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村卽事(강촌즉사)>
釣罷歸來不繫船(조파귀래불계선), 낚시를 끝내고 돌아와서는 배를 매지 않고,
江村月落正堪眠(강촌월락정감면). 강촌에 달이 지려할 때 막 잠이 들고.
縱然一夜風吹去(종연일야풍취거), 저녁 내내 바람이 분다해도,
只在蘆花淺水邊(지재노화천수변). 배는 갈대꽃 핀 얕은 물가에 있을 텐데.
이 시를 읽으면 고인이 자연에 근본을 두고, 자연과 하나로 융합하여, 욕심이 없고 추구하는 것도 없어, 원시적인 자연상태의 한가로움을 느끼게 한다. 낚시꾼이 낚시대를 손질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배도 매어둘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멀리가봐야 바람에 밀려 아침이면 갈대가 무성한 물가에 쳐박혀있을 테니... 그런 태평스런 그가 새벽녘까지 잠못자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분명 고기잡는 일로 고민하지는 않은 것 같고, 그는 밤새 큰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못내 보내기 싫은 친구가 보고싶어 잠을 못이룬 것일까? 아니면 오늘 놓친 물고기가 못내 아쉬워서 잠을 못이룬 것일까? 오늘 살짝 그 배에 올라 숨어, 내일이면 그와 함께 낚시를 한번 해보고 싶다. 갈대꽃핀 가을, 그가 읊는 시를 들으며 한없이 올리는 찌를 보고 싶다.
그는 ‘大曆十才子대력십자재)’에 들어가는데, ≪唐才子傳(당재자전)≫卷4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기이한 재주를 가졌고(磊落有奇才)’, ‘성품이 곧아 권귀자에게 아첨하지 않아(性耿介, 不干權要)’ ‘벼슬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집안이 가난하였다(宦途坎坷, 家境淸寒)’고 하였다.
´懷才不遇(회재불우)’라는 말이 있다. 재능을 가진 자가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전의 글들을 보다보면 그들이 때를 만났다고 여기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거의 매번 이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때를 만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기이한 재주를 가진 자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세상을 한탄하는 깊이도 더하는 법인데, 성품이 올곧아 권귀자에게 아첨까지 하지 못하는 성격이니, 그의 인생살이가 얼마나 고달픈 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그들은 왜 권귀자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고 어려운 길을 택할까? 아마 그릇의 차이라고 보여진다. 조그만 소주잔같은 그릇의 사내가 항상 소줏잔만이 표준이라 여기고 뚝배기같은 그릇의 사내에게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 그래서 이 소줏잔에 맞춰라고 한다면, 아무리 뚝배기같은 그릇으로 소줏잔을 이해할려고 한다해도 며칠을 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려면 도연명이 독우에게 허리굽히기 싫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상관이랍시고 하는 꼬락서니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잣대에 맞추어 아부해야 하고, 그들의 구속에 영원히 갇히는 새장속의 길들어진 새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재를 마음껏 발휘할 그런 때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우울한 삶을 살 수밖에...
사공서는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의 <喜外弟盧綸見宿(희외제로륜견숙)>,<雲陽館與韓紳宿別(운양관여한신숙별)>,<賊平後送人北歸(적평후송인북귀)> 등 송별시를 보면, 구구절절 이별의 정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의탁할 곳이 없어서일까? 자신을 조금만 이해하는 사람만 만나면 지나치게 자신의 정을 쏟고, 밤을 새워 술잔을 기울인다.
그의 송별시도 아마 그러한 연유에서 나온 것일까? 하여튼 사람에 대한 정이 각별하다. 그의 <觀妓(관기)>를 보면, 기녀가 근심으로 인해 흘린 눈물자국을 시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의 괴로운 심정을 시인은 아마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했으리라.
시인의 심정은 어디에 의탁할 곳이 없었다. 사람은 한번 만나면 언제나 헤어져야 하는 법. 이별의 아픔과 타향을 떠도는 아픔을 시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배에 몸을 싣고 바람부는대로 떠다니며, 이 세상으로 다신 돌아오지 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黃子陂(황자피)>를 보면,
岸芳春色曉(안방춘색효), 기슭의 향기 봄색이 완연하고,
水影夕陽微(수영석양미). 물 위에 비친 모습 석양에 희미하다.
寂寂深煙裏(적적심연리), 적적하니 깊은 안개 속에,
漁舟夜不歸(어주야불귀). 어부의 배는 저녁에도 돌아오지 않고.
라고 했는데, 육지의 봄색은 물위에 떠 있는 어부의 배와는 이미 다르다. 그래서 배를 대고 싶어도 댈 수가 없고, 물 위의 상황은 이미 스러지는 석양처럼 적적하기 이를데 없지만, 시인은 그 물위를 택했다. 어딘가 그의 시는 자연의 규율에 어긋난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 아닌가?
그런데 시인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올 줄 모르고, 앞의 <江村卽事(강촌즉사)>에서처럼 배를 매어놓지 않고, 새벽녘까지 잠들지 않는 모습을 드러낸다. 필자는 <江村卽事>는 호수의 한가로운 모습보다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픈 시인의 방기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말한 저녁이 되어도 시인은 자신이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달.호수.갈대.붕어.낚시.시가 있는 물위의 배에서 바람부는대로, 물이 흐르는대로 그렇게 자신을 내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세속의 구속, 동정, 이별, 고향에 대한 향수 등을 못견뎌서, 그러한 모습을 차마 보여주기 싫어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도 없는 자유로운 배안에서 미치도록 세상을 원망하며 술마시고, 미치도록 보고싶은 이를 불러보고, 미치도록 시린 달빛에 시를 읊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釣罷歸來不繫船(조파귀래불계선), 낚시를 끝내고 돌아와서는 배를 매지 않고,
江村月落正堪眠(강촌월락정감면). 강촌에 달이 지려할 때 막 잠이 들고.
縱然一夜風吹去(종연일야풍취거), 저녁 내내 바람이 분다해도,
只在蘆花淺水邊(지재노화천수변). 배는 갈대꽃 핀 얕은 물가에 있을 텐데.
분명 고기잡는 일로 고민하지는 않은 것 같고, 그는 밤새 큰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못내 보내기 싫은 친구가 보고싶어 잠을 못이룬 것일까? 아니면 오늘 놓친 물고기가 못내 아쉬워서 잠을 못이룬 것일까? 오늘 살짝 그 배에 올라 숨어, 내일이면 그와 함께 낚시를 한번 해보고 싶다. 갈대꽃핀 가을, 그가 읊는 시를 들으며 한없이 올리는 찌를 보고 싶다.
그는 ‘大曆十才子대력십자재)’에 들어가는데, ≪唐才子傳(당재자전)≫卷4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고 기이한 재주를 가졌고(磊落有奇才)’, ‘성품이 곧아 권귀자에게 아첨하지 않아(性耿介, 不干權要)’ ‘벼슬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집안이 가난하였다(宦途坎坷, 家境淸寒)’고 하였다.
´懷才不遇(회재불우)’라는 말이 있다. 재능을 가진 자가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전의 글들을 보다보면 그들이 때를 만났다고 여기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거의 매번 이 말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때를 만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기이한 재주를 가진 자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세상을 한탄하는 깊이도 더하는 법인데, 성품이 올곧아 권귀자에게 아첨까지 하지 못하는 성격이니, 그의 인생살이가 얼마나 고달픈 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그들은 왜 권귀자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고 어려운 길을 택할까? 아마 그릇의 차이라고 보여진다. 조그만 소주잔같은 그릇의 사내가 항상 소줏잔만이 표준이라 여기고 뚝배기같은 그릇의 사내에게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고, 그래서 이 소줏잔에 맞춰라고 한다면, 아무리 뚝배기같은 그릇으로 소줏잔을 이해할려고 한다해도 며칠을 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려면 도연명이 독우에게 허리굽히기 싫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상관이랍시고 하는 꼬락서니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잣대에 맞추어 아부해야 하고, 그들의 구속에 영원히 갇히는 새장속의 길들어진 새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재를 마음껏 발휘할 그런 때와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우울한 삶을 살 수밖에...
사공서는 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의 <喜外弟盧綸見宿(희외제로륜견숙)>,<雲陽館與韓紳宿別(운양관여한신숙별)>,<賊平後送人北歸(적평후송인북귀)> 등 송별시를 보면, 구구절절 이별의 정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을 의탁할 곳이 없어서일까? 자신을 조금만 이해하는 사람만 만나면 지나치게 자신의 정을 쏟고, 밤을 새워 술잔을 기울인다.
그의 송별시도 아마 그러한 연유에서 나온 것일까? 하여튼 사람에 대한 정이 각별하다. 그의 <觀妓(관기)>를 보면, 기녀가 근심으로 인해 흘린 눈물자국을 시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의 괴로운 심정을 시인은 아마 충분히 이해하고 동정했으리라.
시인의 심정은 어디에 의탁할 곳이 없었다. 사람은 한번 만나면 언제나 헤어져야 하는 법. 이별의 아픔과 타향을 떠도는 아픔을 시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배에 몸을 싣고 바람부는대로 떠다니며, 이 세상으로 다신 돌아오지 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黃子陂(황자피)>를 보면,
岸芳春色曉(안방춘색효), 기슭의 향기 봄색이 완연하고,
水影夕陽微(수영석양미). 물 위에 비친 모습 석양에 희미하다.
寂寂深煙裏(적적심연리), 적적하니 깊은 안개 속에,
漁舟夜不歸(어주야불귀). 어부의 배는 저녁에도 돌아오지 않고.
라고 했는데, 육지의 봄색은 물위에 떠 있는 어부의 배와는 이미 다르다. 그래서 배를 대고 싶어도 댈 수가 없고, 물 위의 상황은 이미 스러지는 석양처럼 적적하기 이를데 없지만, 시인은 그 물위를 택했다. 어딘가 그의 시는 자연의 규율에 어긋난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고, 해가 지면 잠을 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 아닌가?
그런데 시인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올 줄 모르고, 앞의 <江村卽事(강촌즉사)>에서처럼 배를 매어놓지 않고, 새벽녘까지 잠들지 않는 모습을 드러낸다. 필자는 <江村卽事>는 호수의 한가로운 모습보다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픈 시인의 방기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말한 저녁이 되어도 시인은 자신이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달.호수.갈대.붕어.낚시.시가 있는 물위의 배에서 바람부는대로, 물이 흐르는대로 그렇게 자신을 내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세속의 구속, 동정, 이별, 고향에 대한 향수 등을 못견뎌서, 그러한 모습을 차마 보여주기 싫어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도 없는 자유로운 배안에서 미치도록 세상을 원망하며 술마시고, 미치도록 보고싶은 이를 불러보고, 미치도록 시린 달빛에 시를 읊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누군가가 미치도록 그리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부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0) | 2010.10.09 |
---|---|
雲門에서 華岳까지 (0) | 2010.10.07 |
살맛나는 밥상 (0) | 2010.10.05 |
낚시와 깨달음 ...선자화상(船子和尙) (0) | 2010.10.04 |
이태백은 어떻게 낚시했을까? (0) | 2010.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