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미식가 소동파와 낚시

醉月 2010. 10. 10. 08:10

동파육(東坡肉) 등 구워 먹거나 회로 먹는 모습...불멸의 시어로 남겨

 

중국예술사에서 소동파처럼 다방면에 재능을 지닌 인물이 또 있을까?

시,사(詞),문장,서예,그림,음악 등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은 정치상의 질곡과 낙천적인 그의 성격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주변의 새로운 환경과 사물에 대한 시인의 깊은 관심이 창작의 원천이라고 여겨진다. 나아가 소동파의 작품이 양과 질에서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것은 아마도 당대와는 다른 송대 출판업의 발달과 당 중엽 이후 선종이 도입되어 성행하게 된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소식(蘇軾:1036∼1101)은 자가 자첨(子瞻), 호가 동파거사(東坡居士)다. 미주(眉州) 미산(眉山: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 사람이다. 아버지 순(洵),아우 철(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라 불린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그는 복창현(福昌縣) 주부(主簿),대리평사(大理評事),봉상첨판(鳳翔簽判),전중승(殿中丞) 등을 거쳤는데, 왕안석(王安石)이 주도하는 개혁파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였기에 내침을 당하여 밀주(密州),서주(徐州),호주(湖州)의 지주로 폄적되었다.

또한 신법에 반대하는 글을 써서 옥에 갇혔다가 황주(黃州)와 여주(汝州에서 귀양생활을 했다. 이후 수구파가 득세할 때 잠시 예부상서 겸 한림학사가 되었다가, 왕안석의 신법을 완전히 폐지한 것에 불만을 품고 지방관을 자청하여 항주(杭州),영주(潁州),양주(揚州),정주(定州)로 떠돌았다. 소성(紹聖) 원년에 철종(哲宗)이 친히 정치를 맡아 원우당(元祐黨) 사람을 모두 퇴출할 때, 소식은 처음에 혜주(惠州)로 폄적되었고 뒤에는 첨주(儋州)로 폄적되어, 7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휘종이 즉위하자 겨우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는 정치상의 질곡을 겪었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은 정치적인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주자연의 무상함과 인간의 명리에 대한 허상을 깨닫고,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도록 하여, 그는 주변의 자연환경에 심취하고, 폄적된 지역의 관습이나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인의 천재적인 감성과 재능은 이러한 제재들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펼쳐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정치적인 부침을 수없이 겪었지만 그의 시문은 실의하여 우울한 정조보다는 오히려 거시적이고, 호방한 풍격을 이룬다.

그의 이러한 현실적응과 자연,습속 등의 관찰은 그가 내침을 당한 밀주(密州),서주(徐州),호주(湖州)의 지주시절, 황주(黃州)와 여주(汝州)의 귀양시절, 지방관을 자청한 항주(杭州),영주(潁州),양주(揚州),정주(定州)의 지방관시절, 또 다시 폄적된 혜주(惠州),첨주(儋州)의 지주시절에 빛을 발하여, 역경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전환시킨 그만의 삶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파거사는 황주에 귀양하는 5년동안 동쪽[東] 언덕[坡]에 있는 황무지를 일구어 ´동파(東坡)´라 호를 지은 것이다. 나아가 물고기를 잡는 시(釣魚詩), 물고기를 노래한 시(詠魚詩),생선을 먹는 시(吃魚詩),어촌의 습속과 어구,방생(放魚),물고기의 이름 등과 관련된 수많은 싯구들은 그가 바로 현실에 적응하여 현세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소식의 낚시에 관련된 시들을 보면 당(唐)대 두보가 불행하게도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소식은 이에 비해 여유를 가지고 인생의 이치를 깨닫고, 낚시는 물론이거니와 생선을 먹는 것도 즐기는 상당한 미식가에 속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먼저 조어에 관해서 살펴보자. 그는 항주의 통판시절 부양(富陽),신성(新城)을 순찰하려고 동려(桐廬)에서 배를 타고 칠리뢰(칠리뢰)를 지나면서 쓴 <행향자(杏香子),칠리뢰를 지나며(過七里瀨)>가 있다.

一葉舟輕, 雙槳鴻驚. 水天淸, 影湛波平. 魚翻藻鑒, 鷺點煙汀. 過沙溪急, 霜溪冷, 月溪明.
重重似畵, 曲曲如屛. 算當年, 虛老嚴陵. 君臣一夢, 今古虛名. 但遠山長, 雲山亂, 曉山靑.

◇ ⓒ데일리안
일엽편주는 가볍고, 상앗대 한쌍에 기러기가 놀란다. 물과 하늘은 맑고 그림자가 비치는데 물결은 잠잠하다. 물고기 번듯번듯 노닐며 화려하게 비치고, 해오라기는 안개낀 물가에 점처럼 박혀있다. 배를 타고 지나다보니 모래로 된 시내는 물길이 빠르고, 서리내린 시내는 차갑고, 달이 뜬 시내는 밝다.
거듭 겹쳐있는 것은 그림같고, 구불구불한 것은 병풍같은데, 그때를 생각하면 헛된 엄자릉이라. 君臣이 가지는 각각의 꿈은 고금의 헛된 명성이라. 다만 먼산은 길고, 구름에 가린 산은 어수선하고, 새벽산은 푸르다.


여기서는 낚시를 직접하지 않은 듯 한데, 엄자릉이 낚시하던 칠리뢰를 지나면서 엄자릉의 고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소식은 임금과 신하가 생각하는 이상도 결국 헛된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주변의 경치에 관심이 많고, 학식이 풍부했던 소식은 평소 엄자릉조어대를 직접 보고 싶었고, 그곳에서 낚시도 한번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그가 황주에 유배할 때 지은 불후의 명작 <적벽부(赤壁賦)> 또한 비슷한 연유에서 창작된 것이다. 실제 황주의 적벽과 오(吳)나라 주유(周瑜)가 조조의 백만대군을 격파한 적벽은 다르지만, 달밤에 황주의 적벽에 배를 띄워 놓고보니 적벽대전이 떠올랐고, 결국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된 내용을 적은 것이다.

그는 이전의 고사들을 익히 알았고, 그러한 곳들을 직접 보고 경험해 보고싶은 것이 여행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하여튼 소식이 <복차방어전운(復次放魚前韻)>에서 “어디로 돌아갈까? 팔절탄으로 가야지. 또한 칠리뢰로 돌아가 낚시하고 싶네(逝將歸? 八節灘, 又欲往釣七里瀨.)”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칠리뢰에서 낚시를 했던 것 같다.

다시 <강교(江郊)>를 보자.

江郊葱曨, 雲水蒨絢.(강교총롱, 우수천현) 강이 있는 교외엔 푸르름이 어슴푸레하고, 안개와 물이 어우러져 곱다.
碕岸鬪入, 洄潭輪轉.(기안투입, 회담윤전) 구불구불한 산기슭은 다투어 물속으로 들어가고, 물이 도는 담은 물길이 빙빙 돈다.
先生悅之, 布席閑燕.(선생열지, 포석한연) 선생이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자리를 펴고 한가로운 잔치를 연다.
初日下照, 潛鱗俯見.(초일하조, 잠린부견) 처음 해가 내려 쬐니, 물속에 잠긴 물고기를 굽어 보네.
意釣忘魚, 樂此竿線.(의조망어, 낙지간선) 낚시하려했지만 물고기 잡는 것은 잊고, 드리운 낚시줄만으로도 즐겁네.
優哉悠哉, 玩物之變.(우재유재, 완물지변) 유유자적하구나, 사물을 즐기는 임기응변이.


그의 낙천적인 성격은 여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낚시를 통해 즐거움을 얻으면 될 뿐 굳이 물고기를 걸어올리는 즐거움만을 취하지 않는다. ‘樂此竿線’의 구절을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이 구절만을 통해 본다면 노련한 조사거나 아니면 낚시를 배우는 초짜일 가능성이 있다.

노련한 조사라면 비릿한 물냄새만 맡아도 가슴이 뛰고, 물소리만 들어도 물고기가 사는지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물에 낚싯대만 드리워도 반쯤 소원을 푸는 그들이다. 그런데 초짜의 모습은 관심이 자꾸 다른 곳으로 쏠린다.

주변의 경치.날씨.수초의 생김새.밥집의 반찬 등에 관심을 두며, 심지어 왠놈의 화장실은 그렇게 자주 가는지... 아마 소식의 표현을 보면 일면 노련한 조사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가 연파조도나 육구몽(陸龜蒙),오정한(吳廷翰)과는 달리 낚시에 심취한 많은 조어시를 남기지 않은 것을 볼 때, 낚시에 초짜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의 낙천적인 성격과 어울려 관심이 자꾸 다른 데로 가기에 그는 마지막 구절에서 玩物之變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그에게 낚시는 유유자적하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한적한 산수자연 속에서 세월만 낚으면 될 뿐이었다.

그의 <漁父四首>에서 “어부가 술마실 때, 누구의 집으로 가든 물고기와 게를 요리하라고 이르고. 술은 얼마가 되었든 취할 때 까지 마시는데, 피차 서로간에 돈에 대해선 말하지 않네. 어부가 취할 때, 도롱이를 입은 채로 춤을 추고, 취한 가운데 돌아오는 길을 찾아오네. 가벼운 배에 짧은 노는 가로로 늘어졌는데, 술이 깨고 나니 어디인지 모르네. 어부가 술에 깰 때, 봄강의 정오에, 꿈을 깨니 떨어는 꽃 날리는 버들솜. 술이 깨면 다시 취하고 다시 취했다가 다시 깨고, 인간세상 고금의 일에 대해 한바탕 웃네. 어부가 웃을 때, 가벼운 갈매기 날고, 구름이 짙게 낀 강에는 비바람 이네. 강변에 말탄 사람은 관원인데, 나의 외로운 배에 도움을 받아 남쪽으로 건너네.

(漁父飮, 誰家去, 魚蟹一時分付. 酒無多少醉爲期, 彼此不論錢數. 漁父醉, 蓑衣舞, 醉裏却尋歸路. 輕舟短棹任斜橫, 醒後不知何處. 漁父醒, 春江午, 夢斷落花飛絮. 酒醒還醉醉還醒, 一笑人間今古. 漁父笑, 輕鷗擧, 漠漠一江風雨. 江邊騎馬是官人, 借我孤舟南渡.)”라고 했는데, 어부를 소식 자신이라고 보면, 그의 고기를 잡는 모습이 어떤 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 물고기에 대한 묘사다. 그는 설사 낚시는 좋아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지라 물고기를 묘사한 시 또한 많다. 소식이 43세때 강소성 팽성현에 현령으로 있을 때 지은 <영통락(永通樂),팽성야숙연자루(彭城夜宿燕子樓)>에서 “명월은 서리같고, 시원한 바람은 물 같아 깨끗한 경치는 끝없구나. 구비진 강에는 물고기가 튀고, 둥근 연잎에는 이슬이 내리는데 적막하여 사람이 없는 듯 하구나(明月如霜, 好風如水, 淸景無限. 曲港跳魚, 圓荷㵼露, 寂寞無人見.)”라고 하였고,

그해 초여름에 쓴 <완계사(浣溪沙),서문석담사우도상(徐門石潭謝雨道上)>에서 “내리쪼는 해가 붉어 따뜻해진 가운데 물고기가 보이고, 사막까지 이어진 푸르름은 저녁에는 새까맣게 변하고…(照日深紅暖見魚. 連漠綠暗晩成烏.…)”라고 하였고, 44세때 湖州로 내침을 당했을 때 지은 <호주도중작(湖州道中作)>에서 “날씨가 차가와지고 물이 말라갈 때 물고기가 진흙속에 있네, 쟁기로 밭을 갈 듯 짧은 갈고리로 물속을 휘젓네. 수많은 부들이 헤쳐져서 꺾이고 수초와 행채가 어지러운데, 이렇게 하는 의도가 어찌 미꾸라지 같은 것에 있을까(天寒水落魚在泥, 短鉤畵水如耕犁. 諸蒲披折藻荇亂, 此意豈復遺鰍鯢.)”라고 하였다.

이러한 시에서는 물고기가 자연이나 그 지방의 습속 가운데 한 부분으로 등장한 것에 불과하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물고기를 언급한 것 자체가 시인의 관찰력을 읽을 수가 있다. 물고기의 마음으로 정치적인 시련을 읊은 <魚>를 보자.

湖上移魚子(호상이어자), 호수 위를 움직이는 물고기,
初生人不畏(초생인불외). 처음 태어나서부터 두려움을 몰랐네.
自從識釣餌(자종식조이), 낚시미끼를 알고부터,
欲見更無煙(욕견경무연). 모습을 드러내려 했지만 다신 안개까지 끼지 않네.


이 시는 嘉祐6년(1061), 소식이 벼슬자리에 올라 막 처음 시련을 맞았을 때, 지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은유적인 표현이 압권이다. 그가 정치에 뛰어들어 처음에는 정계의 생리를 제대로 몰랐지만, 정파,권모술수,암계 등 정계의 생리를 알고서 제대로 된 미끼를 물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마음을 먹고나니, 낚시바늘을 드리울 환경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우리의 ‘낚인다’는 표현이 이럴 때 적당할 듯 하다.

세 번째는 어촌의 습속에 대한 관심이다. 원풍(元豐)4년(1081) 소식이 46세 때 황주로 폄적되어, 곧 바로 지은 <초도황주(初到黃州)>라는 시에서, “평생 입이 바빴던 것을 생각하며 스스로 웃고, 늙어지니 사업이 황당하게 변하네. 장강을 둘러싼 성곽에선 생선의 뛰어난 맛을 알고, 좋은 대밭 산까지 이어져 죽순향기를 느끼네. 쫓겨난 객은 원외에 임명해도 꺼리지 않지만, 시인은 水曹의 관리가 된 꼴이네. 다만 조금도 사업에 보탬이 되지 못함을 부끄럽지만, 오히려 관청의 술독을 쏟아내는 낭비만 하네.

(自笑平生爲口忙, 老來事業轉荒唐. 長江繞郭知魚美, 好竹連山覺笋香. 逐客不妨員外置, 詩人例作水曹郞. 只慚無補絲毫事, 尙費官家壓酒囊.)”라고 하여, 곧 어촌의 관리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이 시속에서 벌써 가을농어와 봄철 죽순요리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만자(魚蠻子)>엔 이 지역의 습속이 드러나는데, “강회지역은 물을 밭으로 여기고, 배와 노를 거주하는 방으로 여기고, 물고기와 새우를 양식으로 여기는데 밭을 갈지 않지만 풍요롭다…물을 퍼내어 방어와 잉어를 얻는 것이 길에서 물고기를 줍는 것처럼 쉽다. 부서진 솥에 소금을 넣지 않고 삶고, 눈처럼 흰 고기살에 한묶음의 푸른 채소를 곁들인다.

(江淮水爲田, 舟楫爲室居, 魚蝦以爲粮, 不耕自有餘…劈水取魴鯉, 易如拾諸途. 破釜不着鹽, 雪鱗筆靑蔬.)”고 하여, 강가의 촌락은 물을 육지의 밭과 같이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과, 물고기를 먹는 모습까지 서술하였다. 또한 ≪십이금명(十二琴銘)≫의 <魚粮>을 저술했는데, 어량은 어구(漁具)로, 고기잡을 때 뱃전을 두드리는 장형(長形)의 나무막대기다.

소식은 이것으로 이름을 붙이고, 명(銘)에서 “갈매기, 비둘기와 함께 사물이 되어, 산수의 빛을 발하여, 노니는 물고기를 놀라게 하여 물위로 나와 듣게 하기에 魚粮이라고 한다(與鷗鴿而物化, 發山水之天光, 驚游魚而出聽, 是謂魚粮.)”고 설명하였는데, 어량의 용도와 이것이 내는 소리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주(湖州)에서 지은 그의 시 <劃魚歌>를 보면, 물많고 고기많은 동네에서 고기잡는 특이한 방법이 나온다.

一魚中刃百魚驚(일어중인백어경), 생선 속의 칼 백마리 물고기가 놀라고,
蝦蟹奔忙誤跳擲(하해분망오도척). 새우와 게는 급히 도망하지만 잘못하여 떨어지고.
漁人養魚如養雛(어인양어여양추), 어부가 물고기를 기르는 것이 병아리를 키우는 것과 같아,
揷竿冠笠驚鵜鶘(삽간관립경제호), 낚시대를 물에 넣고 삿갓을 쓰면 사다새가 놀라고,
豈知白挺鬧如雨(개지백정요여우), 비가 오듯 시끄러우면 참고 기다린 것이 헛수고임을 어찌 알까?
攪水覓魚嗟已疏(교수람어차이소). 물을 휘저어 물고기를 찾으면, 아이고! 이미 흩어져버리는데.


오(吳)지방에서는 장대 끝에 길다란 못을 박아 물을 휘저어 물고기를 잡는 것을 획어(劃魚)라고 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소식에게도 신기했을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이토록 물고기가 많았던 모양이다. 시인의 관찰력은 낯선 고장에서 물고기를 잡는 색다른 방법을 놓치지 않았다.

참고로 중국의 남방에서 가마우지를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송대에 절강,강소지역에서 이미 성행했다고 할 수 있는데, 두보의 시에서 ‘집집마다 가마우지를 길러, 매끼마다 황어를 먹네(家家養烏鬼, 頓頓食黃魚.)’(<장난삼아 익살체(俳諧體)를 지어 근심을 없애며․이수 중 일수(戱作俳諧體遣悶二首․其一>)라고 하였다. 남방에서는 가마우지를 烏鬼라고도 하기에, 이것을 가마우지로 해석하면 가마우지의 낚시는 이미 당(唐)대에 민간에서 이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소식은 불교의 규율을 따라 방생한 일에 대해, 그의 <장난삼아 방생에 대해(戱作放魚)>․<다시 방생하기 전에(復次放魚前韻)>․<등급이 낮게 흔적을 숨긴 법사의 방생(次的潛師放魚)>에서 기록하였다.

예를들어 <등급이 낮게 흔적을 숨긴 법사의 방생>에서 “법사의 설법은 헤엄쳐 가는 물가에 임하여, 무수한 천화가 몇 마리 물고기꼬리를 따라 내린다. 淨業에 힘쓰면 서방정토에 씨를 뿌리게 되는 것이니 꿈속의 일을 불러일으키지 말라. 슬퍼구나 물고기처럼 앉아서 입만 벙긋하니, 앎이 크게 부끄러운데 약간 공손하면 예의가 생기는데...(法師說法臨泅水, 無數天花隨廑尾. 勸將淨業種西方, 莫待夢中呼起起. 哀哉若魚竟坐口, 遠愧知幾穆生禮.)”라고 하였는데, 그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물고기와 육고기를 먹는 모습을 볼 때는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도처럼 소식이 양생하는 생활까지는 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네번째는 미식가의 모습이다. 소식은 일찍이 ‘동파육(東坡肉)’으로도 유명한 것처럼 생선에 있어서도 조리하는 법이나 먹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잠시 동파육에 대해 소개하면, 일찍이 항주태수로 있을 때 서호(西湖)가 범람하기에 백성을 위해 서호를 준설하고 제방을 쌓았다. 지금도 항주의 서호엔 백제(白堤: 백거이가 항주태수로 있을 때 쌓은 둑),소제(蘇堤)가 있는데, 제방공사를 할 때 수많은 인부들을 먹이기 위해 소식이 고안한 요리법을 동파육이라고 한다.

소식은 물고기 음식을 매우 좋아했는데, 구워서 먹거나 회로 먹는 모습을 기술하였다. <장난삼아 회유하는 물고기에 대해 짓고(戱作魚回魚>)에서 “분홍색 조기는 곧 뼈가 없어지고, 눈처럼 하얀 복어는 사람에게 약이 되지 않네.(粉紅石首乃無骨, 雪白河豚不藥人.)”라고 하였고, <鰣魚>에서는, “숙주나무,생강,간장을 넣고 은어를 굽고, 하얀 그릇에 2척짜리 고기를 들고 오네. 오히려 복숭아 꽃에 봄 기운이 있고, 이 풍미는 오히려 순채나 농어보다 낫구나.(芽薑紫醋炙銀魚, 雪碗擎來二尺餘, 尙有桃花春氣在, 此中風味勝蒓鱸.)”라고 하였다.

또한 회를 좋아하였는데, 농어는 육질이 단단하고 맛이 담백하기에 농어회를 특히 좋아했다. 그의 <백주와 농어를 가지고 첨사군을 찾아서(携白酒鱸魚過詹史君)>에서 “푸른 색이 나는 둥근 그릇에 홰나무 싹으로 만든 전병, 붉은 점이 박힌 하얀 그릇에 곽초잎사귀처럼 썰은 생선회. 술에 취하여 편안히 자면 좋은 일인데, 이러한 삶엔 세 가지 여유로운 맛이 있다네(靑浮卵碗槐芽餠, 紅點冰盤藿葉魚. 醉飽高眠眞事業, 此生有味在三餘.)”라고 하였고, 사 <오야제(烏夜啼),기원(寄遠)>에서도 “정군은 기억력이 아주 비상하고, 이남은 예전처럼 시를 잘 지었는데, 농어가 있으면 곧바로 회로 뜨는데, 여러 사람들도 그 방법을 알려 주지 않네(小鄭非常强記, 二南依舊能詩, 更有鱸魚堪切膾, 幾輩莫敎知.)”라고 하였다.

또한 전복회를 먹는 모습도 그렸는데, <복어행(鰒魚行)>에서, “요리사가 요리를 잘하여 화려한 자리에 올리면, 연회를 주재한 사람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진열된 요리에 보내는 눈길에 광채가 일고, 육고기․영지․석이버섯요리는 이루 셀 수가 없고, 식초를 살짝 바른 전복회는 과일 속껍질 위에 장식했네, 도시의 귀인들이 이 맛을 진귀하다 하고, 술먹을 때 기름을 약간 넣으면 그 맛을 오래 즐길 수 있다네.(膳夫善治荐華堂, 座令睢俎生輝光. 肉芝石耳不足數, 醋筆魚皮眞倚墻. 中都貴人珍此味, 糟邑油藏能遠致.)”라고 하여, 전복회를 장식한 모습과 참기름에 찍어먹는 사실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소식은 이처럼 많은 시에서 생선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기에, 두보의 오류어(五柳魚)처럼 동파어(東坡魚)가 있다. 이 물고기는 장강의 상류․서강의 상류 등과 사천성 낙산대불 아래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맛있는데, 고기는 살이 통통하고 신선하며 지방이 많아 지방의 유명한 요리의 중요한 재료가 되었다.

또한 절강성 항주시 서호에서 나는 맛난 요리도 東坡魚라고 하는데 그것은 원래 오류어(五柳魚)라 불린다. 동파어의 조리법은 동파육의 조리처럼 “천천히 불을 지피고, 물을 조금 붓고, 불을 땔 때 시간을 넉넉히 해야 그것이 저절로 맛있게 된다.(慢著火, 少著水, 火候足時它自美.)”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보면, 오류어는 두보와도 얽혀있는 물고기인데, 이렇게 된 연유는 아마 두 대시인이 물고기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후세 사람이 요리이름에 이들의 이름을 붙인 듯 하다.

두보와 관련된 것으로 또한 모살치(鯿魚)에 관한 기록이 있다. 소식의 <축항은 무창어를 가리키는데 그 근원을 찾아(縮項指武昌魚探源)>에서 “ 아침 해 강 수면을 비추니, 노는 물고기가 옥병 같구나. 누가 ‘움추린 목을 풀고(解縮項)’라고 해석했나, 먹잇감을 먹고는 삶기니. 두보가 말한 그 때의 의미가 타당한데, 강을 대하니 맹생이 생각나네. 나는 지금 슬픔을 가진 자로, 지칠때까지 눈물을 나는구나.(曉日照江面, 游魚似玉甁. 誰言解縮項, 食餌每遭烹. 杜老當年意, 臨流憶孟生. 吾今又悲子, 轍筋涕縱橫.)”라고 하여, 무창어를 ‘縮頸鯿’이라고 해석한 사람이 바로 두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두 사람 모두 물고기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두보는 눈에 띄는 관직을 가지지 못한데다가 가난으로 찌들린 생활로 인해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한 느낌을 받는다면, 소식은 그래도 관직을 가진데다가 낙천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그의 시는 쾌활하여 물고기 음식을 즐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으로 미식가라는 단어에는 두보보다는 소식이 더 어울릴 듯 하다.