 그것이다.

지금 삼계마을은 깊은 산 속이다. 하지만 이건 자동차시대 눈으로 본 결과일 뿐, 옛날에는 대단한 요충지였다는 게 정설이다. 무엇보다 철(쇠) 생산지였음이 확실하다고 했다. 지금도 곳곳서 발견되는 제철 슬러지가 증거로 꼽힌다. 이곳서 철광석이 났을 뿐 아니라 그걸 녹이기 위한 연료까지 풍부했던 게 제철 입지조건일 것으로 짐작한다. 1800년 즈음 일대에 큰 주물공장들이 들어선 것도 그 전통을 이은 것이리라 보는 시각이 있다.

신라 팽창기에는 거기에 엄청 중요한 시설들까지 자리했다. 원광법사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통해 화랑의 갈 길을 제시해 보인 곳이라는 ‘가슬갑사’가 대표적 존재다. 한 동이 90평이나 되는 큰 건물들을 갖춘 6천여 평짜리 대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순수 사찰을 넘어 화랑도가 주둔하는 국가기관이자 군사기지 역할을 맡았으리라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삼계마을 입구에 세속오계비 기념 소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쌍두봉가든 일대에도 근래까지 큰 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보이는 모습과 달리 농업 소출이 상당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마을 또한 빨치산 때문에 없어졌다고 했다. 주민들은 그 아래 ‘속계’ 등의 마을로 소개(疏開)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휴양지로 변했으나, 삼계계곡은 저렇게 깊은 역사와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그곳 쌍두봉가든 자리는 배너미골 입구이기도 하다. 그쯤서 출발해 올라가는 ‘배너미재’(506m)는 운문사계곡을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등산통문이다. 운문사 정문을 통한 등산이 막힌 뒤 생겨난 대체 통로 중 이만큼 접근성 좋은 건 더 이상 없다. 가든 옆 ‘천문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르면 35분 정도 만에 지룡능선 위의 배너미재에 올라선다. 출발점 고도가 이미 해발 278m나 돼, 높이 기준으로 230m만 더 올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길도 막바지 구간만 조금 가파를 뿐 대부분 완만하다.

배너미재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그게 등산로 네거리여서다. 거기로 올라 왼편(남동쪽)으로 꺾으면 가지산 주능선상의 귀바위봉으로 향한다. 그렇게 한 시간쯤 가다가 만나는 도중의 헬기장 봉우리(1,038m봉)서 예각으로 유턴해 돌아서면 쌍두봉 능선이다. 그걸 타고 천문사로 돌아오는 데도 한 시간이면 족하다.

만약 배너미재서 직진해 고개를 넘으면 거긴 운문사계곡 안의 배너미골이다. 그걸 지나 내려서면 ‘천문동’(天門洞) 터에 도달한다. 배너미골-학소대골-아랫재골 등 세 골의 합류점 평지다. 그 지점서는 밀양 산내면으로 이어지는 아랫재까지도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이와 달리 배너미재에서 오른편(북서쪽)으로 길을 잡아 능선을 타면 얼마 후 사리암 산덩이에 올라서고 조금 더 가면 지룡산성 복호산에 닿는다. 그 도중에 지릉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배너미골 다음에 자리한 것이 ‘내원골’이고, 그 다음은 ‘삼밭골’이며, 하류 마지막 골은 ‘선(先)삼밭골’이라 했다.

입구에 간이음식점이 세워져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내원골은 그 안이 매우 넓다. 배너미재(506m) 만큼이나 낮은 잘록이(558m)를 사이에 두고 운문사 내원암 쪽 내원골과 연결되기도 한다. 삼밭골은 상황버섯 농장이 들어서 있는 그 골이고, 거기서 골을 따라 조금 내려선 곳에 옛날부터 자리한 동네가 신원리 ‘통점’마을이다. ‘흙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간판 자리에서 오르기 시작하는 선삼밭골은 복호산 정상 봉우리 바로 동편이다. 복호산과 지룡산성 659m봉 사이에 상당히 넓게 펼쳐져 있으며, 거기에 지난번 본 ‘가마바위’가 있다.

 

감춰진 땅 운문사계곡 운문천이 흐르는 운문사계곡의 동편은 지룡능선, 서편은 호거능선이 둘러쌌다. 남쪽은 호거산~딱밭재~운문산~아랫재~가지산정상봉~귀바위봉 사이 운문분맥이 꽁꽁 막았다. 유일하게 열린 북쪽마저 선택적으로만 개방된다. ‘운문 성역(聖域)’이라고나 할까. 그 바깥 마을에 ‘속계’란 이름이 붙은 게 이 성역과 대비된 ‘세속세계’라 해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운문면 신원리 그 ‘속계마을’서 남쪽 운문분맥을 향해 들어가는 계곡은 ‘큰골’이다. 그걸 디뎌 나아갈 때 먼저 나타나는 것은 상가촌인 ‘황정마을’이다. 좀 더 들어가 닿는 입장료 징수소 일대는 ‘사기점마을’ 터다. 10여 년 전 공원부지로 편입돼 23가구가 이주해 나갔다고 했다. 거길 통과하고 솔밭을 거치면 운문사 큰절에 닿는다. 큰절 서편 물 건너 땅은 ‘장군평(將軍坪)마을’ 터다. 신원리 어르신들은 그 마을이 1980년대에 뜯긴 것으로 기억했다.

일반 관광객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그 즈음의 운문사 큰절까지다. 더 깊은 골로 들어가려면 또 한 관문을 거쳐야 한다. 더 안쪽에 자리한 ‘사리암’의 기도객만 통과시키는 통문이다.

그 관문을 넘어 얼마 안 가면 운문사의 ‘문수선원’이 나타난다. 더 서편에서 흘러내리는 한 지류가 거기서 큰골에 합류한다. 합수(合水) 모습이 두드러지지 않아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지만, 그 지류 또한 ‘큰골’만큼이나 굉장하다. 그 지류의 전래 명칭은 ‘못골’이라고 했다.

큰골과 못골을 가르는 산줄기는 운문산 정상서 북으로 내려서는 ‘운문북릉’이다. 그 능선을 정상서 타고 내리자면 초입부터 서편 못골 상류에서 장관이 펼쳐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절벽 계곡과 그 바닥서 솟아 오른 암괴기둥이 외경할 정도다.

그런 도중 산줄기는 잠깐 떨어졌다가 1,053m봉으로 되솟는다. 사방이 직벽이고 남쪽으로만 겨우 접근을 허용하는 암봉이다. 누군가가 거기다 ‘독수리바위’라는 표석을 세워뒀다. 하나 멀리서 보면 도사려 앉은 부엉이 같은 느낌이 더 진하게 와 닿는 봉우리다.

그 구간을 지나면 고도가 많이 떨어져 830~860m 높이로 한참 이어가다가 커다랗게 구획된 별도의 산덩이로 올라선다. 최고점 높이는 893m. 그 정점과 더 앞선 지점에 헬기장 2개가 연이어 자리 잡았다. 그 산덩이가 조금씩 낮아져 갈 때 직진 방향으로 곁줄기가 빠져나간다. 동편 큰골의 ‘천문동’으로 내려서는 지릉이다.

본능선은 그와 달리 서편으로 굽어간다. 그리고는 얼마 뒤 마치 산줄기가 끊긴 듯한 느낌까지 주면서 582m재로 폭락했다가 639m봉으로 다시 솟구친다. 큰골 상류서 내려올 때 가장 우뚝하게 솟아 보이고 못골 상류서 내려올 때는 매우 큰 암괴절벽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뚜렷한 지표다. 그게 높아 보이는 건 봉우리 양편이 매우 낮기 때문이고, 두드러지는 것은 산줄기가 굽느라 진행방향 전면으로 맞닥뜨려 보여서다. 그렇게 되바라진 데다 암괴절벽으로 하얗게 분칠까지 하고 있다보니 이 봉우리는 운문산과 호거산 구간 운문분맥 위에서도 가장 두드러져 보인다.

못골은 이렇게 내려서는 운문북릉과 더 서편 호거능선 사이에 형성된 계곡이다. 운문북릉의 종점이자 못골의 초입인 문수선원서 골 바닥으로 걸어 오르자면 15분 후에 사방댐에 도달한다. 거기까지는 널찍한 계곡도로가 개설돼 있다. 그리고 사방댐서 5분쯤 더 오르면 못골의 하이라이트라 할 풍광이 펼쳐진다. 물길이 매우 넓어지는데다 골 바닥 또한 굉장한 반석들로 덮인 곳이다.

그것은 ‘못안(골)’이라는 상당히 큰 지류가 합류해 오느라 생긴 지형이다. 못골과 못안골을 가르는 능선은 호거산 정상 962m봉서 출발해 내려선다. 지금 살피는 그 합수점서는 저 분계능선을 거꾸로 타고 오르는 등산로도 발달해 있다.

합수점을 지나 못골 본류를 20여분 더 오르면 아까 봤던 639m봉 암괴절벽을 지난다. 다시 5분쯤 더 가면 마지막 평평하고 넓은 쉼터가 나타난다. 그 상류의 모든 골들이 모여드는 집합소 같은 곳이다. 본류는 거길 지난 뒤 운문산 정상이 있는 동쪽으로 곧장 오른다. 그 안이 바로 절경 암괴단애들이 포진한 곳이다. 하지만 거기로의 진입로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워낙 험한 계곡이라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결과다. 대신 등산길은 서편으로 굽어 나 있다. 40여분 더 걸어 딱밭재로 이어가는 것이다.

문수선원서 여기 이르는 골을 그 아래 신원리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못골’이라고 지목했다. 거기에 못(저수지)이 있어서 이 이름이 붙었다는 경우가 있고, 지형이 못을 닮아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는 경우도 있었다. 또 ‘못안’에 대해서는 그냥 ‘못안’이라고만 불렀을 뿐 골이라는 말은 잘 붙이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 골은 ‘목골’로 표기되거나, 상류 부분만 가리켜 ‘천문지골’이라는 더 알 수 없는 이름으로 표시된다. 청도군수·경산소방서장 명의의 현장 구조팻말들이 그렇게 전파하고 있으니 더 답답하다. 1대5,000 지형도가 ‘목골’이라고 잘못 표시하는 것 또한 큰 문제다. 장기적으로 전래 지명을 전승할 유일하다시피 한 수단이 그것인데 이래서 될 일이 아니다. 다음으로 축척 큰 1:25,000 지형도만 해도 골짜기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데 말이다.

다시 문수선원 지점으로 되돌아 가, 거기서 못골 대신 큰골을 따라 오르면 곧 사리암 주차장에 도달한다. 거기 서 있는 출입금지 안내판에는 ‘목골’ 대신 ‘못골’로 돼 있고, ‘큰골’과 함께 ‘천문지골’이란 이름을 나열해 놨다. 뭔가 근본조차 정리 안 된 듯하다.

사리암 주차장서 출발해 20분쯤 큰골을 오르면 매우 큰 세 골의 합수점(合水点)에 이른다. 왼편(동편)에서 내려오는 ‘학소대골’, 오른편(서편) 큰골(아랫재골), 지룡능선 속 배너미골 등이 합류하는 곳이다. 배너미재 너머의 ‘삼계마을’ 자리와 비슷한 지형인 셈. 그러다 보니 삼계마을 쪽에 평평한 터전이 생겨나 있듯, 여기 또한 한 마을이 들어서기 족할 넓은 터가 형성돼 있다.

이곳을 신원리 어르신들은 ‘천문동’ 혹은 ‘천문골’이라 지목했다. 신라 때 ‘천문(天門)갑사’라는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지목되는 곳도 바로 여기다. 근세에는 ‘천문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최근엔 10여 년 전까지 한 주민이 거주하면서 벌을 치고 행락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지금 그 이름은 엉뚱하게 못골에 가 붙여져서는 ‘천문지골’이라는 더 왜곡된 합성어로 변질돼 있다. 거기에 마치 ‘천문지’라는 저수지가 있었던 듯 말해지게 된 것이다.

이 천문동서 갈라져 오르는 세 골 중 그냥 큰골이라 부르거나 기껏 ‘아랫재골’ 정도로 불러왔다는 운문북릉 쪽 계곡이 지금 ‘심심이골’로 더 잘 통하는 것도 문제다. 동편 지룡능선 쪽에서 그것으로 합류해 드는 골은 그냥 ‘학소대골’ 정도로 지칭됐으나 현재는 응당 ‘학심이골’로 유통된다. 지명 왜곡이 이렇게 심각하다.

이들 아랫재골과 학소대골을 가르는 능선은 가지산 정상에서 북으로 내려서는 ‘가지북릉’이다. 비 내리던 어느 날 합수점서 출발해 올랐더니 가지산 정상에 도달하는데 거의 두 시간 반이나 걸렸다. 출발 한 시간 안에 고도를 대폭 올려 이 능선 유일의 헬기장에 도달한 뒤, 20여분 간 좀 편안히 가는가 싶었으나 다시 두 차례에 걸쳐 절벽을 올라야 했다. 도합 2시간 걸려 도달한 곳은 가지북릉의 하이라이트인 1,125m ‘청도귀바위’ 혹은 ‘북봉’이다. 정말 장쾌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이 가지북릉 서편의 아랫재골은 매우 편안하고 원만하다. 초입의 20여분간은 길이 거의 임도 같고 풍광조차 조신하다. 등산객들이 걷기 심심하다고 해서 ‘심심이골’이라 부르게 됐다는 농담이 진담같이 느껴질 정도다. 도합 1시간이면 도달하는 ‘아랫재’에 선 낡은 나무이정표는 ‘운문산 1.2km, 가지산 3.87km, 남명초교 3.9km’라고 안내한다. 남쪽으로 넘어서면 밀양 얼음골 상양마을이며, 그 일대 시례 중심지에 자리한 게 남명초교다.

이와 달리 학소대골은 험하다. 협곡이 이어져 산비탈로 오르락내리락 피해 다녀야 하는 구간도 짧잖다. 그렇게 40여 분 오르면 다시 두 골이 하나 되는 합수점에 도달한다. 둘 중 어느 쪽으로 진입해도 금방 폭포를 만난다. 서편 것은 ‘학소대폭포’로 불린다 했다. 그 아래 바위에 ‘鶴巢臺’(학소대)라고 새겨놓은 것은 거기가 학의 둥지 자리라는 뜻일 터이다. 동편 것은 ‘비룡폭포’라 불리는 바, 두 폭포로 대표되는 두 골을 등산객들은 흔히 ‘좌골’ ‘우골’이라 나눠 부른다.

이들 좌·우 골의 분계능선은 가지산 정상 동편의 1,118m봉서 내려서는 산줄기다. 이걸 타고 오르다 보면 서편 계곡 안으로 굽어드는 산길이 나타난다. 학소대 폭포 위 골을 통해 가지북릉 쪽에 바짝 붙어 1,118m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20여 분 동안 아주 편안히 이어지나 나중엔 급등하느라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반면 가름능선을 타다가 동편 지룡능선 밑 골로 들어서면, 얼마 후 1,074m봉서 내려오는 짧은 능선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 능선길은 1,074m봉 북편으로 우회하는 임도와 연결돼 있다. 누군가가 쌓아둔 돌탑이 이 등산로 들머리 표시다. 합수점서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거기서 1,118m봉은 20분 거리다. 1,118m봉은 주능선 답사 때 본 그 헬기장이 있는 곳이며, 가지산 정상은 그곳서 20여 분 떨어져 있다

 

운문사와 오갑사 운문사 계곡 일대 산세의 대단함은 대강 둘러봐도 금방 실감된다. 영남알프스 쟁쟁한 명산들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는 말이 결코 과찬이 아니다. 1750년대 ‘택리지’(擇里志)가 “병란 피할 복지라 하고 승가에서 성인 천명이 나올 곳이라 한다”고 써 둔 이유를 짐작할 듯하다. 거기다 청도군청은 일대를 1983년 말 자연공원으로 묶고 십수 년째 출입까지 통제하고 있다. 지금 이곳 자연 상태는 이 시대가 유지할 수 있는 최상급이라 봐야 할 터이다.

하지만 신라가 팽창하던 시절, 그 땅은 서라벌의 소비재를 충당해 주는 공장지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관측이 있다. 엄청난 양의 숯을 구워 조달함으로써 서라벌이 연기 없는 도시가 될 수 있게 해 준 곳이자, 신라군에 무기를 만들어 대던 곳이었으리라는 얘기다. 경주 시가지 인근에는 큰 산이 없어 쇠나 숯이 날 여지가 적은 반면, 당고개를 넘고 산내면을 지나면 바로 닿을 수 있는 이곳은 그 주산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랑이 무대 삼아 훈련하고 생활하던 땅이 이 일대의 험산심곡들이라는 전설도 곳곳에 널려 있다. 세를 확장해 가던 신라가 서쪽의 가야세력과 맞부딪치던 시절 이야기니 개연성 높은 일일 것이다. 이쪽 계곡에 다섯 개의 甲紗(岬寺), 즉 ‘오갑사’가 창건된 것도 그때였다. 오갑사가 순수 사찰의 경지를 넘어 신라에 매우 중요한 군사거점 같은 곳이었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이유다. 심지어는 그게 화랑의 군사기지 아니었을까 주목하는 시각까지 있다.

그 오갑사의 중심은 운문사였고, 운문사는 ‘대작갑사’(大鵲岬寺)라 불렸다. 이 절 남쪽(7리) 더 깊은 상류 계곡 속 천문동 자리에 ‘천문(天門)갑사’, 하류인 북쪽(8리) 오진리 입구 자리에 ‘소보(所寶)갑사’, 지룡능선 너머 동쪽(9천보) 삼계계곡에 ‘가슬(嘉瑟)갑사’, 호거능선 너머 서쪽(10리) 대비골(박곡리)에 ‘대비(大悲)갑사’가 포진해 오갑사가 됐다.

다섯 갑사가 한꺼번에 창건되던 때는 서기 560~566년 사이였다. 북대암 인근서 수행하던 한 스님이 이 일의 주체로 나타나 있으나 그 실제 지휘자가 정권이었을 수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창건과 중창을 군사적 목적과 연관 지어 생각한 결과다.

그러고 보면 오갑사의 창건 시기는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한창 영토 확장전쟁을 벌이던 시기와 일치한다. 착공 2년 뒤인 562년에 대가야를 합병한 게 상징적 사례다. 그 전쟁 때 신라군의 최전방 기지는 어차피 청도였을 터이다. 하필 그때에 맞춰 오갑사가 창건된 걸 우연으로만 보기가 아쉬울 법도 하다.

운문사의 첫 중창주라는 원광법사가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제시해 줬다는 사실에서도 군사적 연관성이 읽힐 소지가 있다. 서기 600년 중국서 돌아온 스님은 대작갑사에 3년 머문 뒤 가슬갑사로 옮겼으며, 거기서 세속오계를 제시한 것으로 돼 있다. 그 가슬갑사 터로 삼계계곡 계살피골 깊은 곳을 지목하는 경우가 있으나, 유물 출토 상황 등으로 미뤄 배너미골 즈음이었으리라 보는 시각 또한 강력하다.

두 번째 중창주 ‘보양국사’는 아예 고려 왕인 왕건을 군사적으로 돕는다. 신라가 패망한 뒤 불교가 신생 세력과 손을 잡은 모양새다. 반대급부로 왕건은 운문사에 토지 500결을 내려줬다. 유홍준 교수는 그 면적이 청도 전체 논밭 면적의 8분의 1(조선 초 기준)에 해당한다고 계산해 놓고 있다. 운문사는 그로써 경제적으로 반석 위에 올라앉았다고 봐야 할 터이다.

운문사라는 이름도 서기 937년 그 시점에 왕건이 내려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전 해에 후백제까지 소멸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했으니 축하 논공행상이 있었을 법하다. ‘운문’은 중국 ‘운문종’의 개조라는 광동성 운문산 문언(864~949)스님에서 이름을 딴 것이라 했다. 하지만 937년은 운문스님 생전인 바, 정보 전파 속도가 매우 느리던 혼란기 후삼국시대 이 땅까지 그 스님의 명성이 자자해졌으리라고는 간단히 납득되지가 않는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그 이후에 얻은 것 아닐까 싶다.

운문사 중창 과정에서 그런 일들 못잖게 주의를 끄는 사안은 ‘까치’의 등장이다. 후삼국 전쟁으로 파괴돼버린 운문사 중창을 위해 보양스님이 고심하고 있을 때 까치가 쪼는 지점을 팠더니 탑 쌓을 전돌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운문사 이름에 ‘까지 작’자가 들어가 ‘작갑사’(鵲岬寺)가 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운문사 이름은 그냥 ‘대갑사’ 정도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 중 ‘갑사’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앞서 본 바 있는 ‘유운문산록’(이중경) 속에 등장하는 어떤 스님의 설명이 참고가 되려나 싶다. 그 스님은 “까치가 쪼는 지점에서 파낸 전돌을 쌓아 사방 1장(丈) 높이 2장 크기의 갑(岬)을 만들어 그 속에 불상을 모셨다”고 했다. 사방 2m 높이 4m 크기의 탑 비슷한 형태이되, 사리가 아니라 불상을 모셔 불전의 기능을 갖도록 한 일종의 건축양식이 갑이 아닐까 생각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까치와의 인연은 그 후에도 이어져, 조선시대 기록에 까치를 부른다는 뜻의 ‘환작대’(喚鵲臺)가 절 뜰 복판에 있었다 한다. ‘작압’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전각도 있으니, “산이 오압(五鴨) 사이에 있다”고 해서 ‘압(鴨)’ 자를 덧붙였다는 설명이 보인다.

이런 여러 정황에서 자연스레 연상되는 게 석남사 기록이다. 석남산(운문산)에 까치가 많아 그 이름이 ‘까치산’이 됐다가 ‘가지산’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밝혀낼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까치와 이 땅 사이엔 필연코 두터운 인연이 있지 않을까 싶다.

1229년엔 선종 가지산문 중흥조인 원응국사가 주지로 부임해 운문사의 경제기반을 더 튼튼히 했다. 1277년엔 일연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삼국유사를 썼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절이 타버렸다가 100년 뒤인 1690년대에 설송스님에 의해 재건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어 온 운문사에 현대 들어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비구(남자)스님 대신 비구니(여자)스님들이 절을 맡은 일일 터이다. 거기엔 대한불교 조계종의 굴곡 많았던 현대사와 대구·경북지역의 중요한 최근사가 집약돼 있기도 하다.

조계종 불학연구소의 ‘불교사연구총서’들과 전국비구니회 편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 등의 서술에 따르면, 그 전환 계기는 비구·비구니 스님들이 벌인 절 되찾기 운동이다. 1954년 격화된 그 일을 통해 대처승들로부터 많은 절이 회수됐으며, 그 과정서 대구 동화사가 1955년 ‘비구니총림’으로 지정됐다. 교구 본사 운영권을 비구니스님들이 넘겨받는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일 년 만에 중단됐다. 동화사는 다시 비구스님들에게 넘겨지고 비구니스님들에겐 대신 운문사가 주어졌다.

운문사 또한 그 전에는 대처승들이 운영하며 강원(講院)과 선원(禪院)을 열고 있었다. 그 시절만 해도 비구니(혹은 사미니)스님만을 위한 강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경전을 가르치는 강원과 참선하는 선원은 스님 육성과 수행의 필수 기관인데도 기회가 많지 않았다. 비구니스님들은 운문사 산내 암자인 청신암(靑◆庵)에 기거하면서 큰절 혹은 다른 강원으로 가 경전을 공부했다.

대처승들로부터 넘겨받아 운문사를 재건한 초기 비구니 주지도 바로 그 청신암 출신인 유수인(兪守仁ㆍ1898~1997)스님이었다. 스님은 운문사 바로 앞마을인 운문면 신원리 및 그것과 심원령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경주 산내 일부리 심천마을에 부모 및 본인의 출생 연고를 갖고 있었다. 1905년 여덟 살 때 청신암 스님을 따라 절에 들어선 후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하고 금강산 등 전국을 돌며 만공(滿空)스님 등 여러 선사들 아래서 참선 수행했다.

그러다 1940년 이후 부산에 머물며 ‘서운암’ 등을 창건해 포교활동에 나서 있던 중 운문사 주지로 임명된 것이다. 수인스님은 그 후 1966년 말까지 운문사를 맡아 대처승들과의 힘든 송사(訟事)를 이겨내느라 법정에 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농지개혁으로 잃어버린 경제적 기반을 회복시키고 전쟁까지 겹쳐 더 피폐해진 전각 재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렇게 힘든 중에도 비구니스님들은 1958년 비구니 전문 강원을 개원했다. 지금까지 1천600여명의 스님을 배출해 전국 4대 비구니승가대학 중에서도 최다 실적을 쌓고 있는 운문사 강원이 출범한 것이다. 대강백들이 이 강원을 이끌어 큰 힘이 돼 줬다.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 묘엄스님도 1960년대 후반 운문사 강주를 지냈다. 1970년대부터는 명성스님이 맡아 더 발전시키고 2003년에 선원(문수선원), 2008년에 율원(律院·보현율원)까지 갖췄다. 불교 종합대학 격인 ‘총림’(叢林) 규모에 이른 셈이다.

1994년 이후 조계종에 새 규정이 생겨 승가대학을 졸업해야 스님이 될 수 있게 됐다. 장래 전국 비구니스님 중 상당수가 자연스레 운문사 출신일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전국 4대 비구니승가대학 중 2개가 경북에 있다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다른 한 곳은 김천 수도산 청암사이며, 이 외엔 동학사·봉녕사에 승가대학이 있다. 그와 별도로 통학하는 삼선승가대학이 운영되고 있고, 근래 유마사 승가대학이 추가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무적천(舞笛川) 변전사   운문분맥 북편 청도 땅을 흐르는 물길이 동창천임은 누구나 알 만하다. 그럼 그 남쪽을 흐르는 하천은 무엇일까?  밀양 산내면(山內面) 지역을 관통하는 ‘동천’(東川)이다. 이보다 더 남쪽으로는 밀양 표충사 계곡의 ‘시전천’이 흐르다가 보다 큰 ‘단장천’에 합류한다. 그 두 하천을 가르는 분수령은 가지산 아래 능동산서 출발해 재약산(천황산)~도랫재~정승봉~정각산으로 이어가는 산줄기다.

  이 재약산~정승봉 분수령서 주목할 것은 ‘도랫재’(해발 520m)다. 이 재에서 60도 방향으로 총 네 산줄기에 걸쳐 네 개의 재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어서다. 둘째는 가지산~운문산 사이 아랫재(723m), 셋째는 지룡능선 배너미재(508m), 네 번째는 문복능선 수리덤산~옹강산 사이 심원재(449m)다.

  이 재들을 길목 삼아 걷는다면, 경주 산내면서 심원재를 넘어 삼계계곡에 이르고, 배너미재를 넘어 천문동에 도달하며, 아랫재를 넘어 밀양 시례에 닿아, 도랫재를 넘어 바로 표충사 계곡으로 들어선다. 경주 일부리와 밀양 구천리 사이가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돼 겨우 60리 거리(평면 기준)로 축지(縮地)되는 것이다.

  이 희한한 자연현상을 두고 밀양·경주·청도가 별차 없이 공유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게 옛날 옛적 홍수시대 뱃길이라는 것이다. 듣다보면 정말 그때의 실제 경험이 인류 집단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새겨진 것 아닐까 싶어진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홍수가 났던 것일까? 깊은 산일수록 홍수나 배와 관련된 지명과 전설이 많은 걸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대구권 팔공산 동록(東麓)의 신원마을에 있는 ‘배안골’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스며 있다. 지명기록원이 그 이름을 납득 못해 ‘배암골’로 임의 해석해 국가기본도에다 적어 넣은 게 이해될 성도 하다. 홍수시대에 배를 매던 곳이라 해서 산꼭대기 암괴가 ‘배바위’라 불리고 그에 따라 그 산 전체가 ‘주암산’(舟岩山)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운문분맥 일대에서는 그렇게 큰물이 져 온 산이 다 물에 잠기고 꼭대기만 조금씩 남았을 때 그 모양에 따라 산 이름도 정해졌다고 했다. 옹기만큼 남았으면 ‘옹기산’(옹강산, 문복능선), 종지만큼 남았으면 ‘종지산’, 북만큼 남았으면 ‘북바위봉’… 하는 식이다. 참으로 낭만적인 이야기다. TV나 들여다보고 있는 요즘 시대에야 꿈도 못 꿀 상상력의 소산일 수 있다. 종지산은 운문사서 금천으로 나올 때 호수 건너편으로 정면 대면케 되는 오진리 입구(서편) 돌출봉이다.

  하지만 운문분맥에는 슬프고 가슴 에이는 역사도 함께 있다. 고려시대 농민항쟁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1193년 광범하게 폭발한 경상도 항쟁이 운문분맥 일대를 근거지로 그 후 10년간이나 지속됐다. 옷조차 변변찮던 시절 그 깊은 산속에서 그 긴 세월을 버틴다는 것은 살인적인 생존환경과 대결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절망감이 얼마나 무겁고 힘겨웠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우직한 농민군은 아마도 기본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을 터이지만 국가는 그들을 敵(적)조차 못되는 ‘도적’(雲門賊)으로 몰았다. 봉기 주동자 김사미는 관군의 잔꾀에 속아 살해됐고, 후속 지도자였던 패좌(?佐)는 하산길에 피살됐다. 나머지 농민군인들 목숨이나 부지했을까. 그럴 때 토벌군에 앞장섰던 이규보(李奎報)가 쓴 편지에 “운문산 송이버섯을 구워먹으니 맛이 좋다”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굶다시피 하며 살았을 농민군과 왠지 대조되는 모습이다.

  자연 계절이 그러하듯 인간세상 또한 돌고 도는 것, 그 이후 운문분맥 동네에는 큰 호사(好事)가 찾아들었다. 탄소가 많이 들어 무른 무쇠(銑鐵)를 녹여 솥을 만드는 용선(鎔銑)공업이 그 깊은 산 속에 둥지 튼 것이다. ‘무적천’(舞笛川) 주변이 입지였다.

  무적천은 운문천(운문사계곡)과 신원천(삼계계곡) 물이 합쳐 이루는 더 큰 물길이다. 신원리 문명분교 부근서부터 동창천 합류점까지, 즉 지금의 운문호까지가 무적천이다. 앞서 살핀 동편 문복능선과 서편 호거능선으로 둘러싸였다. 풍광이 매우 빼어나, ‘병풍바위’ 등 물가에 둘러선 암벽들과 내 바닥의 장난감 같은 조약돌들이 여전히 많은 행락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옛날에는 여기서 나는 은어회가 왕실까지 진상됐다는 얘기도 들렸다.

  ‘무적’이라는 이름은 문명분교 뒤에 있는 ‘무적산’에서 유래했을 테다. 춤과 피리를 가리키는 한자로 조합돼 무척도 풍류가 느껴지는 이름이다. 산 북편 들도 ‘무적들’로 불린다. ‘무적’은 때로 ‘무지개’로 변음 되는 바, 호거능선을 살필 때 본 ‘무지개산’이란 이름도 그런 경우일 수 있다.

  무적천변에 언제 솥 공장들이 들어섰는지 구체적으로 검증한 연구결과는 만나지 못했으나, 서기 1800년 이전에 이미 터를 잡았다는 설명이 보인다. 1850년에 현지를 유람한 김상은(金尙殷)은 “솥과 번철 화로를 만드는 것이 제법 볼만했다”고 써 놨고, 1888년 찾았던 이호우(李浩祐)는 밤에 솥 만드는 광경을 보고 직접 묘사해 두기도 했다. “이 마을은 솥 만드는 곳으로 나라에 이름이 높다. (용광로)불빛은 하늘에 닿고 들끓는 사람들의 얼굴은 푸른빛이다. 쇳물 쏟아져 나오는 것이 대나무 홈통으로 물을 받아 그릇에 채우는 것 같다. 가마를 앞뒤서 나란히 들어 몇 말 크기의 거푸집 솥발 구멍으로 쇳물을 부어 넣는다”고 했다.

  여러 증언과 청도문화원이 만든 ‘마을지명유래지’(1996)의 서술 등에 따르면, 이 무적천 유역에서는 한때 전국 솥의 70%가 만들어졌다. 최상류 신원리, 그 아래 오진리, 더 하류 방음리 등이 그 터전이었다. 현지 어르신들이 목격하고 기억하는 최근세의 공장만도 신원리에 3개, 방음리에 2개나 됐으며, 오진리에도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솥은 많을 경우 연간 1만8천여개에 달했다. 신원리 삼거리에 자리한 중심마을 이름을 따 ‘속계솥’이라 불렸으며, 입이 작고 몸체는 커 ‘옹달솥’이란 별명도 갖고 있었다.

  거대한 ‘속계솥 주물(鑄物)단지’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고, 엄청난 액수의 임금을 살포했다. 전국을 돌며 쇠를 모아오는 사람이 있어야 했고, 특수한 흙을 모아 봄부터 거푸집을 만들어 둘 사람도 필요했다. 쇠를 녹이고 거푸집을 데우는데 들어가는 굉장한 양의 땔감 준비에는 더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준비가 끝나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가장 바람직한 온도로 불을 땔 기술자가 있어야 하고, 풀무를 밟아 바람을 불어넣을 장정들이 소용됐다. 펄펄 끓는 용광로에다 쇳조각들을 기술적으로 던져 넣을 사람, 이루어진 쇳물을 밖으로 이끌어낼 기술자… 등등해서 필요한 인력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외지에서 일꾼들이 찾아들고, 솥 중개인이 줄을 서는가 하면, 이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여각이 생겨나고, 결국엔 더 멀리서 공연패가 찾아들기까지 했다. 신원리가 한때 400호가 넘는 큰 마을로 확장된 것은 그래서였다. 덩달아 경산 자인시장도 호사를 누렸다. 속계솥이 전국으로 퍼져가는 주 중계지가 거기였다. 운문과 자인시장 사이의 최단거리 코스였던 비슬기맥 상의 ‘곱돌이재’도 자연스레 함께 부산스러워졌다.

  운문 땅의 경제적 호황은 그곳 사람들로 하여금 일찍 개화하고 일찍 신교육에 눈 뜨게 했다. 청도 전역에서 가장 먼저 사설 ‘문명학교’가 설립된 게 그 증거다. 역시 역내 최초로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른 연유도 그것이었다. 지금의 70대 후반 어르신 중 상당수도 외지 중고교 유학생 출신이다. 깊은 산촌의 일이라 믿기 어렵고, 평야지역 농촌과 비교해도 훨씬 앞선 교육열이라 봐야 할 테다.

  어쩌면 ‘운문면’이 탄생한 데도 저런 경제적 기반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본래 이 땅 중 상당 면적은 청도도 아닌 밀양 소속이었다. 전혀 동떨어진 관계지만 그렇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 땅은 대개가 수탈의 대상이었다. ‘날아 들어온 땅’라는 뜻에서 학술용어로 ‘비입지’(飛入地)라 부르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이 밀양 땅과 경주·영천의 일부를 모으고 청도 ‘동이위면’(東二位面)의 4개 마을을 합쳐 1910년에 만든 것이 운문면이다.

  그러나 그 80여년 뒤 운문면은 어렵사리 모았던 여러 마을을 다시 잃었다. 1990년대 초 운문댐이 건설돼 호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적천변의 방음리부터 절반 이상을 떼였다. 그 아래 순지(蓴池)·서지(西芝)가 수몰됐고, 200호나 됐던 면소재지 마을 대천리(大川里)까지 사라졌다. 선사시대 일대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풍광이 특별했던 공암리(孔岩里)도 거의 뜯겼다. 말하자면 운문면의 중심부를 잃은 것이다.

  운문면의 운명이야말로 ‘기구하다’는 표현에 썩 어울린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없던 게 생겼다가 다시 물에 묻혔으니 그 기구함을 어디다 댈 것이며, 도적의 땅으로 토벌 당하고 수탈의 땅으로 비입지가 됐다가 근대 주물공업의 기린아로 솟았으니 그 또한 기복이다. 빨리 개화했다가 만세운동으로 철퇴를 맞았고 좌우대립 때 또 치유하기 힘든 상해를 입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이게 다 운문분맥이라는 거대한 산체(山體)에 깃들어 맞은 인연들일 터이다.

 

억산과 그 북사면   특이하게 발달한 억산 남부를 살폈으니 이제 억산 본채로 돌아가 운문분맥 흐름을 다시 짚을 차례다.

  호거산을 거친 다음 운문분맥은 ‘억산재’로 낮아졌다가 ‘억산’(億山)으로 다시 솟은 후 더 낮은 ‘인재’로 떨어져 내린다. 그런 뒤 ‘구만산’(九萬山) 덩어리로 높아져 잠시 해발 700m대를 회복하기도 하나 차후엔 줄곧 그 이하 높이를 오르내린다.

  이 여정에서 동편 억산재(765m)와 서편 인재(555m) 사이 3㎞ 정도의 산덩이가 하나의 별개로 구분된다. 그 동쪽에 호거산 덩어리가 있고 서편에 ‘구만산 덩어리’가 있으며 중간에 ‘억산 덩어리’가 있는 것이다.

  이 산덩이에 붙은 ‘억산’이라는 이름은 다른 데서는 듣기 힘든 매우 특이한 것이다. 그 ‘억’을 부자의 상징으로 여겨 새해 첫날 그 정상에 올라 한해 사업번성을 축원하는 단체가 있는 것도 그래서 빚어지는 일일 터이다.

  밀양 산내면 향토지는 그 이름이 ‘億萬乾坤’(억만건곤)에서 왔다고 풀이해 놨다. ‘하늘과 땅 사이 수많은 명산 중의 명산’이란 뜻이라 했다. 반면 1940년 쯤 씌어졌다는 ‘淸道文獻考’(청도문헌고)에는 이 산의 이름이 보다 흔한 ‘덕산’(德山)으로 나타나 있다. ‘운문산서 뻗어 나오는 산이면서 구만산이 뻗어나가는 산’을 지목하며 ‘덕산’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억산 덩어리의 최고점 높이는 해발 954m다. 그런데도 정상석(頂上石)은 944m로 적어뒀다. 그 바위엔 누군가가 까맣게 칠을 해 둬서 이채롭기도 하다. 하나 칠은 오래 갈 수 없는 것, 진작부터 조금씩 벗겨져 나가니 머잖아 칙칙해질까 걱정이다.

  유명한 ‘억산바위’는 정점의 동쪽 부분에 해당한다. 칼로 잘린 듯한 그 직벽(直壁) 단애의 지형도 상 높이는 130m에 이른다. 옛 어른들이 일대를 ‘호거산’이라 불렀던 이유가 이 특이한 형상 때문일 가능성은 앞서 살핀 바다. 그러면서 산덩이 몸체 또한 20m 깊이의 홈을 사이에 두고 서편의 954m봉과 동편의 946m봉으로 쪼개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붙은 이름은 ‘깨진바위’이다.

  이 깨진바위에는 용이 되려다 좌절한 ‘꽝철이’의 전설이 맺혀 있다. 무대는 그 북편 대비골에 있는 대비사 절. 현재의 대비사는 고려시대에 옮겨지은 것이라 하니 이야기는 절이 더 아래쪽 박곡리 마을에 있던 신라시대 것일지 모른다.

  그런 시절 대비사에서는 상좌스님 모습을 한 어떤 존재가 용이 되려고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승천을 위해 운문사계곡 깊은 곳에 못을 만들기도 했으니, 이 시리즈가 앞서 ‘못안(골)’으로 지목했던 게 그 자리였다. ‘못골’이란 명칭도 저런 연유로 생겼으며, 거긴 대비골서 호거능선만 넘으면 쉽게 닿는 곳이다.

  하지만 그 상좌는 성사 직전에 대비사 주지스님에게 정체를 들켜 승천에 실패한 채 꽝철이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사람을 피해 달아나야 할 신세가 된 것이다. 그래서 화가 치밀어 꼬리를 내려 쳐 산을 쪼개버렸다. 그 산물이 ‘깨진바위’다.

  그런 뒤 꽝철이는 운문분맥을 넘어 밀양 산내면 땅으로 도망 가 살았다. 새로 자리 잡은 그의 터전은 가지산 이야기 때 살핀 바 있는 ‘시례 호박소’다. 그 이유로 가물 때마다 호박소에서는 꽝철이를 쫓기 위한 기우제가 벌어진다.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호박소’(臼淵)라는 시를 통해 비판한 바로 그 일이다. “아전에게 들으니 태수가 호박소 갔다네 / 거기에 용이 있어 비 오기를 빈다는구나 / 그러나 정말 백성을 생각한다면 / 본분을 다하는데 더 마음 쓸 일이라네…. ”

  저렇게 안타까운 사연을 간직한 억산 정상부를 지난 후 운문분맥은 제법 세게 내려서다가 5분여 후 헬기장에 닿는다. 해발 870m인 그곳은 동편 박곡리와 서편 오봉리를 가르며 내려서는 ‘억산북릉’ 출발점이다.

  이 지릉의 상징은 두 마을 바로 위에 솟은 579m봉이다. 그걸 박곡서는 ‘귀천봉’이라 하고 오봉리서는 ‘개물봉’이라 불렀다. 각 마을서 보는 느낌이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박곡리서는 신령스런 느낌까지 들 정도로 정면(남동쪽)으로 뾰족한 반면, 오봉리서 보기엔 그저 마을 뒤의 밋밋한 산등성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억산북릉은 매우 인기 있는 환종주 등산코스다. 박곡리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운 뒤 이 산줄기로 들어서서 귀천봉을 거쳐 억산바위로 올랐다가, 억산재와 호거산 904m봉을 거쳐 호거능선으로 옮겨 탄 뒤 대비산으로 내려서서 그 서릉을 걸어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깨진바위가 가장 가까이로 보이는 등 전망이 뛰어나 주위 살피느라 시간을 많이 뺏기기 일쑤인 노선이다.

  억산북릉 출발점 헬기장을 지난 후 운문분맥은 한참 동안 오봉리 남쪽울타리로 역할 한다. 그 임무는 동편 금천면(오봉리)과 서편 매전면(남양리)의 경계능선이 내려서는 800m봉에 이를 때까지 지속된다. 이 구간 운문분맥은 헬기장서 단박 60여m를 내려선 뒤 대체로 810±30m대 높이를 오르내린다. 오봉리 공간은 그 도중 835m봉서 내려서는 지릉에 의해 동편 ‘사기점골’과 서편 ‘복잠골’로 더 나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게 분맥의 마지막 800m대 능선이다. 800m봉을 끝으로 그 기세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이후의 운문분맥 3.8㎞ 구간은 매전면 남양2리(임실마을) 남쪽 능선에 해당한다. 이 구간에선 오르내림이 다소 격해, 20여분 후 해발 555m의 ‘인재’로 내려앉았다가 10분 만에 668m 산덩이로 솟고, 또 586m재로 추락했다가 691m봉으로 되 솟는다. 691m봉은 매우 큰 ‘구만산’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는 시발점이다. 거기서 구만산을 거쳐 이어 가는 능선은 편의상 ‘구만능선’이라 불러둬 보자.

  이렇게 펼쳐지는 억산 정상봉 이후 운문분맥에서 가장 중요한 주민 생활사의 현장은 ‘인재’였다. 이것이야말로 청도와 밀양 산내면을 잇는 주 통로였기 때문이다. 그걸 통해 청도 쪽 사람들은 산 너머 산내 팔풍장에 다녔고, 산내 사람들은 인재를 넘어 청도 동곡장을 내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양편은 각자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고 다른 쪽에 부족한 걸 채워줬다.

  양쪽 어르신들에 따르면, 그 시절 밀양 사람들은 소나 염소를 길러 동곡장에 몰아다 팔고는 소금을 사고 솥을 사 갔다. 지금이야 어디 가나 흔한 물건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팔풍장에는 소금·솥 같은 게 귀한 반면 동곡장에는 수량도 많고 값도 쌌다.

  또 청도 사람들은 사과·감 같은 과일을 이고지고 해서 산내 팔풍장에 가서는 쌀·보리쌀 등 곡물로 바꿨다. 지금은 산내 ‘얼음골사과’가 더 유명하나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쪽에는 사과나무라곤 없었기 때문이다. 청도로부터 사과를 사 먹던 밀양이 이제 더 유명한 사과 산지가 됐으니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그럴 때 옛 사람들이 그 높은 운문분맥을 어떻게 넘어 다녔을까 생각할 수 있겠으나, 어르신들은 “멀어봐야 30리 거리”라고 대수롭잖게 받아 넘겼다. 그 북편 청도 매전면 임실마을과 남편 밀양 산내면 인곡(仁谷)마을이 어렵잖게 이어진다는 뜻이다.

  인곡마을과 인재를 잇는 길목은 억산 남부 별채와 구만능선 사이에 생겨 있는 ‘소매골’ 골짜기이다. 봉의저수지 옆으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난 낭만적인 그 소매골 소로를 유람하듯 걸어 올라도 한 시간 남짓 만에 인재 아랫부분에 도달됐다. 거기서 산으로는 갈 짓 자 모양의 생활로가 연결돼 비교적 힘을 덜 들이고도 10여분 만에 고갯마루에 이를 수 있었다. 인곡마을서는 이 옛길을 매우 중시해 오랜 세월 일부러 날을 잡아 보수하고 관리했었다고 했다. 좁은 오솔길이나마 그래도 풀을 베고 폭우로 팬 곳을 고치는 등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올라선 고갯마루서부터 북편 임실마을 사이는 오래 전부터 산판길이 나 있어 자동차까지 오르내린다. 그 길목은 ‘막터골’이라 불리는 바, 그건 청도 쪽 여러 마을 사람들이 막을 쳐 놓고 기거하면서 인재를 넘어 가 인곡 소매골에서 거름으로 쓸 풀이나 땔감을 베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막터골을 마감하는 더 서편 능선은 인재를 지나 솟아오르는 668m 산덩이서 북으로 내려서는 짧지만 뚜렷한 지릉이다. 거기에는 ‘벼락덤’이라 불리고 광산이 개발돼 있는 581m봉이 솟았다. 소매골에서 채취된 땔감은 인재를 넘고 벼락덤 아래 막터골을 거쳐 대구 남문시장으로 보내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앞서 억산재를 팔풍재로 잘못 호칭하고 있음을 살핀 바 있지만, 팔풍장 길목임을 강조하려 든다면 인재야말로 그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재인 셈이다.

  북편 청도 쪽에서는 억산바위·깨진바위 뿐 아니라 거기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어가는 운문분맥 주능선이 매우 잘 보인다. 가지산은 전혀 안 보이고 운문산~호거산(962m봉) 또한 기를 써야 겨우 분간할 수 있던 그 이전의 동편 구간과 천양지차다.

 

구만협곡과 장수골 청도-밀양을 잇는 길목 ‘인재’를 지난 뒤 운문분맥은 ‘구만능선’ 분기점에 올라선다. 그 691m봉서 줄곧 남쪽으로 내려서는 구만능선의 총 주행 거리는 무려 4.5㎞. 종점은 동천(東川)을 사이에 두고 밀양 산내면 소재지 송백리와 마주보는 봉의리 마을이다.

그 부근, 흔히 등산 출발점으로 삼는 ‘구만암’ 인근 지점서 구만능선을 다 걸어 오르는 데는 90분 정도 걸린다. 출발 20여분 만에 주능선에 도달하며, 총 1시간 만에 동편 인곡(봉의)저수지 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에 이른다. 사실상의 구만능선 첫 봉우리인 738m봉 바로 아래 잘록이다. 서편으로 청도 매전면의 들녘이 훤히 바라다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여기부터다.

거기서 30여분 더 가야 도달하는 구만산(九萬山·785m)의 입지는 좀 묘하다. 운문분맥 분기점과 10분 거리를 두고 솟았을 뿐 아니라, 구만능선 본선에서조차 300여m 벗어난 곁가지에 맺혔기 때문이다. 구만능선에서는 이런 짧은 지릉들이 여럿 갈라져 나가 그 서편 통수골 구조를 복잡하게 만든다. 아홉 번 굽는다고 해서 ‘九彎山’(구만산)이라 부르기 시작했던가 싶을 정도다.

구만능선 분기점을 지난 뒤 운문분맥은 동그랗게 반원(半圓)을 그리며 방향을 정반대로 돌린다. 그런 주행을 통해 ‘구만능선’과의 사이에 ‘구만협곡’이라 이를 만한 ‘통수골’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통수골은 차라리 ‘용수골’이라 부르는 게 더 실감날 성싶을 정도다. 용수처럼 길게 이어지면서도 품은 매우 좁기 때문이다.

반원을 그리는 중 산줄기는 691m봉 이후 10분 만에 운문분맥 최후의 700m대 봉우리인 712m 암봉에 도달한다. 위세 상실에 심술을 부리기라도 하듯 산길은 그 봉우리를 북으로 휘휘 감아 돌며 10여분 만에 펑퍼짐한 615m 저점으로 100여m 떨어진다.

거기서 5분쯤 오르면 조망이 특출한 660m 덤이다. 임실마을(매전면 남양2리)을 끝내고 사곡마을(남양1리) 공간을 시작하게 하는 경계 산줄기가 북으로 출발하는 기점이다. 전망도 매우 좋아, 덤에서는 비슬기맥 자락의 ‘학일산’ ‘통내산’이 훤하고, 운문호 및 그 주변 ‘호산’ ‘개산’ ‘시루봉’, 동곡마을 등이 한눈에 짚인다.

이것과 5분 거리에 솟은 668m봉도 좋은 전망대다. 거기서는 사곡마을이 시원히 내려다보일 뿐 아니라, 그 옆 재로 나 있는 등산로를 통해서는 마을로 이어 다닐 수도 있다.

반원이 완성돼 산줄기 방향이 정반대로 확정되는 지점은 ‘흰덤봉’(682m)이다. 구만능선 분기점(691m봉)과 50여분 거리에 있고 직전 668m봉을 지나면 15분 만에 닿는다.

하나 등산객들은 이게 흰덤봉인 줄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등산로서 보기엔 특징 없는 펑퍼짐한 육봉(肉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흰덤봉 갈림점’이라고만 적혔을 뿐, 흰덤봉이노라 알리는 표지조차 뚜렷하지 않다. 하나 그 서쪽 장수골 골짜기서 올려다보면 그건 대단한 절벽 봉우리다. ‘흰덤’이라 불리고 ‘白嶝’(백등)이라 한역되는 암괴 때문이다.

이럴 가능성은 갈림점 표지판서 서북쪽으로 몇 걸음만 올라가도 금방 감지된다. 갑자기 서편 세상이 훤하게 틔면서 산줄기가 급락하는 것이다. 그리로 출발하는 지릉을 타고 조금 내려서면 학생야영장 위에 올라앉은 ‘전망대’라 불리는 또 다른 애암도 만난다. 이 전망대 바위 지점서 갈라지는 등산로를 따를 경우 한 시간이면 장수골 마을에 닿을 수 있다. 그 마을서 가장 뚜렷하게 올려다보이는 지형이 바로 흰덤이다.

흰덤봉서 내려서는 이 지릉은 지금까지 봐 온 사곡마을(남양1리)과 앞으로 보게 될 장수골마을(장연리)을 가르는 것이다. 도중에 해발 200m의 ‘애암(崖岩)고개’로 낮아져 두 마을을 이어주기도 하나, 곧 다시 솟아 남북으로 십리나 뻗으며 동창천변 동화마을(호화2리)과 산 쪽 남양리 공간을 갈라붙인다.

현장이 이런데도 등산 안내서·지도 상당수는 엉뚱한 걸 흰덤봉이라 지칭한다. 다닥다닥 붙어 선 682m봉-697m봉-669m봉 중 정답인 682m봉은 놔둔 채 697m봉이나 669m봉을 지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697m봉은 높긴 하되 지릉을 갖지 못한 단순 육봉이다. 669m봉 서편에는 마을서 ‘명사지굴’이라 부르는 특이한 바위굴이 몇 개 있다. 어지럽던 시절 빨치산이 그 굴에 의지해 살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운문분맥은 흰덤봉 구간 이후 남쪽으로 달리면서 용수 같은 통수골의 나머지 외곽선을 그려나간다. 하지만 669m봉 이후엔 1㎞에 걸쳐 해발 500m대로 납작 엎드린다. 이 때문에 통수골 너머 구만능선을 걸을 때 그 낮은 구간을 통해 매전면 온막리 일대의 들판이 훤히 넘겨다보여 놀라기 일쑤다. 거꾸로 온막 쪽서는 구만산이 운문분맥 봉우리인 양 솟아 보여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500m대 구간의 최저점은 해발 545m 재다. 거기엔 서편 장수골과 동편 통수골로 이어가는 등산로가 네거리마냥 나 있다. 동편으로 내려서면 10분 만에 통수골 바닥에 도달할 수 있으니, 그건 그곳 골 바닥의 높이 또한 해발 460m나 되기 때문이다. 그 도달점서 상류로 오르면 구만산이고, 하류로 방향을 잡으면 불과 몇 분 만에 구만폭포에 이른다.

반면 장수골 쪽으로 내려설 경우 온 골 안을 병풍처럼 둘러선 주상절리 같은 직벽 단애들을 만난다. 다른 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장수골 마을 입구서 접근할 경우 그 골 끝부분 500m대 능선 아래에 해당한다. 이런 괄목할 풍광들에의 특출한 접근성 때문에 545m재는 매우 중요한 등산 경유점이 돼있다.

500m대 구간을 끝내고 도달하는 곳은 612m봉으로, 그것 또한 좋은 전망대다. 하지만 그 후 15분 만에 이르게 되는 658m봉으로서 운문분맥은 통수골 서편 울타리로서의 역할을 마감한다. 658m봉서 지릉이 내려가 통수골 초입을 가름해 주기 때문이다. 그 산줄기로도 등산로가 잘 나 있다.

658m봉 이후 운문분맥은 약 10분 걸을 동안 펑퍼짐하고 편안한 진달래 군락 구간이다. 그리고는 널찍한 삼거리에 도달하니, 바로 육화산(매전면·675m) 등산로 분기점이다. 하나 실제 육화산 능선 분기점은 거기서 5분 더 가야 솟는 657m 암봉이다. 이 봉우리는 그 능선 서편의 매전면 내리(內里)서 볼 때 매우 뾰족하니 고추처럼 솟아 ‘고추봉’이라 불려 왔다고 했다.

매전면 장연리 장수골마을서 출발해서 육화산 능선을 오를 경우 육화산까지는 3㎞, 걸리는 시간은 80분쯤 된다고 안내돼 있다. 하지만 45분여 공들여 첫 봉우리인 399m봉에 오르고 나면 힘든 구간은 거의 지났다고 봐도 좋다. 동편으로 이어가는 운문분맥 본능선은 간곳없고 더 동편의 구만산(785m)과 그 아래 738m봉이 주릉 산봉들인 양 솟아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거기다. 그런 특징 때문인지 마을에선 399m봉을 ‘천지봉’이라 부른다고 했다.

도합 70분 정도 걸려 도달하는 566m봉도 주목해 둘 지점이다. 꼭짓점이 제법 널찍해 식별이 쉬운 거기서는 서쪽으로 산줄기가 하나 갈라져 나가 지나온 장연리와 앞으로 거쳐 갈 내리 공간을 구분 짓는다. 그러는 도중 252m재로 떨어져 두 마을을 이어주고는 다시 463m봉으로 솟아오르니, 그걸 일대서는 ‘고깔봉’이라 불렀다. 동창천변 도로를 주행할 때 전면으로 매우 솟아 보이는 바로 그 봉우리다. 유독 냇가 쪽으로 튀어나온 게 원인일 터이다.

육화산 능선 분기점인 고추봉을 지나고 나면 운문분맥은 100m 이상 급락하며 30여분 후 산불초소가 있는 561m봉에 도달한다. 밀양 산내면 송백리 및 봉의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좋은 전망대다. 송백리 구간 국도서 올려다 볼 경우 이 산불초소 봉우리는 산내면 중심지의 북서쪽 울타리 종점으로 솟아 보인다.

바로 그런 특징 때문에 분맥 종주객에게 561m봉은 주의해야 할 곳이다. 산불초소에서 남서쪽으로 직진해 평평하게 하강하는 산줄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 산줄기가 바로 561m봉서 더 서쪽의 용전리와 구분 지으며 감아 내림으로써 산내면 중심지를 마감하는 지릉이다. 분맥 길은 초소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 급강하, 10분 내에 ‘오치령’(435m)에 닿는다.

오치령은 운문분맥 남쪽의 밀양 산내면과 북쪽 청도 매전면(내리)을 잇는 고개다. 하지만 양 지역 간 내왕이 빈번한 통로는 아니었다고 했다. 북편 매전면에선 인접 유천장을 보고 남편 산내서는 팔풍장을 봄으로써 생활권이 크게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자동차가 쉽게 다닐 정도로 산길이 넓혀져 있다. 이 고개는 애초 ‘오치’라 불렸을 터이지만 그 밑 해발 400m 높이에 자리한 산내면 용전리의 한 자연마을이 그걸 마을 이름으로 가져가면서 재 이름이 오치령이라는 겹말로 변해졌으리라 싶다.

오치령을 지난 뒤 운문분맥은 다시 10분 만에 521m봉으로 상승하며, 거기서 서쪽으로 출발하는 지릉이 경남-경북의 도계(道界)이자 밀양-청도의 시군계가 된다. 조금 둥그렇게 감아 돌며 서쪽으로 이어가는 그 분계령 끝 지점이 다음번 살피게 될 ‘오대’(烏臺)다. 이 분계령 남쪽에는 밀양 상동면 신곡리가 자리하고 북에는 청도 매전면 구촌리와 내리가 분포했다.

북에 있는 두 마을 사이로는 분계령 중간 즈음에서 지릉이 하나 뻗어나간다. 이 지릉 분기점에 솟아 구촌리 동산마을의 앞산이 되고 있는 539m봉을 마을 어르신은 ‘종지봉’이라 불렀다.

 

운문산 유산록(遊山錄) 지난주 살핀 오치령 남서쪽 521m봉을 마지막으로 운문분맥 답사를 마친 셈이지만, 밀양강(동창천)과 단장천(동천)을 가르는 분수령으로서의 운문분맥은 거길 지나서도 계속 이어간다. 521m봉~용암봉(龍岩峰·686m)~중산(中山·649m)~꾀꼬리봉(538m)을 거쳐 고속도 밀양 나들목까지 남진하는 게 그 본능선이다.

그 도중의 용암봉과 중산서는 서쪽으로 지릉이 갈라져 나가면서 동창천변 지형 결정을 마무리한다. 용암봉 서릉은 소천봉(小天峰·632m)을 거쳐 ‘박연정’(博淵亭) 혹은 ‘마전암’(馬轉岩)으로 맺는다. 중산 서릉은 낙화산(落花山·626m)~보두산(562m)~분항산(盆項山·267m)으로 이어진다.

이런 운문분맥 흐름을 동창천을 거슬러 오르며 살펴보는 게 지금부터 하려는 일이다. 마침 1642년에 씌어진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이라는 같은 방향 답사기도 만났다. 370여 년 전 현장 기록인 이 책은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 1599~1678)이 44살 때 쓴 것이다. 수헌은 청도에 관해 가장 귀한 기록들을 남긴 분이다. 30살 이전에 군수 부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해 75살에 완성한 청도읍지 ‘오산지’(鰲山志)가 대표적이다. 오산지와 유산록은 모두 근래에 완역됐으니, 이 또한 이 시리즈의 인연인가 싶다.

우리의 답사 시점(始點)은 청도와 밀양을 잇는 ‘상동교’ 지점이다. 밀양시 상동면 땅인 거기는 ‘밀양강’이라는 표지판이 처음 나붙는 곳이다. 운문분맥 쪽 ‘동창천’과 비슬기맥 쪽 ‘청도천’이 그 직전 유천서 합친 결과다.

이 일대서 먼저 주목해 둘 대상은 상동교 바로 남쪽 ‘분항산’이다. 나지막하고 이제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는 이 드물지만, 그건 밀양·청도·대구로 이어지던 엄중한 봉수(烽燧)의 길목이었다. 그 ‘분항봉수’서 횃불을 들면 청도 ‘남산봉수’가 받고 팔조령 ‘북산봉수’가 이어 대구 수성못 ‘법이산봉수’로 넘겨줬던 것이다.

수헌이 출발했던 지점은 그 상류 유천(楡川)이다. 거길 지나 동창천 서편 58번 국도로 거슬러 오르자면 강 건너로 밀양 상동면의 매우 큰 골짜기 두 개가 차례로 펼쳐진다. 앞의 것은 소천봉(632m)~용암봉(686m)~백암봉(679m)~중산(649m)~낙화산(626m)~보두산(562m) 능선으로 둘러싸인 도곡리 공간이다. 슬금슬금 구경해 가며 걸어서 약 7시간 걸리는 그 환종주 산길은 조망이 아주 좋고 암릉도 쏠쏠한 인기 등산코스다.

그 능선 중 용암봉서 동창천으로 내려선 산줄기는 매화리를 복판에 두고 소천봉서 둘로 나뉘며, 남쪽 것의 끝에 ‘박연정’, 북쪽 것 끝에 ‘마전암’이라는 명소가 있다. 둘 다 두 물 머리로 튀어나온 갑지(岬地)인데다 절벽을 갖췄고, 위에는 노송들로 울창하다.

그 중 박연정(博淵亭)은 매우 아름다운 정자이나, 370여 년 전 수헌이 찾았을 때는 심하게 퇴락해 있었다. 안타까워 묻는 말에 주인은 “하나 있던 자식이 일찍 죽었으니 누가 이걸 지키겠는가. 버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한다. 읽는 가슴이 시리다.

박연정에서 수헌은 “드디어 운문동으로 들어서게 됐다”고 선언한다. 앞서 유천을 지나면서는 “이곳이 운문동 바깥 관문이다”고 썼었다. 당시에는 ‘운문’을 그런 넓은 지구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밀양의 두 번째 골은 소천봉~용암봉~521m봉~종지봉(539m)으로 둘러싸인 신곡리 공간이다. 동네 들머리에 마전암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 마전연(馬轉淵)이라는 소(沼)가 있다. 상동교서 접근해 갈 때 매화리와의 경계점인 마을 입구 도로 왼편에 솟은 전파 중계탑 아래다. 길은 본래 그 아래 절벽 위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고 했다. 여전히 흔적이 잘 유지되고 있는 옛길의 풍치는 지금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듯했다.

‘馬轉’(마전)이란 이름을 두고 수헌은 “말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위험을 경계해 지은 이름일 것”이라는 정도로 추측했다. 반면 ‘密州舊誌’(밀주구지, 밀양 옛 기록)에 “신라군에 패한 이서국의 많은 군사와 말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어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하니 더 숙연할 역사의 현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마전암·마전연은 잊혀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창천 파인 바닥만 가리켜 연원도 모른 채 ‘말구르소’로 부른다고 했다.

복주머니같이 둥그렇게 형성된 신곡리 골의 마전암 맞은편 끝자락은 ‘오대’(烏臺)라 불리는 또 다른 갑지 절벽이다. 신곡리 양수장에 인접했고 동창천을 가로지르는 ‘사천보’에 맞닿아 있으며, 청도-밀양의 시·군 경계능선 답사의 시종점이어서 산행 시그널들이 나붙어 펄럭이는 곳이기도 하다.

44살 때의 답사를 통해 오대에 마음을 뺏긴 수헌은 그 5년 후 아예 거기다 별장을 짓고 67살 때까지 왕래했다. 그가 살던 집의 축대는 소나무 숲 속에 지금도 남아 있고, 그걸 받치는 큰 바위 옆면에는 그 사실을 알리는 한자 글씨가 가로로 새겨져 있다.

오대로 내려서는 산줄기에 의해 밀양 신곡리와 구획된 마을은 청도 매전면 구촌리(龜村里)이나, 그 마을 또한 같은 산줄기의 종지봉 지릉에 의해 매전면 내리(內里)와 나뉘어져 있다.

내리는 종지봉(539m)~521m봉~오치령(435m)~561m봉(산불초소)~고추봉(657m)~육화산(675m)~고깔봉(463m)으로 이어달리는 능선에 의해 동그랗게 둘러싸인 넓은 공간이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그보다 ‘중남’이란 말이 더 중요한 지명같이 사용되고 있었다. 다리는 ‘중남교’, 교회는 ‘중남예배당’…인 것이다. 그 중남은 거기 있던 초등학교 이름으로, 일대 7개 마을을 ‘중남학구’라 부르던 데서 유래해 광역 지명처럼 굳어졌다고 했다. 이채로웠다.

내리 북편으로는 운문분맥의 고추봉서 출발한 뒤 육화산을 거쳐 고깔봉으로 내려서는 육화산 능선이 달린다. 그 산줄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육화산이다. 하나 동창천 건너 국도를 북에서 남으로 달릴 때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양 솟아 보이는 것은 고깔봉이다. 물길 쪽으로 유독 길게 튀어나와 있는 게 이유다.

이 육화산 능선 북편 마을은 장연리(長淵里)다. 그리고 고추봉(657m)~흰덤봉(682m) 사이의 이 동네 구간 운문분맥을 독차지한 것은 장연리 세 자연마을 중 ‘장수골(長水谷)마을’이다. 육화산 등산로는 물론 청도서 구만산 넘어가는 산길도 이 마을 안으로 이어져 있다. 마을 입구 장연사(長淵寺) 터엔 보물 677호 3층 쌍탑이 섰고, 마을 안 골은 대단한 애암(崖岩·벼랑바위)들로 둘러싸여 들어서면 마치 바위병풍 속의 별천지에 도달한 듯하다.

장연리 지나 동창천을 거슬러 오를 경우 매전면 동화마을(호화2리)에 닿는다. 운문분맥의 흰덤봉서 분기해 애암(崖岩)고개를 지난 뒤 되솟아 남북으로 길게 이어가는 산줄기 서편 마을이다. 동편에는 사곡·애암 등 남양1리 마을들이 자리했다.

만약 강변으로 나가지 않고 장연리서 산속으로 들어가 임도를 타고 애암고개(200m)를 넘으면 바로 사곡마을에 닿는다. 그 아래엔 ‘애암’이라 부르면서도 ‘아음’으로 표기하는 마을이 있다. 하지만 청도고 김태호 교사는 근래 ‘청도문화’ 10호를 통해 ‘애암’이 옳은 이름이라는 판단을 제시했다. 마을 앞 동창천변에 있던 절벽바위가 ‘애암’이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사곡마을서 그 애암마을을 통해 동창천변으로 나가는 대신 마을 안 골로 더 깊이 들어가면 ‘사곡고개’(220m)를 넘어 남양2리(임실마을)로 연결된다. 밀양으로 이어가는 ‘인재’ 진입점이다.

임실에 인접해서는 억산 아랫마을인 금천면 오봉리(梧鳳里)가 있고, 거기서 ‘독방고개’를 넘으면 박곡리(珀谷里)다. 박곡은 운문사로 바로 넘어가는 ‘면탯재’ 길목이면서 보물 834호 대비사 대웅전과 보물 203호 석불상을 품은 골 깊은 동네다.

박곡리 석불상은 얼굴 부분이 완전히 망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는 뛰어난 석조물로 정평 나 있다. 1850년 현장을 둘러봤던 송재(松齋) 김상은(金尙殷, 1807~1851)은 자신의 ‘유운문산록’을 통해 “의젓한 모습의 돌부처가 있는데 얼굴과 눈이 움직일 듯 완연히 사람 모습이다”고 기록해 뒀다. 160년 전까지만 해도 잘 보전되고 있었다는 증언일 것이다.

박곡리로 들어가는 동창천 가 진입점은 신지리(薪旨里)다. 지금은 강 건너 동곡리(東谷里)로 옮겨졌으나 전에는 금천면사무소도 여기 있을 만치 일대의 구심점이었던 곳이다. 그런 과거를 증언하는 게 여럿 남은 고건축들이며, 한 시절 일대 선비사회의 사랑방이었을 물 가 ‘만화정’(萬和亭)도 그 하나다.

인접해서는 잘 알려진 ‘선암서원’(仙巖書院)이 있고, 그 건너 어성산(御城山)에는 순국의 혼이 서린 ‘봉황애’(鳳凰崖) 절벽이 솟았다. 임란 때 그 위에서 싸우던 박경선(朴慶宣) 의병장이 백병전 중 팔이 잘리자 왜병을 안고 함께 아래 물속으로 떨어져 순국했다는 곳이다. 그는 청도 이서면에서 창의한 사촌 이내의 박씨 문중 ‘14의사(義士)’의 일원이다. 14의사(義士)는 이서면 소재지 동네인 학산리의 보리미 마을 ‘용강(龍岡)서원’에서 모시며, 선암서원 뒤에는 창의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저렇게 유서 깊은 신지·박곡 동네서는 중요한 이야기를 또 하나 들을 수 있었다. 운문사계곡 ‘못골’이 신원리 땅이긴 하나 주 이용자는 이 마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호거능선만 넘으면 바로 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기서 풀 베어 거름하고 나무 베어 땔감 삼았으며 ‘마루타’(토막나무) 만들어 제재소에 져다 팔아 양식을 샀다고 했다.

신지리 지나 더 오르면 임당리이며, 370여 년 전 수헌은 거길 거쳐 현재 운문호로 변해 있는 구간까지 거슬러 살핀 후 무적천으로 물길을 바꿔 운문사로 향했었다. 이제 그 길을 걸을 수 없게 됐으니 댐 안쪽 풍경은 사진으로나 구경해야 할 형편이다.

 

여름, 운문 떠나 비슬로 지난번 동창천변 답사 때 함께했던 '유운문산록' 및 같은 저자의 '오산지'를 번역한 사람은 한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청도 모계고 이상동 교사다. 같은 학교 강래업 교사와 함께 자료 지원 및 조언 등으로 이 시리즈 제작을 많이 도와주는 분이다.

청도의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 등을 종합 연구한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강 교사가 먼젓번 기사와 관련해 보완 필요성을 제기했다. 매전면 내리(內里)에서 마을 이름보다 '중남'이란 말이 더 중요한 지명으로 사용되는 건 그 땅이 옛날 '중남면'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자료들을 다시 찾아보니 일대는 1720년대 이후 '적암면'(赤岩面)이라 불리기 시작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면리제(面里制) 도입으로 갖게 된 이름이었다. 그러다 1896년에 '중남면'(中南面)으로 바뀌었으며, 1914년에는 매전면의 일부로 포함됐다. 마지막 변화는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한 것이었다.

'중남'은 100여 년 전 불과 18년간 유지된 면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 또한 묘한 일이다. 이런 역사를 짚지 못했으니, 뭣이든 간단히 넘어가려 하면 사고가 나고 마는 법임을 또다시 깨닫는다.

저렇게 갈짓자 걸음을 하는 사이 연재를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니, 지경재~학대산(895m) 사이 42㎞(바닥거리 기준) 구간의 낙동정맥을 살핀 게 지난겨울 두어 달 사이였다. 봄과 초여름 넉 달여에 걸쳐서는 또 그만한 거리의 운문분맥 능선을 지나왔다. 두 구간 거리는 합계 80여㎞였다.

그러는 사이 겨울과 봄이 가고, 이제 여름이다. 지금부터 초가을까지 집중적으로 걸을 구간은 사룡산~비슬산 사이 '비슬기맥'이다. 75㎞ 정도 되는 이 산줄기의 흐름은 사룡산(686m)~오재(375m)~구룡산(675m)~질매재(410m)~바리박산(675m·발백산)~육동구간~곱돌이재(210m)~갈재(170m)~대왕산(606m)~잉애재(373m)~마암산(756m·선의산)~용각산(기슭·650m)~성현(270m·남성현재)~고리골산(잠칭·673m)~팔조령(380m)~삼성산(668m)~밤티재(535m)~청산(802m)~헐티재(510m)~천왕봉(1,083m, 비슬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비슬기맥 대부분 구간은 몇 개 재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해발 500m 이상의 높이를 유지한다. 다만 특별한 예외가 하나 있으니, 경산 용성면 남부에 해당하는 가척재~곱돌이재~갈재 구간 10여㎞가 그것이다. 최고봉이래야 350여m에 불과하고 최저점은 170m까지 떨어지는 곳이다. 탓에 산줄기가 권역 가름선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하는 현상이 빚어져 있기도 하다.

비슬기맥의 북쪽 기슭에는 동→서 순으로 북안면(영천)-용성면(경산)-남산면(경산)-남천면(경산)-가창면(달성) 등 5개 면이 분포했다. 그 땅에서는 3개의 지천(支川)이 생겨 금호강으로 합류해 간다. 용성서 시작해 남산-자인(경산) 경계선 역할을 하며 흐르는 '오목천'(烏鶩川)이 첫째다. 다음 물길은 남천면서 발원해 경산 시가지로 흐르는 '남천'(南川)이다. 셋째는 가창면 물을 싣고 대구 중심부를 관통하는 '신천'(新川)이다.

반면 비슬기맥 남쪽에는 청도의 여러 읍면과 경산 일부 땅이 자리 잡았다. 처음 것은 운문면이며 다음은 흔히 '육동지구'로 불리는 경산 6개 마을이다. 비슬기맥 낮은 구간을 넘어 북편의 용성면이 남쪽까지 영역을 확장한 결과다. 육동 다음 분포는 청도 금천면-매전면-청도읍-화양읍-이서면-각북면 순이다. 청도 9개 읍면 중 7개가 이 산줄기에 등대고 있다.

비슬기맥 남쪽 이들 땅의 물은 크게 둘로 모여 흐른다. 서편의 '청도천'(淸道川)과 동편의 '동창천'(東倉川)이다. 두 하천의 유역을 가르는 것은 비슬기맥 중간 즈음에 솟은 '용각산'서 내려서는 '유천지맥'이다. 길이가 무려 22㎞에 달하는 이 산줄기는 최남단 유천까지 내리 달리며 청도를 둘로 좍 갈라놓는다. 서쪽은 '산서'(山西), 동쪽은 '산동'(山東)이라 별칭될 정도다.

여기까지가 비슬기맥 본맥 대강의 모습이다.

이쯤서 잠깐 밝혀둘 바는, 함께 싣는 고저표의 구간 거리가 일정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산줄기가 남북으로 흐르는 구간의 실제거리를 컴퓨터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결과인 듯하다. 특히 경산 육동 구간서 편차가 심하다. 실거리가 4배나 차이 나는 경우까지도 고저표에서는 같은 간격 안에 그려져 있다. 거리 표시를 주의해 가며 판독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제 운문을 떠나 비슬로 옮겨갈 채비가 된 듯하다. 둘은 사룡산서 이어지긴 하나 실제로는 동떨어진 딴 세상이다. 발길을 돌리자니 지난겨울 산에서 만났던 개 두 마리가 눈에 어른거린다.

하나는 어느 산 높은 재에서 만난 지친 개였다. 누군가 차로 실어다 버린 듯 못 먹어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런데도 다시 주인이 자신을 찾으러 오길 기다리느라 그 재를 맴도는 듯했다. 데려와 살려야겠다 싶어 얼러 봤으나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심했다. 극한의 굶주림과 지난겨울 그 혹심했던 추위를 이겨냈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또 다른 개는 가지산 꼭대기 대피소 식구인 누렁이다. 눈썹을 까맣게 그린 모습이 좀 그렇긴 하나, 누가 들어가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밥값으로 주는 돈은 즉각 물어다 제 주인에게 갖다 바치는 순덕이다. 매우 추웠던 어느 날, 눈밭을 뚫고 올라 때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다리를 슬쩍 건드리는 것 같아 살폈으나 아무도 없었다. 조금 뒤에도 또 그랬다. 그제야 자세히 보니 옆에 누렁이가 있었다. 라면을 나눠먹자고 사인을 보내는 것이라 했다. 벌써부터 그 누렁이가 많이 그립다.

 

장륙산(將六山) 장륙능선   비슬기맥을 살피러 나서는 길에 먼저 해 둘 일은 아무래도 ‘장륙능선’을 살피는 것일 터이다. 출발점인 사룡산서 바로 갈라져 나가는, 기맥 첫 가지산줄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 4회 차에서 본 대로, 장륙능선은 사룡산(686m)을 출발해 동창천 가 같은 높이의 장륙산(686m)까지 12km나 이어달리며 청도(운문면)와 경주(산내면)를 가른다. 최저점조차 해발 400m에 가까울 만큼 위세가 대단하고, 주행을 끝내는 순간까지 대체로 600m대를 지켜나가는 것도 특징이다.

  이 능선 서편 운문면엔 괴틀-신당-평지말 등 마일리 자연마을과 봉하리 오동(봉산)마을 등이 골 상류로부터 차례로 자리 잡았다. 더 하류 지점에선 지촌리 용귀마을이 아예 산줄기 위로 올라 앉아 있기도 하다. 반면 동편 산내면에는 시루미기-중리-지경-수피 등 우라리 마을들과 윗산저-아랫산저 등 내칠리 마을이 순차로 분포했다.

  장륙능선 출발 구간의 사룡산 등성이는 너무도 평평해 산줄기 흐름을 가늠하기 힘들다. 겨우 방향을 잡아 길을 나서도 3분여 만에 산상(山上)농장에 가로막혀 또 당황스럽다. 산짐승 방지용 철망 담장이 빙 둘러처져 산길이 더 모호해져버린 것이다.

  동편 시루미기 마을서 경작하는 듯한 그 농장 울타리를 잘 감아 돌면 도합 30여분 만에 554m재로 내려선다. 괴틀과 중리를 잇는 옛길이다. 괴틀서는 그걸 ‘우라촌고개’라 불렀다. ‘문방골’을 걸어 오르고 이 재를 넘어 경주 아화장에 다녔다는 것이다.

  그 재 이후 산줄기는 100여m 되솟아 오른 뒤 1km에 걸쳐 600m대 높이를 유지한다. 하지만 얼마 후 솟은 만큼 추락하고 또 130m 추가 하락해 해발 398m재로 내려앉는다. 장륙능선을 두 동강 내다시피 하는 최저점 잘록이다.

  청도 신당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옛날 마일리 쪽 어른들은 이 재를 통해 산 너머 산내장을 봤고, 어린이들은 수피마을에 있던 경주의 ‘우라국민학교’(폐교)를 다녔다. 어머니 할머니들은 그쪽 나물을 뜯어 와 영천장에 내다 팔아 생계에 보탰으니, 가족을 위해 무려 3개 시·군을 오갔던 노고가 눈물겹다.

  이 재를 두고 국가기본도는 ‘비지오재’라 기록하고 향토지 중에는 ‘비조’(飛鳥)라는 보다 유식해 보이는 한자 풀이를 해 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현장에선 어느 마을 할 것 없이 ‘비지재’ ‘비지고개’라 불렀다. 신당 마을 동편 저수지 안길이 그 통로이며, 그리로 오르는 골 또한 ‘비지골’이라는 것이다. ‘비지고개’라 하던 게 경상도 식 ‘비지고오’로 변음됐다가 ‘비지고’ ‘비지오’가 된 것을 ‘비조’로 더 축약해 한자말인 줄 알고 역번역한 것 아닐까 싶다.

  비지재에서 다음 봉우리로 오르는 구간은 조건이 매우 나쁘다. 길이 매우 희미해 놓치기 일쑤고 그 탓에 밀림 같은 덤불 속을 헤매게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구간만 돌파하면 큰 오르내림 없는 500m대 능선이 4km 가까이 이어진다.

  그 십리 능선 중 비지재서 올라 처음 도달하는 561m봉서는 동편으로 특이한 지릉이 하나 갈라져 나간다. 거기 사룡산·장륙산보다 더 높은 698m봉 등의 고봉이 솟았다. 같은 위세를 최장 3km나 이어 가면서 그 속으로 4km나 되는 긴 ‘산저골’을 품어 들인다. 진입부는 좁으나 막다른 지점에서 넓은 들판처럼 열리는 특이한 골이다. 그 끝에 별세계 ‘윗산저’ 마을이 자리 잡았다.

  십리능선은 561m 분기봉 이후 20여분 만에 잠깐 고개를 숙여 505m 짜리 잘록이를 하나 내 준다. 서편의 오동(봉산)마을과 동편의 윗산저마을을 잇는 고개다.

  그런 다음 능선은 다시 본래 높이를 회복하며, 그 첫 봉우리인 또다른 561m봉에서 이번엔 서편으로 앞의 것보다 더 긴 4km짜리 지릉이 갈라져 나간다. 그 몸체의 해발 450여m 높이에 ‘용귀’라는 고산 마을을 들어앉히고 장륙능선 본선과의 사이에 10리 가까운 ‘침시골’을 형성하는 매우 볼만한 가지산줄기다.

  침시골은 장륙능선 최하단 지촌리에 속하는 골로, 장륙산 가는 농로 겸 임도도 그 속으로 개설돼 있다. 청도서 접근할 경우 운문호 끝 지점인 지촌리 동경마을을 지난 뒤 경주 산내면과의 경계 교량을 통과하는 즉시 U자로 급좌회전하면 된다. 그러면 장륙산 산덩이 아래 하천을 따라 역방향으로 진입하게 되며, 길은 곧 다시 직각 우회전해 북동 방향의 침시골을 오른다.

  그렇게 올라가는 도중의 침시골은 좁긴 해도 그 안에 논밭이 있고 표고버섯 하우스도 여럿 섰다. 또 봄철이면 나물 뜯고 약초 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외지인들이 그 깊은 산속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신통하기 그지없다.

  침시골 산길은 골 끝에서 둘로 나뉘는 바, 좌회전하는 길을 타고 오르면 마루금에 걸쳐 형성된 용귀마을에 도달된다. 반면 직진하는 길을 타면 얼마 후 우회전하면서 목전의 장륙능선 본선 아래를 감아 돌다가 결국 능선 등허리 위로 올라선다. 길 좌우 해발 500여m 등성이에 여기저기 고산 농장들이 펼쳐져 있는 구간이다. 누가 만들었는지 등산객용 넓은 주차장까지 갖춰져 있다.

  앞서 본 오동~윗산저 사이 505m재에서 산줄기를 걸어 주차장 지점에 이르는 데는 25분가량 걸린다. 505m재 남북에 반반씩 걸쳐 해발 500m대의 십리 능선이 형성돼 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주차장 지점서는 7분 정도 만에 장륙산 바로 밑 잘록이에 닿는다. 해발 492m의 ‘침시골재’다. 그걸 동서로 가로질러 지촌리 침시골과 내칠리 아랫산저마을이 이어진다.

  장륙산 정상은 이 ‘침시골재’에서 걸어 30분미만 거리에 있다. 하지만 도중 15분 정도면 마애불 진입점인 널찍한 마당바위에 먼저 닿는다. 거기서 산허리로 옆걸음질 해 2분 만에 도달되는 마애불은 서향 암벽에 선으로 새긴 높이 154cm 불상 그림이다. 장륙산 3대 명소의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등산객에게 마애불보다 더 솔깃한 것은 그 앞의 시원한 조망대다. 거기서는 사룡산서 구룡산 거쳐 바리박산(발백산)으로 이어가는 비슬기맥 산줄기가 훤하다. 서북방향으로 멀리 구룡산 정상부 구룡마을(청도)과 수암마을이 선명하다. 가까이로는 산상의 용귀마을 또한 전모를 내 보인다.

  그렇지만 마애불서 남서쪽으로 몇 분 간 오르면 더 뛰어난 조망대도 만난다. 장륙산 또 다른 명소인 ‘육장굴’ 위 절벽 덤이다.

  흔히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육장굴 접근로는 이 경로가 아니라 아까 본 침시골재를 거쳐 계속 이어가는 임도다. 임도는 장륙산 정상부를 반 바퀴 휘감아 돈 뒤 장륙능선 남단부를 향해 내려간다. 그 하강 시점에 초막이 있으며, 진입로는 그 바로 아래서 시작돼 2명의 장군상이 새겨진 암괴군을 지나고 바위문을 통과해 육장굴로 들어간다.

  육장굴은 신라시대 장수 6명이 수련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 명소다. 굴 천정이 유달리 높고 들어가는 암괴 통문이 별도로 있는 게 특징이다. 절벽 위에서 남서향으로 열려 있어 전망 또한 특출하다. 굴 넓이는 10여 평이라고 소개돼 있다.

  인접 마애불과 이 육장굴 일대가 유례 귀할 대단한 기도처임은 금방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기도막들이 여기저기 숱하게 포진했기 때문이다. ‘장군’을 산신과 동일시해 그 힘을 빌려 어려움을 이겨나가고자 하는 우리 전래신앙이 빚어낸 현상일 터이다. 그래서인지 장륙산은 ‘장군산’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고, 때로 ‘장구산’이라 지칭되기도 했다.

  장륙산에서는 무속인 뿐 아니라 일반 민초들도 오랜 세월 가물 때 ‘무지’를 올려 왔다고 했다. ‘무지’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으나, 기우제와 비슷한 ‘무제’라는 의례가 있고 거기서 변음된 게 ‘무지’ 아닐까 추측됐다. 무지를 지내던 장소는 ‘무지터’라 불리며, 장륙산뿐 아니라 구룡산·비슬산에서도 볼 수 있다.

  장륙산 무지터는 산 정상의 북편에 해당할 마애불과 그 남서편 육장굴 위 전망대 사이, 그리고 정상의 북동편에 매우 평평하고 넓게 형성된 곳이다. 지금도 나무만 베어내면 밭이 될 듯싶을 정도이다. 이 산이 신라 화랑의 군사 훈련장이었다는 이야기도 그런 바탕 위에서 나왔을지 모른다.

  무지터 모습과 달리 장육산 정상부는 뾰족하다. 덕분에 남서편으로는 가지산·운문산·억산·팔항덤·구만산이 한눈에 꿰인다. 오직 아쉬운 것은 넙적한 암반 위에 세워진 ‘장육산 680m, 울산어울림산악회’라는 정상석이다. 높이가 그보다 6m 더 높다는데 어쩌다 저런 이상한 자료를 구해다 낯선 땅에 새겨 놓은 것일까.

  장륙능선 전체는 12km쯤 되지만 사룡산서 장륙산 정상까지는 8.8km 정도다. 보통 산걸음으로 4시간 정도 걸릴 거리다. 그러나 이 구간은 3시간 정도면 주파할 수 있다. 능선 흐름이 완만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종주는 아무나 도전하기엔 위험해 보인다. 산길은 희미하고 시야는 꽉꽉 막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불가능한데 산줄기는 군데군데서 직각으로 굽어 가 버리기 때문이다.

 

구룡산 세 마을 장륙능선을 갈라 보낸 뒤 비슬기맥은 사룡산(686m)을 떠나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초기 지향은 서쪽, 같은 방향 주행은 5.2㎞에 걸쳐 지속된다. 그 북편에는 영천 북안면 상리가 자리하고, 남쪽 산자락에는 청도 운문면 마일리·정상리가 붙었다.

  이 동·서 구간 비슬기맥서 가장 낮은 곳은 ‘오재’(375m)다. 이 최저점이 최고점 사룡산과 불과 1.6㎞ 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둘 사이 능선 흐름이 상당히 가파르다. 3단 뛰기로 쏟아져 내린다. 그 중 두 번째 급락했다가 잠깐 솟는 497m 암봉을 그 남쪽 ‘괴틀’ 마을서는 ‘칼바위등’이라 불렀다. 괴틀은 20가구 미만의 마일리 최북단 자연마을이다.

  사룡산서 내려서는 데 20분이 채 안 걸리는 오재는 운문~북안을 잇는 주 통로로 부상해 있다. 오래 전 721호선 지방도가 개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에 따르면 옛날 도보시대 중추 교통로는 오재서 서쪽으로 800여m 더 가서 닿는 ‘밤재’(400m)였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북안 쪽에선 6·25전쟁 때만 해도 모두 밤재를 통해 피란 갔다고 했다. 밤재의 그런 유명세 영향으로 청도 쪽 그 바로 밑 저수지는 ‘밤재못’, 그 아래 골은 ‘밤재골’로 불린다. 이들과 재 너머 영천 ‘두곡지’를 잇는 게 옛길이라 했다.

  밤재서 청도·영천 양쪽으로 이어지는 길 자리는 여전히 뚜렷했다. 그러나 밤재에 수백 년 쌓여온 지역민의 애환은 진작 잊혀졌음에 틀림없다. ‘국가기본도’조차 밤재가 어딘지 옳게 지목해 내지 못하는 게 단적인 증거다. 1대 25,000 지형도는 오재 자리 양옆에다 ‘오재’ ‘밤재’를 나눠 기록함으로써 뭐가 뭔지 알아먹을 수 없게 만들어 놨다. 축척이 너무 커 흐지부지할 수 없었을 1대 5,000 지형도는 ‘밤재’라는 명칭을 아예 지워버렸다. 이게 우리 국가기본도 제작의 현 수준이다.

  오재서 밤재 가는 산길을 함께 답사한 누군가는 “꼭 삼림욕장 온 것 같다”고 했다. 길이 편안하고 숲이 좋다는 뜻이었다. 하나 밤재를 지나면 산줄기는 순식간에 140여m 솟아 538m봉에 오른다. ‘대동여지도’가 사룡산과 구룡산 사이에 특별히 하나 표시해 둔 ‘수암산’이 이것 아닐까 싶다.

  잠칭 ‘수암산’을 지나면 산줄기는 다시 90여m 가라앉는다. 영천 북안과 청도 운문을 잇는 오재-밤재-수암재 3대 고갯길 중 마지막 것인 해발 450m의 ‘수암재’다.

  거기로 이어지는 도로는 자동차 한 대 겨우 다닐 정도로 좁다. 하지만 그건 단순 임도나 농로가 아니라 당당한 마을 진입로다. 청도 마일리 큰 마을서 올라오며 ‘아랫수암’을 연결했을 뿐 아니라, 수암재를 지나서도 서쪽의 ‘윗수암’ 마을을 잇는다. 게다가 수암재~상리(북안) 구간도 말끔히 다듬어져 몇 년 전부터는 청도~영천 사이까지 온전히 연결하게 됐다.

  수암재(450m)서 구룡산은 25분 미만 거리다. 582m봉으로 오르느라 10여 분 애쓴 뒤 한숨 돌리고, 625m 높이의 ‘무지터 삼거리’에 도달해 또 한 번 숨 고르면 이후 5분 내 정상에 닿는다.

  그 삼거리서 산 옆구리 길을 타고 오른쪽(북쪽)으로 걸으면 곧 ‘무지터’에 닿는다. 희미하게 생겨나오는 능선 위에 반석이 넓게 펼쳐지고 인접한 골에서는 샘이 솟는 곳이다. ‘실꾸리 한 개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못할 만큼’ 깊은 그 샘에서 용 9마리가 태어나 이 산이 ‘구룡산’이 됐다고 했다.

  그래서 기우제 혹은 무지도 바로 그 샘터에서 올려졌다고 했다. 또 그런 전설에 따라 예부터 일반 기도객들도 끊이지 않아 초파일 같은 날엔 인산인해였다고 한 어르신이 회억했다.

  저 무지터에 못잖은 구룡산 명소가, 수암재를 관문으로 삼는 윗수암 마을이다. 구룡산 정점을 향해 2㎞에 걸쳐 뻗어 오른 골짜기의 최상류에 자리해 전망 뛰어난 덕분이다. 북동편으로는 사룡산이 통째 바라다보이고 남동편으로는 장륙능선-석두능선-낙동정맥 산줄기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마을 안에서는 옛날 보던 그 외양간이 그대로 보이고, 풀밭에선 어미소와 송아지가 한가로이 눕거나 풀을 뜯는다. 다랑논은 묵었지만 군데군데 일궈진 밭에서는 할머니가 김을 매고 있었다.

  최고 연장자 어르신은 마을 4가구가 모두 경주 최씨 일족이며 3가구가 형제고 1가구는 재종간이라 했다. 20ℓ짜리 분무기를 짊어지고 농약을 뿌리던 어르신은 “81살이지만 아직 이 정도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못 고쳐 애 탄다”고 했다. 도시에 살면서 근친 오는 아들·딸이나 손자 손녀들을 생각해서일 터이다.

  이 수암마을(운문면 마일리, 윗수암 기준 해발 520m)은 구룡산 정상부 일대에 포진한 3개 자연마을 중 하나다. 그 서편에는 청도구룡마을(운문면 정상리, 해발 520m), 더 서편에는 경산구룡마을(용성면 매남리, 해발 540m)이 있다. 구룡산을 기준으로 보자면 수암은 그 남동쪽, 청도구룡은 남서쪽, 경산구룡은 서쪽에 순차대로 550여m씩의 직선거리를 두고 떨어져 자리했다.

  셋 중 가장 큰 마을은 경산구룡이다. 그곳 어르신에 따르면 경산구룡은 한창때 37호나 될 만큼 번성했다. 지금은 산간벽지로 치부되지만 농경사회 때는 오히려 들녘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마을이기도 했다. 평야지대는 수리시설 미비로 벼농사를 못하기 일쑤였으나 이곳은 어떤 가뭄도 타지 않을 정도로 물이 많고 들도 넓었다. 여느 산촌은 땔감·산나물을 해다 팔아 생계에 보탰으나 여기선 벼·보리·콩 농사만으로도 충분했다.

  걷기가 주 이동방법이던 그 시절로선 외진 마을도 아니었다. 영천·경산과 청도·경주를 내왕하는 행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을 대상으로 한 주막이 줄을 이었을 정도다. 구룡산과의 사이에 있는 마을 뒤 ‘다박재’에도 주막이 성업했다.

  일제 때는 이 마을이 벼 공출 임무가 면제되는 열외지역이기도 했다. 공출용 가마니를 짜기 위해 다른 마을들처럼 밤 새워 고생할 이유가 없었다. 산속이라 땔감이 풍부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고, 고지대인 덕분에 여름은 시원하게 보냈다. 이렇게 여건이 좋으니 총각들은 신부를 골라가며 장가들 수 있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게 변했다. 숱한 집들이 비게 돼 지금 실거주자는 10여 호에 불과하다. 마을 어르신은 아파도 병원 가기 쉽잖은 게 가장 안 좋다고 했다. 버스가 안 다니니 왕복 2만6천원이나 주고 택시를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과 몇 천원이면 되는 진료비보다 배꼽이 더 큰 꼴이다.

  구룡산 자락에는 저 세 마을 외에도 수암재 꼭대기 너머 영천 상리 땅에 살림집이 한 채 있다. ‘청도수암’에 대비시켜 ‘영천수암’이라고나 할까. 아랫수암서 태어났다는 그 집 어르신(72)은 자신이 어릴 적만 해도 아랫수암에 17가구, 윗수암에 15가구나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아랫수암엔 2가구가 각각 외딴집으로 흩어져 있다. 윗수암엔 민가 4채 외 그 위 높은 곳에 ‘수암사’라는 절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최근 다시 찾았더니, ‘영천수암’ 그 어르신 집도 비어 있었다. 병원 다니기 불편해 산 아랫마을에 또 다른 거처를 구했다는 얘기였다. 산촌과 농촌이 비어가는 과정을 보는 듯했다.

  이런 마을들과 무지터 및 구룡 전설이 아니더라도 구룡산은 중요한 산이다. 여러 고을을 경계 짓는 산줄기가 거기서 북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산줄기는 먼저 영천(북안면)과 경산(용성면)을 가른 뒤, 서편으로 굽어 달리며 용성면과 대창면(영천), 자인면(경산)과 진량읍(경산)을 차례로 구획해 나간다.

  인접 마을서 무지터~오재 사이 산길을 주기적으로 관리한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도 구룡산의 저런 중요성들에 인연한 바일 터이다. 인근 동네에 그만큼 중요한 산이란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올라서 보게 되는 산 정상부는 ‘버려져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무하다. 일부만 간벌돼 겨우 한쪽만 전망이 터졌을 뿐 아니라 정상점 일대도 잡풀들로 어수선하다. 저다지 중요하다는 산 정점을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발백산인가 바리박산일까 구룡산이 일대 지형에 중요한 포인트인 건 틀림없지만, 비슬기맥 흐름에서까지 꼭 그런 건 아니다. 그 점에서는 500여m 서쪽(정상 기준)의 구릉 같은 583m봉이 더 의미 있다. 동에서 서로 달려 온 산줄기가 거기서야 남쪽으로 주향을 전환하기 때문이다. 구룡산 정상부에 있다고 했던 ‘경산구룡’ 마을 자리도 실제는 이 583m봉 서편기슭이다. 엄밀히 말하면 ‘583m봉 마을’인 셈이다.

이 정황을 좀 자세히 보자면, 동에서 달려 온 비슬기맥 본선은 구룡산(675m)을 지나고도 500여m 더 서행(西行)하다가 570m재로 떨어진다. 좁지만 중요한 시멘트도로가 지나는 잘록이다. 경산구룡-청도구룡 두 마을이 이 길로써 이어지고, 그 둘은 이걸 통해 경산 용성면과 청도 운문면 중심지로 더 멀리까지 연결된다.

그 점을 주목한 듯 등산지도들 중에는 이 잘록이를 ‘구룡재’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1대5,000 지형도는 거기 있는 조그만 저수지를 ‘다방못’이라 표기해 놓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재니 고개니 하는 뒷말 없이 그냥 ‘다박’이라 불리던 땅이라 했다. 그러니 굳이 재라 부르려면 ‘다박재’ 정도가 맞을 터이다. ‘다박’이라 할 때는 ‘다’에 악센트가 주어졌다. ‘다방못’은 ‘다박못’을 잘못 알아들은 결과일 듯했다.

583m봉은 산줄기가 다박재를 지난 뒤 올라서는 곳이다. 하지만 마루금 답사자들조차 놓치기 일쑤일 정도로 이것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구릉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릴 만큼 나직할 뿐 아니라, 앞뒤 다른 봉우리들의 훨씬 거센 기세에 묻히기까지 하는 탓이다.

그러나 비슬기맥은 분명 583m봉을 지나고서야 남쪽으로 완전히 굽는다. 그러면서 금방 651m봉으로 솟으니, 경산시청이 “구룡산, 675m, 태백산맥 줄기에 위치했다”고 새긴 돌을 세워 둔 곳이다. 하지만 그건 엉터리다. 이 봉우리는 675m 구룡산이 아닐뿐더러 태백산맥에 있지도 않다. 기껏해야 ‘651m 제2구룡산’으로 불리는 정도다. 더욱이 경산구룡 마을서는 이걸 ‘안산’(案山)이라 부를 뿐이다. 마을의 남쪽에 솟은 마을앞산이라는 뜻이다.

새천년 기념사업으로 경산시청이 세운 산 정상석들 중에는 이런 엉터리가 여럿이다. 앞으로 볼 대왕산 것이 그렇고, 대구 팔공산 관봉 동북편 ‘명마산’ 표석 또한 터무니없다. 하지만 지적해 줘도 고치지 않으니 그건 또 무슨 배짱인지 기가 막힌다.

651m봉에서 정말 주목할 바는 일대가 가톨릭 성소로 다듬어져 있는 사실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높다랗게 섰고 짧잖은 거리가 ‘십자가의 길’로 꾸며져 있다. 이 봉우리 바로 동편에 자리한 ‘청도구룡’ 마을의 오래된 역사에 기인한 일이라 했다.

마을에 따르면 청도구룡은 조선조 후반 참혹했던 천주교 탄압시기에 숱한 신자들이 피신해 살던 곳이다. 하지만 다른 신앙촌들과 달리 이곳에선 희생자를 한 명도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산 속 마을에 170여 년 전 벌써 공소가 설치됐다. 또 지금까지 수많은 성직자를 배출했다. 가톨릭에 특별한 마을인 셈이다.

이 마을은 본래 ‘비석리’였으나 ‘구룡’이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타면서 ‘청도구룡’이라고 별칭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본명은 잊혀지고 모두 구룡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651m봉을 지나면 비슬기맥은 410m재로 떨어졌다가 675m봉(바리박산·발백산)으로 솟는다. 고도 기준으로 240m 폭락했다가 260m 치솟는 것이다. 신세대 눈으로는 그 오르내림이 마치 체크(?)무늬 같을 것이다. 반면 지금의 중년층에겐 그걸 갈매기 형상이라 분별하던 기억이 있다. 1960년대까지도 많은 제대군인들이 그렇게 부르던 그런 모양의 계급장을 달고 돌아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경시대를 살았던 더 옛날 어른들에겐 그게 ‘질매’의 모습이었다. 소 등허리에 얹어 짐을 싣거나 우마차 채를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든 ‘길마’가 그것이다. 그걸 뒤집으면 체크 모양이 된다. 그래서 410m재에는 ‘질매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했다.

그 동편 정상리 어르신(77)은 이 질매재를 넘어 다니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었다고 기억했다. 아이들은 소 먹이러 넘나들고, 저쪽 영천·경산 등의 어른들은 이쪽에 있는 이름난 약수를 찾아 그 재를 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질매재에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났고, 재 꼭대기엔 소공원이 예쁘게 꾸며져 있다.

질매재를 출발해 오르는데 45분가량 걸리는 발백산은 높이에서 구룡산과 맞먹는다. 그 산과 합작해 북서편의 경산 용성면 매남리(梅南里) 일대를 첩첩산중으로 만들 뿐 아니라, 조금 후 살필 ‘동곡능선’과 더불어 그 남서편의 용성 부일리(扶日里) 공간을 세상 밖에선 안 보이게 꼭꼭 숨겨두는 산덩이기도 하다.

한데 문제는 그 이름이다. 국가기본도가 ‘머리카락 발(髮)’ ‘흰 백(白)’ 자를 써 ‘발백산’이라 적어뒀으나 그게 뭣을 뜻하는지 도저히 알아먹기 힘들다. 어르신들도 연유 몰라 하긴 마찬가지였다.

인근 마을서는 대신 그걸 ‘바리배기’(바리박이) ‘바리박산’이라 불렀다. 산 북쪽 경산구룡 어르신이나 동편 봉하리 어르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서쪽 송림리서도 한 치 거리낌 없이 이 이름으로 통했다. 그 소리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서 저런 희한한 명칭이 돌출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우리 땅이름은 참으로 많은 곡절을 겪어 왔고 지금도 그러는 중이다. 자꾸 그냥 넘겨 둬 될 일이 아니다.

몇몇 연구들을 참고해 짐작건대, 우리 산이나 재는 대개 순수 우리말 이름으로 불렸다. 시루를 닮았으면 시루봉, 매가 모여들면 매봉, 능선이 칼 같으면 칼등, 종지 같으면 종지봉, 갈모 형이면 갈모봉, 상여를 닮았으면 ‘생이산’, 위가 평평하면 마당재, 도마 같으면 도마재, 질매 닮았으면 질매재, 큰 고개면 한티·큰티였다.

그 이름은 왜곡되거나 변질될 위험성도 극히 낮았다. 토박이들에 의해 대대손손 전승되기 때문이다. 외지인이 틀리게 기록해 유통시킬 위험성은 거의 없었다. 가끔 고지도가 극소수 산이나 재 이름을 한자로 기록하는 경우가 있긴 해도, 그럴 때 역시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음이 활용됐다.

그러나 1918년 일제(日帝)가 처음으로 전국 1대50,000 지형도를 완성한 걸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세세한 땅이름까지 지도라는 문서에 실리게 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전문성 없는 사람들이 작업을 맡은 건 태생적 위협이었다. 우리말 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한자를 사용하다 보니 개똥산이 계룡산으로 바뀌기 십상이었다. 소리를 반영한 것인지 뜻을 번역한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곳곳서 이해 안 되는 한자 이름들이 돌출하고 숱하게 현지 호칭과 상충하는 것은 그 결과일 터이다.

이렇게 됐을지라도 광복 후에나마 우리 발로 열심히 걷고 재조사해 우리말 이름을 회복시켰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90년 전 그때 기록된 산 이름 재 이름이 지금 지도에도 대부분 그대로 실려 있다. 그리고는 20여 년 전부터 불어 닥친 등산 붐을 타고 급속히 확산됐다. 지도가 새롭고 강력한 지명 전승자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현지인들은 이질적인 명칭을 거부하거나 바로잡으려 하지 못한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을 새긴 정상석이 마을 뒷산에 세워져도 체념한다. 스스로의 전승 능력에 자신감을 잃고 활자의 위력에 짓눌린 탓이다. 오히려 틀린 대로 따라하기 바빠할 지경이다. ‘바람 풍’ 해야 할 사람들까지 ‘바담 풍’ 하게 된 꼴이다.

이 모든 잘못의 책임은 일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 진정한 광복은 거창한 구호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래명칭의 회복 같은 작으나마 실질적인 노력들을 통해서야 이룰 수 있는 것임을 망각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말 전래명칭을 되찾으려 애쓰는 게 옳을 터이나 국가는 여전히 관심이 없다. 이제 한 달여 뒤면 광복절이고 다시 2주 후면 국치(國恥) 100주년 되는 날이라고 많이들 목청을 높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효과라곤 일본을 속웃음 짓게 만드는 이상이기 어려울 것이다.

‘바리박산’ 정상은 뛰어난 전망대다. 지나온 사룡산~구룡산~질매재 능선은 물론, 사룡산에서 부산(富山)을 거쳐 흐르는 낙동정맥 능선까지 훤하다. 2007년에 정상석을 세운 청도산악회서 일대 잡목을 베어낸 공이 크다고 했다. 우리 땅 사랑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이 다른 산 다른 능선 곳곳에도 필요할 것이다.

 

동곡능선   바리박산 이후 산줄기는 서쪽을 향해 슬그머니 굽는다. 그러면서 100여m 폭락했다가 조금 솟아 닿는 언덕 같은 593m봉서 둘로 나뉜다. 더 낮게 떨어지면서 거의 직진하듯 서쪽으로 이어가는 게 비슬기맥이다. 반면 좌회전해 남쪽으로 방향을 되돌리면서 높이를 별차 없이 유지해가는 건 ‘동곡(東谷)능선’이다.

  동곡능선은 쉽게 얘기해 운문호 서편을 감싼 산줄기다. 청도~경주 사이 20번 국도를 따라 운문호를 지나고 있다면 동곡능선 자락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알면 된다. 전체 길이가 14㎞에 이르며, 처음 4㎞는 600m대, 다음 3㎞는 500m대, 다음 2㎞는 400m대다. 이 시리즈가 ‘동곡능선’이란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청도 금천면소재지 동곡리서 이 산줄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동곡능선의 동편은 동창천 유역이고 서편엔 그 지류의 지류인 ‘부일천’(扶日川)이 흐른다. 동창천 변엔 봉하·지촌·공암·대천·방지리 등 운문면 마을, 부일천 주변에는 경산 용성면 육동지구 여섯 마을과 청도 금천면 소천리(小川里) 등 7개 마을이 있다.

  동곡능선을 타면 분기점(593m봉) 출발 5분 만에 598m봉을 거친 뒤 다시 그만한 시간 뒤 다른 598m봉에 도달한다. 동쪽으로 장륙산이 잘 바라다 보이면서 그것의 지릉 위에 올라앉은 용귀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좋은 전망대다.

  하지만 초행자들은 그곳에서 까딱하면 혼란에 빠진다. 도심 공원 같이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품위 있는 정자가 있고, 그 주위에는 대리석 바닥돌이 깔렸으며 잘 생긴 의자들이 죽 나열됐다. 이뿐만도 아니어서 하강로는 멋진 계단으로 장식됐고, 내려선 잘록이엔 널찍한 주차장과 화장실은 물론 족구장까지 완비됐다.

  아무도 없는 심심산중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의문은 뒷날 그 서편 부일리 마을에 가서야 풀 수 있었다. ‘산촌체험장’을 꾸미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중심부가 돼 있는 그 잘록이는 ‘화전재’이며, 그 아래 ‘귀재골’ 안을 거쳐 거기까지 임도도 열었다고 했다. 화전(火田) 터여서 저런 이름이 붙었는가 싶은 화전재는 동편 지촌리와 통하는 길목으로, 옛날엔 주막이 있고 우마차길도 뚫려 있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화전재를 지나면 산줄기는 다시 솟아 1.7㎞ 길이의 600m대 능선을 이룬다. 그 구간 최고봉 높이는 무려 680m. 바리박산이나 구룡산마저 능가한다. 하지만 현지인들이 더 주목하는 것은 그것과 570m재를 사이에 두고 솟은 667m봉이다. 이걸 ‘반룡산’이라 부르면서 일대 산세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 아래 반룡사로부터 이름을 땄을 터이다. 하지만 숲에 막혀 깜깜해지면서 산덩이 자체조차 아주 왜소하게 느껴지는 봉우리다.

  동곡능선은 그 10여 분 후 500m대 능선으로 낮아지며, 그 능선을 15분쯤 걸으면 565m 높이의 평탄면에 닿는다. 청도 제일의 풍광으로 꼽혀온 동창천 가 공암리 절벽암괴로 가는 지릉 분기점이다. 그 절벽암괴는 단풍 모습이 특히 멋지다고 해서 오랜 세월 ‘공암풍벽’(孔岩楓壁)이라 불려 왔다.

  자동차를 이용한 풍벽 답사에 가장 좋은 곳은 20번국도 변 전파중계탑이 보이는 지점이다. 동창천 쪽으로 이어져 있는 풍벽 산줄기의 들머리가 거기다. 올라서면 ‘361m 가리봉’이란 팻말과 산불초소가 있는 첫 봉우리에 바로 닿는다. 도합 30분이면 이탈리아반도처럼 동창천 쪽으로 튀어나간 풍벽 위에 이를 수 있다. 겨우 몇m 너비로 이어나가다 마지막에 올려 세우는 216m봉이 압권이다. 공암마을 어르신은 “운문호만 아니었으면 이 일대가 대단한 명승지가 돼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 전에 벌써 케이블카 설치가 추진되는 등 투자 움직임이 활발했다는 것이다.

  풍벽지릉 분기점 이후 만나게 되는 중요한 지형은 거기서 얼마 안 가 닿는 520m봉이다. 그 아래 학생야영장으로 이어지는 지릉 분기점이다. 봉우리 위에는 거기가 ‘왕재’(王峴)라고 알리는 경산시청의 입간판이 서 있다. 옛날 신라왕이 지나 다니던 압독국(경산) 관문이라는 얘기다.

  하나 낮은 잘록이를 옆에 두고 뭐 하러 굳이 높은 봉우리를 길목 삼았을까? 많은 수행원들은 저 좁은 봉우리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쉽사리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그래도 틀림없이 그랬다면 이름이나마 ‘왕고개’로 정정해야 옳을 것이다. 재는 봉우리가 아니라 그에 대칭되는 잘록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면 동곡능선의 초반 3분의1을 걸은 셈이다. 이것과 다음의 중반 3분의1 구간 걷기에 소요되는 시간은 각 90여분이다. ‘한내(大川)고개’를 종착점으로 하는 중반 구간의 산길은 지나온 것보다 더 평이하다. 이 구간서는 한내고개로 바로 내려설 수도 없다. 찻길 만드느라 많이 깎아내면서 절벽이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선택되는 중반 구간 날머리는 한내고개 북편에 있는 또 다른 잘록이다. 267m봉을 사이에 두고 한내고개와 똑 같은 245m 높이를 하고 있는 지형이다. 그리로 하산하면 낙석방지용 펜스가 없는 묘역으로 내려서게 된다.

  한내고개는 운문호가 생기기 전 그 남쪽에 있던 운문면 대천리 등 큰 마을들을 경산 자인장과 직결시켜 주던 길목이었다. 내다 팔 것을 이고 지고 넘어갔다가 필요한 것을 사서 되돌아오곤 했을 것이다.

  그 고개서 종반 3분의1 구간으로는 미약하나마 길이 이어진다. 터널 같은 숲 더미 속으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서면 얼마 안 가 운문호가 보이기 시작하며, 15분 이내에 첫 봉우리인 373m봉에 도달된다. 이 산줄기 유일의 헬기장과 상수원구역 경계 푯말<80>이 있는 거기는 운문호 전체를 내려다보는 좋은 전망대다. 대천리·방지리도 훤하다.

  이 봉우리서 남동쪽으로 빠져나간 편도 4분 거리의 가지산줄기에 365m봉이 있다. 정상 푯말이 알리는 대로 그 아래 대천마을서 ‘종지봉’이라 부르는 봉우리다. 운문호 둑(댐)은 이 종지봉과 건너편 호산(314m) 사이 협곡을 막은 것이다. 대천 삼거리서 경주 쪽으로 난 20번 국도를 탈 때 맨 먼저 이 산덩이를 감아 돌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종지봉 남쪽 현재의 대천리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이주단지다. 이전의 그곳은 금천면 방지리 평범한 산비탈이었다고 했다. 운문면 소재지 마을인 대천리가 물에 잠기자 그 땅을 떼어 운문면으로 넘겨서는 새 대천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방지리 주민들에게 운문면 전환 의사를 물었고, 상방지·중방지·하방지 세 자연마을 중 동의한 상방지 마을만 금천면서 운문면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현재 대천리와 방지리 주택지가 구분 안 될 정도로 인접하게 된 연유가 바로 이것이다.

  373m봉으로 되돌아 와 동곡능선 본선을 걷자면 출발 20여 분 후에는 247m재로 떨어진다. 방지리와 산줄기 너머 채석장 일대를 잇는 ‘배고개’다. 이 재 이름을 동쪽 방지리와 서쪽 사전리 남전마을 어르신 공히 ‘백꼬개’라 발음했다. ‘고’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배’가 먹는 과일 배(梨)라는 뜻인가 싶었다.

  배고개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서 있다. 300여 년 전 어떤 분이 그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방지리에 전해지고 있었다. 뿌리 주위에 돌 축대가 정성스레 쌓여있는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거길 통해 이어져 가야 할 서편 산길은 이제 절벽으로 잘렸다. 그 너머에 들어선 채석장이 까먹었기 때문이다.

  배고개서 올라서면 산불초소가 선 332m봉이다. 이걸 국가기본도는 ‘납닥갓산’이라 적어뒀으나, 실제 ‘납닥갓’은 그 봉우리 남쪽 기슭 방지리 뒤 나지막하고 납작한 구릉을 가리킬 뿐이라고 했다.

  332m봉서 내려서는 280m재에서도 방지리 쪽으로는 길이 잘 나 있었다. 이 재를 서쪽 남전마을에서는 ‘노루미기’라 했고, 동편 방지리에서는 ‘아래고개’라 했다. 배고개에 대칭시킨 듯하다.

  동곡능선의 끝인 동곡리는 여길 거치고도 한참을 가야하지만, 대부분 구간에서는 산길이 매우 희미하고 전망도 어둡다. 동곡리가 산동의 중심 마을로 매우 크긴 해도 주위에 워낙 좋은 산이 많아서인지 마을에 인접한 이 뒷산은 제대로 돌보지 않는 듯했다.

  종반 3분의1을 걷는 데는 초·중반 구간보다 20~30분 더 걸린다. 바닥거리가 4.75km 정도로 좀 더 길 뿐 아니라 마을들이 조밀해 살필 것도 많기 때문이다.

 

육동(六洞) 구간 동곡능선을 갈라 보낸 뒤 비슬기맥은 북→남에서 동→서로 본래의 주향(走向)을 회복한다. 그렇게 달리는 거리는 6.5㎞ 정도. 이미 언급된 바 있는 ‘육동 구간’이다.

‘육동’은 이 능선 남쪽에 있는 경산 용성면의 6개 마을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비슬기맥에 붙어 동편에 부일리, 서편에 가척리가 있고, 부일리 남쪽에 용전리-용천리, 가척리 아래에 대종리가 분포했다.

육동의 특징은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용성의 다른 땅으로부터 외돌아져 있다는 점이다. 용성의 다른 물은 ‘오목천’(烏鶩川)을 거쳐 금호강으로 흘러가지만, 육동 물은 ‘부일천’을 타고 ‘동곡천’에 합류했다가 동창천을 거쳐 밀양강으로 간다. 물길로 보면 청도에 가깝고 행정구역으로 보면 경산에 속해 있다는 얘기다.

이런 지리적 특성은 그 공간으로 하여금 인문적으로도 어느 정도 독립성을 띠게 할 소지가 있을 터이다. 육동 토박이 주민 대다수가 같은 초등학교 동문 선후배 관계로 묶인 게 예다. 1934년 개교해 60년간 일대의 구심점으로 역할하다가 1995년 폐교한 옛 ‘용강국민학교’가 그것이다.

육동의 독자성은 외부서도 주목해,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면 출장소를 따로 설치해 줄 정도였다. 용성면 소재지 마을과 육동을 잇는 면내(面內)도로가 ‘육동길’로 명명된 것은 불과 몇 년 전 일이기도 하다. 곧 보게 될 ‘비리재’(비오재)는 이 육동길 고개다.

육동 북편담장으로서의 비슬기맥 길이는 6.5㎞나 되지만 100분 정도면 걸을 수 있다. 두 번 정도 100여m 높이를 다시 올라야 하는 구간이 있긴 하나 전체적으로는 내리막인 덕분이다.

바리박산 밑 593m봉 분기점을 출발하자마자 산줄기는 403m재로 190m나 내려앉는다. 거기서 495m봉으로 90여m 오르는 게 다소 부담되지만 곧 다시 410m재로 내려선다. 힘드는 건 이 재에서 다음의 508m봉으로 오르기다. 그러나 그 이후엔 내리막이고, 특히 25분쯤 뒤의 403m봉 이후엔 160여m나 폭락한다.

저 403m봉까지의 구간 남쪽에 자리한 게 부일리(扶日里)다. 서편 가척리(加尺里)와의 경계선은 그 봉우리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려가는 지릉이다. 두 마을은 ‘땅고개’(330m)로 연결되며, 지금은 그 위로 임도가 나 있다.

부일리 구간에서 먼저 주목할 지형은 403m재와 410m재다. ‘물안재’라 불리는 403m재는 기맥 위 높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그 위에 논이 개간돼 있어 일단 놀랍다. ‘임장재’라 지칭할 만한 410m재는 부일리 뒤 불당골과 그 북편의 송림리 후롱골을 연결하는 임도 길목으로, 공원벤치처럼 긴 나무의자들이 놓인 풍경이 독특하다.

하나 이들을 주목하자는 진짜 이유는 딴 것이다. 산을 나무들이나 제 맘대로 살도록 던져둘 대상지가 아니라 인간 삶과 생산의 귀중한 터전으로 인식하게 하는 모범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물안재 남쪽의 부일리 ‘귀재골’에서는 마침 방금 산촌생태체험장 조성 작업이 마무리됐다. 동곡능선 초입의 화전재 일대에서 본 시설들이 바로 그 일부다. 산림청이 10억원을 지원했으며, 마을서는 도시 가족·단체 등에게 과일·버섯 따기나 산나물 캐기 등 산촌 생활을 체험케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주민들은 민박과 토속음식 판매 등을 통한 수입을 기대한다고 했다.

‘임장재’ 너머 후롱골 땅에는 ‘동아임장’이라는 생산임지가 있다. 산을 들판의 ‘농장’에 상응할 ‘임장’(林場)으로 가꿔놓은 99만㎡(30만평)에 달하는 별세계다. 마을에서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을 정도로 관심 밖이었던 410m재에 이 시리즈가 ‘임장재’라는 새 이름표를 달아주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함번웅(69) 대표에 의하면 35년 전 구입할 때 그 일대는 완전히 벌채된 벌거숭이였다. 산은 투자해 봐야 다음 대에나 소득이 날지 말지 한다는 무망론(無望論)이 지배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함 대표는 7, 8년 만에 확실한 소득을 거둬 보였다. 일반과 다른 구상과 전략을 구사한 결과였다. 오가피, 한약재목, 조경수, 수액채취목, 특수묘목, 산나물 등(현재의 수입순위) 오래잖아 소득을 내주는 ‘작목’을 선택한 게 그것이었다.

함 대표는 젊은이들에게도 ‘중기적’ 시각을 권했다. 너무 장기적인 생각이나 일이 년 단위의 지나치게 단기적인 시각은 바람직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임도를 우리나라 특유의 관광자원화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전국의 주요 임도를 연결해 산림 속의 휴양코스로 만든다면 세계 어디에도 없는 특출한 관광자원이 되리라는 얘기였다.

부일리 구간서 주목해 둘 또 다른 지형은 508m봉이다. 산줄기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거기서야 처음으로 평야(용성면 송림리)가 펼쳐져 보여서다. 드디어 바리박산 서편 첩첩산중 매남리 권역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뜻있는 지형인데도 508m봉에는 이름이 없었다. ‘부일봉’(扶日峰)이라 불러 둬 보자.

부일리 구간 종점인 403m봉을 지나면 비슬기맥이 급락해 25분여 만에 240m재로 떨어진다. 산줄기 남쪽의 가척리와 북쪽의 송림리를 연결하는 시멘트도로가 통과해 존재감이 높은 재다. 일대에는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여러 채의 폐가가 있다. 18홀 크기의 골프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이 재 일대 지명에 혼란이 생겨 있는 점이다. 국가기본도는 이 자리에 ‘용림’이라는 마을이 있다고 표기해 뒀다. 경산시청은 새주소 부여를 위해 북편 송림리서 이 마을을 거쳐 그 아래 가척리 비오재 본마을까지 관통하는 길에다 ‘용림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때문에 외지등산객 사이에는 가척재가 ‘용림재’로 통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지 시각은 전혀 달랐다. 240m의 이 고개에 대해서부터 매우 시큰둥했다. 최근에야 길이 났을 뿐, 전에는 넘어 다닐 일이 별로 없어 이름조차 없던 고개라 했다. ‘용림’이란 마을을 아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재 위 마을은 ‘못안’이라고만 불러왔다고 했다. 가척리 비오재 마을과 이것 사이에 큰 저수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 저수지 이름이 ‘용림지’일까 싶어 수소문했다. 마침 20년 전에 제작된 ‘경북마을지’가 그곳 마을은 ‘못안’, 저수지는 ‘용림지’라고 기록해 뒀으니 검토해 봐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그것도 아니라 했다. 저수지는 ‘조고못’이라 부르다가 ‘율능지’라 바뀌었을 뿐이라고 했다. 국가기본도 또한 ‘율능지’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용림’은 무엇이란 말일까? 도로명을 만든 사람들은 알려나 싶어 경산시청에 전화했으나 그쪽 정보는 더 흐리멍덩했다. 2005년 용성면 지명위원회서 “그쪽 길의 모습이 용 같아서” 용림로란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길이 어떻게 생겼기에 용 같다는 것일까?

특이하게도 일대에 ‘용림’이란 이름을 쓰는 지형으로는 240m재에서 700여m 떨어져 있는 ‘용림재’(310m) 딱 하나가 있었다. 동편 가척리·부일리 등의 사람들이 비슬기맥을 넘어 서편 용성면소재지 마을로 다니던 길목이라고 했다. 자동차시대 이전 아이들은 그걸 넘어 학교에 다니고 어른들은 용성장에 다녔다는 얘기다.

하지만 재 이름 중 ‘용림’이 무엇에서 연유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척리는 물론 부일리·송림리·부제리 등 사방의 인근 마을 어르신들은 누구 없이 이 재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했지만, 용림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가리켜 보이지 못했다. 혼란도 거기서 출발된 게 아닐까 싶었다. 일대 생활사에 중요한 그 ‘용림재’를 지도에 표시한다는 게 엉뚱하게 마을 이름으로 용림을 들먹이게 됐을 개연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짜 ‘용림재’와의 혼란이나마 피하도록 240m재에 별도의 임시 명칭을 붙여두는 것일 터이다. 아쉬운 대로 ‘가척재’라는 이름표를 달아 놔 보자. 이 가척재는 비슬기맥 최저 구간의 시점이다. 최고점 높이래야 300m도 채 안 되기 일쑤인 능선이 거기서 시작된 후 12㎞에 걸쳐 이어지는 것이다. 그 모습은 다음번에 살필 몫이다.

저 가척재를 지나고 용림재를 거치면 351m봉에 오른다. 용성면소재지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일대 최고의 전망대다. 큰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용산(龍山·436m)도 지척이다. 맑은 날은 경산 아파트단지와 대구까지 훤하다고 했다. 산불초소가 거기 세워진 이유도 그것일 터이다.

이 지점에서 산줄기는 주향을 다시 바꾼다. 동→서 달리기를 그치고 북→남으로 내려선다. 그럼으로써 비슬기맥은 육동 지구의 서쪽 담장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 말하자면 육동의 동편엔 동곡능선, 북편과 서편엔 비슬기맥이 흐르고, 남쪽만 열려 있는 형세다.

 

300m대 능선 위의 다섯 고개 앞서도 봤듯, 가척재는 비슬기맥 최저 구간의 시점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주목할 지형이다. 그 낮은 구간에선 최고점 높이래야 300m도 채 안 되기 일쑤인 능선이 12㎞(육동구간 3.3㎞ 포함)에 걸쳐 이어진다. 결코 만만찮은 비슬기맥이 여기서만은 동네 야산으로 엎드린 형세다.

저 낮은 능선에는 묘하게도 약 2.5㎞마다 고개가 나 있는 점도 눈여겨둘 만하다. 가척재~비리재(비오재), 비리재~곱돌이재, 곱돌이재~당미기, 당미기~갈재 간이 그렇게 나뉜 단락이다. 그 사이를 걷는 시간 또한 각 50분 전후로 비슷비슷하다. 답사에 활용하기 좋은 지표다.

비리재(비오재)는, 용성면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고 했던 351m봉서 내려서는 잘록이다. 지형도의 등고선으로 읽히는 그 높이는 230m다. 하지만 현지엔 248m라 표시돼 있다.

헷갈리는 것은 그것만도 아니다. 비리재 이후엔 산줄기 파악이 매우 어렵다. 재를 지난 뒤 과수원을 통과해 남동쪽으로 서서히 상승하게 되나, 그 길로 쭉 따라가서는 실패다. 그건 육동 구간을 마감하고 경산-청도를 가르는 가지산 줄기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육동지구 담장 역할은 그것에 맡기고 비슬기맥은 육동 영역을 벗어난다.

그런 사실을 눈치 챈 등산객들 중에는 북서편에 그만한 높이로 솟은 산줄기를 비슬기맥인 줄 여겨 좇아가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도 고생길이다. 그 또한 곡란리 일대의 복잡한 지형을 형성하는 가지산 줄기 중 하나일 뿐이다.

비슬기맥은 주변의 저런 높은 지릉들에 묻혀 어디로 연결돼 가는지 보이지조차 않는다. 찾아볼 곳은 그 두 지릉을 연결하는 산줄기 너머에 골짜기같이 푹 꺼져 있는 곳이다. 희한하게도 비슬기맥은 그 속으로 마치 계곡인 양 엎드리고 숨어서 맥을 이어간다. 이 부분에서만 능선 흐름을 잘 짚으면 다음의 곱돌이재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이어갈 수 있다.

곱돌이재(210m)는 오랜 세월 청도 운문면을 경산과 가장 빠르게 이어줘 온 길목이라 했다. 그걸 넘어 운문면의 많은 청소년들이 경산으로 유학 가고, 어른들은 자인장을 왕래한 것이다. 숱한 사연이 쌓였을 터이다.

그런데도 이 중요한 재의 국가기본도 상 이름 또한 매우 헷갈린다. ‘대천고개'(곡돌내재)라 써 뒀으나 그런 이름을 아는 이가 없는 것이다. 경산 쪽서 넘어봐야 겨우 도달하는 게 ‘소천리’인데 그게 어떻게 대천고개냐고 했다. 소천 쪽에서는 그걸 오직 ‘곱돌이재’라고만 했다. 그 너머 처음 닿는 경산의 곡란리 쪽 땅 이름이 바로 ‘곱돌이’고 그곳 저수지가 ‘곱돌이못’이라는 얘기였다.

곱돌이라는 말은 도로나 물길이 굽어 돌기를 곱(2배)으로 한다고 해서 생긴 것 아닌가 생각됐다. 그곳 양편에서 산덩이 두 개가 교대로 튀어나옴으로써 물길과 사람길이 그걸 피하느라 반원을 그린 후 다시 반대로 반원을 그리며 곱돌이하기 때문이다. 이 재 북사면에는 지금 꿩 농장들이 들어서 있다.

곱돌이재와 다음의 ‘당미기’(200m) 사이에서 비슬기맥이 남·북 간을 오르내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질매 혹은 갈매기 혹은 체크무늬 같다. 곱돌이재서 남서쪽으로 진행해 20여 분 만에 307m봉에 이른 뒤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당미기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그 여정에는 꿩 농장과 채석장 등이 순서대로 포진했다.

방향 전환점인 307m봉은 상당히 의미 있는 한 지릉 출발점이다. 서편 동곡천과 그 지천(支川)인 동편 부일천을 가르는 분수령 능선이 그것이다. 그 최고점 높이는 500m에 가깝고 길이 또한 5㎞를 넘는다. 능선 서편에는 금천면 사전리(四田里), 동편에는 금천면 소천리(小川里) 넓은 공간이 분포한다. 소천리 물은 앞서 본 육동 물과 만나 ‘부일천’을 이룬다.

하지만 307m봉서 저 분수령으로 이어 걷기는 수월찮다. 길 찾기부터가 어렵다. 최고점인 498m봉을 포함한 해발 480m대의 최고 구간 끝 지점에 이를 때까지 계속 그렇다.

도달하는 데 80여 분 걸리는 그 최고점 산덩이를 동편 생미마을(소천2리)에서는 ‘함박등’이라 불렀다. 올라서면 맑은 날 대구 달성공원이 보인다는 얘기도 했다. 북서 방향으로 80리 이상 떨어져 있는 두 지점 간에 더 이상 높은 봉우리가 없다는 말일 것이다. ‘함박’은 많이 쓰이는 산봉 이름으로, 통나무의 속을 파내어 만든 큰 바가지 같은 ‘함지박’의 준말이라고 사전에 설명돼 있다.

다시 비슬기맥 본맥으로 되돌아 와, 307m봉을 지나고 조금 더 높은 327m봉을 거쳐 내려서면 ‘당미기’다. 해발 200m. 남쪽 청도 금천면 갈지리 ‘갈마리마을’과 북쪽 경산 용성면 용산리 사이를 잇는 재다. 꼭짓점에 옛날 당집이 있어서 저런 이름이 붙었고, 갈지리 쪽 사람들이 용성장으로 내왕하던 고개라 했다. 지금은 임도 겸 농로가 통과하는 제법 큰 길목이 돼 있다.

이 ‘당미기’와 다음의 ‘갈재’(170m) 사이 비슬기맥 구간은 최고봉 높이조차 304m밖에 안 될 정도로 낮다. 그러나 304m봉 다음의 295m봉서는 경산 용성면을 마감하는 뜻있는 지릉이 북으로 뻗어나간다. 구룡산 이후 동·서 간 10여㎞(직선거리)에 걸쳐 펼쳐져 온 용성면에 서쪽 담장이 쳐지는 것이다. 그 지릉의 상징은 ‘용산’(436m)이며, 지릉 동편엔 용산리 마을, 서편엔 경산쓰레기매립장이 자리 잡았다.

갈재는 용산 능선 서쪽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경산 남산면과 청도 금천면을 잇는 고갯길이다. 경산 동부와 청도 동부를 잇는 대표적인 길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갈고개’라는 이름으로 더 잘 통하는 이 재를 두고 마을 어르신은 “대구서도 줄곧 오르고 밀양서도 줄곧 올라야 하는 두 지역 간 가장 높은 고개”라고 했다. 하나 그 높이는 기껏 170m다. 고개라는 느낌조차 안 든다. 통행량이 적잖은 이유도 이것일 터이다.

당미기~갈재 구간 비슬기맥은 둥글게 굽어 돌면서 그 남쪽에 있는 갈마리 마을을 감싼다. 이 때문에 갈마리는 그 둥근 산줄기 안에 폭 싸여 갈재를 지나는 지방도에서 안 보인다. 갈재 서편으로 훤히 드러나 있는 ‘삼성’ 마을과 대조적이다. 이 둘과 그 남쪽 ‘구터’ ‘구복’ 등의 자연마을이 청도 ‘갈지리’(葛旨里)를 구성한다.

갈재(갈고개)를 거친 뒤 비슬기맥은 대왕산 산덩이로 쳐 오르면서 12㎞에 걸친 300m대 능선을 마감한다. 그 구간을 오르자면 삼성 마을길을 지나자마자 한 과수원에 닿는다. 어느 날 그 앞에 이르니 외부인 접근을 거부하는 듯 금줄이 쳐져 있었다. 안 그래도 비슬기맥엔 산길을 꽁꽁 틀어막는 구간이 자꾸 느는 중이라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농막에 인기척이 있기에 소리쳐 양해를 구했더니 두말 않고 지나가라 했다.

고맙다고 인사했으나 주인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듯했다. “산길도 길인데 지나다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산꾼에 나쁜 사람이 있겠느냐”고도 했다. 오랜만에 듣는 시원스런 말에 감동한 취재팀과 일행이 배낭을 벗어 놓고 막걸리를 한잔 권했다. 마침 과수원 끝머리에 예사롭잖게 큰 나무 두 그루가 길목을 지키고 서 있어 그냥 지나치기도 아쉬운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을 마실 줄 모르니 대신 저 나무들에게 먹이겠다고 했다. 본인 스스로도 매년 상당량의 막걸리를 사다가 뿌려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땅은 내 것이지만 나무는 윗대 어른들이 심은 것이고 우리 마을과 행인 모두의 것”이라고 했다. 모두가 함께 그 밑에 쉬고 함께 정을 주자는 뜻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한미한 계층이라고 낮춰 소개했다. 그러나 저런 마음씨와 세상을 보는 눈은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닐 터이다. 오랜만에 푸근한 걸음이 됐다.

 

갈재, 대왕산, 더 높은 641m봉 이제 대왕산을 오를 순서지만, 갈재는 아무래도 이 정도로 지나치기 찜찜한 고개다. ‘갈마리’ ‘갈지(리)’ ‘갈재(고개)’ 하는 이름들이 너무 궁금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갈마리’라는 마을 이름이다. 도대체 ‘마리’가 무엇이기에 마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 ‘마리’라 불리는 마을은 다른 곳에서도 더러 발견되니 호기심이 더 커진다. 청도 금천면에는 ‘섶마리’라는 마을이 있고, 매전면에는 ‘북마리’ ‘말마리’가 있다. 저게 대체 무얼 뜻하는 것일까?

종국에는 방언학자들이 설명할 몫이겠지만, 아마추어 눈에 ‘마리’는 ‘말리’와 같은 것 아닐까 싶었다. 두 말을 옮긴 한자가 꼭 같이 ‘旨’(지)인 게 이 추론의 단서다. ‘섶마리’가 ‘薪旨’(신지), ‘북마리’가 ‘北旨’(북지)로 표기되는 동시에, 다른 지방에서 간혹 보이는 ‘띠말리’라는 동네는 ‘茅旨’(모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리’ ‘말리’는 경상도 방언에서 ‘만댕이’와 같은 말이 될 듯하다. ‘만댕이’에서 ‘말랭이’로 변했다가 ‘말리’를 거쳐 ‘마리’로 변용돼 나왔을 수 있어 보이는 것이다. ‘말리’의 다른 용례로는 얼마 후 살필 ‘마당말리’라는 지명도 있다.

이렇게 어떤 말 뒤에 붙어 쓰일 때의 ‘만댕이’ ‘말랭이’는 ‘무엇 무엇의 위’를 가리킬 때가 있고, ‘(뭣뭣 닮은) 꼭대기’를 의미할 수도 있는 듯하다. 거기다 우리 마을 이름들은 땅 이름을 그대로 따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니 ‘마당말리’는 ‘마당같이 평평한 (땅의 상부에 있는) 고개’이면서 ‘그런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띠말리’는 ‘띠가 많은 땅(띠밭·茅田)의 위에 있는 지형’ 혹은 ‘그런 고개 아래의 동네’일 수 있을 듯하다.

그럴 때 ‘말랭이’ ‘말리’ ‘마리’라는 것이 어느 길의 꼭대기라면 그건 고개(고갯마루)가 될 터이다. 다른 말로는 ‘재’다. 다만 ‘말리’ ‘마리’가 이름으로 쓰인 고개는 마을 인접한 나지막한 것 아닐까 싶다. 여러 용례에서 오는 느낌이다.

그러면, ‘마리’ ‘말리’는 왜 ‘旨’(지)로 표기된 것일까? 자전을 찾아 아무리 맞춰 봐도 한자의 뜻으로는 그럴싸한 게 없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말을 음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차용된 글자인 것은 아닐까? 예부터 한자의 음을 빌려 소리 나는 대로 우리 지명을 표기하는 일이 많으니 그것 또한 염두에 둬야 할 가능성이다.

만약 이것도 그런 경우라면 ‘旨’는 ‘재’(고개)라는 말을 기록하기 위해 음을 차용한 한자일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그렇다면 ‘갈마리’는 ‘갈재’(갈고개)와 같은 말이고, 그걸 한자를 빌려 표기하다 보니 ‘갈지’가 된 셈이다. 거기다 里자를 붙이면서 ‘갈지리’라 했을지 모른다.

이 부분에서, '지'와 '재'는 음이 다른데 서로 어떻게 통했겠느냐 할지 모르나, 한자 음이 지금같이 정해진 게 그리 오래 안 됐음을 알면 의문은 해소될 터이다. 일부에서는 한자 음을 통일시키기 위해 발음기호로 만든 게 훈민정음이라 주장하는 경우까지 있음을 상기할 일이다. 그 옛날에는 '旨'가 '재'로 읽혔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고도 여전히 남는 의문은 ‘갈’에 관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한자에 연연해 “칡(葛)이 많은 곳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리라 판단하려 드는 것은 아무리 봐도 난센스다. 옛 농부들이 입에 익은 ‘칡’이란 말을 던져두고 이 시대 대학생들조차 쉽게 못 알아듣는 ‘갈’이라는 어려운 한자 용어를 썼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옛 기록에는 ‘乫’(갈)로 나온다고 하니, 여느 지명들처럼 자연 형성된 순수 우리말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갈’을 밝히기 위해서는 ‘갈지리’라는 마을이 청도뿐 아니라 재 너머 경산에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또 갈재의 남쪽에 ‘藍田’(남전)이란 마을이 있고 북쪽에 ‘藍谷里’(남곡리)가 있으니, 이것 또한 우연일 뿐인지 궁금하다.

갈재(갈고개)를 출발해 오르다 보면 산길은 얼마 후 평평한 쉼터에 닿는다. 해발 390m 정도로 읽히는 곳, 앞서 12㎞에 걸쳐 이어져 온 300m대 능선의 상징적 종점으로 봐도 좋을 만한 지점이다. 거기서는 지난번 그 농장에서 본 것 같은 거목 한 그루가 산꾼을 기다린다. 그 아래 앉았다 하면 일어서기 싫어지는 귀한 정자나무다.

그 지점은 그러나 기맥 마루금 위에 있는 건 아니다. 60여m(높이 기준) 더 올라가야 닿는 기맥 상의 448m봉서 남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지릉 위의 한 지점이다. 갈재서 그 봉우리로 바로 쳐 오르기가 버겁다 보니 옆구리를 감아 이 쉼터로 우회하는 것이다.

기맥 종주객이 아닌 일반 등산객들은 448m봉서 내려서는 이쪽 지릉을 주로 탄다. 그 끝이 김전리(金田里) 마을 입구여서 일대 산줄기를 환종주하고 원위치로 돌아오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김전리~대왕산~큰골산(641m봉)~도태재(345m)~학일산(693m)~김전리가 그 코스다.

저 쉼터를 거쳐 448m봉에 오르면 대왕산 가는 길은 거의 절반 걸은 셈이다. 갈재서 대왕산 오르는 데 총 70여 분 걸린다고 보면 시간상으로도 그 중간 즈음에 해당하는 곳이 448m봉이기 때문이다. 전에 헬기장이었던지 상부가 평평히 닦여 있다.

이 봉우리 다음에 만나는 오르기 힘든 구간은 567m봉이다. 오르다 보면 마치 그게 대왕산 정상인 양 솟아 보일 정도다. 이것만 거치면 10분 이내에 정상에 설 수 있다.

대왕산은 ‘大王山’이라 기록되고 ‘大旺山’으로도 나타나는 해발 606m봉이다. 사람 따라 다른 전설을 들려줬으나, ‘백두대왕’ ‘팔공대왕’ 하는 무속의 사례까지 종합해 보건대 ‘대왕’은 산신(山神)의 별칭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대서 오랜 세월 이 산을 우러른 까닭도 그것 아닐까 싶었다. 주변에 더 높은 봉우리들이 있는데도 굳이 이걸 최고봉이라 확신하는 연유도 그랬다. 딴 봉우리들은 제쳐 두고 모두들 꼭 이것 위에 올라 기우제를 올린 것도 그래서일 수 있다. 경산 남산면 남쪽에 동서로 길고 높게 솟은 비슬기맥이 주는 신령스런 느낌의 중심에 섰으니 산신의 땅이라 느낄 만했을지 모른다.

대왕산은 일대의 일상과도 인연 깊은 산이라 했다. 산 남쪽 기슭 ‘못안’ 마을(청도 김전리) 어르신들은 “대구비행장서 비행기 뜨는 것이 보일 만큼 높고 전망 좋아 옛날 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고 했다. 경산 남산에선 광복 직전 마을사람들이 이 산을 의지 삼아 ‘죽창의거’를 일으켰다고 해서 특히 애착 가는 듯했다.

소문대로 봉수대가 있었던지 대왕산 꼭대기는 제법 널찍하게 닦이고 축대도 쌓여 있다. 그러나 관리가 안 돼 잠깐 앉아 쉴 마음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어수선하다. 간벌이 안 돼 그 좋다는 주변 조망도 완전 깜깜이다. 경산시장 이름으로 된 정상표석은 화가 난 누군가의 발길에 차인 듯 거꾸러져 있었다. 606m봉을 641.2m라 새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표석이 가리킨 641m봉은 대왕산서 30여 분 더 가야 도달한다. 그리고 이 구간 최고봉은 대왕산이 아니고 바로 저 641m봉이다. 그걸 지나면 비슬기맥은 420m재(벗곡재)로 떨어졌다가 해발 373m의 최저점 ‘잉애재’까지 가라앉기 때문이다. 갈재~잉애재 사이 비슬기맥서는 대왕산~641m봉 사이 1.25㎞가 최고능선이고, 그 중에서도 최고점은 641m봉인 것이다.

하지만 641m봉은 높기만 할 뿐 외졌고 정상부 또한 작다. 최고점 부분은 몇 사람이 동시에 올라서기조차 비좁다. 기맥 등산로마저 거기 도달하자마자 바로 급격히 하강해 버린다. 울긋불긋 나붙은 등산 시그널들이 위상을 느끼게 할 뿐, 여기가 최고점이노라 티 내는 것 또한 전혀 없다. 훨씬 낮은 606m 대왕산에 일대 상징적 봉우리의 지위를 내준 것도 이 탓일 수 있다.

그러나 외지고 덩치가 작아도 641m봉은 최고봉으로서의 역할만은 묵묵히 해낸다. 최장 12㎞에 달하는 긴 능선을 두 개나 가진 큰 산덩이를 거기서 남쪽으로 분기시켜 보냄으로써 일대 지형을 구획하는 게 그것이다. 겉모습에선 밀리더라도 산줄기 물줄기 흐름에선 대왕산과 비교 안 되게 중요한 게 641m봉인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가지능선으로 이어가는 남쪽 흐름을 중심으로 보면 641m봉이 결코 작은 게 아님도 드러난다. 평평하게 이어가는 정상부 능선이 상당히 긴 것이다. 그러한 남쪽 흐름에서 봐 이 봉우리에 붙여진 이름은 ‘큰골산’이라고 했다. 그 남릉 위의 인접 644m봉 등과 함께 그 서편 기슭 ‘큰골’의 외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큰골은 금천리 마당말리 마을의 일부다.

 

학일산∼토함산능선 대왕산덩이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나간 별채의 복잡한 구조는 641m봉~513m봉 사이 4㎞ 구간을 중추 삼아 살피는 게 유리하다. 그 초입에서 '청두산능선'이라 부를 만한 지릉을 하나 갈라 보내고, 종점인 513m봉서 총길이 13㎞가량의 역U자 형 산줄기와 이어지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두산능선 분기점은 641m봉과 불과 몇 분 거리에 있는 629m봉이다. 하지만 산길마저 그 옆구리로 우회해 지나쳐 버릴 정도로 희미하다. 이 때문에 641m봉 출발 얼마 후 오른쪽(서편)으로 묘지가 하나 보이거든 거기가 629m봉 남사면인 줄 알아채는 게 좋다. 묘지 저편에 능선 들머리 시그널이 붙었다.

걷는데 도합 70여 분(하산시간 제외) 걸리는 청두산능선에는 비슷비슷한 높이의 봉우리가 매우 많다. 관하실 구간만도 12봉(실제는 8봉)이라 할 정도다. 그 높이도 마지막 489m봉 외엔 모두 500m 이상이다. 능선 서편으로는 매전면 금천리의 '마당말리' 마을이 펼쳐지다가 관하리 '관하실' 마을이 바통을 넘겨받는다.

한데 이곳 지명에도 혼란이 생겨 있다. 1대 5,000 지형도가 도중의 517m봉과 막바지 501m봉 두 군데에다 '천주산'(天柱山)이라 표기해 놓은 게 발단이다. 현장에서는 누군가가 501m봉에다 '477.1m 천주산'이라고 쓴 플라스틱 조각을 걸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현지 어르신들은 모두 마지막에 솟는 489m봉 혹은 그 직전의 501m봉을 합쳐 '청두산'이라 했다. 이걸 동쪽 산으로 삼는 관하실이나 북산으로 기댄 상평리나 마찬가지였다. 꼭대기엔 서쪽 용각산으로 날아갔다는 용마(龍馬) 발자국이 있다고도 했다.

청도읍서 곰티재를 넘어 동쪽으로 내려설 때 전면으로 가장 높게 솟아 보이는 게 저 봉우리다. 거꾸로 매전서 곰티재를 향해 북으로 오를 때도 산줄기들 중간에 정면으로 솟구쳐 가장 선명하고 인상 깊게 마주 보인다. 하지만 청두산은 그 능선에 솟은 봉우리들 중 가장 낮은 것이다. 위치 때문에 시각적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등산로는 관하실마을 안으로 연결돼 있다.

청두산 능선을 갈라 보낸 뒤 중추능선은 잠깐 648m까지 치솟았다가 서편의 상평리 공간과 동편 김전리를 가르며 남동 방향으로 낮아져 간다. 도보로 50여 분 걸려 도달하는 최저점은 345m재. 상평리와 김전리를 직선으로 잇는 고개다. 청도 매전면에서 경산 자인장 가는 최단거리 코스였고, 금천면 김전리 쪽에서 청도읍을 넘나드는 관문이었다고 했다. 산 아래로 두르자면 16㎞가 넘지만 이 재로 지르면 5㎞ 남짓하게 축지(縮地)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을 중시해 이 재를 직통하는 차도 건설이 최근에 확정됐다. 개발촉진지구 사업으로 선정돼 국가가 90억 원을 부담, 너비 8m 길이 4.6㎞의 도로를 2년 내에 내기로 한 것이다.

이 중요한 재의 이름에도 혼선이 생겨 있다. 국가기본도를 따라 대개들 '돈치재'라 알고 표기하지만, 현장에선 누구 없이 '도태재' 혹은 '도치재'라 부르는 것이다. '태'가 고개(峙·치)를 의미하는 '티'의 경북 동남부 방언이니 '도태'와 '도치'는 상통한다. 그러나 '도'와 '돈'이 같다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이 시리즈 또한 비슬기맥 전체 그림(산경도19 '비슬기맥과 그 주변')에서 천주산·돈치 등의 잘못된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 그 외에 '복수덤' 등 몇몇 지명 표기 또한 잘못된 것으로 확인됐다. 하나씩 바로잡아 가다가 최종 교정된 그림을 만들 계획이다.

도태재에는 '상평리 2.5㎞, 김전리 입구 2.5㎞, 통내산·학일산 3㎞'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하지만 바닥길이만 재도 김전리는 3㎞, 토함산(통암산·통내산) 4.25㎞, 학일산 3.25㎞에 이른다.

또 거기서 동편 김전리로 내려가는 도중에 만나는 '김전저수지'를 놓고 일부에서 여전히 '유정지'라는 옛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도 교정 대상이다. 본래 조그만 유정지였으나 확장하면서 이름이 바뀌었고, 그 과정에 '교동(橋洞)마을'이 수몰돼 이전한 사실을 기록한 비가 '신교동' 마을 입구에 서 있다.

도태재 서편 상평리 쪽 아래 골은 '도태재골'이라 했다. 하지만 짧게 끝나고 곧 더 큰 계곡에 합류된다. 상평리 입구서 629m봉 아래까지 쳐 오르는 '반곡'(盤谷)이 그것이다. 온통 감밭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특이한 골이다. 하지만 빨치산이 설치기 전 그 골 깊은 곳에 20여 호나 되는 '반곡'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그 집터 축대들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도태재골보다 더 남쪽으로 갈라져 오르는 반곡 가지골짜기는 '녹동골'이라 했다. 거기에 옛날 '녹동'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형도는 그걸 모르고 그곳 저수지를 '반곡지'라 표기해 놨다. 국가기본도는 대신 영 엉뚱하게 역U자형 산줄기 너머 금곡리 '안버구' 마을 옆자리에다 녹동 마을 표시를 해 놨다. 위치도 엉터리이지만 없어진 마을조차 분간 못하는 게 더 안타깝다. 현지 어르신들이 혀를 찼다.

'녹동골'은 중추능선 중 역U자형 능선 연결점(513m봉)까지 구간의 서편 골짜기다. 도태재서 20여 분이면 오를 수 있는 거리. 하지만 실제 산길이 역U자형 능선과 이어지는 지점은 513m봉이 아니라 그 서편 495m 잘록이다. 걷기 편하게 길을 낸 결과다. 거기도 안내판이 두 개 섰으나 하나는 '학일산 1.2㎞, 통내산 3.5㎞, 돈치재 2㎞'라 하는 반면, 다른 건 '학일산 2.3㎞, 통내산 4㎞'라 한다. 도상 측정한 바닥거리는 학일산 2.25㎞, 토함산(통암산·통내산) 3㎞, 도태재 1㎞ 정도다.

513m봉서 산줄기는 동·서로 갈라져 둥근 역U자 능선을 그려 간다. 그 중 서쪽으로 가는 능선은 점차 높아져 600m대 봉우리를 몇 개 올려 세운다. 그 과정에 몇 개의 지릉들을 갈라 보내 그 속으로 '먼담'(모은정) '수무동' '가라골' 등 하평리(下坪里) 자연마을들을 품어 들인다. 대로에 인접했으면서도 깊은 산촌 분위기가 물씬한 숨겨진 땅들이다. 수무동 한 할머니는 “폭풍이 들어오면 나갈 곳을 못 찾아 회오리로 돌면서 날뛰는 게 이 골”이라 했고, “틀림없이 인근에 (표)범이 산다”고도 확신했다.

국가기본도는 그곳 600m대 봉우리들 중 가장 높은 675m봉에는 '통내산', 산줄기 끝 길가에 솟아 가장 상징적으로 올려다뵈는 630m 절벽봉우리에는 '토한산'이란 이름표를 붙여 놨다.

하지만 저 명칭들은 동일한 하나를 서로 다르게 발음한 결과일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현지인들 발음대로 '토함산'이던 것이 '토한산' 혹은 '통안산'으로 바뀌고 '통내산'으로 한역됐을 가능성이 그 하나다. '통함산'(桶函山) '통암산'(통바위산)을 본딧말로 해서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리라는 추측도 제시돼 있다.

675m봉~630m봉 산덩이의 요체는 뭐니 뭐니 해도 630m봉 남사면 및 그것과 이어지다시피 한 675m봉 남동릉에 형성된 단애 절벽이다. 모습이 세속을 벗어난 땅 같고, 거기 오르면 동창천 일대가 한눈에 꿰인다. 반면 675m봉 본체는 특징이 없을 뿐 아니라 저 절벽에 가려져 보이지조차 않는다. '토함산'이란 이름 또한 675m봉이 아니라 630m봉을 두고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이런 중에 어느 등산단체가 675m봉 돌탑에다 '674.4m 통내산'이란 표석을 붙여 놨다. 하나 그 높이는 그곳 삼각점 것일 뿐이다. 더 북편에 있는 정점의 높이는 675.4m라고 국가기본도에 나와 있다. 잘못된 지명 등재 과정에 관한 지식과 지형도 판별력이 부족한 일반인이 무턱대고 정상석을 세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일깨우는 또 하나의 사례다.

역U자 능선 중 513m봉서 동쪽으로 감아 도는 능선은 얼마 후 최고봉인 해발 693m '학일산'으로 솟구쳤다가 점차 낮아지며, 사실상의 이 능선 마지막 봉우리인 565m봉에서 '동곡재'(210m·금곡재)로 급락한다. 하지만 20번 국도가 지나는 동곡재를 지나서는 다시 427m봉으로 솟는 바, 이걸 국가기본도는 '갓등산'이라 표시하고 현장에도 그렇게 쓴 정상석이 섰다.

그러나 봉우리 남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금곡리(매전면) 어르신들은 그런 이름을 금시초문이라 했다. 마을에서는 대신 그 산 모양이 말(馬)을 닮은 것으로 전해져 온다고 했다. 뾰족한 정상부가 머리고 마을 쪽 낮은 등성이가 궁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을서는 그걸 청도의 은둔선비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1479~1552) 묘소가 있는 그 문중 갓(산)으로 지칭하고 있었다. 그런 뜻에서 '갓등산'이라 했다면 그건 일반명사일 뿐인 셈이다.

삼족당은 무오사화로 희생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조카다. 청도 각북에 살면서 모두 문과에 급제한 삼형제 중 막내가 탁영이고 맏이의 아들이 삼족당이다. 20여 살 아래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삼족당을 두고 "선(善)을 좋아했으나 쓰이지 못하자 홀로 선을 행했고, 능력을 갖고도 쓰이지 못하자 자기 자신을 이루었다"고 썼다. 그리고는 "이게 천명(天命)인가 시운(時運)인가"라고 물었다.

산줄기는 427m봉 이후 다시 낮아져 해발 260m의 '아래고개'를 거친다. 그걸 지나서는 370m봉으로 다시 올라서며, 그 산덩이 자락 동창천 가에 임진왜란 충절의 상징이 된 '봉황애'와 삼족당의 별장이었던 '삼족대' 등 명소가 있다.

저렇게 해서 완성되는 역U자 형 능선 사이는 매우 좁은 협곡이다. 거기다 그 속으로 '함박등'이라 불리는 645m나 되는 큰 산덩이까지 솟아오름으로써 더 좁아졌다. 하지만 그런 골에도 오랜 세월 '버구'라는 마을이 자리 잡아 왔다고 했다. 아랫버구 중버구 안버구 세 땅으로 나뉘어 민가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U자형 능선을 한 바퀴 도는 데는, 427m봉 산덩이를 빼놓고도 4시간 가까이 걸린다. 날머리 겸 들머리는 동곡재, 아랫마을(금곡리), 농협(기도원), 동산초교(면사무소) 등등이다. 동곡재서 오를 경우 첫 고비인 565m봉 오르는데 40분, 565m봉~학일산 30분, 학일산~513m봉 40분, 513m봉~토함산(정상) 65분, 토함산~630m절벽봉 10분, 하산에 40분이 필요하다.

 

잉애재와 선의산   토함산 능선(641m봉 남릉) 서편은 ‘관하천’ 유역이다. 바리박산 이후 지속돼 온 ‘동곡천’ 수계가 그로써 마감되는 것이다. 거기서 시작되는 관하천 유역 북편담장 격 산줄기는 641m봉~벗곡재(420m)~삿이등(520m)~잉애재(373m)~선의산(756m)~말마리재(478m)~용각산분기점(650m) 사이, 비슬기맥 중간토막 10여㎞다.

  이 구간은 큰 지표들에 의해 세 단락으로 세분될 수 있다. 641m봉~잉애재(3.75㎞, 걷는 시간 80분), 잉애재~선의산(3㎞, 90분), 선의산~용각산분기점(3.75㎞, 70분) 등이다. 괄호 속의 거리와 걷는 시간이 비례 않는 건 오르내림 차이 때문이다. 반대방향으로 걸으면 소요 시간이 100분, 60분, 80분으로 달라진다.

  641m봉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첫 단락 북편은 경산 남산면 사림리(沙林里)다. 남편으론 청도 매전면 금천리(錦川里)의 ‘마당(말리)’ 마을과 ‘잉애태’ 마을이 이어서 펼쳐진다. 산줄기 흐름은 대체로 내리막이며 25분 이내(역방향 때는 30분)에 사실상의 첫 잘록이인 해발 420m재로 떨어진다. 마당말리 입구와 재 너머 사림리에서 선명히 올려다 보이는, 두 마을 연결 고리다.

  어르신들에 따르면 옛 도보생활 시대에 이 재는 지금 찻길이 나 있는 서편 잉애재보다 이용자가 많던 중요한 재였다. 경산 자인장을 내왕하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시장은 지금의 마트와 달리 물건을 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생산품도 내다 팔아야 하는 필수공간이었다. 이 재에선 일대의 거점이던 자인장이나 동곡장(청도)이나 마찬가지 30리 거리라 했다.

  하지만 이 유서 깊은 재의 이름 또한 불투명하다. ‘복고개’라 채록해 둔 게 있는가 하면, 너무 높아 옷을 벗고 넘어야 해 ‘벗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사람도 있다. 반면 마당말리 마을 어르신은 그 모두를 부정하면서 ‘벅곡’이 본명이라고 못 박았다. 재는 ‘벅곡재’, 그 아래 골은 ‘벅곡골’이라는 것이다. 그런 중에 이 시리즈처럼 ‘벗곡재’라 표기하는 경우도 간혹 보인다.

  ‘마당말리’는 줄여 ‘마당’이라고도 불리는 15호 남짓한 마을이다. 금천리 최상부 공간을 나눠 차지한 ‘잉애태’ 마을과는 925번 지방도를 통해 금방 연결된다. 하나 마당마을 뒤의 벗곡재와 잉애태 마을 뒤의 잉애재 사이 산길은 무려 3㎞나 된다. 남북으로 오락가락하는 게 원인이다.

  산길은 벗곡재(420m)를 출발하자 말자 520m봉으로 100m 솟는다. 이 뚜렷한 봉우리를 마당마을서는 ‘삿이등’이라 불렀다. 이후 산줄기는 해발 385m로 되레 더 낮게 추락했다가 100여m를 만회해 486m봉에 오른다. 경산의 남산면과 남천면을 가르는 긴 산줄기가 북으로 출발해 나가는 분기점이다. 그 초입에 솟은 게 경산 삼성산(555m)이다. 삿이등(520m)~분기봉(486m)~삼성산능선 사이 산줄기가 둥그렇게 둘러싼 한가운데에 북편 사림리 저수지가 자리했다.

  486m봉서 10여 분이면 내려서는 ‘잉애재’(373m)는 청도 매전면과 경산 남천면을 잇는 지방도 고갯길이다. 매전과 대구를 연결하는 최단거리 코스여서, 옛날 약재 등을 짊어지고 대구 약전골목을 오갈 때 주로 넘던 고개라 했다. 그 남쪽은 아까 본 금천리고, 북에는 신방리(新方里)-송백리(松柏里) 순으로 분포했다.

  그러나 이 재 이름은 더 모호하다. 예로부터 ‘잉애태’라는 이름으로 가리켜져 왔던 그 재인지조차 유동적이다. 그 아래 잉애태 마을서는 ‘고또배기’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다. 국가기본도는 여기가 아니라 더 동쪽 486m봉 어디에다 ‘잉어재’라 표기해 놨다. 그 북편 신방리 골짜기는 ‘잉어골’, 거기 있는 저수지는 ‘이어지’라고도 했다. ‘이어’는 ‘잉어’의 한자 본딧말이다. 그런데도 산줄기 남쪽 여러 마을 어르신들은 이 재를 ‘잉애태’라 부르고 있었다. ‘태’는 ‘티’(고개)의 방언이니 ‘잉애재’라는 뜻인 셈이다.

  하지만 이 재가 ‘잉애재’가 맞다 하더라도 ‘잉애’가 무엇인지는 추가로 밝혀져야 할 과제다. 그 이름을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쓰는 잉애태 동네 어떤 이는 그걸 잉어라고 주장했다. 마을 뒤 골짜기가 그 물고기같이 생겨 ‘잉어터’가 됐다는 얘기다. 국가기본도는 이 재 자리에다 ‘이현재’라 적어 놨다. ‘잉어 이’자와 ‘고개 현’자를 합친 조어다. 뜻에서 동일한 ‘잉어재’와 ‘이현재’를 음으로만 서로 다르게 분식해 여기저기 흩어놓은 꼴이다.

  그러나 ‘잉애’가 잉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발음 때는 ‘잉’에 악센트를 줬다. 물고기 잉어와는 전혀 다른 발음 방식이다. 그렇게 발음하는 ‘잉애’는 베틀 부속품인 ‘잉앗대’의 ‘잉아’다. 그게 발음하기 좋게 변해 ‘잉애’가 된 것이다. 잉앗대 제작을 생계 삼던 옛날 어떤 노인의 슬픈 이야기가 깔려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잉애태 마을 뒤 바위가 잉앗대 모양을 해 그렇게 됐다는 설도 있었다.

  잉애재서 선의산 사이 산줄기는 대체로 꾸준한 오름세다. 출발 직후 441m봉으로 향하는 10여 분, 그 다음 594m봉 오르는 20여 분 간이 힘든 구간이다.

  거기서 25분여 더 가서 도합 55분여 만에 도달하는 659m봉은 금천리 아래쪽 관하리와 그 서편의 두곡리 공간을 가르는 지릉 분기점이다. 이 지릉은 동편 잉애잿길과 서편 곰태잿길이 만나는 20번국도 변 삼거리까지 무려 4㎞나 내리달린다. 659m봉서 내려서는 640m재로 두곡리 암자골 등산로가 연결돼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저 등산로가 거쳐 올라온 숲실-암자골 골짜기는 640m재 다음의 705m봉에서 한눈에 조망된다. 주변서 드물게 특별히 ‘시루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 정도로 특출한 바위덤 절벽 전망대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보면 암자골로 내려서는 산줄기들의 기세가 그야말로 용이 모여드는 것 같다.

  시루봉서 5분여 내려서면 684m재이고, 그 인접 지점서는 등산로가 갖춰진 큰 산줄기가 북쪽 경산 송백리를 향해 내려선다.

  도합 90여 분 걸려 도달하는 선의산(756m) 정상부도 비슬기맥선 유례 드문 암괴봉우리다. ‘맘산바우’라 불리는 그 암봉에 가설된 철계단 또한 기맥서 유일하다. 그런 특별함에 걸맞게 선의산 정상에선 ‘온 세상’이 다 보인다. 남쪽 멀리로는 운문분맥 산줄기, 북으로는 경산시가지 뒤로 팔공산이 훤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 경산시청이 세워둔 예의 새천년 기념 표석은 “남천면 주산으로 선녀가 춤추는 형상이어서 선의산이라 한다”고 써 뒀다. 하지만 ‘仙義’(선의)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해득되지 않는 한자조어일 뿐이다. 춤추는 선녀와 전혀 무관하다. 표석의 설명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것이다.

  경북마을지 기록과 주변 마을 어르신들 증언을 종합해 보면 ‘선의’는 ‘생이’의 음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고인을 무덤으로 모셔가는 ‘상여’의 경상도식 발음이 생이다. 상여를 이곳서는 ‘생기’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산은 ‘생기산’, 그 북편 큰 골 및 거기 있던 마을은 ‘생기골’이라 불렀다. 산이 상여 같이 생겨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다.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명이다.

  생기골은 경산 쪽 선의산 주 등산로 시점인 도성사 안 계곡이다. 송백1리에 속하는 그 골은 사육신 박팽년의 노복이 선생의 후손을 숨겨 대를 잇게 한 곳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인접 송백2리 입구엔 발해 대조영의 후손들 세거지임을 들어 스스로 ‘발해마을’이라 알리는 표석이 서 있기도 하다. 돌림병을 막아 주는 ‘풍신’이 된 ‘전영동’이란 신인(神人)이 인근에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 사람을 살리고 흥하게 하는 터가 상여 터인가 보다.

  하지만 산의 남쪽 청도 두곡리 어르신은 ‘선의산’이란 이름을 매우 거북해했다. “옛날부터 마암산이라 불러왔는데 지금 와서 왜 선의산이라 하느냐”는 것이다. 말씀대로 ‘馬巖山’(마암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산현 조에서부터 나타나는 명칭이다. ‘남쪽 21리에 있는 현의 진산’이라 했다.

  경산 사람들이 이 산을 ‘마암산’이라 부른 흔적은 지금도 있다. 그 꼭대기 암괴를 ‘맘산바위’ 혹은 ‘망산바우’ ‘만세바우’라 부르는 게 그것이다. 그렇다면 일제 때 첫 지형도 제작 과정서 ‘마암산’이 묻히고 ‘선의산’이 채택됐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사연이 복잡한 선의산을 두곡리 입구서 보면 정상 봉우리보다는 714m봉이 더 높아 보인다. 680m재를 사이에 두고 정상봉서 서쪽으로 15분가량 더 간 곳에 솟은 실질적인 마암산 제2봉이 그것이다. 두곡리 어르신은 이걸 ‘고동골 말랭이’라 불렀다. ‘고동봉’ 정도의 이름을 붙여주면 소통에 좋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는 남동쪽으로 ‘진등’(긴등·長嶝)이라 불리는 산줄기가 분기해 두곡리 들머리 마을회관까지 내려서며 지나온 ‘암자골’과 다음의 ‘절골’ 공간을 나눈다. 그 암자골 곁가지 골이 ‘고동골’이다

 

용각산 용산면 마암산(선의산) 혹은 그 제2봉 고동봉(잠칭·714m)과 용각산은 470m대 낮은 구간을 중간에 두고 남·북 간에 나뉘어져 있다. 고동봉서 100m 급락한 후 470m대 구간까지 추가 하강하고, 마지막 저점인 478m재에서 150여m 솟아 용각산에 이르는 게 이 구간 산줄기 흐름인 것이다.

이렇게 이어진 756m봉(마암산)~478m재~693m봉(용각산)을 이어 걷는 환종주 구심점은 매전면 두곡리다. 시종점은 자주 등산버스 주차장이 된다는 마을회관 앞마당. 등산객들은 거기서 오른쪽(동편)으로 난 암자골 계곡을 들머리로 삼는다고 했다. 숲실마을, 저수지 둘, 몇 집이 사는 암자골 마을 등을 차례로 거쳐 선의산에 올랐다가 용각산을 거쳐 절골로 하산한다는 것이다.

선의산과 용각산의 가름선이라고 봐야 할 478m재를 두곡리 이외 지역 사람들은 ‘말마리재’라 불렀다. 두곡리 쪽 그 조금 아래에 ‘말마리’라 불리던 마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골마을 상부 ‘마지’라 불리는 저수지 안이 그 자리라 했다. 지금은 염소농장 하나밖에 없지만 집터들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반면 두곡리 사람들은 그 재를 ‘하도재’라 불렀다. 그걸 넘으면 남천면 하도리(河圖里)이기 때문이다. 하도리는 무려 12㎞에 달하는 비슬기맥 구간을 마을 앞 능선으로 삼아, 비슬기맥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마을을 구심점으로 해서 선의산~용각산~성현~고리골산(경산묘원) 사이 비슬기맥이 둥그스름하게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선의산 권역의 4분의 1 또한 하도리 땅이다.

어르신들에 따르면 하도재 혹은 말마리재는 한때 “하루에 소 1천 마리가 지나다닌다”고 할 정도로 통행량이 많아 재 위에 주막이 성업할 정도였다. 용각산 남서편 덕암·내리 등의 사람들이 그 마을 뒤 ‘큰고개’를 통해 비슬기맥에 오른 뒤 용각산 북사면을 타고 말마리재까지 오가며 땔나무를 챙기고 ‘모풀’을 베러 다녔기 때문이다. ‘모풀’은 다음해 못자리용 퇴비를 만들기 위해 모내기가 끝난 7, 8월쯤 베어 모으던 풀이었다. 모두가 땔감과 비료가 귀하던 1960년대 이전 이야기들이다.

말마리재 이후 제법 용을 쓰고 20여 분을 투자하면 널찍하고 평탄한 고원 같은 지점에 닿는다. 용각산 북편기슭 해발 650m 높이의 ‘용각산 분기점’이다. 용각산이 비슬기맥에 솟지 않고 그 남쪽으로 갈라져 나간 산줄기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분기점과 용각산 사이 거리는 200여m, 오르는 시간은 5분 정도다.

분기점에서 갈라져 나가 용각산을 거친 후 남동쪽으로 굽어 돌기 시작하는 저 능선은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유천지맥’이다. 청도를 산서(山西)와 산동(山東)이라는 두 개의 권역으로 좍 가르면서 유천까지 무려 22㎞에 걸쳐 기세 높이 줄기차게 내달리는 산줄기다. 이 시리즈가 저 산줄기에 특별히 ‘지맥’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이유도 이것이다.

저 중요한 산줄기 출발점이니 청도로서는 용각산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옛 기록이 용각산을 ‘소조산’(小祖山)이라고까지 판단한 이유도 그것임에 틀림없다. 풍수지리학에서 소조산은 조산 다음으로 위상 높은 산이다. 대한민국의 원초적 조산은 백두산이고, 거기서 뻗어나온 산줄기가 산하에 넓은 터전을 만들 때 그 모산이 되는 산이 소조산이다.

용각산이 청도에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산인가는 유천지맥 끄트머리에 있는 ‘대운암’(大雲庵)이란 절이 ‘용각산 대운암’이라 표방하는 것에서도 실감된다. 용각산서 무려 20여㎞나 떨어진 유천지맥 마지막 501m봉 아래 잡았는데도 저러는 것이다. 그 아래 청도읍 유호2리서는 아예 501m봉마저 용각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산을 등산하고 놀 공간으로 생각하는 외지인이 보기에 청도 산 중에선 가지산·운문산이 좋고 억산이 뛰어나며 비슬산이 명산이다. 그 다음에는 선의산이 있고 사룡산·구룡산이 특출할 것이다. 하지만 산과 산줄기를 삶의 터전으로 생각한다면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청도 지리지의 결정본인 ‘오산지’ 서술이 대표적이다. 거기 나타난 용각산과 유천지맥 서술을 현대 감각에 맞춰 조금 분식하면 아래처럼 된다.

“단석산 대간룡(大幹龍)에서 한 산줄기가 서쪽으로 100여리 갈라져 나와 군청 소재지(鰲邑·오읍)의 북동 지점(甲方·갑방)에 도달했을 때 한 봉우리가 우뚝 솟으니 ‘갑령’(甲嶺)이라 불리며 특별하게 ‘소조산’(小祖山)이 된다··· 그 갑봉(甲峰)서 한 산줄기가 남동쪽으로 흘러 곰티(熊峙)를 지난 후 중산(中山)을 이뤘다가 건령(楗嶺)을 넘어 오례산성으로 솟아 유천 주산(主山)이 된다.”

물론 오산지 서술이 틀림없이 과학적이라 보기 힘들 수는 있다. 단석산을 비슬기맥의 출발점으로 잡은 것부터 그렇다. 이 부분을 요즘 시각으로 보면 “사룡산서 서편으로 분기해 100여리 나와서 한 봉우리가 우뚝 서니 청도의 소조산 용각산이다”고 써야 맞다. 그에 앞서서는 “백두대간의 강원도 태백 매봉산 지점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내려오는 낙동정맥의 사룡산 지점에서 비슬기맥이 분기한다”고 써 두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오산지가 용각산을 그냥 ‘갑령’이라 한 것 또한 주목할 대상이다. ‘갑’은 24방위 중 갑방(甲方)을 가리키는 방향 표시로 풀이된다. 요즘 말로 하면 ‘청도 읍치(군청)의 북동쪽에 있는 산’ 정도가 될 것이다. 1673년에 완성된 이 책뿐 아니라 그 100여 년 뒤에 그려진 ‘해동지도’(海東地圖)에도 비슷하게 ‘갑산’(甲山)이라 표기돼 있다. ‘용각산’ 혹은 ‘용산’이라는 지금의 이름이 속명(俗名)으로 있다가 나중에 부상했을 가능성을 말하는 자료들일 것이다.

용각산 좌우 능선의 북편에 있는 것은, 아까도 봤듯 경산 남천면 하도리 한개 마을이다. 그러나 그 남쪽엔 한때 ‘용산면’이란 별도 행정구역으로 분류됐던 적이 있을 만큼 많은 마을들이 깃들였다. 그 골 입구에 세워진 ‘용산회관’ 격 건물에는 그 마을들이 8개나 된다고 적어뒀다. 그걸 면·리제 도입 때 처음 ‘내종도면’으로 묶었다가 1832년 ‘용산면’으로 변경했던 것이다. 청도읍에 통폐합된 지금도 그 마을들이 ‘용산’이란 이름 아래 뭉치는 연유도 그것일 터이다.

용각산을 정점으로 해서 옛 용산면 공간의 동쪽을 둥그스름하게 에워싸는 산줄기는 유천지맥이다. 반면 서쪽을 그렇게 둘러싸는 건 용각산 분기점서 서쪽으로 이어가는 비슬기맥과 거기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리는 지릉이다.

그 중 비슬기맥은 650m 높이의 분기점에서 370m재로 추락했다가 484m봉으로 올라서는 구성을 보인다. 저 370m재를 그 아래 덕암리 마을서는 ‘큰고개’라 불렀다. 앞서 매전면 두곡리의 말마리마을 말마리재와 산길로 이어져 있다고 했던 그 고개다.

큰고개서 서쪽으로 올라서는 484m봉은 용산면 땅의 서편 외곽능선 출발점이다. 그 지릉 이쪽이 옛 용산면 땅(청도읍)이고, 넘으면 옛 성현역 구역(화양읍 송금리)인 것이다. 저 484m봉을 이쪽 덕암리서는 ‘솔방등’이라 했다.

옛 용산면 공간에는 산줄기에 붙어서 서쪽부터 신암마을(덕암1리) 중리마을(덕암2리) 내리 안인리 운산1리 운산2리 등 여섯 마을이 분포한다. 그 중 운산리는 용각산서 정남쪽으로 내려서는 최장 6.5㎞ 길이의 산줄기에 의해 별도로 구분돼 있다. 이 산줄기는 도중에 175m 높이까지 낮아져 양쪽을 잇는 팔치(八雉)고개를 내주기도 하나, 그 이후 다시 매봉(368m)으로 높아진다. 매봉 기슭에는 통안(원정리) 바깥솔골(송읍리) 무등리 등의 마을이 자리 잡았다. 무등리는 옛 용산면 공간 진입점 마을이다.

이런 땅덩이의 핵심 용각산을 오르는 주 등산로 들머리는 그러나 이 마을들 쪽이 아니라 유천지맥 위 ‘곰티재’에 있다. 거기서 출발해 30여 분간 임도로 걷다가 다시 30분 산길로 오르면 정상에 닿는다.

꼭대기엔 ‘龍角山 697.4m’라 새긴 정상석이 있다. 하나 그것은 밖에서 갖다 올린 돌이 아니라 본래 그 자리에 지금 그대로 있던 암괴다. 거기다 글자만 새긴 극히 보기 드문 정상석인 것이다. 청도산악회서 20년 전에 벌써 그런 생각을 했다니 놀랍다.

하나 거기 적힌 높이 표시는 현재 쓰는 지형도 것과 다르다. 국가기본도엔 693m로 나타나 있고, 현장에도 그렇게 적어 둔 비목이 따로 서 있기도 하다. 청도산악회가 세운 정상석 중에는 높이 표시가 저렇게 어긋난 게 많다. 돌에 새길 때 의지했던 당시의 국가기본도가 지금 것과 달랐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측량기술 발달에 따라 지형도에 나타나는 높이도 변하는 모양이다.

 

유천지맥 및 그 서부 유천지맥은 앞서 봤듯 용각산서 유천까지 이어가는 매우 긴 산줄기다. 서편 청도읍과 동편 매전면을 나누는 본맥 길이만도 22㎞에 달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산줄기가 아니다. 거대한 권역, 별도의 산권(山圈)을 이끄는 특별한 산줄기다.

그 산권엔 700m 넘는 봉우리가 1개, 600m대 봉우리가 22개, 500m대 봉우리가 36개나 솟았다. 물론 각각 독립된 산덩이를 형성하는 건 아니지만 산세가 어떠할지는 짐작하게 할 자료다. 최고봉(729m)은 조산(祖山)인 용각산보다 36m 더 높다.

저 봉우리들을 꿰는 중추능선은 용각산(693m)~곰티재(285m)~장돌봉(579m, 효양산능선 분기봉)~625m봉(비룡산능선 분기봉)~시루봉(679m, 용당산능선 분기봉)~작은고개(547m)~종지봉(646m)~큰고개(565m)~함박등(679m)~족두리산(729m, 지소능선 분기점)~대호암바위(637m·아래족둘바위)~큰고개(416m·건티)~532m봉~당고개(512m)~문바위봉(594m)~양지넘(재·443m)~594m봉~사기점고개(473m)~오례산성~501m봉~노루목(40m)~127m봉으로 이어진다. 용각산~곰티재~장돌봉 5㎞(바닥거리), 장돌봉~족두리산 4㎞, 족두리산~오례산성 6.5㎞, 산성~501m봉 2.2㎞, 501m봉 이하 유천까지 3.8㎞ 정도다.

이 노정 첫 지표인 ‘곰티재’는 동창천-청도천 유역을 잇는 여러 고개 중 가장 북쪽 것이다. 예부터 ‘熊峙’(웅치)라 표기하며 주목했고 지금은 자동차도로가 난 유일한 고개다.

유천지맥은 곰티재를 지난 뒤 동쪽으로 향하면서 청도읍 쇠실마을(부야1리) 북편 담장이 된다. 그 들머리 구간 아래가 ‘곰티골’이고, 거기서 올라서면 475m봉이며 이후 420m재로 잠깐 떨어졌다가 160여m 치솟아 579m봉에 오른다. 475m봉~579m봉 사이 등성이는 ‘살매등’이라 불렸다.

이 구간을 자세히 살펴두는 것은, 지금과 달리 옛 곰티잿길이 바로 거길 통과했기 때문이다. 걸어 넘던 옛날 소로는 곰티골을 오르내리도록 나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국도 20호선 초기 신작로는 쇠실마을 안을 통과했다. 지금의 마을 진입로로 들어서서는 골 끝에서 좌회전해 곰티골을 감아 돈 뒤 더 서편의 ‘각골’을 거쳐 곰티재에 이르도록 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 길은 지금도 선명하며, 곰티재 소공원서 올라도 금방 흔적을 볼 수 있다.

유천지맥이 살매등을 거쳐 올라서는 579m봉은, 청도읍서 우회도로를 타고 곰티재 쪽으로 향할 때 정면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그 산덩이다. 정상부가 밭 몇 마지기 크기는 되지 않을까 싶게 평평 널찍한 그 봉우리 정점 삼각점 표석 옆에 누군가 ‘중산봉’이라 쓴 리본을 달아 놨다. 하지만 쇠실마을 어르신은 이 봉우리를 ‘장돌배기’라 불렀다. 그것의 마을 쪽 비탈이 너덜을 복판에 두고 노루발처럼 둘로 갈라져 있어 생긴 이름인가 싶다. ‘장돌’은 ‘노루발장도리’의 준말이다. ‘장돌봉’ 정도로 표기하면 될 듯하다.

유천지맥 산권(山圈) 첫 봉우리인 저 장돌봉을 거친 뒤, 산줄기는 주향을 남쪽으로 바꿔 쇠실마을의 동편 담장 역할을 하며 1㎞ 남짓 진행한다. 이 구간의 동쪽엔 매전면 용산리 안중산마을이 있다가 지금 골프장으로 바뀌었다. 저 구간 최저점은 505m, 최고점은 521m다. 그 521m봉서는 쇠실마을 쪽으로 등성이가 하나 내려서니, 그걸 어르신들은 ‘질등’이라 불렀다. 그 위로 난 산길을 통해 쇠실과 안중산마을이 이어졌었다고 했다.

유천지맥은 골프장 권역이 끝나는 해발 520m쯤 되는 지점에 이를 때 ‘가마실마을’(부야1리)의 동편 담장으로 변한다. 그 변환점서 서쪽으로 내려가는 지릉이 쇠실마을과의 경계선이다. 지릉 끝은 국도(20호)서 가마실마을로 들어설 때 만나는 정자 쉼터다. 거기엔 시그널들이 매달려 등산 들머리임을 알리고 있다.

저 변환점 이후 3.5㎞에 걸쳐 계속되는 가마실 동편 구간은 유천지맥 중에서도 가장 높고 현란하다. 625m봉~시루봉(679m)~작은고개(547m)~종지봉(646m)~큰고개(565m)~함박등(679m)~족두리산(729m·최고봉)~대호암바위(637m·아랫족둘바위) 사이 대단한 지형들이 모두 거기 속했다.

변환점과 그 다음 첫 봉우리인 625m봉 사이 높이 차는 100m다. 10분이면 오른다. 경사도가 보통 수준이라는 뜻이다. 625m봉과 그 다음의 634m봉도 그 자체로 특별한 지형이 아니다. 그 뒤에 오를 ‘시루봉’으로 가기 위한 여정의 일부일 뿐이다. 이런데도 625m봉을 각별히 주목해 두는 것은, 앞서 본 골프장 공간과 그 남쪽 ‘대곡지’ 골을 가르는 비룡산(684m)능선 출발점이어서다.

‘시루봉’은 한 산덩이에 679m-678m-679m짜리 세 봉우리가 솟은 모양새다. 뇌두 3개를 가진 인삼 같다고 할까. 625m봉서 15분이면 닿는 첫 679m봉은 정상부가 상당히 넓고 남쪽 동창천 건너의 운문분맥이 잘 보이는 전망대다. 다시 3분 거리의 678m봉은 북쪽 조망이 뛰어난 돌출 암봉이다. 청도 남산과 읍내는 물론 멀리 경산이 한눈에 보인다. 비슬산~삼성산~팔조령~용각산~선의산~대왕산 사이 비슬기맥 흐름이 일목요연하다. 삼각점과 ‘시루봉’이라는 예쁜 나무푯말이 거기 가설된 연유도 이것일 터이다.

저 암봉과 1분 거리인 세 번째 679m봉은 뾰족하게 솟지 않아 그냥 등성이 같고 전망도 별로다. 하지만 그곳은 용당산(596m) 가는 능선 분기점이다. 지맥 흐름으로 봐선 더 중요한 셈이다.

이렇게 구성된 ‘시루봉’은 인근 마을서 매우 중시하는 봉우리다. 특히 가마실마을서는 옛날 가물 때 그 아래 ‘큰골’서 무지(기우제)를 지낸 뒤 연기를 피워 올리러 오르던 봉우리라 했다.

시루봉 남쪽에는 매전면 용산리 용당골 ‘사고개마을’이 있다. 시루봉서 15분여 만에 내려서는 ‘작은고개’가 이 마을을 가마실과 잇는 통로다. 그래서 작은고개는 ‘가매실고개’로도 불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남쪽에 있는 ‘큰고개’(565m)를 훨씬 많이 이용했다고 했다. ‘작은고개’서 20여 분 애써 646m봉으로 올라섰다가 5분여 걸려 내려서는 재다. 그리 넘고 가마실마을 쪽 ‘오리밭골’을 가로지른 뒤 ‘제비실골’을 통해 청도읍을 내왕했다는 것이다. 재 넘을 사람이 거의 없어진 지금도 경운기 길은 유지되고 있으며, 전기선로도 거길 통과하고 있었다.

작은고개와 큰고개 사이의 저 646m봉은 부야리 주봉인가 여기기 십상일 정도로 뚜렷하다. 마을 쪽으로 유독 튀어나왔을 뿐 아니라 고깔 모양으로 엄청 돌출해 보인다. 가마실은 물론이고 인접 제비실서도 마찬가지다. 그 정점을 제비실서는 ‘종지만댕이’라 지칭했다. ‘종지봉’이라 정리하면 될 것 같다. 거기서 내려서는 산줄기에 ‘자라등’ 등등의 산등이 있다고 했다.

‘큰고개’(565m)는 이 종지봉과 다음의 679m봉 사이에 좁고 깊게 파인 잘록이다. 청도읍 우회도로서 봐 정면 산줄기 중 가장 널찍하게 파여 보이는 곳이 큰고개이고, 그 왼편 봉우리는 종지봉이다. 679m봉은 큰고개서 15분 고생해야 오른다. 등성이가 매우 넓고 펑퍼짐한 이걸 사고개마을서는 ‘함박등’이라 불렀다. 시루봉이 그 마을 뒷산이라면 이건 서산인 형세다.

유천지맥 최고봉인 729m봉은 함박등서 불과 10분이면 닿는다. 그 정상은 크게 넓지 않으나 헬기장 하나 터는 될 듯하다. 바닥 밑이 암괴여서 소나무만 몇 그루 섰을 뿐 훤히 틔었다. 200도 가까이 두루 조망되니 시루봉보다 낫다.

거기서 남동쪽으로는 매전면 지전리 지소(紙所)마을까지 내려 뻗는 ‘지소능선’이 출발한다. 북편 용당골과 남쪽 송원리(松元里) 계곡을 가르는 능선이다. 이 산줄기의 가세로 729m봉 주변은 북서쪽 가마실, 북동쪽 사고개, 남쪽 송원리 세 권역으로 나뉜다.

어렵게 찾아낸 729m봉의 이름은 ‘족둘바위’였다. 그 남쪽 ‘윗건태’마을 출신 어르신들이 특히 명백히 그 이름으로 지칭했다. 북편 쇠실 및 가마실 마을이나 서편 제비실마을에서도 여든 넘은 어르신들은 같은 이름을 잘 기억했다. 729m봉 정상부 바닥의 암괴가 족두리처럼 둥그렇게 생겼다는 것이다. ‘족두리산’이라 불러두면 될 듯싶었다.

그런데도 729m봉 정상에는 누군가가 ‘대남바위산’이라고 알리는 표지를 붙여 놨다. 부산의 어느 신문이 등산코스를 안내하며 퍼뜨린 이름이라고 했다. 유천지맥 산권 첫 봉우리인 ‘장돌봉’을 ‘중산봉’이라고 소문낸 주체도 그것이었다. 우리 전래 지명이 등산객들 탓에 또 다른 위험에 직면했음을 일깨우는 사례다.

‘대남바위’에 유사한 이름을 가진 건 유천지맥이 ‘족두리산’을 지나 하강하다 잠깐 모아 쌓는 637m 암봉(岩峰)이다. 제비실마을에 매우 중요한 지형이어서 할머니들까지 그 바위를 잘 알았다. 옛날 바깥어른들이 ‘무지’(기우제)를 지낼 때 안어른들은 거기 올라 ‘양밥’(비방)을 했다고 했다. 이 암봉도 윗건태 출신 어르신들은 ‘족둘바위’라 했다. 더 동그랗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729m봉은 ‘윗족둘바위’, 이건 ‘아랫족둘바위’로 구분했다.

반면 제비실마을서는 637m봉을 ‘대우나무바위’라 불렀다. 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명칭에는 자신없어했다. 스스로도 ‘대우나무’라는 말이 수상하게 느껴져서인 듯했다. 그런 애매함을 타고 인근 마을서는 ‘남쪽에 있는 큰 바위’로 풀이해 자의적으로 ‘대남바위’라 바꿔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발음을 거슬러 추정할 때 그 본딧말은 ‘대운암바위’ 비슷한 무엇이 아닐까 생각됐다. 그 암괴가 그런 이름으로 불렸거나 그런 이름을 가진 암자가 그 아래 있었다면 가능할 일이다. 거기서 ‘대우나무바위’로 바뀌는 것은 어렵잖을 터이다.

제비실마을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다만 그 본딧말이 ‘대호암(大虎岩)바위’일 것으로 보는 것만 차이였다. 앉아있는 큰 호랑이 형상일 뿐 아니라 그 아래에 ‘범굴’도 있어 예부터 그렇게 봐 왔다고 했다. 그러다가 ‘대혼암바위’ ‘대혼아무바위’ ‘대호나무바위’ ‘대우나무바위’로 변전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옛 윗건태마을 자리 서편에 있는 또 다른 ‘큰고개’(건티·건태)서 보면 ‘대호암’은 족두리산서 내려서는 경사면에 매어놓은 배 같다.

 

유천지맥 동부 유천지맥서 큰 지릉들이 발달하는 것은 그 동부 매전면 쪽이다. '효양산'으로 향하는 '효양산능선' '비룡산'으로 가는 '비룡산능선', 용당산을 맺는 '용당산능선', 지전리(紙田里) 지소(紙所)마을서 끝나는 '지소능선' 등이 대표적이다. 효양산능선-비룡산능선 사이엔 '비룡골'(중산골), 비룡산능선-용당산능선 사이엔 '대곡지'(골), 용당산능선-지소능선 사이엔 '용당골', 지소능선-본맥 사이엔 '송원리 계곡'이 형성돼 있다.

효양산능선은 유천지맥 첫 봉우리라 했던 '장돌봉'에서 분기한다. 그리곤 온막리 자미산(250m)까지 7.5㎞를 이어가며 서편 용산리 공간과 북편 및 동편의 덕산리-관하리(원정자마을)-하평리(박실·월촌마을)-동산리(새터·구동창마을)-북지리-호화리(호방마을) 공간을 가른다. 7개 마을이 저 자락에 깃든 것이다.

이 흐름에서 장돌봉 다음으로 주목할 지형은 거기서 곧바로 내려서는 480m재다. 남쪽 용산리 중산(中山)마을과 북편 덕산리 '춘바골'을 이어온 오래된 관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마을 사이의 옛길 노선은 이제 달라졌다. 남쪽 '안중산' 마을 자리에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길이 효양산능선 위로 끌어올려진 후 '바깥중산' 마을에 바로 닿도록 옮겨진 것이다.

480m재에서 다시 솟는 518m봉은, 그렇게 난 새 도로를 따라 걸을 경우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지형이다. 새 도로가 이 봉우리를 아예 비켜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라보면 그 윗부분이 상당히 펀펀해 작은 봉우리가 아님이 드러나고, 거기서 북으로 의미 있는 3차 지릉이 갈라져 나가기도 한다. 끝에 관하리 '원정자(院亭子)마을'이 자리한 지릉이 그것이다.

원정자마을은 한때 주변 6개(현재 기준) 행정 리(里)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그 마을들을 외종도면(1720년) 혹은 동상면(1896년)으로 묶다가 1906년 '종도면'(終道面)으로 개칭할 때 면소재지가 됐다는 것이다. 그럴 때 마을엔 시장이 서고 파출소도 개설됐다고 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원정자마을은 저 3차 지릉에 의해 남쪽 '박곡'과 구분된다. 518m봉~510m봉~528m봉~535m봉으로 이어지는 효양산능선 낮은 구간 전부를 뒷능선으로 삼는 매우 넓고 깊은 골이 박곡이다. 입구에 하평리 '박실'마을이 자리 잡았고 골 안은 감밭 천지다.

박실 남쪽은 하평리 월촌마을 공간이다. 효양산능선이 다시 586m봉으로 상승한 뒤 632m봉-625m봉으로 치솟는 구간이다. 하지만 쌍봉 같은 이 능선 최고의 저 봉우리들에는 이름이 없었다. 간혹 '솔왕산' '바라봉' 등의 명칭이 들리기도 하나 그건 더 아래 낮은 부분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라 했다. 측량 삼각점을 둘 만큼 조망 좋은 지점들이 저런 이름을 얻었다는 얘기였다.

월촌마을서 그보다 주목할 건 625m봉 지릉 끝 마을 등허리에 뿌리내린 '하평리 은행나무'일 듯싶다. 500살 넘은 거대 노목인데도 시든 가지 없이 창창하며, 아직도 성장을 계속해 허리춤이 갈수록 굵어지고 열매 또한 점점 더 많이 달린다고 했다. 이웃해 사는 어르신(86)은, 30㎝가량 되는 석순(石筍) 같은 목순(木筍)이 가지들 아래로 축 늘어져 자라는 것 또한 특이하다고 했다.

효양산능선은 625m봉을 지난 뒤 489m재로 급락하며, 이어 555m봉으로 오르고 562m봉으로 높아졌다가 495m재로 다시 가라앉는다. 555m봉~562m봉 사이 200여m 짧은 구간의 동편 '안골'에는 '새터'(동산리) 마을, 495m재 동편 '찬샘골' 에는 '구동창' 마을(동산리)이 자리 잡았다. 489m재는 서편 중산이골 '도선사' 쪽으로 통하는 길목이고, 495m재는 동편 구동창마을과 서편 '바깥중산' 마을을 잇는 오래된 길목이라 했다. 두 재 모두에서 양쪽으로 이어지는 길의 흔적은 지금도 뚜렷했다.

495m재를 뜀틀삼아 마지막 도약하는 산덩이는 매전면 소재지 마을(동산리) 서편 봉우리다. 암괴들로 특출하게 치장하고 가파르게 솟아 동편의 토함산(통암산) 암봉과 호응하듯 일대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저 산덩이를 국가기본도는 '호랑산'이라 표기한 반면, 일대서는 대개 '효양산'이라 불렀다. 월촌서도 그러고 구동창서도 그랬다. 북지리·용산리도 다르지 않았다.

효양산능선은 효양산(580m)을 지난 뒤엔 폭락해 위세를 상실한다. 그런 모습으로 용산리 마을 안을 거쳐 둥그스름한 마지막 능선을 형성하면서 동창천 가로 내려앉는다. 앞서 본 '자미산'이 마지막 봉우리고, 그 남쪽 자락에 호화리 '호방' 마을이 자리했다.

이 효양산능선에 맞장구치면서 일대 지형을 결정하는 능선은 시루봉서 남동으로 내려서는 용당산능선이다. 출발점(679m)서 단번에 230m가량 급락해 445m재로 떨어졌다가 596m봉(용당산)으로 오른 후 2.5㎞에 걸쳐 서서히 하강해 동창천에 이른다. 그 끝 지점 온막리서 출발해 오르는 등산로가 발달해 있다.

효양산능선-용당산능선이 형성하는 큰 계곡은 매전면 용산리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골은 상부에서 복판으로 튀어나오는 '비룡산능선'에 의해 다시 둘로 갈린다. 유천지맥의 625m봉서 본맥과 예각을 이루며 북으로 출발하는 능선이 그것이다. 이 능선은 곧 580m재로 떨어졌다가 100여m 솟아 비룡산(684m)에 닿는다. 이후 680m봉을 지난 뒤 또 590m재로 숙였다가 마지막 624m봉-636m봉으로 솟는다. 전망이 별로 없는 이 정점 부분을 지난 뒤엔 점차 낮아지며, 그 끝 지점인 '불령사'(佛靈寺) 서편에 산줄기 등산로 들머리가 있는 것으로 소개돼 있다.

저렇게 해서 형성된 계곡은 하류로부터 거스르며 살피는 게 일목요연하다. 그 아래 용산리의 '사갈' 본마을 끝 지점서 북쪽을 향해 계곡을 오르기 시작할 때 왼편에 솟은 건 용당산이며 오른편 건 효양산이다. 그 즈음 왼편으로 나타나는 큰 시멘트다리를 그냥 지나쳐 직진하면 비룡골이고 얼마 후엔 불령사다. “비룡골 호랑산 기암절벽 아래에 서기 645년 원효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 한다. 절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탑은 '전국 유일하게 문양이 새겨진 흙벽돌(전)로 쌓은 전탑(塼塔)'이라 했다.

불령사 상류에 펼쳐지는 골은 '중산이골'이며, 거기에선 해발 380여m 높이의 '바깥중산'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한때 거의 비워지다시피 했었지만 근래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총 14호 규모로 되살아났다는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은 '도선사'(道瑄寺) 지점서 끝난다. 그 위에도 옛날 10여 가구 되는 '안중산'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골프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골프장은 비룡산 지릉들을 갉아내 터를 더 넓힌 모양새다.

저렇게 불령사를 거쳐 오르는 대신 아까 지나친 시멘트다리를 건너 좌회전해 들어서면 비룡산능선에 의해 둘로 나뉜 계곡 중 아랫부분인 '대곡지' 골짜기다. 그 속으로 이어가는 경운기길은 얼마 후 지류인 '소곡지' 골짜기로 들어섰다가 끝내 용당산능선 몸체 위의 445m재에 올라선다.

기러기 모양 등등의 솟대들로 예쁘게 치장된 445m재는 큰 당나무가 있어 예부터 '당목'이라 불려왔다고 했다. 거기서 좌회전해 능선을 오르면 20분 이내에 용당산 정상에 닿고, 우회전하면 시루봉으로 오른다. 반면 재를 넘어 직진하면 곧바로 용당골로 들어서면서 해발 440여m의 사고개마을에 닿는다. 당목이 용당골 및 '사고개마을'(용산리) 관문인 것이다.

사고개마을은 용당산-시루봉-종지봉-함박등-족두리산에 의해 둘러싸인 용당골 최상부다. 전기는 '큰고개'를 통해 청도읍에서 끌어오고 전화는 당목을 통해 매전면서 이어왔으나 자동차가 온전히 다닐 도로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할 고립산촌이다. 한때 10가구 넘는 마을이었으나 옛집은 비고 지금은 달랑 2가구다.

하지만 옛날 도보시대에 사고개마을은 행인이 끊이지 않던 교통요충지였다고 했다. 매전면의 예전리·용산리·온막리 일대 사람들이 청도읍으로 넘어 다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옛날엔 산지 특유의 누에치기를 통해 살림도 괜찮게 이뤘다고 했다. 깊은 산촌들이 누에치기를 생업으로 삼았던 예는 중산마을이나 학일산 밑 안버구 마을 등에서도 공통되게 살펴지는 일이다.

마을 이름은 1918년 첫 지형도에서부터 '沙峴洞'(사현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마을 출신 한 어르신(대구)은 골이 네 개라고 해서 '사곡'(四谷)이라 했던 게 어원일 것이라고 관측했다. 사고개마을 및 용당골의 남쪽 담장 격 산줄기는 족두리산서 내려서는 지소(紙所)능선이다. 그 너머엔 송원리가 자리했다.

 

유천지맥 남부 용각산서 족두리산(729m)까지의 유천지맥 길이는 9㎞다. 겨우 전체의 40% 정도 달린 셈이다. 그러나 지맥은 그쯤서 일찌감치 권역을 바꾼다. ‘남부’ 구간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남부 산권 중심은 매전면 송원리(松元里)다. 최고봉 족두리산은 이 마을 북쪽 꼭짓점이다. 그 이후 지맥 본맥은 마을 서편 담장, 족두리산서 갈라져가는 ‘지소능선’은 동편 담장이다. 그리고 지맥 마지막 피날레인 ‘오례산성’ 최고 626m봉은 마을 남산이다.

  유천지맥은 족두리산을 떠나기 전에 남동쪽으로 먼저 ‘지소능선’을 갈라 보낸다. 매전면 지전리 지소(紙所)마을까지 내려선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길지 않고 흐름도 완만해서, 3㎞쯤 떨어진 마지막 546m봉까지 70분 정도면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출발 후 8분쯤 될 지점서는 길 찾기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한 묘지를 거쳐 도달하는 686m 구릉이 위험지점이다. 거기서만 방향을 잘 잡으면 4분쯤 후엔 매우 평평한 곳에 도달된다. 밭으로 개간하면 수십 마지기는 족히 나올 듯싶고, 서편으로 경운기 길도 나 있다. 그걸 20여분 따라 걸으면, 조금 후 살필 ‘큰고개’ 인접 아스팔트 도로에 연결된다.

  저 평탄지점서 1분가량 내려서면 첫 잘록이인 571m재다. 용당골 길목이라 해서 ‘용당골재’로 불려 왔다고 했다. 거기서 올라 도달하는 644m봉은 ‘넙덕등’이라 했다. 상부가 평원 같은 등성이다. 다시 내려서는 595m재의 경우 송원리서는 ‘솔안길’이라 했고, 예전리 용전마을에선 마을 뒤에 있다고 해서 ‘뒷고개’라 불렀다. 동창천변서 청도읍을 내왕하는 관문이었다는 얘기다.

  솔안길 잘록이를 거쳐 올라서면 서쪽 지릉에 ‘누룩덤’이 있고 동편엔 습지가 있다는 628m봉이다. 이걸 용전서는 ‘무구덤’이라 한 반면 송원서는 ‘솔골만댕이’라 했다. 무구덤을 지나 닿는 마지막 봉우리인 546m봉을 두고도 두 마을 사이에 호칭이 달랐다. 송원리서는 ‘만사덤’, 용전서는 ‘장군덤’이라고 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용전서 무구덤이라 한 것 외에 송원서 그렇게 부르는 봉우리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넙덕등서 서쪽으로 뻗는 지릉 첫 봉우리인 631m봉이 그것이다. 두 무구덤 사이 골은 ‘무구덤골’이었다. 631m 무구덤 다음의 602m봉은 ‘솔안(등)’, 그 마지막 581m봉은 ‘부엉덤’으로 불리고 있었다.

  유천지맥 본맥은 저 지소능선을 갈라 보낸 뒤 서쪽으로 출발해 10분 이내에 아래족둘바위(637m·대호암바위)에 닿는다. 막힐 것 없이 탁 트인 통바위 큰 봉우리다.

  그 뒤 지맥은 유명한 ‘큰고개’(416m)로 몸을 낮춘다. 송원리 일대 매전면 권역과 청도읍을 잇는 수백 년 된 잿길이다. 그러다 그 남쪽에 ‘양지넘’이란 잿길이 개척되면서 기능의 상당 부분을 물려줬던 고개라 했다. 하지만 큰고개의 중요성은 앞으로 다시 커질 듯하다. 고개 양편의 송원리~원정리 사이에 자동차도로가 뚫리고 있기 때문이다. 송원리 쪽엔 진작 길이 났고 원정리 구간 3.6 ㎞도 최근 착공돼 2013년 봄이면 완전 개통될 예정이라 했다.

  큰고개는 옛 기록들에 ‘巾峙’(건치) ‘楗嶺’(건령)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건태’라는 송원리 자연마을 이름도 거기서 유래했을 터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그 고개를 오직 ‘큰고개’라고만 불렀다. 명칭에 쓰인 한자들이 ‘큰티’(큰고개)의 음 표기를 위해 동원된 것에 불과함을 증언하는 자료일 것이다.

  유천지맥은 큰고개서 100여m 솟아 511m봉에 오른 뒤 532m봉에 도달한다. 청도군 쓰레기 매립장 북편 봉우리다. 거기서는 서편으로 긴 지릉이 갈라져 나가 청도읍 원정리와 그 남편 구미리(九尾里)를 구분 짓는다.

  532m봉 혹은 매립장 지점과 오례산성 사이 3.5㎞ 구간 지맥은 532m봉~512m재~594m봉~443m재~594m봉~473m재~산성 순으로 연결돼 있다. 양쪽으로 이어진 빨랫줄 중간에 2개의 594m봉이 솟아 바지랑대 역할을 하는 양상이라 할까.

  매립장 입구서 내려서는 512m재는 ‘당고개’라 했다. 찻길도 연결돼 있다. 하지만 당고개서 다음의 594m봉 오르는 길은 없다. 산길은 594m봉 서편 옆구리를 감아 돌아 그 다음의 443m재로 바로 이어 가버린다. 생잡이로 직진해 올라야 하는 594m봉은 워낙 펀펀해 어디가 정점인지 금방 집어내기조차 어렵다. 이런 594m봉을 서편 박월마을(월곡2리)에서는 ‘문바위양달’이라 불렀다. 비탈에 ‘문바위’ 등등의 하얀 암괴와 층덤들이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문바위봉’ 정도로 불러두면 무방하리라 싶다.

  문바위봉은 올라서기 힘들지만 내려서기는 더 어렵다. 다음의 443m재를 향해 이어가는 맥이 안 보여서다. 꼭짓점서 평평히 이어지는 능선이 없는 건 아니나, 그걸 좋아라 따라 걷다간 고생만 한다. 송원리 골로 하강하는 매립장 남릉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방향을 잡아 내려선 443m재는 매우 펀펀했다. 옛날 나물 뜯으러 다니던 아주머니들이 솔방울로 야구 놀이를 하던 곳이라는 얘기가 실감났다. 이 재를 일대 마을들에서는 공히 ‘양지넘’이라 불렀다. ‘큰고개’ 대신 부상했다는 그 길목이다. 송원리 쪽으로 등산로가 있는 듯 시그널들이 붙어있었다.

  양지넘서 두 번째 594m봉 오르는 구간은 간벌이 잘 돼 있고 등성이도 널찍해 걷기에 시원스럽다. 오르내림도 완만하다. 이 봉우리를 서편 금호마을 어르신은 ‘면주름’이라 지칭했다.

  거기서 내려서는 473m재는 지나온 산덩이와 남쪽의 오례산성 산덩이를 완전히 갈라놓는 듯한 잘록이다. 그 양쪽 마을들 이름을 따 ‘사기점(사촌)고개’ 혹은 ‘건태고개’라 부르고 있었다.

  473m재에서 산성은 13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연결점 높이가 610m 미만으로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연결점에 도달해서 동쪽(왼편)으로 걸으면 얼마 후 일대 최고점인 626m봉에 닿는다. 그런 다음 남쪽으로 내려서면 산성을 둘러 싼 두 개의 산줄기 중 동편 것으로 이어진다. 동창천변 국도에서 볼 때 바위들로 하얗게 장식된 그곳이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길목은 키가 2m쯤 되는 풀숲에 완전히 묻혔다. 바로 옆도 분간 안 된다. 묘지들이나 간혹 빠끔하게 틔었을 뿐이다.

  유천지맥 남부권 중심마을이라 했던 송원리 경계는 여기까지다. 그 넓은 권역에 ‘윗건태’ ‘아랫건태’ 두 마을이 아래·위로 나뉘어 분포했었다. 윗건태는 매전면 소속이면서도 청도읍 생활권이었다고 했다. 청도읍 시가지 입구 흑석마을(원정2리)과 불과 10리 길이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읍내 중학교 등으로 매일 통학할 정도였다. 그럴 때 넘어 다니던 재가 ‘큰고개’였다.

  하지만 지금 윗건태마을은 사라지고 없다. 거기 닥친 첫 위기는 6·25 때 빨치산 근거지를 없앤다며 마을을 불태운 것이었다. 열댓 집 되던 주민들은 청도읍 흑석마을과 화양읍 눌미리 등으로 흩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 일부 주민들이 다시 돌아가 마을을 이뤘으나 그 이후엔 도시화라는 쓰나미가 닥쳤다. 마지막 주민이 그곳 ‘접산골’을 떠난 건 1980년쯤이었다고 했다.

  ‘아랫건태’라 불리는 지금의 송원리 본마을 주력은 감농사인 듯 보인다. 하나 그곳 어르신은 감농사 경우 근래 시작한 것일 뿐이고, 1950년대까지만 해도 땔나무를 해서 큰고개·양지넘 너머 청도장에 내다 팔아 살았다고 했다. 그러던 아랫건태는 도시화라는 세파를 견디면서 아주 오래 전 우리네 산촌 모습을 지금도 잘 유지하고 있다. 이런 마을이야말로 애써 보전해야지 않을까 싶다.

  유천지맥 본맥은 산성 연결점에서 서편으로 이어져 내려간다. 이후 줄곧 내리막이고 도달하는 최저점은 451m재다. 그 재에는 서편 계곡마을(거연리)서 임도가 올라 와 있다. 산성 안으로까지 경운기 길이 이어졌다는 뜻이다. 산성권역은 그 잘록이서 올라서는 518m봉에서 종료된다.

  그곳 ‘오례산성’(烏禮山城)은 이서국 때부터 요충지였으리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그 패망의 역사가 고스란히 쌓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서국 군사들이 떼로 목숨을 잃었다는 마전암(馬轉岩)이 바로 앞 동창천 건너에 있기도 하다.

  신라 또한 청도 땅에 설치한 3개 행정구역 관청 중 하나인 ‘오도산성’(烏刀山城)을 이 자리에 뒀다. 그럴 시기 산성은 일부 외벽을 흙으로 보강한 토성이었다고 했다. 지금 많이 남아 있는 성벽용 돌덩이들은 임진왜란 직전 전국적으로 시행된 축성공사 흔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성은 왜군에 의해 간단히 점령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 산을 ‘오리산’이라 부르는 것에 착안해 그 꼬리에 해당하는 유천 쪽에서 치고 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근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도 일대를 ‘오리산’이라 지칭한다. 1918년 일제가 만든 최초의 등고선 지형도는 ‘오리 부’(鳧)자를 써 ‘부산성’(鳧山城)이라 번역 표기해 놓기까지 했다. 성안에는 30여 년 전까지 2가구가 살았고, 다랑논이 상당면적 경작됐었다고 했다. 근년엔 골프장 건설이 추진된 적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오례산성 혹은 오리산성 성안 권역은 저렇게 마감되지만, 유천지맥은 518m봉을 지나고도 계속 이어간다. 군데군데 쓰레기만 숱할 뿐 길이 보이지 않아 답사가 불가능한 봉우리들이다. 지맥은 그 후 마지막 501m봉으로 솟는다. 남사면에 ‘대운암’(大雲庵)이 자리 잡은 그 봉우리다. 그 남서쪽 유호2리서는 저 절을 ‘임금절’이라 불러왔고, 마을이 임금이 살던 터라는 얘기도 있다고 했다. ‘임금절’서는 유천지맥 종점 ‘유천’이 잘 내려다보인다.

  유천(楡川)지구 분위기는 상당히 독특하다. 여러 기관과 가게들을 갖춰 면 소재지급 풍모를 보이는 게 첫째다. 읍 단위에나 있을법한 극장 건물까지 있다. 1929년에 초등학교가 생기고 100여 년 전 우체국이 문 열었을 정도로 일찍 성장한 소도시라 했다. 일제강점기에 벌써 전기가 공급됐으며, 장사하는 일본인이 많이 식민(植民)해 지금까지 왜식건물이 4채나 남아 있다고도 했다.

  거기다 유천은 청도천·동창천 두 물길 합류점이다. 두 물길 사이로 튀어나온 이런 지형은 흔히 ‘갑지’(岬地)라 불린다. 거의가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전망이 트인 명당이다. 거기 절벽이 솟았다면 옛사람이 애써 정자를 지었을 터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문의 이러저러한 특성이 유천으로 하여금 이호우(1912~1970) 이영도(1916~1976) 남매 시인을 낳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제 시장은 문을 닫고 영화관은 폐허로 남았다. 한때 870명에 달했다는 유천초교 아동은 겨우 10명으로 줄었다. 그곳 거리가 1960년대 풍경의 영화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이유다. 이게 유천의 두 번째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